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구호사역 경시 현상과 통하지 않나 하는 의혹이 일 때도 있다. 요즘처럼 동포들, 형제자매들이 가난에 쪼들리는 상황에서 산타에 대한 참된 재이해 내지 재조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산타클로스는 땅에 더 이상 현존하지 않으나 그 원조인 성 니콜라스(st. nicholas)는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로 예수님을 믿었기에 현재 천국에 가 있다. 그가 거주했던 터키 칼레에는 5세기경에 세워진 그의 기념교회당과 그의 벽화, 그의 유골을 보존했던 석관 등이 1800년대에 발굴돼 성지로 공개되고있다.
니콜라스에 관해 문서상으로 증명된 것은 거의 없고
다만 온갖 구전과 전설과 상상의 얘기로만 전해질뿐이다.
그에 관해 알려진 바가 적은 까닭은 그가 역사상 실재 인물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이름도 빛도 없이 선행을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니콜라스는 예수 크리스토의 탄생 때부터 불과 약200년후의 사람으로
카톨릭교회와 정교회에서 공히 가장 유명한 소(小)성자의 하나다.
시대로 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속(屬)사도 교부 급에 해당하는 인물인데도
개신교에선 아우구스티누스만큼 사랑 받지는 못하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니콜라스는 4세기경 지중해연안, 현재 터키의 칼레(데므레)인 소아시아 뤼키아(lycia) 지방 뮈라(myra)시의 성도였다. 사도행전 27:5절에 나오는 지명으로
사도 파울의 제3차 선교여행 때 잠시 거쳐간 곳이다(한글개역성경의 '루기아 무라').
아나톨리아(현 안탈랴)라고도 불린 지방의 일부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뤼키아의 항구도시 파타라(patara)에서 태어나
젊을 때 팔레스타인과 에집트를 여행하다 뤼키아로 돌아온 후
뮈라 감독(주교)이 됐다고 한다.
감독 직은 일정한 지방 교회들을 돌보는 목회자로
성경에 나오는 성서적인 직명이다. 헬라어의 '에피스코포스'로
영어로는 bishop, superintendent, supervisor, overseer 등 다양하게 번역된다.
주님 자신이 우리 믿음의 감독이시다(벧전2:25).
자선으로 명성을 떨친 그는 불행한 빈민들을 위해 '이적'을 행했다는 야화가 있다.
니콜라스의 전설은 3이란 숫자와 연결고리가 있다. 성삼위일체를 확인한 니케아회의도 그렇고, 에집트에서 비잔티움으로 오던 3척의 배로부터 곡식을 건져 뮈라 시를 굶주림에서 구조했다는 설, 결혼지참금이 없어 창녀가 될 뻔한 가난한 세 자매에게 몰래 금 자루를 던져준 것, 백정에게 몸이 잘려 소금에 절여진 세 어린이를 부활시켰다는 전설이 그렇다.
뮈라 교회에서 원로들의 모임이 열렸는데 차기 감독(주교)감으로 적합한 인물을 찾지 못해 기도에 들어갔다. 바로 그때 지중해에선 큰 폭풍이 일어났다. 선원들과 승객들은 사력을 다해 폭풍과 싸우고 있었다.
배를 가볍게 하려고 짐을 내던지기도 하며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공포에 질려있었다. 어떤 사람은 "니콜라스! 니콜라스!"하고 부르짖었다. 니콜라스로 불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승선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선실에서 길고 허연 수염의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갑판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폭풍을 멈추어 달라고 기도했다. 잠시 후 신기하게도 폭풍이 멈추고 배는 거의 난파상태로 뮈라 항구로 밀려들어갔다.
이 무렵 교회에서는 합심기도를 하던 장로들에게 환상과 함께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해졌다. 한시간 내로 교회로 기도하러 들어오는 첫 '니콜라스'가 차기감독이 될 것이란 내용이었다.
이 무렵 가까스로 항구에 도착한 배에서 짐을 내린 니콜라스가 가까운 마을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폭풍을 멈추어 모든 승객과 선원들을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였다.
교회 문이 서서히 열리자 안에서 기다리던 모든 장로들이 일제히 문쪽을 돌아다봤다. 흰 수염을 기른 품위 있는 사람이 들어와 맨앞 제대 쪽으로 걸어가더니 무릎을 꿇고 감사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기도를 끝내고 일어난 그에게 장로들이 다가가 물었다.
"성함이 뉘신 지요?"
"니콜라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감독님을 보내주셨다!"
원로들은 놀라는 니콜라스에게 당시의 전통이던 붉은 성의를 입히고 주교관을 씌웠다. 니콜라스는 너무도 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아 '이적의 감독'으로 불렸다. 대부분의 딴 사제와는 달리 니콜라스는 부유한 가정출신이었다. 하지만 부는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믿었다. 또 자기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인 줄 믿었다.
니콜라스는 터키의 관습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조기결혼이 상습화된 당대에 결혼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한 빈가의 소녀들이 노예 또는 창녀로 팔려 가는 악습이 있었다. 그는 갖고있는 재산 대부분을 그런 빈민가에 나눠줄 뿐더러 두루 다니며 독지가들로부터 금을 모았다.
12월6일 저녁이었다. 어둠 속에 금전을 채운 작은 자루들을 들고 지참금 없는 집들을 찾아가 창문으로 자루를 하나씩 던져 넣었다. 당대 의상의 일부였던 양말을 말리러 널어놓은 화덕 가까이 던지면 어떤 경우 양말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성탄절 이브에 벽난로에 양말을 걸어놓는 관습은 그렇게 해서 생겼다.
이튿날 금전자루를 발견한 가족들은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고 딸들은 결혼할 수 있게 됐다. 니콜라스의 선행은 매년 빠짐없이 치러졌지만 아무도 그인 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345년(또는 352년) 12월6일에 숨져 뮈라의 자기 교회에 묻혔는데 죽기 불과 얼마 전에야 빈민의 은인인 정체가 '탄로'났다.
6세기경 그의 성묘가 유명해지자 1087년 5월9일 이탈리아의 뱃사람들이 뮈라에서 그의 유골을 훔쳐 이탈리아 바리로 옮겨가는 통에 더 유명해졌고 바리는 순례명승지의 하나가 됐다. 이 11세기의 유품은 바리의 '산 니콜라 바실리카'에 지금도 남아있다. '바리의 니콜라스'라고도 불리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9세기에 로마카톨릭교회에 의해 시성(canonized)돼 '성 니콜라스'로 호칭되기 시작했다. 라틴계를 비롯한 구교권에서 매년 12월6일은 '성 니콜라스의 날'로 지켜진다. 그의 선행이 매년 대강절인 12월에 행해졌기에 자연스럽게 성탄절 관습과 연결됐다.
중세 때 니콜라스 숭앙 내지 숭배 관습이 폭넓게 확산됐다. 6세기 동로마황제 유스티니아누스1세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 세운 교회를 비롯한 유럽의 수천교회들이 그의 이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캐럴 '고요한 밤'이 작곡되고 처음 연주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그 오베른도르프의 성당도 그의 이름을 땄다.
니콜라스 이야기가 유럽으로 두루 퍼지면서 12세기에 프랑스수녀들이 12월5일 '성 니콜라스 이브' 때 매년 하룻밤에 가난한 가족들의 어린이들을 방문해 평소 먹지 못하던 열매와 건과 등을 남겨두는 선행을 베풀었다.
러시아와 모스크바 시, 그리스, 프리부르그, 스위스, 아풀리아, 시칠리아 등의 '수호성인'이 됐고 그밖에도 자선단체와 조합, 어린이들과 미혼소녀, 선원들, 상인들, 심지어 빵집과 전당포의 수호자로 통했다. 수호자 숭배는 물론 구교 관습이며 비성서적이다.
영국에선 '파더 크리스마스'(성탄교부)로 불렸고 프랑스에선 '파파 노엘'이 됐다.
그에 관한 전설은 중세 예술작품과 종교극의 흔한 주제였고
지금도 소년주교(boy bishop)를 뽑아 '성 무죄자의 날'(12월28일)때까지
통치하게 하는 풍속이 남아있다.
니콜라스가 예수님 자신보다 중시되는 경향마저 생기자 개신교에 의해 도전 받기 시작한다. 마르틴 루터는 참된 성탄메시지가 성 니콜라스 전통에 의해 상실됐다고 개탄했다.
종교개혁 후 유럽의 모든 개신교국가에서 니콜라스 컬트가 사라졌다.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는 양쪽 모두를 살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네덜란드-독일 개신교는 아기예수가 성탄절의 표준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루터가 주도한 독일에서는 12월6일 성니콜라스축일을 폐지하는 대신 그의 이미지와 그리스도를 결합, 성탄이브에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크리스트킨트라인('christkindlein')으로 대체됐고 이것은 다시 산타 비슷한 '크리스 크링글레'가 됐으니 아이러니다.
니콜라스는 벨기에 등 북구에도 널리 알려졌다.
네덜란드에서의 니콜라스 전통은 검둥이 페터와 함께
스페인에서 항해를 와 돈이 없어 못 사먹는 견과와 사탕을
네들란드 어린이들의 신발에 담아 나눠줬다는 '신터클라스'(sinter klass) 전설이
전해져왔다.
네덜란드 식민지개척자들이 17세기 미국 뉴암스테르담(현 뉴욕시)으로 도입한 신터클라스 전통이 '산타클로스'란 이름아래, 나쁜 아이는 벌주고 착한 아이에겐 선물을 주는 마술사에 관한 북구전설과 혼합돼 19세기 미국에서 가장 구체화됐고
특히 20세기 상업문화와 결탁됐다.
1822년, 클레멘트 무어는 자신의 6자녀에게 선물을 주는 존재로서의 니콜라스를
시로 노래하면서 처음으로 '산타클로스'란 용어를 썼다.
시 '성 니콜라스의 방문'은 "성탄절 전날 밤이었죠"('twas the night before christmas…)란 유명한 시구로 시작된다. 무어는 유니온신학교 교수인 신학자였고 아버지가 성공회주교였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무어는 네덜란드 '신터클라스'(sinter klaas)에서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는 산타의 썰매를 끄는 사슴얘기를 꺼내며 사슴에다 이름을 붙이고 하늘을 날게도 했다. 아마도 성 니콜라스가 마차를 타고 지붕 위를 나는 네덜란드 해외이주민들의 꿈을 적은 워싱턴 어빙의 책(1809년)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거기에다 주간 '하퍼즈'지의 만화가 토마스 내쉬가 자기 그림에서 산타를 빨간 옷을 입은 뚱뚱하고 쾌활한 할아버지로 묘사했다.
20세기초 산타는 백화점과 통신주문 회사를 '공식오피스'삼아 상업화됐고
우체국은 총본부인 '북극'으로 보내는 어린이들의 편지로 넘쳐나면서
급속히 세속화돼갔다.
마치 산타가 전설 속 난쟁이들을 부리며 어린이들의 비위나 맞춰주는
북극의 두목(?)인 것 처럼.
본래의 니콜라스의 영성과 기도, 헌신과 구호사역과는 거리가 먼
'상업의 신'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성도 니콜라스의 삶은 선교와 선행이 병행됐던 초기교회의 노선과 상통한다.
교회는 믿음과 언행이 일치했던 그의 삶을 본받고 기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회나 가정에서 산타클로스의 옷차림을 하고 선물을 나눠주는 것은 과연 어떨까?
크리스토가 하나님의 선물이고
그분 자신이 복음과 구원의 메시지인 성탄의 주인공이며,
산타클로스는 한 모범적인 성도로 크리스토의 일꾼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음을 상기시키는 한은 괜찮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