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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황인찬, 응시의 감각과 정직한 조율사
그의 말을 들어보면, 정직하다는 것이 시에서도 얼마나 효용이 높은 태도를 만드는지 확인된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우회하지도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가장 정직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시인이 자신만의 문법을 갖는, (쉬운 듯하면서도 사실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비책인 것 같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부자의 아내 창밖으로는 삶이 부서지지 않는 풍경이 펼쳐져 있고, 복도에 울려 퍼지는 내 아이의 이름이 있는 (중략)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내가 되고 싶었던 것/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
- 「풍속」 부분, 『희지의 세계』 수록
모험을 보여주지 않는 모험의 시인
2014년 12월 세밑의 어느 날, 실천문학사에서 주관한 송년 모임 술자리에 갔다가 황인찬 시인을 만났는데, 그와 인상이 비슷한 다른 시인의 이름을 대며 모 시인 아니냐고 묻는 실례를 범했다. 계간 실천문학의 편집위원 자격으로 그 자리에 나와 있던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내 착시를 부드럽게 받아 넘겼다. 그리고 1년여가 지나 그와 나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관계로 마주앉았다. 그와의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의 시집과 산문을 찾아서 읽고, 그가 여러 곳에서 행한 발언 등을 확인한 지금 나는 2014년 12월의 일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착각한 이에 대해 그가 취했던 대수롭지 않은 태도에 대해서. 과장으로 하는 말도 아니고 억지스러운 내포를 엮으려고 하는 말도 아닌데, 나는 그것에서 시에 대해 시인 황인찬이 갖는 특유의 자의식, 내 식으로 표현하면 ‘백치적 절대성’이라고 할 만한 어떤 태도를 먼저 발견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현재 한국시단의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시인이다. 1988년에 태어났으니 이제 만 스물여덟인데 이미 기념비적인 두 권의 시집을 한국 시단에 돋을 새김한, 현재로서는 딱히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운 기대주다. 1988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해로 기억된다. 변방 극동아시아의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에 모처럼 세계인의 시선이 몰리게 했던 올림픽은, 역사적 내상이 깊은 한국인의 열등감을 다소간 보상해준 정치적 협상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그 해에는 올림픽 말고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소련의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에 착수했고, 한국에선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했으며, 지리멸렬한 전쟁을 벌이던 이란과 이라크는 정전협정에 서명했고, 미국은 자국무역을 보호하는 포괄무역법안, 일명 ‘슈퍼301조’를 통과시켰다. 이밖에도 이 해 한겨레신문사가 창간됐고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윈도우 2.1을 출시했으며, 훗날 고유한 자신만의 음악영역을 개척한 두 명의 뮤지션 신해철과 이상은이 가요계에 데뷔했다. 인기 아이돌그룹 빅뱅의 멤버 태양과 세계적인 영국 가수 아델이 태어난 것도 바로 이 해다.
젊은 시인이 태어난 해에 일어난 일들을 이렇게 나열해본 것은, 시공을 가득 채운 풍속과 기호들의 세례를 받으며 한 시인의 시적 상상력과 리듬이 창조되었으리라는 가설을 분명히 전제하고 있는 것이거니와 황인찬 시인이 도정하고 있는, 한국 시의 새로운 세대론적 의미에 대해 나름의 객관적 감수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온라인 게임과 아이돌 그룹의 광팬인 그의 세대, 그의 시간에 대해 적절한 감수성을 갖는 것은, 곧 그의 시를 바라보는 유효한 관점과 심리적 거리를 확보하는 일이기도 할 테니까.
문득 일전 김경주 시인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젊은 시인들의 시를 쓰는 태도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이런 이야길 들려줬다. 요즘 젊은 시인들은 시를 하나의 유희 대상으로, 오타쿠적 취미의 아이템처럼 대한다는 것. 거기에 엄숙함이나 비장함이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다고. 그의 말을 전적으로 황인찬 시인에게 적용시키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황인찬 시인에게도 ‘오타쿠적’인 어떤 정신의 태도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편집증(paranoia)의 세계다. 편집증이 시적 진술의 전략으로 채택될 때 그 진술에 균형과 질서를 도모하려는 외부의 욕망은 시적 자아에 의해 의도적으로 무시된다. 그것은 그가 두 번째 시집에 붙인 제목 ‘희지의 세계’가 그가 즐겨 읽었다는 만화 제목 ‘미지의 세계’의 착각에서 온 것임을 아무렇지 않게 자인하는 것처럼, 자신이 받아들인 것을 즉자적으로 정물화하는 과정에 확인된다. 그가 편견이나 억압 없이 즉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상은 아무런 의미 값이나 서열이 매겨지지 않는다.
황인찬은 비교적 최근에 행한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메시지를 던지는 건 의미가 없어요. 아주 일시적이고, 심지어는 내가 무슨 메시지를 갖고 있었는지 나도 잘 몰라요. 그런 건 다 착각이에요. 내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고른 말이, 오히려 그 말을 선택하는 순간 훼손돼요. 손상되고 아무것도 아닌 덜 떨어진 종류의 말로 메시지가 갈 수밖에 없어요. 말하자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오’ 하고 짚어서 전달하는 게 아니고, 그물을 더 넓게 펼쳐서 던지는 거예요. 그러는 편이 원래 내가 갖고 있던 문제의식, 생각, 진정성을 덜 훼손시켜요.”
메시지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구조화하지 않고 더 넓게 펼쳐서 그대로 던지는 것, 그것은 마치 아이가 처음 배운 말을 혀를 움직여 공중에 던지는 것처럼 백치적으로 순결한 행위다. 그 순결한 행위에 풍속과 정직하게 호흡하는 즉자적 편집증이 입혀질 때, 황인찬의 새로운 문법이 탄생하는 것은 아닐는지.
이쯤해서 한국시의 애독자로서 그의 시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을 고백하자면, 그의 시가 언어적 구조와 직관의 극단적 모험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첨단을 갖기 위해 극단의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 시인이 과연 어디 있겠냐고 혹자가 반문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모험을 보여주는 일은 사실 생각보다 쉬운 일이라고. 진짜 모험은, 자신이 모험중인 것을 감추는 것이라고.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 모르는 사이 모험을 감행하는 것, 그것이 진짜 모험이라고. 황인찬은 그걸 할 줄 아는 시인이 언어의 진정한 모험가라는 것을 동물적으로 알고 있는 시인이다. 물론 이 말은 어떤 정치한 분석을 근거로 하는 말이 아니라 여전히 모호한 인상에 빚지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모조리 소멸할 때까지 확인되지 않을 것이다.
젊은 시인은 약속 시간에 십여 분 늦었고, 우리가 만나기로 한 카페에서는 인터뷰를 허락하지 않았다. 두 번째 들어간 카페에서도 퇴짜를 맞았다. 귀가 시려울 정도로 추운 날씨에 상수동 일대를 헤매다가 겨우겨우 네 번째 들어간 카페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그에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아스팔트 키드에서 오타쿠 세대로 이전되는 문화적 지표를 갖는 그의 성장 환경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응답하라, 1988.’
부모가 권고하는 신앙과의 충돌
김도언 : 경기도 안양 출신이고,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 태어났고, 스물셋의 나이인 2010년에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어요. 대부분의 작가와 시인들은 가족으로부터 지울 수 없는 영향 같은 걸 받는데 황인찬 시인의 경우는 어떤 편인지. 성장기는 어땠고 부모님과 형제들은 어떤 분들이었나요.
황인찬 : 성장기에 저에겐 큰 딜레마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목회를 하시는 분이거든요. 그런데 장남인 제가 자라면서 신앙을 못 가진 거예요. 신앙을 갖는 데 실패했다고 하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 결국 대학을 가면서 부모님이 계신 집을 나오면서 가까스로 그걸 이룰 수가 있었어요.
김도언 : 아버지가 목사님이셨다는 거죠? 신앙 문제로 불화가 있었어요?
황인찬 : 아니요. 딱히 두드러지는 불화는 없었고요. 제가 속으로 그냥 불편해하는 편이었죠. 저희 집이 굉장히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거든요. 그런 분위기 안에서 제가 겉돌았으니까요.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저를 앉혀놓고 인찬아 너는 하느님의 사람이니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해, 이런 말씀을 매일 하셨는데, 그게 부담이 되었던 게 사실이에요. 저에게는 부모님과 교회가 떼놓을 수 없는 거라서요. 부모님에 대한 어떤 불만이나 반항심 같은 게 신앙을 갖지 못한 원인일 수도 있고요.
김도언 : 그게 억압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겠네요.
황인찬 : 그런데 제가 다행히 흘려듣는 걸 잘하거든요. 마음에 오래 쌓아두지 않는 편이에요. 그리고 대학에 들어와서 집에서 나오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부모님이 제 입장을 납득하게 되신 것 같아요. 저도 그때 최소한의 정신적인 독립을 했던 것 같아요.
김도언 : 독립이라는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진술을 하는 걸 봤어요. 그리고 시를 읽어봐도, 성장서사에 대한 욕망이나 자의식이 느껴지고요. 황인찬 시인의 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 호기심이 왕성한 소년의 이미지가 시 속에 있다는 건데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채워졌을 때, 어른으로 표상되는 성숙한 시적 자아가 시적발화를 이끌 때, 소년일 때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호기심이나 궁금증 같은 것이 방해를 받을 수도 있잖아요.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조로를 할 테니까요. 예를 들어서 랭보도 스물 몇 살 이후로는 시를 못 썼고 장정일 같은 시인도 나이 들어서는 소설로 전향했고요.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과 소년으로서 호기심을 지키려는 태도 사이에 모순은 없었을까요?
황인찬 : 그런데 말씀하신 소년의 이미지로서 제 시적 자아가 갖는 호기심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은 안 해요. 당연히 어릴 때 반짝반짝 하는 감수성이나 상상력이 있고 젊을 때만 할 수 있는 게 있고, 그와 동시에 늙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긴 하겠죠. 그런데 저는 변하지 않는 게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좋아하고 항상 감탄했던 문학작품들은 운 좋게 잘 가지고 태어난 반짝이는 재능 같은 게 아니고, 오랜 시간을 견뎌서 무언가를 만들어낸, 그래서 한 명의 시인이나 작가로 완성된 사람들을 더 좋아했거든요. 저는 그래서 랭보나 기형도 같은 시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들의 재능은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배울 수 있는 건 태도겠죠. 점차 자신을 완성시켜가는 자세, 그러면서 자기복제를 하지 않는 것, 그렇게 희소한 태도를 견지한 작가들에게 감동을 받았어요.
김도언 : 예컨대 황인찬 시인이 영향 받은 시인이라고 여러 자리에서 고백했던 이승훈 시인도 그런 경우인 것 같네요. 그리고 제가 볼 때는 박상순 시인도 좋아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황인찬 : 네, 그렇죠. 맞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들이예요. 그런데 또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그분들의 세계를 갖는 것과는 좀 다른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 20대가 가지는 불안함을 그대로 느끼고 있으니까요. 이걸 부인할 수는 없죠. 지금 이 시기는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시기인 거 같아요.
종교적인 억압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나는 그와 능히 동병상련의 정을 나눌 만하다. 나 역시 외가 쪽에서 대대로 계승된 신앙인 개신교를 일방적으로 강요받으면서 고통스러운 성장기를 보냈으니까. 그 믿음의 강요에 대한 거역과 반항은, 과장된 죄의식과 더불어 낭만적으로 풍화된 정신적 소외를 자초하게 한다. 일종의 ‘배교자’로서의 위악적 포즈를 자기 몸에 불가피하게 들여놓게 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진부한 것이다. 배교자의 위악으로는 어떤 시적 결기도 보여줄 수 없다. 그것을 보다 자연스럽게 통과시켜버리는 자세, 믿음과 신앙의 체계와 부딪혔던 기억을 골똘한 파라노이아의 태도로 마모시키는 불수의적인 전략, 아마도 그것이 첨단의 세련된 양식에 가닿는 것이리라. 역시나 단정적인 직관으로 말하거니와, 목회를 했던 아버지의 기대와 독실한 신앙의 가풍에서 스스로 튕겨나는 동안, 시인 황인찬의 내면에는, 그와 같은 체험이 아니었으면 결코 만들어지지 않았을, 그러니까 고독하고 불안하고 위험한 정신적 모험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어떤 성숙하면서도 유연한 태도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태도가 예의 균형과 질서 같은 정언적 체계마저도 무화시키는, 즉자적이면서 편집증적인 세계를 기술하는 특유의 문법을 만든 것은 아닐는지.
자신을 배반하려는 시도
김도언 : 원하든 원하지 않든 등단 2년 만에 김수영문학상 받으면서 엄청난 주목을 받았고 그것은 두 번째 시집을 낸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그것에 대해 어떤 개인적 소회가 있어요?
황인찬 : 너무 여러 가지인데요. 일단은 큰일났다 싶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언제나 과분한 말들을 듣게 되면서 속으로 나는 그 만큼은 아닌데, 하는 불안이 일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솔직히 사람들이 좋다고 말해주니까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요. 결국에는 여기서 빨리 도망가고 벗어나야지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감사하면서도 거기서 도망가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는 거 같아요.
김도언 : 도망간다는 게 어떤 의미죠?
황인찬 : 그게 약간 여러 가지 맥락이 있는데, 일단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걸 계속하는 것에 제가 재미를 더 이상 못 느낀다는 것인데요. 첫 시집을 내기 전부터 사람들이 제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들었던 생각은 아, 내가 이러다가 되게 빨리 소비되겠구나. 빨리 소비되고 금방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면 그렇게 빨리 소비되는 것에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하는 생각을 같이 했던 것 같아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기대에 계속 부응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의 기대를 계속 배반하려고 움직이는 쪽이 저에게 의미가 있고 그리고 모두한테도 좋은 일이겠다는. 그런 생각을 첫 시집이 나오기 전부터 했어요.
김도언 : 첫 시집 나올 때쯤 사람들이 나한테 응당 기대하는 것을 배반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거군요.
황인찬 : 네, 첫 시집을 내면서 답답한 게 많았거든요. 왜냐하면 이미 이런저런 이유로 방법론에 질려 있었고 어떤 건 이제 그만하고 싶고, 어떤 건 조금 더 하고 싶고, 더 하면 더 잘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랬다가는 제가 원하지 않는 방향에서 제 시가 고정될 것 같은 거예요. 사람들은 잘 보이는 것만 보려고 하니까요. 저는 그렇게 제가 고정된 형태로 사람들에게 규정되는 게 싫었어요. 그러면서 첫 시집 묶으면서 차분하게 시를 돌아보면서 많은 생각들이 오갔어요. 한 권의 시집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어떻게 통일성을 기해야 하는지도 고민했고, 이 시집을 묶고 내보내면서 제 시적 관심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이것 말고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걸 하고 싶다는 열망도 커지고 있었고요. 어쨌거나 일단 한 권의 시집을 완성시켜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컸어요. 그걸 위해 다른 걸 하고 싶은 마음을 잘 다독거리자고 했어요. 참고 한동안은 몇 편을 만들어서 잘 하자. 그런 마음으로 한 일년 정도는 더 썼던 거 같아요.
김도언 : 네, 그렇게 해서 2012년에 《구관조 씻기기》를 내고, 2015년에 《희지의 세계》를 냈는데, 본인 입으로 직접 이 두 시집의 변별점 같은 걸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황인찬 : 첫 시집 같은 경우 많은 비평가들의 이야길 접하면서 좀 당황했어요. 다는 아니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들통 나기 쉬운 걸 썼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웃음) 정말 제가 생각한 걸 평론가들이 많이 얘기하더라고요. 예컨대 시적 대상을, 세계를 잠깐 멈춰서 보는 게 첫 번째 시집에서 하고 싶은 거였거든요. 잠깐 멈춰서 거리를 두고 손 안대고 보는 것.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었고요. 그런데 첫 번째 시집을 그렇게 내고 나서 그게 진짜 쓸모없고, 아무 것도 아닌 거구나를 알게 된 거 같아요. 세상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고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다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죠. 혼자 그렇게 멈추는 건 아무 의미가 없더라고요. 다 멈추거나 다 안 멈추거나 해야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혼자 멈추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죠. 그러면 두 번째 시집에서는 무얼 말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많은 고민을 했어요. 이것저것 들춰보기도 하고 화를 내보기도 했지요. 두 번째 시집은 그런 고민들이 들어간 시집인 거 같아요. 첫 시집은 터치가 별로 없는데, 두 번째 시집에서는 대상하고 터치하는 부분이 훨씬 많이 늘어났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김도언 : 이해가 돼요. 두 번째 시집은 제가 개인적으로 읽은 독법에 의하면, 또래세대의 취향, 정서, 고민 같은 것들을 가급적 기존의 시적 포즈나 색깔을 희박하게 하면서 공감각적 상상력과 독특한 리듬을 가진 산문구조로 녹여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자신의 스타일이 두 번째 시집에서 무르익는 것 같은데, 이런 스타일을 세 번째 시집, 네 번째 시집에서도 심화시킬 것인지. 아니면 정말 황인찬의 기존 독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생각이 있는지.
황인찬 : 제가 하고 싶은 건 가능한 한 전혀 다른 세계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가는 것인데요. 아까 박상순 시인 이야기도 나왔지만, 그 분이 왜 시집을 드물게 내는지 알겠더라고요. 이제서야 이해를 했어요. 왜 시집을 세 권만 내고 안 내시는지요. 그분이 문예지 발표되는 걸 보면 시를 안 쓰시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시집은 안 내시는 거예요. 시집을 안 내면, 그 자리를 정리하지 않고 계속 더 모색하면서 움직일 수 있어요. 책을 안 내면 내가 머물고 있는 세계를 정리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박상순 시인이 시집을 묶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서둘러서 무엇에 쫓기듯 자기가 머물던 세계를 정리하고 시집을 내는 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시집을 묶어낸 이후, 다른 세계를 보여주지 못하고, 무의미한 자기복제를 다시 거듭하게 되는 시인들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럴 바에는 자기 자리에서 여전히 계속 모색하는 게 더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 그대로 자리를 정리 안 하고 편하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소년, 오타쿠, 시인의 이미지들
김도언 : 개인적으로 아까 황인찬 시인의 캐릭터에 소년 같은 이미지가 있다고 했는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황인찬 시인의 이미지는 어떤 백치적인 ‘오타쿠’, 이런 것도 보이고, 개인주의, 몽상과 현실의 경계를 즐기는 모더니스트, 이런 것들이 오버랩되어서 보이거든요. 어떤 비평가는 유물론적 미니멀리스트,라고 표현한 것도 봤고요. 얼핏 보기에는 보통의 시인들이 가지고 있는 깊은 내상, 트라우마나 어떤 정한, 이런 것이 없어 보이는 게 특이하거든요. 실제로 그런지? 아니면 그런 걸 안 보이게 위장하고 있는 건지.
황인찬 : 그런 것이 없을 순 없어요. 저는 그런 내상이나 고통을 드러내는 게 좀 부끄럽더라고요. 아프다는 말을 내뱉는 게 남세스럽게 느껴져서 못하겠더라고요. 어떤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건 고등학교 때 많이 했거든요. 드라마 광팬이어서 드라마 속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진짜 ‘쪽팔린 짓’을 하고 있었네,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사실 저를 추동하는 가장 큰 감정이 부끄러움이거든요. 저는 부끄러운 게 싫은 거예요. 부끄러움이 생각보다 무척 강력한 감정이잖아요. 저는 분노나 슬픔, 기쁨보다 부끄러움을 더 크다고 느끼거든요. 그래서 사실 시적 대상을 손을 대지 않고 지켜본다는 저의 어떤 태도도 그런 성격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터치하는 순간 관계가 발생하는데, 그때부터는 부끄러워지니까요.
김도언 :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숭고미, 고결함, 그런 걸 추구한 것 아닌가요?
황인찬 : 오히려 자기혐오에 가까운 거 같아요. 내가 잘나고 고결해서 그런 게 아니라 부끄러워지면 죽고 싶고, 너무 싫거든요. 자기혐오가 일어나는 감정을 피하기 위해 지켜보는 절대적인 거리가 필요했던 거죠.
세상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시인들이 있고, 그들은 서로 접촉하면서 다양한 연을 맺는다. 그러한 가운데 많은 시집들이 스승이나 선배 시인의 영향 하에서 계열화되거나 유형화되고,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을 안겨주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계승이라는 이름으로든, 패러디나 키치 같은 전략적 개념으로든, 아니면 트리뷰트나 오마주의 의미로든, 시들이 어떤 좌표 안에서 동일한 운행을 보이는 것은 현대시의 풍속에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비난 받을 일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해도 시인은 자기만의 문법과 발성을 끝없이 찾는 존재여야 하고, 그 불가능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 속에서 가장 극적인 존재증명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황인찬 시인의 시편들이 보여준 선명한 이색은 근래에 출현한 젊은 시인들의 그것과 비교할 때 가장 돌올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그가 들려주는 시적 자아의 목소리는 마치 처음 말을 배우는 자폐아의 그것과도 같은, 아니면 뇌졸중으로 언어가 퇴화된 달변가의 슬픈 혀 같은 느낌이 든다. 비문인 것 같은데도 의미가 흘러나오고 정언인 것 같은데도 의미가 증발해버리는, 그 과정에서 언어가 깃든 자리가 신비하리만치 명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해변, 교실, 바다, 종로 같은 익숙한 공간을 부조리한 한 행의 획으로 순식간에 연극적 공간으로 치환시키는 미장센도 어지간하다. 어눌한 말투와 생략되고 뒤틀린 문장, 이것들이 소격효과마저 자아내면 그의 시적 공간은 미증유의 우주가 된다. 이런 감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김도언 : 특유의 시적 문법과 목소리를 갖기 위해 어떤 연습을 했나요? 타고난 것인가요?
황인찬 : 글쎄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사실 나름대로는 시 쓰기 전에 준비를 많이 해요. 다른 시인들의 시를 열심히 읽어요. 시집이 나오면 거의 다 읽고 확인하죠. 그러면 누구는 같고 누구는 다른가 이런 게 보이고 더 나아가면 아무도 하지 않은 말과 아무도 만들지 않은 세계까지도 보이거든요. 제가 습작할 때 황병승이나 김행숙 시인을 무척 좋아했어요. 정말 사랑하는 시인들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분들을 따라 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칭찬도 듣고 그랬는데, 이걸 내가 아무리 잘해도 내가 황병승이나 김행숙 시인만큼 탁월하게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이런 생각이 딱, 드는 거예요. 그래서 의식적으로 방향을 바꿨어요. 다른 시인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런 게 몸에 체화되면 의식을 안 해도 다른 길을 이미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돼요. 그 다른 길이 바로 제 길인 거죠.
김도언 : 샤이니나 엑소 같은 아이돌그룹에 열광한다고 들었어요. 확실히 대중문화적인 취향도 있는 것 같고, 감각적인 유희 같은 것도 추구하고. 그걸 저속한 거라고 밀쳐두지 않고, 아무 편견 없이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황인찬 시인이 시를 통해서 주로 보여준 건 응시와 관조라는 거죠. 그런데 그 응시와 관조라는 게 방금 이야기한 감각을 촉지해내는 능력과 다른 욕망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게 어떻게 시에서 합치될 수 있는지 궁금해요. 다시 이야기하면 감각적인 유희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는데, 응시하고 관조하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감각을 잘라버리는 것이잖아요. 보기에는 이게 양립할 수 없는 것 같은데, 시에서는 조화롭게 드러나더군요.
황인찬 : 저는 그 두 세계가 딱히 분리되는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냥 어떤 중심적인 태도가 있는 거고 그 태도를 구성하고 구축해나가는 감각이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어떤 대상을 응시한다고 해서 그게 팔, 다리가 잘리는 일이라고 하기 힘들고요. 오히려 저는 그렇게 아무 것도 안하고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되게 감각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포르노적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다른 걸 다 지우고, 오히려 하나만 보여주는 게 어쩌면 이게 더 외설적인 방식이구나, 그런 생각도 했고요. 그래서 딱히 분리된다는 생각은 들지가 않아요.
김도언 : 황인찬 시인의 시세계에서는 제가 ‘현상학적인 전복’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것들도 보이더라고요. 이를테면, 고기집에서 쓰는 가위가 있을 때, 우리가 그 가위를 보면 냉면을 자르던 가위, 고기를 자르던 가위, 이런 것이 연상되면서 익숙한 정보들이 따라오는데, 그냥 그 가위를 가위 자체로 보는 거죠. 은빛 날이 두 개 있고, 동그란 테가 두 개 있고, 손잡이인 걸 알지만, 모르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것들이 황시인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황인찬 : 네, 저에게 그런 태도는 있는 것 같아요. 생경하게 묘사하려고 의식적으로 애를 쓰는 건 아니고요. 예컨대, 제 시 속에 교실이나 숲이나 공원이 나오는데, 제가 그걸 딱히 좋아해서 쓰는 건 아니거든요. 그런 공간이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상(像)이 있어요. 그게 워낙 대중매체를 통해서 재현이 많이 되어서 사람들한테 비슷한 정서와 감각을 불러일으켜요. 그러면 저는 그것들을 가져와서 그냥 그대로 쓰는 거예요. 그냥 그대로 쓰는 것만으로도 생경해지더라고요. 거기에 제 관점을 얹지도 않고 별로 손질도 안 하는데, 그것만으로 충분히 생경해지는 걸 느꼈어요. 그게 텍스트의 특성 같기도 하고요.
레퍼런스가 없는 또래의 세계
김도언 : 지금 비슷한 또래들과 동인활동을 하고 있죠? ‘는’ 동인이라고. 김승일, 박성준, 최정진 등이 속해 있다고 들었어요. 아까 얘기한 황병승, 김행숙 등이 바로 윗세대 시인인데, 황인찬 시인 또래가 열어가고 있는, 전 세대와 구분 지을 수 있는, 시사적인 의미와 가치는 뭘까요?
황인찬 : 저는 제가 시인이 된 2010년대가 지지부진한 시대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게 가장 큰 차이일 것 같아요. 80년대, 90년대, 2000년대가 명확하게 구획되는 아젠다가 있다면, 2010년대는 그렇게 구획될 만한 아젠다가 없다고 생각해요. 제 생각에는, 문학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2010년대가 ‘레퍼런스’가 없는 시대인 것 같아요. 지금은 참조할 서양의 흐름이나 사조가 없어요.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인 전망이 악화되면서 예술이 위축되는 것과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이 형편없이 쪼그라든 멘탈로 경쟁사회에서 어떻게 예술을 할 것인가. 어떻게 자생할 것인가의 문제만이 던져져 있다는 거죠. 제가 아이돌을 좋아하는데, 2000년대까지 나온 아이돌의 경우 끊임없이 미국 팝들을 따라하는, 수입해오는 게 많았어요. 그런데 2010년 아이돌들을 보면 이제 다시 90년대 말, 2000년대 초 한국 아이돌들을 복제한 거예요. 그러니까 레퍼런스가 외국에서 90년대 2000년대 한국으로 옮겨온 거예요. 저희 세대가 느끼는 한국 시에 닥친 위기는 문화적 차원에서의 레퍼런스가 없다는 걸 얘기하고 싶어요.
김도언: 웬만한 문화적인 아젠다들은 90년대, 늦어도 2000년대에 이미 다 나왔다는 거죠? 그때가 격렬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또 시적인 걸 물어볼 게요. <백자> 라는 시가 있고, <리코더>라는 시가 있는데, 이런 시들처럼 어떤 그 자리에 있는 그것을 그 자리에 놓아두고 바라만 보는 거잖아요. 나는 거기서 독특한 미적 가능성을 느꼈거든요. 왜냐하면 시적 자아가 백자나 리코더에 손도 안대고 불어보지도 않고, 그냥 보고 있을 때, 독자들은 그 백자나 리코더를 보고 있는 시적자아를 또 보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독자는 대상을 보고 있는 시적자아를 보고 있는 것이고, 시인은 또 바깥에서 그 독자까지 보는 거죠. 거기서 굉장히 묘한 쾌감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어떤 시적대상을 시적자아가 그냥 놓아둔다는 것이 어떤 세계관일까요?
황인찬 : 일차적인 의미로 이야기하면 훼손시키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 이를테면 김춘수식으로 꽃이라는 이름을 불러서 꽃을 만들지 않고 더 많은 것들이 반응한 몸짓으로 두는 것에 가까운 걸 느끼는 거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쾌감을 주는 이유는 그걸 지켜본다는 것이, 시선이라는 것이 어쨌든 권력이고, 포르노 같은 측면이 있잖아요. 그런 부가적인 것들까지도 파생이 되는 거겠죠.
인터뷰 말미에 그가 다소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한국문학의 산실인 중앙대 문창과 출신이고 지금은 같은 대학 문창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다. 2학기를 마쳤고 봄이 되면 다음 과정을 밟는다. 한 시인의 시적인 자아나 태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상당히 다양한 루트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위리안치된 한뼘의 영토에서 회복될 수 없는 상처의 힘으로 시를 쓰고, 어떤 이는 노마드처럼 끝없는 방랑과 순례 속에서 시의 근육을 기르기도 한다. 노동과 사회참여의 가치 속에서 시가 놓일 자리를 모색하는 시인도 있을 수 있다. 예컨대 황인찬 시인의 경우, 지극히 순탄하면서도 공식적인 과정을 밟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상대적으로 이른 나이에 등단했고, 등단하자마자 시인들이 선망하는 큰 상을 탔고 주목과 상찬을 한 몸에 받는 시인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타고난 재능과 치열한 노력의 산물임이 분명하지만, 밖에서 바라볼 때, 지나치게 문단의 관리를 받아들이는, 편하고 쉬운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럴 때, 시적 자아가 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사유의 깊이라거나 감각의 폭들이 자칫 협소해질 수 있다는 의심이나 염려가 발생한다. 야생의 어떤 것들이 들어오는 길이 차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존하는 이 리스크에 맞서 그가 자신을 어떻게 방어하는가에 따라 시인으로서 그의 좌표가 정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툭, 이런 대답을 내놓는다.
“사실 저는 그걸 우려한 적은 없어요. 이를테면, 문창과에서 글만 읽고 쓰는 사람이 얼마나 세상을 알고, 많은 것들을 보았겠느냐 염려를 하신다면 저는 당연히 안 봤다고 대답할 거예요. 저는 매일 책만 읽고, 집에서 컴퓨터만 하고, 핸드폰만 보고 노니까요. 그런데 그게 저의 세계예요. 이 세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는데, 제가 갖지 못하는 다른 세계에서 제가 하지 못하는 일을 자책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하지 못하는 걸 억지로 한다고 제가 대단한 시인이 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요. 그냥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말들을 하면서, 제가 가질 수 있는 태도를 가지고 사는 게, 그게 시 안에서 제가 자유로워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그가 풍속에서 길러낸 말을 들어보면, 정직하다는 것이 시에서도 얼마나 효용이 높은 태도를 만드는지 확인된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우회하지도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가장 정직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시인이 자신만의 문법을 갖는, (쉬운 듯하면서도 사실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비책인 것 같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아이고 비책 같은 게 어딨어요”라고 황인찬, 그가 어디선가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황인찬 시인은 1988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고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펴낸 책으로 시집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가 있다. 2012년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