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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
삿 10:6-18
6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7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8 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9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10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1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12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13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14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16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17 그 때에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도 모여서 미스바에 진을 치고
18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 그가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니라
삿 10:6-18 / [다시 등돌리는 이스라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데도 또 다시 못된 짓만 일삼았다. 그들은 바알과 아스다롯뿐만 아니라 아람 사람의 신, 시돈 사람의 신, 모압 사람의 신, 암몬 사람의 신들을 섬겼으며 여호와께 등돌리고 더이상 그분을 섬기지 않았다. 7)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의 지배를 받게 하셨다. 8) 그 해에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심하게 억압하였다. 이렇게 요단강 건너편 길르앗 지방에 있는 아모리 사람들의 지역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18년 동안이나 그들에게 짓눌려 지낼 수밖에 없었다. 9) 심지어 암몬 사람들이 요단강을 건너와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지파까지 공격하였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겪은 고통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10)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께 울부짖었다. `하나님, 우리가 여호와를 저버리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1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짓눌렀던 애굽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너희를 구해 주지 않았더냐? 또 너희를 못살게 굴던 아모리와 암몬과 블레셋 사람의 손아귀에서 너희를 건져내지 않았더냐? 12) 또한 시돈과 아말렉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괴롭힐 때에도 내게 간절히 애원하기에 너희를 건져내 주지 않았더냐? 13) 그런데도 너희는 이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내게서 등을 돌린 채 다른 신들을 섬겼다. 내가 다시는 너희를 건져내 주지 않겠다. 14) 너희는 어서 가서 너희가 섬기기로 한 그 신들에게나 울부짖어 보아라. 아마도 너희가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그 신들이 너희를 잘 건져내 줄 테니!' 15)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가 정말 주께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주님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이번만은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우리를 생각해 주셔서 이 고통을 겪지 않도록 건져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하고 여호와께 애원하였다. 16)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자기들이 모셨던 이방신상들을 모두 없애 버리고 여호와만을 다시 섬겼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당하였던 고통을 생각하시고는 마음 아파하셨다. 17) [입다가 지도자가 되다] 그때에 암몬 사람들이 몰려와 이스라엘과 싸움을 하려고 길르앗에 진을 쳤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싸움에 대비하여 모두 모여 미스바에 진을 쳤다. 18) 길르앗 우두머리들은 걱정스러워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녀석들과 싸울테냐?' 하고 의논하였다. 그러고나서 `누구든지 먼저 나가 싸우는 사람을 우리 길르앗 땅의 통치자로 삼자!' 하는 결론을 내렸다.
본문은 또다시 우상 숭배의 늪에 빠진 이스라엘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블레셋과 암몬의 압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6-8) 다시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비롯하여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 모압의 신들, 암몬의 신들, 블레셋의 신들 등 각양각색의 우상 숭배에 빠집니다. 이들이 우상에 빠지는 이유는 먼저 이 우상들이 인간의 생존과 생활의 경제적 이익, 그리고 쾌락적 욕망들을 충족시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다가 등 따습고 배부르면 금지와 절제를 싫어하면서 욕망 좇기를 좋아하는 인간 본성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심각한 우상은 온갖 탐욕의 대상이 되는 것들과 이념들입니다. 여호와의 첫 계명을 어기는 이런 자들의 행위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킬 뿐입니다(신 5:7-9).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9-14)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그 지역의 우상 신들을 섬겼지만 상황은 회복될 수 없는 처참함과 신음을 토해내는 곤고함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고통 속에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범죄를 고백하며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요청이 순간의 위기만을 모면하려는 시도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과거 자신이 너희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해 왔는가를 나열하시면서 그들의 배은망덕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너희가 섬겼던 우상들에게 구원을 요청해 보라고 하십니다. 일단 우회적인 거절을 하신 셈입니다.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15-18) 하나님의 책망으로 이스라엘이 정신을 차리고 자기 가운데에 있던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립니다. 이를 통해서 여호와를 섬길 것을 결단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실한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함을 보시고 마음에 근심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자신의 백성을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적용: 버려야 할 욕심이나 악한 습관, 숨은 죄들까지 찾아서 남김없이 참으로 버렸습니까? 등 따습고 배부를 때에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초심이 무엇입니까?
바보의 어원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한 가지는 '밥을 남달리 많이 먹는다'는 의미의 '밥보'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지나친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흔히 욕심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나친 욕심은 더 갖지 못함에 대해 괴로움과 피폐함을 만들고 결국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게 됩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면 행복해집니다. 큰 행복이 찾아와도 만족이 없으면 불행해지고 사소하고 작은 행복이라도 만족이 있으면 큰 행복이 찾아옵니다.
< 설 교 >
상처 받은 치유자
삿 10장 6절 / 류영모목사
I. 상처
인간의 마음처럼 넓고 큰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온 우주를 품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처럼 따뜻한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원수도 녹일 수 있고 무쇠도 녹일 수가 있습니다. 모든 행복과 기쁨의 샘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상처로 얼룩지면 인간의 마음처럼 좁은 것이 없습니다. 바늘 하나도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처럼 추운 것이 없습니다. 상처받은 인간의 마음은 하루 아침에 북극이 되어 버립니다. 상처 입은 인간의 마음이 치유되지 않으면 좋은 직장도, 넉넉한 월급도, 고급 주택도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음의 빗장을 걸고 늘 외롭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교제를 하지 아니하고 사역에 몸담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교회생활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상처를 건강하게 받아들이고 건강하게 해결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상처 가운데 사령관 급에 해당되는 “거절감”이란 상처가 있습니다. 버림받았다는 느낌이지요. 이 거절감은 자살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버림받은 느낌. 부모로부터 힘없는 어린시절 버림받았다는 감정. 자식들로부터 버림받은 노인의 감정. 목숨 걸고 일했던 직장으로부터 버림받은 느낌. 사회와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느낌... 살인마.
지난 시간엔 이 거절감정을 부정적으로 해결하고 이복형제 70명을 죽이고 권력을 쟁취한 아비멜렉이란 사람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거절받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나옵니다. 형제들로부터 거절받은 입다라는 사사가 나옵니다. 입다는 아비멜렉과 달리 거절감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해결했는가 하는 것이 나옵니다.
교인들의 상처와 문제를 치료해 주어야 할 목사도 늘 상처를 받습니다. 교인들은 목사란 존재란 상처받을 마음도, 감정도 없는 목석으로 압니다. 혹시 상처를 받았다 할지라도 ♪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 찬송 한 장 부르고 나면 금방 고침 받는 별종인간 인 줄 압니다. 목사님들은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는 명약을 가지고 다니다가 상처를 받을 때마다 한 알 입에 툭 넣으면 고침 받는 줄로 압니다.
목회자가 상처받아 아파하면 인격이 덜되고 믿음이 모자라 그런 줄로 압니다. 어쩌면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상처를 겪을 수도 있는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누구나 상처를 받고 거절감을 느낍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도 상처를 받고 거절을 경험한다니까요.
문제는 상처와 거절감을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채봉 시인의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하는 시가 있습니다.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하는 말로 이 시는 맺습니다.
상처는 pain(고통)이 될 수도 있고
gain(유익, 자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상처는 miss(실패, 상실)가 될 수도 있고
mission(사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조개
그래서 이 시간에는 사사 입다를 공부하는 첫 시간 「상처 입은 치유자」 「상처 받은 치유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헨리 나우웬의 오래된 책 「The wounded Healer -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 진정한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은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자신이 경험한 상처를 건강한 태도로 받아들이면 다른 사람을 돕고 치유하는 자산, 원천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상처 때문에 인생이 곪고 마냥 아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상처의 경험으로 이웃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굶주린 사람은 굶주리는 사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애통해 본 사람은 애통하는 사람을 달래줄 수가 있습니다. 크리스챤 리더는 자신의 상처를 숨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상처와 약점을 품어 줍니다.
이제 그 「상처 입은 치유자」들을 만나보기 위해 사사기 10장 11장 속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그리고 하나님도 만나보고 입다도 만나보십시다.
II. 입다가 등장하는 상황
사사가 출현하려고 하면 그 시대의 어두운 상황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성경은 사사 입다가 등장하는 과정에 앞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한 영적 타락 상태를 그 어느때 보다 신랄한 언어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6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지금까지 사사들이 등장할 때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겨” 우상 가운데 대표 선수만 나왔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십시오. 이어지는 말씀이 지금까지의 성경 기록과는 아주 다른 “심해도 너무 심하다”는 느낌을 확 풍겨주고 있습니다.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신을 이렇게 음란이 섬기고 있다고 일일이 나열한 적이 없거든요. 무려 7가지 이방신을 나열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기본적으로 우상으로 섬기는
1) 바알들과
2) 아스다롯 외에
3) 아람의 신들,
4) 시돈의 신들,
5) 모압의 신들,
6) 암몬 자손의 신들,
7)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열거합니다. 그것도 모두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무슨 우상 전시장입니까? 이방신 박람회합니까?
보십시오! 아람은 북동쪽에 있는 나라입니다. 시돈 북서쪽에 있는 나라입니다. 모압은 남동쪽 있는 나라이고, 암몬은 동쪽에 있는 나라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블레셋은 서쪽에 있는 나라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까이 있던 가나안의 바알과 아스다롯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동서남북의 모든 나라들의 우상들을 들여와 숭배했다는 말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의 사명은 가나안의 음란하고 타락한 문화를 뿌리뽑고 여호와 신앙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오히려 여호와는 버렸습니다. 총체적인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타락이 도를 넘어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썩을대로 썩었습니다. 아예 타락하기로 작정한 사람들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풍요와 쾌락”이라는 달콤한 이방 문화 때문입니다. 물질의 풍요와 육체적 쾌감은 구별된 백성이라는 정체성도 헌신짝처럼 내버리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이방신으로 대체하면서 철저히 실용주의적 삶을 살았습니다. 물질 풍요를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성적 쾌락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요?
바알과 아스다롯은 가까이 살다보니까 어쩌다 자신도 모르게 물들었다고 구차한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먼 나라에서 우상들을 들여왔다는 것은 의지와 선택으로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함께 섬긴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는 버렸다고 되어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디다 수출해 버리고 먼나라에 가서 우상들을 수입해다 섬겼습니다.
III. 여호와의 분노
이에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7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진노하사” 히브리어 본문은 “여호와의 분노가 불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입과 코에서 나오는 강력한 불길을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그만큼 여호와의 분노가 크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도 “해도 너무한다”라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도대체 저들이 몇 번째 배신하고 회개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완전수 7번을 참아주지 않았나? 7번 참은 것은 참을만큼 참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블레셋과 암몬 족속을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치게 하십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들에 의해 당한 고생을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학대하니- 개역한글)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학대하를 당하였고 -개역한글)
여기서 “학대하니” “학대당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서로 발음이 비슷한 “라아츠”와 “라차츠”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라아츠”는 “산산히 부수다, 파괴하다”라는 뜻이고 “라차츠”는 “으깨다 부수다 압제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심했으면 “라아츠, 라차츠” 곧 산산히 부수고 으깨셨다고 하겠습니까?
18년간 칼바람처럼 매서운 징계를 견디다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똑똑히 보십시오! 이번에는 하나님이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듣고도 예전처럼 구원자를 곧바로 보내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외면합니다. 오히려 백성들을 꾸짖고 나오십니다. 이점이 예전의 하나님의 행동과 다른 모습입니다.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대해 여호와는 11-14절까지 무려 4절에 걸쳐서 호된 질책을 하시는데 그동안 7번 이스라엘을 압제의 손에서 구원해 내셨음을 열거하십니다.
1) 애굽 사람의 압제에서
2) 아모리 사람의 압제에서
3) 암몬 자손의 압제에서
4) 블레셋 사람의 압제에서
5) 시돈 사람의 압제에서
6) 아말렉 사람의 압제에서
7) 마온 사람의 압제에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질책하십니다. “이제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통을 치십니다. 이전 사사시대에는 들어보지 못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상처를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절감을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7번 구원의 손길을 펴신 일을 열거하신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로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배신이 그만큼 심각했다는 말입니다.
성경기자는 백성이 음란이 섬긴 7 이방신과 하나님이 백성에게 베푸신 7번의 은혜를 대비시킴으로써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 것입니다.
백성들의 기계적인 부르짖음으로 또 다시 구원을 요청하는 행위에 하나님은 대단히 역겨워 하십니다.
“부르짖음 = 구원”이라는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에게 상당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제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나도 이제 너희들한테 질려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뿐 아닙니다.
이어 하나님은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14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하는 말씀까지 하시지요.
백성들은 지금까지 부르짖으면 곧 구원자를 보내주시는 하나님 성품의 약점을 이용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르는 척 속아주시는 것은 그의 백성들이 언젠가는 크게 회개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기대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백성들이 기대에 어긋나게 회개할 기미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타락의 극치를 달립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 처럼 타락의 길을 내리치닫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나도 너희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
IV. 상처 입은 하나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내려친 징계의 회초리를 내리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7가지 이방신을 섬기며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 미치고 땅 끝에 도달했던 것으로 고발당한 백성들이기에 이번에는 그들의 회개의 부르짖음도 이전의 부르짖음과는 다르게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그냥 부르짖었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10절) 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긴 자신들의 범죄 사실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 이하 이스라엘의 기도는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좋으실 대로 행하시옵소서. 우리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싸늘한 반응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희들을 향한 분노는 너무나 정당한 것입니다. 하오나 우리는 부르짖을 곳이 없습니다. 우리를 살려주실 분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사오니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소서. 부르짖을 자격도 없고 용서받을 가치도 없사오니 다시 구합니다. 우리를 살려주소서. 」
이에 더하여 성경저자는 그들이 회개를 행동으로 옮겨 이방신 우상들을 제거하고 여호와를 섬겼다고 보고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백성들의 회개에 대한 여호와의 반응이다.
16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이 말씀을 이스라엘의 회개로 인해 하나님이 후회하시고 마음을 돌이키신 것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근심하다”는 말의 히브리 원어는 “카차르”인데 상처로 속이 상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어 자신의 가슴을 뜯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애통한 마음을 말합니다.
백성들의 회개가 참된 회개이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이 돌아섰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회개와는 상관없이, 비록 이스라엘에게 매는 드셨으나 아파하는 그 모습 때문에 마음이 심히 비통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 부모들도 아이들 때려놓고 종아리에 회초리 자국이라도 남은 것을 보면 가슴이 몹시 쓰라린 것과 같습니다. 비록 그 녀석들이 또 잘못을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근심하는 마음으로 인해 범죄한 이스라엘에게는 한가닥 희망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공동체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다하지 못한 채 오히려 이스라엘을 우상 전시장, 이방신의 박람회장으로 만들어 극심한 우상숭배풍조라는 중병에 깊이 빠져들 때, 하나님은 깊은 상처를 입으십니다.
내 자녀, 내 백성, 내가 질곡이 땅 애굽에서 힘써 이끌어낸 자식들이 여호와를 이방신으로 대체하고 여호와를 헌신짝처럼 버릴 때 하나님도 사랑하는 자식으로부터 거절당하는 쓰라린 거절 감정을 겪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 백성이 저지른 극심한 영적 타락을 조목조목 집어가며 호된 꾸중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동안 7번 참아 오시며 7번 베푸셨던 “완전한” 은혜를 상기시키기도 하십니다.
V. 상처 받은 입다
하나님은 참 유모어가 많으신 분이십니다. 상처 입고 거절 받으신 하나님께서 이번에 선택한 사사가 바로 입다! 그는 상처 입고 거절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입다는 지금 가족으로부터 거절당하고 따돌림받아 객지에서 살아갑니다.
입다의 이야기는 중동판 홍길동이나 임꺽정 혹은 일지매 같은 얘기입니다. 입다가 형제들로부터 거절받아 “돕”이란 고장으로가 숨어사니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지 “잡류” 또 다른 상처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몰려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사무엘상 22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아둘람 굴에 숨어 살았더니 환란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이 모여 큰 부대를 이룹니다.
여기 상처 입은 입다 곁으로 상처 입은 자들이 몰려듭니다.
경제적으로 상처 입은 자, 가방 끈 짧아 거절 받은 자, 출신이 천하여 버림 받은 자, 온갖 잡류 인생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입다는 길르앗 땅에 길르앗이란 사람이 기생 즉 매춘부에게서 낳은 아들입니다. 본처의 자식들이 입다에게 아버지의 상속이 물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집에서 쫓아냅니다. 이 무렵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침공해 옵니다. 외적은 침입해 오는데 이스라엘은 변변한 군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원로들이 입다의 소식을 듣고 그를 군대장관으로 모셔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입다가 사사로 등장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사들이 무대에 등장하는 과정과 다른점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사들에겐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그를 사사로 세웁니다. 그런데 입다에겐 여호와의 영이 임하는 과정이 생략되고 이스라엘 장로들이 입다를 모셔와 사사로 세웁니다.
여기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입다를 사사로 세우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오늘 본문 사사기 11:9-11절 사이에 여호와께서 암몬을 넘겨주시고,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고, 여호와 앞에 아뢴다고 말하므로 여호와의 이름이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입다를 사사로 공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입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사사인가 하는 문제에 성경은 아무런 이의를 달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상처받은 사사 입다가 그 상처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이스라엘의 상처를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사기 저자는 입다를 상처를 상처로 해결한 아비멜렉과 의도적으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첩의 자식으로 태어납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정실의 자식들과 갈등을 겪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음을 성경기자는 부각시킵니다. 아비멜렉은 불량배를 돈으로 사서 70명 청부살인을 하게 합니다. 입다에겐 오히려 잡류들이 몰려듭니다.
아비멜렉은 이스라엘 공동체 언약을 버리고 세겜 땅으로 가 정권을 탈취합니다. 입다는 밖으로 쫓겨갔다가 정식으로 초빙되어 군대장관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상처를 상처로 반응한 아비멜렉을 버리고 죽이십니다. 그러나 상처 입은 치유자로 자신이 받은 상처를 상처로 복수하지 않는 입다를 사사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머리가 되기 위해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다 죽이고 머리가 된 아비멜렉의 두개골 머리를 깨뜨려 죽이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입다를 머리로 삼으셨다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0:18, 11:8, 9, 11절 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 - 입다
창녀의 몸에서 태어나 버림받고 상처받은 자가 민족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나설 때 그를 사사로 하나님은 쓰십니다.
도전! 여러분은 상처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가슴에 든 것이 상처 밖에 없어서 남에게 상처나 주면서 사십니까? 아니면 상처 입은 치유자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역자, 이 시대의 사사로 사십니까?
그래도 또 용서하시는 하나님
삿 10장 6~16절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형식의 문장입니다. 즉 새로운 사사의 출현을 예견하게 하는 이스라엘의 어두운 상황을 알리는 전형적인 서술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6절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7절에서 보는 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셨다"고 합니다. 그 결과 8-9절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은 그들의 침략을 받고 십팔 년 동안 억압을 당하였으며 심히 곤고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10절이 전하듯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문은 사사기 기록의 전형을 따르고 있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전의 기록들과는 다른 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6절 전체를 다시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했습니다. 보통은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라는 말로 그치던 것을 여기서는 길게 이어서 그 이스라엘 자손의 악을 열거하며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눈에 띄는 것은 이전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외에 신으로 섬겼다고 언급된 것이 주로 바알과 아세아 또는 아스다롯이었는데(삿2:11, 13, 3:7) 오늘 본문에서는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겼다"고 열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풍조가 그 절정에 달해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아람과 시돈과 모압과 암몬과 블레셋은 가나안 주변 동서남북의 모든 이방나라와 족속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우상뿐 아니라 먼 주변의 모든 우상들까지 끌어들여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먼데로부터 우상들을 들여왔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가 살다보니 어쩌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기들도 모르게 물들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으로 그렇게 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죄악이 극에 달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밑바닥 구렁텅이까지 떨어져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저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는 말만 가지고는 부족해서 6절 끝에서 보듯이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였다" 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바알이나 아세라를 섬긴 것이 아닙니다. 아예 하나님은 버리고 그를 섬기는 대신 원근주변의 온갖 우상들을 섬기는 일에 빠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전의 기록들과 다른 점이 또 있습니다. 앞선 이야기들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의 학대와 착취를 견딜 수 없게 될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3:9, 4:3, 6:7)고 짧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10절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했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게 하는 절박한 상황을 낳은 그 근본적 이유를 스스로 밝힌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조목조목 자백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도 심각하게 그들의 죄상을 알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몰라서 죄를 지었다기보다는 알면서도 그런 죄악으로 빠져들어 갔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그들의 죄악이 더욱 가증스러웠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전의 기록들과 또 다른 점을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선 이야기들 속에서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사사를 세우셔서 이방압제자들을 물리치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평온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반응이 즉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본문 11-14절을 다시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은혜와 구원의 역사를 언급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행한 배신의 역사 또한 길게 상기시키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구원으로 응답해줄 의사가 없음을 밝히십니다: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과 잘 해보라고 빈정거리시기까지 하십니다: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 차가운 하나님의 반응 앞에서 보인 이스라엘의 태도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15절과 16절 상반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한 말을 생각해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대해 냉담하신 하나님의 반응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자기들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행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옳은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으며, 그렇게 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권한이고, 그것에 대해 자기들은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달리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냉담하셔도 대신 기대고 호소할 다른 누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래도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또 부르짖은 것입니다: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부르짖음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없애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는 데로 돌아선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과 행동을 들으시고 목격하신 하나님께서는 고민에 빠지셨습니다. 한두 번 속은 것도 아니고 한두 번 배신당한 것도 아니며 이제 또 용서하고 구원해줘 봐야 조금 세월이 지나면 또 배신당할 것을 뻔히 아시기에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은 돌아보지도 않으시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미워도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이방족속에게 고통 받고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시며 언제까지나 견디실 수 없는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불효막심한 자식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모진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기 자녀의 모습을 보며 무관심하거나 마음이 편할 수 없는 부모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곤고를 외면하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끝 부분의 말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심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죄짓고 스스로 곤고함에 처한 백성 때문에 마음에 근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수없이 죄짓고, 용서받고 구원을 얻은 후에도 오래 가지 않아 또 죄지으며, 하나님 배신하기를 거듭하는 백성임을 뻔히 아시면서도 그들의 불행을 견디지 못하시고 다시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다시는 상관하지 않으시고 정말 내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시고도 당신의 백성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는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도 또 용서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우리의 궁극적인 감사의 이유이며 우리의 영원한 감사의 제목이고 대상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살고 있고 내일도 살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교회가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단지 농업에 종사하시는 이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각자의 생업과 노동과 경제활동의 결과로 거두어들인 모든 수익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는 절기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의 눈을 뜨려고 힘쓸 기회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지내던 우리의 심령을 일깨워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고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심령으로 거듭나기를 다짐할 때입니다. 이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우리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지으셨음을 깨닫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지금까지 살아있고 오늘도 숨 쉬며 활동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때문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 자처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들지 못하고 여전히 죄지으며 살았지만 아직도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심판을 유예하시며 회개와 변화의 기회를 허락하고 계심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갱신의 의지와 결심을 잃지 않고 또 많은 선한 일을 힘쓸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하나님 보시기에 부족하고 부끄러운 일들이 많았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해오던 여러 가지 주님의 사업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금년에는 서울시가 새로 세운 서대문노인종합복지관의 운영을 위탁 받아 우리 교회에서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봉사의 훈련을 하며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섬김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또 언더우드교육관을 아무 사고 없이 완공하여 제 때에 봉헌함으로써 우리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남부러울 것 없이 좋은 환경을 갖게 되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 건물을 단지 주일 하루 교회학교를 위해 사용할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초등학교 어린이에서부터 청년, 대학생을 대상으로 전천후 전방위 선교를 위한 시설로 활용하고자 하는 뜻을 갖고 청소년문화선교부를 국내 최초로 신설하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경제는 여전히 불황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선진복지국가로의 진입의 꿈을 완전히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지지가 밑바닥을 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가 아직은 존재하고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우리가 잘났거나 잘 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 때문임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은혜로운 일들의 근원에는 우리의 모든 부족함과 어리석음과 반복된 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또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마음에 근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셨더라면 우리는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고 이 땅의 많은 교회가 문을 닫았을지 모르며 이 나라가 지금 이렇게 건재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연초부터 오늘까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우리의 가정 가정과 이 교회와 이 나라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하나 손꼽아보며 하루 종일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그래도 또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오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도 또 용서하시겠지 하는 생각으로 언제나 죄 가운데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며 하나님께 부르짖고는, 부르짖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 가운데서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겼다"고 했습니다. 그 행동과 실천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근심하시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고 우리에게 냉담하시게 만든 우리의 모든 죄를 내던져버리고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주의 백성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매몰차게 내치지 못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근심하시는 마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