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기운이 완연하던 지난 일요일 오후 LG와 한화의 경기를 보기 위해 잠실구장을 찾았습니다.
양 팀이 한 경기씩 승-패를 주고 받은 후 벌어진 이번 시즌 세 번째 맞대결이었죠.
지난 주말 한화와의 3연전 시작 전까지 LG는 6연승중이었습니다.
한화의 선발 로테이션상 류현진을 피해갈 수 있는 세 경기였기에
LG로서는 내심 연승을 이어가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1차전에서 데뷔 이후 최고의 투구를 한 한화 유원상에게 완봉승을 안겨주며
기대했던 연승이 첫 경기에서 허무하게 끊기고 말았지요.
연승을 달리던 팀이 불의의 패배를 당한 후 무너져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LG 선수단도 2차전을 앞두고 적잖이 긴장을 했을 겁니다.
실제로 이 날 경기 전에 만난 LG 유지현 코치가 그렇게 얘기하더군요.
지난 시즌에도 8연승이 끊긴 후에 연패에 빠진 경험이 있어서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고 말이죠.
하지만 토요일 경기를 앞두고 박종훈 감독이 소집한 선수단 미팅을 통해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됐고
실제로 이 날 LG는 14대 3의 대승을 거뒀습니다. 이 경기는 박명환의 100승 경기이기도 했죠.
유지현 코치는 전 날 경기 승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의미심장한 얘길 하더군요.
지난 시즌 8연승을 달리며 2위까지 치고 올라갔을 때는
선수단 전력의 100%를 쏟아내면서 정신없이 달려나갔던 기억이 있는데
올해는 시즌 초반 팀이 완벽한 상태를 갖추지 않았음에도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LG는 주축 선수들이 부상이나 컨디션 난조로 제 활약을 해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죠.
상당히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었습니다.
내친 김에 유지현 코치에게 박종훈 감독에 대해 물었습니다.
일단 유 코치가 가장 강조한 대목은 박 감독이 '준비된' 지도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박종훈 감독이 취임 직후인 지난해 말 진주 마무리캠프부터 사이판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
그리고 시즌 시작 후 한달 가까이 지켜본 결과,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한 준비를 해 놨더라는 거죠.
특히 이달 초에 불거졌던 팀 내의 불미스러운 일들을 이겨내는 것을 보면서 감탄했다고 합니다.
그 누가 보더라도 만만치 않은 일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보통 감독이 아니라는 것을 재확인했다더군요.
한 두 수가 아니라 대 여섯 수 이상을 내다보는 고수의 느낌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점점 달라지고 있는 선수단의 분위기와 그 중심에 있는 박종훈 감독의 리더십을 고려할 때
이번 시즌만큼은 팬들이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지현 코치가 그렇게 애기하니 정말 의미심장하게 들리더군요.
LG 감독실에서 박종훈 감독과도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에서 팀이 시즌 전 구상했던대로 운영되는지에 대해 먼저 물었습니다.
박 감독은 LG트윈스를 처음 맡으면서 자신이 가졌던 느낌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내더군요.
지난 시즌 직후 처음 만난 선수단의 분위기는 상당히 가라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성적을 내지 못해서인지 팀 내부에 패배의식이 감돌고 있었던 데다
선수들 하나 하나가 위축돼 있고, 불신과 핑계가 자주 목격됐다고 합니다.
박종훈 감독이 처음 한 일은 바로 그런 부정적인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선수들 하나하나와 적극적으로 대화하면서 자신감을 심어주는 일에 주력했다는군요.
지난 경기 장면들을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문제점을 공유해 해결 방법을 함께 모색하고
각각의 잠재력을 확인시켜 주는 한편 프로선수로서의 자세를 심어주는 데 애를 썼다고 합니다.
2010 시즌에 대한 박종훈 감독의 전체적인 구상은 '절반의 성공'이었습니다.
초반은 팀을 만들어가는 시기로 삼고 시즌 후반부에 제 모습을 보여줄 계획이었다더군요.
LG라는 팀을 처음 경험하는 초보 감독으로서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는 있을 수밖에 없고
팀 전체적으로도 오랜 기간 쌓여 온 어두운 그늘을 씻어 내는 시간도 필요했기에
전반기에는 쉽지 않을 거라고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습니다. 박종훈 감독은 LG의 입장에서는 외부 인사였기에
만만치 않은 시행착오 과정이 반드시 찾아 올 거라고 말이죠.
그런데 생각보다 그 시기가 일찍 온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듯 합니다.
실제로 봉중근 선수가 2군에서 복귀하고 첫 승을 거둔 즈음부터 LG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지요.
팬들이 주고 간 건강음료 한 팩을 받아 들고 인터뷰를 이어 갔습니다. 오지환과 '작은'이병규 등 젊은 선수들에 대한 믿음이 상당히 인상적이라고 했더니 공을 코치진에게 돌리더군요. 감독 본인은 그 선수들이 실수를 하고 찬스를 놓칠 때마다 몇 번이고 다른 생각을 하곤 했는데 선수들과 더 가까이에서 땀흘리는 코치들이 반복해서 확신을 심어줬다는 것입니다. 그 덕에 기회를 얻은 선수들이 이젠 서서히 보답하고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라고 박 감독은 얘기했습니다. 시즌 전부터 기대를 모은 외야 '빅5'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박종훈 감독은 오히려 그 부분이 더 긍정적이라고 말했습니다. 5명 가운데 2명만 제대로 해 주고 있음에도 팀이 서서히 살아나고 있으니 앞으론 더 좋아질 일만 남은 것 아니겠냐며 웃음을 지어 보이더군요. (앞서 유지현 코치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지요.) 그러면서 '빅5'는 LG트윈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에 제대로 가동되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팀들이 LG를 상대하는 일이 더 힘겨워지겠죠? 시즌 전부터 박종훈 감독을 만날 때마다 제가 집요하게 물어봤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타선에 비해 허약한 투수진을 어떤 식으로 운용할 것인가'였죠. 이 날도 어김없이 또 한 번 질문을 던졌습니다. 박종훈 감독은 4선발 체제가 나름의 해법이라고 얘기하더군요. 불펜 투수진이 다른 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5선발이 들어갈 투수진 엔트리의 한 자리를 중간계투로 채우고 그 때 그 때 엔트리를 바꿔 주면서 투수진을 운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고육책 같기도 하지만 LG투수진을 고려할 때 꽤 현실적인 방안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참고로, 전 박 감독이 팀을 더 원활하게 끌고 가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타자 자원을 활용한 트레이드를 통해 투수진을 보강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쭈욱 생각해 왔답니다. 그 생각을 한 번 더 꺼냈더니 박 감독은 또 그 얘기냐며 웃어 넘기더군요.ㅎㅎ 감독실에서 나와 기자실 바로 앞쪽에서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LG 곤잘레스와 한화 카페얀, 두 외국인 선수가 이전과는 달리 무실점 호투를 하면서 6회까지 0대0, 예상 밖의 투수전이 펼쳐졌습니다. 제 옆에 있던 경향신문 이용균 기자는 '항공권 더비'라는 표현을 쓰더군요. 누가 먼저 미국행 비행기 표를 끊는가 하는 싸움이라는 것이죠.ㅋㅋㅋ (이 날 경기 내용만 놓고 볼 때는 두 선수 당분간 비행기 티켓 끊을 일은 없어 보였습니다.^^) 0의 행진이 이어지던 7회 말, LG에게 득점 기회가 왔습니다. 선두타자였던 5번 정성훈이 안타를 치고 나가 무사에 주자 1루 상황이 됐죠. 이어서 나온 타자는 전날 만루홈런을 치는 등 최근 LG에서 가장 잘 치고 있는 조인성이었습니다. 1점 승부였기에 번트 사인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강공이었고 조인성은 좌측 담장까지 가는 2루타를 쳐내며 감독의 기대에 120% 부응했습니다. (조인성 선수도 번트 사인을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아 엄청난 책임감을 느꼈다고 합니다.ㅎㅎ) 제 마음 속 이 날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여기서부터였습니다. 무사 2-3루에서 다음 타자는 7번 박용택이었습니다. 지난 시즌 타격왕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최악의 부진을 보이고 있는 박용택. 1할대 타율로 허덕이고 있는 LG의 주장 박용택에게 찬스가 찾아온 것이죠. LG 팬들도 그랬겠지만 저 역시 박용택이 이 장면에서 뭔가 해 주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박종훈 감독 역시 박용택을 따로 불러 편하게 치라고 지시를 하면서 맡길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 상황에서 한화의 투수가 마일영으로 바뀌었고 박종훈 감독은 고민 끝에 최동수 선수를 대타로 기용합니다. 결국 한화 벤치가 최동수를 고의사구로 거르고 무사만루에서 오지환과의 승부를 선택했지만 오지환이 초구에 깊숙한 좌중간 플라이를 날리면서 LG가 결승점을 뽑습니다. 그 이후 LG가 두 점을 더 추가하면서 승부에 쐐기를 박았지만 저는 그 장면보다 벤치에 있던 박용택 선수가 더 신경이 쓰이더군요. 2009년 리딩히터로서, 주장으로서, 또 LG트윈스의 얼굴로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서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다. 경기 후에 만난 박종훈 감독도 그 대목에서 엄청나게 고민을 했다는 말을 하더군요. 하지만 마일영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결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 상황에서 박용택이 해결을 해 준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박용택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아직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하고 있는 박용택에게 그 부담을 모두 지우는 것보다는 감독과 다른 선수들이 부담을 나누어 지는 상황을 택하는 것이 맞다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결국 박종훈 감독의 그 선택은 좋은 결과로 이어졌고 팀도 승리를 따낼 수 있었죠. 경기 전 LG 불펜에서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목격했습니다. 어떤 선수 하나가 불펜에 있는 타석에 홀로 서서 장시간 이미지 스윙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경기에 임하는 것처럼 타격자세를 취했다가 풀고, 진지하게 방망이를 휘둘렀다가 타석을 벗어난 후 심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타석에 들어서기를 수 차례... 그 선수가 바로 박용택이었습니다. LG 경기를 보러 갈 때마다 항상 박용택 선수와 웃는 얼굴로 안부를 묻곤 했는데 이 날만큼은 그 진지한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박용택이 곧 살아나리라는 확신을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 날 경기에서는 아쉬움을 또 한 번 곱씹어야 했지만 박용택은 꼭 돌아올 겁니다. 그 때 박종훈 감독의 표정은 여기서 얼마나 더 환해질지 정말 궁금하네요.
응원 횟수 0
첫댓글 Coolguy님 글 잘 봤습니다. 괜히 코가 찡긋해지네요. 주장은 살아날께 확실하니까 별 걱정이 안되네요..
감독님이 이정도 팀의 재건을 위해 긍정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면...팀선수들도 .. 같이 해야죠.. 신바람 리더쉽을 일으키고 있으니..같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