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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사기』 ‘조선열전’ 해설(제4회)
<패수는 중국 하북성의 당하唐河였다.>
[해설]
7. 기원난수其遠難守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염철론』과『위략』에 의하면 한초에 고조선의 준왕은 진ㆍ한 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진의 요동외요를 공격하여 요동지역의 고토 일부를 수복하는 한편 위만에게 100리의 땅을 봉해 주어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지키게 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그곳이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려워’에서 그곳은 고조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면 그대로 진의 요동외요에서 관할하던 지역을 의미하며, 또한『사기』의 찬자撰者가 기록한 것처럼 거리가 멀어 후퇴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에 의해 요동외요가 함락되었던 것을 감추기 위한 중국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2) 필자의 주석
한이 일어나서 ‘그곳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므로’ 이 구절에서 그곳은 연장성을 말한다. 연나라가 전성기 때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하고 연장성을 설치하였다. 그 후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하자 연장성은 진나라 요동외요에 속하였으며,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일어나자 요동외요에 속하였던 연장성 지역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워 후퇴했다는 내용이다. 이 시기 고조선이 진번과 조선을 다시 회복하였으므로, 연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이 연장성 설치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곳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고 한 것이다. ‘요동의 옛 요새(요동고새)’는 연나라가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기 이전의 국경에 설치한 장새이다.
『사기』를 통하여 진ㆍ한교체기의 시대상황을 살펴보면 한나라가 연장성 지역이 지키기 어려워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한고조 유방이 해하垓下 싸움에서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한 해가 기원전 202년 12월이다. 『사기』‘흉노열전’에 의하면 한나라가 처음 중국을 평정하고 이듬해인 기원전 201년 9월, 한왕韓王 신信이 대代로 옮겨 안문군 마읍馬邑에 도읍했다. 흉노가 대거 공격해 마읍을 포위하자 신信이 흉노에 항복하였고, 흉노는 한신을 얻고서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구주를 넘어 태원太原을 공격하여 진양晉陽 아래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유방이 직접 흉노를 공격하다가 산서성의 안문군 백등산에서 포위당하여 참패를 당한다. 이후 한나라는 흉노에게 공주公主를 바치고, 매년 일정한 양의 솜과 비단 등을 바치는 조건으로 굴욕적인 화친을 맺게 된다.
이 뒤로도 한왕韓王 신信은 흉노의 장수가 되어 조리, 왕황 등과 함께 수차례 화친의 약속을 어기고 대代, 운중雲中을 침범했다. 또 기원전 197년 거록태수 진희가 배반하여 한신과 함께 대代를 공격했다. 한나라가 번쾌를 시켜 공격하여 다시 대代, 안문鴈門, 운중雲中의 군현들을 다시 함락했으나 새塞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사기』 ‘한고조본기’ 등에 따르면 한왕 6년(BC. 201) 10월 연나라 왕 장도가 모반하여 대代를 공격하여 장도를 사로잡고 태위 노관을 연왕燕王으로 봉했다. 이후 연왕 노관은 기원전 197년 거록태수 진희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아 한고조가 불렀는데 병이라 핑계대고 가지 않았다. 이후 기원전 195년 4월 25일 한고조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흉노로 도망하였다.
위와 같이 『사기』 ‘흉노열전’과 ‘한고조본기’ 등을 살펴보면 한나라 초기 연왕燕王을 세우면 모두 한나라를 배반하고, 산서성 대代를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으며, 당시 한나라의 국경이 대략 산서성 중부의 대代 지역을 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태의 한나라가 연나라의 전성기 시절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설치한 연장성 지역을 지키지 못하고 국경선을 대폭 후퇴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8. 요동고새遼東故塞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본문에 나타난 ‘요동고새’는『사기』의 표현상 앞서 기원전 3세기에 연이 진번ㆍ조선지역까지 침입하여 설치한 ‘장새’로 이해되어진다. 그런데 이를 진이 연을 멸망시키고 그곳을 ‘요동외요’에 속하게 한 것과는 별도로, 한이 흥기하면서 그 지역이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운 까닭에’ 다시 수리하여 이용한 ‘요동의 고새’로 이해하여 그 위치를 ‘장새’나 ‘요동외요’와는 다른 지역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요동고새라는 것은 한 이전부터 설치된 요새라는 것 즉, 한 이전 연ㆍ진대시기 부터 존재한 것으로 진의 만리장성 동쪽 끝에 설치된 것으로 이해된다. (리지린,『고조선 연구』pp.44~47)
그러나 ‘한흥漢興 위기원난수爲其遠難守 복수요동고새復修遼東故塞’에서 ‘한흥漢興’이란 한의 건국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한나라 건국초의 옛 요새란 한이 건설한 요새가 아님이 분명하다.『사기』「조선열전」에서 이에 해당되는 것은 진의 외요와 연의 장새 뿐인데, 요와 새의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고새故塞에 해당되는 것은『사기』에 의하는 한 연의 장새 밖에 없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 41)
(2) 필자의 주석
본문에 나타난 ‘요동고새’는 기원전 3세기에 연이 진번ㆍ조선지역까지 침입하여 설치한 ‘장새’와는 다르다. 본문에 의하면 연나라 장성인 ‘장새’가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고새를 다시 수리했다’ 하였으므로 ‘요동고새’는 연나라의 ‘장새’ 보다는 훨씬 후퇴한 지역이다. 이 시기는 고조선이 진번과 조선을 모두 회복하였으므로, 연나라와 고조선은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기 이전의 국경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므로 ‘요동고새’는 연나라가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기 이전의 국경에 설치했던 장새이다.
요동고새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당시의 요동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요동은 그 위치가 여러 번 바뀌었다. 요동의 위치 변동은 한민족의 상고사 전반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① 연‧진 시기의 요동
이 시기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다. 앞의 ‘진번‧조선’ 항목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전국시대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이 연나라 문공(재위 BC361-BC333)에게 연나라 강역을 언급하면서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다고 하였다. 이때는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진번‧조선)를 물리치고 상곡군‧어양군‧우북평군‧요서군‧요동군 등 연5군을 설치하기 이전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연나라 강역은 상곡군(현 하북성 장가구시 부근) 보다 서쪽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때 연나라의 동쪽에 있었다는 요동은 현 하북성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진개의 침략 전 ‘진번과 조선 및 연나라 강역’ 지도』 참조). 또 앞의 ‘장새’ 항목에서 연‧진 시기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에 있었음을 충분히 입증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소진은 ‘연나라의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 하였고, 『사기』 ‘조선열전’은 연나라가 동쪽으로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했다’고 하였다. 즉 소진이 말한 요동과 『사기』 ‘조선열전’의 진번은 서로 대응관계에 있다. 당시 요동지역에 진번이라는 정치세력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앞의 ‘진번‧조선’ 항목에서 이 요동의 진번이 고구려의 전신임을 언급하였다.
② 전한 초 ~ 후한 화제和帝 영원 16년(AD 105년) 시기의 요동
이 시기의 요동은 현 중국 산서성 지역이다. 연나라가 전성기 시 진번과 조선을 복속하여 연장성을 설치하고, 연5군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한나라가 일어나면서 고조선이 진번과 조선을 모두 회복하였으므로 진번과 조선 지역에 설치되었던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 등 연5군은 현 중국 산서성 지역으로 이치 될 수밖에 없다.
이 시기 요동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도요장군度遼將軍’ 이란 직책이 있었다. 『한서』 ‘권7 소제기’에 의하면 “(기원전 78년) 겨울 요동의 오환이 반란을 일으키자 중랑장 범명우를 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삼아 북변 7군의 2천 기를 이끌고 이를 공격하게 했다(冬, 遼東烏桓反, 以中郎將范明友爲度遼將軍, 將北邊七郡郡二千騎擊之)”는 기록이 있다. 응소가 주석하기를 “요수遼水를 건너 공격하게 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도요度遼를 관호로 삼았다(當度遼水往擊之, 故以度遼爲官號)” 하였다. 이 도요장군의 관호는 한동안 나타나지 않다가 『후한서』 ‘남흉노열전’에 의하면 후한 명제 영평 8년(65년) 남흉노와 북흉노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도요장군度遼將軍 영營을 다시 설치하게 된다. 이때 도요장군 영을 설치한 곳이 오원五原군 만백曼柏현으로 황하 서쪽이다. 당시 남흉노와 북흉노는 황하를 경계로 하였다. 응소의 주석을 참고하면 도요장군은 요수遼水를 건너서 적을 공격하므로 도요度遼를 관호로 삼았는데, 이때의 도요장군은 황하를 건너서 북흉노를 공격하게 되므로 결국 황하가 요수遼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요동은 황하의 동쪽인 산서성 지역이다.
이 기간 중에 해당하는 한무제 원봉3년(BC 108년)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진번과 조선 지역을 다시 차지하였으나, 한나라 초기에 산서성으로 이치되었던 요동군 등을 하북성 지역으로 도로 복치하지는 못하였다.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결과를 보면 승리했다는 한나라의 장수들과 사신들은 모두 한무제에게 참형을 당하였고, 항복한(?) 조선의 대신들은 모두 제후의 자리에 올랐다.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은 결코 한나라의 승리가 아니었으며, 내부 분열로 위만 조선이 나뉘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사군의 명칭을 보더라도 진번군, 임둔군 등 위만조선을 구성하고 있던 정치체의 이름이 그대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결과는 위만조선의 연방체제가 무너지고 여러 개의 독립된 소국으로 분열된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 한나라가 위만조선 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산서성 지역으로 이치되었던 요동군 등이 다시 하북성 지역으로 복치 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사마천이『사기』 ‘조선열전’을 기록하던 당시에도 요동은 여전히 산서성 지역이었으며, 산서성 지역에 위치한 장새들을 요동외요와 요동고새 등으로 기록하였다. 아래의 『만리장성과 요동외요 지도』에서 파란색 장성이 요동고새이다.
그렇다면 이 기간 동안 하북성의 요서‧요동 지역 등은 어떻게 되었을까? 『진개의 침략 전 ‘진번과 조선 및 연나라 강역’ 지도』에서 보는바와 같이 하북성의 요서‧요동 지역은 진번지역이다. 진번지역은 위만조선에 속하였다가 한무제의 침략으로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이 분열되면서 한사군의 하나인 진번군이 된다. 그러나 진번군은 원주민인 고구려의 반발로 설치된 지 27년인 한 소제 시원5년(BC 82) 폐지되었다. 그리고 7년 후인 한 소제 원봉6년(BC 75년)에는 현 요령성의 옥저지역에 있던 현토군이 진번지역의 서북으로 이동하면서 고구려와 마찰을 일으켰다.
이 현토군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유리명왕 33년(AD 14년)에 고구려에게 멸망하였다. 대무신왕 때에는 낙랑(조선) 지역을 두고 한나라와 서로 뺏고 빼앗기는 혈전을 벌였으며, 모본왕 시기에는 한나라의 북평‧어양‧상곡‧태원 등 산서성 중부지역까지 공략하였다. 그리고 태조대왕 3년(AD 55년)에는 요서 10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고구려가 요서에 10성을 쌓았다는 것은 당시 하북성의 요동군과 요서군 지역은 모두 고구려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래의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의 기록을 보면, 이 시기에도 한나라에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요동태수가 등장하고 있다. 역시 한나라의 요동지역이 현 중국 산서성 지역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평(永平: 후한 명제 58-75) 중, 제융이 요동태수가 되자 선비를 선물로 유인하여, 반란을 일으킨 오환 흠지분 등을 참수하게 했는데, 선비족들은 돈황, 주천 동쪽의 읍락 대인들까지 모두 요동으로 와서 하사품을 받았다. 청주와 서주 두 주가 돈을 지급했는데 매년 2억 7천만 전을 항상 주었다.(永平中, 祭肜爲遼東太守, 誘賂鮮卑, 使斬叛烏丸欽志賁等首, 於是鮮卑自燉煌、酒泉以東邑落大人, 皆詣遼東受賞賜, 靑、徐二州給錢, 歲二億七千萬以爲常)”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③ 후한 화제和帝 영원 16년(AD 105년) ~ 요나라(916~1125) 이전 시기의 요동
이 시기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다. 『후한서』 ‘군국지’의 요동군 기록에 의하면 “본기 화제 영원 16년(AD 105년)에 (요동)군을 다시 복치했다(本紀和帝永元十六年, 郡復置)” 하였다. 이때의 한나라는 국력이 매우 강성하였다. 이름난 장수 반초班超가 서역도호가 되어 서아시아의 차사, 선선 등을 멸망시키고 지중해까지 이르렀으며, 거기장군 두헌竇憲은 5천여리에 이르는 원정군을 일으켜 지금의 외몽고 등지로 북흉노를 대파하였다. 이에 따라 하북성 요동의 서북쪽에 있으면서 고구려에 복속되었던 오환‧선비 등이 한나라에 내속함으로써 한나라가 하북성 지역에 요동군을 다시 복치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고구려와 한나라는 하북성 요동지역의 패권을 놓고 숙명의 대결을 벌이게 된다.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고국천왕 시기까지는 하북성 요동지역을 반분하며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고국천왕(재위 : 서기 179~197년) 시절인 AD 189년 요동에 공손씨 정권이 들어서고, 산상왕(재위기간: 서기 197~227년) 시절 ‘발기의 난’으로 고구려가 분열되면서 하북성 요동지역은 모두 공손씨 정권에게로 넘어갔다. 동천왕(재위 : 서기 227~248년) 시절인 AD 237년 위나라와 연합하여 공손씨 정권을 멸하였고, AD 242년에는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그러나 몇 년 후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하북성 요동에서 동쪽으로 천여 리 떨어진 오늘날의 중국 요령성 요양지역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 이후 중천왕과 서천왕 시기를 거치면서 점차 국력을 회복한 고구려는 미천왕(재위 : 서기 300~332년) 시절 서진西晉 말의 혼란기를 틈타서 요동과 낙랑지역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러나 하북성 요동지역에 모용 선비족이 흥기하여 연나라를 건설하면서 고구려는 또 다시 하북성 요동과 낙랑지역을 상실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100여년 후 광개토태왕이 등장하여 하북성 요동과 낙랑지역을 모두 회복하게 되었고, 뒤이어 장수왕 시절 수도를 다시 하북성 요동지역으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대륙 경영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통전』에서 기록한 바와같이 동서 6,000리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대략 고구려의 서쪽 국경이 현 중국 섬서성 유림관 부근까지 이르렀다. 또 『삼국사기』 ‘최치원전’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백만을 보유하여 남쪽으로는 오나라와 월나라를 공략하고, 북으로는 유주, 연나라, 제나라, 노나라 지역을 요동시켰다”고 한 것처럼 중국 동해안 지역을 모두 석권하였다.
④ 요나라(916~1125) 이후 시기의 요동
이 시기의 요동은 현 중국 요령성 지역이다.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지명 이동된 시기는 갈석산의 지명이동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사기』 ‘몽념열전’에 의하면 진나라 만리장성이 ‘임조에서 요동까지’라 하였고, 『수경주』‘하수河水 3’에서는 진나라 만리장성이 ‘임조에서 갈석까지’라 하였다. 두 사료를 통하여 갈석산이 요동의 시작점임을 알 수 있다. 또 『사기색은』은 『태강지리지』를 인용하여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고 하였다. 그러므로 갈석산은 낙랑군이 설치되었던 조선의 위치와 요동의 위치 및 진장성의 동단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산이다.
그런데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난하 하류의 갈석산으로 동쪽으로 천 여리 지명이동이 일어났다. 갈석산의 지명이동은 조선의 위치와 요동의 위치 및 진장성의 동단 등 한민족 상고사를 송두리째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갈석산의 지명이동이 일어난 시기를 살펴보자. 『통전』에는 모두 3개의 갈석산이 나타나는데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과 하북성 보정시에서 천진시 사이인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과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의 우갈석 등이다. 『통전』은 당나라 사람 두우(杜佑 : 735~812)가 801년에 완성한 책이다. 이때까지도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보이지 않는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문헌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우적도』(남송시대 1136년 작)이다. 이 『우적도』에서 난하(유수) 부근에 갈석산과 더불어 노룡현과 평주 등의 지명이 나타난다. 이어서 『구주산천실증총도』(남송시대 1177년 작)와 『거란지리지도』(남송시대 작) 등에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나온다. 그러므로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생겨난 시기는 『통전』의 편찬 이후인 801년에서 『우적도』가 그려진 1,136년 이전으로 대략 요나라(916 ~ 1125년) 시기로 추정된다(필자의 글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1회> 참조). 그러므로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지명이동된 시기는 요나라(916 ~ 1125년) 시대로 본다.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요나라는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초기에는 수백 리 영토에 불과했으나 단기간에 일만 여리의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북성과 산서성 등을 점령하면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대거 요령성 등으로 이주시켜 새로 주州를 설치하였다. 이 때 새롭게 설치한 주의 이름을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주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요사지리지』 ‘서문’은 이때의 정황을 말하기를 “또 정벌하여 사로잡은 포로들로 요해처에 주를 설치하였는데,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곳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又以征伐俘户建州襟要之地, 多因舊居名之)”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요나라 시기에 갈석산의 지명이동과 더불어 하북성 지역의 지명들이 요령성 지역으로 대대적인 지명이동이 일어났다(필자의 글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2회>” 참조).
9. 패수浿水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패수는 한과 조선의 국경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위만의 망명과 한 무제의 조선침공 및 한사군설치 등과 관련하여 당시 고조선의 위치와 영역 알려주는 중요한 지역으로 파악된다.
패수의 위치에 관해서는 종래 대동강설, 청천강설, 압록강설, 요동방면설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최근에는 난하, 혼하설 등이 제시되고 있다. 대동강설은 역도원의『수경주』이래『수서』·『신당서』·『통전』 등 중국사서에 유지되어 패수를 대동강으로 인식케 하는 작용을 하였다. 한편, 정약용은 패수에 관한 설이 압록강설, 대동강설, 요동니하설, 저탄수설 등으로 나뉘어져 한국전통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었음을 언급하고, 자신은 압록강설을 견지하여 패수에 관한 이해가 다양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여유당전서』「강역고」 패수변)
청천강설은 이병도 등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열수를 대동강으로 확정하고 평양 지역을 고조선의 중심지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제시되었다. (「패수고」) 한편 신채호는 헌우락설蓒芉濼說을, (『조선사연구초』pp.45∼65) 정인보는 어니하(대릉하)설을(『조선사연구』) 제기하여 패수의 요동방면 위치설을 구체화시켰다.
이와 같은 요동방면설은 이지린 등에 의해 대릉하설로 연결된다. 즉, 패수에 관한 최초언급으로서『수경』패수조의 ‘패수출낙랑루방현浿水出樂浪鏤方縣 동남과임패현東南過臨浿縣 동입우해東入于海’라는 기사를 검토하여, 현재 요동, 요서지역에서 동남으로 흐르다가 하류에 가서 다시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강은 대릉하 밖에 없다고 하고 또한 이것의 고명이 백랑수(『열하지』대릉하)였음을 밝혀 그 음상이音相似도 설명하였다. 특히, 한대 루방현이 대릉하 유역이었음을 설명하여 이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고조선연구』pp.72∼83)
한편,『한서』「지리지」 요동군 번한현조의 주註내용을 인용하여 패수라는 명칭이 보통명사로서 파악된 연유 등을 설명하면서 패수를 난하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윤내현,「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p. 15~80) 그러나 고조선의 서쪽국경인 패수와 고조선의 중심인 열수가 모두 난하라는 견해는 수긍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즉,『사기』의 표현에 따르면 패수의 위치는 요동고새의 위치와 고조선의 중심지인 열수의 위치 사이에서 찾게 된다. 따라서 요동고새를 진장성의 동단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열수를 요하로 파악한 견해에 의하면 자연히 패수는 대릉하로 이해된다. (리지린,『고조선연구』) 한편, 고조선의 중심이 이동함에 따라 열수의 위치도 옮겨졌으리라는 견해를 따르면 자연 열수가 대동강에 비정되므로, 패수는 대동강과 요하 사이의 강이 된다. 그리하여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청천강(이병도)ㆍ압록강(정약용ㆍ천관우) 등이다.
그러나『사기』의 내용을 세밀히 검토하면 패수는 요동고새(연의 장새)와 진고공지秦故空地사이의 강이다. 연의 동방진출시 조선과의 국경선이었던 만번한滿番汗이 자연계선이라면 패수는 이와 병행하는 강이 된다. 만번한이 천산산맥 주변의 지명에 비정되므로 고조선의 중심 이동과 관계 없이 패수는 요동지역의 강임이 틀림없다. 다만, 패수는 조선계 지명으로 흔히 고조선의 수도 근처를 흐르는 강으로 이해되니,『한서』「지리지」에 나오는 평양 남쪽의 후일의 패수는 바로 고조선 말기의 중심지였던 대동강으로『사기』의 패수와는 다른 강으로 이해된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2) 필자의 주석
일반적으로 패수를 한과 조선의 국경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이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 ‘조선열전’의 관련 구절을 살펴보자.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이라는 문장에서 요동고새가 국경인가? 아니면 패수가 국경인가? 하는 점이다. 사마천은 앞 문장에서부터 일관되게 장성을 기준으로 국경의 변화를 기술하고 있다. 위 문장도 “패수에 이르는 곳까지 요동고새를 다시 수리하여 경계를 삼고 연에 복속시켰다”로 해석하는 것이 더 무난한 듯하다. 패수가 국경이 아니라 요동고새가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이었다.
패수는 위만의 망명과 한 무제의 조선침공 및 한사군설치 등과 관련하여 당시 고조선의 위치와 영역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역이다. 패수의 위치는 학자에 따라 한반도의 대동강에서 중국 하남성 황하부근에 이르기까지 거리 편차가 수 천리에 이르고 학설이 다양하여 우리의 상고사를 미로에 빠뜨리고 있다. 한나라 초기 국력은 ‘7. 기원난수其遠難守’ 항에서 살펴보았듯이 산서성 중부인 대代 부근도 지키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 한나라가 난하를 넘어 심지어 한반도까지 지배하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사마천의 『사기』를 잘 이해하면 패수의 위치를 찾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위의 ‘장새鄣塞’ 항목에서 설명하였듯이 진개가 동호(진번ㆍ조선)를 천 여리 물리친 후 장성을 쌓고, 상곡ㆍ어양ㆍ우북평ㆍ요서ㆍ요동군을 설치하였으므로 연나라 장성 이남의 땅이 본래 동호의 땅이며, 이곳이 바로 진번ㆍ조선이다. 그런데 고조선이 진번ㆍ조선의 땅을 모두 회복하였으므로 연나라와 고조선의 경계는 연나라 장수 진개가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러므로 패수의 위치는 영정하永定河 이남의 조선지역에서 찾아야 한다. 또 『수경』에서 ‘패수는 낙랑 루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으로 흘러 임패현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라는 기사를 참조하면 패수의 위치는 거의 확정할 수 있다. 영정하 이남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강은 역수易水, 당하唐河, 대사하大沙河 뿐이다. 그리고 『사기색은』에서 신찬의 말을 인용하여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王險城在樂浪郡 浿水之東)”고 하였다. 중국 고지도 대부분 당하 동편에 위만의 도성으로 보이는 만성滿城이 표시되어 있으므로 패수는 자연스럽게 당하唐河로 비정할 수 있다. 위 『패수의 위치』지도에서 만성滿城이 왕검성이며, 수성遂城은 낙랑군 수성현이며, 낭아산狼牙山은 갈석산이며, 요동고새는 다시 수리하여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으로 삼은 장새이다.<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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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대를 따라 요동의 위치가 하북성에서 산서성으로, 또 산서성에서 하북성으로, 그리고 하북성에서 요령성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현 강단사학계는 요동의 위치를 현 중국 요령성에 고정시켜놓고 역사를 해석함으로써 한민족의 상고사가 크게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