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은 말한다 (외 3편)
김혜순
눈 뜨고 그냥 있다. 난 안경이니까.
결코 무엇을 보는 법도 없다. 난 그저 안경이니까.
저 화덕 위의 키조개가 뭘 보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냥 있다.
더더구나 나는 눈을 감을 줄 모르니까.
나는 얼음을 먹는 시간과도 같다.
먹고 나면 뭘 먹었는지도 모른다.
모래가 파도를 갉아 먹는 것과도 비슷하다.
또 파도가 몰려오니까.
나는 보고, 느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무색이다.
나의 왼쪽 눈앞엔 바다가 있고, 오른쪽 눈알엔 하늘이 있다. 그게 다다.
하늘과 바다 사이에 내가 있다. 그게 다다.
나는 바닷가에 묶여 이리저리 흔들리는 뗏목처럼 그냥 있다.
10년 후에 어디에 이을 거냐고 묻지 마라.
나는 그냥 있을 거다. 난 안경이니까.
아마 다리를 오므리고 누워 있을지도 모르겠다.
벗을 때나 입을 때나 나는 그냥 있다.
나한테 오는 사람은 왼쪽 하늘과 오른쪽 바다
두 개로 나뉘어서 온다.
그러니 안경에 대고 말하는 건 난센스다.
제 귀에 대고 말하는 거와 같으니까.
내 앞에서 우리의 기억 운운하는 건 난센스 중에 난센스다.
그렇다고 내가 하얗게 눈먼 것은 아니다.
눈 뜨고 그냥 있는 거다. 멍하니란 말 참 좋다. 멍하니? 멍하다.
잠수부 아줌마가 있다.
25미터 산소줄을 잠수복에 매고
우주인 같은 철모를 쓰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키조개를 줍는다.
하루 8시간 심해 속을 걸어다닌다.
3시간마다 바다에 매어놓은 배에 올라와 우유 마시고 빵 먹고
다시 모래를 뒤진다.
목줄에 묶인 검은 물개 같다. 피부는 미끈거린다.
키조개는 깊은 바다 밑 모래사막에 숨어 있다.
아무도 없는 곳. 키조개와 갈고리와 산소줄, 그리고 물안경이 있는 곳.
그리고 물안경 뒤에 아줌마가 있는 곳.
큰 얼음을 갈아 렌즈를 만든다.
그 렌즈를 입속에 넣어본다.
바다에 비 온다.
바다는 말한다.
나는 눈 뜨고 그냥 있다.
난 안경이니까.
나의 프리마켓
뭐 굳이 사겠다는 사람은 없지만
좌판은 벌린다
새의 혀처럼 생긴 말랑한 침묵을 위한 열쇠 몇 개
두들기면 뭉개지는 종소리 몇 개
눈뜨면 슬며시 녹아내리는 풍경 몇 장
노래로 만든 관에 함께 묻을 수 있는
금간 얼굴 몇 장
그리고 애매성
광기의 전압을 높이는 예배당이여!
은혜의 방전을 넓히는 예배당이여!
네온 십자가를 달고
부르르 떠는 은혜 받은 밤의 붉은 상점들이여
그리고 나여, 코고는 흰 토끼 앞에서
좌판을 벌려 놓고 레코드판 따위나 팔겠다니
나는 장의사처럼 차려입은 피아니스트를 예배해요
그의 검은 구두에 박힌 징도 예배하죠
그의 팔에서 열렸다 떨어지는 별들이
내 리어카의 바퀴를 더듬을 때는 그의 대머리도 숭배해요
그가 앙코르의 앙코르에 답하면서 녹턴을 방출할 때는
그의 발밑 그 밑에 꿇어 엎드려요
그런데 당신이 믿는 철기시대에 태어난 그 분의 아버지는
새파란 처녀에게 물고기처럼 체외수정을 하셨다죠? 그렇다면 당신은 어류를 믿고 어류의 아들을 믿는 건가요?
도마 위 물고기에 리본을 달아 드릴까요?
그 검은 리본을 가슴에 박아줄 꽃핀 사실래요?
누르면 말간 알이 쏟아지는 물고기도 있어요
팔뚝에 달 수 있는 별도 물론 있지요
몇억 광년짜리로 드릴까요?
시작도 끝도 없는 이 노래는 어떤가요?
내 기침 밖으로 쏟아지는 압정들
도마 위에서 칼날을 척척 감싸는 손가락들
덮으면 저 건너 암흑이 슬쩍 보이는
두 눈동자용 이불 대용 검은나비 두 마리는 어떤가요?
홍수에서 건져낸 것처럼 부르튼 좌판에
질문으로 화상 입은 입술모형도 있어요
(손님이 장사꾼을 구축하는 거 모르시지 않겠지요?)
코르크 마개를 빼면 듣기 싫은 의심이
쏟아지는 검은와인 한 병, 드실래요?
아예 껍질은 다 도둑맞고 뼈 조롱에
내장만 남은 이 짐승은 어떤가요?
목쉰비명바구니는 어떤가요?
맨발 속에 신는 물고기가시신발은 어떤가요?
사실래요?
배꼽을 잡고 반가사유
나는 안에서 밖으로 부는 풍선이에요
그 이상은 없어요
숨 쉬는 소리는 왜 그리 창피한지
배꼽 속에 나를 안치한 척
옷자락 끌어내리면서 동시에 눈도 내리깔아요
당신의 입술이 닿은 자리라고 하면 좋겠지만
도망은 절대 금지라는 검은 지장 같기도 해요
신기하게 생긴 냄비뚜껑의 배꼽을 들어 올렸더니
거대한 알루미늄 절 한 채 딸려오네요
잠의 경전을 헤매던 노승들이 알머리 바람으로 허둥지둥 흩어지네요
절 뚜껑을 열고 내려다보는 내 얼굴을 보더니 혼비! 혼비!
끓는 냄비 속의 까만 수제비 올챙이들 같아요
여보세요, 계세요! 엄마가 잠자는 아기집의 초인종을 눌렀어요
화들짝 잠깐 조그만 풍선이 앙 터지면서 엄마 뺨을 갈기네요
저마다 독립 만세의 그 날을 꿈꾸지만
밤이면 숟가락을 지참하고 모여드는 곳
내가 숟가락을 들고 식구들에게 근엄하게 물었죠
우리는 배꼽에서 벗어나려고 안달 난 민족일까
우리는 배꼽으로 돌아가려고 안달 난 민족일까
사과도 고양이도 냄비 뚜껑도 양배추도
죽음이 꼬물꼬물 시작한 이곳부터 썩어요
나는 씨 같은 거 없어요
씨앗은 틔워서 내가 다 먹어버렸어요
신기하게 생긴 냄비뚜껑의 배꼽을 들어 올렸더니
염소탕집 아줌마가 검은 염소 머리들을
뜨거운 연기 속에 집어넣고 있네요
목 잘린 염소들이 버둥거리다가
뚜껑을 열고 내려다보는 내 얼굴을
얼굴 없이 쳐다보더니
그만 다리를 쭉 뻗어버리네요
나는 안에서 밖으로 불어대는 풍선이에요
그 이상은 없어요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비행기 타고
다하도록 다하도록 이 구멍을 불어대고 있어요
나는 애하고 재미있게 혼자 살아요
아침
밥하다가 말고 부르는 찬송가
—그 어리신 몸이 눌 자리 없어
—그 거룩하신 몸~
하고 내 노래가 가장 높은음을 넘어가려고 할 때
그 'ㅁ'자 밖으로 잠깐 얼굴을 내비치는 얼굴
그녀가 빈혈나라 샛노란 기류를 타고 혼자 가네
나는 친척 할머니들에게 퀴즈를 내었네
하루 이십사 시간, 자신들이 소녀 같을 때가 많아?
할머니 같을 때가 많아? 어느 시간이 더 많아?
그녀가 소독한 침상 일등석 캡슐에서 밭은 숨을 내쉬네
저 어지러운 곳,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
내 인생에서 제일 희박한 무결이 애용하는
흰 종이비행기 맨 앞좌석에 탄 그녀
늘 여명만 타고 가는 그녀
잠자는 사람의 얼굴 위를 날아가듯 무심하게
밥하는 내 얼굴 위를 날아가는 그 얼굴
그녀에게서 떠난 시간들이 줄지어 그녀에게 서빙하는 아침
차가운 수의, 투명한 얼굴, 면도날처럼 시린 몸
할머니들 대표로 우리 엄마가
여든 살 다 되어가지만 자꾸만 그녀가 나온다고
나이들수록 그녀가 더 자주 나온다고
입 가리고 호호호 내 퀴즈에 답하실 때
막 목욕탕에서 나온 것 같은
동글동글하고 옴팍하고 파리한 소녀가
우리 엄마의 은퇴한 여객기
문을 열고 내릴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
뭉크의 소녀가 왜 발가벗고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줄 아니?
자다가 일어나보니 글쎄 소녀가 된 거야
그 세월, 그 주름, 그 옷, 다 어디 가버린 거야
찬양하라 희디흰 구유에 계신 몸!
나는 오늘 아침 그녀의 제단에 무릎을 꿇었네
붉은 포도송이 같은 심장에서 가득 올라오는
간지러운 설렘, 달콤한 무릎, 나의 알을 터뜨린 서빙!
스크램블로 하실래요? 오믈렛으로 하실래요?
아줌마! 어디 가 살다가 이제 와요? 묻는
이름 없는 소녀에게
나도 낯설어 내 얼굴을 몰라보는 나에게
해 뜨기 전 박명의 시간, 해보다 먼저 슬픔이 솟아오를 때
나는 나의 종이비행기 맨 앞좌석에 앉은 매정한 그녀에게
신선한 아침을 서빙하네
—시집『슬픔치약 거울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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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또 다른 별에서』『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어느 별의 지옥』『우리들의 陰畵』『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불쌍한 사랑 기계』『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슬픔치약 거울크림』. 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