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산불이 앗아간 것
때는 왜정시대 후반, 아버지는 돈을 벌어보겠다고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향은 경북 포항에 붙어있는 청하(淸河)!
맑은 형산강 물이 흐르는 평야지대에서 여섯 식구가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아왔다.
그 아버지는 셋째.
일본에 가면 고향에서 보다는 삶이 나을 것 같았다. 오사카 근처에 자리 잡고 막일을 했다.
술이 취하면 늘 청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학교에 갔으나 ‘조센징’이라는 딱지가 붙어서 친구가 없었다. 그래도 삐뚜루 자라지 않은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교육 때문이었다.
그가 젤로 좋아하는 것은 기타!
기타를 치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아버지는 해방을 보지 못하고 일본 땅에서 죽었다.
그도 일본에서 나고 자랐으니 조선말은 서툴렀으나, 기타 소리는 국적이 없으니 좋았다.
떠돌이 무명 가수가 되어 밤무대 등을 전전 하며 살았다.
그래도 가슴 속에는 한 번도 가 본지 못한 청하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아버지가 수도 없이 들려주시던.
그렇게, 그렇게 꿈꾸고 그리워했던 창하를 찾기로 한 것은 해방이 되고도 30여년 후, 막연히 청하를 찾았다.
처음 찾은 청하는 예전과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인구도 적고 마을 자체도 적었기 때문에 몇 십 년 전이나 다름없지 싶었다.
과연 동네 노인네를 찾아가 왜정 때 일본으로 가서 귀국하지 않고 있는 집을 찾으니 담박에 어떤 집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으니 아버지를 닮은 듯한 할머니 한 분이 맞아주셨다.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내 손자가 틀림없다고 반가워하시며 엉엉 우시고, 부근에 사는 친척들에게도 연락을 취하셨다.
그래도 첨 대하는 사람들이었으니 서먹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의 그 서먹함을 단번에 날려 보낸 것은 다름 아닌 벽에 걸려있는 낡은 사진이었다.
아버지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 형제 친척들이 모두 모여 찍은 기념사진.
누렇게 변해서 걸려있는 그 사진 속에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들어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뿌리를 찾았고, 일본으로 귀국해서는 ‘청하로 가는 길’이라는 연작 아리랑을 부르며 한 생을 살았다.
그 사진 한 장이 그의 인생이 되었다.
강릉시에서 안인진으로 가는 갈림길에 내 동료가 운영하던 약국이 있었다.
매약을 위주로 하는 처방 예외지역 약국이라 크게 잘 되진 않았으나 자리가 좋은 탓에 그럭 저럭 운영이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서 함께 술자리를 하진 않았다. 따라서 아주 친하진 않았다.
그에겐 마흔이 좀 넘은 아들이 하나 있었으니, 이름은 이장우다. 굳이 그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아니면 밝힐 수 있는 것은, 그는 이미 세상에 알려진 공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폐아이다. 가까운 사람들과 대화는 기능하나 떠듬거리며 하는 말로 감정 표현은 어럽다.
그는 자폐자이면서도 천재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즉 한 분야에서만 뛰어난 서번트 증후군 (SAVANT SYNDROM)환자다.
그는 다른 일은 일체 할 수 없지만 그림에는 천재성을 타고났다. 누구에게 배운 바도 없다.
인물화도 그릴 줄 알았지만, 강원도나 강릉 일대의 소나무, 자작나무, 그리고 바다의 풍경, 서울 판자촌, 등등을 유화로 그렸다.
그의 그림은 붓으로 쓱쓱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유화물감을 짜서 그림 칼로 덕지덕지 발라가면서 구도를 이루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입체감이 완전히 살아있고, 소나무를 그리면 그냥 소나무 껍데기가 붙어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파도치는 바다를 그리면, 파도가 치고 그 물안개가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그래서 그는 그림 한 점에 아주 많은 양의 유화 물감을 사용한다. 백호 짜리면 물감값만 백만원이 들지 않겠나 싶다.
2018 올림픽 때도 개별 전시회도 열었고 두 번 정도 작은 개인전도 열었다. 나도 가 보았다.
전시회전에 늘 나에게 도록을 먼저 보내왔다.
나는 꽃이나 화분을 들고 그곳을 찾곤했다.
많은 연예인들이 그의 작품을 선호했는데, 한 점에 보통 5백만원 정도 했다. 그것으로 물감이나 화구를 사고 갤러리를 운영했으나, 그것으론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 약사는 약국을 해서 번 돈은 모조리 그의 아들에게 쏟아 부었다.
그것만이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 애비 약사는 지난 해 봄 급성 췌장암으로 죽고 말았다.
췌장암 진단을 받고 부랴부랴 약국을 처분하고 병원에 입원했다가 석 달 만에 죽고 말았다.
장우가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는 내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약사의 부인은 하늘이 무너짐이었으리라! 화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 바친 최선, 최후의 보루가 무너졌으니 앞이 캄캄했으리라!
교회에서 모금을 하여 일시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했으나, 그건 언 발에 오줌누기에 불과하였다. 일부 작품을 팔기도 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십여년간 그린 백여 점을 모아서 대대적 전시회를 기획하고 있었다. 수장고(守藏庫)를 채웠다.
전시회는 3개월 후로 잡아놓았다.
그러나 이번 불에 10년이 넘게 모아둔 그 작품이 모조리 다 타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그릴 수 없는 그 작품들을!!
장우는 제 몸이 다 타버리는 고통에 처해있을 것이다. 그 어머니의 좌절을 내가 입에 담기도 어렵다.
산불로 집을 잃고 삶의 터전인 팬션을 태우고,
목숨처럼 돌보던 소, 돼지, 닭등의 가축을 잃고
그 아픔을 겪는 이가 한 둘이랴만.
육십을 넘긴 내가 꼬마가 되어 앞줄에 앉았고, 뒷줄에 젊은 아버지가 서고, 가운데엔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잔칫상 앞에 앉아있고, 일가 친척이 다 모여서 할아버지 회갑 때 찍은 누렇게 바랜 사진, 거기에 찍힌 사람은 반 수 이상이 이제는 이미 고인이 된 사진, 그레서 다시 찍을 수는 없는 사진, 고성과 강릉과 울진의 어느 외진 시골집 대청이나 안방에 걸려있던 그 사진들,
그리고 아버지의 지극한 보살핌과 장애자의 피나는 노력으로 십수년을 모은 정우의 작품들이 이번 산불로 다 사라지고 말았으니 그 안타까움과 허전함은 무엇으로 달랠까?!
노자 영감은 이렇게 말아였다.
천지는 불인(天地不仁)하니 이만물위추구(以
萬物爲芻狗)라.
천지(하느님(天)과 따(地)님)는 인자(仁慈)하지 않으니, 만물을 그저 풀강아지 쯤으로 아느니라.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不仁한 일이 생길까?
癸卯 四月 穀雨 前
강릉에서 豐 江
첫댓글 이장우 화가의 사연과 불탄 작품들. "장우의 화실"이라는 큰 글자가 붙어있는 그을린 건물사진을
동아일보를 통해서 보기는 했으나 이렇게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줄은 몰랐네......
정녕 하나님은 인자하지 않으신가?
봄이 되면 매년 불어대는 "양간지풍".
무섭다. 강원도의 산불이......
풍강은 피해가 없으신가?
이미 타들어간 가슴의 상처는 견딜수 없이 아프겠지만........
이장우화가.
생소한이름이라 찾아보았더니 가슴이 멍멍하네요. 밝고 아름다운 그림들,사랑으로 충만한 부모님들. 이 아름답기만 한 그림들이 이제 아픔을 극복한 그림으로 우리에게 전시되길 바래요.
감동!
사진으로 보관된 그 옛 날의 과거는 모두의 고향이고 그리움이고 서러움이며 삶의 여정임에 누구 에게나 자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근본임에는틀림이 없는 것 같아요..
이장우 화가의 슬픈 사연이 그 만의 불행이 아닌 우리 모두가 격고 있는 시대의 아픔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에게 주는 신의 메시지 인 것 같습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다만 내 글이 너무 빨리 뒤로 밀리지 않기만....
응원에 힘입어 또 써보겠습니다.
그저 모두 건강하세요
앞으로 3일간은 내가 쉬겠네~~
자네의 다음 글을 읽어 보고 내마음에 들면 1주일을 쉬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