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입니다. 저절로 일찍 일어났어요. 전쟁 중에서도 사랑은 해야 하고 죽기 전까지는 먹어야 하니 힘을 내서 일터로 나갑시다. 아모스 서가 지나가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요. 몇 년 만에 Q.D(Quiet Day)를 했어요. 안 그러려고 해도 어느새 강한 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한 자 앞에서는 강한 존재가 돼버리는 것이 이미 반세기를 산 내 인생의 결론입니다. 만약 강한 자가 내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약한 자가 함부로 대해도 좋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기독교의 산상 수훈이나 칸트의 도덕 법칙을 떠나서 절대로 소인배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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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음식점 천지인데 정작 밥 먹을 식당이 없어서 요새 중국 집을 자주 갑니다. 경기가 어려우면 중국집이 잘 되는 이유가 뭘까요? 정의를 선지자 아모스가 전하는 메시지는 무시무시한 심판입니다. 왜일까? '파괴와 해체'는 건설과 재 창조의 시작입니다. 죄로 물든 옛 질서를 파멸하지 않고서 도저히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 집을 지을 땅에 낡은 건물이 있으면 그 건물을 헐어내고 집을 지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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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낡은 건물을 헐어내고 집을 짓는 것이 빈 공터에 집을 짓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렵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이 은혜 아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 기존의 인간을 완전히 철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존의 인간을 철거해 내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사상이나 가치관이나 행함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일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아니 오히려 부서진 잔해들처럼 거치적거리고 방해가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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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란 논리적으로 상대를 설득할 수 없을 때 물리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엄 사태를 보면서 폭력은 내 전유물인 줄 알았더니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천사 같은 얼굴로 폭력을 사용하면서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것 같아 놀랐습니다. 영화감독이나 가수 배우 같은 연예인들의 욕망이 여의도와 광화문에서 들통났고 보수 VS 진보의 복수 대 혈전은 현재도 진행형입니다. 헌재의 재판을 6인 체제로 할 것인가, 9인 체제로 할 것인가 놓고 여야가 주판을 때리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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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하만이 모르드게를 죽이기 위해 쳐 놓은 십자가는 폭력을 잠재우는 유일한 대안이 아닙니까? 낙수 효과, 대기업과 고소득층의 소득을 먼저 늘려주면 그들의 소비와 투자 증가로 중소기업과 저소득층도 혜택을 볼 수 있다는 논지지만 현실은 사뭇 다릅니다. 물론 조국의 지킴이 삼성이 죽어라 죽어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삼성도 새 창조되어야 하고 조국 대한민국도 새로운 시작이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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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든 부가 공평하게 분배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아모스는 부의 편중 보다 '의의 부재'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찐빵 시절에는 눈물 콧물 빼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신앙생활을 했었습니다. 신학도 몰랐고 주석도 없었지만 적어도 가면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위선의 냄새는 고약하지요. 죄를 짓고 그 죄를 감추면서 선한 척해야 하니 그 고생이 심할 것입니다. 착각은 자유지만 진실은 착각과 다를 수 있기에 가끔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보면서 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인간은 바깥에서 오는 위협에도 약하지만, 결국 자신을 파괴하기도 하고 자멸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닙니까? 전략적 모호성과 persona가 다를까.
2024.12.16.mon.Cl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