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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의 서울
실화
서울에서 때밀이하다
오늘도 변함없이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좋은자료 많이 올려주십시오 .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
김성호
2007년,나는 다움 카페 <중국조선족대모임>에서 한국제1차무연고 동포시험이 곧 시작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제딴은 특대뉴스라고 여기고 바로 초중때 동창생인 김명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명철은 초중 다닐때 나의 딱친구였는데 그때 당시 둘이서 공부는 잘하지 않고 자전거를 빌려서 통화현 허자신이나 금두로 싸다니며 참외를 훔쳐 먹거나 평일에는 저녁 자습도 하지않고 학교기숙사 담벽을 넘나들며 영화나 보러다니면서 우정을 키운적이 있다.다 가정을 이룬 후에도 서로 래왕이 있었는데 한번은 그가 나에게 거액의 자본금을 꾸어주어 내가 하는 장사에 큰 도움을 준적도 있었다.
근데 김명철은 내 전화를 받고 시큰둥한 반응이였다.심양에서 6만원(인민폐)짜리 한국행 수속을 다 밟았으니 곧 한국으로 나간다며 어디에 돈 안내고 한국 가는것이 있느냐고 나의 정보는 믿을수 없다는것이다.내가 이것도 일종 기회인 만큼 놓치면 안된다고 수차례 설득을 했건만 막무가내였다.
이어서 나는 친척들에게도 이 희소식을 알리며 신분증을 물어봐서 일일이 등록해주고 등록금까지 챙겨주었지만 거의다 시험에 참석하지 않았다.하는수 없어 나혼자만 덩그라니 대련 외국어학원에서 시험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별로 기대하지도 않은 일이 성사되여 추첨에 당첨되였다.이윽고 비자도 바로 나와 12월 27일 춘절이 막 다가오는데도 마다하고 나는 <신나는> 한국<나들이>에 나섰다.
서울에 도착하니 상상하던과는 판 다르게 모든것이 답답하고 막막했다.답답한건 중국처럼 고층빌딩은 적고 거의다 낮은 층집들이고 어디를 가나 다 좁고 비집었다.나는 오매불망 그리던 서울이 북경의 장안가거리 량옆의 웅장하고 하늘높이 찌를듯한 건물처럼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줄만 알았다.이는 내가 돈이 없이 고시원같은데만 살아봐서 <우물안의 개구리>견해일수도 있었다.막막한건 필경 외국이고 처음 가는 서울이라 중국 대륙을 거의 다 다녀 봤다는 나도 어리둥절하여 갈피를 잡지 못했다.한국어를 좀 한다는 나도 한글간판은 뜻이 바로 알리지 않아 한참 쳐다보며 궁리해봐도 모르는것이 있어 망설일때가 많았다.
인천공항 지하철에는 매표창구가 설치되지않아 지하철녀직원의 도움으로 겨우 매표기에서 차표를 구입한 나는 길가는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겨우 서울남부터미널역에 도착하였다.그때 나의 호주머니에는 달랑 떠날때 집사람이 건네준 현찰 5만원(한화,이하 전부 한화로 표기함)밖에 없었다. 식당일을 하는 처형이 약속된 롯데리아치킨(炸鷄)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4500원짜리 키킨을 시켜먹었다.이는 내가 한국에서 처음 먹는 식사였다.맛과 서비스는 KFC(肯得基)보다 약간 못했다.처형은 나를 데리고 다시 지하철을 타더니 영등포역에서 내려 한달에 19만원짜리하는 다솜고시텔이라는 고시원에서 주숙하게 하고는 자기는 바쁘다며 다시 출근하러 떠났다.
처형은 길림사람인데 30대에 남편을 잃고 고생을 많이 했다.한국식당일이 고달픈지 두손가락 마다마디가 다 갈라터져 있었다.견강한 처형은 혼자 힘으로 딸과 아들 둘을 키우며 친정부모들까지 모시고 있어 현처량모형의 대단한 분이다.
고시원은 중국에는 아예 없는 개념이여서 조선족들이 다소 생소한 단어이다.한국의 지방학생들이 서울에 올라가 시험을 치를때 공부도 할수 있고 잘수도 있도록 편리하게 만든 시설로 한마디로 말해서 중국의 려관과 비슷하다.단지 매일 방세를 지불하는것이 아니라 한달에 한번씩 방세를 내는것이다.내가 주숙하는 방은 두사람만 누우면 꽉 차는 단칸방이였는데 창문이 없어 대낮에도 칠흙같이 캄캄하여 항상 전등을 켜고 있어야 했다.다행이 스팀(暖氣)이 잘되여 있어 좋았다.웃층에는 구내식당이 있어 밥과 국은 공짜로 제공 해주었다.주방기구와 가스도 있기에 료리를 할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직접 먹을것을 만들수도 있었고 화장실에는 세탁기와 샤워시설이 마련되여 있었다.다만 모든게 셀프(自己動手)였다.
나는 영등포공원정류장 옆골목에서 휴대폰가게를 하고 있는 전영길씨에게 찾아갔다.친구가 이미 통화를 해 놓은지라 전씨는 반갑게 대했다.전씨는 나에게 14만원짜리 모토로라 휴대폰을 외상으로 주었다.중국에서 나는 노키아만 사용하였는데 한국에서는 노키아라는 브랜드(牌子)의 휴대폰은 판매가 되지 않았다. 전씨는 떠나려는 나를 붙잡고 <연변꼬치구이집>으로 가서 식사까지 대접해준 참 고마운 분이였다.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일자리를 찾을려면 출입국관리국에 가서 외국인등록증을 만들어야하고 한국 인력공단에 가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여러가지로 자상히 알려주었다.
전씨는 한국에 온지 이미 10년이 넘었다.이미 귀화되여 한국국적에 가입했으며 노가다로 일당 13만원씩 받고 있었고 집사람은 휴대폰가게를 운영했다.그들은 한국에서 이미 퍼그나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전씨는 육체로동을 거의 안해본 나를 어이없다는듯 바라보며 무슨 일을 할수 있는가고 물었다.나는 뻔뻔스럽게 돈 벌려고 온 만큼 아무일이나 닥치는 대로 할수 있다고 대답했다.전씨는 웃으며 환경미화원하는게 어떤가고 물어서 좋다고 했다.오후 두시에 나가 새벽까지 도시쓰레기를 실어 나르는 일인데 일이 더워워서 그렇지 한달 월급이 180만원이였다.전씨는 자기의 친구가 중국에서 유명한 대학을 나왔는데 한국 와서 몇년간 환경미화원으로 있으면서 돈을 좀 벌었다고 한다.재간둥이인 전씨의 그 친구는 길가에 쓰레기로 버린 컴퓨터를 보이는족족 수거해 자기가 직접 용산전자상가에 가서 전자부품을 사서 재조립하여 자기도 쓰고 나머지는 재한 조선족들에게 판매하여 수입을 늘린다고 했다.그런데 운이 없게도 전씨가 그 친구에게 전화하여 문의하니 조선족은 더 안 받는다고하여 나의 첫 취직은 그만 수포로 돌아갔다.
할수없었다.자기가 직접 나서는수밖에 없었다.이튼날 나는 날이 밝기 바쁘게 노가다일을 찾아 할려고 직업소개서를 찾아다니며 일감을 달라고 간청했다.그들은 두툼한 근시안경에 배가 불룩 나온 나를 보고 일일이 외면했다. 한눈에 내가 고된 일을 안해본 <햇내기>임을 간파한것이다.나는 하는수 없어 고시원에서 며칠 놀았다.처형이 보다못해 식당 사발씻는 일이 마침 있으니 한번 해보라고 전화왔다.나는 사발 씻는 데는 전혀 자신이 없었고 아무 비전(前景)도 없어 보여 거절했다.
어느날 지하철역에서 빈둥대던 나는 무가지(免費報紙)를 뒤적이다가 때밀이안마수강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발견하고 <바로 이것이다>하며 흥분되여 스낵커피 한봉지를 사들고 무작정 대림전문학원의 정이녀원장님을 찾아갔다.학비 30만원이 없으니 우선 이 학원에서 배우고나서 출근후에 월급이 나오면 학비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나를 받아 줄수 없는가고 자천했다.한심했지만 커비까지 사온 나를 보고 한참 어이없이 바라보더니 마침내 오케이했다.학원은 대림역부근의 지하실에 있었는데 수강생들이 남녀 합쳐 40명은 족히 되였다.남자교원은 흑룡강에서 온 조선족이고 녀자교원은 한국녀성이 직접 담당했다. 한국에서는 때밀이를 나라시라고도 했다.나라시는 일본말이 아닌가 싶다.학원에서는 주로 때밀이 요령을 가르치는데 안마와 구두딱이도 약간 익혀야 졸업할수 있었다.추운 겨울철에 남자들이 증기가 가득한 안방에 들어가 알몸으로 때밀이를 배울때면 녀성들은 바깥방에서 반나절 안마련습을 했고 그렇지 않으면 반대로 남자들이 바깥방에서 안마를 익혔고 녀성들이 안방으로 들어가 때밀이 지도를 받았다.남자수강생중에는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고 나처럼 40대가 넘은 수강생은 얼마 없었다.순간 나는 나이가 원쑤라고 처음으로 내가 이제는 젊지않았구나하는 위기감을 느꼈다.
강습생중에는 중국에 있었으면 절대 이런 <천한> 때밀이를 안할 미모의 20대의 녀자가 있었는데 모든 남자수강생들의 <몽중애인(夢中情人)>이였다.마치 소품(小品)중에서 조본산(趙本山)의 몽중애인이 예평(倪萍)이고 송단단(宋丹丹)의 몽중애인이 조충상(趙忠祥)인것처럼 말이다.그런데 이 녀자는 일이 꼬이는지 학원원장이 일자리를 찾아주면 퇴짜를 맞고 울상이 되여 돌아오군하였다.남자강습생들은 자주 나타나는 이 여자의 고운 얼굴을 자주 봐서 기분이 상쾌했을지 모르지만 항상 거절당하는 이 녀자의 심정인들 오죽했겠나 말이다.
점심시간이면 한시간동안 쉬는 시간이 있어서 수강생들은 밖에 나가 식사를 했다. 나는 아침에는 일절 식사를 안했고 점식과 저녁은 모두 천원짜리 김밥으로 끼니를 채웠다.그때 나는 시장기가 나서 맥이 없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몸에서 식은땀까지 빠직빠직 배여나와 정말 죽는줄로만 알았다.중국에서는 고생을 한번도 안했고 육식을 주로 하던 나였으니 말이다.다행이 나는 저녁에 그래도 고시원이라고 하는 잘데가 있어 좋았는데 수강생 남녀 몇이서는 갈데가 없어 눅눅한 학원의 지하실 안마용테이블우에서 이불없이, 취업이 될때까지, 반달넘게 쉬여야했다.그것도 주말이면 빌딩이 쉬는 날이여서 숙박이 금지 되여 싸구려 사우나로 전전하지 않으면 안되였다.려관은 비싸서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일요일날 한가해서 영등포역 주위를 돌아보다가 길림성통화현 삼과유수진에 사는 고향선배 한길남씨를 만났다.그는 정육점에 데리고 가서 수입산 돼지고기를 뒤다리 살고기로 1키로 사주었다.간김에 반찬가게에서 염장고추와 김치를 약간 샀는데 또한 별미였다.다시 영등포로 갈 기회가 생기면 꼭 그 반찬가계를 찾아가 다시 그 맛을 음미하고 싶다.수입산 돼지고기 가격이 중국산과 비슷하여 그후부터는 고시원 구내식당에서 혼자서 돼지고기만 서 푹푹 끓여 해먹었다.항상 배불리 맛있게 먹을수 있어서 행복했던 나날이였다.그후부터 신물이 나는 김밥을 거의 먹지 않아 좋았다.
20일동안 악전고투하여 나는 서툴게나마 때밀이요령을 일부 장악하여 충청남도 서천(舒川)의 한일장사우나로 <배치>를 받았다.한일장사장은 인자한 분이였는데 나를 데리고 삼겹살집에 가서 포식하고는 일을 시켰다.사우나안에는 잠자는 방에 전기담요까지 있어 조건이 괜찮았다.식사는 식모가 따로 있어 직원들과 같이 했다.새벽 5시부터 기상하여 목용탕안에 더운물을 가득 채워놓고 반시간에 한번씩 바닥을 딲아야 했다.7시면 손님들이 들이 닥치는데 눈코뜰새 없었다.사장은 손재간이 좋아서 리발과 머리염색을 위주로 하는 동시에 짬이 나면 구두도 딲았고 음료수도 팔았다. 나는 손님들이 쓰고 난 목욕수건을 지하실로 가지고 내려가 세탁기에 돌리고 건조기에 말리워 손님들이 사용하기 편리하게끔 차곡차곡 쌓아 두어야 했으며 손님들이 들어오면 큰 소리로 인사하면서 옷장키(열쇠)를 손님들에게 건네주어야 했다.사장이 바쁠때는 내가 손님의 구두를 딲기도 했는데 아무리해도 베터랑(老手)인 사장의 실력에 못따라가 하자(瑕疵)가 생겨 사장에게 꾸지람을 들었다.때를 밀려는 손님은 많지않아 나는 모든 잔일이 보이는 족족 거들어야 하였다.마침내 한 손님이 때밀이를 불렀다.나는 학원에서 배운 순서에 따라 때밀이를 시작했다.유리창너머로 가만이 지켜보던 사장이 급이 다가오더니 나의 손에서 타일은 빼앗아 자기가 직접 밀면서 해본 경험도 없이 무작정 찾아온 나를 질책하였다.나는 아무말 없이 꾹 참으면서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안절부절못하며 사장의 때미는 기술현장지도를 짜증나도록 받았다.
안되겠는지 사장은 밖에 나가서 누구한테 뭐라고 한참 전화하더니 되돌아와서 오늘 저녁 때밀이가 새로 올거니 떠날 준비를 하라고 했다.하루도 안되여 해고 당한 나는 김이 빠져 심란했지만 얼굴이 지지벌개진 상태로 때밀이는 감히 못하고 잔일을 저녘때까지 견지하였다.퇴근후에 정말로 우람진 조선족 때밀이가 트렁크를 들고 나타나났다.때밀이를 2년동안 했다는 그는 연변에서 사온것이라며 마른 명태 두마리를 꺼내더니 소주 한잔하자고 청을 들었다.워낙 술을 안마시는 나였지만 그날만은 술이 당겨 소주 한병을 굽을 냈다.나는 때밀이가 너무 천하고 어려워 포기하고 다른 일 찾아한다며 혀꼬부라진 소리를 내지르다가 어느새 남가일몽에 빠졌다.꿈속에서 몇년간 분투한 나는 대형 사우나에서 때밀이를 10여명 거느린 오야지(承包商)가 되여 수하사람들을 호령하고 있었다.
이튼날 사장은 나에게 어제 일한 일당 5만원을 주며 잠은 사우나에 계속 자면서 자기 친구가 세차장를 하는데 곧 구정(춘절)이라 손님이 많아 며칠 도와줄수없는가고 물었다.서울로 돌아 가봤자 역시 할일 없는건 마찬가지여서 쾌히 응낙을 했다.그런데 세차도 문세(평북방언,지식이나 영문이라는 뜻)가 많아 배우기가 결코 호락호락하지않았다.
저녁에 사우나로 돌아오니 새로 온 때밀이도 사장한테 불합격 맞아 되돌아가야 한다며 볼멘 소리를 하였다.이튼날 그가 먼저 떠났고 며칠후에 나도 다시 기차를 타고 상경하였다.
2009년 5월23일 토요일 오전 쉬는 날이라 PC방(网吧)에서 이 글을 여기까지 써내려가던 나는 부득불 일단 작업을 중단하는수밖에 없었다.전 한국 대통령인 로무현이 이날 아침 8:30시에 봉하마을 자택뒤산에서 투신자살했다는 뉴스에 심한 충격을 받은것다.나의 아버지와 동갑인 로대통령은 재한 조선족들에게 은인이나 다름없다.재임기간에 처음으로 무연고 동포 시험정책을 제정하여 나같은 한국에 친척이 없는 조선족들에게 한국갈 기회를 마련해주고 조선족을 차별안하며 인간대우까지 해주는, 중국사람들이 한사람을 높게 평가할때만 쓰는 말 즉 호인(好人)이였다.조선족들은 한국처럼 잘살지는 못하지만 중국 대륙기질의 영향을 받아 은혜를 갚을줄 아는 사람이다.아니 이 은혜를 꼭 갚아야 한다.한국인들이 불쾌하건 말건 이런 한국인은 정말 많지 않다.이 <무명소졸>의 한 조선족이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비옵니다.부디 하늘나라에서는 편히 쉬십시오.나는 이렇게 묵묵히 기도를 드리며 투신전 마지막까지 그깟 담배 한가치의 행복도 없으신 로대통령에게 권련을 지전(紙錢)과 함께 구석진곳을 찾아서 태워주었다.
여기에서 로대통령의 일화 한구절 적어본다.
<로 전 대통령이 변호사를 개업한 직후 한 아주머니가 남편이 사기 혐의로 구속됐다며 변호를 의뢰해왔다. 로 전 대통령은 60만원에 사건을 수임했다. 한데 그 아주머니는 남편이 합의를 봤다며 해약을 요구했다. 로 전 대통령은 사정이 급해 받은 돈을 이미 써버린 뒤였다. 돌려달라, 안 된다 승강이를 벌이던 끝에 그 아주머니는 “변호사는 그렇게 해서 먹고 삽니까”라며 눈물을 흘린 채 돌아갔다고 한다.로 전 대통령은 나중에 자서전 머리말에서 “지금까지 걸어온 내 삶의 영욕과 진실을 담보로 해 백발의 할머니가 됐을 그 아주머니에게 따뜻한 용서를 받고 싶다”고 부끄러워했다.>
서울에 돌아온 나는 다시 대림전문학원을 찾았다.대림전문학원에서는 수강생들이 일자리를 찾을때가지 책임지고 여러번 알선해주었다.저녁에는 학원 지하실에서 자기로 하였다.정원장은 그날로 50만원 담보금에 의정부일대에 일감이 생겼으니 가보라고 하였으나 나는 돈이 없어서 다른 수강생이 파견되여 갔고 나중에 나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의 드림한증막으로 떠나게 되였다.
대형사우나인 드림한증막은 장사가 유난히 잘되였다.뽀얀 증기속에서 여념없이 때밀이를 서두른던 오야지 전운호는 나를 보더니 인사도 없이 타올을 던져주며 바로 때밀라고 시켰다.나는 정신없이 손님들을 받기 시작하였다.바빠서 프로(專業)나 아마추어(業餘水平)가 따로 없었다. 작업은 저녁10시에 끝났다.나는 깜작 놀랐다.땀범벅이 된 내가 혼자서 26명 손님의 때밀이를 한것이다.전씨는 수고 했다며 찬 음료수 한병을 사서 나에게 건네 주었다.나는 좋은 <사장>을 만났다고 운이 좋다고 미리 기뻐했는데 웬걸 <일은 열심히 하는데 솜씨가 서툴구먼>하면서 내 월급을 180만원에서 150만원으로 깎았다.그렇지 않으면 되돌아가라는것이였다.돌아가면 곧 음력설이여서 바로 길가의 로숙자로 나앉아야 할 형편이라 나는 하는수없이 동의하지 않을수밖에 없었다.나는 안된다면 출근 당시에 곧이대로 말해줘야지 퇴근한 다음에 한수 뜨는 전씨가 쾌씸했다.한국에서는 사장님을 잘 만나야 고생안다더니 정말 그 꼴이 맞았다.
나보다 어린 전운호는 한국인인데 때밀이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예전에는 때밀이오야지를 할려고 1억을 담보금으로 냈다가 사기당한적이 있었고 지금은 3천만으로 주식투자를 하고 있었다.그는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안산지역에서 세집을 얻어 살고 있었다.때밀이를 오래 하여서인지 그의 팔뚝근육은 보기좋게 울퉁불퉁 튀여나와 있었다. 그는 내가 갓 왔을때 나의 나이가 얼마인가고 물은적이 있다.나는 나이가 많으면 그가 받지 않을 가봐 서른한살이라고 거짓말했더니 자기가 한살 우라며 이후부터는 자기를 전형(全兄)이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그후부터도 장사가 여전히 잘되여 눈코뜰새 없었다.때밀이를 제일 많이 한날은 손님이 90명이 넘어섰다.정말 전쟁이나 다름없었다.까다로운 전형은 나에게 때밀이 요령을 가르치는데는 게을리지않았다.하루동안 일하고 나면 옴몸이 비오듯이 흐르는 땀투성이였다.피로할때는 커피를 연거퍼 타마시군했다. 일 많이 하는 한국사람들이 그래서 커피를 좋아하는구나하며 자기나름대로 분석도 해보았다.밤11시에 퇘근하여 잘때는 귀신이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꿈나라로 빠져버리군 하였다.바쁘고 고달픈 나날이였다.
어느날 오래동안 사우나안에 갇혀있던 나는 손님이 밖에 큰눈이 내렸다고 하길래 바깥구경을 나갔다가 그만 찬바람에 허리가 끊어지는 통증을 느껴 바람벽을 지탱하며 겨우 사우나로 돌아왔다.따가운 물에 몸을 한참 담가서야 통증이 서서히 사라졌다.너무 무리하게 때밀이를 한것이 허리병을 초래한것이다.그냥 힘을 써야 하는 오른 팔도 약간 부어나며 아파났다.오른 팔 통증이 완전히 없어지는데는 약 반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마침내 나를 긍정해주는 손님이 있었다.한 손님은 고맙다며 5천원 팁을 주었으나 전형이 2천원 가로채여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나는 3천원만 손에 쥐였다.그후부터 이 손님은 전형이 없을때 몰래 나에게 팁을 건네 주군하였다.
까다롭게구는 손님도 더러 있었다.힘이 너무 약하다.너무 아프게 민다.풋내기다 하며 별별 말을 다 내뱉으며 생트집을 잡았다.그제야 나는 서비스업이 이래서 힘들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엄청난 스트레스였다.내가 과연 이런걸 견디여 낼수있를가 하며 상심도 했다.
저녁 쉬는 참에 나는 중국으로 전화를 했다.장인이 생일날이였다.월급이 안나와 장인생일에 송금도 못해 미안했다.장인은 파킨슨병을 앓고 있어 바깥출입도 못했다.약으로는 호전이 안되는 병이여서 수술해드리고 싶었지만 돈이 원쑤였다.일년후 병마에 고생하시던 장인은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불효였다.
그리고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놈이 학교유리를 깨쳐 벌금을 냈단다.걱정거리가 한두가지 아니다.집사람과 통화하고 나면 밤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다.
탈의실안의 텔레비뉴스에서 이천랭동창고의 화재를 보도하고 있었다.모두 40명이 죽었는데 그중에 조선족 13명이나 되였다.나중에 알고 보니 항일 독립운동가 김규식장군의 후손인 조선족 김군도 사망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언제든지 나도 저런데서 막로동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을수도있다는 공포감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중국뉴스에서는 호금도총서기가 이번사고로 사망한 조선족들을 직접 애도하며 깊은 관심을 보여주어 나를 감동케 하였다.재한조선족들은 절대 고립된 단체가 아니였다.나는 중국 제4대집단령도자들에게 유별나게 호감이 많다.호금도총서기와 온가보총리는 농업세를 완전히 취소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경감시켰으며 지금은 또 전민이 의료혜택을 받게끔 의료개혁정책을 모색하여 조만간 실시하게 된다.이는 얼마나 장한 거사들인가!내가 사는 중국이 정말 강대해졌구나 하는것을 륙감으로 느낄수 있었다.
춘절전날 전형은 설 쇠러 집에 갔고 나 혼자만 남아서 사우나를 지켜야 하였다.사우나에는 손님이 없어 한가했으나 또한 적막강산이였다.친구들이 전화 와서 춘절 파티를 하니 만나자고 했으나 나는 출근해야 한다면서 시간이 없다고 하였다.그들은 유감을 표시하며 나에게 불행한 소식을 한가지 알려주었다.고향선배인 송기환(가명)이 에이즈로 별세했다는것이다.순간 나는 인간의 무상함을 느꼈다.그는 멋쟁이 사나이여서 젊었을때 련애도 많이 했고 파혼도 많이 해본 사람이다.옷도 항상 정갈하게 차려입고 다녔으며 일도 깐지게 하는 부지런한 살림군이였다.나와 가까운 사람이 에이즈환자라니 상상할수 없는 일이였다.연변주위생국에 따르면 1994년에 연변주 귀국로무일군가운에서 첫 에이즈비루스감염자가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연변주에서 이미 발견, 등록된 에이즈비루스감염자 및 에이즈환자는 130여명에 달했다. 그중 귀국로무인원이 50여명으로 전체 감염자수의 40%를 차지하고 성접촉으로 인한 감염이 60%를 차지하고있다.그 만큼 에이즈가 우리와 가까와 진것이다.송기환은 돈 벌려고 한국어선에 올랐다가 이 못쓸병에 걸렸다.정 못견디겠으면 장화(콤돈)라도 신고 들어가지.참 아까운 사람이 죽었다.
며칠후는 숭례문 방화사건이 한국을 되집었다.숭례문은 남대문이라고도 한다.나는 반달전에 남대문 시장에 구경갔다가 숭례문을 본적이 있다. 별로 웅장한 건물이 아니여서 자세히 보지않고 그냥 지나쳐버렸는데 그번이 마지막일줄은 몰랐다.인천의 채종기로인이 고의로 방화, 5시간만에 조선시대 건축의 대표가 되는 국보 제1호가 전소(全燒)하다싶이 되였다.경찰들이 채씨의 집에 들이 닥쳤을때 그는 태연하게 고스톱(화토)를 치고 있더란다.채씨는 10년 징역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불행한 일이 왜 이렇게 많이 터져 나오는지 모르겠다.나의 한국행이<사면초가>로 되였다.
나는 말미 3일을 얻고 한국산업공단의 교욱을 받아야했다.교육을 받지않으면 취업이 불법이다.고시원에 살때 교육받는 날자를 받은적이 한번 있는데 간밤에 설치해놓은 휴대폰알람이 아침에 울리지않아 창문이 없는 캄캄한 방에서 기상하여 엄벙덤벙 달려갔는데도 이미 한시간 지각이였다.그래서 한국인력공단의 선생님들에게 수없이 빌었지만 안된다며 딱 잡아떼길래 하는수없이 다시 등록하여 교육기일이 그만 한달뒤로 미루어졌다.교육받기 전에 신체검사가 있는데 나는 고혈압진단을 받았다.후반생을 매일 고혈압약을 복용하며 살아가야만했다.
집에서 돌아온 전형이 달라졌다.때밀이는 딴전에 치고 컴퓨터에 매달려 주식을 연구하며 일확천금만 을 꿈꾸고 있었다.손님이 몰려 내가 미처 못 밀어내자 손님들이 류실되기 시작했다.설상가상으로 드림한증막 부근에 더 큰 사우나가 생겨 장사가 영향을 받게 되였다.하루는 보다못해 내가 전형에게 주식은 잠시 놔 두고 때밀이에 전력합시다라고 호의로 권고했는데 그게 도화선이 되여 조선족이 버릇없이 사장보고 이래라저래라 시킨다며 나에게 별의별 욕설을 다 퍼붓는것이였다.조선족이란 말에 나도 격분하여 대들었다.그는 나의 멱살을 잡더니 사람없는 복도로 끌고가 주먹을 휘둘렸다.안경이 날아 갔고 코피가 터졌다.한국은 법치사회다. 나는 바로 휴대폰으로 바로 경찰에 신고할려고 버튼을 누르는데 전형이 황급히 제지하며 돈으로 배상할꺼니 화해하자고 쩔쩔 매는것이였다.사실 전형도 겁쟁이여서 나를 혼내보자는 심정으로 슬쩍 때린것이였다.나는 배상은 필요 없으니 깨진 안경을 바꿔주고 월급을 당장 지불하면 신고를 하지않는다고 하니 전형은 순순히 말을 들어주었다.그날로 나는 미련없이 드림한증막을 떠났다.
우선 잠자리를 마련하는것이 급선무였다.조선족교회를 찾아가면 하루 2천원에 먹고 자는것을 해결하수 있어서 가봤는데 초만원을 이루어 되돌아섰다.지하철어구에서 다시 무가지를 집어들었다.광고란에
에 남구로 3번출구의 중국동포타운센터 신문사 빌딩 4층에 하루 5천원하는 동포쉼터가 있다는것을 발견하고 나는 신대륙이나 발견한것처럼 흥분되여 무작정 달려갔다.쉼터는 통간집이였는데 휑하게 커서 살것만같았다.칸막이가 없는 장판구들우에 침대 한층이 더 설치되여 있어서 마치 80년대 조선족중학교의 기숙사를 방불케하였다.방세를 한달씩 지불하면 하루 3천원으로 다운(打折)되였다.내가 어릴때에만 볼수있던 중국의 대차점(大車店)이 서울에 나타난것이다.그제야 나는 여기가 조선족들에게 유명한 가리봉동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거리에는 화교들이 꾸리는 상점,분식점들이 수두룩했다.할일없는 로인화교들이 상점앞에 모여 앉아 중국장기를 두고 있었다.중국찐빵(包子),두유(豆漿),꽈배기(麻花)등을 손쉽게 사먹을수 있었다.중문시스템을 깐 피시방도 있었다.피시방에서 QQ메신저로 중국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족녀자를 만났는데 심양에서 한국의 화교에게 시집온 그녀는 부모를 다 한국에 초청하여 가리봉동에서 분식점(小吃部)을 경영하고 있었다.말 그대로 가리봉동은 한국의 당인가(唐人街)였다.
쉼터에는 김명국할아버지(67세)를 비릇한 로인 세명이 있었는데 나는 그들을 할아버지삼총사라고 불렀다.김명국할아버지는 길림사람으로 젊었을때 군대에 갔다온적이 있어서 그런지 허리가 꼿꼿하고 신체가 정정했다.세분은 항상 다같이 양복에 넥타이를 메고 그림자처럼 떨어지지않았으며 번마다 씩씩하게 걸어다녔다.한번은 세분이 47세에 나는 한국인 농장주에게 가서 일하게 되였는데 월급을 못 봤자 세사람이 다 같이 달려들어 그 한국인을 구두발로 차서 끝내 받아냈다고 한다.쉼터의 무관(無冠)의 제왕들이였다.
나의 잠자리 <이웃>인 청도신항통관학교의 한국어학부의 주임으로 계시던 김영춘선생은 선비라 말수가 적었다.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연변인민출판사에서도 근무하신적이 있었다.김선생은 항상 라지오 듣기를 즐겼다.내가 쉼터를 떠날대까지도 김선생은 아침 일찍 일자리를 찾으러 나다녔으나 번마다 헛수고였다.마침 나의 아버지가 한국 와서 돈벌겠다고 기별이 왔다.나는 김선생의 사례를 들면서 한국에서 일자리 찾기가 어려우니 절대 오지 말라고 신신부탁했다.아버지는 단념했는지 그후 부터는 잠잠했다.
웃층에 있는 젊은이 둘이 술판을 벌이다가 대방이 반말 한마디 했다고 트집 잡으며 다투다가 손찌검까지하게 되였다.마침내 일이 커져 신고가 들어가 둘이 다 경찰에게 불려갔다.무슨 징벌이 있을런지 모르겠으나 이렇게 먼데와서 고생하며 돈벌려고 왔는데 <동족상잔>하는걸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나는 일자리를 찾아야했다.한 침실의 통화강철공사에서 정년퇴직했다는 로인이 일자리가 있으니 같이 가자고하여 지하철 타고 오산으로 갔다.알고 보니 귀가 약간 먹은 이 로인은 나의 둘째삼촌인 김병철과 통화시조선족중학교때의 동창이였다.둘이 다 초중을 졸업하고 통화강철공사의 로동자로 들어가서 처음에는 기차적재함의 석탄을 부리우는 고된 로동을 했다.10년전에 강철공장의 자동차대대장으로 된 둘째삼촌이 47세의 젊은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세상 뜬 사실도 알고 았어 나와 삼촌 이야기를 나누며 그는 연신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오산의 공장규모는 컸는데 전문 보석들을 생산판매하고 있었다.판매를 직판형식으로 한다고 했으나 내보기에는 다단계판매였다.회의실안에 사람들이 북적거렸다.중국이나 한국이나 다 똑 같았다.여기서 나는 매하구에 사시는 정창호작가를 만났다.그분의 글을 어릴때 많이 읽었는데 직접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한국에 나와서 고생하시는 정작가를 보면서 나는 많이 안스러웠다. 조선족기업인들이 빨리 배출(輩出)되여 정작가같은 조선족문인들을 도와야 우리의 문화를 하루속히 발전장대시킬수 있을 텐데 말이다.이 일은 나의 적성에 맞지않아 그만두고 나는 직업소개서를 찾아가 때밀이스피아(替工)를 하게 되였다.일당 10만원이였다.수입이 짭짤했다.
내가 일하는 곳은 대림의 윤서사우나였다.규모가 작았지만 손님은 적지않았다. 오야지는 주씨라는 조선족인데 내가 있는 동안 귀가 아프도록 잔소리를 끊임없이 해댔다.학원에서 배운 학원은 너무 서툴어서 못쓴다.도대체 때밀이를 어디서 배웠는냐?중국에 있을때는 무얼 했는냐?꼬치꼬치 물어봐서 부담이 됐다.그는 언변이 청산류수여서 손님들과도 잘 어울렸다.대학을 나온것은 아닌데 박식했다.어린아이들이 찾아오면 사탕도 주면서 잘 놀아도 주었다.장사가 안될리 없었다.내가 때밀이 할때는 밖어서 기웃거리며 감시를 하군했다.내가 일을 끝나고 나면 잘했다는 말도 없이 몇가지 요령을 시정해주군했다.내가 윤서사우나를 떠날때 주사장은 못내 아쉬워하며 스피아를 하지말고 여기 와서 월급을 받으면서 할수 없는가고 물었다.그는 나를 윤서사우나에 묶여놓을려고 일부러 괴롭힌것이다.
그후부터 나의 때밀이 인생은 계속되였다 .스피아는 매일 있는 일이 아니여서 시간이 많아 나는 도처로 나다니면서 중국에서 조그마한 사업을 할수있는 아이템(項目)을 찾으러 다녔다. 나는 사우나에서 일하며 손님들에게 판매되는 도루코라는 브랜드(品牌)의 면도기를 접촉하게 되였는데 직접 사용해보니 미국의 질레트(吉列)면도기보다 품질이 못지않았다.돈이 될것같았다.나는 도루코 본사를 찾아가 중국에서 판매할 의향이 있으니 도와 달라면서 가격과 샘플을 받아냈다.
한국제2차무연고 동포시험이 등록할때가 되였다. 인터넷등록은 20분미만에 끝났다.한국에 아직도 못간 김명철은 이번에 시험에 참가할려고 하였지만 사람들이 많아 등록도 못했다.그제야 김명철은 전번의 기회를 놓친것을 못내 후회하였으나 엎지른 물이라 좋은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시험에 참가한 내가 아는 사람들의 서험성적이 다 90점을 초과 했으나 추첨당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그만큼 경쟁이 치렬해진것이다.
미국발 국제 금융위기가 한국을 덮쳤다.더욱 혹독한 시련이 나와 재한조선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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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