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아버지, 누구인가?…가난한 농사꾼에서 거제도 갑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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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 왼쪽부터 김대중·김영삼·전두환·노무현 전 대통령.
지난 9월30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친인 김홍조 옹의 장례식이 경남 거제도에서 열렸다. 상가에는 내로라 하는 거물 정치인이 줄을 이어 때아닌 ‘문상정치’가 이뤄졌다. 대통령을 만든 아버지는 어떤 사람들일까? 이승만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대통령의 아버지와 관련한 숨겨진 이야기를 공개한다.
#장면1 아버지는 아들 승룡(承龍)에게 족보를 수북이 내놓으며 달달 외우라고 엄명했다. 난해한 족보 공부는 죽기보다 싫었다. 아들은 처음에는 싫었지만 읽다 보니 점차 가문에 대한 자긍심도 생기고 가부장적 권위도 갖게 되었다. 승룡은 훗날 이승만 대통령이다.
#장면2 배가 침몰했다. 모두 가족을 구하느라 아우성쳤다. 어찌된 일인지 아버지는 가족보다 다른 사람들을 챙기느라 바빴다. 아버지는 평생 우직하게 일만 했지만 잘 풀리지 않았고, 가사는 아내가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아버지였다.
권력자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 국가를 이끌어가는 최고지도자에게 아버지가 차지하는 심리적 공간은 어느 정도일까? 프로이트(Freud)나 융(Jung) 같은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아버지는 모든 인간의 뇌리 속의 ‘영원한 권위체(權威體)’로서 아들의 성격과 리더십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전쟁영웅 알렉산더와 나폴레옹이 세계를 정복하고, 히틀러가 침략전쟁을 일으킨 심리 저변에도 아버지의 짙은 그림자가 있었다. 아버지는 대체로 아들에게 ‘남성적 세계관’과 함께 강인한 의지와 투지, 권력의지를 심어주는가 하면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예컨대 어린 히틀러는 포악한 성격의 아버지가 만취한 상태에서 어머니를 폭행하고 강제로 범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남성에 대한 적개심, 나아가 인간에 대한 공격 욕구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국무부 보고서의 내용 일부다.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이 험난한 정치역정을 헤쳐나가 권력을 잡고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도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지금껏 어머니에게 포커스가 집중된 탓에 아버지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가려 있었지만, 리더십에서 아버지라는 변수는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 국가지도자의 성장 과정은 성격을 형성하고, 성격은 리더십을 형성해 국정운영 곳곳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최근 대통령의 아버지에게 관심을 갖게 만든 계기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버지 김홍조 옹의 별세다. 김홍조 옹은 지난 9월30일 97세의 나이로 별세했는데, 거제도의 상가에 내로라 하는 거물 정치인이 줄을 이어 때아닌 ‘문상정치’가 이뤄졌다. 문상객이 어찌나 많았던지 거제도 일대의 화환이 동나고, 인근 꽃가게 주인들이 모처럼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아버지 콤플렉스의 양면성
아버지 김홍조 옹은 아들인 김영삼 대통령이 26세에 처음 국회의원 배지를 단 이래 60여 년 정치를 하는 동안 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아마 아버지 김홍조 옹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날 정치인 김영삼은 없었을지 모른다.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한눈 팔지 않고 정치인의 외길을 달려간 데는 지방 재력가였던 아버지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을 보면 대체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상대적으로 어머니와 아버지 가운데 어느 한쪽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경우로 나뉜다. 굳이 분류하자면 이승만·노태우·김영삼·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반면 박정희·전두환·김대중 대통령은 어머니 못지않게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심리학적으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 감정적이고 정이 많으며 변화무쌍한 감성적 세계관을 갖기 쉽다. 반대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 냉철하고 엄격하며 강직한 이성적 세계관을 갖게 마련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어린 시절 아버지는 아들에게 ‘동일시(identification)’의 대상이다.
아버지를 좋아하거나 반대로 싫어하면서 무의식중에 아버지를 닮아간다는 것이 동일시 이론이다. 예컨대 아버지가 엄할 경우 그런 모습을 싫어하면서도 아들은 자기도 모르게 엄격한 태도를 닮아간다. 그러면서 기필코 아버지를 능가하고야 말겠다는 극복 심리를 품기도 한다. 일종의 아버지 콤플렉스인 셈이다.
그런데 아버지 콤플렉스에는 양면성이 있다. 즉, 아버지가 지나치게 똑똑하거나 위압적이면 그 기세에 눌려 아들은 열등 콤플렉스를 갖게 된다. 위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아들은 무의식중에 ‘아버지를 반드시 앞지르고야 말겠다’는 극복 의지를 품게 된다. 이에는 박정희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이 해당할 것이다.
반대로 아버지가 무기력한 존재였을 경우 그 초라함을 느낀 아들은 한사코 아버지의 존재를 은폐하려는 또 다른 열등 콤플렉스를 갖게 된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발견된다. 두 대통령의 자서전을 보면, 어머니의 존재는 큰 반면 아버지의 존재는 왜소하기 짝이 없다.
노 대통령이나 이 대통령은 공사석에서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종종 했지만, 아버지에 대해 언급한 적은 드물다. 그만큼 이들의 뇌리 속에 드리운 아버지의 그림자는 미미하지만,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이제 이승만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삶과 그것이 미친 심리적 영향을 간략히 살펴보자.
④ 이승만 대통령의 아버지, 이경선─보학에 능한 한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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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전 대통령(오른쪽에서 둘째)이 미국으로 가기 전 아버지 경선공(왼쪽에서 둘째)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흔히 이승만 대통령의 리더십을 ‘가부장적 권위주의’라고 한다. 긴 수염을 늘어뜨린 봉건시대 집안의 어른처럼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한다는 뜻이다. 이 대통령이 훗날 12년 동안이나 나라를 집안 다스리듯 가부장적으로 통치한 이면에는 가문의 영광과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이승만 대통령의 가문은 조선 제3대 태종의 장자인 양녕대군의 16대 후손으로 조선 왕조의 직계 후손이다. 게다가 6대독자여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홀(G .Hall)에 따르면 독자는 과도한 애정과 간섭을 받고 자라기 때문에 자아의식과 의존 심리가 강하다. 집안에서 유아독존적 존재(single star)의 위치를 차지해 자존심이 세고 신경질적 경향이 강하다.
이 대통령의 아버지 이경선 씨는 보학에 능해 선조들의 내력을 훤히 꿰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손이었기 때문에 선조들의 업적을 기리고 전수하는 데 대한 자긍심이 무척 강했다. 완고한 아버지는 어린 이승만에게 족보를 주며 달달 외우도록 엄명했고, 조선 왕조의 후손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자긍심을 불어 넣어 주었다.
어린 이승만은 어렵고 딱딱한 족보 공부를 하는 것이 정말 싫었지만, 화려했던 조상들의 자취를 더듬는 과정에서 강한 엘리트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는 일개 돗자리 장수였던 유비가 어머니로부터 황족의 후예임을 한시도 잊지 말고 명심해 옛 영광을 되찾으라는 가르침을 받으면서 야망을 키워갔던 <삼국지>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유소년기의 이승만은 조선 왕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전근대적 사회에서 아버지로부터 선민의식과 우월감, 엘리트 의식을 배웠고, 이는 훗날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뿌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가부장적 집안 분위기 탓인지 이승만 대통령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했다. 예컨대 이 대통령은 재임 중 <우남 이승만전>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판했는데, 아버지의 이름 뒤에 존칭이 빠졌다는 이유로 경찰을 동원해 이미 발간된 자서전을 모조리 압수해 버렸다.
양녕대군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이 대통령은 평소 ‘왕손’ ‘백성들’ ‘과인’ 같은 조선시대 용어를 곧잘 사용했고, 참모들은 그를 ‘어르신네’ ‘국부님’이라고 호칭했다. 이 대통령의 돌격대장으로 오늘날의 청와대 경호실장에 해당하는 직책을 맡았던 곽영주는 4·19 혁명재판에서 평소의 습관대로 “재판장님! 황공하옵니다” “통촉해 주시옵소서”라며 조선시대 용어를 사용했다가 재판장으로부터 “지금 장난하느냐”는 핀잔을 받기도 했다.
곽영주는 이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마다 조선시대 어법을 사용하며 아부했고, 그런 맹종파 참모를 이 대통령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이 대통령의 뇌리 속에는 ‘짐은 곧 국가’라는 군주(君主)의식과 왕 콤플렉스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의 아버지는 한량 기질이 많아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느라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선대로부터 꽤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해 이승만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가산을 탕진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아버지와 차분하게 지냈던 시간이 많지 않아 주로 어머니와 지내며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보수적인 양반집 어머니의 6대독자 아들 사랑은 과잉보호라고 할 만큼 각별했다.
심리학적으로 유소년기에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 감정이 풍부하고 변덕스러우며 자기중심적이고 감성적인 세계관을 갖기 쉽다. 심하면 ‘내가 최고’라는 자만심으로 매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심리적 마마보이(psychological mama’ boy)’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 대통령이 훗날 해방정국에서 정적들을 제거하고 좌익을 가차없이 척결하면서 국정을 권위적이고 독선적으로 운영한 심리적 배경에는 아버지의 가부장적 스타일과 어머니의 과잉보호 영향이 컸을 것으로 분석된다.
③ 박정희 대통령의 아버지, 박성빈─집념과 강직한 성품의 엄격한 무인형
박정희 대통령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거대한 그림자’다. 분석심리학자 융에 따르면 그림자(shadow)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짙게 감싸는 ‘어두운 부분’이다. 요컨대 박 대통령의 험난한 삶은 아버지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아버지 박성빈 씨는 과거(무과)에 합격하고도 유력한 후견인이 없어 관리가 되지 못했고, 조선 말엽 부패정치에 환멸을 느껴 동학혁명에 가담했다가 체포돼 처형 직전에 사면돼 위기를 모면했다.
아버지의 파란 많은 삶은 아들 박정희와 그대로 닮은 꼴이다. 박정희는 학업성적이 뛰어났지만 가난 때문에 사범학교에 진학했고, 제2공화국의 부패정치에 환멸을 느껴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됐다 처형 직전에 감면돼 화를 모면했다. 정치적 부전자전인 셈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아버지를 무척 무서워했던 것 같다.
훗날 대통령이 된 뒤 청와대에 걸려 있는 아버지의 사진을 보면서 장조카 박재홍 씨에게 “네 할아버지는 참 무서운 양반이었다. 지금도 무섭게 생각된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는 한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해치우고 마는 집념과 과격하고 강직한 성품, 두주불사의 술버릇을 고스란히 아들 박정희에게 대물림한 것 같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조용하다가도 일단 취하면 큰소리로 시조를 읊는 낭만적 기질이 있는가 하면, 화가 나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기록들을 보면 박 대통령은 아버지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 박 대통령에게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무서워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의 무서운 기질을 닮아가는 동일시 현상이 잠재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에게는 아버지 못지않게 무서운 존재가 있었는데, 바로 셋째 형 박상희 씨였다. 훤칠한 키의 미남에 머리가 우수했던 박상희는 좌절감에 빠져 무기력해진 아버지를 대신해 가정을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어린 박정희에게는 정신적 지주요 우상이었다. 박상희는 동생 박정희가 첫 부인을 소홀히 대하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동생에게 몽둥이 찜질을 가할 정도로 절대적 존재였다.
무섭고 엄격한 아버지와 형 밑에서 자란 박정희는 ‘차돌’ ‘사무라이’ ‘독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강인한 집념의 군인으로 성장했고, 마침내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강인한 국가 통치자로 군림하게 된다. 박 대통령이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괄목할 만한 경제발전을 이룩하는가 하면 민주화세력을 냉혹하게 탄압하는 모습을 보면 아버지의 강인하고 엄격했던 무인 기질이 오버랩된다.
박 대통령의 맏딸 박근혜 전 대표의 정치 스타일에서는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아버지의 절제력과 강인함이 동시에 엿보인다. 박 전 대표는 어린 시절 <삼국지> <삼총사>와 같은 무협소설을 즐겨 읽으며 소설 속의 조자룡과 달타냥을 흠모했을 정도로 남성적 특질이 있었고, 그것은 오늘날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서 박근혜 리더십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다.
동생 근령 씨는 대낮에도 선글라스를 쓰는 등 결벽적인 성격이 아버지를 많이 닮았는데, 언니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오다 지난 10월13일 여의도에서 14세 연하의 젊은 대학교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① 전두환 대통령의 아버지, 전상우─일본 순사에게도 대든 괄괄한 강심장형
전두환 대통령의 불 같은 성격은 어머니 못지않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군대 시절에는 부하들을 몰고 다녀 보스 기질이 강했고, 재임 중에는 장관의 정강이를 걷어찰 정도로 폭압적 권력자였던 전 대통령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 아버지 전상우 씨는 가난한 농부였으나 마을 구장을 지낼 만큼 상당한 한문 지식을 지닌 지식인에 속했다.
성격이 괄괄해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한 성격은 고스란히 아들 전두환에게 대물림됐다. 전상우 씨는 의리가 강해 아들 전두환이 여덟 살이던 1939년에 동네 노름꾼의 빚보증을 서주느라 종토(宗土)를 저당잡혔다. 이 종토를 돌려받는 과정에서 합천 읍내 주재소 순사부장의 소환을 받았으나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그러다 그해 겨울 마을 어귀에 있는 ‘요덕뜸’이라는 낭떠러지에서 순사부장과 맞닥뜨렸는데 엉겁결에 그를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고 곧바로 만주 지린(吉林)성으로 야반도주하고 말았다. 일제 치하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던 일본 순사를 낭떠러지 밑으로 밀어버리고 도망친 아버지의 강인한 성격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전 대통령이 집권 초기인 1982년 5월 출판하려다 포기했던 <촛불>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에 따르면 “아버지는 유도 3단의 시즈오카 순사부장을 100길의 낭떠러지로 내던진 애국자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일제 하에서 마을 구장을 지낸 것을 보면 꽤 지적 수준이 높았고 보스 기질이 있었으며, 노름꾼 빚보증을 서주는 것을 보면 의리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서슬 푸른 일본 순사를 밀어버렸다는 것을 보면 보통 강심장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쨌든 가족이 만주로 도망간 지 2년 만에야 돌아오는 바람에 어린 전두환은 또래보다 2~3년 늦게 호란보통소학교를 졸업했고, 1947년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해 5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 다녔다. 전 대통령은 비록 학업성적은 탁월하지 못했지만 무엇이든 남보다 앞서고야 말겠다는 ‘선두 강박심리’를 갖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전 대통령의 아버지 못지않게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가 바로 어머니 김점문 씨다. 김씨는 아들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강했는지, 지나가는 승려가 어머니의 튀어나온 앞니가 아들의 운세를 가로막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부엌으로 달려가 쇠 집게로 생니 3개를 뽑을 정도였다. 강인한 아버지와 억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전두환이었으니 10·26과 12·12와 같은 국가적 격동기에 놀라운 담력과 투지로 권력을 쟁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② 노태우 대통령의 아버지, 노병수─낭만적인 지역 유지형
노태우 대통령의 삶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정신적 상처)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아버지 노병수 씨는 일제 강점기 동네 유지로 통하는 면(面)서기를 지내 생활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아버지는 1930년대 초반 당시에는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스케이트를 타는가 하면 바이올린·유성기·퉁소 등의 악기를 구입해 혼자 연주할 정도로 낭만과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어린 노태우는 또래 아이들이 갖고 놀지 못하는 장난감을 아버지로부터 선물받았고, 훗날 하모니카·퉁소·휘파람과 함께 <베사메무쵸>를 구성지게 부를 정도로 음악적 감각이 뛰어났다. 한마디로 아버지는 자랑스럽고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노태우가 일곱 살 되던 해인 1938년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는 막내동생 노병상 씨가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러 가는 길에 동행하려고 버스를 타고 가다 그만 기차와 충돌하는 바람에 27세의 젊은 나이에 작고했던 것이다. 심리적으로 신이나 왕의 존재와 같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아들이 겪는 정신적 충격과 불안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게다가 가세가 급속도로 기울면서 노태우는 장남으로서 심적 부담감이 컸을 것이다. 다행히 삼촌 노병상 씨가 문방용구 공장을 운영해 조카 노태우의 뒷바라지를 해준 덕분에 학업을 정상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노태우는 눈칫밥을 먹으며 홀로 살아남는 생존술을 체득해 나갔다.
어머니로부터 “혹여 아비 없는 막된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란 덕분에 매사에 신중하고 몸을 낮추는 ‘2인자 처세술’을 터득한 셈이다. 이러한 환경 탓에 노태우는 어릴 때부터 말수도 적고 어린애답지 않게 점잖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대통령이 된 뒤에는 지나치게 신중해 우유부단하고 유약하다는 비판을 들었다.
어찌 보면 노 대통령은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물처럼 소리 없이 흘러가는 생존술을 익혔고, 대통령이 된 뒤에는 이도 저도 아닌 ‘유사(類似)민주주의’ 또는 ‘자유방임형 리더십’의 소유자로 평가절하된 것인지도 모른다.
7. 노무현 대통령의 아버지, 노판석─ 온순하고 조용한 무골호인형
노무현 대통령의 성장 과정에서는 어머니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반면 아버지가 차지하는 공간은 협소하다. 어머니는 동네에서 소문날 정도로 야무지고 말 잘하는 ‘똑순이’로 집안살림을 책임진 데 비해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노판석 씨 집안이 봉하마을에 뿌리내린 것은 8대째라고 한다.
광주 노씨인 노판석 씨의 조상은 조선시대에 제법 높은 관직을 지냈으나 임금의 오해를 받고 경상도에서 은거생활을 하다 봉하마을에 정착했다고 한다. 일종의 유배 후손인 셈이다. 노판석 씨는 아내와 함께 야산 돌밭을 개간한 산기슭에 고구마를 심어 겨우 입에 풀칠을 했고, 영세민 취로사업장에서 일한 대가로 주는 밀가루와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아버지는 내성적이고 온순하며 자상한 성격에 무골호인형(無骨好人型)이어서 모질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 말에는 3년간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힘겹게 번 돈을 동네사람에게 몽땅 사기당한 후 아내의 구박을 받으며 무기력하게 살아갔다. 집안의 주도권이 어머니에게 넘어가는 결정적 계기였다. 노 대통령에게는 아버지 대신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한 맏형 노영현 씨가 있었다.
영현 씨는 당시 진영읍을 통틀어 유일하게 대학(부산대 법대)을 다닌 엘리트로서 부모가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논밭을 팔아 학비를 댈 정도로 집안의 희망이었고, 어린 노무현에게는 든든한 정신적 지주이자 우상이었다. 그런 맏형은 사법고시에 번번이 낙방하다 중도포기하고 오랫동안 실업자생활을 했고, 결혼 뒤 아내의 구박을 받더니 1973년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훗날 노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형의 죽음 이후 마음속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로 가득 찼다”고 술회하는 것을 보면, 형제 관계의 트라우마가 보통 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무기력한 아버지의 왜소한 입지와 대리인이었던 맏형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강인한 어머니의 영향은 어린 노무현에게 감성적 세계관을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심리학적으로 유소년기에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 감정이 풍부하고 즉흥적이며 때로는 격정적인 경향이 두드러진 감성적 세계관을 갖기 쉽다. 훗날 노 대통령의 열정적이고 튀는 정치인 기질과 국정운영 스타일에서는 어머니를 많이 닮았지만 3당합당 거부, 코드 인사와 같이 외곬으로 밀고 나가는 면에서는 우직한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8. 이명박 대통령의 아버지, 이충우 ─ 가족보다 남을 더 생각한 의인형
이명박 대통령의 삶에서 아버지가 차지하는 공간은 어머니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예 <어머니>라는 제목의 책이 따로 출판되었고 대부분의 자서전이나 일화, 언론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면 아버지는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 이는 어머니의 생활력이 워낙 강해 집안의 주도권을 쥐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버지 이충우 씨는 경북 영일군의 가난한 농사꾼 출신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5년 친구 몇 명과 함께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떠나 오사카(大阪) 근교에서 소젖을 짜고 목초를 베는 목부(牧夫)로 일했다. 고향에서의 머슴살이보다 힘들고 고달픈 생활이었지만 어느 정도 저축할 만큼 돈을 벌자 잠시 한국으로 나와 결혼한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6남매를 낳았다.
이후 10여 년간 일본에서 살다 해방되자 1945년 11월 가족과 함께 귀국선에 올랐다. 이때 당시 네 살이었던 이명박에게 지울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다. 8명의 가족이 임시 귀국선을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下關) 항을 출발해 부산항으로 오던 중 대마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짐을 모조리 바닷속에 잃어버리고 빈손으로 고향 땅을 밟은 것이다. 다행히 희생자가 없었던 것에 만족해야 했다.
지금도 이명박 대통령의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은 배가 침몰한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아버지가 가족을 챙기기보다 배 위의 질서를 잡으며 다른 사람들을 챙기는 광경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희생정신이 강했지만 어찌 보면 가족은 소홀히 하고 융통성이 부족한 측면도 있었다. 그런 아버지였으니 가난은 나날이 심해졌고, 가족의 생활권은 자연히 어머니에게 넘어 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영덕·홍해·한강·곡강 등 포항 인근 장터를 돌며 옷감을 팔았지만 신통찮았다. 아버지는 28세 때 목사와 크게 언쟁을 벌인 뒤 한동안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다시 신앙생활을 재개했다. 1981년 뒤늦게 세례를 받았는데 1주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서전 등을 통해 잘 알려진 이명박 대통령의 어머니는 매일 새벽 4~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자식들을 줄줄이 앉혀놓고 기도를 올렸다.
뻥튀기·국화빵 장사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이 대통령은 어머니로부터 부지런함, 열정, 장사 수완 등을 물려받아 오늘날의 성공 신화를 이룩한 데 비해 아버지로부터는 우직하게 밀고나가는 뚝심을 물려받은 것 같다. 이 대통령의 ‘얼리 버드’나 ‘컴도저’ 기질은 주로 어머니를 닮았다.
어머니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버지의 존재가 왜소할 경우 무의식적으로 ‘아버지 콤플렉스’를 갖게 된다. 아버지에 대해 말하기를 가급적 꺼리고 심지어 숨기려는 심리 상태로, 이는 ‘나는 아버지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야 말겠다’는 상승 욕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심리학자 아들러(Adler)에 의하면, 콤플렉스는 열등감도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기발전의 촉매가 되는 긍정적 효과도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대통령이 온갖 난관을 뚫고 권력의 정상에 오르고, 이후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까지 아버지의 존재는 보이지 않게 심리적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향이 훗날 아들의 리더십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은 아들의 성공을 위해 언행 하나하나에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최 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 [cj0208@hanmail.net]
■최진
고려대 법대 및 동 대학원 행정학 박사. 청와대 정책비서실 국장,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정책홍보실장. 고려대 행정학 연구교수, 한국행정학회 이사. (현)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 사단법인 한국리더십개발원 원장, 경희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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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부모의 역활이 중요 하단 생각을 해 봤네요 ^^ 한참의 세월이 지난후에 여자 대통령을 ? 히힛^^ 그땐 -자유감성주의대통령을 만들고 싶어용 ^^ (그런데 경제는 누가 책임을 질까 ???)
컴플렉스 없는 사람이 없겠지요. 그러나 열등감의 원천을 알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인간승리 아닌가 합니다. 산다는 것은 어린시절의 상처 치유의 과정이라고도 하더군요. 부모노릇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나중에야 그걸 알고 이럴줄 알았으면 결혼하지않았을 것을! 한탄하기도 했는데 자식키우면서 부모는 철드는거 같던데요
위 글을 옮기면서... “과연 전-현직대통령을 보며 기분이 유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는 생각... 특히 살림살이가 팍팍한 요즈음 이들의 얼굴을 대하는 것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국민들은 아랑곳없이 자리만 차지한 그들 - 존경은 커녕 “제발 안보게 해줬으면...”허탈감과 배신감을 안겨줄 때가 더 많이기에... 그렇다고 마땅히 어찌 해볼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기분 별로인... 대통령, 그들의 아버지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 (새삼) 바탕이 좋아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父傳子傳 母傳子傳인 것을...
사실, 그들의 이야기 일부만 옮겨 놓아서이지 - 지난 그들의 삶이 결코 미화될 수 없음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또한 - 지독하고 악착스럽게 살았다는 말을 달리하면 -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고사하고 인정머리 없고 염치없이 살았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 되기도 한다. (단지 아버지 어머니라고 하는 표현이기에 조심스러울 뿐인 것이다) 부전자전, 모전자전과 같이 부모의 영향은 자식들에게 매우 크게 작용한다. 사회적 토양이 건강해야 좋은 지도자가 나올 수 있음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 과연 지금 우리의 토양은 건강한가? 우리의 후대들은 지금까지 보다 더 나쁜 선택을 하여야 하는 것은 아닐지... (별생각을 다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