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 8일 일요일. 소영이가 없으니 무료한 기운을 어쩌지 못한 건희가 나에게 달라붙었다. 눈 뜬 하루 종일 내게 붙어서 종알종알 떠들어댔다. 아빠는 없어질 소자 알아요?, 그 글자는 어떤 때 써요?, 그럼 물고기 어자도 알아요?, 흰 백자는요?, 아빠는 정말 대단해요, 어떻게 모르는 글자가 없어요?, 저도 크면 그렇게 돼요?, 아, 맞아요, 아빠도 모르는 글자 있었어요, 알았어요, 공부는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죠?, 머리나 실력만 믿고 열심히 안 하면 바보 되죠?, 셀 수자도 알아요?, 그럼요, 무거울 중자하고요, 힘 력자하고요, 둘이 있으면 무슨 자인지 알아요?, 딩동댕!, 맞아요, 움직일 동자가 되는 거예요, 먹이를 보채는 아기새처럼 짹짹거렸다.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도 시종 떠들었다. 방금 몇 점을 먹었어요, 아이템을 샀어요, 얼마예요, 그런데 이 아이템을 몸에 어떻게 장착해요?, 승빈이나 성현이 형에게 전화 좀 해봐요, 얼른요, 잠시만요, 아빠 바꿔드릴게요, 아빠를 바꿔달래요, 아빠가 좀 물어봐요, 으으, 저 나쁜 놈이 내가 먹으려고 하는 걸 먼저 먹어버렸어요, 와서 아이디 좀 쳐줘요, 누나가 써준 아이디 중에 영어 한 글자를 못 찾겠어요, 이 글자는 뭐라고 읽어요?, 그럼 이 건 대문자고 이 건 소문자라는 거예요?, 이제 계곡으로 들어갔어요, 바다로 갈까요, 말까요?, 우와, 바다에는 돈이 엄청 많아요, 등등, 아예 스포츠 게임을 라디오로 중계방송하는 아나운서처럼 쉬지 않고 떠들어댄다.
잠자리를 잡아와서도, 이 거 보세요, 꼬리요, 이 잠자리는 꼬리가 가늘고요, 얘는 꼬리가 두꺼워요, 색깔도 보세요, 얘는 눈도 회색이고 머리도 회색이고 꼬리도 회색인데 얘는 머리하고 꼬리가 빨강이고요, 꼬리 끝에만 파랑색이 돌아요, 곧 놓아줄 거예요, 아니, 곤충채집을 해요, 방학숙제로 내야 하잖아요, 아빠, 우리 예전처럼 잠자리채 사서 벌레도 잡으러 다니고요, 풀도 뽑아서 관찰해요, 알았어요, 다음에 하죠, 뭐, 집안에 잠자리를 놓아주어도 돼요?, 집안에서 날아다니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맞아요, 누나가 있었더라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했을 거예요, 아이고, 어떡하면 좋아요?, 이리 와보세요, 잠자리가 죽었어요, 불쌍해요, 아까 살아있을 때 관찰만 하다가 살려줄 걸 그랬어요, 불쌍한 잠자리야, 너는 이제 엄마 아빠도 못 만나고 어떡할래?, 아빠, 우리 잠자리 묻어주러 가요, 호미도 가져가요, 아빠, 저는요, 여름이 가장 싫어요, 왜냐하면요, 여름이 되면 자꾸 귀신 이야기만 나와요, 무서운 걸 방송하던 데서만 하는 게 아니고요, 여기 저기 다 귀신 이야기를 한다니까요, 귀신 이야기만 나와서 미치겠어요, 종알종알, 중얼중얼, 쨍알쨍알, 떠든다.
잠잘 때도 제 누나가 없으니 무서워서 혼자서는 잘 수 없다고 벌벌 떨며 내게 달라붙고 화장실조차 갈 수 없겠다고 하며 해만 지면 내게 같이 가달라고 졸랐다. 시골집 멀리 떨어진 화장실도 아니고 아파트처럼 집안에 있는 화장실이 뭐가 무섭다고 저 난리로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지, 네가 아무래도 내 피를 말리려고 그러나 보다 하면서도 어린 것이 무서워서 그렇다는 데야 마지못한 척 따라가지 않을 도리 없다. 어제부터 신경이 지치더니 소영이 떠난지 이틀째인 오늘은 더욱 늘어져 아예 귀가 웅웅 울리고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거슬렸다.
곧 동무들이 온다고 하는데 저번에 대청소를 하면서 나온 쓰레기가 현관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천이나 플라스틱 재질은 큰 쓰레기봉투 여나무개를 사다 꾹꾹 눌러 채워 버렸지만 종이 종류만 따로 모아 놓은 게 종이상자로 다섯 개였다. 건희에게서도 벗어나고 동무들 맞이도 할 겸, 건희더러 게임을 하라고 일러놓고 종이 쓰레기를 내다 태웠다. 태우기도 일이다. 한꺼번에 쌓아놓고 태우면 책이나 잡지가 딱 달라붙어있어서 제대로 타지도 않을 뿐더러 불길이 높이 치솟아서 조금씩 던져 넣으며 태웠다. 날은 무더운데 불 옆에서 조금씩 집어 던져넣으며 오래 서있자니 몸이며 얼굴이 삶아질 것처럼 뜨거웠다. 비가 오려는지 먹장구름이 끼고 돌풍이 불었다. 종이를 세 상자째 태울 때 소나기가 쏟아졌다.
쓰레기를 태우고 돌아와 다시 건희 말을 끈질기게 들어주어야 했다. 저녁거리도 마땅치 않고 밖에 나가면 서로 기분이 풀리겠지. 가자, 나가자, 건희 옷을 입혀 청평으로 나갔다. 설악에서 청평 나가는 길이 밀렸다. 전에 없던 일이다. 청평으로 나가면서 보니 서울 들어가는 경춘국도에는 차들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청평 터미널 옆 퓨젼 중국집 '차이나 존'으로 갔다. 자장면을 두 개 시켰다. 설악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새우와 꼴뚜기가 두 마리씩 들어있고 완두콩이 삼십 개 넘게 들어간 자장면이다. 건희는 꽤 양이 많은 자장면을 거지반 다 먹었다. 자장면을 먹으면서 건희가 그랬다. 저 번에 여기서 자장면 먹을 때도 누나가 없었는데 또 누나 없이 우리 둘만 왔네요. 안 됐다. 누나도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2004년 8월 9일 월요일, 남양주 문화센터에 가는 날이다. 소영이가 없으니 건희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어 데리고 갔다. 이르게 도착해 화장실 위치와 책 빌려보는 데, 컴퓨터 쓰는 데, 비디오 보는 데를 가르쳐주고 무슨 물어볼 게 있으면 저쪽 카운터에 있는 누나에게 말하라고 알려주고 수업에 들어갔다. 수업을 끝내고 나오니 태연하게 책을 보고 있었다. 제법 컸군, 속으로 말했다.
점심을 먹으러 나가려는데 마침 가까운 데에서 화실을 하는 동무 깡통이 전화를 걸어왔다. 여기 다니기 시작할 때쯤 그 동무는, 내가 점심시간에 잠시 쉬고 싶을 때 월요일은 화실이 비어있으니 아무 때나 들러 쉬어 가라고 하면서 열쇠를 준 이다. 오늘은 나를 보려고 일부러 화실에 나와있다고 했다. 맛있는 점심을 사주겠다고 해 건희 손을 잡고 걸어갔다. 가는 길에 동무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예의 또 바짝 긴장하는 눈치다. 그 동무는 엄마 동무이기도 하다고 말했더니 조금 안심하는 기색이다. 건희가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랑 그 아줌마랑 아빠랑 같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고 몇 년 전에도 우리 집에 찾아와 같이 놀았다고 설명했다.
화실에 들어가니 이미 탕수육과 자장면을 시켜놓고 있었다. 동무는 점심을 먹고 나왔다는데 너무 많아 어떻게 다 먹나 걱정이 되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화실에 나오면 먹이라고 하며 탕수육을 반절 따로 덜어놓고 먹었다. 자장면을 먹다가 혀를 깨물었다. 야물게 깨물었는지 피도 나는 것 같고 금세 부풀어올랐다. 건희는 아줌마에게 적대적인 기색을 늦추지 않고 매 번 도전적인 말을 해대더니 나중에는 긴장을 풀고 어울리다 생고무로 만든 뱀 모양 볼펜과 도마뱀을 얻었다. 둘 다 생고무로 만들어서 0.5밀리미터밖에 안 되는 발가락을 잡아당기면 족히 20여센티미터로 늘어나니 건희가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만화책 '곤' 1권을 그 자리에서 보고 나머지 세 권은 빌려왔다. 스포츠 타올 세 개를 주기에 받아왔다. 건희는 동무네 화실에서 게임을 하며 동무와 놀고 오후 수업을 들어갔다가 나중에 만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소영이에게서 잘 있느냐는 문자메세지가 왔다. 문자 답장을 보냈다. 딸에게 문자를 보내는 맛이 색다르다. 집에 돌아와 다시마, 멸치, 표고버섯, 가다랑어 가루, 마늘을 넣어 국물을 끓여내고 국수를 삶아 넣어 잔치국수를 먹었다. 이르게 잠자리에 들었다. 건희는 잠이 쉬 들지 않는지 잠자리에서조차 여러 말을 걸어왔다.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함께 가줄 테니 아빠를 깨우라는 대답을 바람 빠지는 풍선에서 나는 소리처럼 힘겹게 내뱉으며 잠으로 빠져들었다.
첫댓글 아침부터, 그 자장면, 군침 돌게 하네요. ^^
저 집 자장면 맛나요.
남의 차 얻어타고 남의 별장에 놀러가던 길에 보았다. 그 중국집. 짜장면이 맛있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