용장사터 삼륜대좌불 동쪽에 남쪽을 향한 바위면에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있다. 항마촉지인을 맺고 연화대위에 앉아있는데 옷 주름이 마치 물결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이것을 번파식이라고 한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각각 두 줄의 음각 선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외광(外光)은 보이지 않는다. 대좌는 무릎 밑에 앙련의 연화문을 길게 새겼다. 법의는 통견이며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삼륜대좌불이 미륵불이므로 법상종에서 미륵불과 함께 모셔지는 부처님은 아미타불이기 때문에 이 마애불은 아미타여래로 추정된다.
이 마애불이 조성된 시기는 통일신라 8세기 경으로 추정해왔지만 1984년 부처님 왼쪽 어깨 곁에 있는 명문이 판독되면서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 추정하기도 한다. 황수영 박사팀에 의해 판독된 명문은 ‘大平 二年八月 □□ 阿(尉)□ 佛成奉爲時’으로 '대평 2년인 고려 현종 13년, 곧 1022년 8월에 부처를 만들어 모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불상을 수리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2007. 11. 14>
첫댓글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은 삼륜대좌불 바로 뒤쪽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로, 통일신라 8세기 석조 조각의 정수를 보여주는 문화재이다.
소라 모양의 나발(螺髮)과 상단의 육계가 또렷하며, 도툼한 뺨과 약간 다문 입술, 살짝 감은 듯한 눈매가 어우러져 신라 석불 특유의 인후하면서도 엄숙한 미소를 보여준다.
양 어깨를 모두 감싼 통견(通肩) 양식을 취하고 있다. 가슴 아래로 잔잔하게 물결치듯 내려오는 촘촘한 계단식 옷주름 선이 바위라는 단단한 재질에도 불구하고 매우 섬세하고 유연하게 조각되었다.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손가락 끝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으며, 왼손은 가부좌를 한 다리 위에 단정하게 놓아두었다.
머리 뒤에는 원형의 두광(頭光)과 몸 전체를 감싸는 신광(身光)이 이중 띠 형태로 정교하게 선각(線刻)되어 있으며, 불상은 연꽃이 활짝 핀 연화대좌 위에 안좌해 계신다.
이 마애여래좌상은 입체 석불인 삼륜대좌불과 한 공간에 배치됨으로써, 자연 암벽(마애불)과 입체 조각(삼륜대좌불)이 남산이라는 자연 속에서 하나의 정교한 불국토를 완성하도록 연출된 통일신라 미술의 위대한 걸작이다.
‘大平 二年八月 □□ 阿(尉)□ 佛成奉爲時’라는 명문은 학계에서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에 대해 논의할 때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大平 二年八月 (태평 2년 8월)에서
태평(大平/太平)은 중국 요나라(거란) 성종 때 쓰인 연호로 1022년(고려 현종 13년)에 해당한다.
즉, '1022년 8월'이라는 명확한 연월을 나타낸다.
佛成奉爲時 (불상을 조성/성취하여 받들어 모실 때)는
특정 인물(아위□ 등)이 발원하여 부처님(불상)을 조성하여 바쳤다는 전형적인 조상 발원문(造像發願文)의 형태를 보여준다.
이 명문의 발견으로 인해 이 마애불의 조성 시기에 대하여 불교미술사학계에서 흥미로운 두 가지 견해가 대립/논의되어 왔다.
명문에 기록된 연호(태평 2년)를 그대로 받아들여, 이 마애불이 통일신라가 아닌 고려 현종 대(1022년)에 조성되었거나, 혹은 신라 시대 불상을 고려 시대에 중창·보수하면서 기록을 남긴 것이라는 견해이다.
마애불의 조각 기법(풍만한 얼굴, 촘촘한 계단식 옷주름, 항마촉지인 등)은 석굴암 본존불이나 8세기 통일신라 불상의 완숙한 양식을 너무나 전형적으로 띠고 있다.
따라서 불상 자체는 8세기 신라 시대(대현 스님 유식학 부흥기)에 조성되었고, 훗날 고려 시대(1022년)에 마애불을 보수하거나 신앙적 예경을 올리면서 바위에 명문을 추가로 덧새긴 '중수 명문'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 명문은 용장사가 신라 시대 대현 스님 때뿐만 아니라, 고려 시대(11세기 초 현종 대)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중심지이자 주요 사찰로서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예경받았음을 입증해 주는 결정적인 문자 자료이다.
이 마애불 위에는 지붕(목조 전각이나 덮개 건물인 복옥)이 세워져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마애불이 새겨진 암벽의 상부나 주변을 관찰해 보면, 목재 기둥을 세우거나 들보를 들이얹기 위해 뚫어놓은 네모나거나 둥근 구멍(주혈, 柱穴)과 함께, 위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불상으로 바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물길을 돌려주는 물꽂이 홈(유수구, 流水溝)의 흔적이 확인된다. 이는 암벽에 바짝 붙여 목조 전각을 세웠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자국이다.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비바람으로부터 소중한 불상을 보호하는 동시에, 참배객들이 들어와 예경을 올릴 수 있는 예배 공간(전실)을 확보하기 위해 야외 마애불 위에 목조 지붕(전각)을 덮어씌우는 부옥(覆屋) 전통이 보편적이었다.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은 1,0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상호)의 미소나 옷주름(법의)의 선각이 매우 또렷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처럼 보존 상태가 우수한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상부에 전각이 존재하여 직사광선(선명도 마모)이나 비바람에 의한 풍화 작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해 주었음을 증명해 준다.
따라서 당시에는 암벽에 들보를 연결한 형태의 목조 보호 전각(인공 굴 구조)이 세워져 있었으며, 수행자와 참배객들은 비바람이 차단된 아늑한 전각 내부에서 마애불을 바라보며 예경을 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륜대좌불은 자연 속의 '미륵전(彌勒殿)'이었고 마애여래좌상은 암벽에 구현된 '대웅전(大雄殿)'이었다.
《삼국유사》 기록에서 명확히 '자씨석장육(慈氏石丈六, 미륵석상)'으로 명시되어 있고, 용장사에 머물던 대현 스님이 법상종(유가종)의 대덕으로서 미륵 유식학을 깊이 연구했음을 감안하면, 삼륜대좌불은 명실상부한 미륵부처님이다.
마애여래좌상은 오른손을 아래로 내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수인을 취하고 있다.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마왕을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수인이다.
평지 사찰에서 석가모니불을 수부(首府)로 모시는 대웅전(또는 법당)의 역할을 담당했다. 마애불 위에 부옥(覆屋, 보호 전각)이 세워져 있었다면, 바위 벽면 자체가 대웅전의 후불탱화이자 본존불이 되고 그 앞 공간이 참배객들이 예경을 올리는 법당 내부가 되었을 것이다.
통일신라의 수행자와 석공들은 목조 전각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경주 남산의 암벽과 능선 전체를 거대한 '자연 속 대웅전과 미륵전'으로 탈바꿈시킨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