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 판사유감(문유석著, 21세기북스刊)
지난주 이야기는 “미쳤다”였습니다. 새 정부들어 “비정상의 정상화”를 모토로 여러 가지 관행과 제도를 정상화 한다 하는데 그만큼 우리 사회가 비정상적인 것이 많다는 이야기이고 비정상 상태에서 살아왔으니 미친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남이 보던 안보던 줄창 끄적거리고 있으니 따지고 보면 저도 정상은 아닙니다. 오늘은 책 이야기를 드릴까 합니다.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는 형평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눈을 가리고 저울을 들고 있다. 법을 집행함에 있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과연 판사들이 재판과정에서 정상을 참작하는 범위는 어느 정도일까? 궁금한 대목중의 하나였다. 피도 눈물도 없이 눈을 가리고 저울의 척도대로 형을 언도하는 것일까? 아니면 안대를 풀고 저울 없이 엿장수 마음대로 양형을 하는 것일까?
저자는 현직부장판사로 근 10년간 재판과정에서 느낀 점들을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려왔다. 악의 무리를 몰아내겠다는 정의감에 불타 법조인인 된 것이 아니고 그저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위해 판사가 되어 재판을 하면서 세상을 알아가는 별난 판사가 말하고 싶은 법과 사람 그리고 정의는 무엇일까?
젊은 시절 단독판사를 담당하며 무전취식을 일삼던 피고의 전과를 보니 비슷비슷한 죄목으로 전과 20범이었다. 당시 잡혀온 죄목도 그러했다. 출감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충남에서부터 강릉까지 갔는데 택시비가 없었다. “피고인은 출소 후 살길이 막막하니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닙니까? 콩밥도 국민의 혈세입니다. 피고인에게는 콩밥도 아깝습니다.” “콩밥도 아깝다니요? 저는 이 나라 국민도 아닙니까? 사람도 아닙니까? 친구를 찾으러 강릉에 갔는데 친구가 없었을 뿐입니다.” 나는 움찔했고 다음날 피고인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고 사과를 했다.
2005년 파산부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학창시절 “일단 맺어진 계약은 준수되어야 한다.”고 배웠고 다른 판사가 빚을 갚으라고 판결한 내용을 뒤집어 빚잔치를 하게 만드는 파산부는 참으로 희한한 곳이었다. A씨는 중소기업경영자였는데 거래처의 연쇄부도로 연대보증을 했던 A씨가 빚쟁이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영국유학중으로 전형적인 재산 빼돌리기 수법 같았다.
남의 빚도 갚지 못하는데 영국유학을 보내냐 했더니 아이들이 장학금을 받고 애 엄마는 식당일을 한다고 했다. 의심이 들어 뒷조사를 하니 사실이었다. 아이들은 음악영재로 장학생이었고 애 엄마는 식당일을 하고 있었고 A씨가 송금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파산부의 판사들이 채무자에게 채무면책권을 남용하는 것이 아니나 면책한 비율은 99%입니다. 그렇다고 나머지 1%의 채무자가 흉악한 사기꾼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고 이러저러한 사유로 면책을 받지 못한 선량한 시민들이 많습니다. 파산한 기업은 청산되어 소멸되지만 파산한 인간은 계속 살아가야 하며 도전하다가 쓰러진 인간에게는 무덤대신 두 번째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활자가 아닌 사람을 통해 배운 겁니다.
베트남에서 시집온 며느리가 문화적 이질감과 고부갈등으로 시어머니를 독살하려했다. 밥에 쥐약을 넣은 양은 미미하여 치사량에는 이르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처벌을 원했으나 손녀딸은 예뻐했고 남편은 아직도 베트남 아내를 사랑했으나 어머니를 독살하려 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고민 끝에 판결을 내렸다. 피고인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한다. 다만 판결일로부터 5년간 형을 유예한다. 피고인에게 3년간 보호관찰을 받을 것과 양로원봉사활동 320시간의 사회봉사 및 심리치료, 사회적응훈련 40시간의 수강을 명했다.
폭력전과가 10여 차례 있는 50대가 무전취식과 여주인을 구타한 죄로 1년형을 받았다는 기사의 댓글은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엄벌에 처해야하는데 우리나라 법원의 온정주의로 인해 범죄가 끊이지 않는다고... 그렇다, 양형은 참으로 어렵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엄벌주의는 인간의 본성에는 가장 부합하는 제도이며 고대문명에서는 살인자는 죽이고 간음 자는 거세하는 등 상당히 엄한 법률을 갖고 있었고 현대에도 아랍권, 중국, 북한의 형벌은 상당히 엄합니다.
하지만 엄벌주의가 범죄율을 낮추는 특효약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엄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선진국 중 엄한편인 미국이 모범적이라고 하나 미국의 수감자수는 200만 명을 넘으며 평균 수감기간은 34개월로 프랑스의 4배입니다. 엄벌주의에 비해 범죄율을 낮추는 데는 필벌주의가 효과적인지 모릅니다. 범죄를 저질러 처벌받을 확률이 높다면 충동범죄를 제외한 일반범죄 확률이 상당히 떨어집니다.
최근 1년간 살인죄를 포함하며 297건의 선고형량을 보면 징역10년이 50건(16.84%), 15년이 31건(10.44%)로 15년 이하가 250건(84.10%)입니다. 국민의 법 감정과 배치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한 생명을 빼앗고도 극형인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민의 법 감정에 반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고 범죄자들도 사람1명을 죽이면 13년 정도 선고받는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중벌주의에 치우쳤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2010.04.15 형법개정으로 유기징역의 상한이 15년에서 30년으로 상향조정되었습니다. 이처럼 국민 개개인의 법 감정, 의견과 법적 제도와 선고가 일치 하지는 않습니다.
하버드 로스쿨에서 부탄의 공주와 같이 공부를 했는데 국민소득 2천불이 되지 않는 나라인데 교육과 의료를 국가가 보장하고 국민행복도가 세계 1위인 나라입니다. 국왕은 국정기본ㅊㄹ학이 국민소득증대가 아닌 국민 총행복 극대화이며 국정 철학은 의도적인 저속성장과 개발지연 입니다. 이 나라는 소박하나마 전통적 가치와 문화 속에 상당히 안정되어 있고 경쟁이 치열하지 않습니다.
돈이 많다고 산해진미를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는 것보다 생일에 부모님 손을 잡고 중국집에서 먹는 짜장면이 더욱 맛있을 수 있습니다. 100배 많은 재화를 소비하거나 100배 더 비싼 재화를 소비해도 인간의 뇌가 지각할 수 있는 쾌락이 100배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부유층 마약사건을 보면 권태가 배경입니다. 좋은 차를 타도 좋은 것을 먹어도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가도 시큰둥하니 마약으로 뇌를 속이는 겁니다. 뭘 해도 감동이 없는 삶이란 겉만 번지르르한 지옥이라는 것을 법정에서 배워봅니다. 부탄 공주에게 놀러 갈 테니 왕궁에서 재워주겠냐고 농담 삼아 물었더니 쿨 하게 오케이 했습니다. 자기네 왕궁은 검소한 목조주택에 불과하다나 뭐라나.
옆방의 소년부판사는 마른체구, 뿔테안경의 교회오빠 인상입니다. 인천지역의 본드흡입사건비율이 타지방에 비해 높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철물점에 본드판매를 자제해 달라는 공문을 보냅니다. 더 나아가 충북에 있는 본드공장에 찾아가 사장을 설득해 인천에 납품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판사가 영업방해를 하고 다니는 거죠.
연세 지긋한 판사님은 호통쟁이 입니다. 학교폭력으로 잡혀온 아이에게는 공부만 잘하면 다야 전교 9등이나 하면서 친구 돈을 뺐어? 쩌렁쩌렁하게 호통을 치면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립니다. 담임선생님에게도 돈 없는 아이들을 위해 법정에 와본 적이 있냐? 힘없는 아이들도 돌봐야지.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안보이는 것도 보세요! 부모에게도 호통을 친다. 어머니 자꾸 일진이 아니라고 하는데 아이들이 몰려다니면 일진이예요. 그걸 모르고 계시는데 어떻게 아이교육을 시킬 겁니까?
심지어는 아이들을 법정구석에 꿇어앉히고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를 10번씩 외치게도 한답니다. 난생 처음 제대로 혼나보는 아이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매사에 꼭 선명한 결론을 내리려고 무리하는 것은 오만과 동시에 무지라고 했는데 저는 법원은 보수적이고 고루하고 피도 눈물도 없이 매뉴얼대로 선고를 하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법정에도 인정이 있고 판사님들 사회도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는 곳이네요. 제 무식의 소치였습니다. 아 ~ 아직 대한민국은 살만한 곳입니다.
본책의 저자인 문판사님은 소통을 위해 법관게시판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대통령의 글쓰기”의 저자인 강원국님은 대우증권 신입사원때창립 20주년 사사발간 보조업무를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하여 글쟁이가 직업이 된 분이다. 두분 모두 나하고 유사한 동기와 방법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나도 소통을 위해, 직원들의 마음을 훔쳐 안전의식을 고취해보고자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는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만나서 동질감을 찾아봐야 겠다. 문판사와 만나려면 먼저 죄를 지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2014. 09.15 기술개발실 임순형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