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비멜렉의 죽음
삿 9:50-57
50 아비멜렉이 데베스에 가서 데베스에 맞서 진 치고 그것을 점령하였더니
51 성읍 중에 견고한 망대가 있으므로 그 성읍 백성의 남녀가 모두 그리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간지라
52 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 공격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그것을 불사르려 하더니
53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54 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
55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 각각 자기 처소로 떠나갔더라
56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57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삿 9:50-57 / [아비멜렉의 최후] 아비멜렉은 데베스로 가서 그 성읍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51) 그 성읍 한가운데는 매우 튼튼하고 견고한 망대가 서 있었다. 그 성읍 사람들은 여자건 남자건 할 것 없이 아비멜렉의 공격을 피하려고 망대로 들어가서는 문을 걸어 잠그고 그 꼭대기로 모두 올라갔다. 52) 그러자 아비멜렉은 그 망대를 무너뜨리려고도 하였고 불을 지르려고도 하였다. 53) 그때 어떤 여인이 망대 위에서 맷돌짝을 아비멜렉 머리 위로 집어 던졌다. 아비멜렉은 그 맷돌에 맞아 머리통이 깨어지고 말았다. 54) 그러자 아비멜렉이 서둘러 자기 호위병을 불렀다. `어서 칼을 빼어 나를 찔러 죽여라. 여인네가 집어 던진 맷돌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구나.' 호위병이 아비멜렉을 칼로 찌르자 그가 곧 숨을 거두었다. 55)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는 모두 밖으로 나와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56) 이렇게 아비멜렉이 자기 형제 70명을 살해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지은 죄를 하나님께서 갚아주셨다. 57) 또한 세겜 사람들이 지은 죄도 하나님께서 갚아 주셨다. 여룹바알이라고도 불리는 기드온의 아들 요담이 퍼부은 그 저주가 그대로 이루어졌고, 그 마음속에 맺혔던 한을 하나님께서 풀어 주셨던 것이다.
아비멜렉이 데베스 망대 앞에서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고 무기를 든 청년의 칼에 죽었습니다. 이로써 자기 형제 70명을 죽인 아비멜렉과 이에 동조한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께서 갚으셨습니다. 요담의 예언이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이 죽은지라(50-55) 엘브릿 신전의 보루에 불을 놓아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인 아비멜렉은 세겜 성에서 15km 떨어진 데베스 성을 점령했습니다. 성읍 백성들은 성읍에 있는 견고한 망대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아비멜렉은 세겜 성 때처럼 망대에 불을 놓아 도망간 자들을 죽이려 망대 문에 가까이 갔습니다. 그러나 이름 모를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망대에서 내려 던져 아비멜렉의 두개골을 깨뜨렸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의 뜻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할 때 한 여인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악인은 마지막 순간에도 자기 체면과 자기 자존심에 집중합니다. 아비멜렉은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에게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하지 않도록 칼로 찌르게 합니다. 악인이 심판받는 것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시나무 같은 아비멜렉을 쫓던 이들은 그늘 없는 곳에서 쉴 곳을 찾지 못하고 각각 처소로 떠나갔습니다.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갚으셨고(56-57) 하나님은 자기 형제 70인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아비멜렉과 이에 동조하던 세겜 사람들의 악행을 이같이 갚으셨습니다. “머리에 갚으셨으니”는 하나님의 철저하고 완벽한 심판이 시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를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삼하 3:39; 잠 13:5). 그리고 그 이름을 영원히 지우십니다(시 9:5). 따라서 우리는 공의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비멜렉의 최후는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왕이 되어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결국입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세우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 삶의 왕으로 섬길 때, 예수님은 당신의 구원자, 당신의 안식되시며, 당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남아프리카에는 ‘스프링 벅’이라는 산양이 살고 있는데 평소에는 대여섯 마리 정도 모여서 살다가 어느 시기에는 갑자기 한 곳에 모여들기 시작하여 수천마리의 대 집단을 이룹니다. 이 양떼들은 처음에는 풀을 뜯어 먹으면서 천천히 행렬로 이루어 나가는 여유를 보이지만, 앞서가는 양들이 대부분의 풀을 먹어 치워 버리므로 뒤에 따라가는 양들은 풀을 차지하기 위해 앞 다툼을 하게 됩니다. 처음의 목적을 잊어버린 채 필사적으로 질주하는 양떼들은 마침내 사막을 건너 바닷가에 이릅니다. 어떤 신호도 귀 담아 듣거나 눈여겨 볼 여유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수많은 산양의 시체들이 바닷가에 떠오른 채 파도는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 설 교 >
모든 악행을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삿 9:50-57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아비멜렉의 비극적인 최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먼저, 50절에 “아비멜렉이 데베스에 가서 데베스에 맞서 진 치고 그것을 점령하였더니”라고 말씀합니다.
데베스는 세겜 북동쪽 약 16km지점에 있는 성읍으로 세겜과 함께 아비멜렉에게 반역한 성읍입니다.
그래서 세겜을 정복한 아비멜렉은 쉬지 않고 데베스를 점령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51절에 성읍 사람들은 죽음을 면하고자 크고 넓게 만든 견고한 망대위로 도망하여 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데베스 사람들은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들에게 행한 악행을 듣고 그의 잔인함을 두려워하여 망대로 피신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아비멜렉은 망대를 공격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가서 세겜 망대에 있던 사람들에게 한 것처럼 그들을 불로 태워 죽이려고 했습니다.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 1,000명을 불로 태워 죽이고서도 모자라 또다시 그 짓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악인은 자신의 분이 풀릴 때까지 악행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을 상대할 때 이러한 악인들의 특징을 기억하여 상대를 해야 합니다.
2. 그런데 53절에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22-24에서 살펴보았듯이 지금의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악행을 심판하시기 위해 허락하신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아비멜렉을 심판하실 때 용맹스러운 용사를 통해 하신 것이 아니라 한 연약한 여성을 통해 심판하셨습니다.
가나안 왕 야빈이 무려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학대하였을 때 여 사사 ‘드보라’를 세우시고 이름 없던 여인 ‘야엘’을 통해 심판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 또 다시 이름 없는 한 여인을 통해 악한 아비멜렉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같은 섭리는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언제든지 다를 수 있음을 강조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꼭 세상의 이치에 맞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루어질 때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은 강한 군사력이, 더 큰 권세를 가진 사람이, 더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일반적인 법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역설적인 방법으로 일을 이루어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으로 강하고 교만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80세 노인 목자인 ‘모세’를 부르셔서 애굽 왕 바로를 심판하신 일, 어린 목동 ‘다윗’을 부르셔서 블레셋의 용사 골리앗을 심판하신 일, 배운 게 없는 어부들과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던 세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셔서 교회를 세우신 일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일반적인 세상의 법칙대로 이루어지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우리가 제일 자신없어 하는 약한 곳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곳곳에 연약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크신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소개함으로써 이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반 세상의 법칙과 원리의 범주에 갇혀서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눈을 버리고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기대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약하고 부끄러운 것을 감추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것까지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내어드리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여러분의 약함이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자신이 초라해 보이십니까?
다른 사람보다 가진 것이 없어 낙심이 되십니까?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약한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그 약한 것을 사용하셔서 큰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이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면서 자신의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심으로 ‘약할 그때에 오히려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54절에 “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비멜렉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는 모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은 자신의 악행을 벌하시기 위한 하나의 심판 과정이었는데,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순간에도 거짓된 명예를 추구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여러분, 회개는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힘이 있습니다.
회개는 죄의 구덩이에서 우리를 끌어 올려주는 생명줄입니다.
그러나 깊은 악에 빠지게 되면 회개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죽어가던 그 순간에서조차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기도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잘못된 자만심은 겸손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에 대한 자랑만 늘어놓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활에 젖어 있다 보면 결국 아비멜렉과 같이 하나님을 잊고 자기의 체면과 명성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만하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체면이나 자존심보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겸손한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늘의 별과 같이 높여 주시는 그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비멜렉이 세겜을 정복하고 더욱 교만해져서 악행을 일삼을 때, 이름없는 한 여인을 통해 그의 악행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어가던 그 순간에도 회개하지 못하고 거짓된 영광을 꾸미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비멜렉의 삶을 교훈으로 삼아 악을 경계하되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오직 겸손으로 서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회개는 죄의 구덩이에서 우리를 끌어 올려주는 생명줄임을 꼭 기억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어떤 씨앗을 뿌리는가
삿 9:50-57
요담의 저주가 아비멜렉과 세겜사람들에게 응답되었다.
특별히 오늘의 표현속에서 '하나님께서 갚으셨다'라는 표현이 참 깊이 다가온다.
나의 불순종의 악행들을 생각해보면 섬뜩하고 무섭기도 하며 또 반대로 하나님께 순종한 나의 삶을 보며 그것을 갚으실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결코 그냥 넘어가시는 분이 아니시다.
불순종은 그 대가를 지게 하시고 순종은 열매를 맺게 하시고 누리게 하신다.
오늘 나의 삶은 이 두 가지를 선택하는 시간이다.
오늘의 이 말씀을 기억한다면 나는 순종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늘 악한 습관과 연약함이 이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고 또다시 불순종으로 이끌때가 참 많다.
새롭게 시작하게 하시는 하루 속에서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이 중심을 지키는 한 주가 되길 기도한다.
오늘 나는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는지...
순종의 씨앗은 열매를 맺게 한다.
불순종의 씨앗은 죄의 대가를 지게 한다.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긴다.
하나님은 부재하시는가?
삿 9:1~57 / 이병권목사
여러분, 하나님이 부재하실까요? 하나님이 너무 바빠서 혹은 특별한 일이 생겨서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달리 부재중일 때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론으로 배우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 다를 때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믿고 있지만, 체험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다른 곳으로 출장가신 것처럼,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미뤄두고 잠시 쉬고 계신 것처럼, 하나님이 다른 일에 바쁘셔서 내 삶에 벌어지는 일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어떻게 하나님이 이런 일을 그냥 두고 보실 수 있을까?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이런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 그런 의문을 가질만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기드온의 막내아들 요담입니다. 요담은 70명이나 되는 자신의 형제들을 하루아침에 모두 잃어버립니다. 자신만 살아남았고 집을 떠나 도망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한 요담이라면 충분히 이 질문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럼 이 질문을 잠시 마음에 담아두고 요담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에 대한 교훈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1) 기드온이 첩에게서 낳은 아들, 오늘 본문의 중심인물이 되는 아비멜렉이 등장합니다. 아비멜렉은 외가친척들이 있는 세겜으로 가는데,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와서 처음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곳이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축복과 저주를 선포했던 곳입니다. 세겜은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곳이고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곳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들은 이 세겜에서 벌어집니다.
아비멜렉이 세겜에 있는 외가친척들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2) 아비멜렉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세겜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친척들의 도움을 구합니다. ‘너희가 기드온의 아들 칠십 명으로부터 다스림을 받는 것보다 너희와 피를 나눈 내가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낫지 않냐‘하고 제안합니다. 자신이 혈연관계임을 부각시키면서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백성의 입장에서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이 여러 명으로 있는 것보다 한 명인 것이 더 나은 일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외가친척들은 그의 말을 따릅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먼저 세력을 얻기 위해 세겜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비멜렉을 말하며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을 향하도록 합니다.
마치 선거 유세를 하는 것처럼 아비멜렉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친척들을 동원해서 자신의 출신지역에서 근거지를 마련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맥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제가 정치를 한다고 선거에 나간다면 여러분은 저를 뽑지 않겠습니까? 제가 정치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든 어떤 공약을 말하든 우선 아는 사람이니까 저를 지지하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아비멜렉과 그의 친척들의 전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우리 형제라’ 그리고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아비멜렉은 외가친척의 도움을 입어 세겜 사람들의 마음을 얻습니다. 그런 후에 아비멜렉은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자들을 제거합니다.
누가 방해가 될까요? 아비멜렉의 이복형제들, 어머니는 다르지만 같은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70명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첩의 자녀이기 때문에 출신의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죽이려고 합니다. 혼자서 이 일을 할 수 없기에 사람들을 모으는데 우상에게 바쳐진 재물, 은 칠십을 얻어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용병으로 삽니다. 쉽게 생각하면 돈을 주고 불량배들을 고용한 것입니다. 돈의 출처도 문제이고 그 돈으로 하는 일도 문제입니다. 아비멜렉은 더러운 돈으로 더러운 사람을 사서 더러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5) 아비멜렉의 악함을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는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죽입니다. 그 중에 막내 혼자만 숨어서 목숨을 구하지만, 다른 형제들은 모두 한 바위 위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모두 한 바위 위에서 죽었다는 것은 형제들이 아비멜렉을 반대하면서 싸우다가 죽거나, 혹은 도망가는 중에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형제들을 붙잡아 특별한 곳으로 끌고 가서, 그곳에서 그 모두를 처형한 것입니다.
기드온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였지만,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더 나아가 자기 형제들까지 잔인하게 죽입니다. 이렇게 아비멜렉은 형제들의 피를 흘림으로 왕이 되었고,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한 공동체를 이끄는 리더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리더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 공동체의 미래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자격 없는 사람이 리더가 되었을 때는 공동체 전체에게 고통스러운 결과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리더를 세우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괜찮을까요? 아비멜렉은 왕이 될 만한 사람일까요? 스스로 왕이 되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형제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에서 우리는 아비멜렉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자질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 아비멜렉이 왕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살아남은 기드온의 막내아들 요담이 나오는데, 그는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세겜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먼저 세겜 사람들의 모습을 나무에 빗대어서 우화로 말하는데,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일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꼬집어 말한 것입니다.
우화의 내용은 나무들이 자신의 왕을 세우려고 왕이 될 만한 나무들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세 종류의 나무가 나오는데, 이스라엘에 재배되는 주된 나무들입니다.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입니다. 이 세 나무는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본분이 있기에 그것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 우쭐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무들은 가시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달라고 합니다. 가시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없는 무가치한 나무였습니다. 30에서 60센티 정도 자라는 나무였기에 기본적인 그늘조차도 줄 수 없었고, 불에도 잘 붙어서 다른 나무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위험한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나무들은 이러한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요담이 말하는 나무 이야기에서 아비멜렉이 가시나무와 같은 자입니다. 그리고 요담은 나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말하는데,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만일 아비멜렉을 너희 왕으로 삼은 것이 잘한 일이라면 너희가 아비멜렉의 통치로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잘한 일이 아니라면 너희와 아비멜렉은 마땅한 보응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그에 의해 불탈 것이요, 그는 너희에 의해 불탈 것이다.‘
요담은 이렇게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저주하고 도망갑니다. 지금 같으면 스마트 폰으로 글을 올리며 비난할 텐데 이때는 그렇게 할 수 없어서 큰소리로 직접 말하고 얼른 도망가야 했습니다.
그럼 이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요담이 세겜과 아비멜렉을 저주한 결과 큰 재앙이 찾아왔을까요? 하나님이 이 악한 일에 대해서 심판을 시작하셨을까요? 아닙니다. 당장이라도 큰 일이 생길 거 같았지만 아무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악에 대해서 그냥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일 없이 시간은 흘러갑니다. 아비멜렉은 문제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삼 년에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22-23) 하나님이 악한 영을 사용하셔서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고 다른 사람을 따릅니다.
가알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데(26) 세겜 사람들이 가알을 신뢰하여 그를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가알은 대놓고 아비멜렉을 저주하며 자신이 아비멜렉과 싸우겠다고 허세를 부립니다. 그가 술에 취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 백성이 내 수하에 있었더라면 내가 아비멜렉을 제거하였으리라 하고 아비멜렉에게 이르되 네 군대를 증원해서 나오라 하니라”(29)아비멜렉이 없는 자리에서 아비멜렉을 부르며 군대를 모아서 오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술에 취해서 정신 못 차리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의 신복인 스불은 이 모든 일들을 아비멜렉에게 보고 합니다. 아비멜렉은 스불이 알려준 대로 군사들을 데리고 매복해 있다가 아침 해가 뜰 때 일어나 가알을 공격합니다. 결국 허세를 부리던 가알은 패하여 세겜에 쫓겨났고, 아비멜렉은 세겜 성읍으로 쳐들어가 백성들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밭에 소금을 뿌립니다. 소금을 뿌리는 것은 다시 작물을 심을 수 없도록 저주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에게 자신을 배신한 대가를 단단히 치르게 합니다.
또한 아비멜렉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세겜 망대에 있던 사람들이 우상의 신전으로 몸을 피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갑니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군사들을 명하여 나뭇가지를 가지고 오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신전에 불을 지릅니다. 그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 천 명이 됩니다. 아비멜렉의 잔인함을 또 다시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런 후에 아비멜렉은 세겜 가까이 있는 데베스라는 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똑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불에 태워서 죽이려 합니다. 사람들이 망대로 몸을 피하고 있을 때, 그곳에 불을 지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망대 위에 있던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던졌고, 아비멜렉은 그 맷돌에 맞아 머리가 깨집니다.
장난하는 것처럼 사람의 목숨을 빼앗던 아비멜렉, 그도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장난하는 것처럼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인생을 마치게 된 것입니다.
그의 최후입니다. “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54) 여자의 손에 의해 죽는 것을 수치로 여겨 무기든 자에게 자신을 죽이도록 했지만, 그의 의도와는 달리 모든 사람이 아비멜렉의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여인의 손에 죽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었고 오늘날 우리도 그의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마26:52)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형제들을 죽이는 악을 행했고, 그 결과 자신도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에 결론입니다.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56-57)
하나님이 아비멜렉이 행한 악행을 심판하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심판하셨습니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심판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요담의 저주처럼 아비멜렉에게서 나온 불이 세겜을 태웠고, 반대로 세겜에서 나온 불이 아비멜렉을 태워버렸습니다.
요담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저주에 대해서 침묵하시는 것 같았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모든 자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우리도 때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악에 대해서 가만히 계시는 걸까? 왜 심판하지 않으실까? 하나님이 이 악에 대해서 모르고 계신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고, 악에 대해서 그냥 눈 감아 주시는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눈에는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그 뜻대로 역사하시며 악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아비멜렉이 악을 행하고 왕이 되어 잘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도와 악을 행했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거리낌 없이 악을 행하고 반복해서 악을 행할 수 있는 것은 그 악에 대해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을 때입니다. 하지만 악에 대해서 무시무시한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악을 행한 후의 결과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악을 멈출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해서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에 대해서, 나 스스로를 살피며 죄에 대해서 경계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상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기대하며 내가 원수 갚으려는 욕심과 정죄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죄에 대해서, 세상의 모든 악에 대해서 복수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때로 나에 대해서 악을 행한 사람들을 향해 내가 그 악을 갚기보다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답답하게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심판에 대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시간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집니다.
요담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저주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3년의 기다림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악에 대해서 당장 심판이 임하기를 바라고 당장 뭔가 바뀌고 정리되고 공의가 이루어지고 선이 이기는 것을, 그런 결과를 보기 원합니다. 기다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뜻을 행하시면서 늘 기다림을 경험하도록 하십니다.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하십니다. 믿음으로 기다리고 참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때를 우직하게 기다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다리며 인내한다면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 각자에 대해서 하나님이 기다리지 않으시고 바로바로 심판하셨다면 우리가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셨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분의 때를 위해 침묵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임재하시고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하나님은 그 선하신 뜻에 따라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보는 눈이 필요하고, 믿음으로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본문을 생각해보십시오. 믿음 없이 이 이야기를 본다면 어떨까요? 아비멜렉이 권력에 눈이 멀어 세겜 사람과 연합했다가 그 연합이 깨져서 결국 서로 다투다가 비참한 결과를 맞은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운이 없어서, 흔한 말로 재수가 없어서 어떤 여자가 던진 맷돌에 우연히 맞은 것뿐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오늘 말씀에는 그런 오해가 없도록 하나님이 가려진 커튼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누가 이 일을 하셨습니까?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이 일을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23-24, 56-57).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 속에서, 일련의 연속되는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은 그 뜻에 따라 심판을 행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위해 하늘에 벼락이 떨어지게 하지는 않으셨지만, 한 여인을 통해 하늘에 맷돌이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커튼에 가려진 것처럼 믿음이 없어서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갈 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 뜻을 이루어 가시며 하나님의 심판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모든 악에 대해서 온전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훗날 그 앞에서 어떤 악도 변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심판자로서 완벽하게 심판하시고 모든 악은 그 앞에 굴복하며 떨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우리는 그 심판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잘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그 무서운 심판에서, 그 영원한 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습니다. 세상 끝 날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심판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 은혜를 기억할 때 은혜를 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여러분, 하나님은 반드시 악에 대해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어떤 모양이든지 악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때로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복수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여러분의 그 마음을 아십니다. 주님이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주님께 맡기고 무엇보다 주님의 위로를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삿 9:50~57 / 새로운우리교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은 “비록 사실은 그러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라는 뜻으로, 어떠한 상황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거나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어떤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온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가 아님에도 사사기에서 매우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그렇다면 아비멜렉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토록 중요하며, 또한 아비멜렉의 이야기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첩이 낳은 아들로, 세겜에 살았습니다(삿8:31).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다른 아들 70명과는 달리, 상속받을 것 하나 없는 서자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비멜렉은 자신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작은 하나라도 가지려고 했던 치열한 삶을 살게 되었고,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왕이 되는 과정은 고대 사회의 흔히 볼 수 있는 왕권찬탈 과정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세겜 사람들을 선동하여 지지를 얻게 되었고, 세겜 사람들은 바알의 신전에서 은 70개를 아비멜렉에게 주었고, 아비멜렉은 이 돈으로 사람들을 사서 이복형제 70명을 한 바위 위에서 한꺼번에 죽이고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왕이 되었지만 아비멜렉의 왕권은 바알의 신전에서 나온 돈과 바위 위에서 70명의 형제들을 죽인 피 위에 세워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아버지 기드온은 왕이 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척이라도 했던 것에 비하면, 아비멜렉은 그런 척조차도 하지 않았고, 그 어떤 하나님의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왕이 된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스리고 있을 때 세겜에서 가알이라는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가알은 세겜 사람들과 힘을 합쳐 아비멜렉을 몰아내기로 합니다. 하지만 가알의 반란을 알게 된 아비멜렉은 가알의 세력을 급습했고, 결국 가알은 아비멜렉에게 패배하게 됩니다(삿9:39~45).
그런데 아비멜렉은 자신을 배반한 세겜을 공격했고, 수세에 몰린 세겜 사람들이 세겜 망대에 모여든 것을 알게 된 아비멜렉은 망대 아래 나무를 쌓고 불을 질러 그 안에 있던 남녀 약 천여 명을 학살하게 됩니디(삿9:46~49). 아비멜렉은 세겜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세겜 북쪽에 있는 데베스를 치게 되고, 데베스 사람들 역시 살기 위해 데베스 망루에 모여들게 되었고, 세셈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비멜렉은 데베스 망루를 불태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데베스 사람들마저 세겜 망루에서 일어난 학살과 같은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순간, 이름 모를 한 여인의 용감한 행동으로 아비멜렉은 허망하게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삿9:53~54). 이로서 형제들 70명을 죽이고, 세겜 망루에서 천여 명을 학살하며 스스로 왕의 자리를 지키려고 했던 아비멜렉은 모든 쿠데타를 진압하고, 세겜을 완전히 점령함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더욱 더 견고하게 서려고 했던 자신의 꿈은 마지막 순간에 모두 무너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의 이야기는 기드온 이야기의 결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드온은 자신 스스로가 고백한 것처럼 너무나 부족하고, 연약하고, 지극히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실수도 많이 하고, 한 끗 차이로 아쉬운 모습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기드온을 사용하셔서 13만5천 명의 대군을 앞세운 미디안을 이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을 승리의 용사로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에 비해 너무나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서자였지만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야망이 컸고, 꿈을 이룰 수 있었던 능력자였을 뿐만 아니라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아비멜렉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뛰어난 힘과 능력을 가진 아비멜렉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악행을 이름도 없는 한 여인이 던진 맷돌 하나로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의 연약함을 사용하시기도 하시고, 아비멜렉의 악행을 심판하시며, 그의 힘을 멈추게도 하시는 힘은 기드온에게나 아비멜렉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잘났든 못났든,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힘이 있든 힘이 없든,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든, 나이가 많든 나이가 적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살다 보면 승리할 때도 있고, 패배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승리했다고 교만해져서도 안 되고, 패배했다고 좌절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 삶의 주권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하나님은 나의 나 된 것이 어떠하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하나님의 현세적인 심판
삿 9:22-25, 50-5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유대인 한 명이 랍비를 찾아왔습니다. 자신에게는 40년 동안 사귄 죽마고우가 있는데, 막대한 유산을 받은 후 부터는 사람이 너무 달라졌다고, 오랜 친구인 자신을 모른 척 한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러자 랍비는 “이리 오게 창밖을 보게나. 무엇이 보이지?” 했지요. 나무가 보이고 사람들이 보이고 차가 지나가는 게 보인다고 유대인이 말하자, 랍비는 다시 말합니다. “그런가? 그럼 이번엔 이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안을 들여다보게나. 뭐가 보이지?” “저 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유대인이 말하자, 랍비는 그에게 이렇게 일렀습니다. “그런 거라네. 사람이 돈을 가지고 있지 않는 동안은 창밖을 내다보는 것과 같이, 무엇이나 잘 보이지만, 웬만큼의 돈을 가지면 유리 뒤에 은을 바른 것 같이 자기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는 거라네.” [탈무드]에서 전해지는 이 이야기에서 랍비가 말하는 건, 다만 재물에 대한 욕심만이 아니라, 온갖 번뇌 집착 자기 연민과 이기심 같은 것들이겠지요. 이런 것들이 은박이 펴진 거울처럼 창을 가리면, 다른 사람은 못 보고 자신만 바라보게 된다는 얘기일 겁니다. 나는 지금 창밖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지, 은을 바른 거울 보듯 나 자신만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아주 좁은 곳이라고 해도, 그리고 창이 아주 작은 거라고 해도, 밖에 무엇이 보이고 어떤 일들이 일어나며, 어떤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바라보려고 노력할 수 있을 겁니다. 고통이나 고난의 종류 또 삶에서 겪는 어려움 또한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지금의 나보다 어렵고 힘든 일을 바라보는 것도, 거울이 아닌 작은 창을 통해서만 가능한 거겠지요.
2. 성경은 두 종류의 심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 본문에서처럼 현세적인 심판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끝날에 받게 되는 심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현세적 심판의 한 예라 하겠습니다. 기드온의 자녀들 69명이 한 자리에서 죽임을 당할 만큼의 끔찍한 사건은, 그 형제들에게 음으로 양으로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서자 아비멜렉의 쿠데타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어제 본문은 쿠데타의 전말(顚末)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기드온의 70인의 아들 중 한 사람인 요담이 아비멜렉의 눈을 피해서 브올에 머물고 있었는데, 요담은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그를 도운 세겜 사람들도 심판하실 것이라 예언을 하였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과 세겜의 어른들 사이를 이간질해서 아비멜렉을 배신하게 하셨고, 이즈음에 에벳의 아들 가알이 아비멜렉을 물리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나섭니다. 결국 아비멜렉과 가일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으나, 가일은 아비멜렉의 싸움 상대가 되지 못하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세겜의 어른들 역시 피신 간 세겜 성루에서는 천 명가량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성루 싸움에서 완전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던 아비멜렉은 성루의 문에 불을 지르려 할 때, 한 세겜 여인이 던진 맷돌 짝에 머리를 맞아 죽게 됩니다. 그 때 자신의 부관에게 자신의 칼을 뽑아 죽일 것을 명하고, 최후를 마치게 됩니다. 요담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죽자 이스라엘은 다시 왕이 없던 평온했던 시절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늘 심판만이 아니라 현세적인 심판을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물론 심판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선하신 심판과 무서운 심판이 있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