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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 돌라와 야일
삿 10:1-5
1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주하면서
2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이십삼 년 만에 죽으매 사밀에 장사되었더라
3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4 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르더라
5 야일이 죽으매 가몬에 장사되었더라
삿 10:1-5 / [사사 돌라와 야일] 아비멜렉이 죽은 뒤 또다시 한 사람이 등장하여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건져내었다. 그 사람은 잇사갈 지파 사람으로 도도의 손자이며 부아의 아들인 돌라였다. 그는 에브라임 산악지대에 있는 사밀에서 살았다. 2) 그는 23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활동하다가 이 세상을 뜨자 그가 살던 사밀에 묻혔다. 3) 그 다음에는 길르앗 지파 사람인 야일이 등장하여 22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활동하였다. 4) 그는 아들을 30명이나 두었는데, 이 아들들은 늘 나귀를 타고 다녔고 각자 한 마을씩 모두 서른 마을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ㄱ) `야일의 마을'로 불리는 곳이 길르앗 땅에 남아 있다. (ㄱ. 히. 하봇 야일) 5) 야일이 세상을 뜨자 가몬에 묻혔다.
오늘 본문의 특이함은 돌라와 야일의 행적이 거의 언급되지 않는 점과 그럼에도 이들이 사사로 있던 총 45년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비교적 무탈했다는 것입니다.
잇사갈 사람 돌라가 일어나서(1-2) 아비멜렉 이후 이스라엘은 사자성어 그대로 동족상잔, 사분오열, 민심 흉용 그 자체이었을 것입니다. 이때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그는 단 한 번의 공적으로 사사가 되어 에브라임 산지 사밀 성에 사사로 이십삼 년을 보내며 평화를 유지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기억될 큰 종적은 남기지 못한 채 죽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풍요와 평화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았다는 흔적조차 없습니다.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3, 5) 둘라 사후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사사가 됩니다. 여기 “야일이 일어나서”라는 어구는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사사되어 주변의 인정을 받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야일의 특이점은 누구의 손자, 누구의 아들이라는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22이라는 긴 기간 동안 사사로 지내며 둘라가 남긴 태평성대를 잇고 그것을 누리는데도 성공합니다. 그는 아들이 삼십 명이라 했는데 딸을 포함하면 더 많은 자녀를 두었을 것입니다. 일부일처에서는 이 많은 자녀가 생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읍 삼십을 가질 부와 그 성읍들을 다스릴 만한 역량의 자녀들을 두었다는 것은 특이합니다.
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4) 자녀 70명 이상을 둔 사사 기드온의 나쁜 영향력은 후대 사사 야일에게도 미치고 있습니다. 야일의 아들 삼십 명은 늘 나귀를 타고 다녔고 성읍을 하나씩 소유한 영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길르앗 땅에는 오늘날까지도 야일의 마을로 불리는 곳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야일 가의 형태는 고대 국가에서는 흔한 일이긴 하나 여전히 심각한 부작용을 낳습니다.
적용: 여호와께서 사사 돌라와 야일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내린 선물은 무엇인가요? 그런 평화를 주신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이나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까요?
호주는 사계절 모두가 온화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계절 모두 꽃이 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초창기 호주를 처음 밟은 유럽인들은 호주 땅을 양봉으로 성공할 수 있는 천혜의 땅이라 믿고 벌통을 유럽으로부터 옮겨 왔다고 합니다. 첫 1년간 이주해 온 벌들은 유럽에서 거둘 수 있는 몇 배의 벌꿀을 생산해 냈습니다. 그러나 그 이듬해부터는 웬일인지 벌들이 꿀을 따러 나가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벌 통속에서 놀기만 할 뿐 벌꿀의 생산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1년 내내 피어 있는 꽃이 널려 있는데 굳이 힘써가며 꿀 수집을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게 풍족할 때 게으름을 피우다가 부족할 때 힘겨워하는 어리석음은 경계해야 합니다.
< 설 교 >
하나님의 한결같으심
삿 10장 1~18절 / 양인국목사
1. 사사기2부(2:6-16:31)의 내용은 사건들의 상황만 다를 뿐 본질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들이 이스라엘의 범죄, 하나님의 심판, 회개, 구원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째서 동일한 내용을 계속 반복하여 말씀해 주셨을까? 이 사건들을 통하여 주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일까? 본문을 통하여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해 주시는 대답을 듣고자 한다.
2. 1-5절 말씀이다.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주하면서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지 이십삼 년 만에 죽으매 사밀에 장사되었더라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르더라 야일이 죽으매 가몬에 장사되었더라” 이 말씀은 아비멜렉 후에 있었던 두 명의 사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두 사람 중 하나는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였고, 다른 한 사람은 길르앗 사람 야일이었다. 둘라는 이십 삼년만에 죽었고, 야일은 이십 이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지만 그들의 시대에는 큰 전쟁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사사들을 세워 주신 것은 그들에 대한 사랑이 변함없으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사는 전쟁시에는 구원자로 활동하지만 전쟁이 없을 때에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도록 지도해 주는 영적 지도자로서 활동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즉 사사는 대적들의 손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는 군사적 지도자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신앙으로 지도하는 영적인 지도자이기도 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사사들이 존재하는 기간 동안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살 수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속 사사들을 보내 주셨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사랑이 변함없으셨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사기의 반복되는 내용을 통하여 주고자 하신 말씀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 가운데 거(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6-9절의 말씀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이스라엘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 여기 그들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우상숭배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째서 우상숭배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것인가? 우리는 우상숭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상은 언제나 그것을 숭배하는 지역의 문화와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졌다는 것은 그 지역의 문화에 깊이 동화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신앙에서 떠나 세속화 되었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인근의 여러 나라들이 숭배하는 우상들을 숭배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세속화에 깊이 빠졌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스라엘이 이처럼 우상들을 숭배하는 행위에 대하여 본문은 “여호와를 버렸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함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원하여 이방신들을 숭배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택한 우상들에게 팔리게 되었다. 이로서 그들의 소유권(所有權)은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들의 것이 되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로 인하여 두 가지 고통을 당했다. 하나는 이방 문화에 속박됨으로 당하게 된 고통이다. 이방의 문화들은 인간의 탐욕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세속화되었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탐욕에 지배당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지배하며 살도록 창조된 사람이 지배를 당하며 살고 있다는 것은 자유를 상실한 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할수록 그리고 세속화 될수록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타민족들의 침략을 받아 곤고가 심했다.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곤고함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가끼이 할수록 복된 삶을 살게 되고 멀리할수록 곤고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교훈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사사 시대의 300년의 역사를 통하여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고자 하신 말씀들 가운데 하나다.
하나님께서 사사기의 반복되는 내용을 통하여 주고자 하신 말씀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의 학대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게 했고, 또한 하나님께 나가 이방인들의 학대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구하게 했다.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를 택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으로부터 자유 할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인간은 스스로 악을 택할 수는 있지만 악에게 팔렸을 때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처럼 악에 팔린 자들을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에 팔렸을 때 구원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나가 부르짖는 것뿐이다.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간구를 들으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삿10:16). 여기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기 시작하셨다는 의미다. 우리는 사사시대 반복되는 내용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들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우리가 간구할 때 하나님은 들어 주신다는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주는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고 죄의 길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시고 또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사사기를 통하여 주신 이와 같은 말씀들이 우리로 하여금 주를 더욱 신뢰하며 살게 해 주시고 이로 인하여 주를 더욱 경외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아멘!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삿 10:1-5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긴장’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세 가지 뜻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을 조이고 정신을 바짝 차림’, 또, ‘정세나 분위기가 평온하지 않은 상태’ 의학용어로는 ‘근육이나 신경 중추의 지속적인 수축, 흥분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사람이 긴장을 하면 심신에 크나큰 부담을 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긴장이 부정적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긴장이 풀어질 때에 목표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여러분! 고산산악인들은 “등반할 때보다 하산할 때에 사고가 더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긴장이 풀어지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공연을 시작하기 전, 무대 뒤에서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세계적인 수준의 연주자임에도 불구하고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긴장을 해야, 연습한 것 이상으로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긴장을 해야 합니다.
긴장하지 않는 신앙은 추락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8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는 긴장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긴장의 끈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굳이 원인을 따진다면 아비멜렉 왕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이 첩을 얻어서 낳은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왕이시라’는 이름의 뜻과는 달리 명예욕이 강하고, 욕심이 대단한 자였습니다.
정치적인 모략에도 능하고, 무죄한 사람들의 피를 뿌려 왕에 등극한 독재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 기드온이 세상을 뜨자, 자기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 사람들과 결탁해서 은70개로 불량배를 매수하여, 자기형제 70명을 반석위에서 살해하고, 왕이 됐습니다.
그러니 그가 다스렸던 3년 내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갖 박해와 압제 가운데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회하며,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아비멜렉 저 자만 없으면 나라에 태평성대가 올 텐데.......”
백성들의 소원대로 아비멜렉이 죽임을 당합니다. 어떤 죽음이죠?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두개골(頭蓋骨)이 쪼개져 사망하지 않습니까?
마침내 아비멜렉의 지긋지긋하고, 무시무시했던 철권통치가 종말을 고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아서 얼마나 흥분했겠습니까?
이제 나라가 평안하고, 신앙도 안정을 되찾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막상 죽자, 이상하게도 백성들의 삶에 진한 공허함이 찾아들었습니다.
아비멜렉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세력들도 졸지에 할 일이 없어져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꺼번에 긴장이 풀어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진정 그 때에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에 긴장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실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대신, 바알신당으로 올라갔습니다.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우상단지 앞에서 자신들의 공허한 가슴을 달랬습니다.
이내 백성들의 신앙은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개입하셨습니다.
두 명의 구원자를 세우셨습니다.
본문 1a절을 보십시오.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돌라가 사사로서 상처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했고요.
깨어진 사회질서를 바로 잡았고요.
극도로 무너진 백성들의 신앙을 바로 세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본문 1b절과 2절을 살펴보십시오.
돌라에 관해 언급한 것은 겨우 ‘사밀’이라는 거주지와 매장지뿐, 별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쉰일곱 절의 긴 이야기를 남긴 아비멜렉 왕과는 수준이 달랐습니다.
돌라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돌라를 이스라엘 민족의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나라와 민족의 혼란과 상실로부터 구원토록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비멜렉은 민족의 지도자였던 기드온의 아들이었죠? 출신배경이 좋은 인물이었습니다.
남보다 화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 대한 스토리도 많습니다.
사사기 9장 한 장을 할애해서 아비멜렉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왜요?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는 권력과 금력을 쟁취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거나 의식하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의 뇌리에 하나님이란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러한 인물을 하나님이 어찌 쓰실 수 있겠습니까?
반면, 돌라를 보십시오. 아비멜렉처럼 가문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이렇다 할 업적도 없습니다. 사역에 관한 별다른 이야기 거리도 없습니다.
그에 관한 언급은 겨우 두 절, 본문1절과 2절을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돌라는 하나님이 장중에 들어 쓰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유가 뭐죠?
본문1b절을 보십시오. “돌라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주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사기 4:5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어떻습니까?
종려나무 아래 거주하면서 백성들을 재판하며, 잘 다스린 드보라를 생각나게 하지요?
그렇습니다. 돌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사로서의 직임을 훌륭하게 감당했습니다.
돌라는 하나님 말씀의 바탕 위에서 나라와 민족을 안정시켰습니다.
23년 간 치리하면서 나라의 해체와 혼란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나라와 민족의 리더와 그리고 한국교회의 리더와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쓰시겠습니까? 가문이 좋은 사람일까요?
출신배경이 좋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학벌이나 스펙이 좋은 사람입니까?
아비멜렉처럼 과정보다 결과만을 중시하는 그런 인물입니까?
이도저도 아니면, 많은 일들을 벌려서 열심히 감당하며, 주도하는 사람입니까?
교회에서 맡은 직분이 많아, 늘 동분서주하며, 섬겨야 하는 사람입니까?
물론, 그 사람들의 노고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칫 하면 ‘자기열심’이란 블랙홀에 빠져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즉, “아비멜렉처럼 권력이나 금력과 같은, 어떤 힘을 향유하고 싶어, 열심을 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뜻을 잘 분간하고, 받들어 묵묵히 섬기는 자들이 나라와 민족, 그리고 교회와 삶의 현장의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계층의 리더이건, 늘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사람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죠. 본문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돌라 외에 또 한 사람의 사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길르앗 출신 ‘야일’이란 사람입니다. 그는 22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활동했습니다.
돌라가 요단강 서편 가나안 본토에서 사사로 일하고 있을 때에 요단강 동편 길르앗에서는 돌라를 이어 사사가 될 인물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야일은 돌라와는 사뭇 다른 인물입니다.
야일은 사사로서의 자격에 상당한 무리가 있는 자였습니다.
아들이 30명이나 됐고요. 모두 나귀를 타고 다녔습니다.
사사기 12:14을 보십시오.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
압돈의 아들 40명과 압돈의 손자30명, ‘70명 모두가 나귀를 탔다’는 것 아닙니까?
본문4a에서 ‘야일의 아들 30명도 모두 나귀를 탔다’고 증거 합니다.
그것은 큰 부자라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부유한 사람만이 나귀를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본문4b절을 보면 야일의 30명 아들은 나귀 외에 30동의 성읍까지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야일은 30대의 차량과 30채 부동산을 소유한 대 부호였던 겁니다.
여러분! 물론,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사사의 자격을 운운할 수 없습니다.
만약 부자란 이유로 사사가 될 수 없다면, 그것 또한 부당한 일입니다.
그런데요. 야일은 부자임에도 존경받을 만한 인품과 도덕성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여러분! “많은 아들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죠?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다”는 뜻으로, 신명기 17:17의 하나님 말씀을 어긴 범죄입니다.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죠?
그럼에도 야일은 아내를 많이 뒀죠? 은금도 많이 쌓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부자가 되어서도 곤란합니다.
그런 사람은 소유한 부로 오직 자신의 육신을 위해 쓸 거며, 또, 죄밖에 더 짓겠습니까?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에, 야일은 결코 민족의 지도자인 사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야일이란 인물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됐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치관이 많이 변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23년 동안 나라와 민족을 안정시킨 돌라가 죽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에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했습니다.
더욱 더 하나님을 신앙해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긴장하지 않았습니다. 즉, 깨어, 근신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은 백성들의 신앙적 해이는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사는, 야일이란 인물이 지도자가 되는 토양이 됐습니다.
사사가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와 권력을 지향하는 민족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만홀히 여기는 자가 사사가 됐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야일이 이스라엘을 무려 22년 동안 통치했다”는 것은 비극이었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의 미래가 결코 밝지 않음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부와 권력을 더 숭배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매를 드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돌라와 야일은 사사기에 등장하는 저명한 사사들과 비교하면 이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성장배경과 삶에 대한 경험과 업적 등등이 저명한 사사들과 비교 안 될 만큼 전무합니다.
그런데도 돌라는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 등 명예의 전당에 오를만한 사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하나님이 돌라를 장중에 높이 들어 쓰셨던 것입니다.
반면, 큰 부자인 야일은 하나님이 쓰시는 일꾼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어 사사로서의 직무를 잘 감당한 돌라와는 달리 야일은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늘 긴장하며, 하나님을 신앙하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대신, 야일은 아비멜렉처럼 권력과 금력을 틀어쥐고 누렸습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보다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더 높이며, 즐겼습니다.
그런 인물이 어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런 인물이 온갖 핍박과 죽음에의 공포와 무너진 신앙으로 상처 받은 백성들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그런 생각이라도 가지고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는 결코 하나님이 쓰시는 일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진실로 진실로 목회자인 저와 동역자인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질문해봐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잘 받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 전에, 과연 나 자신은 세상을 구원해야 할 영적지도자인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떨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가? 질문해봐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받들고 살아가려고 한다면, 아니면, 그런 마음과 생각을 품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만에 하나, 권력이나 금력을 탐하거나, 소원하거나, 그것으로 나의 존재를 드러내려 한다면,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말 것입니다.
제아무리 교회에 관련된 일을 한다 해도, 성도나 목회자는 물론, 교회자체를 높이려고 한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심중으로부터 멀어지고 말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려워 떨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아비멜렉처럼 모든 것 갖췄다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돌라처럼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갖췄건, 그렇지 못했건 그것이 결단코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두려워 떨며, 그 말씀을 받들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그 생각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받으시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세우시고, 사용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목회자인 저를 비롯해서 모든 직분자와 성도들이 2016년도에는 하나님이 장중에 들어 귀하게 쓰시는 사람으로 세워져 나가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사사 돌라와 야일 너무나 달랐던 두 사사의 길
사사기 10장 1-5절 / 박동진목사(소토교회)
1. 성경에는 참 많은 난제들이 있습니다.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참 난감한 경우를 만납니다. 그 중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도 한 몫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사사들 중 돌라와 야일, 다른 사사들은 그들의 업적과 행적에 대해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반면, 이 두 사람은 슬쩍 지나가는 듯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저 이런 사사들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이름만이라도 기록해두자는 것인지, 아니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사들도 있지만 그저 이렇게 이름만 남긴 사사들도 있으니, 그저 사사가 된 것에 만족하지 말고, 일 좀 제대로 하자는 뜻으로 후세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남긴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 짧은 내용 속에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뭔가 가르치고자 하는 주님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것인지, 쉽게 판단하기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어려움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우린 지도자가 되면 뭔가 내세울만한 업적을 해놓아야 한다는 그런 압박감을 갖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가시적인 것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고,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업들을 벌입니다. 그 중에는 필요한 것도 있지만 불필요한 것도 많습니다. 불필요한 줄 알면서도 또 합니다.
저는 본적이 청도입니다. 그래서 언론이나 사람들이 청도에 대해 이야기하면 마치 제 고향인 것 같은 반가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제 본적이 청도인 것이 부끄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청도 군수가 각종 비리에 연루되어, 전 현직 모두 줄줄이 검찰에 불려가고, 핵심 요직에 있던 사람들이 자살하는 등, 참 부끄러운 일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군수가 되자마자 별 필요 없는 도로공사를 강행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얼마나 길을 많이 닦았는지 청도군수를 길군수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습니다. 전문가들이 여기는 길을 닦을 필요가 없다고 해도, 강행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 길을 내가 닦았다고 자랑하고 싶은 과시욕, 그리고 비리를 통한 검은 돈의 유혹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망하고 만 것이죠.
이런 사실을 보면 재임기간 동안 별 다른 일을 저지르지 않고, 조용히 자신이 할 일만 제대로 하고 나오는 사람을 보면 언뜻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잘했다고 해야할지, 못했다고 해야 할지. 그냥 그렇다고 해야 할지. 선뜻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런 부분이 나오면 당황스런 것입니다. 코미디 프로에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고객님 당황하셨지요?” 라는 말이 생각이 납니다.
2. 돌라의 희생
일단 그런 당혹감을 느끼셨다면 그 당혹감을 조금만 뒤로 미루어두고, 성경을 차근히 곱씹으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먼저 돌라입니다. 돌라는 잇사갈 지파이며, 그 아버지는 부아입니다. 부아는 ‘입, 말’이란 듯이며, 돌라는 ‘곤충, 벌레’라는 뜻입니다. 사사의 이름이 벌레라니요? 조금 뉘앙스를 비꼬듯이 해서 부르면, 버러지 같은 사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이름만 보아도 사사 돌라는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위대하게 떠받들여지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돌라의 아버지 부아는 역대기의 기록을 보면 그는 전사였습니다. 그렇기에 돌라 역시 전쟁에 능한 전사의 기질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비멜렉 이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였고. 23년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특징 중의 하나가 잇사갈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활동한 주 무대는 에브라임지파가 살고 있는 산간지역이었습니다. 그는 고향을 등지고, 타지에서 사사로 활동한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상상력을 동원해보면, 우리는 사사 돌라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사사가 된 때는 바로 아비멜렉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큰 혼란에 빠져 있을 때입니다. 세겜사람 아비멜렉이 그 형제 70명을 공개처형하고, 또 그것도 모자라 자기 고향인 세겜 사람들과 전쟁을 벌여 무려 수천명이 죽임을 당한 후였습니다. 여러분, 전쟁 중에도 가장 치유되기 어려운 전쟁의 상처가 바로 동족 간의 전쟁입니다. 우린 지금 한국전쟁이 끝난 지 무려 60년이 지났는데도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원수처럼 대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들은 왕이 되고자 하는 아비멜렉 때문에 동족간에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얼마나 많은 원망과 질시가 정국을 어지럽혔겠습니까? 그런데 돌라는 그런 정국 상황 속에서 23년을 사사로서 활동을 잘 하였다고 합니다.
즉 돌라는 외세의 침입에서 이스라엘을 구한 혁혁한 전공은 없지만 분열되고 상처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픔을 잘 치유하고, 그들 간에 화목을 이루며, 이스라엘 내부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전심을 다한 사사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고향에서가 아니라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 머물렀습니다. 세겜이 바로 에브라임 지파에 있었고, 동족간의 전쟁 역시 에브라임 지파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것이기에 돌라는 아예 그 지역에 머물면서 그 상처를 치유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돌라 사사가 한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바로 떠오르는 대단한 사건은 없지만,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열의 현장에서 그들을 치유하고 평화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그리고 부부도 그러합니다. 금술 좋은 부부가 상처하면 재혼을 빨리합니다. 이유는 그 빈자리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너무 친숙해서 그 빈자리를 잘 모르지만 없어지고 나면 다른 어떤 것으로 메울 수 없는 허전함 때문에 재혼을 서두른다고 합니다.
돌라가 바로 그런 사사였습니다. 평소에는 잘 있는지 없는지 그 존재감을 모르지만, 실은 그 헌신이 너무 커서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3. 야일과 서른명의 아들
그런데 이 돌라 사사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은 사사가 있습니다. 바로 야일입니다. 돌라는 분열된 이스라엘을 치유하기 위해 자기 고향도 떠나 눈에 보이지 않는 헌신으로 온갖 고생과 어려움을 감수하며 헌신한 사사인 반면, 야일은 자기 고향에서 자기 가문의 부흥을 위해 힘쓴 사사입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합니다. 그의 고향이 길르앗이며, 이 길르앗에서 사사가 되었다는 것과 그에게 아들이 30명이 있고, 그 아들들이 모두 나귀를 탔으며, 그 아들들이 한 성읍씩 맡아 다스렸다. 그리고 그 성읍들을 하봇야일이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부귀영화를 누린 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사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싶기도 합니다.
빌리그레함이라는 세계적인 부흥사가 있습니다. 예전 부산에서 복음화 대성회를 하는데, 빌리그레함의 아들이 초청강사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올 때 자기 전용기를 직접 몰고 왔습니다. 이를 두고 최홍준 목사는 감동받았다고 하는데, 저는 전혀 그 사실이 감동이 되질 않더군요. 그 전용기 다 교인들이 헌금한 것일텐데, 목사가 뭐가 그리 긴박한 일이 있어 전용기까지 구입하며 다녀야 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돌라의 23년 이후 이스라엘은 다시 부강해집니다. 하지만 야일과 같이 지도자가 자신의 치적과 일신의 영달을 위해 애쓰게 되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다시 우상을 섬기고 악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돌라와 야일의 차이이며, 이렇게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사사 이야기를 함께 기록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4. 하나님의 바람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돌라도 야일도 그들이 지도자로 있던 그 때는 참 평화로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누린 평화가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최근에 나온 영화 중 ‘관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마지막 대목에 보면 주인공이 자신은 파도만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파도를 만드는 것은 바람인데, 바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죠.
당시 이스라엘이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가정 큰 원인은 당시에 이스라엘은 외적의 침입을 받지 않았습니다. 사사들의 노력도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자신들의 평화를 위해 많이 노력하고 애쓴 이유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태평성대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도움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도리어 더 크게 작용합니다. 마치 파도를 만드는 바람과 같습니다. 이 바람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안목을 열어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길 축원합니다.
평범함은 또 하나의 큰 축복입니다
삿 10:1-5 / 우인택목사
오늘 본문은 아비멜렉의 압제가 그의 죽음으로 끝이 나고 잇사갈 지파 출신의 사사 ‘돌라’에 의해 다시 이스라엘에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여 그 평화가 길르앗 출신의 사사 ‘야일’의 시대까지 계속된 것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1.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특이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사 돌라와 야일의 구체적인 행적이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돌라와 야일의 업적이 보잘것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다만 사사기의 기록목적이 사사들의 행적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구속사를 밝히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어떠한 범죄사실도, 사사들의 어떠한 실수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돌라와 야일은 사사로서의 임무를 잘 수행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45년 간 어떠한 대적도 이스라엘을 넘어뜨리지 못한 것이 이를 더욱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범죄에 빠졌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자기의 이름을 높이고 자기 혼자 모든 권세를 휘두르고자 하는 그릇된 야망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쟁이 될 만한 형제 70명을 모두 죽이고, 또 자기의 권위에 반기를 드는 세겜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그는 지도자로서 이스라엘의 평화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신의 권력욕에만 취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권력욕에 빠진 아비멜렉이 죽고 난 후의 이스라엘에는 어떠한 지도자가 필요했을까요?
자기의 이름과 권력보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평화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오랜 분열과 전쟁의 상처에 아파하던 백성들을 위로해 주고 화평을 이룰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돌라와 야일을 평화를 위한 일꾼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도자에게 권위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도자의 이름이나 권력을 세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직 그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맡기신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지도자가 자기 이름이나 권력에 초월할 때, 그를 따르는 공동체에 여호와 살롬,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지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뿐만 아니라, 가정에도, 나라에도 이런 지도자가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또 한가지 교훈은 평범하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 사사의 행적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1절의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라는 말은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대적들을 물리쳤음을 의미하고, 3절의 ‘사사가 되니라’라는 말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직분을 충성되게 감당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사의 일생뿐만 아니라 말년도 매우 평범합니다.
그들을 장사지낸 것에 관한 기록도 각각 ‘장사되었더라’라는 짧은 구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2, 5절)
기드온은 위대한 믿음의 용사였지만, 후대에 내분의 씨앗과 우상 숭배의 빌미를 남겨둠으로 아름답지 못한 말년을 보냈습니다(8:24-31).
그리고 오늘날에도 큰 업적을 이루고서도 말년을 잘못 보내 오명을 남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고 난 후, 물러나야 할 때에 묵묵히 물러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지도자가 적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대개 평범한 것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성도들은 기드온과 삼손은 기억하여도 돌라와 야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평범하게 일생을 누리는 것이 귀하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자신은 이름없이 빛없이 충성된 종으로서의 일생을 사는 것이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는 삶을 준비하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 뜻 안에서의 평범한 일상에 더욱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돌라와 야일 두 사사가 통치하던 시기는 합해서 모두 45년입니다.
이 45년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내적, 외적 풍파 없이 평온한 시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또, 4절에 야일의 아들 삼십 명이 어린 나귀를 탔고, 성읍 삼십을 두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매우 번영했음을 뜻하는 구절입니다.
사실, 이러한 평화 직전에 이스라엘은 아비멜렉으로 인해 격동과 역경의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그들에게 겸손하고 신실한 두 사사를 보내시어 평화의 시기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평화의 시기를 잘 보내지 못했습니다.
이어지는 6절에 그들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평화의 45년을 신앙 부흥의 기회로 삼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에 빠지는 타락의 기회로 삼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역경을 주실 때에는 믿음을 지키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마땅하지만, 평안과 풍요를 주실 때에는 믿음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서 선교와 구제 등의 선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러한 일에는 소홀하고 자기 배를 불리는 데에만 급급해 한다면,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처럼 또다시 악의 수렁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이 평안하고 풍성하십니까?
그러시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선한 일들에 힘쓰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 삶을 살면 평화와 풍요의 때가 계속되어질 것이지만, 이때를 자신의 배를 채우는데 사용한다면 반드시 악한 사탄이 다시 우리를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나는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선한 일을 하며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살피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고 권세를 누리기를 원하지만 오늘 사사 돌라와 야일을 통해 평범한 삶이 참으로 귀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역경을 주실 때에는 믿음을 굳게 지키기에 힘쓰고, 평안과 풍요를 주실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한 일을 하기에 힘써야 하는데, 저희들은 이러한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 주신 사명을 따라 선한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