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민중과 학생의 피의 궐기 4.19에 의해 정권을 잡은 제2공화국 민주당정부는 구파 김도연·윤보선·김영삼 세력과 신파 장면·박순천·김대중 세력으로 분열되어 권력주도권 다툼만 할 뿐, 국민들에게 무능 이외에 보여준 것이 없다. 장면 총리는 국가적 위기의 본질을 잘 몰랐으며 그에 대처할 위기관리 능력도 없었다. 부정, 부패, 폭력, 혼란 온갖 사회악이 뿌리깊이 잠재해 있었으며, 자유당정부의 붕괴로 데모 만능사조가 풍미, 사회질서는 더욱 혼란의 수렁에 빠졌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암시장, 실업자가 급격히 늘어났으며 결국 장면정권의 지지기반이던 도시중산층이 등을 돌렸다.
이때에 박정희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1961년 5월 16일 뜻을 같이하는 젊은 군인들과 군사혁명을 단행했다. 민주당 정권의 무능으로 혼란과 표류에 지친 윤보선 대통령과 국민들은 ‘올 것이 왔다’며 환영했다. 朴正熙는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로 가는 교두보 확보를 위한 행정적 민주주의의 실천, 경제적으로는 근대화를 위한 경제적 악순환의 시정과 자립경제기반 구축, 사회적으로는 구조의 근본적 개혁을 통한 부정부패 일소, 조국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한 국민기풍의 쇄신, 그리고 외교안보에서는 국제협력 증진과 ‘선건설, 후통일’ 기반 조성 등을 5·16혁명의 목표로 삼았다.
朴正熙와 경제철학
“폭우가 쏟아지는 야반 0시. 그때 나는 서재의 일우에 앉아 붓을 멈추고, 멍하니 비에 젖어가는 밤의 가로를 내다보고 있었다, 문득 저 거리로 뛰어나가 내 재주로 저 비를 막거나, 아니면 저 비 때문에 수없이 울고 있을 동포와 더불어 이 밤을 지새우고 싶은 격정을 느꼈다. 5천년을 하루같이 시달려온, 피곤한 민족이 모처럼 일어서려는 비장한 이 마당에, 다시금 하늘은 시련을 내리다니. 그러나 우리는 일어서야 했고 이 고비를 싸워 넘어서야 했다.”
-1963년 7월 하순, 박정희의 일기
박정희의 어린 시절은 가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의 가난이 ‘빈곤 추방’이라는 통치철학을 형성한 것이다. 그는 전국에 밤나무 등 유실수를 심도록 독려했다.
박정희는 소년시절부터 자립생활을 몸에 익혔다. 그만큼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일생에 큰 교훈이 되었다. 환경은 그로 하여금 많은 것을 깨우치게 했고, 그의 결의를 굳건히 다져주었다. ‘가난’은 그의 스승이었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 한국의 건설’이 그의 소망이었다.
박정희가 이룩해놓은 경제발전은 ‘성숙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었으며, 이를 가능케 하는 절대조건이었다. 그의 경제철학은 경제발전이 국가안보와 통일의 기초가 된다는 것, 경제발전은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18년간의 통치기간에 1인당 국민소득을 87달러에서 일약 1,650달러로 끌어올림으로써 부정할 수 없는 ‘한국 경제기적의 주역’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1945년 이후 독립한 세계의 130여 개국 가운데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이다. 척박한 한반도에서 대통령과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만들어낸 피와 땀의 결실이다. 일본은 100년, 미국은 180년, 영국은 200년이 걸린 국민소득 1만 달러 달성을 우리는 30년 만에 해냈다.
중국의 덩샤오핑,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 파키스탄 무샤라프 대통령 등 아시아의 여러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박정희 경제모델을 벤치마킹하여 국가경제를 일으키려 노력했다. 그들 모두 박정희를 가장 존경스럽고 본받을 지도자로 꼽았다.
덩샤오핑은 박정희의 외교·경제정책을 본받아 실사구시 전략을 구사, 미국과 협조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을 다국적 기업들이 가장 선호하는 투자지역으로 만들었다. 이를 위해 천안문사태 때 탱크군단을 동원, 민주화를 열망하여 광장에 운집한 100만 학생시민에게 발포하여 2천여 명을 사살, 1만 2천 명의 부상자를 내는 참사를 빚었다. 그러나 오늘 중국인들은 그를 천하대란에 빠진 나라를 구한 은인으로 추앙한다.
리콴유는 국민의 인권·언론을 통제, 길거리에 휴지 한 장을 버려도 곤장 20대, 마약소지자는 사형 등의 무시무시한 형벌로 국민들을 통치, 싱가포르를 아시아 최고의 부국으로 만들었다.
장제스, 장징궈는 1949년 중국 공산당에 밀려 대만으로 후퇴한 뒤, 국민정부를 다시 세워 1987년까지 38년간 계엄령 하 1당 독재정치를 펼쳤지만, 경제우선 정책으로 대만의 발전을 이끌었다. 국민들은 이들을 독재자라고 비난하지 않았으며, 나라를 구하고 일으킨 은인으로 추앙하고 존경한다.
朴正熙와 새마을운동
박정희는 유달영이 쓴 ‘새 역사를 위하여’를 읽고, 실의에 빠진 덴마크를 부흥시켜 국부로 추앙받는 국민운동가 그룬트비와 달가스에게 크게 감동받았다. 이에 영향 받은 그는 농민들에게 근면·자조·협동 정신을 각성시키고 이를 실천하는 ‘새마을운동’을 일으켜 한국 농촌 부흥의 결정적 요인을 만들었다. “빈곤을 자기의 운명이라 한탄하면서 정부가 도와주지 않아 빈곤 속에 있다고 책임을 미루는 농민은 절대 일어설 수 없다. 의욕 없는 사람을 지원하는 것은 국가적 낭비이다. 국가도 게으른 사람은 도울 수 없다.” 박정희는 나태한 농민을 꾸짖고 부지런한 농민은 격려하면서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앞장서서 이끌었다.
그는 새마을운동 초기 환경개선 사업에서 점차 소득증대 사업으로 초점을 이동시키며, 농가소득 향상과 비농업소득 증진 등 두 가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1965~69년 기간 중 정부가 도시중심의 공업화 정책에 주된 관심을 기울였을 때, 농가 소득은 도시가구 소득에 비해 증가율이 1/4에 불과했다. 그러나 높은 곡물가격 정책을 채택하고 새마을운동을 위해 집중적인 투자를 했던 1970~76년 기간 중 도농간 상황이 뒤바뀌어 도시가구 소득이 4.6% 증가한 반면, 농가 소득은 9.5%나 높아졌다. 새마을운동을 통한 농·공 병진 발전전략이 없었다면, 1970년대 한국의 중화학공업화 노력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朴正熙와 중화학공업 유신선언
우리 사회에 팽배해진 무질서와 비능률, 국가적 사명감도 잊은 채 당리당략 권력투쟁에만 몰두하는 정치권과 정당들의 작태에 박정희는 크게 탄식했다. 과연 그들에게 국가적 과업을 맡길 수 있느냐고 국민들에게 반문했다. 그는 자유를 방종과 혼돈하지 말 것, 질서와 기강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독재라고 비난하지 말 것, 파쟁과 갈등을 민주주의로 착각하지 말 것 등을 주창했다.
1972년 박정희는 유신을 선언한다. “북한과 대치한 어려운 여건 하에서 중화학공업을 일으켜 민주주의를 성장시켜 나가려는 고심의 일단이다.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고 그 속에서 국가의 독립과 국민의 자유·번영을 추구해 나가자는 우리 나름의 고심작이다.” 그는 민주주의라는 이상적인 목표보다는 경제개발이라는 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했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유신체제는 민주주의, 근대화, 국가안보라는 3대 국가목표를 적절히 조화시킨 체제라고 생각했다.
중화학공업화 프로그램은 북한에 대해 전면적 우위를 차지하고,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박정희의 비전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굴하지 않는 강력한 정치적 뒷받침을 필요로 했다. 중화학공업화의 주역인 박정희· 김정렴· 오원철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상당한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유신체제, 특히 박정희가 제도화한 ‘대통령 직접지시’, 정부지원특혜, 정부지급보증 체제는 박정희와 그의 테크노크라트들이 정부 주도 중화학공업화의 강력한 추진 도구 역할을 했다. 사실 많은 한국 테크노크라트들은 박정희가 쥔 막강한 힘의 기반이었던 유신체제가 국가의 근본적 목표, 즉 부강하고 공업화된 국가 건설을 달성하고 대미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획기적인 공업 구조 개혁을 시행하는 데 절대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그 신념을 자부했다.
朴正熙와 리더십
남북 간의 대반전은 저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박 정권은 끊임없이 미국을 압박해 군 현대화 지원자금을 끌어들이면서 국방과학연구소 설립(1970년), 5개년 군 현대화계획(1971~76년), 율곡사업(1974년) 등을 밀어붙였다. 무엇보다도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을 하나의 패키지로 추진해, 군도 현대화하고 나라도 ‘근대공업국가’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유신체제는 한국이 고도 경제성장을 위해 치러야 했던 큰 대가였다. 중화학공업과 유신개혁 ― 두 축은 서로 떼어놓고 말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하나였다. 하나 없이 다른 하나는 존재할 수 없었다. 한국이 중화학공업에 성공한 것은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계획이 그의 이상대로 정확하게 시행되도록 국가유신체제로써 뒷받침되고 강력히 훈련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유신혁명이 없었다면, 한국의 중화학공업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신헌법은 내용이나 구조면에서 서구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다분히 ‘비민주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1970년대 한국 정치를 어려움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朴正熙의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기초를 만들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朴正熙에게 유신과 중화학공업 양날의 선택은 온몸을 바치는 혁명가의 비장한 결의였다.
세계는 박정희를 탁월한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다. 피터 드러커는 한국을 “부존자원이 없는 상태에서 교육 강조와 확산을 통해 성공적으로 산업사회에 진입한 대표적 국가”로 평가했다. 1999년 8월 미국의 주간지 ‘타임’은 그를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20세기 아시아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20명 중 하나로 뽑았다. 국민들은 진정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그의 강력한 애국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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