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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가톨릭평론> 39호(2023년 봄)에 실린 글입니다. 성소수자와 약자의 권리를 위해 힘써 온 고 임보라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섬돌향린교회 담임목사, 2월 3일 별세)를 추모하며,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 편집자
초록나무, ‘너와 나의 임보라’
올해 1월 어느 일요일 아침, 우리는 종로3가역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에, 나는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있었는데, 내가 먼저 그를 알아보았다. “어머, 목사님! 제가 다시 올라갈 게요. 출구 앞에 계세요!” 뜨거운 연인 같았을까. 단숨에 출구로 올라 그를 덥석 안아버렸다.
나의 호들갑이 반가웠는지 연신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큰 보따리들이 들려 있었다. 이게 다 뭐냐는 물음에, 작년 한 해 수고한 교회 분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선물을 전달할 생각에서인지 그는 조금 설레 보였다. 잠깐의 만남 속에서도 그는 나의 안녕을 살폈고 나의 행보를 응원하며 위로를 잊지 않았다. “목사님, 우리 명절 지나면 진짜로 만나요. 회의 자리 말고 제발 그냥 만나요.” 그래, 제발 그러자고 서로 약속했지만 우리는 이후 몇 차례 공적 자리에서 다시 만났을 뿐 ‘그냥 만나는 자리’는 만들지 못했다.1)
돌이켜보면, 그가 나를 만나는 자리가 비록 회의장 바깥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냥’인 적은 없었다. 나는 내 삶에 문제가 생겼을 때라야만 그가 보고 싶었고, 그에게 전화했고, 그를 찾아갔다. 그는 늘 지혜로웠 고 용감했고 먼저 그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나 말고도 그런 사람이 몇백은 더 있으리라. 그날 종로3가역에서 그를 덥석 안으며 “당신은 괜찮습니까?”를 묻지 않았던 나를 앞으로도 꽤나 탓할 것이다. 이런 사람 역시 몇백은 되겠지.
목사로, 아니 여성 목사로서 일은 부단히 고단하다. 세상만사가 변해도 종교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 종교의 변화는 한참 느리다 보니 그 안에서 여성들은 부쩍 곤하다. 목사 안수를 준비하는 여성들이 감내해야만 하는 질문에는 “남편이 목산데 아내까지 목사를 하면 쓰나. 남편을 도와줘야지”, “여성인데 꼭 목사를 해야 하는가? 양육하는 것도 쉽지 않지 않느냐” 정도가 있다. 남편은 존경받는 가장이자 제사장의 역할, 아내는 현모양처의 역할을 수행할 때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강해진다는 타자화와 주체화 전략2)이 여실히 드러나는 질문이다. 그런 질문은 남성은 배려, 보살핌, 사랑의 생산을 위해 다른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여성의 친밀성과 감정노동에 의존된 가부장제 사회를 계속해서 작동시키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3) 이런 환경에서 여성 목회자들이 문제제기를 하는 일은 거의 모든 순간이 투쟁적일 수밖에 없기에 다수가 침묵하게 된다. 말할 수 없는 이들은 좌절하기도 절망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여성들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왈칵 쏟아놓는 곳이 있었다. 초록나무가 드리우는 그늘 아래가 그랬다. 우리는 초록나무 곁에 둘러앉아 삼켰던 이야기를 털어내고 위로받았다. 우리가 털어냈던 억울함은 그의 가슴에 맺혔고 그는 교회 정치 자리에서 차별적 제도와 문화를 바꿔내기 위한 발언을 하고, 또 하고 또.... 했다. 여성으로, 목사로, 사람으로, 다양성으로 그는 언제나 ‘너와 나의 임보라’로 존재했다.
성찬 집례 중인 임보라 목사. ©김해은
‘함께 잘 살기’를 위한 분투
그가 ‘너와 나의 임보라’였던 이유는 그의 활동이 한국기독교장로회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젠더 이분법과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문제가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교세가 약해짐에 따라 교회의 움직임은 더 전략적이게 되었다. 교회 바깥은 ‘페미니즘 리부트’가 하나의 물결이 되고, 동성 커플에게도 건강보험 피부양자를 인정하는 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다양한 젠더와 다채로운 가족을 위한 자리는 교회에 없어 보였다. 동성애, 비혼, 저출산 같은 친밀성의 영역에 대한 교회의 적극 간섭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일어나고 있다.4) 젠더 본질주의와 이성애 규범성에서 비롯한 교회의 가족 복원을 위한 전략과 정치 움직임의 핵심은 동성애 반대 또는 동성애 혐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혐오의 벌판에서 사랑이 혐오보다 강하다는 것을 부단히 외치던 임보라는 결국 2018년 주요 교단에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사랑이 죄가 될 수 없음을 선포하며 소수자를 축복하고 엘라이들을 격려하던 그의 무지갯빛 행보가 이단이 되고 마는 현실 앞에서 초록나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내 신앙 여정에서 예장 통합이 미친 영향력은 매우 소중한 자산 중 하나이다. 그런 교단이 나를 ‘이단성’이 있다고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굉장히 서글펐고, 가슴이 아려왔고, 그리고 큰 배신감을 느꼈다. 당시 인터뷰 기사를 보면 담담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남몰래 자주 울곤했다."(임보라, '나의 이야기', <한국여성신학> 96호(2022년 겨울) 중에서)
얼마 전 그의 ‘나의 이야기’를 보며 뒤늦은 눈물을 훔쳤다. 담담하던 그였기에, 언제나 푸르던 초록나무였기에 그가 남몰래 울었다는 대목에 죄책감이 밀려왔던 모양이다. ‘임보라’니까 그래도 계속 괜찮을 거 라고만 생각했던 그를 향한 나의 굳은 신뢰? 아니 솔직하게는 ‘임보라’니까 그럼에도 큰 파도 앞에 계속 서 있어 주길 바라는 나의 이기심이 더 정확할 것이다. 교계의 폭력적 선언 속에서도 묵묵히 사랑을 외치던 그의 한결같음에 안도했고, 교차하는 공간에서 만날 때 작게 혹은 크게 응원할 뿐이었다. 아픔이 있는 존재 간의 연결을 노래하던 초록나무. 이제라도 그의 아픔과 연결을 시도해 본다. 그의 노랫말처럼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면, 그의 삶의 자리야말로 세상의 중심이었음을 애달프게 읊조리며 빈 가슴을 달래 본다.
돌아보면 그의 삶은 ‘함께 잘 살기’를 향한 분투였다. 사회에서 예외 상태 속에 놓여 있던 존재들과 함께 살기 위해 땀 흘리던 시간이었다. 세계적 페미니즘 사상가이자 문화비평가인 도나 해러웨이가 말한 “트러블과 함께하기”가 바로 그의 삶 자체이지 싶다. 트러블과 함께하기 위한 전략이자 가장 중요한 방법은 응답-능력resopse- ability이다. 해러웨이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어릴 때 접한 실뜨기 놀이를 비유로 제안한다.5) 실뜨기 놀이는 손에 손을 포개고, 손가락에 손가락을 걸고, 서로가 만든 다양한 모양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그 모양 위에 또 다른 모양을 덧입히며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만들어 가는 놀이다. 꼬임과 뒤얽힘은 혼자서 만들어 갈 수 없으며, 그 안에는 나와 다른 존재의 손길이 담겨 있다. 실을 주고-받음 사이에는 기다림이 있고, 간혹 문제적 모양들을 만나기도 한다. 문제가 되는 모양이라도 그것은 다른 이에게 전달되지만 우연하게 아름답기까지 한 새로운 모양을 발견하기도 한다. 놀이 속에 있는 존재들은 모두가 크리에이터가 되고 문제를 공유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앞의 사람이 전하는 것에 응답하는 사람들이 된다. 여성학자이자 이분법적 질서의 해체를 시도하는 해러웨이가 “트러블과 함께하기” 위한 예로 실뜨기 놀이를 제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을 끊어버리면 놀이가 중단되듯, 다른 존재들이 전하는 문제들에 아무런 응답이 없다면 세상은 홀로 생존을 위한 전장이 되고 만다. 응답-능력을 포기하지 않을 때 비로소 모든 존재, 다시 말해 소외된 존재들과 함께 살기가 가능해진다.
2019년 대구퀴어문화축제 축복식. ©김해은
염려일랑 붙들어 매시라,
실뜨기 놀이를 하며 당신의 그 길을 이어갈 터니
그렇다면 임보라와 함께 실뜨기 놀이에 참여한 존재들은 누구였을까?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는 물론, 강정의 푸른 바다, 성폭력 피해자들, 고양이, 강아지, 버림당한 동물들, 방황하는 여성 목회자들, 갈 곳 잃은 그리스도인이 그 놀이 속에 있었다. 존재 간의 위계 없이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연결되고, 연결된 존재가 또 다른 존재를 부르면, 어김없이 응답하는 존재들이 거기에 있었다. ‘함께-살기’와 ‘함께-되기’를 결단한 존재들은 불현듯 문제를 마주하지만,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믿음이 이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있었다.
초록나무의 장례식 이후에도 함께-살기를 다짐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 그의 마음씀이 담겼던 또 하나의 공간 ‘무지개예수’6)에서도 추모제가 있었는데, 초록나무의 기억을 회상하며 우리는 울기도 웃기도 하면서 그가 만든 길을 따라가기를 기도했다. 투쟁으로, 연대로, 공감으로, 노래로, 어쩌면 눈물로, 아픔으로 초록나무와 여정을 함께해 갔던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고마움이 밀려왔다. 추모 기도회를 담당한 나는, 나보다 먼저 그곳에 있었던 무지개 동무들의 마음을 담아내는 기도문을 쓰고 싶었다.
"여린 새싹이 언 땅을 녹이듯, 약한 존재들 속에 하나님(하느님)의 큰 생명이 들어차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듯 새싹은 초록나무가 되고, 우리는 또 하나의 초록나무가 됩니다.
우리들의 목사였던 초록나무가 뿌린 씨를 하나님이 날로달로 거둘 것을 믿습니다. 우리 역시 씨 뿌리는 사람이 될 것을 다짐합니다. 세상의 찬바람을 같이 견뎌 주던 초록나무의 따스함이 우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아픈 존재들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용기를 소망합니다. 아픔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 평화의 바람으로 살겠습니다.
눈물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 생명의 노래로 흐르겠습니다. 초록나무의 삶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 안에 있습니다. 아멘."
‘찹쌀’이와 함께하던 초록나무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나의 임보라’ 쓰기를 마감해 본다. 찹쌀이는 그가 교단에서 이단으로 낙인 찍혀 인간에 대한 신뢰감에 회의를 느낄 때쯤 입양한 반려견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목사님과 많은 순간을 함께했던 강아지였다. 폭우가 내리던 퀴어 축제에도, 집회 현장에도, 많은 회의 때도 목사님과 함께 와서는 만나는 이들에게 꼬리를 흔들던 찹쌀이. 까만 몸에 무지개 장신구로 치장하고서는, 주인을 닮았는지 낯선 이들에게도 몸을 부비며 환대하는 녀석을 생각하니 미소가 절로 난다. 찹쌀이 덕분에 집회와 예배에 참석 가능한 존재가 인간을 넘어 비인간 존재로까지 확장되고 있었다. 목사님은 인간뿐만 아니라 강아지, 고양이를 비롯해 다른 종과도 교감했으며, 나아가 모든 생명체를 영적 존재로 받아들였다. 그가 반려동물들의 삶을 축복하고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을 통해 생명을 대하는 겸손한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법 밖에 있는 존재들이 초록나무의 그늘 아래에서 그간 잘 쉬었다. 그의 경청과 응답, 웃음과 환대로 편안할 수 있었다. 트러블과 함께 있으며 늘 우리의 편이 되어 주던 그가 이제는 온전히 임보라의 편이 되 어 평안하기를 간절히 빈다. 당신을 경험한 존재들이 실뜨기 놀이에 참여하며 그 길을 계속해서 이어갈 터이니 염려일랑 붙들어 매시라. 두 다리를 쭉 뻗고 좋아하시는 노래나 실컷 부르시라. 그리운 초록나무, 감사합니다.
2022년 반려동물 축복식에서 임보라 목사와 반려견 찹쌀이. (사진 출처 = 임보라 목사 페이스북)
1) 임보라 목사의 활동명. 그는 모두에게 목사보다는 초록나무로 불리길 바랐다.2) 이숙진, '한국 개신교의 정상가족 만들기: 타자화와 주체화 전략을 중심으로', <종교연구> Vol.82 No.1, 한국종교학회, 2022.
3)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개정증보판), 교양인, 2016, 104쪽.
4) 조현, '감리교단, ‘성 소수자 축복’ 이동환 목사에 정직 2년', <한겨레>, 2020.10.15. 구권효, '‘동성애 찬반’ 묻는 반동성애 광풍', <뉴스앤조이>, 2022.09.22.
5) 도나 해러웨이, 최유미 옮김, "트러블과 함께하기", 마농지, 2016, 23-30쪽.
6) 단체 ‘무지개예수’는 퀴어·엘라이 그리스도인의 연대체로서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힘쓰고 있다.
김정원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목사로 현재 ‘여름교회’를 담당하며 여성주의/퀴어프렌들리를 기반으로 한 모두에게 안전한 교회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신과 인간, 하늘과 땅, 여성과 남성, 기호와 물질 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사유에 관심하며 위반을 위한 공부를 성공회대학교에서 진행 중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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