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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부제: 제안서를 다시 설명하다.
주제1: 법(法)과 표(票)와 시간(時間)은 과연 우리편인가?
주제 1의 글 순서
가. 서론
1.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
2. 크리스천은 가치지향적인 집단이다.
3.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나. 본론
1. 법(法)은 우리편인가?
A. ‘법’의 생리
B. ‘법’은 승패(勝敗)의 실질적 요인인가?
2. 표(票)는 우리 편인가?
A. 투표권의 허(虛)와 실(實)
B. 공동의회의 ‘소집가능성’ (召集可能性)
C. 공동의회의 ‘공정성’ (公正性)
D. 공동의회의 ‘효용성’ (效用性)
3. 시간(時間)은 우리 편인가?
A. 필자의 반론
B. 필자의 주장
4. 그러면 우리에게 긍정적 요소는 무엇인가?
A. 우리의 고난은 낭비(浪費)가 아니다.
B. 우리는 억울(抑鬱)하지 않다.
다. 결론
가. 서론
1.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
교회에도 죄인인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보면 분쟁이 생길 수 있다. 더욱이 교회 내로 몰래 들어온 ‘가라지’들이 종종 문제를 야기하는 현실에서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분쟁이 불가피해지게 된다. 따라서 “어떻게 분쟁을 해결해 나가느냐” 하는 것은 분쟁을 예방하는 만큼이나 중요하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요 17:16) 구별(區別, separated)된 성도다. 따라서 우리가 성도(聖徒, saints)로서 교회 분쟁의 해법을 모색할 때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자세와 방법으로 싸울 수 없다는 말에는 모든 분들이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는 싸움을 통해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본(本)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교회의 분쟁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알릴 수 있는 최적(最適)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사람의 진면목(眞面目)은 위기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위기적 분쟁에 임해서도 세상사람들에게 그들과는 다른 성화(聖化)된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기독교인들이 자기들과 다른 점이 없다면 예수를 믿을 이유가 없다. 기독교인들에게 큰 모욕은 “그 놈이 그 놈이다”란 말이다. 더 큰 모욕은 “예수 믿는 놈들이 더하더라”는 말이다. 즉 평소에는 잘난 척하더니 뚜껑을 열어보니 자기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고 도리어 더 실망스럽더라는 뜻이다.
2. 크리스천은 가치지향적인 집단이다.
크리스천은 ‘성과지향적인 집단’이 아니라 ‘가치지향적인 집단’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동기부터 시작하여 과정상의 수단과 방법을 통해 나타나는 가치(Value)가 목표성취만큼이나 중요하다. 그것은 ‘겉으로만 보이기 위한 형식’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를 말한다. 물론 그 모든 가치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이 당연한 진리를 잊고 산다. 특히 우리에게 불편함을 주는 ‘말씀’들을 장롱 속에 잠깐 모셔두어야 할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여길 때도 있다.
솔직히 말해 필자는 지난 번 필자의 제안서에 대한 반론의 이유들을 보고 놀랐다. 그것은 반대의견의 주된 이유가 실정법과 교회법 상의 문제로 인하여 우리에게 미칠 불리한 결과를 우려한다는 뜻이었다. 이 말은 뒤집어보면 실정법을 통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며, 또 한편으로는 공동의회 투표권을 행사하여 친오파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 된다. ‘강한 확신’을 하고 있든지, 아니면 최소한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물론 그런 확신이나 기대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단지 그런 법적 제도적 수단을 최우선시(最優先視)하는 자세, 즉 우리의 모든 전력(戰力)을 거기에 다 쏟고 따라서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으로서 희생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직되고 편협된 발상(發想)을 우려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과’를 위해서는 ‘가치’를 유보시킬 수도 있다는 것인데, 필자는 그것이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을 감히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한 영혼’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 목표는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담임목사의 불법과 비리를 들추어 내고 그가 범법자인 것을 입증해서 그를 쫓아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긴 하나,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도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또 그 한 사람을 내쫓는 일이,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많은 수의 ‘한 영혼’들의 희생과 맞바꿔져도 될 만큼 크고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믿는다.
3.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What would Jesus do?)를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라면 지금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투쟁방법을 칭찬하실까?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의 분쟁 현장에 오신다면 “정식 새예배처소 마련이나 새교회 설립 같은 사안은 지금 단계에서 중요하지 않다. 도리어 해가 된다.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해결하라. 지금은 법적 소송에 의한 승리나 공동의회 투표를 통한 승리가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해 온 대로, 담임목사를 쫓아 내는 문제에 계속 모든 화력(火力)을 집중하라.” - 이렇게 말씀하실까?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많은 가르침 중 대표적인 것은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는 말씀이다. ‘지혜와 순결’ -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고 조화롭게 적용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나, 우리의 행동기준이 되어야 할 말씀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싸움이 길어지면 질수록, 또 ‘승리’라는 목표에 대한 집념(執念)이 강해지면 질수록, 대개 순결보다는 지혜가 우선시되게 마련이다. 그 지혜란 것도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을 통해 주시는 위로부터의 지혜보다는 세상의 지혜로 더 경도(傾倒)되어 가게 된다. 그것이 더 쉽고 빠르고 효과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29) 우리의 무거운 짐을 들고 예수님께 나아가자.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셨듯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해 주시는 문제의 해법은 의외로 단순할지 모른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는 난마(亂麻)와 같이 얽힌 것도, 미로(迷路)와 같이 혼란스러운 것도 아닐지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법학자(法學者)나 신학자(神學者)만이 해결할 수 있는 그런 고차원적이고 어려운 문제를 우리에게 내 주셨을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일에 있어서는 ‘지식’보다는 오히려 ‘지혜’가 더 필요하고, 인본주의적인 ‘영리한 지략’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고전 9:26) 이 말씀처럼 우리의 거룩한 싸움의 ‘방향과 목표’를 재검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싸우는 ‘견고함’도 가져야 하지만, 말씀이나 성경정신에 어긋난 점이 있으면 즉시 궤도를 수정할 수 있는 ‘유연함’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나. 본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오늘 이 글은 ‘법과 표와 시간이 우리 편’이라고 믿고 계시는 우리 개혁진영의 동역자 분들을 위한 필자의 ‘작지만 최선을 다한 수고’다. 혹시 자기의 신념에 어긋나는 내용의 글이라 생각되어도 한 번 마음을 열고 찬찬히 읽어봐 주시기 바란다. 이 글이 졸고(拙稿)이기는 하지만 오직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쓴 글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아무쪼록 이 글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우리가 ‘함께 고민하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법’과 ‘표’와 ‘시간’ – 이 세 가지 수단은 누구든지 원치 않는 분쟁에 휘말렸을 때,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막론하고 자신들의 투쟁전략에 고려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기(武器, ammunition)들이다. 물론 모두 하나님의 일반은총 아래에 있는 수단들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것들은 세상의 지혜만을 좇는 ‘이 세대의 아들들’(눅16:8)에게는 ‘절대 필수적인(absolutely required)’ 무기들이지만, 하나님의 지혜가 우선적인 ‘빛의 아들들’ 에게는 ‘단지 선택적인(only optional)’ 무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필자의 논의의 초점은 이러한 수단들을 “쓰자 또는 쓰지 말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일단 논의의 초점을 “쓰자”에 두겠다. 다른 말로 하면, “이러한 수단을 쓰는 것이 문제 해결의 필요충분 조건이다. 우리에게도 절대 필수적이다. (또는 더 강한 표현으로) 이런 수단을 쓰는 것 외에 우리가 택할 다른 방법은 없다.”는 가정(假定)하에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의 주제는 “이러한 수단을 사용하는 전략이 과연 ‘담임목사의 퇴진’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효과적(效果的)인 전략인가?”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수단의 ‘가치’에 관한 문제는 일단 접어 놓고, ‘실제적 효용성(效用性)’의 문제부터 검토해 보자는 뜻이다.
1. 법(法)은 우리편인가?
A. ‘법’의 생리
필자는 법률전문가가 아니다. 법에 관해서 논한다면 금방 바닥이 들통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방면의 문제를 다루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때가 때인지라 법에 관한 담론(談論)에 끼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법률적 전문지식’이 아니라 단지 ‘법적 상식’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법치국가에서 육십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법에 대해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경험적 통찰로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명제(命題)처럼, 법은 알면 알수록 실질적인 힘을 주는 수단이 된다. 이 철학자의 말에는 단순히 지식을 더 많이 쌓자는 것만이 아니라, 남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사회적인 권력을 잡게 된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이전부터 자식을 법대에 보내어 법조인을 만들려고 노력해왔다. 적어도 사돈팔촌을 포함하는 ‘한 집안’에서 법조인 하나 정도는 나와야 집안을 위한 방패막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법고시를 패스하면 온 집안의 경사가 되었다. 시골에서는 면 단위뿐 아니라 군 단위의 경사였다. 그것은 단지 옛날 이야기인가? 아니다. 지금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여전히 법조인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법조인 직업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무엇을 말하는가? ‘법 자체’보다 법을 집행하는 ‘법조인’이 힘이 있다는 것은, 법은 그것을 집행하는 주체에 따라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내가 법 집행 주체와 관계상 더 가까울수록, 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힘이 더 많을수록 그것이 내 편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것은 내가 법률지식이 많은 것과는 정비례하지 않는다. 아무리 투명한 법 집행을 하는 사법시스템이 존재한다고 하더라고, 역시 정실판결(情實判決)이니 전관예우(前官禮遇)니 하는 말들이 살아있다. 아무리 그물망같이 잘 짜인 법체계가 있어도 법에는 빠져나갈 구멍이 존재하고, 주관적인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탈법(脫法)과 편법(便法)이란 말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법의 생리(生理)’를 잘 아는 사람은 주변에 항상 가까운 법조인을 몇 명 확보한다. 물론 힘이 있는 법조인일수록 더 좋다. 아울러 때로는 초법적(超法的)인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으므로 유력 정치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로비의 도구로 사용한다. 역시 권력의 핵심에 더 가까운 인사일수록 좋다. 만일 이런 사람들이 “법은 내 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법의 위엄을 훼손시키고 법치국가를 조롱하는 비도덕적인 망언(妄言)일지언정, 그 말의 현실성과 실제성만은 부인할 수가 없다.
B. ‘법’은 승패(勝敗)의 실질적 요인인가?
자 우리 문제로 돌아가자. 지금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은 법이라면 벌벌 떠는 평범한 소시민(小市民)이 아니다. 정치적인 게임에는 나름대로 득도(得道)의 수준에 오른 사람이다. 그래서 온갖 불법과 편법과 탈법, 그리고 거짓과 술수를 써서 그 자리까지 올라온 인물이다. 지금은 이전보다 더 막강한 진용을 갖추고 있다.
그는 지금 돈과 권력을 다 쥐고 있는 종교권력자다. 또 이제는 ‘그 한 사람’만 생각하면 안 된다. 그 사람 때문에 먹고 살고 있는 주변의 많은 지지자들이 그를 떠 받쳐주고 있다. 부인하고 싶겠지만 그것이 ‘불편한 진실’이다. 이렇게 되어 올 때까지 그 동안 눈 감고 귀 막고 있었던 사람들의 때늦은 하소연은 이제 만시지탄(晩時之歎)일 뿐이다.
담임목사가 ‘롤모델’(role model)로 삼고 있다고 알려진 조용기 목사는 지금 오랜 법적 공방 속에 있다. 그의 횡령과 비리 및 스캔들에 얽힌 사건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었더면 목이 열 개라도 부족했겠지만 그는 아직도 건재하다.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지만, 그는 양심이 화인 맞았으니 아직도 건재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건재할 것이라는 것이 현명한 세상사람들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주(週) 중에는 재판정을 드나들고, 매 주일(主日)마다 꼭 1시 예배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교인들에게만 “병(病) 주고 약(藥)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병 드리고 약 드리고” 하는 이 시대의 하나님의 ‘귀한 종’이다.
강북제일교회 황형택 목사의 ‘횡령 및 배임사건’과 ‘허위 목사안수에 관한 소송’은 우리 사랑의교회 사건을 빼 닮았다. 단지 거기는 ‘예장통합’이고 여기는 ‘예장합동’이라는 교단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지금 거기는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출구(出口)가 보이지 않는 분쟁’ 속에 있다. 통합교단 재판부는 ‘교인들 손’을 들어주었으나 사회법이 나중에 ‘목사 손’을 들어주어 교단 재판부가 망신을 당했다. 이제는 소송 사건을 주도한 하 모 집사란 사람이 신천지 교인이란 소문을 놓고 분쟁요인이 더 추가됨으로써 반대편조차 당회측과 하집사측의 둘로 갈라졌다. 정말 가슴 아픈 비극이다. 그러니 우리도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싸워야 할지 모른다. 우리교회만은 잘 될 것이라는 속단은 금물이다.
얼마 전 ‘무교병 카페’를 통해 ‘친오진영’에서 시작된 신상털기에 대해 ‘사랑넷’에서도 좌시하지 않겠다는 대응 이메일을 담임목사 앞으로 보냄으로써 신상털기의 제2라운드로 진입한 것 같다. 이제 속 옷만 벗기면 피차의 나신(裸身)을 보게 되는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왔다. 어디까지 갈 것인가? 목사 한 사람의 거짓과 비리로 시작된 싸움이 이제는 전 장로들까지 번졌다. 오목측이나 무교병은 이미 신앙은 물론 이성을 잃은 집단이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우리측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제대로 된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고 있는가? 이 치사한 이전투구의 싸움만이 오직 유일한 길인가?
예수님은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 (눅 16:8)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지혜롭다’는 ‘와이즈(wise)’가 아니라 ‘셔루드(shrewd)’란 단어로 표현되어 있는데(N.I.V.), “뱀 같이 지혜롭고”(마10:16)란 말씀에서도 역시 ‘셔루드(shrewd)’로 표현되어 있다. 이 단어는 ‘상황판단이 빠르다 기민하다 빈틈없다’란 뜻이다. 그리고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이란 말씀은 표준성경에서는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in dealing with their own kind: N.I.V.)이라고 되어있다. 즉 세상적 방법에 관한 한 우리보다 훨씬 고단수란 뜻이다. 당신은 세상적 ‘권모술수’(權謀術數)에 관한 한 지금의 담임목사와 필적(匹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필자는 지난 7월9일 서초구 주민소송 판결을 보며, “우리가 과연 저들을 법으로 제압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대한 회의(懷疑)를 가지게 되었다. 서초구가 상위기관인 서울시의 행정명령에 불복할 때부터 ‘이상한 싸움’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래도 전문위원들이 모두 소송에 긍정의견을 낸 터라 우리측이 이길 줄 알았다. 그러나 결국은 “소송대상이 아니다”라는 ‘소각하’(訴却下) 판결이 나와 버렸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법원은 오목사측의 손을 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로 소송을 지연(遲延)시키는 지연작전을 씀으로써 공사(工事)를 추진하는데 더 충분한 시간(時間)까지 벌어 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오목사는 그의 세속적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뿐 아니다. 지금의 문제는 ‘그 한 사람’만 해당되고 ‘그 한 사람’만 관련되어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같이 떡을 나누는 그룹’이 없이 혼자서만 이런 큰 판을 벌일 수 있겠는가? “저 분이 어떻게 저렇게 변했지?” 할 정도로 담임목사의 호위무사(護衛武士)가 되어있는 장로들을 보지 않았는가? 이 문제가 한 사람 담임목사의 생존이 걸린 문제라도 맞상대 하기가 어려운데, 지금은 SGMC 내(內) 소위 ‘마피아 집단’이라고 칭할 수도 있는 ‘그 그룹의 생존’(生存)이 걸린 문제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생명을 건 대응’을 할 것이다. 따라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편, 우리는 목숨을 걸고라도, 자기의 생업(生業)의 터전을 포기하고라도, 죽기살기로 적진을 향해 돌격할 준비가 된 필사각오(必死覺悟)의 전사(戰士)들인가? 그렇다면 그런 분이 몇 명이나 되는가?
결론적으로, 이상 언급된 바를 정리하자면, ‘법’ 자체가 승패의 실질적 요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①돈과 권력의 차이, ②권모술수적 능력의 차이, ③싸움에 임하는 강도(强度)의 차이가 승패를 좌우하는 ‘실질적 요인’이 된다는 말이다. ‘법’이란 녀석은 관객들 앞에 나와서 인형극의 ‘꼭두각시’처럼 연기(演技)를 할 뿐이며, 실제로 그것을 ‘움직이는 손’은 뒤에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을 움직이는 ‘더 큰 손’은 전지전능의 주권자이신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법의 심판’을 통해서 우리의 손을 들어주실 것인가? 이 말에 반드시 ‘아멘’으로 화답해야 하는가? 그것을 믿으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사람인가? 만약 우리가 승소(勝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자책해야 할 일일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법의 심판’을 통해 약자들이 보호 받도록 개입(介入)하신다. 필자도 그것을 바라고 기도하고 있다.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고 있지도 않다. 하나님께서 ‘항상’ 법의 심판에 개입하시고 직접 공의로 통치하신다면, 이 세상의 부조리는 모두 없어졌어야 했다. 모든 ‘이단 교주’들은 죽었어야 하고, ‘사이비 목사’들은 강단에서 거짓복음을 외치는 순간 거꾸러져서 죽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이 더 보편적이다. 왜 그러한가? 이 땅에 천국이 도래하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한 천국은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니 우리가 반드시 법적 투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믿는 것은 주관적인 ‘바람’일 뿐이다. 그것은 정직하게 말해서 믿음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재판 승소’라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다고 해서 ‘니이체’처럼 자기 편리한대로 “신(神)은 죽었다”고 선언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법에 호소하면서도 한편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내 생각과 내 뜻을 내려 놓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하나님께 백지(白紙) 수표를 올려드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도 가져야 한다. “우리 교회 문제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소서”라고 겸손히 여쭈어야 한다. 우리의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법은 단지 도구일 뿐, 우리의 구원자가 아니다. “법 법”하며 ‘법’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언젠가는 그 ‘법’이 우리를 배반(排反)하고 우리를 실족(失足)하게 할 것이다.
2. 표(票)는 우리 편인가?
A. 투표권의 허(虛)와 실(實)
교회법에 의하면 ‘무흠 입교인’ 즉 세례교인 이상의 등록교인은 투표권을 가진다. 세례는 이단이 아닌 정통교회에서 받았으면 어느 교회에서 받았더라도 유효하다. 이 투표권이 평상시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나 분쟁이 생긴 교회에서는 귀중한 취급을 받게 된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투표권 행사를 통하여 담임목사를 심판하기를 원하기에, 투표권을 유지하기 위해 끝까지 교적(敎籍)을 포기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SGMC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지 않겠다는 성도들의 경우, 다른 교회에 가서 등록교인으로 신앙생활 하자니 투표권이 염려되고, 계속 ‘떠돌이 교인’ 생활하자니 영적으로 힘들어, 언제까지 이런 불안정한 신앙생활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하고 계실 것이다. 차라리 앞으로 한 달, 두 달 또는 여섯 달- 이렇게 시한이라도 정해 주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없는 일임을 알기에 벙어리 냉가슴만 앓는다.
제발 이 투표권이 우리 교회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만능열쇠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선교지에 있는 우리 부부는 비싼 비행기를 타고 와서라도 투표할 것이다. 그러나 투표로 심판하는 일은 낙관과 비관이란 양면(兩面)이 다 있으므로 쉽게 속단할 수는 없다. 따라서 투표권에 대한 희망 섞인 주관적 판단을 지양하고 그 ‘허와 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전략 수립 및 방향 설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중한 투표권은 ‘담임목사의 재신임(또는 해임청원)을 위한 공동의회’가 열려야만 행사할 수 있다. 공동의회가 소집되지 않는 한 투표권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공동의회에 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공동의회의 소집 가능성, 공정성, 효용성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B. 공동의회의 ‘소집가능성’ (召集可能性, Availability of Convening)
이 소제목을 풀어 쓰면, “과연 공동의회에서 투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는 오겠는가?”라는 내용이 된다. 장로교 헌법 제 21장에 의하면, 공동의회의 소집은 다음 네 가지 중 한 가지가 충족되면 된다; (1) 당회(堂會)가 필요로 인정할 때 (2)제직회(諸職會)의 청원 (3) 무흠(無欠) 입교인(入敎人) 3분의 1 이상 청원 (4) 상회(上會)의 명령. 여기서 (1)과 (2)의 당회의 인정과 제직회의 요청은 ‘일반 의안’(議案) 결의 정족수(定足數)인 회원 과반수의 찬성이면 된다.
예를 들자면 당회의 경우 현재 50명의 당회원 중 개혁진영에 속한다고 분류된 장로가 아직25명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전선(戰線)이 고착된 상황이라 또 다른 변수가 나오지 않는 한 이 숫자의 변동이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담임목사측이 치사하고 비열한 방법으로 개혁진영 장로들을 효과적으로 겁박(劫迫)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기 때문에, 우리진영 장로의 수가 단 몇 명이라도 줄어들 수는 있으나 과반수로 늘어날 가능성은 현재 상태론 없어 보인다.
앞으로 담임목사에 관한 새로운 충격적 비리 사실이 폭로되거나, 또한 그에게 확실하게 불리한 법적 판결이 나올 경우, 이 판세가 우리측에 유리하게 바뀔 수는 있다. 그러나 대법원 상고까지 간다면, 최종 판결이 날 때까지 최소한 3~5년은 걸릴 것이고 보면 재판으로 인한 당회원 판세의 변화도 쉽게 예단할 수는 없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어쨌든 당회원들 입장에서는 지금 상황에서 뚜렷한 명분 없이 진영을 바꾸면 배신자가 되는 셈이니 당분간은 이대로 갈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그 때까지는 당회의 과반수가 필요로 인정하여 공동의회를 소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제직회의 구성원은 (1)당회원 (2)안수집사 (3)권사 (4)서리집사 등이다. 그러나 제직회는 아직 한 번도 양측의 세(勢)를 검증해 본 바가 없기에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마 서로 자기 진영이 상대를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쨌든, 판단을 내릴 수 없기에 제직회의 ‘공동의회 소집 청원안’의 가결(可決)이 (안 된다기 보다는) 될 수 있다는 쪽으로도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많다.
지금까지의 친오진영의 권사(勸士)들이 저질러 온 경력(經歷)으로 봐서 이런 사안을 표결에 올리는 ‘안건 상정’ 자체도 쉽지 않을 것이다. 기억하는가? 4명의 나이든 권사들이 10 분의 은퇴장로님들을 물리친 그 용맹스러운 전과(戰果)를? 당회를 마치고 나오는 반오진영 장로님들을 향해 육두문자(肉頭文字)로 거친 항변을 하던 그 권사들의 불타는 전의(戰意)를?
또 다른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다. 친오진영의 제직수는 전혀 변동이 없으나 우리측의 제직들 중 일부 또는 상당수가 우리측의 목양적 관리 부재로 인해 이미 교회를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도 우리측은 그 분들에 대한 목양적 관리를 전혀 못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적은 수나마 꾸준히 떠날 것이 예상된다. 그럴 경우 일단 떠난 분들이 사랑의교회 제직회 투표 날을 기억하고 올 수 있을지, 또 와도 그 때 투표권이 주어질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다음으로, 무흠 입교인 3분의 1 이상의 청원인을 모집하는 것도 쉽지 않다. 정확한 무흠입교인 총수(總數)를 알려고 하면 교회 행정목사들의 협조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적개심에 불타고 있는 닳고 닳은 그들이 순순히 협조하겠는가? 청원인 모집을 방해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만약 세례교인이 2만 명이라면 최소한7천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이 어찌 쉽다고 하겠는가? 물론 투표를 통해 승산이 있다고 판단된다면 일단 시도는 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측의 교인들이 더 이상 떠나가기 전에 지금이라도 빨리 서둘러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측에 유리한 재판 결과가 나오거나 추가적 비리가 폭로될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재판 결과를 기다릴 경우, 계속 교회를 떠나고 있는 교인들의 행렬이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번 겨울 중 특히 연말연시나 음력 설을 기점으로 교회 적(籍)을 옮기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상회(上會)의 명령’은 일차적으로 차상급(次上級) 상회인 ‘노회(老會)의 명령’을 말한다. 교회 내부의 합의에 의해 공동의회가 소집될 수 없는 경우, 지역 시찰회(視察會)를 경유하든지 직접 노회를 찾아가 개입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1) 반오진영의 장로나 (2) 제직이나 (3) 무흠입교인의 수가 친오진영에 비해 우리진영이 많아도, 친오진영이 공동의회 소집을 결사반대(決死反對)하고 나서면 소집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매년 개최 되는 합동교단 정기총회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노회나 총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볼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가스총 목사 사건’은 우리 교단의 진행형 이야기다. 그 사람이 현재도 우리교단 총무로서 건재(健在)하다. 대단한 뚝심과 지략과 야심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교권다툼 속에는 항상 이해관계가 따르며 금권의 개입이 있는 법이다. 2012년 97차 총회에서SGMC의 담임목사란 사람과 대전에 있는 그의 동생목사가 자신들의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가스총 총무 그룹과 ‘서로 봐주기 식’의 야합(野合)을 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교회 언론의 시각이다. 지금은 그들이 밀월(蜜月)관계에 있다. 그런데 이들이 오목사 형제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리진영의 공동의회 소집청원을 순순히 받아 주겠는가?
또한 노회나 총회 재판국은 교단법에 의하여 항상 목사의 수가 장로의 수보다 한 명 더 많게 구성되어있다. “게는 가제 편”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따라서 “노회가 사랑의교회 사태에 적극적 조정자(調停者)로 나서 주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오목사를 포함한 당회’의 요청이나 동의가 없는 한, 노회가 그 반대를 무릅쓰고 공동의회 소집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현 단계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다.
C. 공동의회의 ‘공정성’ (公正性, Justice)
“공동의회가 정당(正當)하게 개최되고, 투표가 공정(公正)하게 진행되고 관리될 수 있는가?”란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반응은 교회의 규모에 따라 다를 것이다. 세례교인 오백 명 미만의 소형교회에서는 ‘예’라는 답이 쉽게 나올 수 있다. 천 명 이 천 명의 중형교회에서는 ‘쉽지는 않다’라는 답이 나오게 된다. 삼 천 명 오 천 명 되는 대형교회는 ‘힘들다’는 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만 명 이 만 명 이상 되는 초대형교회의 반응은 어떨까? 공정성을 보장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 정직한 답변일 것이다.
“사랑의교회는 그 동안 해마다 공동의회를 소집해 왔다. 예산결산을 위한 연말 공동의회뿐 아니라, 담임목사 청빙이나 장로선출 등 많은 공동의회를 치러왔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공동의회의 공정성을 이야기 하는가?” 분명히 이런 질문을 하는 착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황(狀況)이다. 어떤 분위기와 상황 가운에서 공동의회가 치러지는가 하는 점이다. 평상시에는 공동의회에 대한 교인들의 관심이 높지 않다. 특히 대형교회로 갈수록 공동의회 참석률은 현저히 떨어진다. 평상시에는 투표하는 사람들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할 필요도 없으며,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항상 공동의회의 결론은 미리 나 있는 것이니까 모든 것을 ‘은혜(恩惠)’로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쟁(紛爭)교회’에서는 다르다. 특히 담임목사를 해임시키기 위하여 ‘재신임(또는 해임청원) 투표’를 할 경우 한 표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게 된다. 상대진영에서 꼼수나 불법을 행할까 봐 서로 감시하며 전전긍긍한다. 이런 경우 역시 재정과 조직을 쥐고 있는 현직실세가 더 유리할 수 밖에 없다. 반대측에서는 불리함을 알기에, 만약에 질 경우를 대비하여 무효선언을 하기 위한 증거확보에도 힘을 기울이게 된다. 현직실세도 마찬가지로 상대진영의 약점을 찾는 한편, 제기될 수 있는 무효선언에도 철저히 대비한다.
이런 경우 한 쪽이 압도적인 표차로 이길 경우 불만 가운데서도 피차 승복(承服)할 수는 있으나, 찬반 표차가 크지 않을 경우 불복(不服)의 소지가 크다. 물론 노회에서 감시위원이 파견되지만 형식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런 내부적 분쟁 상황 하에서는, 중소형교회라도 공동의회의 소집이나 진행과 관리가 쉽지 않은데, 사랑의교회 같은 초대형교회에서는 전혀 이의나 불복 없이 치러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이해가 안 가실 분들을 위해서 그 이유를 좀 더 자세히 살펴 보겠다.
1). 무흠입교인 명부 즉 투표자명부의 정확성이 지켜지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 명부의 기초가 되는 것은 각 교구담당 교역자가 관리하는 ‘교구 교인대장(敎人臺帳)’일 것이다. 이것을 총괄하는 것은 행정목사들이 관장하는 교회행정실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모든 행정업무의 주체는 담임목사의 주구(走狗)가 되어있는 부교역자들이다. 교인 명부는 모두 이들의 손아귀 안에 있다. 이들은 교회를 떠났다고 생각되는 반오진영의 교인들을 발견해 가차없이 명부에서 삭제할 것이고, 친오진영의 수를 불리기 위해 ‘위장 등록교인’들을 많이 양산(量産)할 것이다. 그들의 존재와 역할은 ‘어물전 고양이’와 같다고 이해하면 된다.
물론 이러한 준비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공동의회 소집’의 조짐이 조금이라도 보인다고 생각되면 상부의 지침에 따라 조직적(組織的)으로 은밀(隱密)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반오진영에서는 설령 심증이 있더라도 명확한 증거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투표관리위원회’가 조직된다고 하더라도(친오와 반오가 섞인 위원회), 반오진영에 속한 위원들이 그 많은 무흠입교인들을 다 확인하고 검증할 수 없다. 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누가 그 일을 감당해 낼 수 있겠는가? ‘무흠입교인 명부’의 부정(不正)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행정실에서 제공하는 명부를 그대로 인정하고 따라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만약 투표 전 주(週)에 공개적 명부열람확인 절차가 있고, 투표권 통지가 개별적으로 전달되는 시스템이 제공될 경우, 이에 누락된 교인들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교회를 사실상 떠났다. 떠나지 않았다.” 주로 이러한 시비를 말한다. 한편, 위장등록 교인 고발 또는 조사요청 이 계속 접수될 것이다. 그래서 그 진위를 확인(確認)하고 심판(審判)하고 수습(收拾)하는 과정 중에 일어날 수 있는 엄청난 소란을 각오해야 하며, 이것이 장차 투표결과에 대한 ‘불복(不服) 소송’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
2). 투표 당일 날 문제다. (문제1) 대리투표나 무더기 부정투표가 예상된다. (문제 2) 본인확인-투표자 본인 확인을 위해 한 사람 한 사람 사진을 보고 대조하는 작업도 말처럼 쉽지 않다. 명부에 있는 사진이 최근 찍은 것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문제3) 관리 주체-투표 진행의 전 과정을 관리하는 역할은 일반 중소교회에서는 대개 부교역자들의 몫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목회자로서의 그들의 인격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들이 가장 중립적이고 공정하게 처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사랑의교회의 부교역자들은 담임목사의 손과 발이니 그들에게 중립과 공정을 기대할 수는 없다. 반오진영에서는 그들이 관리하도록 허락할 리도 만무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가기관이 취하는 것 같은 방식으로 중립적(中立的) ‘선거관리위원회’를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철저하고 충분한 검토와 예행연습을 통해서 이 역할을 담당하도록 위촉할 수도 있다. (물론 아직 그런 식으로 공동의회 투표를 실시했다는 사례를 듣지 못했지만) 그러나 선거관리위원들을 외부에서 초빙할 때는 많은 재정지출을 각오해야 하고, 또 그들이 현직 실세에게 비밀리에 매수(買收)되거나, 혹 그렇지 않더라고 그 평소의 영향력(影響力)에 지배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목사들은 물론 신학대학 교수들도 잘 믿을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인데, 다른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3).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일에 앞서, 공동의회 예고부터 소집, 진행, 개표에 이르는 탄탄한 시행규칙과, 발생할 수 있는 이의제기나 분규의 해결기준을 정하는 일도 사전에 마련되고 합의되어야 하는 데, 이 과정에서도 분쟁이 일어날 수 있고, 설령 그런 분쟁 없이 진행된다 하더라도 실무적으로도 많은 인원과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상 언급한 사항들은 모두 ‘합리적 예측’에 의한 것이다. 이 외에도 예상치 못한 더 많은 일들이 복병(伏兵)처럼 숨어있다가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점들을 고려할 때, 그 누가 감히 ‘분쟁 중인 초대형교회의 공동의회’가 쉽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D. 공동의회의 효용성(效用性, effectiveness)
이번에는 효용성, 즉 “투표를 했을 때 담임목사 재신임 부결, 또는 해임 가결을 위한 과반수의 반대 투표수를 획득할 수 있겠는가?”는 질문이다. 이 ‘공동의회의 효용성’은, 전술(前述)한 공동의회 ‘소집의 가능성’과 공동의회의 ‘공정성’이 보장된다는 전제 아래에서 논할 수 있다.
‘효용성’이란 즉 “이길 수 있는 싸움인가?” 하는 점이다. 이 질문에는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각 진영에서는 자기들이 이길 것이라고 낙관만 할 뿐이다. 질 수도 있다는 부정적 견해를 나타냈다가는 그 진영에서 ‘사꾸라’로 배척되는 것이 싸움판의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에, 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이야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투표의 승패를 결정짓는 요소로는; (1) 상황 (2) 각 진영의 노력, 이 두 가지 정도로만 압축해 보겠다.
1). ‘상황(狀況)’이란 요소
현 담임목사에게 불리한 사실 폭로나 재판 결과가 나오는 상황이 될 때 당연히 우리진영에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친오진영은 이런 저런 이유로 공동의회를 원천적으로 피하려고 할 것이다. 지난 번처럼 ‘쇼’를 동반한 회개니 자숙이니 감봉이니 하면서 측면돌파를 시도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해임’ 또는 ‘퇴진’이란 단어는 저들의 사전(辭典)에 없다. 단지 적당한 수준의 징계를 함으로써 여론을 잠시 무마하려 할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 구속영장이 청구되어 그가 감옥에 가더라도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날 때까지는 미결수의 입장이니, 해임이란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하게 할 것이다. 설령 실형을 살고 나오더라도, ‘목동’의 어느 목사처럼 다음과 같은 종류의 기괴한 말을 할 것이다. “제가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라면 당장 죽여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를 용서하셨고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땅의 교회의 회개운동을 위해 남은 인생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오목사도 더했으면 더했지 덜 할 위인이 아니다. 오목사는 쉽게 회개할 사람이 아니다. 지난번 복귀 후 영화 ‘밀양’식 회개의 대사(臺詞)를 말하는 것을 듣지 않았는가? 이 자에게 그렇게 속고도 아직도 더 속으려고 하는가? 재판에 진다고 해서 이 자가 퇴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기대라는 것이다. 저 쪽 진영의 사람들은 궤변의 천재들이다.
따라서 담임목사의 결정적 비리가 드러나면 친오진영도 당연히 공동의회를 소집에 응할 것이라는 기대도 나이브한 생각이다. 그 분들의 ‘착한 기대’의 논리는 이렇다. -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들이 담임목사의 명백한 죄상을 확인하고도 공동의회조차 개최하지 않는 비양심적인 태도를 취하겠는가? 슬슬 꼬리를 내리고 출구전략을 찾지 않겠는가?” 그러나 친오진영의 사람들, 특히 그 중추세력들이 그런 선한 양심의 소유자들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중추세력들은 현 담임목사와 각종 이해관계로 얼기설기 얽혀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2) ‘각 진영의 노력’(努力) 이란 요소
이것에 관해서는 우리진영이 친오진영을 따라갈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친오진영은 막강한 교구의 조직을 가지고 있다. 정치권의 투표에서도 집권정당이 조직을 장악하고 있을 때 이미 최소한 10%의 유효투표는 먹고 들어간다. 게다가 군목들이 중심이 된 교구목사들의 충성도(忠誠度)는 단연 표창감이다. SGMC에는 여전도사들도 질 새라 더 씩씩한 것 같다. 또 돈으로 조직원들을 관리하니 조직이 흔들릴 가능성이 거의 없다.
지난 한 해 내내 혹 양심선언 하실 부목사님이 한 분이라도 나올지를 기다렸지만 자발적 양심선언은 한 명도 없었다. (Y목사님의 경우는 양심선언이 아니라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신 경우였다.) 이만하면 SGMC는 이미 어떤 난관도 돌파할 수 있는 조직의 안정성을 갖춘 셈이다. 친오측 장로들의 충성도도 이들에 못지 않다. 친오측 권사들은 이미 장안(長安)의 화제거리다. 그들이 ‘투표라는 게임’에서 쉽게 질 수 있을까?
반면에 반오진영은 조직도 자금도 모두 열세인 것 같다. 좋게 표현하자면 ‘관군(官軍) 대 의병(義兵)의 싸움’ 정도다. 따라서 이런 여건 아래서 ‘표’의 대결로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희망이다. 표의 대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결력과 조직력이다. 친오진영 즉 관군(官軍)은 그것을 돈의 힘으로 한다.
우리 “병(義)의 병사(兵士)” 즉 의병들은 돈으로 조직관리를 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표를 모아야 할까? 제일 중요한 것은 최소한 남아 있는 사람이라도 떠나지 않게 해야 한다. 필자는 지도자들에게 “떠나는 사람들을 붙잡는 노력을 해달라”고 계속 호소해 왔다. 그러나 그것을 위한 절실한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투표로 오목사를 밀어내야 한다는 말들을 하는 것을 보고는 그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태도에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려면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진심으로 경청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동시에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구체적 실천이 필요하다. 비전제시도 있어야 한다. 오목사를 퇴진시키는 것은 우리의 목표일 뿐이지 비전은 아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의 미래상이 우리의 비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싸우는 것도 바쁜데 사치스럽게 무슨 비전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단지 싸움꾼들이 아니다. 그렇게 우리의 싸움을 축소시킨다면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오목사만 퇴진시키는 것을 지고지상(至高至上)의 목표로 삼고 다른 것은 전부 다음에 생각하자고 하면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우리는 저들과는 달라야 한다. 설령 우리의 목표를 이루었다고 치자. 그러나 그 때 우리는 이기고도 진 싸움을 했다고 깨닫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에 공허함이 밀려 올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런 마음이 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앞으로 계속되는 필자의 글에서 이 부분은 더 다루어질 것이다.
지금 정말 우리가 이기는 싸움을 하고 싶다면 깊이 기도하며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는 가운데 중지(衆知)를 모아야 한다. 한 쪽에 편향된 의견만 듣는다면 결국 우리진영은 차츰 축소 또는 언젠가 와해될 수 밖에 없다. 정말 이기고 싶다면 하나님의 편에 서서 원점(原點)에서부터 모든 것을 다시 재검토하는 진정한 용기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3. 시간(時間)은 우리 편인가?
시간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까 불리하게 작용할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의 논리는 (1)갈수록 그의 거짓과 비리가 더 드러날 것이므로 (2)SGMC에서 비용은 늘어나는데 비해 교인이 줄고 교회헌금이 줄어 재정난을 겪을 것이므로- 대개 이런 두 가지 이유에 근거하고 있다. 타당한 근거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이유들이 우리가 바라는 바 ‘현 담임목사의 조속한 퇴진과 그 추종자들의 회개 또는 몰락’이라는 승리(勝利)의 결과물(結果物)을 가져다 줄 것 같지는 않다. 거기에 대한 필자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A. 필자의 반론
1) “비리와 거짓이 계속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시간은 우리 편이다”에 대하여
지난 9개월은 친오진영에는 위기의 순간들이었고 반대로 우리진영에는 기회의 순간들이었다. 싸움의 주도권을 충분히 쥐고 갈 수 있었지만 우리측의 전력(戰力)은 기대만큼 탄탄하지 않았다. 물론 성과도 더러 있었지만 결정적인 성과가 없었고, 포위망을 좁혀 들어 가는 집요함이 부족했다. 일부의 성과는 친오진영의 자충수에 기인한 것들이었다. 멀리서 지켜보는 입장에서 볼 때 긴박감도 없고 느슨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듯이 보였다. 미안한 평가지만 우리진영은 그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시간에 비해서 비리와 거짓을 입증하기 위한 노력과 실적이 부족했다. 그것이 필자의 솔직한 견해다. 그러나 어느 누구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보고 싶다.
또한 앞으로 더 효과적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더 성공적인 실적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물론 이 사명을 위해 누가 어떻게 뛰고 있는지, 전세현황이나 전투보고서는 전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그냥 무조건 믿자. 그런데 설령 앞으로 큰 ‘비리와 거짓’이 드러나더라도 그것이 현 담임목사의 퇴진을 쉽게 가져다 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첫째 이미 앞에서 언급한대로 사회법은 우리의 편이 아닌 것 같으며 (필자 주: ‘크리스천투데이’에서 2012년11월 3회에 걸쳐 연재된 “황형택사건의 법원판결, 무엇이 문제인가”란 글을 꼭 찾아 읽어보시기 바람), 둘째 현 담임목사에게는 그와 공생해야 하는 확실하고 탄탄한 추종자들이 교회 안팎으로 존재하며, 셋째 어떠한 결과가 나와도 담임목사를 교주(敎主)처럼 받드는 신도(信徒)들의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를 전병욱 목사 정도로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2) “SGMC가 갈수록 재정난을 겪을 것이므로, 시간은 우리 편이다”에 대하여
이 말은 분명히 옳은 말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정파탄은 단기적(短期的)으로 올 수 있는 결과가 아니라, 최소한 10년 이상 장기적(長期的)으로 다가 올 결과라는 것이다. 남가주 ‘크리스탈교회’의 경우 1980년에 건축되어 2010년에 파산되었으니 총 30년이 걸렸다. 거기에 비해 현 담임목사는 ‘비리(非理)’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시작하는 핸디캡은 있으나, 이단의 교주처럼 거짓 선동에 능한 자이므로 재정에 관한 한 꽤 오랫동안 버텨나갈 것이다.
더구나 이들에게는 강남예배당이 있다. 최근 앞으로 이 건물을 ‘공공재’(公共財)로 사용한다느니 하는 대사회적 발표를 자기들 마음대로 했다는데, 필자는 이것은 이들이 앞으로 ‘종교시설’을 ‘문화교육시설’로 용도 변경하려는 꼼수에서 나왔다고 본다. 용도 변경이 되면 언젠가 재정적 어려움이 봉착할 때 매물로 내 놓든지 이 건물을 담보로 새로운 대출을 일으켜 재정난을 돌파하는 마지막 카드로 사용하려고 할 것이다.
필자는 도리어 ‘SGMC의 재정난’이란 측면에서 ‘시간이 우리 편’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미 제안된 ‘투 트랙’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다. 새 교회가 모범적으로 은혜롭게 잘 세워지고 질적 양적 부흥을 이루어 나가면 지금 어쩔 수 없이 SGMC에 다니는 교인들도 새 교회로 옮겨 올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반오진영의 교인들은 물론 많은 수의 중립성향의 교인들도 포함될 것이다. 그러면 SGMC는 점차 줄어들게 된다. 그들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무리수를 한층 더 두게 되고 그것이 결국은 자충수가 되어 SGMC의 파산을 앞당기게 할 것이다.
이것은 제안서에서도 설명했듯이, ‘다윗의 집안’과 ‘사울의 집안’ 사이의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스토리와도 같다.(삼하3:1) 단기 전술(tactics)만 생각하지 말고 장기 전략(strategy)을, 좁은 의미의 전투(battle)만 생각하지 말고 넓은 의미의 전쟁(war)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B. 필자의 주장
필자는 여기에 덧붙여 ‘시간이 우리 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추가적 주장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1) 시간이 갈수록 교인 구성(構成)이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갈 것이기 때문에,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필자는 지금부터 ‘중간지대의 교인은 더 이상 없는 것’으로 간주하려고 한다. 있더라도 유의미(有意味)한 숫자는 아니라고 판단한다. 이미 중간지대의 교인들은 떠나갔거나 남아 있다면 친오성향을 가지든지 반오성향을 가지든지 마음의 결정이 되었으리라고 믿는다. 투표할 때 어떤 쪽을 지지할 것인가로 측정하면 된다. 따라서, 필자는 ‘교인들의 구성’을 세 그룹 즉 (1)친오진영 (2)반오진영 (3)‘SGMC의 새 등록교인’으로 분류하고 싶다.
이 중 새 등록교인은 거의 대 부분 친오진영 성향을 띤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 담임목사의 비리를 어느 정도 들어 알고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왔든지, 아니면 자기 나름으로 목사에게 끌리는 매력이 있어서 왔을 것이다. 또한 SGMC 자체의 편리하고 모던한 분위기도 좋아서 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현 체제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 등록한 교인들이다. 또한 전도나 인도에 의해서 왔다면 모두 친오진영 교인들의 손에 이끌려 왔음이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오진영의 숫자는 (1) + (3) 합산(合算)에 의해 늘어나는데 반해, 반오진영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어 갈 것이다. 비록 필자가 제안했던 ‘분리된 개척교회’를 설립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1년이 가고 2년이 가더라도 이러한 감소추세는 계속될 것이다. SGMC는 그들이 모든 공간과 조직과 재정을 장악하고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그들의 ‘홈그라운드’인데 친오진영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동시에 반오진영의 숫자는 점차 줄어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도 누구든지 짐작할 수 있는 상식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한편, 현재 반오진영 내부에는 세 가지 그룹이 존재한다; (1) SGMC에 들어가서 끝까지 싸우겠다는 ‘강경파’ (2) 영적충전을 위한 새 교회설립과 병행하여 싸우기를 원하는 ‘온건파’ (3) 이미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으나 그 교회 등록만 유보하고 있는 ‘대기파’- 이런 세 그룹이 엄연히 존재한다. 어쨌든 이 세 그룹은 시간이 감에 따라 각자의 스탠스(stance)가 더 분명히 전해질 것이다.
SGMC로 회귀(回歸)하기보다는 떠나는 숫자가 더 많아질 것이다. 그것은 실로 자연적인 현상이다. 순리(順理)를 거역하지 말자. 현실을 직면(直面)하자. 떠남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적 고갈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개혁진영의 성도들의 영적 갈급함은 더해 갈 것이다. 가뜩이나 개혁진영 안에서는 지금 공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들을 목양할 주체도 없고, 심지어 그 필요성조차도 거론하기를 ‘금기시’(禁忌視)하는 경직된 분위기가 아닌가? 합리적이고 포용적인 리더십은 볼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진영의 수가 유지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에 불과하다고 본다.
지금 우리에게 결핍된 것은 ‘참다운 예배’만이 아니다. 교회 생활은 선포(케리그마), 교육(디다케), 친교(코이노니아), 봉사(디아코니아) 라는 기능적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거의 이 모든 것이 결핍 또는 상실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 고갈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대안예배나 대안기도회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새 교회’가 설립되어야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무(無)교회적’인 투쟁 일변도의 외골수 신앙생활로는 중장기적으로 절대 ‘건강(健康)하고 균형(均衡) 잡힌 영성(靈性)’을 유지할 수 없다. “나는 잘 해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잘 할 수 있다. 그러하니 딴 사람들도 다 잘 할 수 있고, 또 잘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주관적인 판단이며, 남을 배려하지 않는 무정하고도 교만한 생각일 수 있다.
다시 말씀 드린다. 분리된 새 교회 설립을 통한 ‘투트랙’을 취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고 해도 ‘시간이 감에 따라’ SGMC에서 우리측은 숫자적으로는 더욱 더 불리해 질 수 밖에 없다. 절대 유리하지 않다. 이 ‘예견(豫見)된 사실’이 지금 우리에게 웅변해 주고 있는 것은 ‘투트랙’ 제안이 무시되거나 미루어져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2) 장기전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이 전쟁은 장기전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 우리의 전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일단 이성(理性)과 상식(常識)으로 생각해 보자. 공격군이 수비군을 단기간에 이기려면 압도하는 군사력의 우세가 있어야 한다. 동등한 힘이라면 절대 수비군을 뚫을 수 없다. 하물며 훨씬 힘이 약할 때는 이길 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다. 비록 힘은 약하나 적의 ‘약점’을 알아 급소(急所)를 치는 효과적인 공격을 한다면 이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준비가 안된 군대였기에, 개전초기(開戰初期)부터 밀리는 전쟁을 했다. 그러다가 한 번도 공격다운 공격을 하지 못한 채 좋은 시기를 다 놓쳐버렸다. 적의 급소를 알았지만 효과적으로 급소를 치지 못했다. 도리어 적이 눈치를 채고 빠른 기동력과 돈의 힘으로 먼저 가서 방어했다. 이제 수비군은 우리의 전력에 대한 분석을 다 마쳤고, 다양한 작전계획을 작성하여 하나 둘 실행에 옮겨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 전쟁에서 기선(機先)을 잡기는커녕 대응하기도 바쁘다. 이것은 피할 수 없었던 결과라고 하더라도, 지금에 와서도 곧 전쟁을 끝낼 수 있는 ‘한 방’이 가능할 것 같이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겸손히 장기전을 대비해야 한다. 그러나 장기전은 ‘투지’와 ‘의기’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영적인 고갈에 대비해야 하고, 충분한 재정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지도자 그룹과 회중 사이에 막힘 없는 ‘소통의 문화’가 형성되어야 하고, ‘정보 공개’와 ‘투명한 재정’을 통한 신뢰가 구축되어야 한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을 경우, 붕괴는 내부에서 시작되고 결국 참담한 실패를 맛 볼 수 있음을 명심(銘心)해야 할 것이다.
3) 장기전은 많이 ‘가진 자’와 ‘힘있는 자’에게 절대 유리하기 때문에, 시간은 우리편이 아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법적 다툼은 ‘법정 안’에서만 싸우는 싸움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과 상대할수록 ‘법정 밖’의 로비와 정치가 승패를 좌우한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친오진영은 아무리 교회의 재정이 힘들다 해도 이 싸움을 위한 실탄(돈)은 이미 충분히 확보해 놓고 있으며, 필요시 목회비나 판공비나 구제비나 선교비 또는 기타 경비로 얼마든지 뽑아낼 수 있다. 또 이미 뿌려놓은 로비자금도 상당할 것이며 꽤 오랫동안 그 약효가 지속될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맨땅에 헤딩’하는 것같이 보여 걱정스럽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對敵)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눅 14:31) 비록 이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의 도’에 관한 교훈을 주시려고 하셨던 말씀이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적용할 필요가 있는 말씀이다. 우리는 ‘믿음’이란 말로 만용(蠻勇)의 우(愚)를 범해서는 안되고, ‘믿음’이란 말로 하나님을 시험(試驗)해서도 안 된다.
4. 그러면 우리에게 긍정적 요소는 무엇인가?
A. 우리의 고난은 낭비(浪費)가 아니다.
지난 한 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사랑의교회에서 배우고 훈련 받은 것 보다 지난 한 해 동안 배우고 느낀 것이 더 많을지 모른다. 지금 우리는 불의에 대한 ‘싸움터’에 놓여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체험적 ‘배움터’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 동안 지식으로만 배운 것이 머리를 통해 가슴까지 왔었다면, 금년에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며 배운 것은 ‘뼈 속 깊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피를 통해’ 흐르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고난은 귀한 ‘배움의 기회’일지언정 결코 낭비가 아니다.
많은 분들은 우리가 그토록 자부심을 가지고 사랑했던 사랑의교회가 어떻게 이렇게 망가지게 되었는지 안타까워하며 슬퍼하고 있다. 또한 그만큼,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그 장본인을 향하여 비난과 분노의 심정을 표출하게 된다. 그것은 깨어있는 성도라면 누구나 가지게 되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마음조차도 성령님께 의탁해야 한다. 성령의 필터를 통해 불순물과 찌꺼기를 걸러내고 순전(純全)해진 ‘마음의 창(窓)’으로 현실을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현실을 주관적(主觀的)인 눈으로 보고 감정적(感情的)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성경적인 분별력’이며 지.정.의.의 균형을 갖춘 ‘인격적인 통찰력’이다.
숭실대 김회권 교수는 사랑의교회 사태를 다룬 그의 기고문에서 “하나님의 역사 속 ‘활동 동선(活動 動線)’을 포착하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 위기의 시기에 사랑의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에 최선을 다해 달라는 냉철하고도 따뜻한 권고의 글을 써 주셨다. (복음과상황 269호, 2012.04.11)
따라서 우리는 그렇게도 고단했던 한 해를 결코 낭비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실수(失手)가 없으신 분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다.(롬8:28) 우리의 과제는 이러한 고난 중에도 우리를 통해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B. 우리는 억울(抑鬱)하지 않다.
많은 성도들이 예외 없이 느끼는 감정은 ‘억울함’이다. 우리가 그렇게도 힘겹게 일구고 쌓아왔던 교회를 하루 아침에 악한 자에게 빼앗기고 나니 얼마나 억울한가? 이렇게 참담할 수 있는가? 울분이 솟는다. 그러나 거친 호흡을 고르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정말 억울한 일인가? 이런 참담한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을 억울하게만 생각하면 이 모든 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오늘의 고통스러운 현실이 우리의 잘못과 죄에 대한 당연한 ‘대가(代價)’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나 인과응보의 개념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때 앗수르의 산헤립를 통하여 벌하셨고 유다가 범죄했을 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벌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사랑의교회의 범죄를 오정현이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도구(道具)로 사용하여 벌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이 벌은 회복을 전제로 한 아버지의 ‘사랑의 매’다.
이것은 필자만 아는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상기시켜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억울한 심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의 뜻’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이 일의 시작부터 돌이켜 보건대, 처음 우리는 ‘교회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무관심하게 지냈던 우리’를 자책하고 회개했다. 그 동안의 잘못이 너무나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동안의 잘못을 회개하면서, 악을 향한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제는 정신을 차렸으니 악을 처단하고 빼앗긴 교회를 되찾자. 승리할 때까지 절대로 뒤로 물러설 수 없다. 퇴로도 없고 후퇴도 없다. 오직 앞으로 전진하자.”- 혹, 이것이 우리진영을 지배하고 있는 주된 신념(信念)이요 정서(情緖)가 아닌가?
사실 필자도 동일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건 아닌 것 같다”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가데스’에서 일어났던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 스토리를 기억하게 해 주셨다. (민14:39-45, 신1:41-46)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탐군들의 보고(報告)를 듣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이어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모세로부터 하나님의 저주(詛呪)의 말씀을 듣게 되자 크게 슬퍼하였다. 그리고서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 백성을 치겠다고 출정(出征)을 서둘렀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너희가 하나님을 배반한 죄로 인하여 너희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 지금 출정한다면 그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는 것이니 올라가지 말라. 전쟁에서 패하고 말 것이다.”고 간곡히 만류(挽留)했다. ‘그래도’ (민14:44) 그들은 경솔히 적지(敵地)로 올라갔고 결국 그 전쟁에서 참패(慘敗)를 당하고 말았다.》
이 역사적 스토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주관과 감정에 몰입된 나머지 ‘하나님의 뜻’을 읽어 내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한 번의 잘못으로 끝났을 일을 두 번의 잘못으로 인해 수 많은 인명의 손실까지 감수하게 된 것이다. 위에서 밑줄로 표시된 ‘그제서야’는 과도한 자책(自責)을 말하고, ‘그래도’는 그릇된 열심(熱心)을 말한다. 이와 같이 과거의 잘못에 대한 ‘과도한 자책’이나, 뒤늦게 잘못을 보상하려는 때 지난 ‘그릇된 열심’은 자칫 허공을 치는 헛수고가 될 수 있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절대 억울하지 않다. 아니, 억울하다고 생각 해서는 안 된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위한 바른 해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다. 결론
이상 길고 지루한 글을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주셔서 감사 드린다. 법’과 ‘표’와 ‘시간’이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다고 해서 이런 수단을 배제하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사용하되 냉철한 현실 분석을 통해서 때를 따라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 한편, ‘믿음’으로 포장된 ‘허황(虛荒)된 낙관론(樂觀論)’이나 ‘하나님은 무조건 내 편’이라는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독선(獨善)’을 경계해야 한다. 온건한 주장이나 소수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법’과 ‘표’와 ‘시간’이라는 수단에 과도한 집착을 하면 실패한다. 설령 목적을 이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에 의한 승리가 아니면 진정한 승리가 될 수 없다. 그 승리가 언젠가 우리의 발목을 다시 잡을 것이다. 필자는 특별히 ‘표’에 대한 집착을 우려한다. 표는 가장 비현실적이고 그것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지불이 크다. 지금 우리진영의 분위기는 ‘한 사람의 성도’를 ‘한 영혼의 소중성’이 아니라 ‘한 장의 표’의 가치로 밖에 인식하지 않는 것 같다. 한 장의 표가 아무리 중요한 역할을 한다손 치더라도, 지금 현재 한 사람의 성도의 간절한 필요를 유보시키고, 삶의 가치를 제한시키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다시 말해서, ‘법’과 ‘표’와 ‘시간’은 우리를 구해 줄 수 없다. 여기에만 모든 힘을 다 쏟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한편 “우리의 고난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또 우리는 절대 억울하지 않다”는 필자의 호소(呼訴)를 모든 분들이 함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러한 사실들을 인정할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영적 안목(眼目)’이 생길 수 있고 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하나님의 해법(解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이 수렁에서 구할 수 있다.
지금의 이 싸움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싸워야 한다. 서론에서 언급해 드린 대로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다. 세상 방식을 그대로 답습할 수 없다. 세상과는 달라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 사람에게 너무 교회 걱정을 많이 시키고 있다. 우리 크리스천은 가치지향적인 집단이다. 목표달성이라는 성과에만 매달려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를 포기한다면 이미 진 싸움이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이 상황을 보시고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실까?”를 물어야 한다. 4복음서를 두 번이고 세 번 네 번이고 답을 찾을 때가지 읽고 또 읽어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지금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투 트랙’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지를 향한 ‘궤도’ 위에 우리 열차의 두 바퀴를 올려 놓을 수 있게 하고, 우리의 나뉘어진 마음을 다시 합쳐지게 함으로써 공동체가 보호될 수 있고, 장기적인 전쟁을 위해 효과적인 전쟁을 가능하게 하는 ‘최선의 전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투 트랙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그림이나 자세한 계획은 ‘투 트랙’ 원칙을 먼저 받아들이고 난 후 머리를 맞대어 보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필자의 주장을 선택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온전히 여러분의 몫이다. 여러분의 미래는 여러분들이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구원은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나누어 주실 수 있지만, 축복은 여러분들의 그릇만큼 부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내심(內心) “그러면, 여러분들이 옳다고 믿는 대로 마음껏 해보세요. 저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방관자의 입장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방관자의 입장이 되지 못하고 이렇게 ‘눈치 없이’ 욕(辱)만 얻어 먹는 글을 쓰게 된 것은 역사(歷史)는 ‘시험(試驗)할 대상’이 아니며 ‘실패(失敗)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인생을 두 번 살 수 없듯이, 소위 사랑의교회의 ‘남은 자’(The Remnants)요 ‘알곡들’이라는 우리진영의 미래도 우리가 결정하는 대로 그 결과를 감수(甘受)할 뿐이지 되돌아 와서 다시 시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안타까움에서 쓴 글이다. (끝)
종료나무님...다시 찾아와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를 드립니다.제가 무지해서 귀하게 쓰신 글에 마음을 다 전해드릴 수는 없지만 읽고,읽으면서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위의 황장로님의 글에 전적으로 동의를 합니다.황장로님,지혜를 모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종려나무님 기도와 애끊는 마음으로 글써주심에 감사드립니다~우리의 궁극적 관심이 어디에 있어야하고 무엇이 지켜져야할건지 생각해보게 하는 기도해야할 아침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뚝 뚝 묻어나는 종려나무님의 글을 마음으로 감사하며 잘 읽었습니다.
장로님께서 얼마나 기도하며 이 글을 쓰셨을지요.
댓글로 표현하지 않은 많은 분들도 공감하며 감사하며 이 글을 읽었을 것입니다.
다시한번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살아도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죽어도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림이 내 삶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우리들의 오늘의 이 싸움의 승패도 그리 중요하지 않을 듯합니다.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각자 성령님과 긴밀히 소통하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눈다면 이것이 세상과 싸워 승리하는 크리스천의 삶이 아닐까요. 결과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무시하고 우리들의 인간적 노력으로 뭔가 이룰 수 있다는 교만이 가장 큰 사탄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결과는 주님께 맡기고 서로 주안에서 화목하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종려나무님의 감사합니다.
마당기도회 탄압은 정문자물쇠에서, 각파이프로 정문과 각 통로를 봉쇄하고, 교회전체를 판넬로 울타리를 치더니, 어젠인원까지 동원하여 저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인원은 850명, 1200명, 2000명으로 점점 폭증하더니, 어젠 본당과 1층을 가득메웠습니다.
수천명의 성도를 이끌려면, 종려나무님의 제안서를 심도있게 다시금, 논의할 때라 봅니다.
점점 힘들어지는 강남본당 진입과 SGMC에 있는 교우들의 포용, 영적 갈망을 해소할 수 있는 올바른 교회관을 세울 지도체를 구성할 때인것 같습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것을 후회하노니..."<사무엘상 15장11절> 다윗이 행함에서 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종려나무 선교사님의 글을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많이 고심 하셨겠습니까? 그래도 교회가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기에 다시 글을 올리신거라고 생각합니다.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 그 한 사람 때문에 순수하게 신앙을 지켜온 많은 분들이 속상하고 힘들어 하는 모습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사랑의 교회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많은 분들이 종려나무선교사님의 생각과 같다고 생각합니다.글을 읽고 판단하도록 했으면 합니다.논쟁을 일으켜서 교회회복에 회의를 느끼게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공감합니다.
활의각 장로님의 글에 동감 입니다 꼭 필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공감합니다!!
활의각 장로님의 글에 동감 입니다 꼭 필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선교사님 글 너무 감사합니다
예민한 반응의 댓글이 있어서 조금 두렵지만
저는 선교사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선교사님이 저희와 함께 이곳에서 사역해주심 안될까? 하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조심스럽게요
모든의견 소중하고 존중합니다
좋은 참고자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구요
갱신위에서 많은 토의가 필요할줄 알겠습니다
또한,지금 우리같은 평신도들은 찬성,반대의 날선 공방이 아니라 갱신위와 하나가 되어야 할때인줄로 알고 있겠습니다.
때론 문제를 가까이에서 볼때 보다 멀리서 바라보왔을때 더 정확이 보일때가 있는것 같습니다.
어제밤 선교사님의 글을 읽으며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되었고 많은 갈등가운데 있는 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4천여명의 사랑넷 회원의 한사람,한사람 다 다를 것입니다. 다만 방향성에서 선교사님의 제안은 우리 모두 기도하며 생각을 나누어 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분리와 분립이 아닌 분열로 보아야 합니다.
제안처럼, 예배처는 일단 강남본당을 사수하고 올바른 교회 공동체를 이끌 조직을 구성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사무엘상 16장1절>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사무엘상 18장29절>
"중략...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사무엘하 3장 1절>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사무엘하 5장3절>
질문 있습니다. 제가 몰라서 묻습니다. 삼상16:1에서 실제 다윗왕이 와위에 오르기 까지 몇년 걸렸는지요?
제가 생각이 많거든요^^;
소년이 30에 왕이 되었으니 십여년이 걸렸지요, "다윗의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중략" <사무엘하 5장4절>
하지만 과정에서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사무엘상18장7절>,
또한, 사울의 가족, 아들 요나단까지도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사무엘상18장1절>
이는 사랑의 교회가 SGMC가 아닌 강남본당이 정통성을 인정받도록 똑바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젠 숫적으로 조금 더 치밀한 조직력과 SGMC의 중도파, 아니 오목사측까지도 포용해야 합니다.
어제도 친오쪽을 몸으로 막을 것이 아니라 같이 예배토록하여 우린 언제나 열려 있음을 표해야죠.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저는 글이 길다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한번에 읽었습니다. 그리고 츳점이 이렇게 선명한데도 애매하다고 하시니 제가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무엇이 애매한 부분이 있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 곳에서 힘든 사역 중에도 이렇게 교회를 사랑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논리정연하고 명쾌한 글 다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읽으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미세한 부분까지 지적되어 많이 공감했고 정리가 되네요
여러 의견을 비교분석하여 최선의 방법을 모색하면서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하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이 글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더불어 현실을 감안하여 정체성을 가지고 큰 그림을 보자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직 동력이 많이 남아 있고 검찰조사, 재정공개 등 변수도 있는 만큼 조금 더 진척이 되는 상황을 보고 신중히 고려했으면 합니다. 이제까지의 개혁 활동이 솔직히 많이 아깝습니다.
종려나무님 글을 다시 보게되어서 반갑습니다. 더불어 초기부터 많은 것들을 일깨워 주셨던 분들의 글도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건축관련, 재정관련, 신학적인 문제점 등등 다양한 분야의 글들이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고
실체를 알게해주어 오늘에 이르렀지요. 온몸을 던져 앞장서 일하시는 사회넷과 갱신위 여러분들의 수고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정말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주일 마당기도회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성급히 단언하지 말고 모든 다양한 의견과 제안들을 서로 수용하며 좀 더 유연해졌으면합니다
맞습니다.
아낌없이 수고하고 계시는 갱신위원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다양한 의견과 제안들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시고 검토결과를 공유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전략상 기밀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겠지요.
iangma 님의 글 공감합니다. 모든 다양한 의견과 제안들을 서로 수용하며 좀 더 부드럽고 지혜롭게 진행 되어졌음 합니다.
선교사님의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주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시는 안타까운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지난 10여개월의 경험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계셔서 일을 행하신다고 보여집니다. 교회 공동체의 존재목적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까지 이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일들, 각성과 변화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선교사님께서 말씀하시는 투트랙이 지금 우리 공동체에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투쟁일변도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은 시기적으로 기도하면서 좀 더 지켜봐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우리 공동체 지체들의 각 심령에 역사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선한 일들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를 세우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우신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지금 일하시고 계신다고 보여집니다. 단적인 예가 제 자신이고 주위에 계신 분들에게서도 이를 목도하게 됩니다. 지금은 광야를 지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한가지 우리 공동체를 이루는 지체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고난과 함께 하는 영광의 시간들을 예비하고 있지 않나 생각되며, 그 어느 때보다 주를 사랑하고 복음과 교회를 순전하게 사랑하는 시간들이라고 생각됩니다. 한 분 한분 정말 보석같든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심령에 역사하시는 성령하나님과 그 역사를 놓치지 않기를 늘 원하고 있으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계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흐름은 거대하며,. 특히 요즘에는 매주마다 기이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성령하나님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선교사님의 글도 그런 점에서 많은 분들께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공감합니다. 2000여명이 기도회를 마치고 나오는 얼굴과 대화 속에서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의 모습을 봅니다.
환란으로 인해 더욱 뭉쳐진 동지애와 함께요.
선교사님 감사합니다…
일부의 오해는 Two tracks에 대한 개념을 바로 이해 하지 못한데 있다고 봅니다. TwoTracks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양면작전
(기도회에 집중하여 힘을 쌓고 응집력을 높이면서, 오목의 잘못을 밝혀 그를 내려않도록 하는 전략입니다) 이미 기도회는 SGMC와 강남 우리사랑의교회 성도간에 분리하여 개최되고 있습니다. 오목과의 법정투쟁은 길고도 힘든 길입니다. 이런데 우리가 모여 기도하고 예배하며 응집력을 유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단견에 사로 잡혀 하나만 보지 마시고 대국적 시각을 가지고 전투에 임해야 합니다. 개념을 바로 이해 하시고 목표를 흔들림 없이 지혜롭게 이룩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황장로님의 글 백번 공감하며 아멘입니다.!! 황장로님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100% 동감합니다. 갱신위원회는 빠르고 그러나 신중한 응답을 종려나무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 정도 수준의 엄격한 논리와 냉철한 상황 분석과 말씀에 근거한 전략 대안을 그대로 흘려서는 절대 안됩니다. 기존의 방책과 다르다고 간과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겠지요.
아멘!
"우리가 오목사만 퇴진시키는 것을 지고지상(至高至上)의 목표로 삼고... (중략)
앞으로 계속되는 필자의 글에서 이 부분은 더 다루어질 것이다."
-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로 우리의 현실을 점검할 수 있게 해 주신다고 약속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같은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종려나무님의 글 한마디 한마디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
선교사님 다시 글을 써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갱신위의 무응답으로 선교사님께서 절필하셨나 하고 무척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황의각장로님께서 선교사님의 제안에 대한 명확한 뜻을 댓글로 달아주셔서 많은 우리 성도들께서 참 뜻을 이해하리라고 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선교사님.
계속 글을 볼수있게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