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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02년월드컵응원과 탄핵시위, 6.10시민항쟁의 유사점
/(73번째글)5.18광주사태에 이용당한 이대호의 행보
/망국의 위기에 미얀마,북한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대호의 부끄러운 참회록 2편
<이 글은 2025년5월7일(수정: 2026년2월18일)
이대호두증인블로그 (http://blog.naver.com/daeho7103)
이대호다음블로그 (https://daehod.tistory.com/)에 올린 글입니다>
2002년월드컵응원과 탄핵시위, 6.10시민항쟁의 유사점
1월13일 윤석열대통령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다.
막후세력의 사주를 받은 특검은 코미디를 하고 있다.
그 정도면 탄핵 시위도 윤석열탄핵민주화운동으로 불러야하나?
시위 참가자에겐 국가유공자로 대우하고 보상금을 줘야겠네.
반탄핵집회 참가자는 국가반역죄로 모두 구속할 각오가
되어있다면 구형 논리가 맞지만, 코미디도 이러기 힘들다.
1980년 5.18광주사태 때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권력 공백 상태였고
과도기에 각 정치세력이 주도권을 잡기위해 진짜 유혈사태까지 났었다.
유혈사태의 책임은 반반이다.
양대 세력을 갈등전략으로 조율해 온 막후대권자 책임 50% .
신군부의 최고 지휘관들은 발포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지만,
실세 신군부의 책임도 있다고 봐야겠지.
1987년 6.10시민항쟁 이후부터는 좀 다르다.
전두환 정부는 레임덕이 이미 왔고, 후계자이자 킹메이커 TK사단인
노태우 인맥에게 온전히 정국 대처를 위임한 상태였다.
막후대권자는 이미 완전한 언론주도권(대권)을 되찾았고
보이지않는 실세로 사태의 강약을 요리하고 있었다.
1987년 6.10시민항쟁 때, 나는 지켜보았다.
2002년 월드컵 응원처럼,
박근혜,윤석열 대통령 탄핵 시위 때처럼,
넥타이 맨 직장인까지 포함해
전 국민이 자유의 축제를 즐기는 것을.....
그 시대의 현장을 지켜 본 7080세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이한열열사가 맞은 최루탄을 보고도
축제 운운 할 수있냐...는 반론에는 차차 설명하겠다.
중대원 구타 사건은 지역 감정을 이용한 각본
육군 일등병 시절, 중대원 구타사건(71번째 글)에
대해서 추가할 것이 있다.
사건 전에, 내가 경상도(대구)출신 중사와
정승화참모총장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기에
각본,연출의 주도권은 경상도 중사에게 있었던 것같다.
원래 짜여진 그들의 각본은 이랬다.
전라도 출신 중사가 전라도 일병에 빠따를 칠때는 내가 개입하지않고,
경상도 출신 중사가 경상도 병장을 구타할 때만 개입해서
나를 경상도 전우들 한테 특히 총애받는 군부 라인으로
편입시키기를 원했던 것같다.
기억을 돌이켜보니 사건 며칠전, 경상도 출신 친한 동기가
치료받으러 의무실에 온 기억이 난다.
엉덩이 전체에 피멍이 시뻘겋게 난 상태로 나를 찾아왔다.
전라도 출신 모 일병에게 밤에 불려가 빠따를 맞았다길래
깜짝 놀라“우리랑 동기뻘인데 때린다고 맞냐”고 물었다.
전라도 일병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동기뻘이라 생각했지만
자대 배치가 20일 정도 빠르다는 명분으로
운전,정비병들 기수 정리도 할겸(고참들의 지시가 있었겠지만)
밤에 내 동기들을 불러내 군기를 잡았던 것이다.
내가 친한 동기를 때린 ‘20일 빨라 별로 친하지않던 전라도 일병’에 대해
당연히 반감을 가질 것으로 보고 짠 각본이다.
그가 공개적으로 내무반에서 빠따를 맞을 때
말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런 각본을 모르는 나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벌어지는 구타에
깜짝 놀라 의협심을 발휘해 전라도 중사를 말렸던 것이다.
다음날 경상도 중사가 구타할때는 ‘짜여진 각본’임을
간파했기에 자연스런 의협심이 발동될 수없었고,
의도가 의심되어 개입을 망설였던 것이다.
내 성격이 단순해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보이는
상황에 용감하게 나서는 척은 할 수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실생활에서 수없이 맞닥드린다.
막후권력자들과 초일류재벌들(세계정부 세력)이
재고 무기 판매, 전쟁준비금 빼돌리기,
국제질서 개편, 돈세탁을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전쟁에서
죽고 부상당한 전쟁 난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TV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해 동정심을 유발한다.
거대한 연극인줄 모르면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후원금을 보낸다.
철없는 어린이의 푼돈부터 재벌들의 성금까지
싹싹 끌어모아 일부는 후원단체 운영금으로 쓰고
일부는 돈세탁해 착복하고 나머지 작은 액수의 후원금만
전쟁 피해자에게 전달되는 것을 안다면
눈물을 흘리면서 후원금을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5.18 광주사태에 이용당한 나의 행보.
지금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격상된 광주폭동을
이렇게 사태로 지칭한 이유는 태생의 근본을 돌아보자는 취지다.
1980년 ‘서울의 봄’은 단언컨대
3.1운동 때처럼 외세의 억압 상태도 아니었고
경제 폭망, 치안 실종 상태도 아니고,
대통령의 급서,공백으로 인해 혼란을 줄여야 할 과도기였다.
각 정치세력들의‘세력 다툼’은 너무 성급했다.
급한 혁명으로 1980년에 정치인 김대중이 권력을 잡았다한들,
분단된 나라가 또 두쪽으로 갈라지고,
진짜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한 시대적 환경이었다.
노태우를 거쳐 YS에 이어 DJ가 순차적으로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 것은 지금와서 보면 얼마나 순리대로 된 일인가?
내전이냐, 폭동이냐, 사태냐, 민주화 운동이냐?
1980년3월,
제대후 연세대 2학년에 복학했을 때
한치 앞도 모르는 안개 속 정국에서
연대 캠퍼스 잔디밭에는 학생수 보다 많은 사복경찰이
늘 죽치고 앉아있어 애초에 교내 시위는 성립될 수없었다.
첫 막후대권자는 언론을 통해
야당과 운동권 세력도 배후조종했다.
실세 전두환의 보안사 세력이나
킹메이커 사단 경북고 세력과도
비선라인이 연결되어 소통했겠지만
변수가 너무 많은 계엄정국이었다.
안개정국 속에서 강력해진 신군부에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않고
‘어떻게 막후대권을 유지할까’ 많은 고심을 했을 것이다.
막후대권자가 어떤 정치현안에 대해
확실한 방향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러 당파의 사람들을 설득할 합의점을 도출해야 할때가 있다.
이때 이대호의 의중으로 결정하자고 제시한다.
<막후대권자는 야당과 운동권 세력,
신군부와 킹메이커 집단 경북고 세력,
모든 세력에게 이대호의 의중을 확인하고
투쟁과 대응 수위를 정하자고 각각 제안한다.
각 세력은 자기들만 관찰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모든 세력이 이대호의 행보를 보고받는 것이다.
군 복무중 나로 인해 위기를 모면한
군부 전라도 인맥이 호의적인 소문을 접했을테고,
신군부로 인해 피해를 본 정승화 계엄사령관 친척이라니
야권과 운동권도 동의를 했을 것이다.
킹메이커 집단인 경북고 출신이고,
전두환의 아들인 전재국과 수업을 같이 듣는
연대 경영학과 동기 <내가 복학생이라 입학동기는 아니고
졸업동기인데 친구들이 나에게 다가와, 전재국의 개인사에 대해
가끔 나에게 애기해줘 친밀감은 갖고 있었다>
로써 중립적인 면이 있으니까 그 제안에 응했을 것이다.
이대호의 의중을 보고 합의점을 도출하기 위해
이런 풍경이 세차례 정도 펼쳐졌다.
5월 초,
내가 수업을 마치고 건물을 빠져나오면 갑자기
한 학생이 삐라를 뿌리며 ‘독재 타도’를 외친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학생들이 나타나 오른 팔을 흔들며
운동권 가요를 부르는데 하필 내 주위로 몰리더군.
30명 내지는 많아야 50명이 데모하면서 나를 둘러싸는 장면이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되는 상황인데 나는 눈치를 못챘다.
내가 중심권에서 빠져 나올려고 하면 시위대는 나를 둘러싸며
내가 가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방금 나는 경제학과 윤석범교수의 강의를 듣고 나왔다.
윤교수는 프랑스 같이 민주화된 유럽 선진국의 예를 들면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학생들이 봉기할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뿌리내린다”라며 수업을 마치더군.
강의 말미에 부추겼던 선동을 듣고
나는 ‘동의할 수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통령이 급서(急逝)한 상태에서 나라가 혼란스러운데
왜 저렇게 조급해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일제 탄압 속의 3.1운동도 아니고, 시위를 할만큼 물가가 폭등하고
경제나 치안이 엉망도 아닌데 무슨 명분으로 프랑스혁명을 언급하는지.
차기 대권에 대한 각 세력권의 조급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교수님 같은 사회 중진,엘리트 계층이 언론과 정치를 통해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야지, 왜 철없는 학생들이 명분도 없이
피를 흘려야 되나. 당신 가족들이 희생된다 해도
이렇게 부추길 수있겠는가”하는 거부감이 들었다)
잔디밭에 앉아 있던 사복경찰 두명이 한조가 되어
여기저기서 노래 부르는 학생들 한명씩을 양팔잡고
끌어가고 있는데 별 저항없이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드러운 체포와 끌려감이 이상했다)
마침 잔디밭과 아스팔트로 이루어진 백양로에
누가 일부러 갖다놓은 것같이 아담한 자갈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학생들은 둘러싸고 있는 경찰들을 향해 모두 돌팔매질을 하더군.
경찰들은 곤봉도 없었고 폭력적인 수단이나
최루탄을 활용하지않고 체포만 하고 있었다.
사실 비무장 경찰에 의해 학우들이 질질 끌려가는데
구호만 외치는 것도 이상했고 자갈이라도 던져야 할 상황이었다.
나 혼자 멀뚱하니 서 있기도 뭐해
나도 덩달아 자갈을 몇 번 던져보았다.
그러다 스르륵 데모는 끝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캠퍼스는 조용해졌다.
데모가 왜 20분도 안돼 끝나고, 학생들을 360도 둘러쌌던
그 많은 경찰들은 갑자기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런 의문을 품을 만도 한데,
황급하게 교실로 도피하기 바빠
그때 나는 거대한 연극을 눈치 못챘다.
나의 의중이 1차로 파악됐고(투석전을 벌임)
사진도 찍었으니 더 이상 시간 끌 필요가 없었던 것.
이런 풍경이 세번 정도 벌어졌던 것같다.
군 전역 후, 1학년때 망친 학점을 회복하고자
향학열에 불타던 나는 군중을 벗어나
강의실 건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쏜살같이 뛰어서 군중을 벗어나면 비겁해 보이기도 하고
바로 외곽을 둘러싼 경찰들에 체포될 것같아
울며겨자 먹기로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5월12일,
또 한번 (연출된)시위때.
내가 하교할려고 정문 쪽으로 가는데
또 갑자기 내 옆으로 모여든 시위대에 포위되고 말았다.
정문에는 상당한 전투경찰 병력이
대기하고 있어, 나는 갈데가 없었다.
전투경찰이 뜬금없이 하늘을 향해 최루탄을 발사한다.
지금 생각하면, 30명~50명 정도가 모여 구호를 외치는 연출된 시위에
리얼리티, 긴박감을 불어넣기위해 괜히 몇방 쏜거다.
소리만 나고 매운 연기는 거의 없는
공포탄에 가까운 최루탄을 하늘로 빵빵 쏜 것이다.
총소리가 나자 마치 격전지로 변한 듯 정문 앞의 시위대는 퇴각한다.
뒤로 쫓기듯 둔덕 위로 이동하면서 몇몇이 돌을 던지기에
나도 무심코 전투경찰을 향해 발밑의 돌을 하나 집어 던졌는데
경찰 발밑에 툭 떨어지는데 전투경찰 수십명 중대원들이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고,
아무런 반격도 안 하고 멀뚱히 서 있는거였다.
갑자기 시위를 주도하던 건장한 청년이 나에게 다가와
“우리는 비폭력 평화시위를 원하니 돌을 던지지 말라”고
나무라는 것이었다.
최루탄을 쏘길래 다들 흥분해서 돌을 던진 것이 아닌가?
조용히 하교하는 나를 갑자기 둘러쌀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몇몇이 돌을 던지길래 따라 했는데
마치 나만 던진 것처럼 또라이 취급을 받으니
이상한 느낌은 받았지만 연출된 상황이라는 것을 알리없었다.
곧 시위는 끝났고 나는 하숙집에도 못 가고
중앙도서관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얼마후 도서관 직원이 큰소리로 소문을 전달했다.
“대규모 경찰병력이 대학 구내에 진입해
곧 수색에 들어간다는 소문이 있으니
모두 귀가하는게 좋겠다”
몇몇 사람이 주섬주섬 가방을 싸기에
나도 가방을 꾸려 정문으로 가니 아까 내가 돌을 던진
그 전투경찰 부대원들이 문앞에 서서,
나가는 사람은 그냥 두고,
들어가는 사람은 신분을 통제하고 있었다.
5월13일,
소문이 돌기를 어제 내가 도서관에서
짐 싸들고 귀가한 후, 곧 정문이 닫혔고
경찰들이 대학 구내를 쌓쌓이 뒤져
운동권 본부가 될만한 사무실을 수색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부터
뒷산에서 밀어를 나누는 연인들까지
대학생이란 대학생은 학교를 불문하고 몽땅 잡아들여
죽지않을 정도로 두들겨 팼다는 것이다.
“시위는 내가 했는데, 엉뚱하게 교내에 남아 있던 연인들이
두들겨 맞았구나”하는 자각이 들면서 미안하더군.
내가 돌을 던지며 시위에 참여했다는 보고가 전달되며
신호탄이 되어 야당과 학생 운동권은 옆동네 이화여대로
본부를 옮기고 적극적으로 전체 대학의 시위를 기획한다.
학내 시위에서 교문 밖 시위로 발전시켜 나간다.
5월14일,
서울지역 27개 대학 총학생회는 학교밖 시위를 결의한다.
이화여대 안팎에서와 연세대 교문 밖으로 시위가 전개된다.
모든 수업이 휴강된 나도 구경 차,
길거리로 나왔다가 죽을 뻔한 경험을 했다.
신촌 굴다리 근처에서 이화여대 정문 사이.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며 순한 몸싸움을 하며
밀고 밀리는 공방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만 빠져 나가고 싶은데 뒤에서 누군가 자꾸 밀면서
경찰 앞 1m 앞까지 밀려가게 되었다.
그동안 얌전히 어깨 싸움만 하던 전투경찰이
순간, 내 눈 앞에서 방패와 곤봉으로 시위대를 찍어 내기 시작했다.
피가 사방으로 팍 튀며, 여자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피가 낭자한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학생들은 반대로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무력을 쓰는 이들이 없었고
평화적 시위로 밀기만 하고 있었는데,
내가 경찰 1m 앞까지 군중에 의해 밀려가자
마치 누군가의 신호에 의해
강경 진압이 시작된 느낌을 받아 소름이 돋더군.
다행히 동작이 날다람쥐처럼 빠른 나는
다친 데 없이 무사히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전 내가 엉겁결에 돌을 던지는 시위를 한후
핀잔을 듣고, 마음이 언짢았는데,
보고를 받은 신군부의 전술이 정리가 되고
막후대권자의 갈등 전략도 단계적으로 이해가 된다.
연출된 시위지만 이대호가 돌을 던지며 시위했다
===>보복으로 연세대 진입해 학내 시위의 본부 동아리 방을
압수수색하고 학생들을 구타해 겁을 준다
===>반발로 본부가 이화여대로 옮겨지고 학내 시위는 학교 밖 시위로 발전한다.
===>보복으로 이대호가 참여한 학교 밖 시위에서 폭력진압을 함으로써 겁을 준다
===>반발로 학교 밖 시위는 광화문(시내 거리)시위로 확산된다(언론이 도와준다)
===>보복으로 광화문(거리)시위는 차단된다(언론이 시위에 부정적으로 돌변한다)
===>반발로 시위는 지방으로 이동해 광주사태가 일어난다.
5월15일,
신촌 대학가의 교문 밖 시위가 막혀서 그런지,
학생들은 광화문, 종로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서울역에 10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운집해
가두 시위의 정점을 찍는다.
모든 언론이 거리 시위를 대서특필하며
학생들의 표정을 묘하게 보도했다.
보안사 검열을 받던 시국이니 기술적으로 살짝 집어넣었던 것.
나는 그날 현장르포 기사를 읽고 신기하게 여겼던 기억이 있다.
그날 언론은 이런 식으로 보도했다.
“학생들의 굳게 다문 입술과 표정은 결의에 차 있었다.
삐라를 든 학생들의 눈빛은 초롱초롱 빛났다”
언론을 주도하는 막후대권자의 협조가 없었으면
5월15일 서울역 10만 시위대의 운집과 격렬한 시위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대호의 시위 참여가
막후대권자의 갈등전략에 신호탄을 쏴준 셈이다.
(한 예로 전광훈,손현보목사를 필두로 광화문과 여의도를 중심으로
전국을 달궜던 윤대통령 탄핵반대 집회도 막후대권자가
헌재를 협박해 탄핵 인용을 하자,
더 이상 투쟁하지않고, 소리없이 사그라지는 것을 보면
언론을 주도하는 대권자의 역할이 시위의 성공 여부를 좌우한다고 볼 수 있다.)
이대호의 행보가 각 세력에 전달되면서
학생 시위가 강경 투쟁으로 전환될 것으로
판단한 신군부도 철저한 대비 계획을 짰을 것이다.
막후대권자, 한 사람의 양다리 전략임을 알리없는
신군부와 야당,운동권은 최선을 다해 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서울역에서 시위대가 모는 버스에
전투경찰 한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생겼는데
블랙요원이 투입된 신군부의 자작극임을 나는 확신한다.
조금 다친 것을 사망으로 발표,보도했을 수도 있다.
이 자작극 이후 언론은 시위의 과격성을 보도했고
여론은 신군부에게 유리해진다.
시위 학생 지도부도 나중에 패착으로 지적된,
그 유명한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다.
(지도부가 회군을 결정하기까지 영향을 준
전국 비상계엄 확대 소문은 막후세력의 작품이 당연하다.
신군부에는 확대를 건의하고,
운동권 지도부에는 확대를 슬며시 흘린다)
막후대권자의 갈등 전략이 성공한 셈이다.
5월17일,
소문대로 제주도까지 포함된 ‘비상계엄 전국 확대’가
국무회의를 통과해 발표되었다.
장관들은 임명권자인 막후인사권자의 조언에 따라
국무회의에서 행동했을 것이다.
전두환 한 사람이 최규하대통령과 장관들을
윽박질러 통과시킬 계제(階梯)는 아니었다.
5월18일,
하숙집에서 1분 거리 연세대 정문으로 가보니 경찰은 사라지고
레슬링 선수같이 거대한 체격의 특전사 병력이 탱크와 함께
총을 들고 서 있는데 휴교령이 내려졌음을 깨달았다.
언론의 부정적 보도와 계엄군의 위세에 눌려
서울을 비롯한 모든 도시에서 시위는 서서히 사그러지고
오직 광주에서만 시위가 새로 촉발되었다.
병주고 약주는 막후대권자
대권을 유지할려면 갈등전략을 쓸 수밖에 없는
막후대권자는 신군부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가자
야권인사와 운동권을 움직여 세력의 균형을 기했다.
설혹 시위대의 반격이 실패하더라도
군부의 새 대통령이 강경 진압으로 입을
치명적인 약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장은 막후대권자가 숨을 죽이고
부분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겠지만,
때가 되면 이 약점을 활용해
완전한 대권을 복원시킬 수있기 때문이다.
막후대권자의 원격조종으로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
1987년 박종철,이한열 두 대학생의
사망 사건과 6.10 시민항쟁으로
전두환대통령의 권력은 점점 더 약화되고
막후대권자는 완벽한 대권을 서서히 복원시켜 나간다.
탄핵시위와 6.10시민항쟁, 2002년 월드컵 응원의 유사점
1987년 6.10시민항쟁과 최근 탄핵시위를 보고
전 세계는 한국인의 저항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왜 북한에서는 이런 시위로 독재를 뒤집지 못하는가
하는 자책과 남한사람들의 저항의식을 부러워 하는
북한이탈주민들의 간증을 들으며 나 또한 국뽕에 빠질 때가 있었다).
과연 그럴까 ①
(지금 나는 2002년 월드컵대회 때 본 ’붉은 악마‘응원과
박근혜,윤석열 대통령 탄핵시위를 떠올린다.
직접 겪어본 사람들은 모두 신명나는 축제로 기억한다.
초중고생부터 넥타이 맨 직장인들까지 거리로 나와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며‘대한민국‘을 외치던
신명나던 한판의 축제.
사회 각 요소요소에 인사권과 재정권을 행사하던
막후대권 세력의 주선으로 언론과 정부기관 뿐만아니라
대기업,학교,영세상인까지 협조하는 분위기는 자발성을 띠고 있다.
많은 군중들이 강압적인 지시없이 모일 때 놀라운 힘이 발휘된다.
우리보다 훨씬 축구 인프라와 선수층이 거대하게 형성된
월드컵 공동개최국 일본은 그때 왜 우리나라처럼 신명나게 거리응원을 못하고
집에서 TV만 보며 우리나라를 부러워했을까?
거대한 여론을 조성할 수 있는 막후대권자와 막후비선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6.10시민항쟁에서도 넥타이 맨 직장인들이
박근혜,윤석열 탄핵 시위때처럼 축제를 즐겼을 뿐이다.
이한열이 얼굴에 맞은 최루탄을 보고도 그런 망발을 할수있냐구...
그 살벌한 5.18 직전에도, 장난치듯이 하늘에 대고 최루탄을
빵빵 터트리던 경찰이 5공화국 임기말 레임덕 상태에서
한번이지만 유독 학생들 얼굴을 대고 쏘다니 이상하지않은가.
과잉진압의 이미지를 심어주고,
민중의 힘으로 독재를 타파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거대한 상징조작일 뿐이다.
이한열은 재수없어 희생양이 되고 운좋게 열사,영웅이 된 것뿐.
당시 막후대권자는 때마다 언론을 통해
전두환정부의 과잉대응을 견제해 주고 정국을 요리해주고 있었다.
5공화국 말기가 일제 탄압 때 총칼에 맞서
3.1운동 할만한 망국의 상황도 아니었고,
경제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던 최호황기였다.
그냥 민주주의 축제를 즐겼을 뿐이다.
에필로그:우리는 흔히 1987년 6.10 시민항쟁이나
탄핵 시위에 대해 민중의 자발적 승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는 그 이면에서 여론을 조성하고
판을 짜는 거대한 조정자의 존재를 느낀다.
이한열 열사의 비극 또한 과잉 진압의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독재 타파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
희생된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당시 경제적 호황기였던 대한민국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 축제 뒤에는,
정국을 요리하는 막후 세력의 치밀한 계산이 있었다.
박근혜 정부가 권력의 정점에 달해
대통령의 임기가 절반이 되던 2015년 11월에
시작된 민중총궐기 때도 마찬가지다.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망 사건도 이한열처럼
희생양을 통한 이미지 구축이라는 가설이 적용된다.
현장의 우연성과 배후의 필연성 사이의 상관관계를 따져보자.
이한열 열사가 맞은 SY-44 최루탄은 곡사로 쏘게 되어 있으나,
당시 경찰은 이를 직사로 발사했다.
백남기 농민 사건의 물대포 역시 살수차 운용 지침을 어기고
근거리에서 머리를 향해 직사되었다.
공권력이 지침을 어기고 직사를 했다는 점은
분명한 과실이자 폭력적 진압이다.
이것이‘의도된 정밀한 타격'이었는지, 아니면
'과잉 충성 분위기 속에서 터져 나온 실수'였는지는
해석이 갈릴 수있다.
분명한 것은 두 사건 모두 정권에
비판적인 여론을 폭발시키는 결정적 계기(Trigger)가 되었다.
무고한 개인의 죽음이 시각적(사진, 영상)으로 공유될 때
대중의 도덕적 분노는 극에 달한다.
진압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실수'를 '정치적 기회'로 포착하여
언론과 시민단체를 통해 증폭시키는 방식은 고전적인 수법이다.
환자가 실려간 병원 의사나 내부에 잠입한 블랙 요원이
일부러 사고와 사망을 유도했다는 추측도 있다.
우발적인 과잉 진압으로 사고가 발생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순교자 서사로 만들어
정권을 몰아붙이는 전략이다
1. 경찰이 어리석게도 과잉 진압의 덫에 걸려들었고,
막후 세력은 그 실수를 놓치지 않고
거대한 민주화 축제의 제물로 삼았다고 봐도 좋고.
2. 당시 서울대 병원 의사들이 물대포는
사망 원인이 아니고, 지병이 있었다고 최초 보고했듯이,
다쳐서 병원에 실려가는 순간,
생사의 결정권은 막후세력의 손에 달려있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언론과 시민단체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을 '열사'로 추대하고, 그들의 죽음을 시각화하여
대중의 분노를 극대화시킨다.
1987년의 최루탄이나 2015년의 물대포나, 본질은 같다.
정국을 반전시키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강경 진압'이라는 프레임을 완성한 것이다.
우리는 깨달아야한다.
우리가 정의라고 믿었던 투쟁의 불꽃 중 상당수는,
누군가에 의해 정밀하게 설계된
'기획된 비극'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 희생 위에 세워진 민주화라는 금탑이
사실은 타인의 피로 칠해진
보이지않는 세력의 전유물은 아니었는지,
참담한 마음으로 되돌아보게 된다.
과연 그럴까 ②
5.18은 민주화 운동인가, 폭동인가, 내전인가
막후대권자란 존재가 없고,
실세 독재자가 나쁜 마음을 품었다면
북한 당국처럼,
미얀마 군부처럼,
캄보디아 크메르루즈처럼,
이란 하메네이 정권처럼
시민들을 무조건 대량학살했을 수도 있었고
그랬다면 우리나라도 3류 국가에 머물렀을 것이다.
1980년 광주에서도
시민(+불순분자)들의 무기고 탈취 후 내전 불사가 성공했다면
대한민국은 현 미얀마 내전 정국과
다를 바없는 상황으로 흘러 갔을 것이다.
똑같은 최빈국, 유랑 민족이 될 수도 있었다.
신군부가 북한이나 미얀마,이란,캄보디아 같은 수준의 강경진압을 했다면
그런 군부와 똑같은 수준으로 평가받았겠지.
광주시민들도 차별 받았다는 이유로 무기고 탈취하고
외세의 도움을 받아 내전으로 발전시켜 갔다면,
미얀마 반군과 다를 바없는 평가를 받았겠지.
북한, 미얀마,이란,캄보디아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조정능력이 있는
언론과 세계를 움직이는 막후대권자의 존재 때문이다.
이것이 하늘이 대한민국에 준 선물이다.
갈등전략은 쓰지만 치명적인 망국은 원치않는 막후대권자
언론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막후대권자가
갈등 전략만 쓰고, 국민들도 강대강 대치만 했다면
대한민국도 지금 미얀마,북한과 똑같은
지옥이 되지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신군부가 잘했니 못했니, 광주 시민들이 잘했니 못했니
하는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 운동이냐, 폭동이냐 따지는 것도 무의미하다.
나라가 망하고 난뒤 호칭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3.1운동은 적개심을 품을만한 일본에 대해 왜 비폭력 만세로만 했고,
5.18은 같은 민족끼리 총기탈취,시가전까지 가야했는가?
과연 5.18 당시 우리나라 상황이 일제 강점기나
북한,미얀마,이란,캄보디아 크메르루즈와 비교할 때
시민들이 총기탈취와 시가전을 불사할 상황이었는가?
대통령의 급서(急逝)로 국가적 안정을 기해야될 때라고
보는 것이 더 상식적이지 않는가?
동남아 국가들, 특히 미얀마보다 경제적으로 엄청 잘 살고
K-문화의 자부심으로 민족적 자긍심이 드높아진 대한민국 국민들이여.
우리는 절대 미얀마 내전 같은 식의 망국 사태는
겪지않는다는 자부심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우리나라가 미얀마 같이 처참한 내전에 빠지지않았던
이유를 묻는다면 한국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같다.
우리 민족은 자유 민주주의를 사랑하고 저항정신이 강하고
K-culture 에서 보듯이 똑똑하고 지혜로운 민족이라
절대 미얀마 같은 3류 국가로 전락할 수없다고.....
미얀마 국민은 자유 민주주의를 사랑하지 않을까?
미얀마 국민은 저항정신이 없는가?
미얀마 국민은 지혜롭지 않는가?
미얀마 군부는 나라를 안정시켜
국민들을 잘 살게 하고싶지 않았을까?
‘세계를 움직이는 막후대권’이라는 하늘의 선물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도 다른 민족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본다.
1945년 이전까지 한민족 형제자매였던 북한을 보면
우리는 겸손해지지 않을 수없다.
전 세계 200여 국가 중에 가장 야만적이고 폐쇄적인 나라.
국가라기 보다 거대한 수용소, 이단 사이비공동체에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는 나라가 우리의 분단 형제국이다.
1.북한보다 국민소득이 낮으나 덜 폐쇄적인 아프리카 후진국,
2.내전 중이나, 자유가 있는 양곤 시내에 지금도 관광객이 왕래하는 미얀마,
3.족벌세력이 국가의 땅과 부를 대부분 차지해
빈부격차가 극심한 동남아 몇몇 국가들.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이민가서
살고싶지않은 나라가 북한일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북한과 다른 나라라고
애써 외면하고 싶겠지만,
얼마 전까지 우리와 풍습이 같고,
같은 언어로, 같은 임금을 모시고,
같은 땅에서 살던 한민족 국가 아닌가?
남한 사람만 미얀마 사람보다 우등 민족이고,
북한 사람은 원래 열등 민족이었다고 주장할 수있겠는가?
북측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성공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이하
수많은 실향민 인재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영적으로 보면,
원죄는 이대호에게 있다.
만약 내가 시위를 극도로 혐오해
때마다 잽싸게 강의실로 도피했더라면
전국 대학생 시위가 동력을 받지 않게되고,
야당 인사와 운동권도 승산이 없음을 느껴,
광주사태는 일어나지 않게되고,
순리에 의해 막후대권자와 원로들이 신군부를 견제해
대한민국은 갈등과 상처가 없는
더 살기좋은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다른 민족과 차별화되는
우등 민족으로 자부해도 좋았을 것이다.
단, 지혜로운 견제에 실패한다면
전두환 세습왕조가 탄생할 수도 있었겠지만,
어차피 킹메이커 집단은 따로 있었고
막후대권자가 비밀리에 대권을 유지할려고
온갖 기획조정을 하는한
그럴 염려는 없었다고 본다.
결론==막후대권자가 나를 이용했던
갈등전략은 비난 받아야겠지만,
그 존재로 인해 미얀마 내전 같은 상태로 가진 않았기에
하늘이 대한민국에게 준 선물이기도 하다.
이글은 이대호의 부끄러운 참회록 2편이다.
(참회록 1편=71번째 글)
동시에 이대호의 의도를 왜곡해 가면서
막후대권자의 욕심을 채우는 공작(工作)을
그만 했으면 하는 경고문이기도 하다.
그런 취지에서 쓴글이 58번째글(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대권자와 이대호 간의 치밀한 두뇌게임)이었는데
이대호를 이용해 학생 시위를 강경 투쟁으로
발화시킨 이번 사례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