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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몬 자손과 사사 입다
삿 11:1-11
1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2 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3 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4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5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6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하니
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니라
8 그러므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당신이 우리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매
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하니
10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그렇게 행하리이다 하니라
11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
삿 11:1-11 / 길르앗 사람 가운데에는 용감한 전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입다였다. 그는 기생의 몸에서 난 사람으로, 그의 아버지 이름은 길르앗이었다. 2) 길르앗은 또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들들이 장성하여 입다에게 `너는 다른 여인에게서 난 자식이야. 그러니 우리 집안에서 물려받을 유산은 하나도 없는 줄 알아라.' 하고 그를 내쫓았다. 3) 그래서 입다는 자기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으로 가 살았다. 그러자 건달꾼들이 그에게 몰려들어 입다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4) 그런데 이즈음에 암몬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치려고 쳐들어왔다. 5) 암몬 사람들이 쳐들어오자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를 만나려고 돕 땅으로 내려갔다. 6) `우리는 지금 암몬 사람들과 싸우러 나가려는 참이오. 그대가 와서 우리의 사령관이 되어 싸워주시오' 하고 장로들이 청하자 입다는 7) `당신들이 전에는 나를 미워하여 우리 집안에서 나를 억지로 내쫓다시피 하여 나가게 하더니 이제 무슨 염치로 나를 찾아오는 것이오? 그래, 어려운 일을 당하였다고 내게 찾아오면 내가 도와줄 줄 알았소?' 하고 쏘아 붙였다. 8) 길르앗 사람들은 `우리가 그대에게 이렇게 부탁드리는 까닭은 우리가 지금 암몬 사람들과 싸움이 붙었기 때문이 아니오?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사람들을 무찌릅시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우리가 그대를 길르앗 땅의 우두머리로 삼겠소' 하고 말하였다. 9) 그러자 입다가 `여호와께서 이 싸움을 이기게 해주신다면 정말 나를 그대들의 우두머리로 삼겠소? 그 말을 믿어도 되오?' 하고 되묻자 길르앗 장로들이 10) `하나님께서 우리의 증인이시오. 그분이 지금 우리가 주고받은 말을 모두 듣지 않으셨소? 믿어 보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11) 이 말을 듣고 입다는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백성이 입다를 그들의 우두머리, 곧 그들의 지도자로 떠받들자 그는 미스바로 가서 이 모든 일을 여호와께 모두 말씀드렸다. 이는 백성들이 자기에게 한 약속을 분명히 해두려는 생각에서였다.
하나님께서는 암몬 족속의 침입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잡류에 속한 입다를 선택하십니다(히 11:32).
가족으로부터 쫓겨난 입다(1-3) 길르앗 사람 입다는 기생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이복형제들의 구박에 돕 땅으로 피신하여 다른 잡류들과 함께 거합니다. 잡류들은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여 떠도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길르앗 사람은 길르앗에 사는 주민들이나(삿 10:18),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후손인 길르앗 가문을 의미합니다(민 26:29). 그런데 입다가 쫓겨난 표면적 이유는 기생의 아들이었지만, 실제는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지 않으려는 이복형제들의 속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며 백성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장로들이 묵인하였거나 동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7). 당시에도 재산상속 문제로 가족들과의 불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입다를 찾아 온 이스라엘의 장로들(4-7) 당시 공동체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쫓겨난 사람은 아무런 소속도, 권리도, 보호책도 없었으며 의식주 등과 관련하여 생명의 기본권조차도 보장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해놓고서도 암몬 자손이라는 외부세력이 침공해 온다는 소식에 이스라엘 장로들은 입다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처럼 입다를 천대하였던 그들이 입장을 바꾼 것은 입다가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잡류들의 우두머리가 될 정도로 지도력과 용감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3).
이스라엘 장로들과 입다의 언약(8-11) 입다는 큰 용사였지만 모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암몬 전쟁과의 모든 책임을 지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뢰했던 입다에게 하나님께서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암몬 자손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한 것을 발판으로 입다를 길르앗 사람들의 장관, 곧 통치자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한 자와 겸손한 자를 통해 높은 자와 교만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겔 21:26; 약 4:6; 벧전 5:5).
적용: 입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여건을 불평하지 않고, 있는 현장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당신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한 아이가 엄마와 함께 재래시장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한눈을 팔다 잡고 있던 엄마의 옷자락을 놓쳤습니다. 아이의 시야에서 엄마가 사라지자 두려워진 아이는 엄마를 부르기 위해 다급하게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아이는 '엄마'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이름 석 자를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이 엄마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는 금방 아이를 찾았지만 야단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녀석아, 엄마라고 불러야지,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많이 보는데 엄마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면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러자 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에게 대답했습니다. "엄마, 여기에 엄마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제가 엄마를 부르면 사람들이 다 돌아보지 않겠어요? 그래서 엄마 이름을 불렀어요."
< 설 교 >
어려울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삿 11장 1~11절 / 이충섭목사(의정부승리교회)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세요 어려우면 어렵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때 해결방법과 처방전이 나온다.
어려우면서도 안 어려운 척, 아프면서도 안 아픈 척하면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어설픈 자존심과 내성적인 생각은 자신만 더욱 어렵게 만들 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제가 이런 글을 썼어요.
<하나님의 일을 할때는 자존심을 버려야 하지요. 전도할때는 자존심을 버려야 하지요.
목회할때는 자존심을 버려야 하지요.>
나는 죽고 예수님은 살고... 나는 전도하고 하나님은 열매주시고.....
이 글에 댓글입니다.
목사님!! 내자아가 죽어야 주님일 할수있지요.. 근데...자아를 못박는 일이 쉬운게 아니네요..
맞아요 절대공감합니다 자존심 죽이니까 쓰시고 날높이시더라고요 요즘절실히느낌니다 모든게 나한테 문제가 있더라고요
자존심 버린게 자기를 버린 거고 자기 목숨을 버리고 예수님만 따르는 성자가 되신 겁니다. 멋져요!
1. 우리는 얼마든지 좋지 않은 환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어려울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입다를 보십시오. 아마 성경 인물 중 가장 불행한 가정환경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입다는 아주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기생이었습니다. 오늘날 말하면 창녀였다는 말입니다. 창녀의 아들입니다. 원치않는 아이입니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창녀의 자식이라는 괄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분노와 슬픔, 열등감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었을 것입니다. 그의 거부당한 마음을 어떻게 헤아리겠습니까? 자존감이 상실되었을 것입니다.
동생들은 그를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형을 쫓아 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시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대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입다를 쫓아내는데 함께 하였습니다.
그는 집에서 쫓겨나 누구와 어울립니까? 3절보십시오. 잡류들과 어울렸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조직 폭력배나 깡패들입니다. 무익한 쓸모없는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무리들입니다. 그가 쫓겨간 곳은 어디입니까? 돕 땅입니다. 이방 땅입니다. 이방 땅에서 폭력배들과 어울려 사니 그의 행동 양식은 이방문화에 흠뻑 젖었을 것입니다. 30절 보십시오. 그러니 자연스럽게 사람을 제사하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그만큼 이방 문화에 물이 들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불우한 환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우상 장사 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모세에게도 양어머니와 친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이삭에게도 두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어머니가 넷인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불우한 환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주어진 환경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습니까?
2. 우리는 환경을 극복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환경을 원망하지 말라
미국 행동과학자 스키너는 하고 싶은대로 먹고 입고 놀게 하는 인간군과 박봉으로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보통 인간군과의 6개월후 달라진 행동을 비교했습니다. 놀고 먹는 인간군 과반수가 이제 놀고 먹는 것도 귀찮게 여겨 평균 18시간씩 누워 살더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플러스 환경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마이너스 환경이 오히려 우리를 더 견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라가 위급할 때 입다를 사용하기 위하여 집에서 추방시켰고 결국 그에게 성령을 부어 전쟁에서 이기게 하였던 것입니다(29). 하나님께서는 야곱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요셉을 환난 가운데 처하게 하였습니다.(창 45: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로 하여금 40년간 긴 세월을 도피 생활을 하게 하였습니다.(출3:10)"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
지금 그 의미를 모른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어려운 환경일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는 자신의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였습니다. 당시의 문화였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동생들에게 쫓겨나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실제적으로는 큰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는 큰 용사였습니다. 힘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위기 속에 나타난 그의 태도를 통하여 그가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는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12절 이하를 보십시오. 입다는 암몬 왕과 담판을 짓습니다. 아르논에서 요단까지 자기 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입다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출애굽 시키면서 주신 땅인 것을 그에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에 대하여 정확이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깡패와는 달랐습니다. 구속사를 잘 알고 있을 때 성도는 흔들리지 안고 자신이 나갈 바를 환란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인내할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 가정에 태어났는지, 왜 이 승리 교회를 다니고 있는지, 왜 한국 땅에 태어났는지 분명한 의미를 알고 있으면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하나님께서 왜 이런 조건을 주었는지, 왜 나를 구원하였는지, 왜 나를 이런 위치, 이런 직장, 이런 환경을 주었는지를 알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린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환경을 인정한 입다가 나라에 위급한 상황이 닦칠 때 어떻게 합니까?
장로들이 입다에게 왔습니다(5). 입다에게 백성의 우두머리가 되어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머리는 카친이라는 말로 군대 장관, 전쟁의 우두머리가 되어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입다는 기분이 안좋았을 것입니다. 7절보십시오, 그들은 과거 자신을 쫓아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속을 알고 있는 입다는 구역질 이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인간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뱃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도 일반적인 통치자 "로쉬"(8)가 되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전쟁의 우두머리입니다. 위급하니까 너가 나가 싸워달라는 것입니다. 다행이 싸워 이기면 좋고 죽으면 너나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알고 있는 입다는 그들에게 물어 봅니다. 9절보십시오. 여기에 나오는 머리는 로쉬입니다. 일반적인 통치자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통치자로 삼겠느냐는 것입니다. 비록 불쾌하고 속보이는 짓들을 하고 있지만 나라를 위하여 위기 앞에서 입다는 원수 같은 사람들의 요구이지만 여호와 신앙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입다는 전쟁의 승리가 여호와께 있었던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9,11,21,23,24,30).
하나님께서 그 전쟁을 이기게 할 것을 확신합니다(9,24). 기도합니다(11).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이기게 하였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21,23)
인간적인 환경은 정면으로 부디치면서 이겨야 합니다.(애3:31-39; 롬8:35-37; 엡3:13)
인간적인 좋지 않은 환경은 우리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입다는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였지만 결국 이방 문화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입다는 이방 풍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잘못된 서원을 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면 먼저 만난 사람을 인육제사를 드린다고 서원하였습니다. 경솔한 서원을 하였습니다. 이방 풍습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입다는 결국 불행을 대물림하였습니다. 딸이 처녀의 몸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그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했겠습니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이방 문화 환경입니다. 이 환경을 극복하여 신앙의 좋은 물을 후손에게 남겨주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영생에 비하면 사람의 일생은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고장 난 자동차는 정비사를 만나야 하고 병든 환자는 의사를 만나야 하듯이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미 성도가 된 사람은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추구해야 합니다. 왜 매주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립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을 깊이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만남이 모든 행복과 축복의 원천입니다.
어느 날, 한 총각이 한 처녀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일 년 동안 매일 편지를 보냈습니다. 365일 동안 365통을 보내니까 우체부가 매일 그 편지를 처녀에게 갖다 주면서 그 처녀를 거의 매일 만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 처녀가 매일 만나는 우체부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습니다. 만남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그처럼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이루고 항상 자기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면 지금부터라도 인생 역전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기생 라합을 보십시오. 그녀는 돌에 맞아죽지 않으면 다행인 창녀였지만 하나님의 뜻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깨닫고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 여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결국 황무지에 피어난 한 송이 백합화처럼 창녀 출신으로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남김으로 멋진 역전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역전 인생을 원하면 라합처럼 현재 하나님의 섭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민하게 행동하십시오. 과거의 직업이나 행적이 결코 성공의 방해물이 되지 못합니다. 또한 과거의 실패가 현재를 결코 주장하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이루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루면서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역전 인생이 펼쳐질 것입니다.
어려울때가 있습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세요 어려우면 어렵다고 말하세요.
로마서12장 15절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했어요. 즐거울때는 즐거워하세요. 울때는 우세요. 힘들면 힘들다고 외치세요. 어렵다하면 어렵다고 하세요. 그게 사람이지요. 나는 죽고 예수님은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도록 믿음과 실력을 가추세요.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할때 믿음과 실력이 필요해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죽을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믿음을 요구하실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먹을것을 찾아야 할때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감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생각하지 못한 고난과 눈물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병든 몸을 치료받기 위해 예수님의 옷자락이래도 만져야 하겠다는 믿음이 생길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십시오.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머리로 하나님을 아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생활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그러기위해 24시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이 임하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어려울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환경을 탓하지 말고 믿음이 없음을 회개하십시오.
온전히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심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상처와 치유
삿 11장 1~11, 29절 / 박인걸목사
상처라는 말은 의학 용어입니다. 몸을 다쳐서 부상을 입은 자리, 혹은 피해를 입은 흔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몸에 상처 한 두 개 이상은 모두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적 상처는 쉽게 아무는데 마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최명기씨가 쓴『트라우마 테라피』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먼저 트라우마의 종류를 이야기합니다. 굴욕, 무시, 배신, 억울함, 공포, 간섭과 통제, 따돌림, 냉담, 버림받음, 거부당함, 좌절과 멸시받음 등이 마음에 상처를 만들고 이런 상처들은 평생 동안 자신을 괴롭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투라우마는 정신적 외상, 충격적인 경험들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는 책에서 우리들 삶의 주변에서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며, 이런 사람들이 전문가를 통한 치유가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을 통한 해결방법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사람과 관련된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개입니다. 이렇게 형서성 된 상처가 빨리 치유되지 않으면 자신을 해치거나 타인 혹은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킵니다. 얼마 전 인천에서 28세 청년이 32세 형과 자신의 어머니를 죽여서 형은 도막을 내서 강원도 정선에 유기하였고, 어머니 시체는 울진의 한 야산에 유기하였다가 열흘이 넘은 후에 경찰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트리우마로 인하여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트라우마가 있는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건을 발견합니다. 그 사람은 입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열 것이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제 9대 사사입니다. 그에게는 트라우마, 즉 상처가 있었습니다. 길르앗이란 사람이 기생을 가까이 하여 태어난 서자(삿11:1)입니다. 자신의 엄마 품에서 자라지 못하고 아버지 본가에서 이복형제들에게 설움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성장한 후에는 이복형제들이 그를 쫓아냈습니다.(삿11:2-3) 아주 서럽고 외롭게 자랐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을 떠나 놉 땅에서 독립하여 살면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류의 사람들이 그를 따랐고, 그는 그 지역에서 두목이 되었습니다. 그이 영향력은 지역을 넘어 국가와 민족에게까지 확대되었으며, 그의 명성도 자자했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의 목전에서 이스라엘이 크게 악을 행하였습니다. 바알, 아스다롯 뿐만 아니라 암몬, 모압, 아람, 블레셋의 신들까지 섬기면서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무슨 이방신 박람회를 열듯이 이방 신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암몬자손들이 쳐들어오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암몬과 싸울 장수도 없었고, 군사도 없었습니다.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길르앗의 장로들이 입다를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호소합니다. 입다는 과거에 그들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 크지만 그 상처를 잊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결국 암몬을 이깁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상처와 치유』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겠습니다.
(1) 상처 입은 자(1-7)
① 입다는 천한 신분이었습니다.“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난 자”(1) ② 부모의 상속권을 상실하였습니다.“기업을 잇지 못하리니”(2) ③ 형제들이 그를 미워했습니다. 마치 요셉과 같은 처지였습니다.(7) ④ 그 지역 사람들이 그를 쫓아냈습니다.(7) 그는 놉 땅에서 비류들과 함께 살았습니다.(3) 이정도 되면 그는 마음에 쌓인 것이 너무 많아 한을 품고 살았을 수 있습니다. 형제들과 마을 사람들에 대한 원한의 복수를 생각하며 살았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큰 상처 즉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갔을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크고 작은 상처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현대 사회가 그 어느 때 보다도 심각한 범죄가 일어나는 이유는 복잡한 사회 구조 안에서 다양한 원인의 상처들로 인하여 트라우마가 생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상처가 밖으로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소개합니다.
첫째, 화입니다. 분노입니다. 짜증, 신경질, 고함, 매질과 같은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하여 화를 많이 내는 편이라고 합니다. 차를 운전하며 가다가 길에서 운전자 끼리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시장 골목에서는 이웃 상인이나 고객과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전화를 하면서 소리소리 지르는 사람들도 많이 봅니다. 대게는 화를 내는 사람의 마음에 어떤 트라우마가 있어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화를 내거나 분노하는 사람들은 억울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생기거나 자신이 겪었던 동질의 현상을 당하거나 볼 때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나며 화를 냅니다. 문제는 화를 내서 속이 시원하거나 상처가 치유된다면 괜찮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분노하거나 화를 더 자주 내게 되며 하나의 습성이 형성되어 아주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짜증과 신경질을 내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입거나 기분을 상하게 합니다. 특히 자녀들에게 치명적이라고 합니다. 화를 잘 내는 부모 아래서 성장한 자녀는 공격적인 아이가 된답니다. 부모와 거리를 두려고 한답니다. 모든 영역에 적응력이 낮답니다. 정신적으로 미성숙해진답니다. 정체성 발달에 많은 피해를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화를 내는 사람은 관상동맥경화에 걸릴 위험과 심장질환에 걸릴 확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하여 5배나 높다고 합니다. (화내지 맙시다.)
둘째, 미움(증오)입니다. 타인에 대하여 미워하는 마음도 하나의 트라우마입니다. 미워하는 대상과 종류도 다양합니다. ① 원수(적)입니다. 우리는 북한을 원수, 적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많은 피해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워합니다. ② 가해자입니다. 재산, 생명, 진로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경우입니다. ③ 이해관계들입니다. 생활 속에 크고 작은 이해관계로 인하여 상대방을 미워하는 경우입니다. ④ 무의식이 억압한 자아의 못난 부분입니다. 이는 심리학적 해석입니다. 일종의 열등감, 시기심, 질투의 감정, 자신의 요구에 대한 거절, 경쟁자, 등에 대한 미움의 감정입니다. 성경은 타인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규정합니다.(마5:21-22) 아무튼 누구를 미워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있기 때문이며 그 상처를 치유 받아야 건강한 영적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우울입니다. 현대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살인 병이라고 일컬어지는 병입니다. 대게는 선천적 요인이 있고, 여성이 남성보다 2배 이상 많다고 합니다. 뇌신경 전달물질 불균형으로 일어나며, 계절성 우울증, 주우우울증(흥미를 잃어가는 병) 기분변조 우울증(장기적인 우울증)입니다. 그리고 조울증이 있습니다. 조증과 울증의 합성어인데 기분이 수시를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충동행동, 과잉행동, 말이 빨라짐)등입니다. 우울증의 요인으로는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신체적, 종교적 요인이 있습니다.
이렇게 분노하는 마음과 타인을 미워하는 마음, 그리고 우울증의 원인은 그 원인이 마음의 상처에서 출발합니다. 이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는 건강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러 오신 분입니다. 이사야53장 5절에“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했습니다. 주님만이 우리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실 수 있습니다.
(2) 불완전한 치유 자(3)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출입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돕 땅은 이방 이며, 잡류들은 무가치한 사람들, 오늘날의 의미로 재해석하면 부랑배집단을 말합니다. 입다는 이곳에 와서 부랑배집단을 형성하여 세력화 하였고, 주변의 많은 부족들과 싸워 이겼으며, 그에 대한 소문이 이스라엘 온 땅에 퍼졌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일제 때 김두환, 조선시대 때 홍길동이나 임꺽정, 일본의 야쿠자 같은 조직폭력배와 같은 개념의 단체를 만들어 그 세력을 누구도 꺾을 수 없게 되었고, 그 우두머리에 입다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입다는 형제들과 그 지역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마음의 상처를 안고 열심히 산 것 같습니다. 이를 악물고 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고향 지역 사람들이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할 정도의 인물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자수성가를 찬양하거나 칭송합니다. 자수성가란 물려받은 재산이 없이 자기 혼자의 힘으로 집안을 일으키고 재산을 모은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한문으로 살펴보면 (스스로 自)(손 手)(이를 成)(집 家)입니다. 자신의 손으로 집을 크게 일으켜 세웠다는 뜻입니다. 부모의 도움이나 형제의 도움 없이 안 해 본 일 없이 살면서 성공한 케이스를 두고 자수성가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훌륭한 일입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칭송받을 일입니다.
미국에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살펴본 보고서를 보았습니다. 21세에서 70세 까지 다양했습니다. 초등학교 출신에서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까지 다양했고 성격도 다양했습니다. 하나의 공통점은 70%가 시골 출신이며 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를 악물고 노력하게 된 동기는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훌륭한 발견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저축하는 습관, 노력하는 습관, 일하는 습관, 책 읽는 습관, 기도하는 습관, 신앙 생활하는 습관, 정직한 습관과 같은 것들을 본받고 자신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 결과 자수성가하여 100만 장자가 되거나 사회적 유명인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결심을 강하게 하면 성공적인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필승의 각오를 가지면 반드시 이기게 됩니다. 하지만 사회적 성공이나 물질적 성공이 그의 인격과 정비례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적 출세와 성공이 그를 더 교만하게 하거나 과거의 고통을 잊고 비인격적인 사람이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출세는 했는데 인격은 꽝이야”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입다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발견합니다. 암몬자손이 쳐들어와 전쟁상태에 처한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입다에게 찾아와 도움을 구할 때 입다가 어떻게 대답하고 있습니까? 11장7절을 보세요.“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과거의 아픔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들에게 내 쫓기고,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때의 서러운 감정을 치유 받지 못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은 과거에 당한 사람들에게‘내보란 듯이 살겠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과거의 설움을 잊지 말자.’ ‘나를 내쫓은 자들 앞에서 출세한 내 모습을 보여주리라.’ ‘나를 박대하던 자들을 내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말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반드시 잘 돼서 고향에 돌아가리라.’ ‘원수를 갚는 일은 출세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적 태도는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출세한 것은 출세가 아닙니다. 일종의 傲氣(오기)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는 마음에 상처가 큰 사람입니다.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하여 출세와 성공을 지향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형들에 대하여 복수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렸습니다. 오히려 형들이 동생에게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면서 전전긍긍했습니다.
사회적인 성공을 했을지라도 그 마음속에는 아직 과거에 대한 아픔과 억울함에 대한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진정한 치유가 아닙니다. 상처를 덮고 사는 것과 상처를 치유 받고 사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는 언젠가 다시 덧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완전한 치유, 완전한 회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완전한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요삼1:2)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3) 완전한 치유 자(29)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29-32) 사사기 11장 4절에서 28절까지의 내용을 살펴 보면 입다와 장로들의 협상에서 입다가 전쟁에 승리할 경우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8-11) 가 되게 하겠다는 조인식을 거행합니다. 이후 입다는 암몬에게 사자들을 파송하여 전쟁 없이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나 그들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은 전쟁을 결심하고 하나님께 서원하며 기도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그에게 영을 부어 주셨습니다. 성령이 강하게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결국 전쟁에 승리합니다. 이스라엘의 사사가 됩니다. 입자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아주 건강한 치유 자가 됩니다.
제임스 깁슨이라는 심리학자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서는 ① 자신을 사랑하라. ② 압박에서 벗어나라. ③ 자신의 재주를 활용하라. ④ 아집을 버리라. ⑤ 분노를 버리라. ⑥ 일어나지 않을 일을 염려하지 말라. ⑦ 너그러워라. ⑧ 낙관적으로 생각하라. ⑨ 용서하라. ⑩ 자신의 결심을 지켜라 등등의 주장을 합니다. 이런 주장들은 일반적이며 아주 평이한 방법론으로서 심리학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는데 다소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완전한 치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치유는 어떻게 일어납니까?
첫째, 주님의 영이 임해야 합니다.(29) 신약적으로 해 재해석하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영적인 사람을 칭하며 영적이라는 의미하는 영성이 강하게 형성 된 사람을 뜻합니다. 주님의 영은 치유의 영입니다. 회복의 영입니다. 승리하게 하는 영입니다. 우리를 돕는 영입니다. 우리를 완전하게 하는 영입니다. 용서의 영입니다. 사랑의 영입니다. 기쁨의 영입니다. 사탄의 세력을 이기는 영입니다. 성령은 믿는 자에게 임합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자에게 임합니다. 사명이 있는 자에게 임합니다.
둘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자는 치유가 일어납니다. 입다는 전쟁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절감했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합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사이에 판결 하옵소서.”(27) 하나님은 입다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암몬사람들이 입다가 보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기도에 응답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암몬과 싸워 이기게 했습니다. 이는 입다의 승리입니다. 그의 승리는 자신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영이 임한 승리이며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응답입니다.
셋째, 믿음입니다. 그는 하나님만을 신뢰하였습니다. 참 치유 자는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의지하였기 때문에 서원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는 비결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에 있습니다. 참 믿음은 육의 상처와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영혼의 죄악 까지도 치유 받게 됩니다. 입다가 치유 받은 증거는 자신의 동족과 자신을 내쫓은 사람들까지 보듬고 사랑하며, 용서하는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기독교의 치유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는”(마6:12)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주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스데반도 같은 기도를 하였습니다.(행7:60)
결론입니다. 현대병원들은 육신의 질병을 치유받기 위하여 만원입니다. 대학병원들 마다 인산인해입니다. 각종 의료 혜택과 함께 치료기술이 발달한 것이 사실입니다. 못지않게 마음의 상처로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심리학적 치유. 음악치유. 스포츠 치유, 상담치유. 신경정신과적 치유. 등등 많은 치유 방법들이 있지만 가장 완전한 치유는 우리 주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주의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모두 치유자로 받는 모든 상처를 치유받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인생
삿 11:1-11 / 송기성목사
“공허한 인생이 열매로 충만해지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이 역사한 결과다”라고 유진 피터슨은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악으로 타락한 인간은 공허한 인생으로 전략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공허한 인생은 열매로 충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이 공허한 인생으로 하여금 열매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을 새롭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성도의 특권인 줄 믿습니다.
사사기 11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구원자로 등장하는 사사 입다의 생애를 보게 됩니다. 입다의 출생배경과 가정환경과 성장과정 등을 보면 그야말로 공허한 인생을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도 그는 그 민족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원한 전쟁 영웅이 되었으며, 그 민족을 6년간이나 다스리는 사사가 되었습니다(삿12:7). 그 비결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입혀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입다’는 ‘하나님이 열어 주신다’(God opens, Yahweh has opened)라는 뜻입니다.입다는 평생 그의 이름의 뜻을 되새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열어 주신다는 확신과 소망도 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일생을 통하여 그의 인생을 활짝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함으로써 공허한 인생에서 열매로 충만한 인물이 된 줄 믿습니다. 열어 주시는 하나님께서 사사 입다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보며 우리도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1.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인생은 환경에 굴하지 않고 실력을 쌓습니다.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valiant warrior, brave soldier)라고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길르앗은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신세는 비천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방 여인이었으며 기생이었습니다. 이방 여인, 그나마 첩도 아닌 창녀에게서 태어난 입다는 그의 집안에서 상속권 등 아무런 권리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는 배 다른 형제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을 뿐이었습니다. 이복 형제들은 그를 미워하다 못해 결국 그를 집에서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의 생존권을 박탈했다는 것입니다.
창녀의 아들로 태어나 온갖 시련을 겪어야만 했던 입다에게는 좌절감과 열등감 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불우한 운명과 가혹한 현실에 대한 증오와 분노 등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비참한 환경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그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남달리 실력을 쌓았습니다. 입다에게 있어서 그 비참한 환경은 실력을 쌓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큰 용사가 되어 그 민족을 살리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그가 실력을 쌓지 않았더라면 그는 창녀의 아들로 태어난 자신을 비관하며 조상을 원망하고, 세상을 저주하며 등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그는 오히려 환경에 굴하지 않고 실력을 쌓으므로써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 줄 믿습니다.
소설가 유순하(1943~ )씨가 최근에 낸 책 「당신들의 일본」에서 일본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해 ‘선린은 없다. 힘의 위계가 있을 뿐!’이라면서 실용주의적 차원에서 능력을 키우는 길밖에 없음을 강조하며 이렇게 제안하였습니다. “길거리에서 일본을 비판할 게 아니라 은연자중하며 칼을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지금은 정치, 경제, 국방 등 모든 측면에서 우리가 일본을 위협할 능력이 부족하다. 현재로선 어느 것도 일본에 앞선다고 할 수 없다. 일본을 무시하고 싫어할 게 아니라 그들이 잘하는 걸 보고 우리가 그걸 넘을 수 있는 방법을 찾자. 우리가 힘이 있으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하지 않아도(일본은) 사과할 것이다.”
유순하씨는 역사적으로 한국이 주자학을, 일본이 양명학을 선택하면서 국가 경쟁력에서 격차가 벌어졌다고 분석했습니다. 조선은 명분을 중시하는 선비문화가 뿌리를 내린 반면, 일본은 실리를 중시하며 행동하는 사무라이 문화가 정착됐다고 했습니다. 그는 저서에서 “주자학의 요체는 지선행후(知先行後)이고, 양명학의 요체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다. 먼저 앎을 익히고 실천한다는 주자학이 존재를 위한 학문이라면, 실천이 없는 앎은 앎이 아니라는 양명학은 행동을 위한 학문이다.”
사무엘상 17:45에 다윗이 블레셋 거인 골리앗에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라고 했습니다. 그가 선포한 ‘만군의 여호와’(The Lord Almighty)란 ‘전능하신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힘 입어 행동하고 그의 물매로 돌 던지는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리고 통쾌하게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인생은 환경에 굴하지 않고 실력을 쌓습니다. 환경에 굴하지 않고 실력을 쌓음으로써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인생은 잡류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지킵니다.
이복 형제들에게 미움과 버림을 당한 입다는 그들을 피하여 돕 땅으로 도망가서 살았습니다. 돕 땅은 이방 땅이었으며 우상숭배가 성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잡류가 있었습니다. 잡류란 윤리적으로 ‘무가치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건달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입다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습니다. 입다의 처지가 그들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자성어에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옛 시인은 ‘까마귀 노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말라’고도 했습니다. 탈무드에 ‘향수 가게를 가까이 가면 향수 냄새가 묻어나고, 가죽 가게에 가까이 가면 가죽 냄새가 묻어난다’고 했습니다. 다 주의 깊게 들어야 할 말입니다. 창녀의 아들로서 도망자 신세가 된 입다가 이방 땅에서 잡류들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영향을 받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이방 땅에 살았지만 이방 신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잡류 곧 가치 없는 삶을 사는 건달패들의 두목이 되었지만 그들에게 물들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그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 주며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는 무가치한 잡류로 전락하지 않고 예수님의 군대 장관과 최고 통치권자인 사사가 되기까지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 줄 믿습니다.
미국의 프로미식축구 선수 제이슨 아반트(1983~ )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일리노이즈주 시카고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친척 대부분이 마약 갱단과 연관된 일을 했습니다. 그도 중학교 시절부터 마약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손자를 교회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주여, 이 어린양을 다른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그에게 당신의 뜻을 보여 주시옵소서”라며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할머니는 제이슨이 다른 취미를 가질 수 있도록 그를 미식 축구팀이 있는 학교로 전학시켰습니다. 그는 선수로 뛴 지 1년 만에 지역 최고의 선수로 거듭났고, 실력을 인정받아 2003년 미식축구 명문인 미시간대학에 진학했습니다.입학한 첫 해, 벤치를 지키는 날이 많아지면서 마음을 졸이며 지내던 그는 5월 4일 주일예배 중에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때 “마약을 팔다 총격을 받은 적이 많았지만 누구 하나 상한 적이 없고 보잘 것 없는 제가 미식축구 선수가 된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약속했다”라며 미국 기독방송 CBN 인터뷰에서 간증했습니다.
야고보서 1:27에 사도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정결하고 참된 경건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돌보아 주며,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인생을 열어 주십니다.잡류에 물들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기를 지킴으로써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인생은 자만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열여덟 해 동안이나 억압한(삿10:8)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길르앗에 진을 쳤습니다. 이스라엘도 길르앗 미스바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울 자가 없었습니다(삿10:17,18). 그 때 생각해낸 사람이 입다였습니다. 사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입다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존재 가치도 없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입다에게 우리가 암몬과 싸우려 하니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어 달라고 했습니다. 입다는 그들에게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라며 그들을 책망하였습니다. 길르앗 장로들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이방 여인의 아들, 창녀의 아들에게 길르앗 장로들이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어 달라’(Come, be our commander)라며 부탁하였을 때 입다는 자만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만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여호와께서 그들 곧 암몬 자손을 내게 넘겨주시면’(If the Lord gives me victory)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께 있다는 그의 신앙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이스라엘의 머리와 장관으로 삼았을 때 무엇보다 먼저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in the presencs of the Lord) 자기의 말을 다 아뢰었던 것입니다(삿11:11). 그는 전쟁에 앞서 하나님께 먼저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 후 하나님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셨으며(삿11:29), 하나님께서 암몬 자손을 입다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삿11:32). 이방 창녀의 아들로서 건달패들의 두목이었던 입다가 이스라엘 민족의 사사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입다, 그는 실로 자만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의존하였기에 인생의 패자가 되지 않고 승자가 되기까지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 줄 믿습니다.
2013년 3월까지 환경부 장관을 지낸 유영숙(1955~ )권사님의 신앙 간증입니다. 이화여대에서 학사, 석사 공부를 마친 후 미국 오리건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생화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녀는 1990년부터 한국과 각 기술연구원에서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하던 중 여성과 학계에서 추천해 2011년 5월에 장관에 내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언론에서는 그녀를 ‘낙마 1순위’로 꼽았습니다. 언론은 교회 다니면서 낸 헌금을 매관매직으로 몰아갔으며, 미국 유학 중에 낳은 아이의 이중 국정도 문제시 하였습니다. 진퇴양난에 처했을 때 그녀는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며 많이 매달렸던 것 같다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장관에 내정된 뒤 청문회를 거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귀히 쓰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간증 말미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16-18절 말씀을 되새기며 늘 하나님과 국민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6에 사도 베드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라고 했습니다.그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under God's mighty hand)라고 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코 자만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만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때가 되면 높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자만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인생을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만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67년 17세 때 다이빙 사고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된 조니 에릭슨에게 어느 목사님이 하나님은 문이 닫힐 때 또 다른 문을 열어 주신다는 말로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조니는 그 말씀이 맞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또 다른 문을 하나만 열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나 더 열어 주신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입다의 하나님은 열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인생은 결코 환경에 굴하지 않고 실력을 쌓으며, 결코 잡류에 물들지 않고 자기를 지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인생은 결코 자만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모든 닫혔던 문들이 활짝 열리어 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큰 용사 입다
삿 11:1-40.
1. 입다는 입지적(立志的)인 인물이다. 그는 첩의 아들로 태어나서 본처의 아들들에게 쫓겨나서 낮선 땅에서 살았지만 그곳에서도 스스로를 세움으로 후에 자신을 쫓아낸 사람들의 간청으로 쫓겨났던 땅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곳의 사람들을 암몬의 손으로부터 구해 주었고 이로 인하여 그들의 머리가 되었다. 입다의 이와 같은 삶은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낙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스스로를 세울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그리고 스스로를 세울 때 얻게 되는 열매들이 무엇인지 교훈해 주고 있다.
2. 1-3절의 말씀이다.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이 말씀은 입다를 “큰 용사”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가 큰 용사로 불리게 되기까지 전기(傳記)적인 내용을 말해 주고 있다. 입다는 첩의 아들로 태어나서 본처의 아들들로부터 쫓겨나서 돕 땅에 거주하였는데 잡류들이 그에게 모여서 그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해 주고 있는 입다의 전기적인 이야기다. 우리는 이 이야기 중에서 쫓겨난 입다로 하여금 큰 용사가 되게 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3절의 말씀을 주목해야 한다.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들이 그에게 모여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이 말씀은 입다로 하여금 큰 용사가 되게 한 것은 잡류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입다는 잡류들과 함께 함으로 큰 힘을 갖게 되었고. 그가 가진 힘은 암몬의 침략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입다의 도움을 구하게 했다. 이것은 잡류들이 그와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큰 용사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입다로 하여금 큰 용사가 되게 한 것은 잡류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 잡류들이란 이스라엘의 주류에 속하지 않은 자들을 말한다. 신명기에서는 잡류를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는 이방인들로서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이방신을 숭배하도록 하는 자들을 말하고 있고(신13:13), 에스겔서는 이방인들로서 도덕적으로 부패한 자들을 말하였다(겔23:42). 본문도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주류에 속하지 못한 자들을 잡류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생각할 때 잡류들이란 주류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상처받은 자들이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품어줄 사람이 필요했고, 자신들만의 공동체가 필요했다. 입다는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만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잡류들이 그의 주변에 모였고, 그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있었을 때 상처받은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던 다윗에게 모였던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삼상22;2).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입다는 주류사회로부터 소외된 잡류들의 아픔을 품어 줄 수 있는 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만의 공동체로 세워줌으로 그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입다는 그들 가운데 자연스럽게 지도자로 인정될 수밖에 없었다. 입다가 이와 같은 위치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현재 자신이 직면한 환경에 대하여 비관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품어주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 스스로를 세우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환경을 초월하여 스스로를 세울 수 있는 길은 섬김의 살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실제로 입다는 잡류들을 품어 줌으로서 그들과 함께 하나의 세력이 되어 이스라엘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도움을 청할 만한 자가 되었다. 즉 그와 함께한 잡류들은 전쟁 시에 그의 군대 역할을 한 것이다.
입다를 큰 용사로 불리게 해 준 것들 가운데 다른 하나를 말한다면 그것은 기회라고 말할 수 있다. 입다는 낙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있었지만 자신을 방치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를 세움으로 기회를 얻었다. 그가 얻은 기회란 작게는 첩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소외시킨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회복되는 일이었고 크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자원으로 이스라엘을 위기로부터 구원해 주는 일이었다.
4-11절의 내용이다. 암몬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에게 가서 도움을 청했다.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11:6)” 입다는 이렇게 말하는 장로들의 약속을 재확인한 후 그들과 함께 가서 암몬과 싸워서 이겼고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었다. 여기 입다가 그들의 머리가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다는 의미이고 또한 자신을 쫓아낸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회복되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입다는 암몬의 손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해 줌으로 그들 가운데 머리가 되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을 쫓아내었던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입다는 자신이 얻은 기회를 사서 자신을 세우고 또한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했다. 만일 입다가 형제들로부터 쫓겨났을 때 낙심하고 스스로를 세우는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기회도 오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기회가 왔을지라도 그것을 사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삶의 여정에서 어떤 환경을 만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낙심하지 않을 것이고 원망과 불평함으로 스스로를 세우도록 허락해 주신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허락된 환경을 스스로를 세울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로 삼을 것이다.
입다를 큰 용사로 불리게 해 준 것은 언행이 일치된 삶이었다. 다음은 29-31절 말씀이다.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이 말씀에서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입다의 믿음을 보시고(11:12-28)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모압의 손으로부터 구하시기로 정하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사용하실 때 언제나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해 주심으로 그로 하여금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보장해 주신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사람도 여호와의 신이 함께 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그가 부르심에 순종하는 일을 방해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와 싸우는 것은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고, 그와 다투는 것은 하나님과 다투는 것이기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라는 말씀은 모압과의 싸움에서 입다의 승리를 보장해 주는 말씀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입다는 하지 말아야 할 서원을 했다.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11:31)” 입다는 불신앙과 신중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이와 같은 서원을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또는 승리에 대한 갈망으로 자의적 숭배에 빠져버린 것이다. 여호와의 신이 이미 그와 함께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입다는 승리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인신(人身)을 제물로 드릴 것을 서약함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가 만일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오히려 승리를 확신하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감사할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신(人身)을 제물로 받으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인신을 제물로 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이방신들에게 하는 가증된 행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다가 이와 같은 것을 서원을 한 것은 그가 이방인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란 사람을 말한다. 즉 입다의 승리의 소식을 듣고 그를 영접하기 위해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은 가족이든지 그의 종이든지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의 승리는 또 다른 사람에게는 죽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위하여 누군가를 희생시키고자 했다. 물론 그가 서원한 것은 희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의사와 관계없이 행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무지할 때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입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지와 경솔함으로 인하여 무남독녀인 사랑하는 딸을 희생시켰다. 이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축제가 되어야 할 시간이 오히려 고통과 슬픔을 안겨다 주는 시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한가지 일은 입다는 언행이 일치한 삶을 사는 자였다는 것이다. 입다는 서원이 비록 무지로 인하여 저지른 어리석음이었을지라도 그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자였다는 의미다. 35절은 그가 집에 이르렀을 때 무남독녀인 자신의 딸이 제일 먼저 나와서 자신을 맞아 주었을 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말해 준다.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서원한 것을 지켰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일지라도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을 달리한다. 그러나 입다는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희생시키는 일이었을지라도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이것은 그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는 언행이 일치한 삶을 사는 자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낙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희망으로 가는 길, 넘어진 바로 그곳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길, 실패의 삶에서 성공으로 가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들었다. 그것은 섬김이고, 기회를 사는 일이고, 언행이 일치하는 삶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변하는 환경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으로 언제나 스스로를 세우는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아멘
이해할 수 없다
삿 11장 1~10절 / 채규현목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다양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고, 어디나 계시는 분이시라고 설명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성경 각 부분에서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에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계속 나오지만 각각 다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대상인 그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그 대상에 따라서 각기 다른 면의 하나님이 보입니다. 성경에 많은 사사들이 나오지만 다 다른 면이 보입니다. 오늘 나오는 입다도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어떠한 독특한 면이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고, 그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인지 우리가 함께 보기를 원합니다.
입다는 우선 그 출신부터가 독특합니다. 입다에 대해 많은 부분이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그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길르앗의 창기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에게는 본 부인이 있어서 그 본 부인 아래 많은 아들들이 있고, 장성하게 되면서 입다가 쫓겨나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버림받고 다른 사람에게 쫓겨나게 되는 것이 입다 개인의 잘못은 아니거든요? 개인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을 가지고 차별받고 내쫓김을 당하고 서러움을 당하는 입장의 입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입다를 들어서 그들의 구원자로 세우십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이 준비된 사람, 또 리더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자 들이 많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법칙은 장남으로 이어가지만 그런데 차남, 막내 또 어린 사람을 부르시고, 지파 중에서도 연약한 지파 중에서 부르시고, 세상적으로는 내놓을 것이 없는 사람, 불행한 사람, 불쌍한 사람, 오히려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을 봅니다. 사실 우리의 삶 속에 그러한 모든 불공정과 불공평은 죄 때문에 옵니다. 하나님은 공정하심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심을 좋아하십니다. 누구나 똑같은 기회가 있기를 원합니다. 일한 대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의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는 불공평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공정함은 뭐고, 불공평함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실 우리가 불공평하다고 느낄 때는, 어떤 특정한 목적에 따라서 아니면 정해진 능력에 따라서 판단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부분을 가지고 사람을 구분하고 차별하고, 이런 것이 불공평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면이 공평하고 공정하게 처리되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뿐만 아니고, 참으로 생명의 길에는 공평함과 공정함이 그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조직이든, 어떤 그룹이든 그 조직이 살아나고 그 조직이 흥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조직 안에 공평함과 공정함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조직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그 목표에 맞는 사람이 책임자가 되고 리더가 되고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에 우리 믿는 사람들안에, 또 교회에서 유행이 되다시피 한 말이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전에 “목적이 이끄는 교회”라는 책도 나왔었습니다. 교회가 그 목적에 맞게 이루어지느냐 판단하고 그 목적에 맞추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에 따라서 우리의 삶을 다시한번 재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뽑고 사람을 세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특정한 직책에 어떤 사람을 세우려고 할 때에 그 직책의 목표가 무엇인가? 한 교회의 담임목사를 세울 때에도 그 담임목사를 세우는 목적이 무엇이냐를 생각해 볼 때, 담임목사는 성도들을 잘 돌보고 성도들을 합하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강성한 군대가 되기 위한 것, 이런 목표가 있습니다. 그런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그것을 봐야하는데 그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면이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학벌을 가지고 판단하고 또 인물을 보고 판단하는데 인물이야 부모님이 그렇게 낳으신 것 아닙니까? 또 출신지를 가지고 판단하고, 이런 모든 것은 공평한 것이 아닙니다. 불공평하게 만들기 위한 가진 자들의 기준일 뿐입니다. 목사뿐만이 아닙니다. 교회의 모든 리더들이 세워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리가 교회에 장로님을 세우는가, 교회에 집사님을 세우는가, 권사님을 세우는가, 그 목표를 분명히 합시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감투로 생각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감투로 생각하니까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도, 온갖 잘못된 방법으로도 끝까지 그 직책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직책은 하나님 앞에 섬기는 자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도 시간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사람은 세워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일을 하기 위한 직책이니까요. 시간을 내서 함께 교회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감투로 생각해서 ‘내가 드디어 우리 교회의 어른이 되는구나.’ 이 마음을 가지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사람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원래 이 직책의 목표가 그게 아니니까요. 섬기는 자의 자리, ‘아, 그 분이면 우리가 앞으로 따를 수 있겠구나.’ 본이 되는 사람, 이런 모든 면에서 그 직책에 부합한 사람이 뽑혀야 됩니다. ‘그 분은 나의 아는 사람, 그 분은 나의 친척, 그 분은 나와 함께 친목계하는 분, 그 분이 나 한번 밥 사줬지….’ 이런 것이 세우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원래 그 직책에 부합한 목적을 가지고 그 면에 부합한 사람을 뽑아야 공평하고 공정하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불공평하다고 느끼고 불공정하다고 느낍니다. 적어도 믿는 백성들끼리는 공평하고 공정하게 모든 일이 되어야 하겠고, 그리고 분명히 우리가 어떤 직책을 세울 때에도 그 직책에 가장 합당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하고 그 면에서 공평하고 공정하게 일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하튼 이 세상은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사회입니다. 입다도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그 면 때문에 집안에서 형제자매들에게 버림을 받고 고향을 떠나 살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를 버렸던 바로 그 사람들이 다시 입다에게 찾아와서 “제발 우리의 머리가 되어 주고 우리를 구원해달라.” 고 합니다. 그러니까 입다가 “나를 버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게 왔느냐?” 합니다. 좀 귀에 익숙한 말 아닙니까? 바로 지난주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대화가 바로 그거였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와서 “우리가 곤고해 죽겠으니까 제발 우리 좀 구해주십시오.” 하나님이 하시는 말이 “전에도 구원해 주었더니 바로 그 다음에 나를 버리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제 와서 뭘 또 구해달라고.” 입다도 똑같이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이들이 다시한번 간구합니다. “그래도 제발 우리를 구원해달라.” 그때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입다가 당했던 것이 하나님이 당했던 것입니다. 입다가 당했던 그 심정이 하나님이 당했던 심정입니다. 하나님이나 입다나 자기가 잘못한 것 없이 버림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입다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이 스스로 다시 돌이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그러한 역사가 바로 예수님의 하시는 일 중에 드디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불공평을 당하는 것, 불공정을 당하는 것을 가지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어찌할 수 없는 그것을 가지고 당하는 일, 하나님이 모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세우시는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어찌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설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내 자신을 맡기기만 하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나의 출신이나 나의 배경이나 이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나의 생김새도 문제가 되지 않고, 오직 내 마음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아느냐 모르느냐 그 차이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분들에게는 여러분이 어떠한 삶에 있던지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드디어 입다를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 이제 11장 12절부터 있습니다. 입다가 이스라엘을 치러 온 암몬 자손에게 질문합니다. “왜 우리를 치러왔느냐?” 그러니까 암몬 자손이 하는 말이 “아, 여기가 우리 땅이다.” 합니다. 지금 요단 동편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남쪽에서부터 암몬 자손이 치러 왔습니다. 그러자 15절부터 대답이 나옵니다. “이 땅이 당신들 것이 아니고 우리들 것” 이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두 가지로 증명합니다. 제일 먼저는 역사적인 논리로 쭉 증명합니다. 22절까지입니다. 역사적인 면에서 “우리 선조들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하나님께서 이 지경을 지나가게 하시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고 그래서 다 지나왔고, 그리고 이 땅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300년 동안 완전히 우리 것으로 이 땅에서 살아왔는데 어찌 당신들 땅이요?” 역사적으로 먼저 이야기합니다. 23절부터는 신앙적인 논리로 이야기합니다. “이 땅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이라. 그러니 너희 것이 아니고 우리 것이라. 너희는 너희 신 그모스에게 가서 그모스가 준 땅에 가서 살아라. 이 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이러한 면은 오늘날의 크리스챤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미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이 구약의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상징하지만 여러 가지 다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 면이 오늘날에 가장 잘 표현된 부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표현입니다. 구약 백성들은 가나안 땅 안에서 살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가나안 땅 안에서 살기 때문에 모든 축복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신약의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는, 그리스도의 뜻대로 사는 삶을 살아야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축복을 누리고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 때 마치 입다에게 암몬 자손이 와서 “이 땅 우리 땅이다.” 이렇게 하듯이, 사탄이 여러분에게 와서 “이 축복은 너희 것이 아니다.”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 이거 우리 것 아닌가?” 그러고 빼앗깁니까? 여러분의 축복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하셔서 많은 재물이 있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하셔서 많은 재능이 있게 하셨습니까? 지혜가 있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하셔서 많은 자손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하셔서 높은 자리를 주셨습니까? 명예를 주셨습니까? 거기에서 내가 축복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찾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의 마음속에 모든 축복으로 더하여 주신 줄 믿습니다. 사람의 행불행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겉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느냐, 소유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행복과 불행은 마음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천국을 누리는 것은 마음이 천국일 때 천국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황량하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어도, 여러분의 인생은 황량한 인생입니다.
어느 도박꾼이 도박으로 패가망신을 하고 ‘내가 다시는 도박을 안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죄적으로 버는 돈은 왜 그렇게 크게 버는지 모르겠어요. 도박하는 사람들이 왜 일반 직장을 못 갖느냐면 ‘내가 하루저녁만 잘 하면 백만원, 이백 만원 문제가 아닌데 하루 종일 일하고 오 만원 받는 일을 내가 왜하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수십 년 도박하고도 매일 쪽박신세더라구요. 또 술집에 나가서 돈 버는 여자들 있죠? 그들도 다른 직장을 못 가져요. 돈이 너무 적어서요. 무슨 수공예 일을 하고 하루 종일 일하면서 어깨 아프고 허리 아프고 일을 하는데도 얼마 벌지를 못해요. 그런데 자기는 하루 저녁 일하면 그런 일 하는 한달치를 한꺼번에 벌 수 있어요. 그런데 몇 십 년이 지나도 돈이 없어요. 죄악된 것은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도박하는 사람이 돈 다 없애고 절대로 도박 안 한다며 자기 손을 찍었어요. 그러고 가서는 또 다시 도박을 한다고 해요. 손을 찍었으니까 손에 패를 쥘 수는 없죠. 엄지 발가락과 집게 발가락으로 집어서 팔꿈치에 화투장을 끼고 도박을 한다고 해요. 손이 문제에요? 도박장을 가는 내 발이 문제입니까? 결국은 마음이 문제입니다. 모든 행불행, 인생의 가는 모든 길은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에 도박에 찌든 마음이 있는데 손가락을 찍고 발가락을 찍으면 뭐 합니까? 마음의 축복이 가장 큰 복이요, 하나님은 그러한 축복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부 다 다하여 주신 줄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천국의 소망이 있음을 알려 주시고, 이 세상에서 다 주지 못하신 것을 영원한 천국에서 반드시 다 주신다고 우리에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지금 잠시잠깐 우리의 삶 속에서 그런 것을 다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시잠깐이며 그 이후에, 인생의 짧은 몇 십 년의 세월을 지난 이후에는 천국의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사탄은 마치 여기 암몬 자손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꾀입니다. “너 행복하냐?” “그래, 행복하다.” “그래? 그럼 한번 따져볼까? 너 돈 있냐?” “나 돈 없는데….” “너 높은 자리에 있냐?” “없는데….” “주변 사람들이 막 너 좋다고 섬기냐?” “그런 것도 아닌데….” “너 건강하냐?” “건강도 별로 안 좋은데….” “그런데 뭐가 행복하냐? 네가 가졌다고 하는 그것, 네 것 아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끊임없이 사탄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바로 그 면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때 입다가 한 대답처럼 바로 그러한 대답을 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소리냐? 잠시잠깐 이럴지라도 결국 하나님은 내게 많은 복을 주시고 생명으로 나를 복 주셔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고 보증으로 내 마음속에 성령님을 주셨는데, 이제 나는 천국 간다. 이 세상 잠시잠깐 별 것 아니다. 그 이후에는 내가 천국 가는 삶을 사는데 무슨 소리냐? 나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행복하다.” 감사함이 넘치고 은혜가 넘치고 믿음이 넘치고 소망이 넘치는 여러분의 삶을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이 에덴동산이면 여러분은 이미 천국 속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비 된 천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있는 천국은 이 세상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놀라운 보배를 꼭 지키셔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의 그 구원이, 언제나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그 구원이 인간의 연약함과 인간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항상 조금씩 다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면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여기 두 가지가 나오는데, 첫째로 입다의 빗나간 열심히 나옵니다. 본문 29절부터 보죠. 입다가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싸움을 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열심이 하나님의 뜻을 지나가서 기어이 자기가 뭔가를 이루고 싶기 원하니까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 나를 이기게 하시면 나중에 내가 집에 가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겠습니다.” 서원까지 해 가면서 하나님께 꼭 이기게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이깁니다. 기어코 자기가 이루겠다는 그러한 빗나간 열심 때문에 오히려 그 가정에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사실 여기 나온 대로 31절에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이게 전혀 하나님 뜻과 맞지 않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게 누구겠어요? 강아지 아니면 사람이지요. 그런데 강아지를 드릴 것은 없고, 성경에 개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이야기는 없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사람을 드리겠다는 이야기에요. 이것은 이방 종교적인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수없이 많은 곳에서 사람을 제물로 드린 흔적들이 나옵니다. 제가 저번에 멕시코에 갔을 때 그 멕시코의 피라밋은 이집트의 피라밋보다 크다고 그랬죠? 그것은 무덤이 아니에요. 멕시코의 피라밋은 그 꼭대기에서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제물을 드렸는데 그 중에 사람도 있었습니다. 태양신에게 제물로 사람을 드리고, 달의 신에게 제물로 사람을 드렸어요. 그런 식으로 사람을 제물로 드리겠다는 얘기까지 해 가면서 이기려고 한 것입니다. 결국 자기가 한 그 빗나간 열심 때문에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딸을 잃게 됩니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승리를 만끽하지 못하게 하고 슬픔에 잠기게 합니다. 한 사람의 빗나간 열심 때문에…. 교회 일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안팎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일을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만 의지하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가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앞서 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자기의 빗나간 열심-자기가 영광 받고자 하는 그 열심으로 더 뭔가 이루고자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빛바래게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정말 가장 좋은 면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오히려 허망한 것으로 바꾸는 일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일 한다고 열심히 일을 하는데 오히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열심히 해요. 그런데 그 일을 기어코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빗나간 열심이에요. 그 과정 중에 다른 것은 일체 안 보고 그 목표 하나만 보고 할 때,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가 어긋나게 되고 상심하게 되고 문제가 생깁니다. 이렇게 빗나간 열심은 하나님 뜻에 감사하면서 하는 일이 아니에요.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영광 받기 위할 때 그런 빗나간 열심이 있습니다. 그럴 때 더불어서 일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교회 일을 할 때, 아니면 하나님 일을 한다고 할 때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습니까? 부딪힌다면 여러분은 그 열심이 빗나간 열심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스스로 한번 돌이켜 보십시요. 나를 드러내고 싶어서 하는 일일 가능성도 많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는 일이라면 일이 멋지게 결론이 안 날수도 있지만, 그 가운데서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함도 주고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사역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우리 교회를 통해서 뭔가 대단한 일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만큼 일할 것이고, 때가 되면 내 일은 다 한 겁니다. 뒤돌아서서 “야, 채목사, 지난 20여 년 동안 무슨 일 했고, 무슨 일 했고….” 그건 별것 없습니다. 하나님이 능력 주신대로 일하다가 하나님이 됐다고 하시면 그냥 끝나면 됩니다. 여러분의 삶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력서에 “나는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런 게 붙어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뭔가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 일에 동참하는 것은 그 자체가 축복이고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끼워주는 것에 감사하는 것이지, “내가 무슨 일을 한다.” 그런 마음은 추호도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12장 1절부터 7절까지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나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이스라엘 열두지파 중의 하나인데 가장 숫자가 많고 넓은 땅을 차지한 강성한 족속이죠. 그런데 그 앞에 사사 기드온에게도 전쟁에 이기고 나서 꼭 한번씩 딴지를 거는 족속이었어요. “왜 우리를 먼저 안 불렀느냐?” 자기들에게 영광이 덜 돌아갔다 이거죠. ‘이기는 전쟁은 나도 먼저 껴야 되는데.’ 하는 겁니다. 그때 기드온은 잘 위로해서 따독거려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입다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냐?” 같이 부딪혀서 드디어 전쟁을 하고 4만 명이 넘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 재미있는 것이 있어요. 12장 6절을 한번 봅시다. 사실 똑같은 유대인인데 어떻게 에브라임 사람을 구별해 죽였을까요? 12장 6절에 보면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죽인 사람이 4만 2천명이에요. 우리말은 씹볼렛이라고 하지만, 원래 쉽볼렛입니다. 발음이 쉽볼렛인데 발음을 해 보라고 하니까 쉽볼렛이라고 못하고 십볼렛이라고 그런 거예요. 이게 사투리죠. 사투리 보고 알아내는 거예요. 제 고등학교 때 친구 하나도 밀양 출신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제가 “쌀” 해보라고 해도 “살” 그래요. 그 발음하고 똑같아요. 그래서 에브라임 사람들을 구별해서 그 사람들을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잘못한 에브라임 사람이 4만 2천명 죽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열두지파 전체입니다. 결국 싸워서 에브라임 사람들 4만 2천명이 죽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4만 2천명 줄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에게만 상처가 되고 괴로움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의 상처와 괴로운 일인 것입니다. 그런 일이 왜 일어났습니까? 한 부족의 교만함 때문에요. ‘내가 제일 대접받아야 되는데, 내가 제일 앞자리에 앉고 상좌에 앉아야 되는데….’ 하는 그 마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의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한 가족으로 뭉쳐져야 되는데 그 일부 사람들의 교만함과 자존심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니까요. “왜 나를 제일 앞세우지 않았느냐? 왜 나를 대우하지 않았느냐? 내가 제일 먼저인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 모임은 괴롭습니다. 하나님 일을 할 때에는 이 두 가지 면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빗나간 열심-자기 영광 받으려고, 자기가 뭔가 훈장처럼 내가 이렇게 일을 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열심은 문제가 되고 함께 일을 못합니다. 그 다음에는 항상 상석을 차지하려고, 항상 대우받으려고 하는 그 사람들 때문에 교회 안에서, 교회 밖에서 하나님의 일이 항상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성령의 불을 계속해서 세우고, 다른 사람을 세우는 불쏘시개 역할을 합니까, 아니면 그 불을 끄는 냉수 역할을 합니까? 부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다 하나님의 일에 불쏘시개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이미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그 놀라운 축복이 나도 누리고 온 성도들도 함께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계를 극복하라
삿 11장 1~11절 / 조상호목사
EX) 말씀을 나누기 전에, 음악가 베에토벤을 소개할까 합니다. 아마 이 자리에 베토벤을 모르시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음악을 작곡하는 음악가인 그가 도중에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전혀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악기 소리도, 합창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그의 제9번 교향곡을 발표할 때에는 그는 완전히 귀머거리 상태가 되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해도 전혀 들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 그는 이 곡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지휘자로서 귀가 먹어 버렸다는 것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지휘를 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단원들은 "저 사람의 지휘봉을 신뢰하지 말라. 베에토벤은 귀머거리이다."라고 수군거렸습니다. 드디어 연주 발표회 날이 되었습니다. 베에토벤의 뒤에는 군중이 입추의 여지가 없이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곡이 진행되자 분위기는 비장하고 긴장되고 엄숙했습니다. 점점 군중들은 과거의 어떠한 음악회에 갔었을 때보다 더 매료가 되어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도취가 되었습니다. 발표회가 끝나자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로 벽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무대 위에는 단원들이 모두 울고 있었습니다. 감격, 열광, 환희, 그런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황홀함에 도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군중들의 반응을 전혀 들을 수가 없었기에, 여전히 그 단원들 앞에서 눈을 지긋이 감은 것처럼 서서 지휘봉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한 여자 단원이 그의 몸을 돌려 뒤에 서 있는 군중들의 그 열광적인 환호와 박수를 보게 했습니다. 연주회는 대성공을 했던 것입니다. 베에토벤은 귀머거리의 벽을 뚫고, 절대 불가능을 절대 가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가 신체적인 핸디캡과 한계를 극복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음악의 성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한계라는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빠져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계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1940년대만 해도 마라톤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42.195Km를 절대로 2시간 30분내에는 달릴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2시간 30분보다 더 빨리 달리면 심장이 파열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어떻습니까? 2시간30분대로 달린 선수가 심장이 파열되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까? 아닙니다. 심장 파열로 한 사람도 죽지 않았습니다. 한국 마라톤 기록도 2000년 2월에 이봉주선수가 세운 2시간 7분20초입니다. 또한 세계적으로 2시간 6분대의 선수가 부지수입니다. 모로코의 할리드 하누치(27)라는 선수는 1999년10월에 미국 시카고 마라톤에서 처음으로 6분 벽을 깨버리고 2시간 5분 42초로 세계신기록을 수립했습니다. 마라톤 기록은 한계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들에 의해 깨어졌습니다. 앞으로도 마라톤 기록은 한계 너머를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계속해서 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계 너머를 바라 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키가 작기 때문에 안 된다, 학벌이 시원치 않아 힘들다, 별 볼 일없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틀렸다, 출신지역 때문에 불가능하다, 이민자라 어렵다, 검은머리와 노란색 피부를 가지고는 한계가 있다, 등등의 이유를 대며 스스로 한계를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빠져 나올 생각은 하지 못한채, 좌절하며 방황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악한 사단이 우리의 마음에 이러한 한계를 심어준다는 것입니다. 한계를 정하는 것은 사단의 장난입니다. 미신입니다. 하나님의 사전에는 한계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한계가 없습니다. 또한 한계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보면, 한계를 극복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목동출신의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던 다윗은 전국을 다스리는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민자였던 요셉과 다니엘은 국무총리에까지 올랐습니다. 키가 작아 신체적으로 핸디캡이 있었던 삭개오는 영광스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간질 등으로 인해 신체가 건강하지 못했던 바울은 예수님 이후에 가장 위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 입다라는 사람도 한계를 극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한계를 극복한 사사 입다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입다처럼 한계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불행한 환경 가운데
입다는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났고, 불행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비정상적인 결손가정 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돠 2절을 보겠습니다.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입다는 몸팔아 먹고살던 윤락녀의 아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집안에서 천덕꾸러기처럼 눈총을 받고 자랐습니다. 다른 어머니로부터 구박을 당했습니다. 배 다른 이복형제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집안이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본처로부터 난 형제들이 기생의 아들 입다로 인하여 유산상속에 손해를 볼 것 같으니까 아버지의 유산이 그에게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를 내쫓아 버렸습니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정든 고향을 떠나 요단강 동북쪽에 있는 돕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그는 새로운 마음으로 타향살이를 하려고 했지만, 그것 또한 자신의 맘대로 안되었습니다. 그의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까? 잡류들, 즉 직업도 없이 떠도는 백수같은 불량배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입다는 행복한 생활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입다의 삶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스스로 결정해서, 또는 그가 실수로 말미암아 그가 이러한 불행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는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스스로 윤락녀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로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술집에서 몸팔아 먹고살던 어머니를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유산에 손을 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복형제들로부터 억울하게 내쫓김을 당했습니다. 또 새로운 객지생활에서 그가 백수들의 보스가 되려고 한 것도 아닌데, 주위에 백수들만 잔뜩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환경에 처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은 신세 타령을 할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집구석에 왜 태어나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느냐", "키우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낳지를 말지 왜, 나를 낳아서 이 고생을 시키느냐", "너희들이나 나나 똑같은 아버지 자식인데 나를 왜 이렇게 구박을 하느냐"고 부모에 대해, 형제에 대해, 가정에 대해, 이웃에 대해 원망을 하고, 심하면 삶을 포기하고 낙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입다는 달랐습니다. 보모나 형제 등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좌절하여 삶을 포기하지도 아니했습니다. 더욱이 그의 주위에 백수들이 몰려있기 때문에, 갱단을 조직하여 나쁜 짓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했습니다.
2) 고난 속에서 실력을
입다는 불행한 환경 가운데에서 실력을 닦았습니다. 그는 돕 땅에 거하면서 실력을 차분하게 쌓았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4~6절을 보면 그가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실력을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어느 날 암몬이라는 족속이 이스라엘에 침략했을 때, 고향에 있는 어른들이 입다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부탁을 합니다.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군대 지휘관이 되어 주십시오. 저 이방나라 암몬 군대를 무찌르기 위해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당신이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 주십시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입다는 군대 장관이 될 정도로 실력을 키웠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군대장관에 임명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적군을 앞에 두고 대치하는 상황에서 군대장관에 임명할 정도라면 입다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좌절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에서도 실력을 키웠습니다.
EX) 어느 가난한 농촌 마을에 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가는 고등학교 진학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골에서 농사일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방이 꽉 막혀 미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진학도 실패한 주제에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절망하고 좌절에 처해있는 그가 어느 날 마을에 있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그에게도 꿈이 생겼습니다. 믿음과 꿈은 그를 살맛 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비록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틈틈이 실력을 쌓아 나갔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 결과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꿈도 꾸지 못하던 대학까지 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하와이까지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박사학위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 청년은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과거에 찢어지게 가난했던 이 청년은 기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의 식량사정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주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꿈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한국인'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북한의 어려운 식량 사정을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옥수수 박사라고 불리 우는 김순권 박사님이십니다.
여러분! 가정이 어렵습니까? 환경이 어렵습니까?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가난이 영원한 가난이 아닙니다. 지금의 불행이 영원한 불행이 아닙니다. 지금의 아픔이 영원한 아픔이 아닙니다. 지금의 슬픔이 영원한 슬픔이 아닙니다. 슬픔 너머에 기쁨이 있고, 불행 너머에는 행복이 있습니다. 누구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환경에 불평하지 마십시오. 처해진 환경이 열악하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실력을 키우십시오.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실력입니다. 실력만 있으면 환경이 극복됩니다. 시편기자도 (시126:5~6)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환경을 바꾸려고 하지 마십시오. 환경을 바꾼다 할지라도 실력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오히려 실력을 키우십시오. 실력을 키우면 환경이 바뀝니다. 실력을 키우면 농사꾼이 대학생이 되고, 박사도 됩니다. 실력을 키우면 환경을 바꿀 수 있습니다. 사사 입다는 어려운 환경을 거부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실력을 키웠습니다.
3) 용서와 사랑을 가지고
입다는 미움보다는 용서와 사랑을 가졌습니다. 그가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하면서 실력을 쌓아 큰 용사가 되었을 때, 고향 어른들이 찾아와서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으니 우리를 위하여 군대장관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입다가 과거 고향에 있을 때, 어떠한 대접을 받았습니까? 그는 정말로 고향사람들로부터 많은 구박을 받았습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고향 어른들이 도와달라고 찾아왔을 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추방할 때는 언제고, 자기들이 위기에 처하니까 도움을 요청하는 고향사람들이 얼마나 밉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는 사사로운 감정을 멀리하고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그는 비록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구박하고 자기를 푸대접한 고향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전쟁터에 나가 암몬 군대를 대항해 싸우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러한 모습이 크리스챤들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미움보다는 용서와 사랑으로 사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EX) 김구 선생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실 때에 일본인 헌병이 한국 청년을 매수해서 김구 선생을 암살하도록 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얼마 안 가서 붙잡혔고, 사람들은 청년을 처형하기 직전에 김구 선생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선생님을 암살하려던 청년을 붙잡았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김구 선생은 그 자리에서 이 청년을 용서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청년을 붙들고서 "내가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한 한국 청년을 여기서 만나니 실로 감격스럽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김구선생은 자기를 암살하려고 권총을 들었던 그 청년을 부둥켜안고서 기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은 이러한 김구 선생의 인품에 감동이 되어, 독립군으로 끝까지 충성을 다하며 헌신을 다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와 사랑인줄로 믿습니다. 남을 미워한다는 것은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고통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관용을 베풀면 관용을 베푼 만큼 나에게 유익이 됩니다. 우리가 잘못을 하고 용서를 받는 것도 기쁜 일 이기는 하지만, 더 큰 기쁨은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입다는 미움이라는 한계를 용서와 사랑으로 극복했습니다.
4) 하나님의 능력으로
입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1절을 보면,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큰 용사였습니다.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엄청난 힘과 용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전쟁터에 나가면서 "내가 가서 싸우리라. 내 능력으로 승리하리라. 나를 믿으라. 나는 저 암몬 족속들을 무찌를 수 있다"라고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또 30~31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손에 붙이시면 이길 것입니다'라고 하며 승리는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내 힘과 내 능력과 내 경험과 내 지혜로 성공할 것 같지만, 성공하게 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만 성공할 수 있고,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EX) 저는 지난주 휴가 기간동안 바닷가에서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서쪽의 Grey Mouth의 해변가에 갔는데, 많은 젊은 청년들이 써핑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족들과 함께 방파제에 앉아서 그 모습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로 써핑을 잘하는 베테랑 써퍼들이 있었습니다. 파도를 타는데, 예술의 경지에 올라선 것 같이 잘 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제대로 써핑을 즐기지 못하는 왕초보 써퍼들도 있었습니다. 파도가 밀려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곧바로 물 속으로 곤두박질하는 왕초보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족과 함께 그 광경을 한참보고 있는데, 그렇게 불던 바람이 갑자기 잠잠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으니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파도도 일지 않았습니다. 파도가 일지 않으니까 써핑을 즐기던 사람들이 그냥 써핑 보드에 엎드린 채, 높은 파도가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성질이 급한 두세 사람이 써핑을 하지 않고 밖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베테랑 써퍼라 할지라도 파도가 일지 않으니까 써핑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파도를 일으켜 주지 않으면 왕초보 써퍼들이나 베테랑 써퍼들이나 똑같이 보드에 배 깔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만약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한다면 많이 배우고 많은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은 100% 성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능력있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패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축복의 바람을 불어 주셔야만 성공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뒤에서 팍팍 밀어 주셔야만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잠16:9)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2001년도에 승리하는 비결이 바로 이것입니다. 승리를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승리를 주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승리하게 하시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사사 입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암몬 족속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한 입다와 같은 자세가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승리케 하신다는 입다와 같은 믿음이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사사 입다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우리의 모델입니다. 오늘 말씀은 2001년도를 살아가는 삶의 기준입니다. 불우한 환경, 고난의 환경 가운데에서 절망하는 우리에게 한계를 극복하는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환경이 어렵습니까? 절망하지 마십시오. 한계를 극복한 믿음이 선배들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입다는 윤락녀의 아들로서 참으로 불행한 환경의 사람이었습니다. 쥬리어스 시이저 황제는 간질환자였습니다. 가장 위대한 황제라는 아우구스터스는 심한 위궤양으로 평생 고생했습니다. 2차 대전때 영국 공군의 영웅인 더그러스 베이더는 두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끼운 뒤에도 공중전의 최우수 조정사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버클러 박사가 신학교 교수로 있을 때, 희랍어에 최고점을 받은 학생은 장님이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빌립보서 4장13절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도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무슨 한계가 가로막혀 있습니까? 돈이라는 벽이 있습니까? 영어라는 벽이 있습니까? 미래에 대한 암담한 장벽 가로막혔습니까? 저는 한계에 가로막혀 고민하고 있는 분들에게 마지막으로 곤돌 메기 이야기를 드리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EX) 1년 전 전교인 수양회 때에 '생각을 바꾸라'는 내용의 말씀을 드리면서 소개한 곤돌 메기 이야기를 다시 한번 소개하겠습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이 곤돌 메기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곤돌 메기 한 마리를 큰 어항에다 풀어놓고 곤돌 메기가 즐겨 먹는 플랑크톤이나 작은 물고기 같은 먹이들을 무제한으로 풀어놓았다고 합니다. 곤돌 메기는 신이 낫습니다. 먹고 싶으면 그 안에서 마음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매일 같이 마구 잡아먹었습니다. 그러다가 사회학자는 어느 날 큰 어항 한가운데를 투명 유리막으로 막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한쪽에는 곤돌 메기라는 놈을 몰아넣고 다른 한쪽에는 전과 같이 메기가 좋아하는 먹이들을 몰아 넣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곤돌 메기는 전과 다름없이 어항 안을 유유히 헤엄치며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이 곤돌 메기가 배가 고파옴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곤돌 메기는 늘 그랬던 것처럼 먹이들을 향해서 돌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맛있게 먹던 먹이들의 근처에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다시 먹이들을 향해서 돌진했지만, 보이지 않는 어떤 장애물로 인해서 실패하였습니다. 아무리 해도 곤돌 메기는 맛있는 먹이들을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상당한 시일 동안 이러한 상태로 유지하여 곤돌 메기가 허기진 상태가 되었을 때, 사회학자는 큰 어항의 한 가운데를 가로막고 있던 투명 유리막을 치워 버렸습니다. 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곤돌 메기는 배가 고파 먹이들을 먹으려고 미친 듯이 헤엄을 쳐서 먹이들을 향해 돌진하다가 한가운데에 이르면 갑자기 기수를 돌리며 U턴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막 돌진하다가 한 가운데에서 U턴을 하고, 계속 U턴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곤돌 메기는 먹이들을 눈앞에 놓아두고도 굶어죽어 갔습니다.
그런데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와 같이 무기력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 곤돌 메기와 같은 초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거 실패 보았던 경험으로 인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죽어 가는 곤돌 메기 같은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작년에 시험에서 낙제했다구요? 작년에 사업에 실패 보았다구요? 직장을 잃었다구요? 다른 사람들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았다구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우리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입다와 같이 당당하게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 앞에 가로막힌 장벽을 허물어 버리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죄의 문제, 저주의 문제, 질병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등의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몸 찢기시고, 피 흘려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더 이상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초라한 인생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곤돌 메기처럼 무기력하게 살지 말기를 바랍니다. 물론 환경이 우리를 불편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외부적인 환경이 결코 우리를 넘어뜨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우리는 입다 처럼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다시 한번 고백하겠습니다. "OOO에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OOO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닥에서 정상으로
삿 11장 1~11절 / 조상호목사
피에르 렌취니크 박사는 세계 역사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정치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정치인들 대부분이 고아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아기 혹은 아동기에 아버지를 잃기도 하고 어머니를 잃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버지와 어머니 양부모를 잃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이 이혼함으로 인해 여러 가지 아픔과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정상적인 부부로부터 출생하지 못한 서자로서 아버지와 떨어졌거나 아버지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거부당했거나 버림을 받기도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정리하여 한 권의 책을 썼는데, 그 책의 이름이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Orphans Lead the World)>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어린 시절에 고아였다가, 후에 유명한 정치인이 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대충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꼽아보면,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 황제, 프랑스의 루이 14세 왕, 미국에서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조지 워싱턴, 세계 정복을 꿈꾸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해상을 장악함으로 해가지지 않는 나라가 되는 기초를 놓았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이스라엘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던 골다 메이어,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의 히틀러, 공산주의 태동케 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던 소련의 레닌과 스탈린, 프랑스의 유명한 정치가 비스마르크 수상과 드골 장군 등, 300여 명의 인물들이 고아 출신입니다. 그가 언급한 300여 명의 인물들 가운데에는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친 인물들 뿐 아니라, 나쁜 영향을 끼친 인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이 불우한 환경을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정상적인 환경과 여건에서 자라는 것은 축복입니다. 누구나 꿈꾸고 있고, 바라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위대한 인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잡한 가정과 환경 속에서 격어야 하는 고통 때문에 오히려 더 위대한 인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을 폴 투르니에는 ‘창조적 고통’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책 <창조적 고통>에서 복잡한 가정 속에서 버림 받기도 하고, 왕따를 당하기도 하는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 가운데 역사를 움직이는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입다가 바로 그러한 인물입니다. 어두운 역사적 환경에서 태어난 그는 이제까지 등장한 다른 사사들과는 달리, 시대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극히 불우한 환경에서 어렵게 성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11장 32절에 보면 입다는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더불어 성경에 기록된 위대한 사사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 F.B. Meyer가 요셉의 생애를 가리켜 “From Pit to Pinnacle(바닥에서 정상으로)”라고 표현했지만, 입다 역시 그러한 칭호를 받기에 충분한 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닥에서 정상에 오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닥에서 정상으로 올랐던 입다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불행한 환경의 사람
입다는 태어날 때부터 기구한 운명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입다는 기생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기생이란 몸 팔아 먹고 사는 창녀를 말합니다. 더군다나 그의 기생 어머니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는 자기 어머니가 아닌, 다른 의붓어머니로부터 구박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나중에는 다른 어머니가 낳은 배다른 형제들에 의해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입다는 유산상속에 손해를 보지 않을까 걱정하는 본처 자녀들에게 의해 쫓겨나서, 고향을 떠나 동북쪽으로 25Km 떨어진 돕 지방에 들어가서 이민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이 이민생활이지 사실은 들풀과 같은 유랑 생활이었습니다. 자연히 입다 주위에 누가 모여들겠습니까? 3절에 의하면 그의 주위로 잡류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잡류’란 히브리 원어로 ‘할 일 없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즉 갈 데 없는 떠돌이들, 한량들, 건달들, 백수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입다는 그들과 함께 들풀처럼 자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질문하겠습니다. 입다가 이러한 삶을 살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구 때문입니까? 입다가 원해서 기생의 소생으로 태어났습니까? 입다가 잘못해서 집에 구박을 당했습니까? 입다가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천대를 당하고 집에서 쫓겨났습니까? 아닙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입다가 잘못했기 때문에 그의 부모님이 그에게 방을 빼라고 했다, 결국 그는 쫓겨나서 백수들과 같이 살았다. 그가 불효했기 때문에 벌을 받아 그렇게 되었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가 집을 떠나 객지에서 어렵게 살게 된 것은 그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로 인해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서 비참한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잘못으로 인해 입다는 불행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제가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는데, 수년 전에 모 대학 교수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사건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범인인 김모 교수에게 선고가 내려졌는데, 무기징역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부모님을 살해하는 <존속살해사건>은 사형인데, 무기징역이 선고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김교수의 어머니, 다시 말해서 죽은 사람의 아내가 장문의 편지를 써서 재판관에게 탄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것은 마땅히 죽을 죄를 지은 끔찍한 일지만, 그러나 살해한 아들 못지않게 죽은 아버지의 잘못도 큽니다. 아버지는 외부로는 선한 교육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가정에서 폭군처럼 행세했습니다.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족을 학대했고, 예사스럽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자녀들도 아버지의 증오 때문에 항상 분노와 증오를 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림을 받아 살아오는 중에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아버지의 책임도 있었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잘못이 아들로 하여금 이런 끔직한 사건을 유발시킨 점을 이해해 달라는 내용의 탄원서가 감동을 불러 일으켜 결국 무기징역이 선고된 것입니다. 흔히 부모들은 자녀교육은 부모 마음대로 안 된다고 자기 합리화 내지 변명을 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들에게 살아있는 교과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거울입니다. 문제아 뒤에는 문제 부모가 있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부모의 모습 그대로 자녀들이 본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에게 지금 어떤 유산을 남기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들처럼 자란다고 생각해보셨습니까? 선한 것도 악한 것도 그대로 자녀가 닮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부모의 잘못 때문에 고통당했던 입다 처럼, 우리 부모들 때문에 우리들의 자녀들이 고통당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부모의 잘못 때문에 자식이 불행하게 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입다는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났고, 불행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아마 이러한 환경에 처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은 신세타령을 할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할 것입니다. 부모에 대해, 형제에 대해, 가정에 대해, 이웃에 대해 원망을 하고, 심하면 삶을 포기하고 낙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입다는 달랐습니다. 비록 아무 잘못도 없이 억울하게 고향에서 쫓겨나서 유랑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좌절하며 삶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의 주위에 백수들이 몰려있기 때문에, 갱단을 조직하여 나쁜 짓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2) 실력을 쌓았던 사람
입다는 불행한 환경 속에서도 실력을 쌓았습니다. 5절과 6절에 의하면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을 때, 이스라엘의 어른들이 입다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5~6절) 나라가 어렵게 되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우리의 장관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의 군대 지휘관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부탁할 정도로 입다는 큰 용사로 성장했습니다. 입다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서 이미 큰 용사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불행한 환경에서 살았지만, 그는 시간만 죽이고 백수로 살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자기를 쫓아냈던 어른들이 다시 찾아올 정도로 입다는 그 동안 무예와 지략을 갈고 닦았음에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입다에게 찾아와서 암모사람들을 대항해서 싸워달라고 부탁하겠습니까? 백수들이 자신의 주위에 몰려오고 들풀처럼 자랄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했지만, 그는 실력을 쌓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이 바로 우리 믿는 자의 삶이라고 믿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불행한 환경 때문에 절망하지 말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세상에 거룩한 도전장을 내기 위해서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세상에서 영향력 미치는 삶을 살려면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바닥에서 정상으로 나아가려면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꿈이, 비전이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꿈이나 비전은 인생을 살맛나게 하고 달려갈 방향을 제시 해주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인생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꿈과 비전이 이루어지려면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저절로 비전이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자주 소개한 복권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우리가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 어떤 남자가 매일 밤 “하나님이여, 제발 한 번만 복권에 당첨되게 해주시옹소서.... 제가 다른 것을 원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제발 좀 당첨되게 해주셔서 다시는 당신을 귀찮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옵소서!”라고 복권에 당첨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몇 년 동안 이렇게 기도하고 또 기도하던 어느 날 밤, 드디어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야 복권 좀 사면서 복권이 당첨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네가 복권 한 장이라도 산다면 복권 당첨을 고려해 보겠다!” 여러분! 이 유머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주위에 보면 복권 한 장 사는 값도 지불하지 않고 복권에 당첨되게 해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꿈은 반드시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요셉을 보십시오. 그가 17살 때에 꿈을 꾸었지만, 그의 꿈이 곧 바로 이루어졌습니까? 그가 꿈을 꾸자마자 곧바로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에 올랐습니까? 그리고 그가 꾼 꿈대로 그의 부모님과 11명의 형제들이 자기에게 절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11년, 감옥에서 2년을 보냈습니다. 요셉은 있는 자리에서 실력을 쌓았습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경호실장이라고 할 수 있는 바로왕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면서도 부지런하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디발이 그를 가정 총무를 삼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했습니다. 다른 종들이 잠을 자고 있을 때에도 애굽의 문화와 언어를 익혔을 것입니다. 다른 종들을 부리기 위해서 리더쉽을 키웠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원망하고 틈만 있으면 쉬기를 원할 때에도 요셉은 달랐습니다. 또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서도 보디발의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감옥 생활을 자기 발전과 성장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곳에서 왕의 죄수들을 섬기면서 애굽의 정치세계를 배웠습니다. 궁중의 도와 궁중의 언어와 궁중의 문화를 익혔습니다. 희망이 없는 감옥 속에서도 애굽 문화와 애굽의 정치와 애굽의 역사를 배웠습니다. 요셉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람을 소중하게 여겼고, 자기의 교사로 삼았습니다. 요셉은 꿈을 갖고 미래를 향해 나가면서도 현재의 삶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고난의 기회를 발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시편 105편 17절부터 19절에서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결국 요셉은 종살이와 옥살이를 하면서 훈련되어지고 성숙해 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어떠한 형편에 있습니까? 가정 형편이 어렵습니까? 영어를 못합니까? 키가 작습니까? 머리통이 큽니까? 머리가 자꾸 빠져 대머리가 되어가고 있습니까? 앉아서 신세타령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민한다고 머리통이 작아집니까? 고민한다고 머리가 생깁니까? 걱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해결된다면 자꾸 고민하십시오. 문제가 해결된다면 계속 징징 짜십시오. 그러나 고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지나간 역사를 보면 <바닥에서 정상에 올라 선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들이 저절로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저절로 정상에 올라선 것이 아닙니다. 에브라임 링컨, 발명왕 에디슨, 작곡가 베토벤 등 모든 사람들은 어려운 환경을, 불행한 환경 가운데에서도 최선을 다함으로써 역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처한 불행한 환경으로 인하여 낙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누구를 원망하지도 말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불행한 환경이라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겠다, 하나님의 큰 용사가 되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리에서 입다처럼 실력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3) 용서와 사랑의 사람
입다가 고향에서 쫓겨난 후의 생활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겠습니까? 그리고 암몬 족속이 쳐들어왔다고 “우리를 위해 대신 싸워주세요”라고 부탁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들이 얼마나 야속하게 보였겠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이 말씀을 보면 길르앗 사람들이 입다를 얼마나 구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입다는 자기를 멸시하고 천대하고 쫓아낸 그들이 와서 도와 달라고 했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미움이나 증오나 섭섭한 감정을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사로운 감정을 멀리하고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 그는 비록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구박하고 자기를 푸대접한 고향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을 용서하고 전쟁터에 나가 암몬 군대를 대항해 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러한 용서의 마음과 사랑의 마음이 주님의 모습이고 우리가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이런 너그러운 ‘용서의 마음’이야말로 주위에 사람을 부를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인간이 기계가 아닌 이상, 조금의 실수도 범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다 실수는 있는 법입니다. 사실 사람은 실수의 가능성과 함께 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의 전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미국 조지아 주에 선교사로 가기 위해서 베를 탔는데, 그 배에서 한 장군과 무척 친해집니다. 한번은 그 배에서 일하는 젊은 친구가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러자 이 장군이 화가 나서 젊은이를 향해 “저 놈은 내가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냅다 소리쳤습니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웨슬리 목사님은 그 장군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장군님, 장군님이 저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장군께서도 결코 실수함이 없으셔야 합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 장군은 자기 역시 실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그 젊은 청년을 용서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려면 절대로 실수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실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입다처럼 상대방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만약 마음속에 미움이나 적개심을 품고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사실은 본인의 마음속에 더 큰 상처가 생깁니다. 미워하면 상대방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큰 손해를 봅니다. 미워해 보십시오. 잠자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미워하는 상대방입니까? 아닙니다. 본인이 잠을 자지 못합니다. 미워할 때 감사가 사라집니다. 기도가 잘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떨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귀가 역사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성령이 역사하는 줄로 믿습니다. 내 마음속에 사랑이 있으면 성령께서 역사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입다처럼 용서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움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
입다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1절에서 입다를 소개하는 첫머리에서 ‘길르앗 사람 큰 용사’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 그는 무예가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큰 용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임꺽정처럼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전쟁터에 나가면서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내가 가서 승리하리라. 여러 장로들이여,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여기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씀 아닙니까? 이와 비슷한 말씀이 여호수아 14장 12절에 나옵니다. 85세 된 백발의 갈렙이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고 고백한 것과 비슷합니다. 갈렙은 “이 산지를 주십시오. 반드시 내가 좇아낼 것입니다.”라고 고백했는데, 그 고백의 근거는 다름 아닌 ‘하나남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입니다. 이 말이 자칫 잘못하면 오해할만한 번역으로 되어 있는데, 수개월 전에 말씀드린 대로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이라고 할 때, ‘혹시’라는 말은 히브리어 ‘울라이’입니다. 이 말은 그럴지 안 그럴지, 하나님이 혹시 함께 하실지 안 하실지 하는 두려움이나 의심을 표현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소망’과 ‘믿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문맥을 살핀다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와 함께 하실 것을 내가 믿는데, 그렇다면 내가 반드시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좇아내리이다.” 갈렙은 자신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사 입다도 갈렙처럼 자신의 전략과 전술로 이스라엘을 구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입다는 여호와께서 암몬을 그에게 붙이실 때만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입다는 자신의 힘과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은 것입니다. 또 11절 말씀에 보면 입다가 전쟁에 나가면서 특이한 행동을 보입니다.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 여기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는 말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입다는 암몬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아뢰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의지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입다처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어느 책에서 신학교를 다니던 두 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두 학생 다 공부는 잘하는데 공교롭게도 똑같이 가정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한 학생은 교수가 되기 위해 외국 유학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 일을 못하시겠느냐?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고 마음을 먹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1년 동안 매일 아침마다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1년 동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셨습니다. 어떤 교수님의 주선으로 네덜란드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학비도 주고 생활비도 주고 심지어 용돈까지 주고 나중에는 부인의 생활비까지 다 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박사 과정까지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동일한 상황에서 똑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또 다른 학생은 자기 발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모금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수년이 지난 요즈음도 모금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방법이 지름길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방법이 가장 빠른 길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는 사실 우리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과 능력과 재력과 힘으로 성공하는 것 같지만, 성공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해 가는 것 같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잠16:9)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누구라고 합니까? “여호와시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승리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여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바닥에 있는 사람을 정상에 서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입다처럼 자기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을,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입다처럼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입다처럼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국 지방대 영문과 교수로 일하던 돈 슈나이더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그는 학교 다닐 때 늘 수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졸업 후 실력을 인정받아 교수가 되었고, 학생들에게도 인기 있는 교수였습니다. 월급도 쑥쑥 올랐습니다. 승승장구하였습니다. 그러나 1992년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하여 학교에서 해고당하였습니다. 101개의 대학에 이력서를 보내었지만, 그를 부르는 대학은 한 곳도 없었습니다. 그 동안 저금하여 놓았던 돈이 바닥이 났습니다. 드디어 생활 보호 대상자가 되었습니다. 아내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고아원으로 보낼 생각을 하니 잠이 오지 않아 수면제에 의존하여 억지로 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자살을 생각하여 보기도 했습니다만 자살을 하면 남은 가족들의 살 길이 막막해서 자살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렵게 용기를 내어 페인트 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대학교 교수가 페인트 공이 된 것입니다. 높은 빌딩의 벽 밧줄에 매달려 건물 벽에 페인트를 칠하는 페인트 공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비록 벽에 매달려 목숨을 걸고 페인트를 칠하는 것이 힘이 든 일이었지만, 즐겁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기 경험을 살려서 <절벽 산책>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교수 이상의 명예를 얻었습니다.
여러분! 환경이 어렵습니까? 지금 있는 자리가 새로운 출발의 자리입니다.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이 출발의 도구입니다. 지금이 출발 시간입니다. 절망하지 말고 입다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는 불우한 환경, 고난의 환경을 극복하고 바닥에서 정상으로 올랐던 사람입니다.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실력을 쌓으십시오. 미움이나 증오나 섭섭한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용서하고 사랑으로 대하십시오. 낮은 자를 높여주시고 바닥에 있는 사람을 정상에 서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입다처럼 바닥에서 정상으로 오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