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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웅장한 스케일로 돌아왔다.
24년 만의 화려한 컴백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천재성과 예술성에 호평이 자자한 '리들리 스콧'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지금 장안의 화제를 모으고 있는 바로 그 작품, '글래디에이터 2'였다.
내가 30대 후반이었을 때 이 영화를 처음으로 접했는데 금년에 내가 환갑이니 1편과 2편 사이에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단 말인가.
첫 상영 후 지금까지 정말로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무수한 세월이 흘렀지만 내 가슴과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이름이 하나 있다.
그때 받았던 감동과 뭉클함이 나의 골수에 새겨졌기 때문이리라.
그는 용맹, 자상함, 지략, 인간애, 겸손의 복합적인 캐릭터로 전 세계인의 사랑과 찬미를 한몸에 받았던 로마제국의 위대한 장수 '막시무스'(러셀 크로우)였다.
지금으로부터 1844년 전인 서기 180년.
그 당시 로마제국은 세상의 옴파로스였고 지구의 중심이었다.
선정을 펼치며 영토를 확장해 나갔던 뛰어난 군주, 그의 치세는 여전헸지만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황제'는 나이가 들어 점점 쇠약해 지고 있었다.
'막시무스'는 그런 황제를 보필하며 각종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파죽지세로 로마의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황제는 폐단이 많고 독재로 흐르기 쉬운 '군주제'를 폐지하고 원로원과 백성들을 중시하는 '공화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어질고 공명정대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리처드 해리스) 황제'를 따르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만인지상으로서 구름같은 사람들을 거느렸지만 끝까지 신뢰하며 애정했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대동소이한 인간세상의 특징이었다.
정작 후사를 맡길 사람이 별로 없었다.
황제가 자신의 아들보다 더 신뢰했던 유일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막시무스'였다.
제왕의 아들, '코모두스(호아킨 피닉스)'에게 '막시무스'는 강력한 경쟁자였고 눈엣가시였다.
그리고 온갖 계략을 꾸며서라도 끝내 제거해야만 했던 대상일 뿐이었다.
한편, 황제의 딸로서 총애를 받았고 영민하고 현숙했던 여인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코모두스'의 누나였으며 어린 아들, '루시우스'를 양육하고 있었던 '루실라 공주(코니 닐슨)'였다.
'루실라'가 남자였으면 '아울렐리우스'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후계자로 삼았을 터였다.
하지만 당시 로마에선 여자를 제왕으로 옹립하거나 여성이 왕권을 계승할 수 없었다.
그건 건국 이래 철칙으로 지켜졌던 지엄한 계율이었다.
황제가 로마의 앞날을 '막시무스'에게 당부하자, 그 사실에 분노한 아들은 노쇠한 아버지를 목 졸라 살해하고 스스로 권자에 앉았으며 눈엣가시였던 '막시무스'를 처단하라 명령했다.
친위대 병사들이 깊은 숲속에서 장군을 처단하기 직전에 숱한 전장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백전노장 '막시무스'는 오히려 친위대 병사들을 제거하고 부상을 당한 채 구사일생으로 현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몇 날 며칠, 말을 달려 자신의 고향으로 달려갔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는 곳이었다.
비겁하고 악날한 '코모두스'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족들의 안위가 몹시도 걱정되었다.
잠시도 지체할 틈이 없었다.
어렵고 힘들게 자신의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가옥은 쏙대밭과 잿더비로 돌변해 있었고 아품과 절망 속에 잠긴 연기만 뭉게뭉게 소리없이 피어오르고 았었다.
그리고 검게 타버린 두 구의 시신.
바로 아내와 아들의 처참한 주검이었다.
냉혈안 같은 '코모두스'의 악행이었다.
하늘이 무너졌고 땅이 꺼졌다.
눈물 콧물을 쏟으며 시신을 수습해 땅에 묻은 채 '막시무스'는 그곳에서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 그 길을 지나가던 노예상단이 그를 발견했고, 묻지도 따지지도 못한 채 장군은 미천한 노예로 팔려갔다.
하지만 장군의 올곧은 품성과 예리한 눈빛을 알아본 이가 있었다.
그도 한때엔 노예 검투사였지만 '콜로세움'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최후의 승자가 되었고, 그 댓가로 황제로부터 자유의 목검을 하사받아 평민이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끝내 검투사들의 트레이더와 구단주로 활약하며 막대한 부를 거머쥔, 철저한 장사꾼 '프로시모(올리버 리드)'였다.
'막시무스'는 스페인 출신의 노예 검투사라는 뜻의 '스페냐드'로 불렸다.
삼인행이면 필유아사라고 했던가.
그는 '프로시모'를 통해 검투사로서의 마인드와 처세 그리고 최후에 황제를 만나 복수를 하기까지의 숱한 과정과 절차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익하며 훗날을 도모했다.
'프로시모'는 철저한 장사꾼이자 핏물을 팔아 부를 일군 투기꾼이었지만 그래도 그에게서 배울 게 적지 않았다.
유사 이래로 폭군이나 독재자들은 백성들의 이목을 성대한 스포츠나 깜짝 이벤트 또는 각종 행사로 돌리고 싶어했다.
그건 '전두환'이나 '코모두스'도 마찬가지였다.
'전두환'은 문화계 족보에도 없었던 '국풍81'을 시작으로 '프로야구 출범'(85), '올림픽 유치전 돌입' 같은 3S 정책을 펼쳤다.
그 '국풍81'로 한순간에 스타덤에 뛰어오른 '잊혀진 계절'의 '이용' 같은 가수도 있었다.
"에휴~~"
전두환, 노태우 얘기는 더 이상 입에 담고 싶지도 않다.
그냥 넘어가자.
마찬가지로 시기 질투의 화신이자 능력도 없었던 '코모두스'도 자신의 정당성과 무능에 대한 로마시민들의 비판과 야유를 콜로세움의 피비린내와 흑먼지 바람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압제와 모반의 시대에 위정자들이 자주 쓰는 계책일 터였다.
무려 150일 이상 그렇게 로마의 한 복판에서 뜨거운 핏물과 살육의 제전이 막을 올렸다.
'프로시모'가 그 파시를 피해 갈 수도 없었고, 골드러시를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에겐 금화를 쓸어담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프로시모' 구단의 전무후무한 에이스는 누가 뭐래도 단연 '스페냐드'였다.
그는 파죽지세로 연전연승을 이어가고 있었다.
끝내 황제도, 백성들도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아니, 군계일학이었던 그를 알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스페냐드'가 실상은 로마제국의 전설적인 장수였으며 선왕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후사를 당부했던 불세출의 명장, '막시무스'였다는 것을.
'스페냐드'의 정체를 알게 되자 '코모두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그를 사랑했던 '루실라'는 그의 재귀에 더더욱 애간장이 녹았다.
'루실라'의 어린 아들, '루시우스'도 '막시무스'를 미래의 롤모델이자 멘토로서 한없이 흠모하고 있었다.
'막시무스'에겐 한 가지 소망이 골수에 사무쳤다.
"살아서 실패하면 죽어서라도 '코모두스'에게 복수를 하겠다"며 자나깨나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와신상담이었다.
누나 '루실라'는 동생이 아버지를 죽인 걸 알고 있었다.
그때 영민했던 '루실라'가 보였던 행동은 단 두 가지였다.
첫번째는 동생 '코모두스'의 뺨을 있는 힘껫 후려진 것이었다.
그것은 증오와 적개심에 대한 극명한 표출이었다.
두번째는 '코모두스'의 손을 잡고 황제반지에 키스를 보낸 것이었다.
그건 같은 혈족이기 이전에 이제는 새로운 황제에 대한 복종과 경외를 상징하는 강력한 메타포였다.
실질적으로 존경했거나 권위를 인정한 건 결단코 아니었다.
'루실라'는 여성이었지만 야심도 컸고 똑똑했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루시우스'의 훗날을 위한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
일단 폭풍우는 피해야 했다.
그리고 '루시우스'가 성장할 때까지 길고 긴 시간을 인내해야만 했다.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상반된 두 가지 행동이 아버지의 죽음 직후, 단 몇 초 사이에 자연스럽게 표출될 수 있었던 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다림과 눈물로써 서슬퍼런 동생의 압제를 견디고 또 견뎌왔는 지를 단박에 대변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바로 그 대목이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렸고 저릿했다.
친 누나에게 자신의 아이를 낳으라며 윽박지르는 자가 어찌 정상적인 인간일 수 있겠는가.
'코모두스'는 황제이기 이전에 평범한 인간이기를 포기한 패륜아 같은 캐릭터였다.
오랜 세월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채 영혼과 양심이 심각하게 비틀리고 굴절된 미치광이에 불과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막시무스'의 화려한 등장.
그를 애타게 사랑하며 흠모했던 '루실라', 어린 '루시우스', 원로원의 노련한 정치인들, 구름같은 백성들까지 혜성처럼 등장한 위대한 사령관, '막시무스'를 힘차게 연호했다.
뜨겁고 간절한 외침이었다.
"막시무스, 막시무스, 막시무스"
나는 지금까지 이 영화를 예닐곱 번 정도 봤는데 감상할 때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샘이 터졌다.
시대의 아픔과 백성들의 절망을 푸근하게 다독여 줄 단 한 사람, 바로 '구세주의 재림' 같은 감정이입 앞에서 내 감성은 작은 윤슬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힘없는 부평초일 수밖에 없었다.
딱 그 존재 그 느낌, 그대로였다.
매번 같은 정감이 출렁거렸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코모두스'에게 그의 등장은 설상가상이요 진퇴양난이었다.
정말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악평이 자자했던 황제는 원형 경기장에서 둘만의 대결로 '막시무스'를 제거한 뒤 자신의 정당성을 만방에 알리고 백성들로부터 황제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랬을 것이다.
간절히 그렇게 되기를 염원했고 갈망했다.
그러나 황제는 콜로세움에서 '막시무스'와 일대일로 대적할 '깜'이 아니었다.
그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부당한 편법 외엔 대안이 없었다.
형틀에 묶여 있던 그에게 다가가 비수로 급소를 찔렀다.
그리고는 갑옷을 입혀 상처를 가렸고 자신의 악행을 위장했다.
그랬어도 여전히 적수가 되지 못했다.
'코모두스'는 끝내 '막시무스'의 손에 절명했고, 불세출의 장수도 원형 경기장 땅바닥으로 고목처럼 쓰러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쓰러지자 울며 불며 뛰어온 '루실라'에게 '막시무스'가 나즈막하게 던진 마지막 일성은 어린 '루시우스'의 안위에 대한 말이었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루시우스'가 '막시무스'와 '루실라'의 DNA를 절반씩 물려받고 태어난 아들이란 것을.
거목이 쓰러지자 짧은 순간 백주의 콜로세움엔 개미새끼 하나 움직이지 않았고 둔중한 침묵과 고요가 세상의 중심을 짓눌렀다.
위대하면서도 항상 겸손했던 '막시무스'의 눈꺼풀도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그의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갈 때, 고향 마을의 드넓은 밀밭을 지나가며 잘 여문 곡식의 알갱이들을 자신의 왼손으로 어루만지던 '엔딩씬'이 스크린에 투영되었다.
그때 영화음악의 거장, '한스 짐머'가 작곡하고 영혼을 울리는 보컬, '리사 제라드'가 불렀던 '글래디에이터'의 불후의 OST, 'Now we are free'가 낮게 깔리며 흘렀다.
"아아, 이 가슴 먹먹한 애절함과 안타까움이라니....."
이 마지막 처연한 아픔에 대해 부연한들 무엇하겠는가.
어차피 사족일 게 뻔한데.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전편의 시놉시스를 길게 나열했던 건 속편의 스토리텔링이 대부분 전편의 컨텐츠 자양분을 숙주 삼아 발아하고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같은 뿌리에 다른 전개, 즉 동근이주(同根異柱)적 패턴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2편에서도 미친 스케일과 전투장면은 여전했지만 감흥의 깊이와 파장은 달랐다.
특히 지중해에서 펼쳐진 스펙터클한 '해상전'과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공성전'은 압권이었고 액션은 화려했지만 전편에서 이미 학습된 관객들의 잠든 심연을 흔들어 깨우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장면 장면 마다에 관객들의 감성을 저격하는 스타카토와 임팩트도 미약했다.
또한 속편이 전편을 뛰어넘기 힘든 가장 중요한 존재론적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러셀 크로우'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대체불가한 캐릭터를 과연 이 시대 어떤 '페르소나'가 있어 그의 고유한 매력과 감동을 더 심화시키고 확장시킬 수 있단 말인가.
영화관에 가기 전에도 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실제적으로도 글래디에이터에서 '러셀 크로우'의 위상과 그림자는 너무나도 크고 깊었다.
그래도 기대감을 안고 영화관을 찾아갔다.
어젯밤 상영관에서 2편을 감상했다.
폭군 '코모두스'가 죽자 세상은 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넘어갈 것으로 기대했으나 실상은 더욱 암담했다.
그리고 어지러운 현실은 왕위 계승의 정당성과 적통을 주장하는 '루실라'의 기대와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권력 앞에서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강력한 리더십이 사라지자 오히려 그 반대로 돌변했다.
배반의 눈동자들이 더욱 기승을 부렸고 중상모략이 횡행했다.
'루실라'는 아들을 위해 결단을 내려야 했다.
시국이 시시각각으로 급변하고 있었다.
무방비와 막연한 기다림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손자이자 적자인 자신의 아들, '루시우스'의 죽음을 의미했다.
불안했다.
"루시우스, 로마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거라. 가서 목슴을 건사한 채 힘을 기르고 훗날을 도모하거라. 단 한시도 로마제국의 황손으로서 힘과 명예를 잊어선 안된다"
'루시우스'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분루를 삼키며 어머니 곁을 떠났다.
어렸어도 자신의 신분과 출신 그리고 현재의 처지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중해 건너 아프리카 북단의 '누미디아'로 흘러들었고 그곳에서 용맹한 전사로 성장했다.
'누미디아'는 작금의 사하라 사막 북부에 위치한 나라, '알제리'의 땅이었다.
BC 6세기 경부터 지중해 제해권을 놓고 로마와 건곡일척 죽음의 패권전쟁에 국운을 걸었던 '카르타고'의 근거지였다.
역사와 전통이 깊은 비옥한 땅이었다.
지중해와 연해 있는 북아프리카 지역은 각종 곡물과 과일, 기름과 무기, 수산물과 철 등 다양한 자원과 물산이 풍부한 곳이라 로마의 입장에선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엘리시움'이었다.
그런 엘리시움을 포기하거나 반기를 좌시하자는 주장은 제국의 몰락을 가속하는 모반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코모두스' 사망 후로 로마의 왕권은 몇 차례 부침이 있었다.
그 부침 이후에도 여전히 확고한 기반을 수립하지 못한 채 형제가 함께 황제에 즉위하는 기형적 통치체제가 출범했다.
서기 209년에서 211년까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공동 황제 통치가 시작되었다.
누가 봐도 갈등과 파열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특이한 형제 통치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형인 '카라칼라'와 동생인 '게타'가 전면에 나섰지만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는 없었다.
그건 역사에도, 자연현상에도, 복잡한 안간사에도 균형과 안정을 저해하는 불완전한 시스템일 뿐이었다.
언젠가 둘 중 누군가는 선혈을 쏟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을 배태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황제 '아우렐리우스' 치하에서 '막시무스'의 부하로 적잖은 공을 세웠던 '아키우스' 장군이 총사령관이 되어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로마에 반기를 든 '누미디아'를 정벌하러 지중해를 건너갔다.
함대의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엄청난 규모였다.
피비린내 나는 쟁투와 인산인해를 이루는 살상이 무참하게 자행될 게 뻔했다.
로마의 사령관은 온갖 전투에서 이골이 난 '아카시우스'였으나 북아프리카의 선봉엔 '루실라'의 아들인 신출내기 '루시우스(폴 메스칼)'가 선봉에서 결사항전을 불태우고 있었다.
치열하고 살벌한 해상전과 공성전이 펼쳐졌다.
단숨에 관객을 사로잡았다.
대단한 볼거리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스케일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던 밀리터리 블록버스터가 영화 초반 관객들에게 강력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잠시도 시선을 뗄 수 없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러나 제 아무리 용감한 '누미디아 병사들'이라고 해도 예리하게 벼려진 로마군의 칼날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견고했던 성은 끝내 함락되었고 무수한 병사들이 참혹하게 유명을 달리했다.
끝없는 주검들이 지중해의 검푸른 바다 위에 널브러져 있었고 선혈이 흥건했다.
'루시우스'를 비롯해 살아남은 수많은 병사들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비천한 노예로 전락한 채 노예상들에게 팔려나갔다.
전편의 '프로시모'와 마찬가지로 그 노예들을 검투사로 조련하여 돈을 벌고 무기를 만들어 로마군에 제공하는 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였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나 피와 무기를 팔아 부와 권력을 거머쥐는 인간들이 존재했다.
'마크리누스'도 노예 검투사 출신이었다.
최후 승자가 되어 결국 자유인이 되었으며 피로 얼룩진 세상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돈을 긁어 모아
훗날 원로원의 집정관을 거쳐 황제의 반열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장성한 '루시우스'도 '마크리누스'의 휘하에 있었던 노예 검투사였다.
로마에 대한 '루시우스'의 원초적인 분노와 적개심을 '마크리누스'가 단박에 알아본 것이었다.
역시 전문가에겐 될 성부른 떡잎을 간파하는 섬세한 눈썰미가 있었다.
경륜과 욕심으로 시대의 흐름을 읽는 데 탁월했던 '마크리누스'는 부와 권력을 움켜쥔 뒤에 권력의 중심부로 진출했고, 특유의 정치력과 처세술로 형인 '카라칼라'와 결탁하여 동생인 '게타'를 죽였다.
그리고 형을 단독 황제로 다시 옹립했다.
'카라칼라'가 스물네 살 때의 일이었다.
'카라칼라'는 동생을 죽인 다음엔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악몽에 시달렸고 그럴수록 폭력성, 변덕, 조울증은 날로 심해졌다.
그때 그가 선택했던 타계책도 '코모두스'의 결정과 동일했다.
콜로세움의 선혈로 로마시민들의 환심도 사고 자신의 실정에도 위장막을 치고 싶었다.
검투사들의 치열한 싸움에 관중들의 환호와 갈채가 난무하던 순간, 야망에 눈이 먼 '마크리누스'는 황제의 귀에 대침을 꽂아넣어 황제를 살해했다.
반역과 모반 그리고 배신과 야만이 횡행했던 시대였다.
한편 '막시무스'가 그랬던 것처럼 '루시우스'도 콜로세움에서 연전연승하며 로마에 유명세를 떨쳤다.
단 한순간도 어머니가 당부했던 '힘과 명예'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결전이 있을 때마다 그를 따르는 휘하 검투사들과 함께 결전에 임하는 주문을 큰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가 있는 곳에 죽음은 없고 죽음이 있는 곳에 우리는 없다."
그 외침은 간절한 기도문이었고 심장에 선명하게 새겨진 검투사들의 결의문이었다.
마치 마애비문 같이 지워지지 않았던 비장한 결구였다.
그가 승리할 때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원형 경기장은 요란하게 들썩거렸다.
끝내 로마의 백성들은 신들린 검투사, '루시우스'의 존재와 신분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그의 모친인 '루실라'도 모를 수 없었다.
아들이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한 것을 깨달았고 여러번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비로소 아들에게 아버지가 '막시무스'였음을 고백했다.
용감무쌍한 청년이 된 아들에게 아버지의 반지와 생전에 사용했던 검과 갑옷을 선사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힘과 명예'를 강조했고 한시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노예 검투사에서 승승장구하여 양손에 권력을 휘어잡은 '마크리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손자로서 적통을 인정받은, 걸출한 신예 '루시우스'.
과거에 둘은 한솥밥을 먹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이들도 양립할 수 없는 견원지간으로 돌변했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었다.
형제간에도, 부부간에도,부모 지식 사이에도 분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권력의 속성이었다.
그렇게 로마는 두 파로 갈라졌다.
현재와 같이 황제 중심주의를 따르는 군주파와 백성과 원로원 중심의 공화제를 표방하는 공화파로 대별되었다.
군주파의 중심에선 '마크리누스'가 지휘봉을 잡고 있었고, 공화파는 '루시우스'가 맨 앞에서 대오를 이끌었다.
군대도, 정치인도,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양분되어 서로를 증오의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 군사적인 충돌은 없었다.
양 진영의 수장, 두 사람의 결투로 극심한 분열과 반목은 드디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같은 로마 군인들끼리 선혈을 흩뿌리며 서로를 사지로 내몰고 싶지는 않았다.
늙고 권모술수에 능했던 '마크리누스'가 젊고 당찬 신예 '루시우스'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그의 아버지였던 '막시무스'와 황제 '코모두스'가 그랬던 것처럼.
둘의 결투에서 '마크리누스'가 죽자 다시 로마는 '루시우스'를 중심으로 급속한 대통합을 구축했다.
해피엔딩이었다.
2편에선 피에 굶주린 고릴라와의 전투, 저돌적인 코뿔소와의 결투, 콜로세움에 물을 가득 채운 다음 전투함을 띄워 결전했던 수상전 등등 허를 찌르는 볼거리과 신선한 임팩트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관객들의 가슴을 후비는 감동의 비등점을 어느 타이밍에 둘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적어 보였다.
물론 내 개인적인 평가이므로 아직 영화를 감상하지 못한 분들에겐 또 다른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편은 누가 봐도 여느 작품과 비교를 허락치 않았던, 기반이 탄탄했고 짜임새가 뛰어났던 대서사였다.
그리고 감동으로 얼룩진 유장한 장편 대하 사극이었다.
작품 개봉 당시 각종 영화제가 줄 수 있는 모든 찬사를 한몸에 받았고 온갖 시상식을 휩쓸었다.
'리들리 스콧' 감독도 단박에 문화예술계의 명인으로 등극했으며 그를 향한 칭송이 그칠 날이 없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러셀 크로우'와 '폴 메스칼' 만큼이나 '막시무스'와 그의 아들 '루시우스'는 품격과 카리스마 그리고 작품 속 캐릭터의 인간적 매력과 마그마처럼 심연에서 분출하는 감동의 울림 등등 여러 면에서 결이 달랐다.
주인공의 기세도, 캐릭터의 위용도, 연기자의 인지도와 연기력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솔직하게 고백한다.
글래디에이터는 1편도, 2편도 '막시무스'를 위한, '막시무스'에 의한, '막시무스'의 대서사였고, 그의 눈물이었으며 비원이었다.
스토리텔링의 개연성과 1편, 2편의 연결성 그리고 각 씬마다 스타카토처럼 톡톡 튀는 가슴 뭉클함과 몰입감이 전작에 비해 미진한 듯하여 아쉬움으로 남았다.
상술한 바와 같이 개인적인 느낌표와 호,불호가 다를 수 있으니 부디 이 후기가 독자들에게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세월이 간다.
빠르게 간다.
속절없이 흐른다.
24년 전에 '루실라' 역을 맡아 훌륭하게 열연함으로써 세상 남자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뛰어난 여배우 '코니 닐슨'이 곧 환갑이 된다.
현재 59세다.
그렇게 곱고 희던 그녀도 세월을 비켜가진 못했다.
어느새 나이 든 모습에 적잖게 아쉬움이 들기도 했지만 일견 안도감도 들었다.
한때 절세가인으로 평가 받으며 세인들의 칭송이 끊이지 않았던 '코니 닐슨'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군들 세월을 거스를 수 있을까.
모 대학병원의 이사장이자 모 대학의 여성 총장님 같이 우주 최강 동안으로 평가받으며 고운 피부를 자랑하는 사람도 있고 실제로 멋지고 매끈한 외모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속 깊고 현숙하며 지혜로운 여인으로 곱게 늙어가기를, 과거에도 지금도 그 배우의 펜이었던 한 사람으로서 그녀가 항상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기도하고 있다.
또한 힘찬 성원과 격려를 보낸다.
마지막으로 각 배우들의 열연에도 깊은 감사를 전하지만,
1937년 생으로 현재 80대 후반인 '리들리 스콧'의 식지 않는 예술혼과 그 뜨거운 열정에 진심어린 오마주를 보낸다.
"리들리 스콧 감독님.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 연세에 이런 대작을 창조해 내시다니요. 언제까지나 건강 잘 유지하시길 기도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건재하는 우리 세상, 얼마나 멋지고 감사한 일인가.
2024년 11월 24일.
일요일 오후에.
감독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오마주를 보내며
글래디에이터 2, 후기를 남겨 본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