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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보령 60코스 역방향 제1부
깊은골 입구-이지함 묘-송학리-대천방조제-노둣길
20230809
1.토정 이지함의 실천과 대천방조제의 빛나는 풍경
서해랑길 61코스 역방향 탐방을 마치고서 기픈골마을 입구 오포리 오천해안로 이마트 앞 탁자에서 김치 사발면으로 아침을 먹었다. 아직 아침 6시도 되지 않았다. 토정로 '지픈골길' 입구 서해랑길 이정목과 '오포3리 지풍골' 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동녘 하늘이 붉은 아침노을로 물들어 있다. 붉은 노을을 향하여 서해교회 하얀 건물과 십자가가 손을 흔든다. 아침의 깨어남,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아침 풍경이다. 그곳에서 서해랑길 60코스 역방향 탐방을 출발한다. 탐방길은 주교면 고정리, 송학리, 은포리를 지나, 보령시 대천2동으로 넘어가, 보령시 대천5동 내항동, 남곡동, 신흑동 지역을 통과혀여 대천5동 신흑동 대천해수욕장 머드광장에서 마치게 된다.
보령시 오천면 오포리 ‘지픈골길’ 입구에서 지방도 제610호선 토정로를 따라 곧바로 주교면 고정리로 넘어갔다. 보령시 주교면(舟橋面)은 1989년 4월 1일, 주포면(周浦面)에서 분할, 독립된 지역으로, '주교면(舟橋面)' 지명은 ‘배다리’ 또는 ‘주교(舟橋)’ 지명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주교면 고정리(高亭里)는 행정리 고정1~2리로 구성되어 있고, 자연마을로 고만(高巒), 사당(祠堂)골, 조금진(造今津), 안산, 마동(馬洞) 등이 있으며, 한국중부발전 신보령발전본부, 신보령화력발전소 및 보령에너지월드 등의 주요 시설이 있다고 한다. 이제부터 보령시 주교면 해안의 송학리로 넘어갈 때까지는 고정리 지역을 걸어간다.
토정 이지함을 기려서 '토정로(土亭路)'라고 명명된 지방도 제610호선을 따라 국수봉 등산로 입구를 거쳐 언덕을 올라가면 보령식품 앞 고정 버스정류소에 이른다. 이곳은 해안에 보령 마동야구장, 그 북쪽에 보령 에너지월드 전시장이 자리하고 있는 고정리 마동마을 지역인 것 같다. 고정 버스정류소를 통과하여 토정로는 언덕을 완만하게 내려가는데, 동쪽은 산자락이고, 서쪽 해안 방향은 나무숲으로 전망이 막혀 있다. 잠시 뒤 서쪽 해안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오는데, 길은 쇠창살문과 울타리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지만 해안의 간척지와 서해바다가 조망된다. 양쪽이 꽉 막혀 있는 토정로를 따라오다가 아침빛이 물들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자 꽉 막혀 있던 체증이 뚫리는 것처럼 속이 시원해진다.
토정로를 따라 걸어가는 일은 대단히 위험하다. 인도(人道)가 없고 갓길도 없는 토정로를 산업용 대형 차량들이 질주한다. 토정로에서 차량을 피하느라고 계속 멈추면서 언덕길을 내려가면 해안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오는 곳에 고만 버스정류소가 있다. 이 지역이 고정리 고만(高巒) 지역이다. 왜 고만일까? 동쪽에 솟은 산을, '높은 뫼'라는 뜻의 '고만(高巒)'이라 이르는 것 같은데, 그래서 이 지역이 '고만(高巒)'이라 불리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토정 이지함 선생의 가족묘가 있는 고만산소(高巒山所)가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추정의 단서가 된다. 토정 이지함 묘 입구 토정로에서 충청남도 문화재 제320호 고만산소(高巒山所) 묘역으로 들어가면 입구에 넙적바위(薄石) 두 개가 놓여 있는데, 본래 연당 자락 바닷가에 있는 것을 이곳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넙적바위는 평평하게 넓어서 앉아서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다. 그 옆에 토정 이지함 선생 영정이 새겨져 있는 시비, 문화재 묘역 안내도, 이지함 선생 묘(李之菡 先生 墓) 설명안내판이 차례로 세워져 있다. 고만(高巒) 묘역은 선생과 그의 형제와 존비속의 14기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올라가 볼까, 그만둘까? 잠시 망설이다가 토정 선생의 묘로 올라갔다.
토정 선생의 묘는, 한산(韓山) 이씨(李氏) 제12세손(世孫) 아버지 찬성공(贊成公) 이치(李穉)와 어머니 광산(光山) 김씨의 합장묘 아래 맨 왼쪽에 있다. 부인 완산(完山) 이씨와 합장되어, 묘비에 ‘토정선생이공지묘 공인완산이씨부좌(亭先生李公之墓 恭人完山李氏俯左)’라고 적혀 있다. 토정 선생 묘 앞에서 내려 보니 보령 송학도 앞 바다가 보인다. 이곳이 과연, 토정 선생이 말한 대로 명당일까? 1532年(中宗27)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토정 선생은 이곳이 명당이라고 지정하여 아버지 묘를 이곳에 옮겨 어머니와 합장하였으며, 뒤에 형제와 조카 등 가족 묘지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후손에서 영의정과 이조판서가 배출되었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문하에서 수학한 실학자로서 아산현감으로 부임해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걸인을 구조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호하였다고 한다. 실학 정신을 실천한 성리학자 토정 선생이 명당이란 이름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후손들의 부귀영화를 바라는 가족묘 고만산소(高巒山所)를 조성한 것은 모순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토정 선생이 실학 정신을 철저히 실천하는 성리학자의 길로 나가지 못한 당대의 한계라고, 식견 좁은 길손은 생각한다. 그 연장선에서 토정 선생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토정비결(土亭秘訣)>에 대하여 의문이 생긴다. 조선 말기에 토정 선생의 이름을 빌려 위작된 <토정비결>이 험난한 시대를 맞이하여 민중들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이 책은 숙명론적 인생관에 편승한 허무맹랑한 미신이자 점술 서적이다. 당대의 시대적 한계를 지닌 토정 선생이었지만, 성리학자 토정 선생이 이런 허무맹랑한 책을 결코 쓸 수는 없다. 그래서 조선 말기의 <토정비결(土亭秘訣)>은 토정 선생의 <토정비결>과는 전혀 다르다고 판단할 수 있다. 토정 선생의 <토정비결>은 윤리적인 실천 강령이나 도덕률을 모은 교육서라고 보아야 하는데, 사라졌다.
고만산소(高巒山所) 묘역 입구로 내려와 토정 선생의 시를 읽어 본다. "청강은 맑기도 한데 흰 갈매기 기슭에 있고/ 갈매기는 희기도 한데 청강 기슭에 있네./ 맑은 강물은 갈매기의 흰빛을 싫어하지 않으니/ 갈매기는 길이 청강에 있으리." 청강의 맑음과 갈매기의 흰 빛, 영원히 맑은 푸름과 순수함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토정 선생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 뒷면에 토정의 문하생으로 임진왜란 때 호서(湖西)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의병장(義兵將) 조헌(趙憲, 1544~1592)의 추모시가 토정의 삶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큰어른 모시고 먼 길 다닐 때/ 사는 날까지 조심하라는 말씀/ 오늘 다시 왔지만 만날 수조차 없네./ 딱하다 백성들 살필 방법 누가 후에 말할는지."(조헌의 '보령 가는 길에 토정 선생을 생각하다' 전문) 토정 선생은 큰어른이다. 어려운 백성들을 구휼하고 현실을 개혁하려고 한 선각자이다. 그가 가족의 명당을 지정하여 조성한 것은 시대의 한계이지만, 현재 전해지는 점술서인 <토정비결>은 선생의 저작이 결코 아니라고 길손은 판단한다.
고만산소(高巒山所)에서 나와 토정로를 따라 돌아가면 고정리 사당골 지역이다. 이곳에 한산 이씨 찬성공파 종중회관 '고만재(高巒齋)'가 있는데, 찬성공파(贊成公派)는 한산(韓山) 이씨(李氏)의 분파이며, 제12세손(世孫) 찬성공(贊成公)(휘諱, 치穉)은 토정 이지함 선생의 선친으로, 세 아들을 두었다. 고만재 앞에 찬성공파의 중심인물인 찬성공과 그 자제들의 신도비 및 묘갈비가 세워져 있다. 한산 이씨 찬성공파 혈족들이 자랑스럽게 조상을 받들고 있는 모습을 보며 가문의 명성도 없고, 개인의 영달도 이루지 못한, 빈한한 가문의 길손은 토정로를 따라간다. 사당골 버스정류소에서 신보령화력발전본부가 있는 송도라고 불리는 송학도로 들어가는 츨입구가 있다. 이번 서해랑길 탐방을 통해 무지한 탐방객은 화력발전소 중심지가 보령 지역임을 알게 되었다. 관념적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 현장의 모습을 통해 알게 되니, 길은 걷는 자의 것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송학천 배수갑문 입구에서 길게 따라온 지방도 제610호선 토정로와 헤어져 송학천 제방길로 진입한다. 송학천 하구 지역이 특이하다. 송학천 서쪽 바다로 돌출한 고정리 지역의 곶(串)은 그 끝에서 송학도와 아주 가까이 마주보고 있으며 그 사이로 송학천과 바닷물이 만난다. 송학천 서쪽 고정리 곶(串)의 중간 지점과 송학천 동쪽 언덕을 잇는 제방을 쌓아 고정리 지역은 제방 안쪽에 드넓은 간척 농지가 조성되고 바닷물은 밀물 때 제방까지 올라온다. 이 제방이 아니라면 바다는 송학도와 고정리 사이 안쪽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어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 모양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바다를 막은 송학천 제방 배수갑문교를 건너 고정리 들녘 길로 나갔다. 밝은 태양이 온누리를 비추어 눈부시다. 벼들이 고정리 들녘을 푸르게 물들이며 반짝인다. 아침 7시가 안 된 시각, 여름 태양은 뜨겁게 내리쬐며 벼들은 서로 몸을 부대끼며 무성하게 자란다. 고정리 간척농지를 돌아 바다로 돌출한 고정리 곶(串) 등으로 올라가면 보령 앞 바다가 활짝 열린다. 원산도와 대섬, 대천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태양은 아직 바다를 끓이지 못하여 바다는 코발트색으로 빛난다. 아침 바다는 자신을 정화하고 있는 듯 파란 남색(藍色)은 투명하게 맑아서, 길손 또한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풍경 속으로 잠입한다.
고정리 곶(串) 등을 걸어서 '대천방조제로'로 나와 왼쪽 언덕의 뷰티풀씨하우스 앞을 통과하여, 주교면 고정리에서 송학리로 넘어간다. 언덕을 올라 숲길로 들어가기 전 뒤돌아서면 송학천 입구에서 고정리 푸른 들녘을 빙 돌아서 이곳으로 걸어온 길이 환하게 보인다. 송학천 입구에서 헤어진 토정로는, 서쪽으로 '대천방조제로'를 갈래치고 자신은 남쪽으로 내려가는 고정교차로가 고정리 들녘 동남쪽에 보인다. 서쪽에는 바다가 열려 있고 길게 누워 있는 원산도가 눈에 들어온다. 소나무 우거진 언덕이 좋다. 아침 태양이 점점 뜨거워지는데 이곳에서 그냥 머무르고 싶다. 잠시의 생각일 뿐, 탐방의 목적에 얽매인 길손은 방랑자가 되지 못하고 길을 바삐 이어간다. 언덕 숲길을 지나면 동쪽에 봉대산이 솟아 있고 그 아래 마을과 저수지가 자리한다. 저곳이 송학초등학교가 있는 송학1리 마을이다. 산고내길은 송학1리 마을과 송학2리 마을을 이어주는 길인 것 같다. 산고내길을 따라 송학2리 안산 고내마을을 지나간다. 그런데 '산고내'라는 뜻이 무엇일까? 그 지명을 알아보니 산고내는 송학리 대동(大洞) 남쪽 마을인데, 마을 돌산에 사람의 뼈가 상했을 때 약재로 쓰는 돌(산골)이 있다 해서 산고래 또는 산고내(散古乃)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 그렇구나. 산고내길을 따라 '대천방조제로'로 내려오니 송학2리 마을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옛날에 소나무가 울창하여 학이 서식하였으므로 송학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그런데 송학2리는 안산 고내마을과 발산 고내마을로 나뉜다. 송학2리 구릉지 북쪽은 안산 고내, 그 남쪽은 발산 고내 지역이 된다.
이제부터 ‘대천방조제로’를 따라가며 서쪽 보령 바다를 감상한다. 아침 7시 드넓은 보령 바다 건너편 대천항에서 대천천 상류로 이어지는 해안선을 바라보며 가슴은 환하게 밝아진다. 대천항 북쪽 바다에는 대섬과 원산도가 떠 있는데, 대천항과 원산도는 해저터널로 이어져 있다. 활짝 열린 이 풍경은 가슴에 실오라기 걱정도 날려 버려서 평화의 마음이 된다. 고요와 평화가 흐르는 풍경을 감상하며 걷다가 뒤돌아보면 송학도 신보령발전본부가 하얀 건물로 말쑥하게 솟아서 호텔 건물처럼 멋지다. 그리고 원산도와 태안군 안면도를 잇는 원산안면대교의 흰 주탑 2개가 분명히 확인된다. 새벽 3시 서해랑길 61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하면서 오천면 소송리 해안에서 까만 어둠 속 안면도의 불빛을 가늠하며 아쉬워했는데, 남쪽 송학리 해안에서 안면도 끄트머리 다리라도 볼 수 있게 되어 그 아쉬움을 달랜다. 송학선착장이 있는 송학3리 마을 입구 설명안내판에는 송학3리를 황금 바지락 마을이라 이르고 있다. 송학선착장 앞 바다는 황금 바지락 어장이어서 이렇게 부르는 것 같다. 또 토정 이지함 선생이 생재구민(生財救民)을 위하여 고개를 넘어 고만(高巒)을 경유, 서해안 일대를 왕래하였기에 이 고개를 지함재라 부른다고 적혀 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도 토정 이지함 선생의 면모를 재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는 그의 실천적 현실 개혁 정신을 분명히 보여준다.
대천방조제는 송학3리 마을 앞에서부터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 은포리를 거쳐 보령시 대천2동, 대천1동까지 이어진다. 방조제 아래는 대천천방조제로가 방조제와 평행으로 따라간다. 주교배수갑문 아래 대천방조제 2교를 건너 방조제 제방길로 올라갔다. 보령시 대천동과 주교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송학3리 마을 북쪽에 우뚝한 봉대산이 동쪽으로 벋어 태봉산을 솟구친다. 이 산줄기 남쪽과 대천방조제 동쪽으로 간척농지가 푸른 비단으로 펼쳐져 있고, 서쪽에는 호수 같은 고요한 바다가 파란 비단으로 반짝인다. 봉당천은 방조제에 갇혀 수로로 이어져 주교배수갑문으로 흘러가고, 서해안고속도로가 간척농지를 가로질러 대천천을 건넌다. 제방길 정면으로 남쪽 옥마산 산줄기가 북쪽으로 성주산으로 벋어가고 동북쪽에 오서산이 보령 최고봉으로 자랑처럼 솟아서 빛난다. 오서산 남쪽으로는 진당산과 배재산 산줄기가 이어지며 봉당천을 흘려보낸다. 이 풍경에 감동하여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꽃봉오리 같은 소중한 순간을 가슴에 더 담는다. 탐방길의 모든 순간은 꽃봉오리 순간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펴야 하지만 순간을 놓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순간을 지나고 나서 후회한다.
서해랑길은 지금까지 걸어오던 방조제길과 헤어져 서해안고속도로 대천2교 아래서 대천천 노둣길을 건너 대천5동 내항동 왕대산 자락으로 넘어간다. 노둣길을 건너려 하는데 바닷물이 밀려와 벌써 노둣길이 잠겨 있다. 마을 주민 한 분이 건너기 위험하니 대천천 위쪽으로 우회하여야 한다고 일러준다. 만조시 우회안내도를 살피니 우회거리는 6.1km, 대천천 노둣길을 건너면 60코스 시점까지 7.9km이지만 우회할 때는 6.1km가 늘어나 14km 거리가 된다. 시간이 문제다. 지금이 아침 8시, 남은 14km를 제한 시각 오전 11시 30분에 맞춰 대천해수욕장 머드광장에 도착할 수 있을까? 길손의 체력으로는 어려울 것 같다. 위험하지만 노둣길을 건너가 보자. 그러나 어림없는 일, 노둣길을 건너가다가 밀려오는 바닷물에 건너기를 포기하고 제방으로 올라왔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 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 때 그 사람이/ 그 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정현종(1939~)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전문>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23.5km 중 9.33km
전체 소요 시간 : 5시간 11분 중 2시간 13분
토정로의 오천면 오천3리 지풍골 표석 앞에서 서해랑길 60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한다. 아래는 서해교회 건물이다.
지방도 제610호선 토정로를 따라 오천면 오포리에서 주교면 고정리로 넘어가 깊은골 버스정류소 앞을 통과한다.
'토정로'의 '지픈골길' 입구 '오천면 오천3리 지풍골' 표석 앞에서 출발하였다.
국수봉 등산로 입구를 거쳐 지방도 제610호선 '토정로'를 따라간다.
지방도 제610호선 '토정로' 보령식품 앞 고정 버스정류소를 통과한다. 이곳은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마동마을인 것 같다.
토정로를 따라가다 서쪽으로 열려있는 곳에서 서해 바다를 조망한다. 아래는 간척지로서 고정국가산업단지에 속하는 것 같다.
토정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고만 버스정류소 앞에서 뒤돌아보았다. 왼쪽 길은 고정리 고만 해안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토정로의 토정 이지함 묘 입구에서 왼쪽 토정 선생의 묘 주차장으로 진입한다.
충청남도 문화재 제320호 고만산소(高巒山所) 묘역을 살핀다.
두 개의 넙적한 바위가 묘역 입구에 놓여 있는데 본래 연당 자락 바닷가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文化財 墓域으로서 一名 高巒山所이다. 1532年(中宗27) 壬辰年 土亭 先生이 母喪을 當하자 名堂으로 擇地하고 韓山에서 先考墓를 옮겨 合葬하였으며 후에 兄弟 子姪 등 家族墓地로 造成되었다. 土亭 先生이 擇地할 때 말하기를 우리 三兄弟는 己亥年에 貴得子하고 後孫 중 一品職이 나오겠다고 한 바 과연 己亥年(1539年)에 長兄인 省菴公은 鵝溪相公(諱 : 山海)을, 仲兄 議政公(諱 : 之茂)은 鳴谷公(諱 : 山甫)을, 土亭公은 忠義衛公(諱 : 山斗)을 各各 得男하고 當代에 領議政(諱 : 山海), 史曹判書(諱 : 山甫)를 輩出하였다.
고만(高巒) 묘역은 선생과 그의 형제와 존비속의 14기 묘소가 위치하고 있는데, 토정 선생의 묘는 왼쪽 가장자리에 있다.
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되어, 묘비에 ‘토정선생이공지묘 공인완산이씨부좌(亭先生李公之墓 恭人完山李氏俯左)’ 글자가 적혀 있다.
중앙은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 송학도, 왼쪽은 주교면 송학리 해안, 그 건너편은 대천항 해변이다.
왼쪽부터 이지함 선생 묘(李之菡 先生 墓) 설명안내판과 사진, 묘역안내도, 선생의영정이 그려진 한시비, 넙적바위가 있다. 토정 이지함 선생 묘 입구로 나가 토정로를 왼쪽으로 따라간다.
이 지역이 고정1리 사당골인 듯. 왼쪽에 한산 이씨 찬성공파 종중회관 '고만재(高巒齋)'를 잠깐 보고서 토정로를 따라간다.
찬성공파는 한산 이씨의 분파이며, 韓山 李氏 第12世 贊成公(諱 : 치穉)은 토정 이지함 선생의 선친으로, 세 아들을 두었다. 고만재 앞 비석들은 찬성공파의 중심 인물인 찬성공과 그 자제들의 신도비 및 묘갈비이다.
송학도의 고정국가산업단지 신보령발전본부 진입로가 사당골 버스정류소 오른쪽에 있다.
토정로 사당골 버스정류소 앞에서 뒤돌아보았다. 왼쪽은 송도 신보령발전본부로 이어지는 송도길, 정면에 고만재가 보인다.
고정리 사당골 버스정류소에서 계속하여 토정로를 따라간다.
서해 바닷물이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사당골 지역까지 파고 들어온다.
서해랑길은 지방도 제610호선 '토정로'와 헤어져 오른쪽 길로 진입한다. 왼쪽은 고정2리 감적골 지역인 것 같다.
왼쪽에 송학천 배수갑문이 있으며 오른쪽은 송학도 입구에서 들어오는 바닷물이다.
왼쪽은 보령시 주교면 고정2리 감적골마을, 송학천이 고정리 들녘을 가로질러 내려온다. 중앙 왼쪽의 고정교차로에서 지방도 제610호선 토정로는 위쪽으로 올라가고 대천방조제로가 오른쪽으로 돌아나간다. 고정교차로 위쪽은 고정1리 지역인 듯.
서해랑길은 오른쪽 길을 따라 고정리 마을과 중앙의 연립주택을 거쳐 중앙 왼쪽 펜션 건물이 있는 '대천방조제로'로 나간다.
왼쪽은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 곶(串), 오른쪽은 송학도이며 그 사이로 송학천이 바다로 흘러드는데, 배수갑문에 막혀 있다.
대천방조제로 850-1012길을 역방향으로 따라간다.
지방도 제610호선 '토정로'와 헤어져 대천방조제길로 진입하여 고정리 들녘을 돌아서 마을을 거쳐가고 있다.
대천방조제로 850-1012길 고정리 마을에서 바다로 돌출한 곶(串) 뒤쪽에 원산도를 확인한다.
왼쪽에 대섬, 그 뒤에 대천항, 오른쪽에 원산도가 확인된다. 대천항과 원산도는 해저터널로 이어져 있다.
대섬과 그 뒤 대천항이 확인된다. 보령시 신흑동 대천항으로부터 왼쪽 남곡동으로 이어지는 해안선과 바다가 아름답다.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대천방조제로 850-1012길을 따라가며 주교면 송학리 해변과 건너편 보령시 남곡동 해안을 조망한다.
대천방조제로 850-1012길을 따라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마을을 거쳐 '대천방조제로'로 나간다.
왼쪽 대천방조제로 850-1012길을 따라와서 '대천방조제로'로 나와 뒤돌아 보았다.
대천방조제로에서 원산도를 바라본다. 오른쪽 송학리 곶(串) 뒤쪽에 송학도와 고정국가산업단지가 있다.
대천방조제로에서 왼쪽 언덕 위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 뷰티풀씨하우스 앞으로 이어간다.
고정리에서 송학리로 넘어와 뷰티풀씨하우스 앞을 거쳐 힐하우스 앞을 지나간다.
산고내길을 따라 숲길 고개를 넘어 송학2리 마을로 내려간다.
중앙 뒤 송학천 입구에서 대천방조제길로 진입하여 마을을 거쳐 중앙 왼쪽 뒤 연립주택을 거쳐왔다. 앞쪽은 고정리 들녘이며, 오른쪽 고정교차로에서 왼쪽 대천방조제로와 위쪽 토정로가 갈라진다. 아래쪽은 고정2리, 위쪽은 고정1리 지역이다.
'대천방조제로'로 나와서 언덕의 뷰티풀씨하우스와 힐하우스를 거쳐 이곳으로 올라왔다. 바다에 원산도가 길게 펼쳐져 있다.
산고내길을 따라 숲길 고개를 넘으면 서쪽으로 풍경이 열리고 서해 바다의 원산도가 길게 누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산고내길에서 북동쪽을 바라보면 봉대산이 솟아 있고 송학저수지가 보인다. 이곳은 송학초등학교가 있는 송학1리 마을이다.
위쪽은 산고내샛길,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꺾어 산고내길을 따라 송학2리 안산 고내마을을 통과한다.
산고내길을 따라 안산 고내마을을 지나간다. 그런데 '산고내'라는 뜻이 무엇일까? 산고내는 송학리 대동(大洞) 남쪽 마을인데, 마을 돌산에 사람의 뼈가 상했을 때 약재로 쓰는 돌(산골)이 있다 해서 산고래 또는 산고내(散古乃)라고 부른다고 한다.
태극기와 보령시 깃발이 게양되어 있는 곳은 어디일까? 송학2리 안산 고내마을 경로당일까?
산고내길을 따라 대천방조제로 안산 고내마을 출입구로 내려간다. 건너편은 보령시 대천항 신흑동과 남곡동 해안이다.
안산 고내 버스정류소가 '대천방조제로' 건너편에 있으며, 바다 건너 맞은편에 대천항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산고래하늘공원이 있다고 하는데 모르고서 지나쳤다.
마을연혁 :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송도리, 대동, 산고내를 병합하여 송학리라 하였다. 옛날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여 학이 서식하였으므로 송학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주포면 주교출장소가 주교면으로 승격된 후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이 통합,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로 되었다.
송학2리 마을을 지나 왼쪽 '송학리 마을 안내판' 앞으로 나와 대천방조제로를 따라 남진한다.
기계 설비공사 시공·제작업체인 BK(주)와 소방 시설업체인 (주)보령소방 앞을 거쳐 대천방조제로를 따라간다.
서해랑길 60코스 시작지점인 대천해수욕장은 대천항 뒤 낮은 구릉 뒤에 있으며, 보령시 신흑동 대천항으로부터 왼쪽 남곡동으로 보령시 해안선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대천방조제로를 따라 송학2리 마을 표석이 있는 곳을 거쳐간다.
대천방조제로 송학2리 지역에서 바다를 조망한다. 지나온 BK(주)와 (주)보령소방이 오른쪽에 있다. 바다에는 왼쪽에 대섬, 그 뒤에 원산도가 길게 북쪽으로 올라가 안면도와 만난다. 원산도와 안면도를 잇는 원산안면대교 하얀 주탑이 오른쪽 뒤에 보인다.
송학2리는 안산 고내마을과 발산 고내마을로 나뉘는 것 같다. 구릉지 뒤쪽은 안산 고내, 그 남쪽은 발산 고내인 것 같다. 맨 왼쪽 뒤에 원산안면대교 흰 주탑 2개가 보이고, 그 오른쪽 앞에 송학도 고정국가산업단지 시설물들이 보인다.
송학2리 발산 고내마을 입구에 주교어촌계 수산물 산지 가공시설이 있다.
중앙 뒤에 봉대산이 솟아 있다. 그 왼쪽 북쪽 아래는 송학1리 대동, 서쪽인 이곳은 송학2리 지역 발산 고내마을이다.
카페 포르투나 앞을 거쳐 대천방조제로를 따라 남진한다.
대섬이 앞에 있고, 원산도가 길게 북쪽으로 뻗어 태안군 안면도와 이어진다. 중앙에 원산안면대교 흰 주탑 2개가 보인다. 오른쪽에는 주교면 송학리 송학도 고정국가산업단지의 신보령화력발전본부 흰 건물이 솟아 있다.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는 보령시 신흑동 대천항과 해저터널로 이어져 있다.
보령시 신흑동(新黑洞) 대천항에서 왼쪽 보령시 남곡동(藍谷洞)으로 해안이 이어지고 있다.
대천방조제로를 따라간다. 바다 건너 중앙 오른쪽의 낮은 해망산을 경계로 왼쪽은 남곡동, 오른쪽은 신흑동 지역이다.
대천방조제로를 따라오다가 뒤돌아보았다. 송학2리 안산 고내마을 출입구 앞에 BK(주)와 (주)보령소방 건물이 분명히 보이고, 그 뒤 왼쪽 해안 언덕에 산고래하늘공원이 가늠된다. 중앙 맨뒤에 보령화력발전소, 중앙 왼쪽에 신보령화력발전본부가 보인다.
댜천방조제로를 따라 송학3리 마을로 진입한다. 바다 건너편 중앙 왼쪽 높은 산은 옥마산, 중앙 해안의 산은 왕대산이다.
보령시 주교면 송학3리 송학선착장. 건너편 중앙 왼쪽의 해망산을 경계로 오른쪽은 보령시 신흑동, 그 왼쪽은 남곡동이다.
송학3리 마을 입구에 마을 안내도 및 마을 역혁과 지암재 유래에 대하여 설명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1.마을연혁 : 백제(百濟) 시대엔 신촌현(新村縣), 신라(新羅) 시대엔 신읍현(新邑縣), 고려(高麗) 시대엔 보령현(保寧縣)에 속했었다. 조선(朝鮮) 시대에도 보령현에 속했으며 조선 말엽엔 보령군(保寧郡) 주포면(周浦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송도리(松島里), 대동(大洞), 산고내(散古乃)를 병합하여 소나무가 울창하고 학이 서식하였음으로 송학리(松鶴里)라 하였다. 이후 1995년 보령시 주교면 송학리로 되었다.
2.지함재 유래 : 이 고개는 조선 중기 명현 토정 이지함 선생(1517~1578)이 생재구민(生財救民)을 위하여 이곳을 통하여 고만(高巒)을 경유, 서해안 일대를 왕래하였다 하여 예부터 지함재라 부르고 있다.
60코스 종점 6km, 시점 11.2km 지점이다.
봉당천이 대천방조제에 가로막혀 수로를 따라 흘러와 주교 배수갑문을 통해 바다로 흘러든다. 대천방조제(大川防潮堤) 2교를 건넌 뒤 대천방조제로를 가로질러 제방길로 올라간다.
제방길에서 뒤돌아 본다. 오른쪽 봉대산 왼쪽에 주교면 송학3리 마을이 자리한다. 봉당천이 수로를 따라 흐른다.
송학3리 마을이 오른쪽에, 송학선착장 방파제가 왼쪽에 있다. 바다 왼쪽에 대섬 및 그 뒤 원산도, 안면도가 가늠된다. 송학도의 신보령발전본부 흰 건물이 호텔 건물 같다.
뒤쪽의 원산도는 북쪽으로 뻗어,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게 이어져 내려온 안면도와 원산안면대교로 이어진다. 원산안면대교 흰 주탑이 보인다. 오른쪽에는 송학도에 신보령발전본부 흰 긴물이 솟아 있다.
오른쪽 대천항 뒤 낮은 구릉 뒤에 대천해수욕장이 있으며, 대천5동 신흑동과 남곡동 해안이 길게 이어져 있다. 중앙 왼쪽의 해망산에서 대천5동은 신흑동과 남곡동으로 구분되는 것 같다.
제방길을 따라 남진한다. 왼쪽에 성주산, 중앙에 옥마산, 그 아래 보령시청이 있을 것이며, 제방길 정면에 왕대산이 보인다.
봉당천 수로 뒤쪽은 은포리(隱浦里)의 간척농지이다. 왼쪽 맨 뒤의 산은 보령의 최고봉 오서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중앙 왼쪽 뒤에 태봉산, 왼쪽 앞에 봉대산이 솟아 있으며, 봉대산 오른쪽 아래에 주교면 은포리(隱浦里) 지역이 펼쳐져 있다. 오른쪽 맨 뒤에 오서산이 가늠되며, 그 앞의 산은 진당산과 배재산 산줄기일 것이다.
봉대산이 늠름하다. 그 왼쪽 아래에 송학3리 마을, 봉당천은 수로를 따라 주교 배수갑문을 통하여 서해 바다로 흘러든다.
봉당천은 대천방조제에 가로막혀 수로를 따라 서해로 유입된다. 은포리 간척농지가 드넓고, 왼쪽 맨 뒤에 오서산을 가늠한다. 오서산 앞쪽의 산줄기는 진당산과 배재산 산줄기라고 추정한다.
봉당천은 대천방조제에 의해 수로를 따라 흘러내린다. 중앙 왼쪽 뒤에 옥마산(玉馬山), 중앙 앞에 왕대산이 확인된다.
오른쪽 옥마산 산줄기가 중앙의 성주산으로 굽이치고 봉당천(鳳堂川) 이 흘러내린다.
주교배수장 동쪽으로 봉당천이 흐르고 그 뒤쪽에 은포리 간척농지가 펼쳐져 있다. 왼쪽 맨 뒤에 오서산, 그 앞쪽에 진당산과 배재산 산줄기를 가늠한다. 오른쪽에 성주산이 있으며, 성주산 남서쪽 자락에 통일신라 후기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의 성주사(聖住寺)가 있었으나 폐사되었다.
오른쪽 앞 왕대산(王臺山) 중턱에 왕대사가 있다. 왼쪽 뒤에 성주산, 중앙 오른쪽에 옥마산이 솟아 있는데, 그 아래 명천동 지역에 보령시청이 있을 것이다. 대천천을 가로지르는 서해안고속도로 대천2교가 앞에 보인다. 해안의 돌탑이 정성스럽다.
보령시 주교면 은포리에서 보령시 대천2동으로 넘어왔다. '대천방조제로' 오른쪽에 주교면 경계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보령배수장 오른쪽에 신대천이 흐르고, 중앙 뒤쪽의 산줄기는 진당산과 배재산 산줄기일 것이다.
대천방조제 제방길 신대천배수갑문 앞에서 '대천방조제로'로 내려간다. 중앙은 옥마산, 왼쪽은 성주산(聖住山)일 것이다.
'대천방조제로' 신대천배수갑문교를 건너 '대천방조제로'를 따라간다.
보령시 주교면 신대리(新垈里) 봉황산 자락에서 발원하여 신대천(新垈川)이라 이르는 것 같다. 중앙 뒤는 배재산일 것이다.
보령분뇨공공처리시설이 신대천 남쪽 보령시설관리공단 직전에 있다.
보령시설관리공단이 왼쪽에 그 위쪽에 보령시생태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서해란고속도로가 보령시 대천2동 간척농지 들녘을 가로지르고 있다.
'대천방조제로' 횡단보도를 건너 서해안고속도로 대천2교 아래 제방길로 오른다.
대천방조제 제방길과 '대천방조제로'가 길게 이어져 있다. '대천방조제로'에서 제방으로 올라왔다. 멀리 원산도가 보인다.
바다 건너 중앙 대천항에서 대천5동 해안이 길게 이어진다. 왼쪽 하얀 호텔은 대천5동 내항동과 남곡동의 경계이다.
보령시 내항동 왕대산이 누에처럼 누워 있고, 그 중턱에 왕대사가 자리한다. 대천천을 가로지르는 서해안고속도로 대천2교와 그 아래 대천2동과 내항동을 잇는 노둣길이 밀물에 잠기고 있다.
서해랑길은 서해안고속도로 대천2교 아래 대천천 노둣길로 이어진다.
대천천 하구 만조 때는 방조제 제방길을 따라 동진하여 대천1동으로 올라가 대천천 인도교를 건너 대천3동으로 넘어와서 대천천 남쪽 제방길을 따라 서진하여 대천천 노둣길 남쪽 내항동으로 내려와야 한다.
건너편 왕대산이 대천천 하구를 지키고 있다. 대천천 노둣길을 건너면 60코스 시점까지 7.9km이지만 우회할 때는 6.1km가 늘어나 14km 거리가 된다. 노둣길을 건너가다가 몰려오는 밀물에 포기하고 우회하기로 한다.
대천천 노둣길로 대천천을 건너지 못하고 고행의 길로 우회하며 노둣길을 내려본다. 대천천 하구 바다가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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