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통과하는 공식
해외 교민 교회 목사님 한 분이 쓰신 글에 감동이 있었습니다.
좀 길어 조금 다듬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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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통과하는 공식]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전혀 상식 밖의 일을 겪으면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겼었습니다.
자존심이 강하고,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제가, 교인 앞에서 눈물을 다 흘렸겠습니까?
억울함과 막막함, 두려움과 서러움의 감정이 혼합이 되어 터져나온 제 인생에서 가장 아픈 눈물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저희 내외는 기도 중에 이렇게 묻기 시작했지요.
“주님, 저희가 지금 이 곳에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희는 당신께서 이곳으로 저희를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것도 기도 중에 마음에 큰 감동과 함께 한인교회 성도들이 처한 영적인 상황을 가슴으로 느끼며 어렵게 결정하여 여기에 오게 된 것입니다.
저희가 주님의 음성을 잘못 알아 들은 것인가요?
지금 일어난 상황은 너무나도 상식을 벗어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거짓이 동원되어 왔고, 모함과 음모, 함정과 위협이 가해지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는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주님께 기도하는 중에 마음이 많이 평안해졌지만 여전히 고뇌를 벗어버리지 못하였는데,갑자기 주님께서 이 고난과 시련의 길에 새겨 놓으신 암호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선명한 것이어서 지금 저희들의 상황에 대입해 볼 때, 너무나도 명확히 맞아 떨어지는 공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지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경험해 보지 않은 엄청난 크기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했던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성취하실 때, 사용하신 공식이었습니다.
주님, 저는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라’ 권면하였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의 의미를 실제로 경험해 본 일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4:12-13)
사도 바울도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이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미 산상설교를 통해 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마5:11-12)
주님께서 몸소 그와 같은 고난을 받으실 것이며, 주님이 맞이하시는 고난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말씀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에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할 과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고난 - 죽음 - 부활의 영광’입니다.
이런 공식을 제 자신에게 적용해 보니까, 저희는 하나님께서 불로서 연단하시는 과정을 지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기고만장했고,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저희들을 다듬으시고, 주님께 온전히 복종하게 하는 연단의 시간을 말입니다.
앞으로 남은 것이 제가 온전히 죽어야 하는 단계인 것 같습니다.
완전히 주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제 자신이 온전히 죽어야만 하는 과정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 길이 선명히 보입니다.
사실, 제 자신이 완전히 죽어야 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두려운 마음도 있습니다. 저 자신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센 존재인지를 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실패하면 어떡하나,,,?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 저는 기쁜 마음을 가지고 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에 과감히 저 자신을 던질 각오를 갖습니다.
이 죽음의 고통 마저도 주님이 사용하시는 과정이라면 안심하고 주님께 제 자신을 맡겨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의 영광을 향해서 가는 소망의 길이며, 기쁨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달라질지 사뭇 기대가 됩니다.
주님,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저를 주님 마음대로 다루어주십시오.
그 십자가의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의 영광, 고난과 죽음을 거쳐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광의 순간에 제가 서 있게 될 때 쯤이면, 주님께서 저를 새롭게 일으키셔서 지금까지 당해 온 고난과는 족히 비교도 되지 않을 축복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런 소망이 있기에 저는 오늘도 당신을 찬양하며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갈 것입니다.
주님만 저와 함께 하시면, 고난도 즐거운 일인 것을 오늘도 고백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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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귀한 고백이었습니다.
고난 중에 자아의 죽음을 결단하는 일은 정말 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아를 죽이려고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이미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롬 6:3)
우리는 이미 죽어 장례식을 치른 존재인 것입니다. (롬 6:4)
이 엄청나고 놀라운 일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고 ‘나는 죽었습니다’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롬 6:1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 사도 바울도 죽었고 우리도 죽은 것입니다.
자아의 죽음은 신앙생활의 시작이지 궁극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또한 속죄의 은혜와 자아의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속죄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분명히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주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도 이미 죽은 것입니다.
우리 자아와 우리의 죄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었기에 우리 죄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오직 믿음’과 분명한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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