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고구려사극 [우씨왕후]와 관련하여 우씨황후의 시아버지가 되는 고구려 신대태왕에게는 현.남무.발기.연우 4명의 태자들이 있었다. 신대태왕은 장남 현 태자가 너무 신선仙도을 너무 좋아하기에 차남 남무를 동궁(후계자)으로 삼았다.
고구려는 원래 단군조선이전부터 계승되어온 신선도 국가였다. 신선도는 우리의 본향을 천국으로 인식하고 지상의 삶도 천국의 삶처럼 매순간 마음이 행복하게 사는 삶을 추구하는 정신문명이다.
고구려사초 고구려사략 제8대 신대제기第八世新大帝紀 제8세 신대제기
◎ 十一年乙卯, 三月, 上, 以<玄>太子徒善而好仙, 欲立<男武>太子為東宮. <男武>曰;“不可以越兄.” 按行州邑, 至<提那>而淹留. <玄>太子徃諭, 而還. <發岐>娶<虎川>. <朱>氏生女<夐>.
재위○ 11년{단기2508년/AD175}을묘, 3월, 상이, <현>태자는 선하기는 하였으나 선(仙)하기를 좋아하기에, <남무>태자를 동궁으로 삼으려 하였더니, <남무>는 “형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고 말하고는 주와 읍을 두루두루 살피며 <제나>에 이르러서 오래도록 머물고 있었으며, <현>태자가 찾아가서 알아듣도록 하였더니, 돌아왔다. <발기>가 <호천>에게 장가를 들었다. <주>씨가 딸 <형>을 낳았다.
◎ 十二年丙辰, 三月, 以<男武>為正胤, 后兄<穆天>為東宮大夫, <于素>東宮皂衣. <白面>薨, 年八十, 美容儀, 善画繪. 以<尙>太后外族, 居中用事六十年, 未有一失. 人稱其難, 然, 德不普身, 器不容國, 非宰相才, 云. <穆崇>太輔, <陽弼>左輔, <高衡>右輔. <盖婁>殂, <肖古>立.
○ 12년{단기2509년/AD176}병진, 삼월, <남무>를 정윤으로 삼고, 후의 오라비 <목천>을 동궁대부로, <우소>를 동궁 조의로 삼았다. <백면>이 나이 80으로 죽었다. 용모와 행동거지가 가지런하였으며, 비단 폭에 그리기를 잘 하였다. <상>태후의 외가 식구로, 벼슬살이를 60년이나 하면서도, 허튼 일은 한 번도 저지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하면서도, “덕이 몸에 널리 배어있지 않고, 그릇이 나라를 담아내지 못하여 재상감은 아니었다.”라고 하였다. <목숭>이 태보가, <양필>이 좌보가, <고형>이 우보가 되었다. <개루>가 죽고, <초고>가 섰다.
◎ 十四年戊午, 三月, 以 東 宮 皂衣<于素>女為東宮妃. 加<素>爵為<提那>沛者. 十月, 丙子晦, 日食. 上, 泫然流涕, 曰;“朕, 以不德, 忝居寶位. 上不能孝母, 下不能慈民. 昔, 我<東明仙皇>, 日行百善而猶以為不足. 朕, 欲日行一善而不及, 豈不悲哉.” 左右悚然. 是日, 太輔<穆崇>薨, 年六十九, <弼>代之. <高衡>左輔, <穆天>右輔.
○ 14년{단기2511년/AD178}무오, 3월, 동궁 조의 <우소>의 딸을 동궁비로 삼았다. <우소>에게는 작위를 더하여 주어서 <제나>패자로 삼았다. 10월, 병자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상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이르길; “짐이 부덕하여 보위를 더럽히고 있소. 위로는 모친께 효를 다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자애롭지 못하였소. 일찍이, 우리 <동명선황>께서는 하루에 백 가지의 좋은 일을 하시고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하셨소. 짐은 하루에 한 가지의 선행을 하고자 하여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소!”라 하였다. 좌우가 송연해 하였다{송구해서 등골이 오싹했다}. 이날, 태보 <목숭>이 죽어, <양필>이 대신하게 되었고, <고형>이 좌보가, <목천>이 우보가 되었다.
◎ 十五年己未, 九月, <梁貊公>・摂政<明臨答夫>暴薨, 年五十二. 葬以<梁貊大王>・駙馬都尉之禮于<質山園>. 有膽力権智, 謀事必成. 人以為天. 得<尙>太后寵, 專國政十五年, 內外洽然.
十二月, 上, 崩於「西 都」<鸞宮>, 春秋五十九, 葬于<故國谷>. 上, 寬厚好仁, 喜聞<漢>人經籍, 擇師而講. 欲行聖人之治, 而権委於<尙>太后・<明臨答夫>, 故不得如意而終. 惜哉.
○ 15년{단기2512년/AD179}기미, 9월, <양맥공>이며 섭정이었던 <명림답부>가 나이 52살에 갑자기 죽어, <양맥대왕>․부마도위의 예를 갖추어서 <질산원>에 장사하였다. 담력 있고 권도{위급 시에는 변통하는}의 지략이 있어서, 도모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었다. 사람들이 하늘처럼 여겼다. <상>태후의 총애를 받아, 국정을 15년이나 도맡아 보았는데, 도성 안팎 모두가 흡족해 하였다.
12월, 상이 「서도」의 <란궁>에서 춘추 59세로 죽어, <고국곡>에 장사했다. 상은, 너그럽고 어질었으며, <한>인들의 경적 내용을 즐겨 들었고, 스승을 두어 강의하게 하였으며, 성인의 다스림을 펼치고 싶어 하였으나, 정사를 <상>태후와 <명림답부>에게 위임하였던 까닭에, 뜻과 같이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니, 서글픈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