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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잘살게 된 지나온 근대사(近代史)
박정희 대동령이 탄생한 지 107주년이 되는 성군의 생신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에,
하늘이 내리신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은 어떻게 5000년 동안이나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억압받고 수탈당해서
세계에서 가장 못살고 있는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이렇게 빠르게 부강한 선진국으로 만드셨는지, 수많은 어려움을
어떻게 슬기롭게 국민의 의지를 하나로 모아 성공시켰는지, 그런 우리나라를 도와준 나라는 또 어떤 나라였는지,
그분의 애국 애족의 장신과 타고난 천재적인 지혜와 그리고 영웅적인 지도력을 여러분들과 함께 다시 한번 기억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합니다.
저는 1961년 5.16 군사 혁명 정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에 행정관으로 보직을 받고 공직생활을 처음
시작해서 18년 동안 그분을 모시고 공직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최고회의는 혁명 주체인 군 장교들이 완전 무장을 하고 살기(殺氣)가 등등했습니다.
그 속에 민간인은 나 혼자였고 혁명군 장교들이 국민 복을 입은 나를 보는 눈빛은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박정희 장군은 어떻게 군사 혁명을 일으킬 생각을 했고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혁명 과업을 어떻게 성공시켰는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어려웠던 일들을 그분을 18년 동안 모시고 공직 생활을 했던 제가 옆에서 보고 느꼈던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어려웠던 일들을 다시 기억하면서, 오늘 그분에 대한 애국심과 애민 정신을 같이 추모하고자
합니다.
**5.16 군사 혁명의 배경**
1961년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2번째로 제일 가난하고 못 사는 나라였습니다.
국민은 먹을 것이 없어 들판에 나가 나물을 캐고 뒷동산에 올라가 소나무 껍질을 벗겨다 삶아 먹고, 그야말로 초근
목피(草根木皮)피로 겨우 보리고개를 넘겼습니다.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대학을 나와도 취직할 곳이 업었습니다.
와중에 북한 괴뢰집단은 호시탐탐 무력남침을 획책하고 있을 때, 우리는 돈이 없어 적을 막을 수 있는 군장비도
변변치 않았고 나라는 데모 천국이 되어 혼란에 빠져 있었고 군인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군 장교들의 정군(整軍) 운동**
이를 본 육군사관학교 8기 생 엘리트라고 하는 김종필· 김형욱· 오치성· 길재호· 옥창호 등 11명이 대표가 되어
당시 현석호 국방부 장관에게 부패한 정군의 계획을 건의하려고 갔다가 면담을 거절당했습니다.
이에 실망을 한 대표 장교들은 평화적인 방법이 아닌 부패한 민주당 정권 자체를 제거하는 거국적인 무력 혁명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 5.16 군사 혁명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혁명 거사 계획을 4번이나 변경**
이들은 혁명 위원회를 조직하고 박정희 소장을 주군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국내외의 경제· 사회· 문화, 특히 농촌 경제 문제의 특수성 등에 관한 방대한 자료 수집과 민족중흥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정부 형태를 준비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박정희 소장을 주축으로 민족의 영원한 장래를 위해 1960년 5월 8일 군사혁명을
하기로 거사 일을 정했다가 4.19 학생 혁명으로 거사가 중지되었습니다.
**해병대 단독 거사를 계획**
4.19 학생 혁명으로 거사가 중지된 후에 해병대 내에서도 군 인사에 불만을 가진 해병 장교들이 제1 여단장 김윤근
준장을 중심으로 해병대 창설 기념일인 4월 15일 해병대 단독으로 거사를 하기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장군의 혁명 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을 안 후 해병대 자체 계획은 또 불발이 되었습니다.
**5.16 한국 군사 혁명**
그 후도 박정희 소장은 혁명 거사 일을 3번이나 연기한 끝에 드디어 1961년 5월 12일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제5 사단장 채명신 준장과 혁명 동지회 김종필· 김형욱· 오치성· 길재호· 옥창호 등
11명을 만나 거사 일을 5월 16일 새벽 3시로 확정을 합니다.
이렇게 군에서 혁명 거사일을 4번이나 변경하는 동안 '장면' 정부나 군 수뇌부에는 기밀이 많이 알려 있었지만,
드디어 올 것이 오는구나 하고 제지할 의지도 힘도 없었고, 국가나 국민은 당연한 일로 군사 혁명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혁명군은 드디어 5월 16일 새벽 3시에 영등포 문래동에 있는 제6 관구 사령부에서 출발해서 서울로 한강 다리를
건넜습니다.
마침내 혁명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혈로 국가 3권을 장악한 뒤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 장군을 위원장으로
군사 혁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이것이 혁명 정부 국가재건최고회의입니다.
그리고 혁명 제1성(聲)에서 “우리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궐기한 것이다”
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는다. 유엔 헌장을 준수한다. 지금까지 사회의 부패와 구악(舊惡)을 일소
해서 새로운 기풍을 진작한다.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이렇게 혁명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이와 같이 혁명 정부의 야심 찬 계획은 도탄에 빠진 국민에게 하늘 같은 희망을 불어넣게 되었습니다.
국가 3권을 장악하고 혁명에 성공한 국가 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은 맨 먼저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는 국민을
구하고 경제 개발 계획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우리와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캐네디 대통령은 헌정을 중단시키고 군인이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받은 박정희 의장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원조로 먹고사는 나라에 무슨 돈을 꿔줄 수 있는가 하고 박정희 의장 일행을 만나주지도 않고 문전 박대를 했습니다.
미국 대통령도 만나지 못한 박정희 의장 일행은 숙소에 돌아와 가난한 나라의 설움에 북받쳐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습니다. 가장 믿었던 미국에 가서 문전 박대를 받은 박정희 의장은 가난한 나라의 설움에 목이 메었습니다.
**고심 끝에 우리 민족 역사에 처음으로 서독 상업 차관**
낙심하던 박정희 의장은 라인 강의 기적을 일으켜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서독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처럼 분단국가의 아픔과 패전의 상처를 딛고 당당하게 일어나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을 보면서,
같은 입장에 있는 우리의 사정을 호소해 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전쟁의 잿더미에서 서독처럼 한강의 기적을 이뤄보자’라는 각오를 하게 됩니다.
혁명 정부는 1961년 11월 말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주축으로 차관 교섭단을 구성해서 서독으로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당시 독일어 통역을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알아본 결과 이승만 대통령 시절 국비 유학생으로 서독 뉘른베르크 에를랑겐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백영훈' 박사와 연락이 되어 사절단의 통역관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사절단이 서독에 도착은 했으나 듣도 보도 못한 가난한 나라에서 차관 교섭단이 왔다고 누구도 만나주려고 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를 옆에서 본 '백영훈' 박사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2년 후에 서독 총리가 됨) 재무장관과 같은 대학을 나온 자신의
대학 은사를 찾아가서 장관을 좀 만나게 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961년 12월 11일 우리 사절단은 마침내 '루트거베 스트리크' 재무차관을 만나게 되었고, 그다음 날
'에르하르트' 재무장관을 만나서 마침내 1억 5000만 마르크(약 3000만 달러)의 상업 차관을 얻는데 합의를 했습니다.
사절단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은행의 지급 보증이 있어야 하는데 국가 신인도가 없는 나라에 지급 보증을 해주겠다고
하는 나라는 세계에 어디도 없었습니다.
기적적으로 성공한 차관 협상이 물거품이 될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독일에 광부·간호사 인력 진출**
못 사는 나라의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있을 때 '백영훈' 박사에게 구세주 같은 독일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노동부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슈미트'라는 독일 사람이었습니다.
찾아와서 하는 말이 “너희 나라는 길거리에 실업자가 널려 있다고 하던데” 지금 서독은 탄광에서 일할 광부가 모자란다.
지하 1000m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데 지열이 뜨거워서 파키스탄· 터키(투르 키예) 노동자들이 다 도망을 가버렸다.
혹시 한국에서 광부 약 5000명 정도, 간호조무사 약 2000명 정도를 보내줄 수 있다면 이 사람들 급여를 담보로 하고
돈을 빌릴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백영훈' 박사는 '신응균' 당시 주 서독 한국 대사를 찾아가 이야기를 했고, 대사는 즉시 한국 정부에
전문을 띄웠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바로 모집 공고를 냈습니다.
그래서 1차 광부 500명 모집에 2894명이 몰려와서 6대 1의 경쟁률이 되었는데, 선발 자격이 2년 이상 경력자였지만
실은 30%가 대학 졸업자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연금 저축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을 고스란히 고국 가족에게 송금을 했습니다.
이들이 한국에 송금한 돈은 연간 5000만 달러로 그때 우리나라 국민 총생산의 2%에 달한 큰돈입니다.
이렇게 해서 1977년까지 독일로 간 광부는 7932명이고, 간호사는 1만 226명으로 집계되어 있습니다.
**독일에 취업한 광부·간호사 월급을 담보**
이렇게 이들의 급여는 모두 독일 코메르크 방크를 통해서 한국에 송금되었으며, 코메르크 방크가 지급 보증을 서서
우리 민족 역사 이래 처음으로 외국 차관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 돈이 오늘의 경제·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종잣돈이
된 것입니다.
이후에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에 국빈 방문 초청을 받게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 서독 국빈 방문**
서독 정부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광부를 보내주고 간호사를 보낸 한국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마음으로 한국 대통령을
국빈 방문으로 초청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의 서러움은 다시 계속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통령 전용기는 고사하고 비행기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미국 노스웨스트 항공기를 1대 전세 계약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미국으로부터 항공기를 빌려줄 수 없다고
연락이 온 것입니다.
그 이유는 원조로 먹고사는 가난한 나라에 비행기를 빌려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래서 처음 외국 초청을 받은 우리나라 대통령의 서독 방문이 허사가 될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서독에 특사를 보내 우리나라는 비행기가 없으니 서독에서 비행기를 좀 보내줄 수 없겠는지 부탁을 한
것입니다.
고맙게도 독일 정부는 그때 독일에서 홍콩을 거쳐 일본을 왕래하는 루프트 항공 일반 여객기를 서울에 일부러 들려서
우리 대통령 일행을 태우고 오도록 조치를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비행기는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 로마를 거쳐서 28시간 만에 1964년 12월 7일 서독 쾰른 공항에
도착했고, '뤼브케'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총리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필자가 보기에는 말이 국빈 방문이지 대통령 숙소는 10평도 안 되고 수행원들은 아침에 샤워를 하면 샤워 값을 별도로
내면서 여관방 같은 곳에서 잠을 잤습니다.
연 도로에 걸린 태극기도 불과 20여 개밖에 없고, 말로만 듣던 독일의 근검한 정신을 새삼 나는 느끼게 되었습니다.
차관 교섭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1억 5000만 마르크를 빌리기로 내부 합의를 했는데, 절차상 국제 은행의 지급 보증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용도가 없는 우리나라에 지급 보증을 써 준다는 나라는 지구상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독일 정부는 궁여지책이지만 독일에 와 있는 광부와 간호사가 받는 월급을 1개월 간 은행에 예치하는 조건으로 당초
한국이 요구한 금액보다도 많은 3억 마르크를 차관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당시 서독에 취업한 우리 광부 간호사들이 본국에 송금한 총액은 연간 약 5000만 달러였습니다.
여기 교포들 중에 서독 광부로 간호사로 다녀오신 분 중에 그때 제 얼굴을 지금도 기억하고 계신 분도 계십니다.
이 분들이 서독에 가서 고생한 덕택으로 얻은 차관이 종잣돈이 되어서 가난했던 우리나라 경제를 재건하게 된 기초가
된 것입니다.
우리 다시 한번 이 분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냅시다.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로하기 위해함부론 탄광 회사 방문**
그리고 12월 10일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독일 함브로 탄광 회사를 방문했습니다.
우리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광부와 간호사 250 여 명은 양복과 한복을 깔끔히 차려입고,
뒤스부르크 교외의 타운 홀을 가득 메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단상에 올라 애국가 반주가 울려 퍼지자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 하세’란 마지막 대목에서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했고, 대통령도 옆에 있던 육영수 여사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지하 1000m까지 파고 들어가 뜨거운 지열을 받아 얼굴이 새까맣게 탄 우리 형제들, 그리고 이국 만리타국 변두리
시골 병원에서 덩치가 큰 시신들을 알코올이 묻은 가제로 시신(屍身)을 이리저리 뒹굴리며 닦고 있는 어린 간호사
우리 딸들의 얼굴을 본 박정희 대통령은 벅차오르는 가난의 설움에 미리 써 가지고 온 연설문은 꺼내지도 못하고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열심히 합시다. 우리 후세들을 위해서도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리도 서독의 라인 강 기적처럼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냅시다.”
우리 대통령은 눈물을 훔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광부와 간호사들은 서독 '뤼브케' 대통령 만세를 부르며 “우리 대통령을 도와주십시오. 우리 열심히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이렇게 광부· 간호사· 육영수 여사· 대통령이 한데 엉켜서 얼싸안고 울었습니다.
옆에 있는 서독 '뤼브케' 대통령은 자기 손수건을 꺼내서 우리 대통령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세계 역사에 일국의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서 동포들을 얼싸안고 이렇게 울었던 이야기는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대통령 영부인 옷자락을 붙들고 우리 대통령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울며 놓아주지 않은 광부· 간호사를 겨우 떨치고,
차에 올라 숙소로 가는 중에 대통령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고, 옆에서 '뤼프케' 서독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계속 우리
대통령 눈물을 닦아 주면서 “이제 그만 우세요. 각하,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우리 독일 국민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위로를 해주셨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필자는 가난한 조국을 후대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가득했던 젊은 박정희 대통령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2월 8일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와 회담을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혁명 정신과 나라를 재건하려는 절절한 애국심에 감명을 받은 '에르하르트' 총리는 서독의 경제를
부흥시킨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조언을 하게 됩니다.
“내가 경제 장관을 할 때 한국을 두 번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한국은 산이 많던데 산이 많으면 경제 발전이 어렵습니다.
고속도로를 깔아야 합니다. 독일은 '히틀러'가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깔았습니다. 다음엔 자동차가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국민차 폭스바겐도 '히틀러' 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판이 있어야 하는데 제철 공장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연료도 필요하니까 정유 공장도 있어야 합니다.
경제가 안정되려면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돕겠습니다.
경제 고문을 보내주겠습니다. 그리고 일본과도 손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도 프랑스와 16번을 전쟁을 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한이 맺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우리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 악수를 청했습니다. 한국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도자는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오늘날 한강의 기적을 이루게 한 황금 같은 지혜와 경험을 우리 대통령한테 이야기하면서,
당초 우리가 요구했던 금액보다 더 많은 3억 마르크 차관을 조건 없이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우리 국민은 이 고마움을 앞으로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박정희 대통령은 아우토반 고속도로를 캐딜락을 타고 160㎞ 속도로 달렸습니다.
미끄러지듯 달리는 차를 타고 가다가 2번이나 중간에서 차를 세우고 내려서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고 비볐습니다.
'장기영' 부총리를 비롯한 우리 일행들도 울면서 이를 지켜보았습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독일 농촌은 한 폭의 그림 같이 아름다웠습니다. 너무도 잘 정돈된 정원 도시였습니다.
띄엄띄엄 보이는 농가는 마치 별장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대통령은 이것을 보고 “바로 이것이다”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우리도 이렇게 농촌을 가꿔야 한다”라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에서 '에르하르트' 총리의 경험담과 충고로 경부 고속도로를 깔고 포항 제철 공장을
짓고 정유 공장을 짓고, 원수로만 여기고 있었던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해서 대일 청구권 자금을 받아내고, 새마을
운동을 시작해서 농촌을 근대화시켰습니다.
독일은 이렇게 우리나라 역사 이래 처음으로 돈을 꾸어준 나라이며, 라인 강의 기적을 이뤄서 부강한 나라를 만든
'에르하르트' 총리의 층고를 받아서 종잣돈도 없고 기술도 없었던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서, 지금은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필자는 박정희 대통령 서독 방문 수행을 마치고 청와대에 돌아와서, 필자가 보고 느낀 기적 같은 일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행 문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 기행 문을 국회에 보내 회보에 실었습니다.
당시 국회의원들이 이 기행 문을 읽고 눈물을 흘린 의원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코 우리는 독일 정부와 국민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난에 찌든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끌어올려 부강한 나라를 만드신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 탄신 일을 맞이
해서 다시 한번 그분의 업적과 애국정신을 가슴으로 추모하는 바입니다.
-민족 중흥회 양재윤 박사 -
<옮긴 글>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제2의 박정희 대통령같은분이
우리나라 대통령 을
간절히 기원해봅니다
늘 건강하세요.
박정희대통령의 경제적 공적을 인정한다고 해서 독재와 인권침해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독재와 인권침해를 비판한다고 해서 산업화의 경제적 성과까지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국의 근대사를 이해할 때는 오히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했다는 역설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박정희 시대는
**“경제적으로는 매우 빠른 산업화를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노동권·분배·인권에 상당한 비용을 치른 시대”**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은, 한국의 경제성장을 박정희대통령 개인 한 사람의 공으로만 설명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1950년대의 농지개혁과 교육 확대, 미국의 원조와 시장, 기업가들의 투자, 노동자들의 노동, 국제경제 환경, 이후 정부들의 정책이 모두 연결되어 오늘날의 한국 경제를 만들었습니다. 1949년에도 이미 정부가 산업부흥 5개년계획을 세우는 등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구상은 박정희 대통령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를 기억하여 봅니다.그러면서 박정희 대통령 님이 이룩한 업적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어떤 위치에
와 있는가를 보면서 박정희 대통령 님의 공적에 대한 평가를 할 때 어느 한 쪽은 평가의 위치에서 더하고 빼기를 하되
어느 쪽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할 가를 생각하여 봅니다.
저는 양 김(김대중 김영삼)의 사사건건 반대로 아무 것도 진척을 할 수 없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밀려 박 대통령 님이
꿈꾼 이상을 펼칠 수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미국에 가서 그 모욕을 당하고 독일에 가서
라인 강의 기적을 배우지 안 하셨다면 그런 실천을 할 수 있었을까요? 도로 건설, 차 생산 철광 산업 육성, 정유 시설
도입 등 그보다 더 가까운 경제개발 로드 맵을 배울 수 있을까요? 배워 실천하려 하는데 그렇게 심한 반대를 당하고
그대로 멈췄다면 5000년 가난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아이러니한 생각을 해봅니다.양 김이 기여한 게 있습니다.양 김이 모든 것을 거부하며 막으려고 하였기에 거기에 굽히지
않고 더 강한 마음으로 18년을 통치할 수 있었기에 오늘의 한강의 기적이 이루어졌다 봅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