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장례식
내가 어려서 우리 집안 제일 웃어른은 경동 할아버지였다. 그분은 내 친할아버지의
바로 손 아래 동생인데 인천 경동에서 사기전(사기그릇 상점)을 하셔서 나는 그분을
경동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내 친할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려서 금강산에 입산하셨다
고 들었다. 그 자세한 사연은 모른다. 경동 할아버지는 나를 친손자처럼 귀여워 해주
셨다.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머리가 좀 길다 싶으면 으레"이놈 이발하러 가자" 하고
이발소로 데리고 가셨다. 한번은 무슨 일로 아버지에게 따귀를 맞고 집 안마당 한구
석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를 보시고 사연을 물으셨다. 내가 대답을 안 하니 붉어
진 뺨을 보시고 "아범에게 맞았구나" 하시고 쩍쩍 입맛을 다시며 방으로 들어가셨다.
곧이어 "아범 나 좀 보자" 하는 할아버지 소리가 들렸다. 방문 뒤에서 무슨 말이 오갔
는지는 모르나 슬픔이 가시고 마음이 든든해지던 기억이 있다.1950년 대 중반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얼마 안 되어서 경동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선산이 있던 시골
로 운구를 하고 그곳에서 장사를 지냈다. 그때 내 생전 처음으로 상여 행렬에 참여했
다. 상여를 메고 가는 그곳 동네 상여꾼들의 구성진 상엿소리도 그때 처음 들었다. 묘
지로 향하는 장례 행렬 맨 앞에서 요령(종)을 치는 요령잡이가 목청을 돋워 인제 가면
언제 오나 ~ 라고 전주를 뽑으면 뒤의 상여꾼들이 에헤 에이라~ 달고~라는 후렴으로
응수한다. 앞에서 선창하는 요령 잡이가 이야기하듯 타령조로 사설을 할 때마다 상여
꾼들은 에헤 에이라~ 달고~로 되받는다. 간다~간다 나는 간다. 황천길로 나는 간다,
저승길이 머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이네, 앞동산의 두견새야, 너도 나를 기다리나. 그
때 요령잡이가 읊던 가락중에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이다. 상여가 좁은 시골
길을 지나 산으로 오르는 동안 요령잡이의 타령에 귀가 쏠린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은
잊고 있었다. 상여 타령에 몰입해 침울하고 슬픈 주위 분위기에서 나 나혼자 신기하고
흥미 있어 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모르긴 해도 요새 이런 우리 전통 문화 상여
행렬은 보기 힘들 것이다. 이제는 한국의 장례 문화도 예전과 다르다.그 중에 손꼽을만
한 것이 장례식을 병원에서 하는 일이다. 부고란에 장례식장은 거의 병원으로 나와 있
고 병원에서 치루는 장례식이 70%를 웃돈다고 한다.언제부터 병원이 장례식장까지 겸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한국을 떠날 1960년대에는 없던 풍습이다. 의료시설
의 증가와 선진 의료서비스의 발전과 보편화로 이제는 병원에서 마지막을 맞는 사람들
이 부쩍 늘었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겠지만,이런 풍습은 다른 나라에서 찾기 힘들
다. 기왕지사 병원에서 죽은 사람 병원에서 처리해서 장례까지 끝 내는 것이 얼마나쉽
고 편리한가. 속전속결' 그리고'빨리빨리'하는 한국인의 삶의 방식이 상장례에까지 연
장된 것 아닌가 하는 씁쓸한 생각도 든다.장례 일정도 2일장이 느는 추세라고 한다.유
교 사상에 뿌리를 둔 한국의 전통 상장례 문화는 조상 숭배를 으뜸으로치고 비록 망자
의 육신은 이승을 떠나도 자손들과의 영적인 연계가 계속된다는 의미가있다.다소 복잡
하고 격식에치우친 전통 장례의식이 죽은 조상과 살아 있는 자손을 연결하는 일종의 통
과의례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우리가 늘 지내는 조상 제사,차례 등 의식 모두 조
상과 자손간에 연연히이어가는 공동체 의식의 구체적 발현 아닌가.우리의 전통 장례 풍
습이 지나치게 격식을 따지고 복잡해서 간소하고 편리함을 따지는 현대인의 삶과 아귀
가 잘 맞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병원 장례식과 장례전문업체들의 장례처리는 죽
음을 육체적인 것으로 한정하고 망자의 육신 처리에 집중하여 죽은자와 산자의 연결을
성급하게 단절해 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옮김)
한 가 위 에
어느 가수는 동그라미를 그리려다가 무심코 그리운 얼굴을 그려버렸다
고 노래했는데, 나는 며칠 안남은 추석 명절 채비를 하다가 어느 새 이
십여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재된 의식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현존하는 의식으로 돌아와 나를 지배하곤 한다. 지
나간 나날들은 모두 차곡차곡 접혀 뇌리 갈피 갈피 쟁여 있으면서 틈을
엿보다가, 어느 순간 약간의 계기만 있으면 어김없이 생생한 기억으로
불쑥불쑥 튀어 나오곤 한다. 어머니는 세시(歲時) 음식을 번번이 잘 챙
겨 장만하셨다. 진달래가 필 무렵엔 화전을 부쳤고, 단옷날엔 준칫국을
끓였으며, 시월 상달엔 붉은 팥을 두둑히 놓은 시루떡을 쪄서 이웃과
나누었고, 동지엔 꼭 팥죽을 끓여 어린 두 딸을 먹이셨다. 아버지 없는
빈 자리를 그렇게라도 메워 주고 싶었던 건지, 청상의 어머니는 지치
지도 않고 평생토록 딸들 먹이는 일에 열심이셨다. 추석 같은 큰 명절을
범연히 보냈을 이가 없다. 추석에 먹는 대표적인 음식은 토란국과 송편
이다. 어머니는 팥이며 콩이랑 밤이랑 대추 등을넣은 송편을 종일 빚
어 큰 시루에 솔잎을 켜켜이 얹어 찐 것을, 김이 서려 어둑신한 부엌 백
열등 밑에서 찬물에서 솔잎을 재빨리 떼어가며 건져내던일은 꼭 어제일
처럼 생생하다. 그정겨운 이야기를 나눌 언니도 어머니도 이세상 사람이
아닌지 이미 오래니, 명절 때마다 겪는 허전함이 사무칠 수밖에 없다.온
갖 먹거리를 비롯해 값싸고 질좋은 옷이 넘쳐나는 요즈음엔 특별히 명절
이라고 아이들이 기뻐 할 일이 없는 것 같다.그러나 오래 전엔 추석은 아
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모처럼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어보는 날이고,
아이들은 새 옷으로 한껏 치장하는 신나는 날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5학
년 때 어머니께서 처음으로 추석빔을 해 주셨었다. 한복으로 곤색 사텐
치마에 자줏빛 고름과 끝동을 단 노랑 호박단 겹저고리를 손수 지어 입혀
주셨는데, 마치 날개를 단 양 날 듯하던 기분과 처음으로 입어 본 그 새옷
에서 나던 냄새를 아직껏 기억하고 있다.남녀 불문하고 명절에 대한 스트
레스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명절을 맞으면서 설레던 기쁨과 의미가 농
경사회에서 상공사회로 바뀌어가며 모두 바빠진 시류를따라 퇴색된게 사
실이다. 명절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우선 소(小)가구로 분화된
가족 관계로해서 가족간의 유대감을 잃어 어른을 찾아 뵙거나 집안 대소
사를 챙기는 게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남의 일로 여겨지게된 때문
이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가을 청명한 날에 햇곡식으로 맛있는 음식을 장
만하며 농부의 수고를생각하고, 조상의 음덕을 기리며, 모든 살아 있는 것
들을 위한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좀 귀찮고 번거롭더라도 어른에대한 예의와 전래되어 온 미풍양속
을 아름답게 지키는 것은,자식들에게 본을보이는 무언의 교육행위라 생각
하는 쪽이다. 들리는 소식에, 추석을 앞두고 모처럼 대형마트를 비롯해 전
통시장을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많아졌다고 한다.기왕에 잦아진 걸음이니
계속 이어져 우리나라의 경제 형편이 한 단계 뛰어 올랐으면 좋겠다. 그
리고 명절을 핑계 삼아 이번 추석에는 집집마다 온가족이 모여 한 조상의
자녀임을 확인하며 한층 행복이 다져지는 날이 되었으면하는 바람이다.이
번 추석에도 나는 둥근 달속에 얼비치는 어머니의 얼굴을 그리며 어머니의
솜씨를 흉내 낸 ‘송편 빚기’를 어김없이 해 볼 생각이다.더불어 내 자녀들의
추억 거리도 함께 빚을 요량이다. (친구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