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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3월 19일 월요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요셉 성인은 유다 지파로 다윗 가문에 속했다. 그는 마리아와 약혼하였는데, 마리아께서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시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몰랐던 요셉은 고뇌하지만 천사의 인도로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었다. 요셉 성인에 대한 공경은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1870년 비오 9세 교황은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고, 비오 12세 교황은 5월 1일을 ‘노동자들의 수호자 성 요셉 축일’로 제정하였다. 요셉 성인은 성모 마리아와 더불어 한국 교회의 수호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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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마태오 1,16.18-21.24ㄱ)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your wife into your home.
For it is through the Holy Spirit
that this child has been conceived in her.
She will bear a son and you are to name him Jesus,
because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When Joseph awoke,
he did as the angel of the Lord had commanded him
and took his wife into his home.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축복의 말씀을 내리신다. 나탄은 주님께서 다윗의 후손을 일으켜 세우시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제1독서). 아브라함은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굳게 믿었기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우리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제2독서).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난다. 의로운 요셉은 마리아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그러나 요셉은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협력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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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을 기르신 요셉 성인의 축일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혼인과 가난한 가정, 말 못하며 감당해야 했던 요셉 성인의 삶의 무게를 헤아려 봅니다. 오늘의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글 “아버지는 누구인가”를 실어 봅니다.
아버지는 기분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학교 성적이 자기가 기대한 만큼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도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 있는 사람이다./ ……./ 아버지가 아침마다 서둘러 나가는 곳은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이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용과 싸우러 나간다. 피로와, 끝없는 업무와, 스트레스이다./ ……./ 아버지는 자식을 결혼시킬 때 속으로는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뒤에,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 뒷동산의 큰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큰 이름이다.
요즘 많은 아버지가 힘들어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자녀들 교육비는 점점 늘어만 가는데 가정의 경제 사정은 전보다 더 어려워졌습니다. 직장에서 경쟁은 날로 치열해지고 젊은 사람들이 자꾸 뒤쫓아 옵니다. 퇴직 후의 노후 생활도 걱정거리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들의 시름은 늘어가고 주름은 깊어만 갑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아버지는 뒷동산 큰 바위 같은 이름입니다. 지치고 힘들게 살아가는 아버지들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힘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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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성인의 일생에는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약혼 시절 그는 약혼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놀람과 번민 속에서 조용히 헤어지리라 다짐합니다. 그는 착한 남자입니다. 하지만 그의 고뇌는 은총을 받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마음을 정한 그날 밤, 천사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알려 줍니다. 이후 요셉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됩니다. 자신의 역할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성모님과 함께, 아기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 박사의 방문을 받습니다. 그 자리에 어떤 모습으로 계셨을까요? 아버지이면서 아버지가 아닌 모습으로 계셨을 것입니다. 이후 성가정은 헤로데의 학살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나자렛으로 돌아와 삽니다.
요셉 성인은 성가정에 반드시 계셔야 할 분입니다. 그런데도 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꼭 필요한 분이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았습니다. 아름다운 겸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모든 교회는 그분을 수호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성가정을 수호하였듯이 우리 교회도 보호해 주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에는 요셉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미 운명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분의 죽음에는 분명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함께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에게 주어진 당연한 위로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살다 간 분이 요셉 성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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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성인은 착하고 순박한 사람입니다.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았을 때 가만히 헤어지려 했습니다. 약혼녀가 자신도 모르는 아기를 가졌다면 당황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조용한 해결을 선택합니다. 그러한 결단이 있기까지 얼마나 고뇌했을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늘 고뇌와 함께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고뇌는 은총이었습니다. 아픔을 통해 성숙해지라는 하느님의 배려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임마누엘’은 자신을 비우고 상처받고 포기한 뒤에야 깨달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또 다른 모습의 요셉입니다. 고뇌 없이 아버지가 되고 남편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라도 고통을 두려워하면 의심이 생기고, 편한 것만 추구하면 이기적으로 바뀝니다.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옹졸한 남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훌륭한 남자는 자신을 감출 줄 아는 남자입니다. 그러면서도 있어야 할 자리에는 꼭 있는 남자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살아가는 남자입니다. 요셉 성인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봅니다.
순결한 성 요셉
-전삼용신부-
한번은 신자분들과 식사를 하는데 환갑 가까운 나이의 자매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행사 때 주임신부님과 손을 잡을 일이 있었는데 주임 신부님이 손을 잡기를 거부했어요.”
그 자매님은 그것이 기분 나쁘셨던 것입니다. 주임 신부님은 그래도 젊으신 편이었는데도 자매들과 손을 잡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은 신부님과 수녀님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봅니다. 아마 정결해야 한다는 교육을 너무 강하게 받으신 것 같습니다.
일부러 손을 잡으려 하지 않는 이상 잡아야 할 때는 스스럼없이 잡는 것이 더 정결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이전에는 서로 옷을 입고 있지 않더라도 부끄러움을 몰랐던 것처럼 더 정결해 질수록 그런 것에 더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오늘 요셉 축일이라 무엇을 쓸까 고민하던 중,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요셉 세례명을 가진 한 신부님께 당신은 요셉 성인의 어느 면이 좋으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 신부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요셉 성인은 엄청 불쌍해요. 아내도 빼앗기고... 그래도 잘 받아들이며 사신 것이 불쌍하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오늘 복음에서도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결혼의 꿈에 부풀어있는 한 건장한 남자에게 이 말은 어쩌면 평생 한 번밖에 가질 수 없는 결혼의 행복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오히려 행복해합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약혼한 마리아가 사촌 엘리사벳의 집에 다녀왔을 때 배가 불러오는 것을 보고는 크게 배신감을 느꼈다가 비로소 그 진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결혼해서 부부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의 아내가 주님 것이 된 것이 기쁘고 아내를 의심하여 파혼하기로 결심했던 자신이 미워질 뿐입니다.
요셉은 그 신부님 말처럼 아내를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마리아와 요셉만큼 금실 좋은 부부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육체적 관계만 갖지 않았을 뿐이지 부부간의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요셉은 상대를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더 관계가 깊어짐을 아셨습니다.
요셉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고 요셉의 말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그 분은 교회의 원형인 성모님과 교회의 신랑인 그리스도를 지켜주셨기 때문에 ‘교회의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인들 중 유일하게 전례력에서 한 달, 즉 삼월이 그 분께 봉헌되었습니다.
그 분이 이렇게 큰 성인일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큰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저도 결혼해서 신혼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어요.’ 혹은 ‘제가 왜 그런 고생을 해야 해요?’라고 주님의 뜻을 거부하셨다면 다른 순결한 마리아의 배필을 찾기는 어려우셨을 것입니다.
큰 분들은 이렇게 자신의 즐거움을 아버지의 뜻을 위해 버리시는 분들입니다. 자신의 즐거움을 찾으려면 아버지의 뜻을 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주님의 뜻을 품을 수 있는 큰마음이 바로 순결함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순결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으셨던 것처럼 요셉도 당신의 순결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순결함보다도 요셉의 순결함이 더 고귀하게 느껴지는 것은 두 분은 원죄가 없이 순결한 분들이셨지만 요셉은 원죄가 있고 성욕도 있는 우리와 정말 똑 같으신 분이셨는데도 위의 두 분처럼 모든 것을 품을 줄 아셨기 때문입니다.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순결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의 뜻을 거슬러 죄를 지었던 이유는 순결하지 않아서입니다. 오늘 원죄가 있으셨던 분 중 가장 순결하셨던 요셉 성인의 축일을 맞아 우리도 그 분처럼 정결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분께 간구를 청하도록 합시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의 수용
-남상근 신부-
꿈에 부풀어 새로운 출발을 기대했던 요셉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랑스러운약혼녀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덜컥 가진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마리아를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기에 조용히 남모르게 파혼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마음을 바꿉니다. 꿈에 나타난 천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일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위해서는 이렇게 한 남자, 요셉의 엄청난
갈등과 번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얼토당토않은 상황을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요셉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 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그의 수용을 통해 이제
하느님의 새 역사가 놀랍게 펼쳐지게 됩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믿음이 결정적으로
발휘되어야 하는 순간은 바로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상황,
기대하지도 않았고 나의 계획에는 들어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상황 안에서도 여전히 하느님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좋은 일 안에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면 반쪽짜리입니다.
궁지에 몰린 순간에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자, 그가 진짜입니다.
신적인 의로움
-김찬선신부-
의로움은 남성의 덕
사랑은 여성의 덕이라 해도 좋겠지.
그렇기에 반대로
독선은 남성의 악덕
질투는 여성의 악덕이라고 해도 될까?
의로움이 남성의 덕이라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을 특별히 의롭다 추어줄 이유가 있을까?
사랑-이해적인 여성에 비해
남성이 사리-판단적이고
그래서 남성이 여성보다 더 의로움을 중시하고
의로움에 강점이 있다 해도
모든 남자가 다 의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진리를 지향하고 진리를 수호하며
진리에 순응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에는 진리를 저버리게 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 것이 人情입니다.
인정에 끌리어 우리는 의로움을 잃기도 합니다.
잘 아는 이의 딱한 사정을 봐주다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두 번째 것이 욕심입니다.
누구 때문이 아니라 자기 욕심 때문에 진리를 저버리는 경우입니다.
욕심에 눈이 멀면 진리가 보이지 않고 진실도 왜곡합니다.
그러므로 의로우려면 이런 인정과 욕심을 칼처럼 잘라내야 합니다.
그러나 욕심은 과단성 있게 잘라내야 하지만
사랑마저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냉정할 필요는 있어도 무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정함과 사랑 없음은 가장 큰 불의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부합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지만
최고의 진리는 사랑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도 사유화하지 않고
진리도 사유화하지 않을 때
우리는 최고의 진리 안에서 사랑하고
최고의 사랑으로 진리에 의합함으로
신적인 의로움에 도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성 요셉은
이 신적인 의로움에 가까이 다가간 남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왜 요셉을 의롭다 하는가?
- 이정배 목사-
세상에 주연만 있고 조연이 없다면 이 세상은 살벌한 장소가 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기에 주연만큼이나 조연의 역할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조연들이 있을 때 주인공의 역할이 더욱 빛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노자 도덕경도 이 점에서 천한 것의 귀함을 알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지요. 골짜기가 깊으면 산은 높고, 짧은 것이 있어야 긴 것이 있다는 도덕경의 상반상성(相反相成)의 원리는 그래서 성경과 많은 부분 같은 뜻을 보여줍니다. 성경 속에 단 한 번의 대사도 없으나 그 없이는 그리스도 탄생 자체가 불가능했던 요셉을 중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의 첫머리에는 ‘누가 누구를 낳고’로 시작되는 지리한 족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부터 이어지는 족보는 아버지 요셉이 아니라 어머니 마리아로 이어짐을 눈여겨보았을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 외에도 타마르, 라합, 룻과 같은 여인들의 이름이 족보에 올라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요셉과 같은 의로운 사람의 이야기는 이들 여인들 이야기 곁에는 없지요. 오직 요셉이란 인물이 마리아 이야기와 함께 전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마리아의 약혼자인 젊은 청년으로서 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많은 세월 준비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여인이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역사를 위해 사랑하는 여인을 택하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거룩한 신비적 사건이 사랑하던 여인에게서 일어났던 것이지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요셉은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마리아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내어 줄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 신비를 볼 수 있었고 알아차릴 수 있던 요셉은 분명 예사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성 요셉 대축일을 지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일상사를 돌아보아도 요셉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뭇 사람이 사회 곳곳에 있습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그림자 역할로 만족하며 하느님을 섬기며 세상에 봉사하는 존재들로 인해 세상이 이만한 거겠지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나무들이 있지요. ‘나무’란 ‘내〔我〕가 없다〔無〕.’는 뜻이라 합니다. 나무의 본질 자체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생각해 보시면 되겠지요. 우리는 ‘나무’와 같은 존재로 살아야 할 뿐 아니라 그렇게 살고 있는 분들을 존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로 인해, 그들의 덕분으로 우리가 온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새벽을 열며
- 조명연신부-
어제 어떤 분으로부터 “50대 여성에게 꼭 필요한 네 가지가 무엇인지 알아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뭐가 필요할까?’를 생각했는데, 제가 남자라 그런지 딱히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더군요. 꼭 필요한 네 가지는 ‘돈, 건강, 친구, 딸’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특이한 것은 바로 ‘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질문도 하시네요.
“그렇다면 50대 여성에게 꼭 필요 없는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50대 여성에게 필요 없는 한 가지는 글쎄 ‘남편’이라고 하네요. 경제력이 없어지는 50대의 남편이 이제는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 “50대 남편에게 꼭 필요한 다섯 가지는 무엇일까요?”를 생각해보세요. 저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돈, 명예, 친구, 자녀, 아내를 떠올려 보았지요. 그런데 정답은 이것이라고 하네요.
“마누라, 집사람, 와이프, 아내, 부인”
힘이 점점 없어지는 남편에게 아내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이들이 내 가까이 있는 사람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지요. 마냥 내 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섣부른 판단과 단죄를 자주 하며, 이로써 상대방에게 지우기 힘든 아픔과 상처를 남기곤 합니다. 하긴 고해성사를 듣다보면 ‘남을 미워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 그 대상은 멀리 있는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주로 내 곁에 있는 사람,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가족 안에서 그 미움의 감정이 가득 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우리의 가정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당신의 모범을 통해 가르쳐 주시는 것 같습니다. 즉, 그는 미움으로써 가정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아기를 가진 약혼녀를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그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는 말을 하는데, 과연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요셉 성인은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하신 말씀,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는 말을 그대로 따릅니다.
사실 꿈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꿈에 직장 그만 두고 모든 재산을 팔라고 하면 그대로 따르겠습니까? 개꿈 꿨다고 하면서 기분 찝찝하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꿈대로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으로 마리아를 믿을 수 있었고, 요셉 성인은 성 가정을 만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들의 가정 안에서 내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 이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으로 불가능한 것도 가능할 수 있으며, 이 사랑으로 모든 아픔과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이제는 내게 가장 가까운 가족을 받아들이십시오. 우리 가정 역시 나를 통해서 성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가족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 보세요.
요셉의 꿈
-김종기신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꿈에 관해 생각할 때면 동시에 구약 성경의 야곱의 아들
요셉의 꿈이 생각납니다. 구약 성경의 요셉은 이집트에서 파라오 왕의 꿈을
해몽함으로써 왕의 신뢰를 얻어 최고 통치자로서 영예를 누렸습니다.
또한 야곱 가족은 요셉 덕분에 흉년에도 잘 지낼 수 있었고 마침내 이집트에서
평안히 부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약혼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사실을 알고 의심과 갈등으로 괴로워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꿈에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입니다.
구약 성경의 요셉이 형들로 인해 미움과 시련을 겪고 그 후 하느님께서
꿈을 통해 이끌어주셨다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신앙의 시험을 거친 후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다양한 아픔과
갈등으로 인해 신앙의 위기를 겪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신앙의 위기를
맞을 때 쉽게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많은 일 때문에 염려하고 힘겨워하며 생활하고 있는 우리는
이제 인류 구원을 위해 성모님과 함께 충실히 살았던 요셉 성인의
믿음과 신앙을 본받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함께 기도하면···
-서효경 수녀-
성경에서 의로움 또는 정의는 관계의 충실함을 뜻한다. 요셉의 의로움은 먼저 마리아와의 관계에 충실함으로써 마리아를 살리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인 하느님과의 관계에 충실하여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요셉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마리아를 믿었다. 관계의 의로움은 신뢰로 표명되며, 이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교포사목을 할 때 자주 출근길에 있는 미국인 성당에 들러 성체조배를 하곤 했다. 1년 6개월 전 대장암 수술을 받은 남동생 요셉의 간에 또다시 두 개의 종양이 발견되어 재수술을 받아야 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은 뒤라 기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께서 남동생과 가정을 지켜주셔야 제가 이곳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 교포사목에 충실할 수 있으니 남동생을 살려 달라고 기도했다.
성당 제대 쪽에 모셔져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성화 앞에서 남동생을 위해 기도하면서 갑자기 큰 성당을 꽉 채우는 듯한 메시지를 느꼈다. ‘너희가 함께 기도하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그 후 우리 가족은 각자 삶의 자리에서 남동생을 위한 묵주의 9일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고, 그렇게 묵주의 54일 기도를 두 차례 바쳤다. 그 후 동생이 병원에 갔더니 대장에서 간으로 전이된 동전만한 크기의 종양 두 개가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금 동생은 건강한 몸으로 살고 있으니 ‘너희가 함께 기도하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는 이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하는 것이다.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은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신다. 성령으로 잉태된 말씀이 사람이 되시기까지 삶이 곧 기도가 되셨던 성 요셉과 성 마리아처럼 우리 역시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 위해 성령의 은총을 지속적으로 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 이상 마음을 합해 기도할 때 더욱 큰 능력을 드러내신다. 가족이 함께 두 손을 모은다면 우리 가정사는 바로 구원사가 되어 저마다 하느님의 영광을 비추는 성가정이 될 것이다.
성 요셉 대축일에...
-오상선신부-
오늘은 들은 우스개 소리 하나를 해야겠다.
천국의 문지기인 베드로 사도가 고민에 빠졌다.
언제부턴가 천국 살림이 빠져나가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셈을 해보아도 자꾸만 식량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며칠을 지켜보면서 문제를 찾아본 결과 답이 나왔다.
요셉이라는 녀석이
자꾸만 연옥에 있어야 할 위인들을
때도 되지 않았는데
몰래 천국으로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요셉을 불러서 나무랐다.
천국 살림을 생각지도 않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한번만 더 그러면 천국에서 추방하겠노라고 엄포를 놓았다.
아니, 그런데도 자꾸만 살림이 부족한 것이었다.
요셉이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연옥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명이 아니라 무더기로 말이다.
베드로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게 되었다.
그래서 요셉을 불러서 천국에서 나가라고 하였다.
요셉은 두말하지 않고 천국문을 나섰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더니만
<여보, 얘 데리고 나와!>
하는 것이었다.
요셉 성인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지만
예수님과 성모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신 분이라는 사실만이라도 기억하자.
우리 또한
예수님과 성모님과 가까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요셉의 전구가 필요하리라.
그리고
임종자들의 주보이신 성 요셉을
오늘 특별히 기억하자.
그리고
오늘 임종하는 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연옥에서 단련받고 있을 영혼들을 위해
성 요셉의 전구를 겸손되이 청해봄이 어떨까?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김기욱 신부 -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먼저 오늘 축일을 맞으신 많은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 안에서 복된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요셉 성인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마리아의 남편이며, 예수님의 양부이십니다. 마리아와 예수님과 더불어 성가정의 모범을 보여주신 성인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요셉 성인이 이러한 호칭과 존경을 받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기 때문입니다.
착하고 성실했던 요셉은 자신과 약혼한 마리아가 결혼 전에 임신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몰래 파혼을 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일러줍니다. 그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니,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요셉은 천사의 말에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말을 듣고, 그것을 실천한 요셉의 행동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믿음이 그 첫 번째이며, 두 번째로는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용기있는 행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집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또한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앙으로 고백하며, 그분을 하느님 아버지로 모시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 믿음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에는 나약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믿고 바라고 희망하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나의 삶 안에서 실천하는 것에는 인색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매일 듣고 묵상하고, 그분께 간절한 우리의 소망을 담아 기도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그 말씀을 통해서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을, 나의 삶 안에서 실천하는 것에는 부족한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고, 다른 사람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세상의 것들에 더 마음을 두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이 믿는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믿는 바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모범으로서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질 때, 그것을 나의 말과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제 2 독서의 말씀처럼 아브라함은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그 말씀에 온전히 의탁하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내가 가지는 욕심과 세상에서 오는 유혹들로 인해서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게 됩니다.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을 삶으로 증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돌보아주시고, 당신께로 향하고자 하는 당신 자녀들을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희망입니다. 우리가 하루 빨리 죄에서 벗어나 당신께로 돌아오고, 빛으로 향해 나아가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부족한 작은 기도와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큰 열매를 맺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요셉 성인의 축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을 되새기며,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키우신 요셉 성인
-경규봉 신부-
성경 안에서 요셉 성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마태오복음 1-2장과 루카복음 1-2장에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기록되었을 따름이다. 요셉 성인은 다윗의 후손으로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에서 목수 일을 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요셉 성인에 대한 공경은 동방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서방 교회에서는 아일랜드의 웬거스 펠리르에 의하여 9세기에 성 요셉 축일을 기념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셉 신심이 널리 퍼진 것은 1479년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가 로마(Rome)에 요셉 신심을 도입한 이후,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1515-1582)와 성 프란치스코 드 살(1567-1622)에 의하여 보편화되었다.
1870년에 교황 비오 9세는 요셉을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으며, 교황 레오 13세는 가장의 모델로 선포하면서 성인들 가운데서 성모님 다음의 지위로 올렸다. 교황 베네딕투스 15세는 ‘노동자의 수호자’, 교황 비오 11세는 ‘사회정의의 수호자’란 칭호를 부여하였고, 1955년에 비오 12세는 5월 1일을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을 제정하였다.
복음에 기록된 요셉 성인은 먼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다(마태 1,19). 여기서 법이란 율법을 말하므로 요셉은 하느님의 법을 충실히 지키며 사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으며(마태 5,17-18), 율법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고(마태 22,37-39), 사랑을 새 계명으로 주셨다(요한 13,34). 또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법에 충실한 사람임을 가르쳐주셨다.
그러므로 법대로 사는 요셉은 마음속에 사랑을 간직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율법에 얽매여 법조문을 글자 그대로 지키기 위하여 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는 자신과 약혼한 마리아가 함께 살기도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나자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사람이라면 마리아를 율법(신명 22,23)에 따라 처벌했을 것이다. 법을 어긴 사람은 법대로 처벌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율법에 따라 마리아를 처벌하는 대신에 마리아와 파혼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마리아가 처벌받지도 않고, 마리아가 원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알고, 마음속에 그 사랑을 담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마리아를 사랑으로 배려해준 것이다.
또한 성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이었다. 그는 마리아와 파혼하려고 마음먹었으나 꿈에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자, 천사의 말에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는 신앙인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꿈을 통해 많은 계시를 내리시기도 하지만, 이를 알아듣고, 믿고 따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모든 것을 해석하고, 자신이 편하고 이롭다고 생각하는 편으로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계시를 듣고도 이를 무시하거나 등한시한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나 결정을 따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가까이 나가지 못하곤 한다.
하느님께 가까이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성인은 꿈에 받은 계시에 순종하여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꿈에 받은 계시에 따라 예수님과 마리아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했으며, 또한 자기 나라로 돌아왔다. 그는 이처럼 계시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성인은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아기 예수님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았을 때, 성인은 이 소명에 충실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때까지 마리아를 충실히 보호했다. 만삭이 된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에 갔을 때 여관에는 그들이 머물 방이 없자, 성인은 외양간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는 것을 묵묵히 도왔다.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하였으며, 해마다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다니면서 예수님이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심을 가지도록 이끌어주셨다. 이처럼 성인은 아기 예수님이 구세주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는 당신의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남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겸손한 삶을 살았다.
오늘 성 요셉 대축일을 지내면서, 요셉 성인의 삶을 묵상하자.
하느님의 법에 충실하여 마음속에 사랑을 가득 담고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 묵묵히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면서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키워준 신앙인, 그리하여 세상을 구원하는데 일익을 담당한 신앙인이 곧 요셉 성인이었음을 생각하자.
우리 가정의 자녀가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되고, 또 하나의 구세주가 될 수 있도록 성인을 본받고, 성인처럼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참 신앙인의 전형과 모범이신 성 요셉
-이기정 신부-
오늘은 성모님의 정배이시며 예수님의 양부이신 요셉성인의 삶을 기리고 본받는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요셉 대축일인 오늘 복음말씀으로서 예수님의 탄생 경위와 함께 대림의 현장에서 구세주의 길을 가장 충실히 예비한 두 구원의 주역이며 협력자이신 성모님과 요셉성인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의 잉태 소식을 접한 요셉성인의 태도와 처신은 세상의 많은 문제들 앞에서 인간적인 감정과 세상의 논리로만 반응하고 대처함으로서 많은 일을 그르치는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의 잉태 소식을 접한 요셉성인의 반응과 태도는 감정적이고 인간적인 판단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우선하는 판단이고 처신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잉태 소식을 접한 요셉성인께서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바로 모든 문제들 앞에서 사랑으로 대처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보다 상대의 처지와 입장을 먼저 헤아리고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한 잉태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은 자신의 생각을 거두고 천사가 일러 준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모습에서 자신의 생각과 입장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과 섭리에 기꺼이 응답하는 참 신앙인의 전형과 모범을 봅니다. 이렇게 요셉성인은 문제들 앞에서 믿음으로 반응하고 처신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요셉성인이라면 어떤 반응과 처신을 했겠습니까? 진정으로 구원에 협력하는 자세를 보였겠습니까? 미련하리 만치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누군가가 해야 할, 꼭 필요한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의 모습 속에서 세상의 희망을 발견하며, 참 삶의 의미와 보람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연극에 있어서 주연이든 조연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배역을 맡든 필요한 때 필요한 역할을 충실히 완벽하게 해내는 연기자가 가장 훌륭한 배우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역할보다는 남의 자리를 넘보며 주연만을 고집하는 세태 속에서 묵묵히 맡겨진 역할에 충실하시는 요셉성인의 삶이 더욱 돋보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역할이 빛이 나고, 생색이 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는 그 일의 중요성과 상관없이 도가 지나칠 정도의 열성과 성의를 보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지만 내가 드러나지 않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에는 아무리 그 일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꼭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인 우리의 모습임을 봅니다.
정작 얼굴을 비춰야 하고 꼭 필요할 때에는 없고, 필요 없을 때 얼굴을 내미는 생색내는 기회주의적인 신앙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상황과 처지가 좋든 나쁘든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 해야될 역할을 묵묵히 충실히 해 내는 꿋꿋한 신앙의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요구됩니다.
요셉성인께서는 아무에게도 누구로부터도 주목받지 못하면서도 세상의 평가나 인간들의 평판에 관심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역할과 사명에 충실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반응하고 처신하심으로써 구원의 충실한 협력자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요셉성인의 삶의 모범을 본받아, 자신에게 맡겨진 일과 역할이 무엇이든, 그 일이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상관없이, 구원을 이루어내는 일만이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인 가운데, 묵묵히 믿음과 사랑으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구원을 이루어내는 복된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요셉성인의 삶의 모범을 본받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아멘..............◆
'법대로 사는 요셉'
-정 호 신부 -
항상 사순절 중에 기념하게 되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축일입니다. 우리는 굳이 예수님의 ‘양부’라는 이름으로 그분을 부르지만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실 수 있게 선택된 또 한명의 어버이인 요셉의 가치는 양부가 아닌 실제 아버지의 역할을 훌륭히 하신 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찌보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여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님과 그 태중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아들의 생명 모두를 손에 쥐고서 아무런 이유 없이, 인간적인 수고와 손해를 감수하며 그들을 지켜낸 아버지의 참된 가치를 실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는 요셉을 중심인물로 드러내 줍니다. 아직 예수님은 성모님의 뱃속에 있고 복음은 성령으로 인해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짧은 이야기만을 배경으로 들려줍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방문을 받은 마리아의 이야기가 아닌 이 상황을 요셉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약혼을 하고 함께 살 날을 꼽고 있던 요셉에게 마리아의 잉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상황을 말해줍니다. 마리아가 착하다, 순수하다 등의 수많은 수식어를 붙이더라도 이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그런 약혼자의 이유 모를 임신은 분명 요셉에게는 참을 수 없는 수치스러움이고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현실은 끔찍하게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을 때였기에 이 일을 전해듣고 그는 당장 마리아를 고발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복음이 너무 덤덤하게 전해주는 요셉의 성품은 그가 그 성품대로였다면 분명 신고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는 마리아의 죄를 밝혀 자신의 부정을 피하기 위해 마리아를 희생시켰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근거 모를 아이 역시 그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움직입니다. 그는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지만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만일 요셉이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면 그는 그 율법을 어긴 결정을 하게 됩니다. 혹 여기서 말하는 ‘법대로’라는 말이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면, 곧 율법의 정신을 이야기한다면 그는 법대로 제대로 행동한 것이 됩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라는 율법의 정신 말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요셉의 행동은 사랑의 이중계명 중 이웃 사랑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더 중요한 것을 복음은 요셉의 이 결정이 주님의 계시 이전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이런 요셉의 결정이 있을 즈음에야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주셨음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요셉은 그 근본부터 하느님의 뜻에 가까운 인물이었다는 말입니다. 마리아가 순수한 영혼으로 하느님의 뜻에 전적인 순명을 보였다면 요셉은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인으로 그 속에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자신만큼, 아니 자신보다 더 귀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 사람의 모범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요셉이 성모님의 순명만큼이나 예수님의 탄생에 큰 몫을 하게 된 이유입니다. 또한 주님의 천사의 알림 이후에 요셉이 서둘러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사실은 그 역시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임을 동시에 드러내 줍니다.
이런 부모 사이에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적어도 이 부모만큼은 하느님이 이 세상을 내신 첫 사람의 사랑스런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부모, 그 속에 자리하신 예수님을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로 이 탄생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웃 사랑의 극치를 보여준 요셉.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불가능하다는, 혹은 그러면 안된다는 그런 선택 속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사랑은 그래서 어렵지만 하느님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사람의 표본을 갖고 싶으십니까? 그럼 요셉의 마음을 한 번 헤아려 보십시오.................◆
겸손의 삶
- 허찬란 신부-
제 동기 신부가 신학교 시절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강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항상 원칙을 강조하시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시며 사신 분인데다
자녀들을 기쁘게 하느님께 봉헌하시고 늘 무욕의 삶을 사셨다고 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을 우선하셨다는 등의 이야기였는데 머리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감동했기에 내용은 자세히 생각나지 않지만, 그의 아버님의
모습에서 참 겸손함을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분은 생전에 자녀들에게
자신이 죽고 나면 화장을 시켜달라고 하셨답니다.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대로 말씀을 못하시는 분이셨으나 삶에 있어서 너무나 훌륭하셨던
분임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님이 몇 해 전 돌아가셨습니다.
생전의 말씀처럼 산화하여 가셨는데 동기 신부의 형제들과 모친이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에서 또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오늘 요셉 성인의 축일을 맞아 제 동기 신부
아버님의 모습과 함께 요셉 성인의 모습을 그려보게 됩니다. “나의 아버지는
목수이시다. 나의 아버지는 겸손하시다. 나의 아버지는 가난하시다. 나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신다. 나의 아버지는 나를 율법으로 가르치신다.
나의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시다.” 성경은 예수님의 양부이신 성 요셉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실제로 그분의 삶이 드러나지 않아서일까요? 묵상 끝에
그분 삶이 그러셨기에 그분 삶에 대한 회고도 그렇게 조용하리란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 요셉
-최성기 신부-
요즈음 친구들의 아버님이 부쩍 많이 돌아가신다. 세월의 흐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하나 둘씩 아버지를 잃어가는 친구들, 그리고 어느새 아버지가 되어 아버지의 삶을 사는 친구들을 바라보게 된다. 씩씩하게 상주 노릇을 하는 친구들에 비해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저 친구들처럼 아버지와 작별을 잘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안 계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가끔씩 아버지와 통화를 할 때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나면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어머니 좀 바꿔주세요”로 그 어색함을 피한다. 마음속에 있는 따뜻함을 친근하게 전하는 데 아버지나 그 아들이나 영 낯설어한다.
「사랑의 기술」로 유명한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성장하는 데는 두 가지 사랑이 필요하다고 한다. 어머니 사랑과 아버지 사랑이다. 어머니 사랑은 “네가 어떤 처지에 있던지, 네가 상처 받고 시름할 때도, 혹 네가 큰 잘못을 하고 내게 돌아온다 할지라도 나는 너를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주고 사랑해”라고 말해주는 사랑이다. 아버지 사랑은 “네가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봐. 네 능력을 발휘하고, 네 좋은 점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 봐. 그러면 넌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라고 말하는 사랑이다.
사실 복음서에서 요셉 성인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오늘 마태오복음처럼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는 자리에서 잠깐 소개되고, 루카복음에서 예루살렘에 아들 예수와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는 이야기를 끝으로 복음서에서는 요셉에 대한 언급이 사라진다. 요셉을 소개하는 형식 역시 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보다는 성모 마리아의 관계에서, 아들 예수와 관계에서 마리아의 배필로 구세주의 양부(養父)로 소개될 뿐이다.
늘 성가정의 배경처럼 소개되는 요셉의 모습은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드러나지 않게, 서투른 감정 표현으로 우리 삶에 가장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 내게 이 세상을 헤쳐 나갈 힘이 있음을 묵묵히 깨우쳐 주는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아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복음서에서 배경으로 물러나 버린 요셉한테서 볼 수 있지 않는가? 오늘 하루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자.
꿈꾸는 요셉
-이회진신부-
신약성서에서 요셉의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요셉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는데,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꿈을 꾼 뒤 예수님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는
요셉이 예수님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였다는 것에 대해 신앙으로 그러했다고
아주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쉽고, 간단했을까요?
요셉은 아직 결혼하지도 않았고 함께 잠자리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은 이제 겨우 약혼한 상태였고, 마리아의 임신은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명 요셉은 혼란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왜?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거지? 왜?
만약 그러한 일이 우리 자신에게 일어난다면, 우리 역시 하느님께 물을 것입니다.
왜? 주님, 왜 이런 일이 저에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하고 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묻겠죠?
그럼 저더러 어쩌란 말씀이십니까?
그때 우리는 선택해야 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이 일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그것이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해야 합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으로 인해 마음 안에 오만가지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 요셉에게는 이렇게 결혼 전에 임신한 부인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그에게 조언을 해 줄 친구도 있었을 것이고, 조언을 해 줄 어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밖에서 그 해결책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가 꿈을 꾸었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많은 일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많은 유혹들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긴장과,
자신의 내적 요구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들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오로는 필립 4,4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그는 “걱정하지 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흔히 우리는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걱정하지 마라” 혹은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라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걱정하지마. 좋아질거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또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은 우리더러 무작정 기뻐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누구이며, 누구에게 속해 있는 사람인가를
먼저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다는 의미는 그가 그의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께 해답을 청했고,
하느님은 요셉의 혼란스러움과 결정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주었습니다.
요셉은 그렇게 하느님 안에서 꿈을 꾼 뒤 마리아를 자신의 집으로 들여옵니다.
우리의 삶 안에도 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면 요셉을 기억하면 어떨까요?
그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꿈꾸었고, 하느님 나라를 꿈꾸었고, 하느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해 기뻐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꿈꾼다면 우리 역시 요셉처럼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주님, 저 역시 오늘 당신과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며 저의 삶 속에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길 꿈꿉니다. 아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양승국신부-
<착한 남자>
요셉! 단 한번도 대면한 적이 없지만, 성인의 모습을 상상해볼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렇습니다. 착한 남자, 과묵한 사람, 그래서 든든한 사람, 쫀쫀하지 않은 사람, 아무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떨지 않는 사람, 비록 타인으로부터 속임을 당하고 손해 보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개의치 않는 사람, 신의나 의리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
진정 사랑했던 여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약혼녀 마리아를 포기하라는 하느님의 요청은 요셉에게 있어 청천벽력 같은 요구였기에 정말 수용하기 힘든 부담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구세주 탄생 사건의 전모는 모든 것이 다 베일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명확하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다"는 설명도 없었습니다. 무조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어떤 면에서 구세주 탄생으로 인해 발생한 가장 큰 피해자였습니다. 속수무책인 가운데 약혼녀를 강탈당한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미래의 삶 역시 생각만 하면 갑갑한 것이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마리아!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지만 태어나게 될 아기, 고스란히 떠안아야할 부양의 의무...한 평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식과 “배신녀” 마리아를 위해서 뼈 빠지게 일만 하는 자신의 괴로운 미래가 예측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불평불만하지 않고 묵묵히 천사가 알려준 그 길, 한 평생 이해 못할 신앙여정을 출발합니다. 우리같이 길고 짧음과 이해득실을 세밀하게 따져보지 않고 길을 떠납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순명, 여기에 요셉의 덕이 있습니다. 요셉이 지녔던 가장 큰 덕행은 뭐니뭐니 해도 순명의 덕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요청에 그저 한 치 오차도 없이 따라갑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니 말씀대로 맞아들입니다. 이집트로 길을 떠나라니 말씀대로 길을 떠납니다. 유다로 돌아오라니 말씀대로 돌아옵니다. 한 평생 하느님께서 제시해주신 그 길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묵묵히 따라감을 통해서 요셉은 구세사업에 한 몫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의 협조자로서 지녀할 첫 번째 자세는 결국 요셉 성인이 지니셨던 부드러움입니다. 부드러움만이 하느님을 기꺼이 수용하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원동력이 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부드러운 시선, 이웃을 향한 따뜻한 눈길 그것이 결국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노란 종달새"란 이름의 인디언이 지은 기도를 읽으면서 세상만사 안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했던 요셉의 생애가 떠올랐습니다.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당신이 내 부족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것들을
나 또한 알게 하시고
당신이 만든 나뭇잎, 모든 돌 틈에 감춰둔 교훈들을
나 또한 배우게 하소서.
내 형제들보다 더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큰 적인 내 자신들과 싸울 수 있도록 내게 힘을 주소서.
나를 하여금 깨끗한 손, 똑바른 눈으로
언제라도 당신에게 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소서.
그래서 저 노을이 지듯이 내 목숨이 사라질 때
내 영혼이 부끄럼 없이 당신에게 갈 수 있게 하소서.
어느 수녀의 기도
-이재욱 신부-
성가정의 수호자이며 노동자들의 수호성인 요셉. 아마도 예수님과 성모님을 제외하고 나면 모든 성인을 통틀어서 요셉 성인만큼 사랑과 존경을 많이 받는 성인도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내가 아는 요셉, 혹은 요셉피나 본명을 가진 이들이 대부분 충직하고, 일거리도 많이 따라다녔던 것으로 기억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성인의 영성이 그러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내가 수련원에서 처음 요셉 축일을 맞이했을 때, 지금은 신설교구의 교구장이 되신 수련장 신부님께 성인에 대한 기도문을 하나 받았다. 그 기도문은 초라하게 낡은 종이에 인쇄되어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성서 안에 끼워놓고 가끔씩 읽어보곤 한다. 이 기도문은 어떤 수녀님이 30일 영신수련 피정을 하시면서 묵상 중에 만든 기도문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것을 읽을 때마다 수도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마음으로 되새겨 보곤 한다.
어느 수녀의 기도
숨은 의인 성 요셉이여,
당신은 말없이, 보수를 기대함도 없이, 누가 알아주기를 바람도 없이 순수히 그저 당신을 내어주셨으며 숨어 봉사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당신은 항상 남의 입장을 옹호해 줄 줄 알았으며 남의 허물을 감싸줄 줄 알았고 자신의 포기와 양보로 평화를 도모하는 길을 추구했습니다. 당신은 항상 깨어 주님 말씀에 귀기울였고, 듣는 순간 자기 계획을 포기할 줄 알았으며 주님 길을 선택하는 데 과감했습니다.
주님 뜻을 받드는 것이 당신 음식이 되고, 남을 위한 봉사가 당신 기도가 되었으며 가족을 돌봄이 당신 유일한 기쁨이었습니다. 당신은 평생 내내 세상 어느 누구도 당신을 위인이라 생각지 않았으며 당신 자신도 그저 하느님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랬기에 당신은 하느님 앞에 더욱 보배로웠고, 그런 겸손과 그런 의덕이 아들을 맡길 정도로 하느님 눈에 들었습니다. 세상에서는 한줄기 빛도, 한 점의 영광도 못 누렸어도 지금은 하느님 동산에 체드루스처럼 우뚝 서 계시며 성인 중에 혜성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존경하올 성 요셉이여,
당신은 수도자의 모범이시고 주님 찾는 자들의 지도자시니 아직 투쟁 중에 있는 우리를 이끄사 당신 숨은 길을 걷게 하소서..........
父傳子傳
- 강영구신부-
예수님, 교회는 3월을 성 요셉의 달로 정하고 요셉 성인의 믿음과 삶을 본받고자 합니다.
솔직히 저희들은 당신의 아버지 요셉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복음서는 당신이 목수의 아들(마태13,55)이라고 말할 뿐, 요셉이 어떤 인물인지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통해서 당신의 아버지 요셉이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됩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알려면 아들을 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 없는 아들이 없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랍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기 마련입니다.
당신은 늘 하늘의 뜻(天命)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당신은 하늘의 뜻(天命)을 따르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당신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르14,36)
하늘의 뜻(天命)이 펼쳐지도록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당신의 모습에서 요셉의 모습을 봅니다. 십자가 위에서 두 팔을 벌리고 온 세상을 감싸 안으신 당신의 모습에서 요셉의 모습을 봅니다.
하늘의 뜻을 따르고자 요셉은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포기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포기하고 비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는 대자대비하신 역사役事를 시작합니다. 요셉은 처녀 마리아가 아들을 낳아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울타리가 되어줍니다. 당신도 아버지 요셉의 큰 울타리 안에서 자라고 교육 받습니다. 침묵하는 사람 요셉은 하늘의 뜻이 펼쳐지는 자리입니다.
예수님, 저희들도 요셉을 닮아서 하늘의 뜻이 펼쳐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一明)
요셉 성인에게 만들어 준 명함(名銜)
-박상대신부-
한창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교회가 오늘 하루만큼은 사순시기를 중단하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요 예수의 양아버지인 요셉 성인을 크게 경축한다. 요셉 성인에 관한 성서상의 기록은 복음서의 전사(前史)에 속하는 마태오복음 1-2장, 루가복음 1-2장에서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보도된 내용이 전부이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후손(마태 1,16)이었으나, 다윗의 고을인 유다지방 베들레헴에서 살지 않고 갈릴래아지방 나자렛에서 살았던 것(루가 2,4)으로 추정된다. 이곳 나자렛에서 목수 직업을 가졌던 요셉은 ’의로운 사람’, 즉 법대로 사는 사람(마태 1,19)으로 이미 세간(世間)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하였으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진 그녀와 파혼하지 말라는 천사의 명을 받들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호구조사령 때문에 다윗의 고을 베들레헴에 왔고, 여기서 예수를 낳게 된다. 요셉은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온 목동들과 동방박사의 방문을 받았고, 헤로데 대왕의 무죄한 영아학살을 피하기 위하여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였다.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에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나자렛으로 와서 살았다. 요셉은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베풀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하였다. 예수가 12세였을 때,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잃어버렸다가, 학자들과 대화를 하고 있던 아들을 찾기도 하였다. 여기까지가 전사(前史)가 보도하는 내용이다. 그후 요셉이 예수의 아버지이고 목수였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공생활 중 고향방문 때 그곳 사람들의 입으로 증언된다.(마태 13,55; 마르 6,3; 루가 4,22)
기원후 2세기경에 예수의 형제로 추정되는 야고보가 편집한, 그러나 위경(僞經)에 해당하는 《야고보 복음서》에는 요셉과 마리아, 안나와 요아킴, 그리고 예수의 소위 ’잃어버린 시절’(12살~30살)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많다. 야고보복음서에 따르면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할 때 이미 80세의 고령이었고 이미 결혼한 경험이 있어 슬하에 야고보, 유다, 시몬, 미리암 등의 자식들을 둔 것으로(마태 13,55) 전해진다. 야고보복음서의 이러한 내용은 초기 교회가 직면한 일련의 신학적 문제들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들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당시 중대한 신학적 문제들로는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과 천주의 모친성, 성령으로 말미암은 예수잉태, 예수의 신성(神性)등을 손꼽을 수 있다. 야고보복음은 어디까지나 위경(僞經)에 속하기 때문에 그 내용의 역사성과 진실성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정경(正經)을 이해하는데 다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셉!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원래 그는 가장자리에 서 있고, 그림자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침묵 가운데서도 남을 도울 줄 아는 사람이었고, 하느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내리는 지시를 군말 없이 따랐으며, 보여주는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이것이 요셉의 법칙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에게 입을 주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위에서 보았듯이 요셉에 관한 성서적 근거는 마태오와 루가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의 탄생예고부터 12살까지로 한정된다. 그러나 그 어느 부분에도 요셉 스스로의 말은 찾아볼 수 없다. 요셉은 그저 침묵으로 등장하며, 그저 마음먹는 것뿐이다. 성서저자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은 그 의미가 무엇일까? 마태오와 루가의 의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성서상 말하지 못하는 요셉의 답답함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말이 없는 자의 마음은 크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그렇다. 말하지 않아도 주어진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넉넉한 마음 때문이다. 넉넉한 마음은 때로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말이 없는 요셉에게 사람들은 명함(名銜)을 만들어 주었다. 그 명함을 나는 보았다. 명함에 나타난 직함은 이렇다: ’임종자의 수호자’, ’노동자의 수호자’, ’가정의 수호자’, 게다가 비오 9세는 1870년 ’교회의 수호자’라는 직함까지 내렸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41년 8월 22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분의 배필 성 요셉을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정했다. 말로써 주장을 펴지도 못하는 요셉이 왜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는가? 우리가 지난 2000년의 교회역사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교도직이 신앙의 유산을 수호하기 위하여 줄곧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수많은 사상적 침입으로부터 신앙을 보존하고 전수하였다는 것이다. 교권은 신앙을 수호하면서 많은 부작용을 빚어냈다. 논쟁을 벌이고 이단자를 파문하고, 심지어는 종교재판을 통하여 사람까지 죽였다. 요셉이 바로 이런 교회의 수호자라 말인가? 아니다. 요셉은 그렇지 않다. 요셉은 그저 ’수호자’이다. 오늘 복음에서 해답을 찾아보자. 마리아는 요셉이 모르는 사이에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자 요셉은 몰래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꿈에 나타난 천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자 그 마음을 고쳐먹는다. 결국 요셉은 처음에 자신의 잣대로 파혼을 결심하지만, 금방 그 잣대를 내려놓고 하느님의 잣대로 사건을 바라본다. 그 바라봄의 결론은 받아들임이다. 마리아와 그녀의 태중에 있는 아기를 수호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 점이 요셉을 교회, 노동자, 임종자, 가정의 수호자로 칭송할 수 있는 명함을 만든 것이다. 우리도 요셉처럼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아끼고 돌보고 수호할 수 있는 은총을 요셉성인을 통하여 하느님께 간구해야 하겠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마태 2,18-25)
-유 광수신부-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제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인류 역사 안에 들어오시게 되었는지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그분의 방법을 보았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하느님, 한번 약속하신 것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하느님,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그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그칠줄 모르고 베푸신다는 것을 보았다. 인간이 생각하는 방법으로가 아니고 하느님의 방법으로 개입하시고 역사 하시는 하느님을 보았다.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하느님의 구원 방법을 방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오늘 그런 신앙인의 대표적인 모델을 성 요셉을 통해서 보여 주신다.
성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였다. 성 요셉이 비록 의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리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파혼한다고 해서 요셉을 나무랄 사람이 없다. 동네 방네 돌아 다니면서 소문을 퍼뜨리지 않고 조용히 해결하기 위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한 것만도 감사할 일이다. 만일 인간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런 일을 요셉도 그냥 그런 방법으로 해결하였다면 조금도 우리보다 나을 것이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일을 하였을 테니까. 그런데 요셉은 자기가 마음 먹었던 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였으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실패할 수도 있을만한 위험한 상태였다. 만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하느님의 계획대로 이루워지지 않았다면 그 실패의 한 중앙에 요셉이 서게 되었을 것이다. 즉 요셉이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고 그 책임을 요셉이 져야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요셉이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협조자가 되었을까? 이에 대해 복음은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라고 하였다.
요셉이 잠을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가?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서"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이 내용도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결코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다. 느낫없이 천사가 나타나서 이야기 한 말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천사가 누구인지, 믿을 수 있는 분인지? 그리고 도저히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이미 파혼하기로 결심까지 한 것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고 하였다.
"잠에서 깨어나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잠에서 깨어다다"라는 말은 "부활하다"라는 말이다. 부활한다는 말은 말씀을 듣고 일어나는 것이다. 즉 자기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요셉이 잠에서 깨어나다."란 말은 인간적으로만 생각했던 것에서 하느님의 말씀에서 빛을 받고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셉은 구약에서 이미 말씀하셨던 하느님의 약속 즉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이해한 것이다. 지금 마리아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역사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들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맞아들였다."라는 말은 마리아가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전했을 때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똑같은 태도이다. 즉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 그것이 곧 부활이다. 요셉의 "맞아들였다."라는 자세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신앙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다. 신앙은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려고 하던 것을 멈추고 하느님의 방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신앙은 하느님의 구원을 방해하려던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절대적으로 순명하고 협력하는 것이다. 신앙은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역사를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신앙은 나의 방법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이다. 신앙은 내 생각대로 나의 행동을 옮기기전에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생활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너무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잠을 자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만 모든 것을 생각하려고 하고 인간적인 이론과 합리성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데에서 불평하고 원망한다. 그래서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우리가 말씀에 잠을 자고 있는 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맞아들일 수도 없고 또 하느님이 주시는 은혜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만이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협력할 수 있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만이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지 또 어떻게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협력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