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앞에서 나는 스스로를 인질 삼아 겁박한다. 나는 인질로서 겁에 질린 동물처럼 꼬리를 감치고 눈을 감고 어떤 발언도 삼간다. 이 인질극은 오래 지속되었다. 우리는 몇 번의 소나기에 흠뻑 젖었고, 몇 번의 폭설에 네 발이 얼었다 녹았으며’
- 박세미 詩『일 앞에서』
- 시집〈오늘 사회 발코니〉문학과지성사 | 2023
비행기는 곧 착륙할 것이다. “오~” 하고 발음할 때의 입 모양을 닮은 창문 너머를 본다. 베를린으로부터 돌아오는 중이다. 구름 위의 하늘은 언제나 파랑. 비도 눈도 경험해보지 않은 그야말로 순정한 파랑.
6박 7일 일정의 출장이었다. 지난여름에 잡힌 일정이었으나, 사정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출국 날짜가 다가올 즈음, 내심 이 출장이 취소되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출장을 제안한 출판사 대표는 내게 “휴가라 생각해”달라고 했다. 출국 전날까지도 못다 한 일들로 허덕이면서 나는 그의 말을 떠올렸고, 내겐 어울리지 않는 사치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1000㎞도 넘게 떨어진 도시에 도착해서도 한동안 나는 일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보내지 못한 메일 회신, 다 쓰지 못한 원고, 지불을 잊어버려 체납이 되어버린 요금….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눈앞의 현실은 낯설거나 아름다운 이국의 풍경이었으니, 빠른 체념과 망각만이 남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공식 일정을 마치고 자유롭게 보낼 수 있던 이틀은 철없이 즐겁기만 했다. 일 생각이 독버섯처럼 돋아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맞닥뜨리는 새로움은 이내 여유롭고 들뜬 영혼으로 돌려세웠다.
비행기 안에서는 “한 이틀만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아쉽지만은 않은 것은 돌아갈 곳에 기다리고 있는 일들 때문이겠지. 허겁지겁 살아가게 될지라도 며칠은 새로운 기분으로 잘 살아 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유희경 시인·서점지기〉
Three Pieces from Schindler's List: I. Theme · John Williams · Yo-Yo Ma · New York Philharmon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