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조도 트레킹
거제는 면적이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다음으로 넓은 규모가 큰 섬이다. 해안선이 올망졸망하고 산지가 많기는 해도 곳곳에 너른 들판이 있어 사십여 년 전 대형 조선소가 들어서기 전에는 어업만이 아닌 농사도 꽤 지었다. 거제는 섬이라는 지역 특성으로 왜구 노략질을 자주 받았다. 해안 곳곳 봉수대가 있고 허물어진 석성도 보았다. 장목에는 임진왜란 때 왜구가 쌓은 왜성도 있었다.
일본은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나라를 무척 괴롭혔다. 환태평양의 잦은 지진과 태풍은 섬나라 한계를 떨쳐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 대표 사례가 임진왜란과 한일합방이다. 대마도와 가까운 동남해안 울산과 경주, 그리고 부산 경남 해안이 피해가 컸다. 남녘 해안인 거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거제는 섬이지만 내륙의 평야에 버금할 기름진 들판들이 몇 군데 되었다.
거제 지명 유래를 찾아 연초면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지난날 왜구 노략질에 한때 공도(空島)정책을 펼쳤음을 알게 되었다. 1271년 고려 말 원종 때 거제 주민들은 섬을 떠나 멀리 거창 가조로 떠나 살았더랬다. 왕조가 교체된 1422년 조선 세종 때 거제로 돌아왔다. 세종이 북방 국경선을 확정 짓고 남녘 해안 왜구를 쫓아내어 섬 생활이 안정될 수 있었기에 150년 만의 귀향이었다.
고현과 가까운 곳에 수월과 수양이라는 지명이 있다. 두 마을의 지명도 거창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유추되었다. 이보다 더 확실한 흔적이 사등면에 딸린 가조도다. 진동만 내해 옥녀봉이 솟아오른 유인도로 몇몇 어촌에서 주민들이 더러 살고 있다. 출장소와 보건진료소와 함께 초등학교가 있다. 견내량 통영으로 저무는 낙조가 아름다운 섬으로 성포에서 건너는 연도교가 놓여 있었다.
가조도는 고려 말 거제를 떠나 거창 가조현에 살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예전 살다 온 고장의 지명을 붙였음이 분명하다. 가조도는 어촌계에서 자발적인 금융조합 운동이 펼쳐져 우리나라 수협이 최초 발생한 고장으로 알려진 데다. 백 년 전 일제 강점기였지만 관에서 주도하지 않고 지역민이 자생적으로 조합의 필요성을 느껴 설립했음이 의의가 컸다. 신전마을엔 수협 효시공원이 있다.
근무지가 거제로 정해지기 전 나는 남해안은 그냥 다도해라 여겼다. 나중 알고 보니 마산합포구 구산이나 진동 갯가로 나가면 유독 눈에 띄던 봉긋한 섬이 가조도였다. 나는 재작년 여름 가조도 옥녀봉을 올랐다가 이튿날 새벽 깜짝 놀랐다. 와실로 들어 샤워를 했음에도 허벅지에 진드기가 붙어 있었다. 옥녀봉에 올랐다가 계도마을로 내려서던 하산 길에 진드기가 붙었던 모양이었다.
지난해에도 두 차례 가조도로 들어가 트레킹을 다녀왔다. 진동만 내해는 파도가 일지 않아 잔잔한 호수 같았다. 바다는 온통 홍합과 미더덕 양식장으로 하얀 부표가 줄을 지어 떠 있었다. 바다는 그곳 사람들에겐 목장과 같았다. 여름날에는 섬을 일주하는 도로를 따라 걸었고 해가 짧은 겨울에는 수협 효시공원 신전에서 가조대교를 건너 성포 포구로 나오면서 석양의 낙조를 완상했다.
근무지에서 정기고사가 진행 중인 칠월 첫날이었다. 오전에 고사 감독을 끝내고 서둘러 교정을 빠져나왔다. 고현으로 나가 두 시간마다 한 차례 있는 가도도행 버스를 탔다. 고현 재래시장을 둘러 장평을 거쳐 사곡을 지나 면소재지 성포로 갔다. 버스는 성포에서 가조도 다리를 건너 해안선 따라 섬을 일주하는 도로를 따라 갔다. 어촌 체험마을 계도 입구에서 내려 찻길을 따라 걸었다.
바다 건너가 고성 당동으로 헤아려지는 마을 앞 방파제에는 낚시꾼들이 몰려와 낚싯대를 드리워 놓았다. 낚시에 관심이 없는 나는 방파제를 넘어가 바윗돌에 앉아 드넓게 펼쳐진 양식장 부표를 바라봤다. 배낭에 넣어간 곡차를 비우면서 안주는 국사봉에 올라 따온 곰취잎을 챙겨갔었다. 이후 해안선 따라 걸으면서 남긴 갯가 사진을 몇몇 지기에게 보내면서 사회적응 연수중이라고 했다. 21.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