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구한말 기울어 가는 조선의 아련함이 서린 역사의 현장 강화를 걷다~
<2019년 6월 22일, 토요일>
오늘은 오전 8시 경 여의도를 출발해 직장 트레킹 회원들과 함께 섬 전체가 역사의 현장인 우리나라 4번째 크기의 섬 강화도로 역사기행(정족산성 & 광성보) 트레킹을 나섰습니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정족산성)에서 조선말 양헌수 장군은 온 몸으로 프랑스군을 막아냈으나, 신미양요때 어재연 장군과 250여명의 백의전사와 최후를 맞이한 광성보 포대 위에서 그 날의 미스터 선샤인을 찾아봅니다~
☆ 코스 : 온수리성당 ~ 정족산성(북문 ~ 정상 ~ 서문 ~ 남문) ~ 전등사 ~ 정족산성(동문~ 북문) ~ 온수리성당 ~ 차량이동 ~ 광성보(6.5km, 4시간)
오전 9시 경 강화나들길 3코스 시점인 온수공영주차장에 도착해서 트레킹을 시작 후 바로 뒷편의 강화 온수리 성공회 성당(江華溫水里聖公會聖堂)에 들렸습니다~
강화 온수리 성공회 성당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소재하는 목조 성공회의 본당 예배당과 2층 종탑 건물(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2호, 2003년 10월 27일 지정)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6년(고종 43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가 건립한 성당으로 '성 안드레 성당' 으로도 불리우며,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기법을 활용하여 서양 그리스도교의 종교적인 성당 건축 방법과 공간 구성을 확립한 동서 절충식 강당형의 목조건물로, 우리나라에 전래된 초기 서양 기독교 성공회의 교회양식을 볼 수 있는 종교사 및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본당 내부의 모습입니다~
본당은 정면 9칸 측면 3칸의 규모이고, 용마루 양끝에 십자가를 장식해놓았으며, 건물 내부는 예배공간인 신랑(身廊)과 측랑(側廊)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제관과 문루 입니다~
2층 종탑 문루는 성당 남쪽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인데, 중앙 1칸을 2층 종루로 삼은 2층 누각식 외삼문 형식이며, 종루에는 본래 서양식 종이 달려 있었으나 1945년 일제에게 징발당한 뒤 1989년 새로 우리나라 전통양식의 종을 제작하여 걸었습니다~
본당 좌측의 현대식 예배당과 내부 모습입니다~
온수리성당를 돌아나와 온수감리교회를 지납니다~
온수리감리교회 뒷편의 완만한 숲길로 접어들어 초록빛 숲속을 상쾌한 기분으로 걷습니다~
삼랑성을 바로 앞두고 가파른 숲길을 다소 숨차게 오릅니다~
조금 땀이 나기 시작할 즈음 삼랑성의 북문에 도착했습니다~
삼랑성(三郞城)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소재의 문화재 국가사적 제130호(1964년 6윌 10일 지정)로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 이라고도 불리우는데 단군이 세 아들인 부여(夫餘), 부우(夫虞), 부소(夫蘇)를 시켜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길이는 2,300m에 달하며 자연활석을 이용하여 축조된 성으로 성 내에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전등사가 있으며 고려 고종 46년(1259)에는 이 성안에 궁궐(이궁)을 지었으나 현재는 무너지고 터만 남아 있습니다~
조선 현종 1년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할 사고를 설치하였는데, 무너진 것을 1998년 강화군에서 복원하였고, 조선 고종 3년 병인양요 시에는 양헌수 장군이 이 성을 침입하는 프랑스군을 무찌른 전승지 이기도 합니다~
북문을 통과하여 성곽길 그늘에 올라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갑니다~
우측 동문의 반대 방향인 좌측 정족산 정상 방향으로 성곽을 따라 다시 오르막이 이어집니다~
성곽길 능선에서 바라본 강화도 동ㆍ북 방향 전경 입니다~
길정 저수지가 가운데 자리하고 있습니다~
삼랑성과 정족산 정상 안내목 앞에서 인증샷을 남깁니다~
저 멀리 마니산을 배경으로도 한 폼을 잡습니다~
성벽 옆에 자라는 멋진 소나무를 지나서 서문에 도착했습니다~
다시 성곽길을 오르며 지나온 길을 되돌아 봅니다~
저 멀리 염하와 건너편 김포가 희미하게 보입니다~
초지대교가 보이는 소나무 그늘에서 휴식하며 과일 등 간식을 맛나게 나누고 갑니다~
성벽을 돌아나와 한 동안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남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삼람성 남문 종해루(宗海樓) 앞ㆍ뒤 전경 입니다~
삼랑성에는 동ㆍ서ㆍ남ㆍ북에 4대문이 있지만 남문을 제외한 3개 문에는 문루가 없으며, 영조때에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였다 하는데 남문의 문루가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6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한창 진입로가 공사중인 전등사로 향하며 입구의 아름드리 보호수 은행나무 들을 지납니다~
전등사 '무설전(無說殿)' 에 들렸다가 '대조루(對潮樓)'를 통해 전등사 본당으로 오릅니다~
전등사(傳燈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안에 있는 사찰로 381년(소수림왕 11년)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 하였고, 그 후 고려 제27, 28, 30대의 충숙왕(忠肅王)ㆍ충혜왕(忠惠王)ㆍ충정왕(忠定王) 때에 수축 후 1625년(인조 3년)과 1906년에도 중수하였으며, 또 일제강점기에도 두 차례 중수하였습니다~
전등사라는 이름은 충렬왕(忠烈王, 1274~1308)의 비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이 절에 옥등(玉燈)을 시주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이때 정화궁주는 승려 인기(印奇)에게 대장경을 인간(印刊),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고색창연한 전등사 대웅보전(大雄寶殿)과 범종(梵鐘) 종루 입니다~
전등사에는 보물 제178호인 대웅보전과 더불어 보물 제179호인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및 보물 제393호인 전등사 범종이 있으며, 대웅보전에는 1544년(중종 39년)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改版)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목판 104장이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삼성각을 지나고 강화나들길 이정표를 따라 북문 방향의 정족산사고로 향합니다~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에 도착했습니다~
정족산사고는 정족산성 내에 위치한 조선시대 정부의 문서보관소로 전등사 서쪽에 있었고, 실록의 보관이 중심 업무였는데 강화도에 사고가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1595년(선조 28년)이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춘추관(春秋館)과 충주(忠州) ·성주(星州)의 사고가 불타고 유일하게 남은 전주(全州)사고의 실록이 해주(海州)를 거쳐 강화부 관아 건물에 보관되었던 것으로 그 후 다시 영변의 보현사(普賢寺)와 객사(客舍)을 거쳐 1603년 새로 설치된 강화도 마리산(摩利山)사고에 옮겨져 복간되었습니다~
정족산사고는 1653년(효종 4년) 마리산사고에 화재가 일어남으로써 건립이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특히 효종대 이후로 강화도가 국가의 위기에 대처할 기지로 적극 개발되었으므로 그 곳에 사고를 둘 필요성이 더욱 커졌으며 1660년(현종 1년) 정족산성이 완성되고 실록을 성 내의 사고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관례대로 장사각(藏史閣)과 함께 선원각(璿源閣)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고로 실록이 옮겨진 것은 1678년(숙종 4년)이었고, 이후 실록이 새로 만들어지는 대로 1부씩 보관하였으며, 그 밖에 왕실 족보나 의궤(儀軌)를 비롯한 여러 정부문서를 함께 보관하였는데 춘추관에 소속되어 그 곳에서 관장하였으나 현지의 관리는 수호사찰인 전등사에서 맡았습니다~
정조대에 강화부 관아 위쪽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이 설치되어 국왕의 초상화나 친필 외에 많은 서책이 보관되었지만, 이 사고는 그것과 별개로 계속 운영되었으며 외규장각과 달리 병인양요 때 피해를 입지 않았고, 1910년 이후 보관 서적들은 규장각 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모여져 함께 관리되었고 지금의 서울대학 규장각 도서로 이어졌으며, 건물은 1930년경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장사각과 선원각의 현판만이 전등사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정족산사고 내부 모습입니다~
정족산사고를 뒤로하고 다시 원점 회귀를 위해 북문으로 오릅니다~
일정상 정족산성 동문에 들리지 못하고 아쉽지만 북문을 통과해서 숲길을 내려갑니다~
숲길을 벗어나며 온수감리교회가 보입니다~
다시 찾은 온수리성공회성당 예배당에서 사제님으로부터 본당에 대한 유래와 구조 및 건축 방법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는 유익한 시간을 갖습니다~
오전 11시 40분 경 오전 트레킹을 마치고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시골밥상 맛집으로 이동해서 정성이 가득한 점심을 맛나게 먹고 오후 12시 40분 경 오후 트레킹 시점인 광성보로 향합니다~
오후 1시 경 광성보 문루 안해루(按海樓)에 도착해서 다시 트레킹을 어어갑니다~
강화 광성보(江華 廣城堡)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광성나루(광성진)에 있던 성보(城堡)로써 사적 제227호(1971년 12월 28일 지정)이며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강화 12진보(鎭堡, 5진 7보) 중의 하나로 몽골의 침략과 신미양요를 버텨낸 곳으로 지난해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tvN 드라마 '미스터선샤인' 첫 회에서 방송된 전쟁장면, 즉 1871년 근대조선군과 미군이 싸웠던 신미양요 역사의 현장 입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으로 조선 광해군 때 헐어진 곳을 다시 고쳐 쌓았으며, 1658년(효종 9년)에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고, 그 후 숙종 때(1679년)에 이르러 완전한 석성(石城)으로 축조하였습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되었던 격전지로 그 해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극동함대를 초지진·덕진진·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는데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을 중심으로 용감히 항전하였으나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 되기를 거부하여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전원이 순국하였습니다~
이 때 파괴된 문루와 돈대(墩臺)를 1976년에 복원하였으며,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魚在淵) 장군의 전적비 등을 보수·정비하여 충절을 기리고 있습니다~
광성보 문루 앞 그늘에서 문화해설사님으로부터 광성보와 신미양요 등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는 시간을 갖습니다~
문화해설사님의 안내로 광성보 좌측의 광성돈대에 올랐습니다~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딸린 원형의 돈대로, 돈 안에는 당시에 사용했던 대포, 소포, 불랑기(조선 중기에 제작된 서양식 청동제 화포)가 복원되어있고, 주변으로 성축을 쌓았으며 신미양요때 파괴되었다가 19770년 포좌 4개 소와 포 3문을 복원하였습니다~
손돌목 돈대로 향하며 길목에 있는 쌍충비각을 지납니다~
'쌍충비각'은 신미양요 시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로 어재연ㆍ어재순 이하 전 수비군은 열세한 병기로 미국 아세아 함대의 해병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려 전 수비군이 장렬히 순국한 곳에 나라에서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습니다~
쌍충비각 옆의 '신미양요 순국무명 용사비'는 신미양요(1871년)때 미군이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던 것에 비해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과 군졸이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우다 순국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 입니다~
어느새 염하가 내려다 보이는 손돌목 돈대에 도착했습니다~
손돌목 돈대(孫乭項墩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53돈대의 하나로 덕진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으며 뱃사공 손돌의 전설에서 돈대의 이름을 땄는데 일명 손석항 돈대라고도 하며, 용두돈대에 못미쳐 구릉 정상부에 둥그랗게 쌓은 돈대로써 강화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여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679년(숙종 5)에 축조하였는데, 강화도의 다른 돈대들이 사각 모양인 것과는 달리 원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외국 함대들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서,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파괴되었던 성벽을 복원하였습니다~
염하를 바라보며 용두돈대 방향으로 내려갑니다~
저 아래 해안가에는 광성보 포대가 설치되어 있고, 쉼터를 지나면 손돌목에 대한 전설과 유래 안내판이 있습니다~
해안가에 돌출된 용두돈대(龍頭墩臺)에 도착했습니다~
용두돈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강화 53돈대의 하나로써 광성보가 아닌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고, 손돌목 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 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축조되어 고려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시되었으며 1679년(숙종 5)에 돈대가 세워져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르면서 외국 함대들과 벌인 치열한 전투로 성벽이 크게 파괴되었으나,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용두돈대의 대포와 복원 시 돈대 중앙에 세운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입니다~
기념비 앞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 선생이 짓고 김충현 선생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용두돈대 앞을 흐르는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고 하며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는 전설의 주인공인 손돌의 묘가 있습니다~
손돌목(孫乭項)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지역에 있는 목으로 지형상 이 지역이 바다로 돌출해 있는데 대안(對岸)의 강화도 광성보(廣城堡)가 있는 곳도 바다로 돌출해 있어 두 지역 사이가 좁은 여울의 형태를 이루게 됨에 따라서 밀물 때 이곳을 흐르는 해류가 급류를 이루어 배가 건너다니기 어렵습니다~
손돌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있던 뱃사공의 이름에서 나왔으며 그에 관한 전설은 2개로 되어있는데 고려 때 몽고의 난을 피해 급히 이곳에 도착한 왕이 바다를 건너고자 할 때 손돌이 아직 바람이 자지 않았으니 쉬었다 건너자고 하여 왕이 그를 모반자로 생각하여 처형을 하니 광풍이 불이 바다를 건널 수 없게 되었고, 왕이 크게 후회하여 그가 탄 말의 목을 베어 제사를 지내고 나니 바람이 잔잔하여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전설과 또 하나는 왕이 탄 배가 바다를 건널 때 손돌이 배를 급류쪽으로 몰아 위험을 느낀 왕이 손돌의 행동을 의심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그가 죽기 전 자기가 죽은 뒤 바다에 바가지를 띠워 그 바가지가 가는대로 배를 몰면 안전할 것이라고하여 손돌을 죽인 뒤 그의 말대로 했더니 배가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고 하는 전설입니다~
이에 왕이 크게 뉘우쳐 손돌의 무덤을 만들고 크게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하며, 음력 10월 20일경인데, 이때는 겨울의 북서풍이 강하게 불어 겨울의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며 이 시기에 부는 바람을 손돌풍(孫乭風)이라고 합니다~
광성보 문루로 되돌아 나오며 신미 순의총에 들립니다~
신미 순의총은 신미양요때 광성보 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하다가 전사한 용사들의 묘가 있는 곳으로 당시 어재연 장군과 아우 재순을 비롯한 군관, 사졸 53인의 전사자중 어재연 형제는 고향인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분별할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습니다~
오후 2시 경 광성보 안해루로 원점 회귀하여 오늘의 행복한 트레킹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향합니다 ~
오늘 트레킹을 하며 담아본 이쁜 꽃 들 입니다~
첫댓글 고생하셨습니다^^
손인환 님 ! 격려해 주심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직장 동료분들과 강화도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는 현장을 두루 두루 돌아 보셨네요.
좋은 걸음 참 잘 하셨습니다.
강화는 정말 볼거리도 배울거리도 많은 곳이지요.
차량을 이용하며 하루에 많은 곳을 다 걸어보시니 얼마나 좋으셨을까요?
더운날씨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요즘도 왕성하신 발걸음 이어 가시겠지요?
폭염 조심하시고 좋은길 이으세요.
수고 하셨습니다.
가곡님 ! 강화나들길을 완주하며 부지런히 걸었던 역사의 장소를 좀 더 여유있는 발걸음으로 걷다보니 못 보거나, 충분한 역사적 배경과 의미를 몰랐던 것을 상세하게 음미할 수 있었서 좋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직장 트레킹 회원들의 정기 트레킹이라 대중교통으로 오가는 불편이 없어서 좋은 장점도 있지만 마음껏 걷지 못하는 단점도 있습니다~
최고로 무더워지는 날씨에 항상 건강 유의하시며 두 분께서 행복한 길나섬 이어 가시길 기원드립니다~
항상 격려해 주심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강화도의 역사적 사건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조금이나마 알게되었습니다.더위에 다녀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금강 홍보대사님 ! 강화도는 고려와 조선의 역사가 가는 곳마다 숨쉬고 있는지라 저도 항상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요즘 평화누리길 트레킹 외 코리아둘레길 노선조사도 하시는 것 같은데, 무더위에 항상 건강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응원해 주심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강화 참다운 역사가
있는곳이지요
더울때 건강 잘챙기시고
길위에서 뵙기를~~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두리님! 강화나들길 어느 코스를 걸어도 너무 좋지만 역사의 현장을 걸을 땐 가슴이 뭉쿨한 아픔이 있는 곳이 정족산성과 광성보 인 것 같습니다 ~
격려해주심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
폭염속 항상 건강한 발걸음 이어 가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