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시는 웃음
나이드는 현상 중 하나가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글을 읽고 심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효도 관광에 참여한 인원는 80이상 된 어르신이 63명이고, 13명의 도우미가 동행했다.
어르신들과 함께 지내면서 깨닫는 바는 몸의 기력이 쇠하여지면 아무리 아름다운 곳으로 모셔가도 걸을 힘이 없으니 구경할 수 없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 드려도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어지간한 옷을 입혀드려도 폼이 나지 않는다.
근육도 굳어서 좀처럼 웃지 않는다. 아니 웃을 수가 없다.
지팡이를 의지하고 힘겹게 걷는 남자 집사님과 호흡을 맞춰가며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집사님은 혼잣말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나들이가 될 것 같아 따라나서 봤어요!”
갖고 있던 폴더 폰으로 사진 몇 장을 찍으셨다.
아주 특별한 기념사진이라도 찍는 느낌이 들었다.’
제가 찍힌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에 때론 화가 난 듯한 표정일 때가 많은 것입니다.
당시를 생각하면 전혀 그런 마음이 아니었으니 더욱 당황스러웠습니다.
대부분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제게 ‘얼굴 관리를 잘 하라’는 마음을 주십니다.
한마디로 ‘웃으라’는 것입니다.
너무 민망하고 부끄럽지만 웃는 연습을 합니다.
생각날 때 마다 웃는 표정을 짓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 크게 웃어 볼 일이 없는 시절을 삽니다.
그 답답함 때문에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억지로 웃으려니 너무 힘들었습니다.
웃으려면 마음이 바뀌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마음이 웃지 않는데 얼굴이 웃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웃을 일이 없는데도 웃을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위를 바라보면 웃을 일이 없어도 주님을 바라보면 웃게 됩니다.
되어지는 일을 보면 웃을 수 없어도 주님을 바라보며 웃게 됩니다.
하나님은 웃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롬 12:12 말씀처럼 우리로 하여금 소망 중에 즐거워하게 만드십니다.
이삭이 생각납니다.
아브라함을 웃게 하시고 사라를 웃게 하셨습니다.
사라의 나이가 90세를 이미 지났고, 아브라함은 100살이나 되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찾아와 아이를 가질 것이라 말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웃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었고 (창 17:17) 사라는 천막 문 뒤에서 웃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이없어 웃었으나 하나님은 크게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두 사람은 아이의 이름을 '이삭' 이라고 불렀습니다.
히브리어로 이삭은 '웃음' 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에게 다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웃는 웃음은 세상이 주는 웃음과 다릅니다.
다윗은 법궤 앞에서 춤추었다 (삼하 6:16-21)고 했는데 크게 웃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시 126:2)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이 박수하며 산악이 함께 즐거이 노래할찌어다" (시 98 :8).
주님을 바라보면 이런 웃음 소리가 가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지체부자유자, 과부, 소외된자, 무능한 사람들에게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눅 6: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삶에는 반드시 희락과 빛이 있고 복된 웃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뻐하십니까?
어떻게 하면 고통과 혼란함으로 가득한 삶에서 웃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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