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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임과의 전쟁
삿 12:1-7
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3 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5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6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7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삿 12:1-7 / [입다가 에브라임과 충돌하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모여 싸울 준비를 하고 북으로 내려와 입다에게 이같이 위협하였다. `네가 암몬 사람과 싸우러 건너갈 때 어째서 우리에게 싸우러 가자는 단 한마디 없이 그냥 갔느냐? 우리가 너와 네 집안 사람들을 불에 태워죽여 버리겠다' 2) 그러자 입다가 `내가 우리 군대를 이끌고 암몬군과 싸우러 나갈 때 너희를 부르지 않았느냐? 같이 싸우러 나가자고 하였지만 너희는 우리를 도와줄 생각도하지 않았다. 3) 너희가 우리를 도울 마음이 없는 것 같아 나는 죽음을 무릅쓰고 암몬 진영으로 쳐들어가 싸웠다. 그랬더니 여호와께서 암몬군을 우리 손에 넘겨 주시어 우리가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이제 와서 내게 싸움을 거느냐?' 4) 입다는 길르앗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아 에브라임 사람들과 싸움을 벌였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길르앗 사람들에게 패하고 말았다. 길르앗 사람들이 화가 났던 까닭은 에브라임 사람들이 자기들에 대해서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우습게 여겼기 때문이다. `너희 길르앗 사람들은 우리 에브라임 지파에서 도망 쳐 나간 자들이다! 너희가 살고 있는 길르앗도 우리 에브라임 지역과 므낫세 지역 사이에 있지 않으냐?' 5)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 지역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요단강 나루터를 지켰다. 그러다가 강을 건너 도망치려는 에브라임 사람이 있으면 에브라임 사람이냐고 물어 보아 아니라고 대답하면 6) ㄱ) `십볼렛!' 하고 발음해 보라고 하였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이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씹볼렛!' 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볼렛을 씹볼렛이라고 소리 내는 사람은 무조건 잡아서 그 강 나루터에서 쳐죽였다. 이때 죽은 에브라임 사람은 4만 2천 명이나 되었다. (ㄱ. `곡식'이라는 뜻이다) 7) 입다는 6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활동하다가 죽어 길르앗에 있는 한 성읍에 묻혔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암몬과의 전투에 자기 지파를 참여시키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말합니다. 입다와 그 집안을 위협합니다. 이에 입다는 에브라임과 감정이 있던 길르앗 사람들을 모아 에브라임 사람들을 치게 해서 요단 나루턱에서 사만 이천 명을 죽입니다.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1-3) 요단 동편에 있던 지파의 사람들이 입다의 지휘 아래 암몬 사람들을 정복했습니다. 그러자 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입다에게 시비를 걸어옵니다. 이들은 기드온이 승리했을 때도 같은 이유로 불평했던 사랍들입니다(삿 8:1). 이들이 시비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와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에 대한 시기심 때문으로 보입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암몬이라는 이스라엘의 공통의 적이 사라지자, 향후 이스라엘의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습니다. 결국 외부의 적들을 향해 싸워야 할 힘이, 시기심으로 인해 이스라엘 내부에서 불평과 원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공동체에도 자신에게도 아무런 이득을 주지 못합니다.
입다의 반응(4-7)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들에 대해서 과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딸을 잃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겹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말대로 에브라임 족속을 불렀는데 그들이 모두 외면하다 승리하고 난 후에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2b). 입다는 심하게 화를 내었고 결국 종족간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입다의 태도는 전에 에브라임 지파가 문제를 제기했을 때 자기를 낮추는 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 기드온과 비교할 때 큰 차이가 납니다(8:3).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말로 해결해야 합니다. 결국 질투와 관용하지 못하는 태도가 내전을 유발하여 42,000명의 에브라임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은 패전하여 돌아가려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s발음을 sh로 발음하면 모두 죽였습니다. 어려울 때에는 방관하다가 어려움이 끝나자 나서서 자신을 주장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야기된 문제를 이방민족을 징벌하듯이 처리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적용: 지금 당신 마음의 분노와 불평의 원인이 혹시 당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공명심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왜 예수가 십자가에 힘없이 죽어갑니까? 너무나 약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죽음을 끌어안는 사랑을 보고 너무나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부활을 본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죽음을 끌어안는 사랑은 부활을 만들어 놨습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힘. 힘이 있어야 살지요. 힘이 있어야 사랑하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저의 사랑입니다. 사람은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야 합니다. 잘 아시는 대로 소크라테스가 죽으면서 “내 영이 육에서 이제 해방한다. 그러나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고 해방의 노래” 그게 “백조의 노래”입니다.
< 설 교 >
애국과 생명
이성희목사 / 사사기 12:1-3, 마가복음 8:35-38
서론
오늘은 우리교회가 지키는 ‘북한선교주일’입니다. 분단된 한반도가 다시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평화로운 통일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전쟁의 위협을 멈추고, 대화로 한민족의 슬기를 세계에 보여주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북한 동포의 생명입니다. 이 땅에서의 생명이며 동시에 영원한 생명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일에는 우리 모두가 힘을 다해 앞장 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사이버’시대를 넘어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시대입니다.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덕이 될지 아니면 독이 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덕보다 독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미래학자 커츠웰(Raymond Kurzwell)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앞서는 특이점(singularity)을 돌파하게 되면 인공지능이 스스로 가속적 추론을 거듭하여 수퍼지능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리학자 호킹(Steve Hocking)은 인간은 인공지능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생각하는 로봇의 개발을 위한 완전한 인공지능의 등장은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생명복제는 이 전 세기부터 열심히 연구되어 왔습니다. 2002년에는 복제한 아기가 첫 번째로 탄생하였다고 미국 유사 종교단체인 ‘라엘리언’ 산하 ‘클로네이드’사가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인간복제 이야기는 잠잠합니다. 아마 클로네이드사의 발표도 사실이 아닌 듯합니다. 인간복제는 실현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봅니다. 인공지능은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고, 지식도 엄청나게 보유할 수 있지만 현재 인류가 알지 못하는 문제로 후퇴하게 될 것이고, 인공지능이 파괴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생명이 없는 어떤 것도 무한하지 못하고, 가치가 없습니다.
인공지능은 생명이 없는 존재입니다. 더구나 우리시대를 ‘감성시대’라고 하는데 감성시대에 감성 없는 존재가 인간을 이긴다는 것은 절대 인류에게 희망을 주지 못합니다. 감동을 주지 못하는 존재는 희망도 주지 못합니다.
복제인간에게 영혼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만들지 않은 존재가 영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을 하나님이 만들지 않은 존재에 주실 것 같지 않습니다. 영혼이 없다면 구원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이 없는 흙에 숨을 불어넣으셔서 ‘생령’(living soul)으로 만드셨습니다. 영 혹은 혼으로 번역한 ‘네페시’는 성경에 750번 등장합니다. 이 단어가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생명의 힘을 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과 관련하여 쓰일 때는 우리의 ‘영혼’을 뜻합니다.
성경에는 “생명의 하나님”, “생명을 주신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생명” 등 하나님과 생명을 연관시켜 한 말이 많습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며, 내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 있음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그래서 생명을 빼앗지 못하게 하며, 고의가 아닌 우발적 살인에 보복을 당하지 않도록 도피성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고귀합니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두 번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생명은 함부로 버리지 말이야 할 것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목숨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리고 천하보다 귀한 것이 있으면 목숨을 버리라고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릴 수 있고,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하신 말씀은 생명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대답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목숨과 맞바꿀만한 것이 있는데 무엇인지 대답해 보라는 질문입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리고 바꿀 수 있습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을 버리고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지만 잃으면 얻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역설적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시므로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얻으셨습니다. 잃으면 얻는 비결은 성경적 진리입니다. 우리 모두가 잃어서 더 큰 것을 얻는 복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천하보다 귀한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합니다.
마가복음 8:36에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합니다. 구원하고자 하면 잃고 목숨을 잃으면 구원한다는 말은 역설의 극치입니다. 성경적 진리는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긍정을 얻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왜 소중합니까?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소중합니다. 살아 있는 생령이어야 사람이기에 소중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소명도 끝나기 때문에 살아 있는 생명이 소중합니다.
사람이 목숨을 잃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37절에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합니다. 38절에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합니다. 사람의 목숨이 가장 귀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가운데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란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큰일을 이루어놓아도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일본의 대학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학자가 하루는 강 건너편을 가기 위하여 나룻배를 타러 강가에 갔습니다. 나룻배를 탔는데 넓은 강이라 건너기 위하여 한참 걸렸습니다. 학자는 뱃사공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사공 양반, 플라톤을 아시오?” “모르죠, 저 같은 천인이 어떻게 플라톤을 알겠습니까?” 학자는 측은한 듯이 바라보더니 “플라톤은 헬라의 대철학자요. 플라톤을 모른다면 당신은 인생의 절반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소”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가다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프랑스라는 나라를 아시오?” “모르죠. 프랑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혀를 차면서 “프랑스는 유럽의 예술의 나라인데 프랑스를 모른다면 인생의 4분의 1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요”라고 했습니다. 얼마쯤 갔는데 갑자기 돌풍이 불어 풍랑에 배가 뒤집혔습니다. 강에 빠져 허우적대는 학자에게 사공이 물었습니다. “학자님, 수영할 줄 아시오?” “몰라요.” 그 때 사공이 말했습니다. “수영을 할 줄 모르면 인생을 다 잃은 겁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많은 지식이나 재물도 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것이 다 끝나는 것입니다. 죽으면 더 이상 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고속도로에 이런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졸음운전, 모든 걸 다 잃습니다.’ 과속운전도 모든 걸 다 잃습니다. 빨리 가려다 진짜 빨리 저 나라로 갑니다. 빨리 가려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죽으면 빨리 가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살아 있어야 빨리 가는 것도 유효합니다.
톨스토이가 말했습니다.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살아라.” 살아 있어야 행복하고, 자신이 할 일도 하고, 인생의 보람도 있습니다. 신학자 하워드 터먼은 “세상에 필요한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래서 옛말에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는 반대되는 말을 합니다? 요한복음 12:24에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죽으라고 합니다.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이 말이야 말로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보세요.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 외에 길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9:22에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기본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죽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죽어서 우리를 구원하고, 죽어야 살고, 죽어야 열매를 맺게 만드셨습니다.
포로민이었던 느헤미야는 죽을 각오로 포로민으로 왕에게 나아가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에스더는 왕이 정한 법을 깨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자굴에 던져질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잃어서 얻은 포로기 신앙의 위인들입니다.
순교자 푸추아는 “죽고자 하는 자는 삽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잃으면 얻는다는 것이 성경적 역설이며 진리입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도 “죽고자 하면 살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충무공이 목숨을 바치고 죽으니 나라가 살고 자신이 살고 백성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광화문 길목을 버티고 지키고 서 있습니다.
서위렴(William Show 2세)선교사는 아버지가 한국선교사였습니다. 그는 평양에서 출생하여 16세까지 한국에서 자랐습니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던 중 미국 해군사관학교 전신인 해안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여 한때는 한국에서 근무하였습니다. 그가 하버드대학교의 박사 과정 졸업을 6개월 남겨두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미 해병사단 수색대에 입대하여 한국전에 참전하였습니다. 1950년 9월 22일, 서울 탈환작전을 수행하던 중 서울 은평구 녹번리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그는 평상시에 한국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1992년 6월 24일, 은평구 응암1동 녹번 제2놀이터에 그를 위하여 작은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런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고귀한 목숨을 버리신 죽음입니다. 서위렴선교사의 죽음은 죽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스스로 죽으므로 한국을 살리는 작은 불꽃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자기를 구원하는 생명보다 남을 구원하는 고귀한 죽음이 더 아름답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버리므로 더 많은 것을 구원하는 우리의 생명이기를 바랍니다.
둘째,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마가복음 8:38에는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합니다. 죄의 세대는 복음을 부정합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란 생명과 물질을 혼동하는 시대를 말합니다. “음란과 죄”란 예수님의 복음을 부인하고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는 복음을 부끄러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부끄러운 일을 당할 것입니다.
각종 비리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보면 한 결 같이 부끄러운 일을 당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부모와 조상에게 가장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가는 일이 지체가 높은 사람일수록 부끄러운 일입니다. 요즘에도 법조계 비리를 보세요. 아무리 전관예우라고 하지만 어떻게 변호사 수임료가 일 년에 100억 원이나 됩니까? 이런 일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구속이 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입니다. 가문의 굴욕입니다.
남의 돈을 사기 쳐서 자신의 배를 불리고 서민들을 피눈물 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금을 외국으로 빼돌리고 사는 사람들이 과연 그 돈으로 행복할까요? 늘 남의 눈치를 봐야 하고, 고향에 갈 수도 없고, 친구도 다 떨어지고, 경찰만 봐도 겁이 나고, 낯선 사람이 찾아오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할 것입니다. 이게 재미있는 일입니까? 자기 얼굴을 맘대로 드러내고 살지도 못하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마태복음 7:22에는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합니다. 7:23에는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지만 하나님은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하나님 앞에 섰는데 “네 이름이 없다, 저리 가라”고 하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초청장이 없어 쫓겨나는 잔치보다 더 부끄러운 일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쫓겨나는 것은 치명적 부끄러움입니다. 이 부끄러움은 멸망이며 영원한 벌입니다.
‘퍼블릭 차일드’(public child)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낯을 가리는 것처럼 처음 보는 낯선 대상을 경계하고 부끄러워하며 의사표현을 제대로 못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런 증상이 심해지면 대인 공포증이 된다고 합니다.
가끔 제가 어떤 분을 만나서 “처음 뵙겠습니다. 이성희목사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분이 “지난번에 어디에서 인사드렸잖습니까?” 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죄송하기도 하고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사람과는 얼마든지 양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날 때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하면 절대 안 되지요. 하나님을 만나서 이렇게 되면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인간은 수치심을 아는 유일한 존재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부끄러워하는 것은 가장 큰 수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기뻐야 하고, 그 만남을 기다려야 합니다.
윌리엄스는 “보통 사람은 악행을 부끄러워하지만 뛰어난 분별력과 반성 능력이 있는 성도들은 악행을 저지르기 쉬운 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저지른 죄가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더 부끄러운 것은 인간이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죄는 악행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떠나 있는 죄와 복음을 떠나 있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이 다음에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뭐라 말할까 그 때에는 부끄러움 없어야지 우리 서로 사랑해 하나님이 가르쳐준 한 가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버리고 우리 서로 사랑해.” 하나님을 만날 때는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카네기는 “부자인 채 죽은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있습니다. 복음을 모른 채 죽는 것입니다. 복음을 모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겪어야 할 영원한 부끄러움입니다.
나라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발전, 안녕, 복음화, 통일을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 했다”라는 자긍심을 가지게 일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성장했습니다. 사회가 발전했습니다. 앞으로 통일이 될 것입니다. 이런 국가의 발전에 그냥 아무 한 일도 없이 혜택만 누린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국가의 발전과 통일을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 했다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룬트비목사님이 덴마크를 세계의 모범적인 낙농국으로 만들어 국민소득 최고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곁에서 기도로 돕고 그룬트비목사님의 사역에 동참한 달가스 대령을 잊을 수 없습니다. 달가스 대령은 “밖에서 잃은 국토 안에서 찾자”고 국민들에게 호소하며 광활한 늪지대인 버려진 유틀란트 반도를 개간하였습니다. 그는 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는데 세찬 북극의 바람과 추위에 나무가 견디지 못해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절망하지 않고 죽지 않는 새 품종을 개발하여 울창한 숲을 만들어 차가운 바람을 막았습니다. 이것이 덴마크의 농업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달가스 대령의 기도와 수고가 결실한 것입니다.
결론
프랜시스 사비에르는 가톨릭의 예수회(Jesuit) 공동창설자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의 개혁운동을 주도하던 인물입니다. 가톨릭이 선교사역으로 방향을 돌려 그는 인도, 중국, 일본까지 가서 선교하였습니다. 그리고 1552년 선교지인 중국, 마카오 인근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국왕에게 유서를 써 보냈습니다. “폐하, 어느 날인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날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 날을 위하여 더욱 양심적인 국왕이 되십시오. 사람과 하나님 앞에 겸손한 왕이 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결산의 날을 위해 준비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기 위해서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 나라가 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잘 준비하고, 이 나라에서도 잘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이중국적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나 이 나라에서나 부끄럽지 않은 위풍당당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남북의 통일과 북한의 복음화를 위하여 육적 생명을 살리는 양식과 영적 생명을 살리는 양식을 공급할 수 있는 생명의 공급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서론
오늘은 우리교회가 지키는 ‘북한선교주일’입니다. 분단된 한반도가 다시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평화로운 통일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전쟁의 위협을 멈추고, 대화로 한민족의 슬기를 세계에 보여주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북한 동포의 생명입니다. 이 땅에서의 생명이며 동시에 영원한 생명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일에는 우리 모두가 힘을 다해 앞장 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사이버’시대를 넘어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시대입니다.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덕이 될지 아니면 독이 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덕보다 독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미래학자 커츠웰(Raymond Kurzwell)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앞서는 특이점(singularity)을 돌파하게 되면 인공지능이 스스로 가속적 추론을 거듭하여 수퍼지능 상태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리학자 호킹(Steve Hocking)은 인간은 인공지능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생각하는 로봇의 개발을 위한 완전한 인공지능의 등장은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생명복제는 이 전 세기부터 열심히 연구되어 왔습니다. 2002년에는 복제한 아기가 첫 번째로 탄생하였다고 미국 유사 종교단체인 ‘라엘리언’ 산하 ‘클로네이드’사가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인간복제 이야기는 잠잠합니다. 아마 클로네이드사의 발표도 사실이 아닌 듯합니다. 인간복제는 실현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봅니다. 인공지능은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고, 지식도 엄청나게 보유할 수 있지만 현재 인류가 알지 못하는 문제로 후퇴하게 될 것이고, 인공지능이 파괴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생명이 없는 어떤 것도 무한하지 못하고, 가치가 없습니다.
인공지능은 생명이 없는 존재입니다. 더구나 우리시대를 ‘감성시대’라고 하는데 감성시대에 감성 없는 존재가 인간을 이긴다는 것은 절대 인류에게 희망을 주지 못합니다. 감동을 주지 못하는 존재는 희망도 주지 못합니다.
복제인간에게 영혼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만들지 않은 존재가 영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을 하나님이 만들지 않은 존재에 주실 것 같지 않습니다. 영혼이 없다면 구원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이 없는 흙에 숨을 불어넣으셔서 ‘생령’(living soul)으로 만드셨습니다. 영 혹은 혼으로 번역한 ‘네페시’는 성경에 750번 등장합니다. 이 단어가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생명의 힘을 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과 관련하여 쓰일 때는 우리의 ‘영혼’을 뜻합니다.
성경에는 “생명의 하나님”, “생명을 주신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생명” 등 하나님과 생명을 연관시켜 한 말이 많습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며, 내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 있음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그래서 생명을 빼앗지 못하게 하며, 고의가 아닌 우발적 살인에 보복을 당하지 않도록 도피성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고귀합니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두 번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생명은 함부로 버리지 말이야 할 것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목숨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리고 천하보다 귀한 것이 있으면 목숨을 버리라고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릴 수 있고,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하신 말씀은 생명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대답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목숨과 맞바꿀만한 것이 있는데 무엇인지 대답해 보라는 질문입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리고 바꿀 수 있습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을 버리고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지만 잃으면 얻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역설적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시므로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얻으셨습니다. 잃으면 얻는 비결은 성경적 진리입니다. 우리 모두가 잃어서 더 큰 것을 얻는 복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천하보다 귀한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합니다.
마가복음 8:36에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합니다. 구원하고자 하면 잃고 목숨을 잃으면 구원한다는 말은 역설의 극치입니다. 성경적 진리는 자기를 부인하는 자가 긍정을 얻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왜 소중합니까?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소중합니다. 살아 있는 생령이어야 사람이기에 소중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소명도 끝나기 때문에 살아 있는 생명이 소중합니다.
사람이 목숨을 잃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37절에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합니다. 38절에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합니다. 사람의 목숨이 가장 귀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가운데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란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큰일을 이루어놓아도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일본의 대학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학자가 하루는 강 건너편을 가기 위하여 나룻배를 타러 강가에 갔습니다. 나룻배를 탔는데 넓은 강이라 건너기 위하여 한참 걸렸습니다. 학자는 뱃사공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사공 양반, 플라톤을 아시오?” “모르죠, 저 같은 천인이 어떻게 플라톤을 알겠습니까?” 학자는 측은한 듯이 바라보더니 “플라톤은 헬라의 대철학자요. 플라톤을 모른다면 당신은 인생의 절반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소”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가다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프랑스라는 나라를 아시오?” “모르죠. 프랑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혀를 차면서 “프랑스는 유럽의 예술의 나라인데 프랑스를 모른다면 인생의 4분의 1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요”라고 했습니다. 얼마쯤 갔는데 갑자기 돌풍이 불어 풍랑에 배가 뒤집혔습니다. 강에 빠져 허우적대는 학자에게 사공이 물었습니다. “학자님, 수영할 줄 아시오?” “몰라요.” 그 때 사공이 말했습니다. “수영을 할 줄 모르면 인생을 다 잃은 겁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많은 지식이나 재물도 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것이 다 끝나는 것입니다. 죽으면 더 이상 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고속도로에 이런 주의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졸음운전, 모든 걸 다 잃습니다.’ 과속운전도 모든 걸 다 잃습니다. 빨리 가려다 진짜 빨리 저 나라로 갑니다. 빨리 가려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죽으면 빨리 가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살아 있어야 빨리 가는 것도 유효합니다.
톨스토이가 말했습니다.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살아라.” 살아 있어야 행복하고, 자신이 할 일도 하고, 인생의 보람도 있습니다. 신학자 하워드 터먼은 “세상에 필요한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래서 옛말에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는 반대되는 말을 합니다? 요한복음 12:24에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죽으라고 합니다.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이 말이야 말로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보세요.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 외에 길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9:22에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기본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죽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죽어서 우리를 구원하고, 죽어야 살고, 죽어야 열매를 맺게 만드셨습니다.
포로민이었던 느헤미야는 죽을 각오로 포로민으로 왕에게 나아가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에스더는 왕이 정한 법을 깨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자굴에 던져질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잃어서 얻은 포로기 신앙의 위인들입니다.
순교자 푸추아는 “죽고자 하는 자는 삽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잃으면 얻는다는 것이 성경적 역설이며 진리입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도 “죽고자 하면 살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충무공이 목숨을 바치고 죽으니 나라가 살고 자신이 살고 백성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광화문 길목을 버티고 지키고 서 있습니다.
서위렴(William Show 2세)선교사는 아버지가 한국선교사였습니다. 그는 평양에서 출생하여 16세까지 한국에서 자랐습니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던 중 미국 해군사관학교 전신인 해안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여 한때는 한국에서 근무하였습니다. 그가 하버드대학교의 박사 과정 졸업을 6개월 남겨두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미 해병사단 수색대에 입대하여 한국전에 참전하였습니다. 1950년 9월 22일, 서울 탈환작전을 수행하던 중 서울 은평구 녹번리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그는 평상시에 한국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1992년 6월 24일, 은평구 응암1동 녹번 제2놀이터에 그를 위하여 작은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런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고귀한 목숨을 버리신 죽음입니다. 서위렴선교사의 죽음은 죽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스스로 죽으므로 한국을 살리는 작은 불꽃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자기를 구원하는 생명보다 남을 구원하는 고귀한 죽음이 더 아름답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버리므로 더 많은 것을 구원하는 우리의 생명이기를 바랍니다.
둘째,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마가복음 8:38에는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합니다. 죄의 세대는 복음을 부정합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란 생명과 물질을 혼동하는 시대를 말합니다. “음란과 죄”란 예수님의 복음을 부인하고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는 복음을 부끄러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부끄러운 일을 당할 것입니다.
각종 비리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보면 한 결 같이 부끄러운 일을 당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부모와 조상에게 가장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가는 일이 지체가 높은 사람일수록 부끄러운 일입니다. 요즘에도 법조계 비리를 보세요. 아무리 전관예우라고 하지만 어떻게 변호사 수임료가 일 년에 100억 원이나 됩니까? 이런 일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구속이 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입니다. 가문의 굴욕입니다.
남의 돈을 사기 쳐서 자신의 배를 불리고 서민들을 피눈물 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금을 외국으로 빼돌리고 사는 사람들이 과연 그 돈으로 행복할까요? 늘 남의 눈치를 봐야 하고, 고향에 갈 수도 없고, 친구도 다 떨어지고, 경찰만 봐도 겁이 나고, 낯선 사람이 찾아오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할 것입니다. 이게 재미있는 일입니까? 자기 얼굴을 맘대로 드러내고 살지도 못하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마태복음 7:22에는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합니다. 7:23에는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지만 하나님은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하나님 앞에 섰는데 “네 이름이 없다, 저리 가라”고 하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초청장이 없어 쫓겨나는 잔치보다 더 부끄러운 일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쫓겨나는 것은 치명적 부끄러움입니다. 이 부끄러움은 멸망이며 영원한 벌입니다.
‘퍼블릭 차일드’(public child)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낯을 가리는 것처럼 처음 보는 낯선 대상을 경계하고 부끄러워하며 의사표현을 제대로 못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런 증상이 심해지면 대인 공포증이 된다고 합니다.
가끔 제가 어떤 분을 만나서 “처음 뵙겠습니다. 이성희목사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분이 “지난번에 어디에서 인사드렸잖습니까?” 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죄송하기도 하고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사람과는 얼마든지 양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날 때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하면 절대 안 되지요. 하나님을 만나서 이렇게 되면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인간은 수치심을 아는 유일한 존재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부끄러워하는 것은 가장 큰 수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기뻐야 하고, 그 만남을 기다려야 합니다.
윌리엄스는 “보통 사람은 악행을 부끄러워하지만 뛰어난 분별력과 반성 능력이 있는 성도들은 악행을 저지르기 쉬운 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저지른 죄가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더 부끄러운 것은 인간이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죄는 악행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떠나 있는 죄와 복음을 떠나 있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이 다음에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뭐라 말할까 그 때에는 부끄러움 없어야지 우리 서로 사랑해 하나님이 가르쳐준 한 가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버리고 우리 서로 사랑해.” 하나님을 만날 때는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카네기는 “부자인 채 죽은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있습니다. 복음을 모른 채 죽는 것입니다. 복음을 모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겪어야 할 영원한 부끄러움입니다.
나라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의 발전, 안녕, 복음화, 통일을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 했다”라는 자긍심을 가지게 일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성장했습니다. 사회가 발전했습니다. 앞으로 통일이 될 것입니다. 이런 국가의 발전에 그냥 아무 한 일도 없이 혜택만 누린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국가의 발전과 통일을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 했다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룬트비목사님이 덴마크를 세계의 모범적인 낙농국으로 만들어 국민소득 최고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곁에서 기도로 돕고 그룬트비목사님의 사역에 동참한 달가스 대령을 잊을 수 없습니다. 달가스 대령은 “밖에서 잃은 국토 안에서 찾자”고 국민들에게 호소하며 광활한 늪지대인 버려진 유틀란트 반도를 개간하였습니다. 그는 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는데 세찬 북극의 바람과 추위에 나무가 견디지 못해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절망하지 않고 죽지 않는 새 품종을 개발하여 울창한 숲을 만들어 차가운 바람을 막았습니다. 이것이 덴마크의 농업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달가스 대령의 기도와 수고가 결실한 것입니다.
결 론
프랜시스 사비에르는 가톨릭의 예수회(Jesuit) 공동창설자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의 개혁운동을 주도하던 인물입니다. 가톨릭이 선교사역으로 방향을 돌려 그는 인도, 중국, 일본까지 가서 선교하였습니다. 그리고 1552년 선교지인 중국, 마카오 인근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국왕에게 유서를 써 보냈습니다. “폐하, 어느 날인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날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 날을 위하여 더욱 양심적인 국왕이 되십시오. 사람과 하나님 앞에 겸손한 왕이 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결산의 날을 위해 준비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기 위해서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 나라가 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잘 준비하고, 이 나라에서도 잘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이중국적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나 이 나라에서나 부끄럽지 않은 위풍당당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남북의 통일과 북한의 복음화를 위하여 육적 생명을 살리는 양식과 영적 생명을 살리는 양식을 공급할 수 있는 생명의 공급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싸워서는 안될 일
삿 12장 1절 / 양인국목사(서신교회)
1. 어떤 사람도 세상에 사는 동안 싸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삶 자체가 싸움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싸움은 우리를 세워주지만, 어떤 싸움은 우리를 넘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를 세우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싸움이 어떤 싸움인지 알아야 하고, 그런 싸움을 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은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도 싸워서는 안되는 싸움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다.
2. 1-7절의 내용이다. 길르앗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에브라임은 길르앗이 암몬과 싸울 때 자신들을 불러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길르앗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그러나 에브라임의 이와 같은 행위는 정당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길르앗이 입다에게 암몬의 손으로부터 구원해주기를 청하기 전, 먼저 에브라임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들은 길르앗을 외면했었기 때문이다(12:2). 만일 에브라임이 다른 지파의 고통에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길르앗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싸움을 걸기보다는 그들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면 에브라임은 어째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길르앗과 싸우고자 했을까? 모든 정황들을 고려할 때 우리가 이 물음에 대하여 얻을 수 있는 대답은 형제의 승리에 대한 시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에브라임은 형제 지파들에게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기 원했다. 그래서 에브라임은 자신보다 더 우월하게 보이는 지파에 대하여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에브라임은 길르앗의 승리만을 시기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드온과 그의 용사들이 승리했을 때에도 시기했다(삿8:2). 언급한 것처럼 그들은 다른 지파들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보다 우월하게 보이는 지파에 대해서는 시기하여 그들을 넘어뜨리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에브라임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길르앗의 손에 붙임으로 사만 이천 명이 죽임을 당하도록 허용하신 것이다(12:6).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신 말씀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허락해 주신 권리를 침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라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 원칙을 지킨 사람들은 형통했고 이 원칙으로부터 떠난 사람들은 넘어졌다는 것이다.
가인은 동생 아벨의 의로움을 시기하여 그를 살해했고 이로 인하여 그는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왕위가 후손들에게 계승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시기하여 자신이 받은 모든 축복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후손들 모두로 하여금 넘어지게 했다.
에돔은 야곱의 형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에 대한 시기로 야곱이 넘어졌을 때 오히려 기뻐했으며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겨주었다. 물론 이로 인해 에돔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넘어졌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 중에는 이들과 달리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그들은 형통했다. 실례로서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가족처럼 돌보아주었지만 그가 성장하여 스스로 독립하고자 했을 때 그를 인정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독립하여 형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그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마다 도움을 주었다. 아브라함은 이처럼 롯을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태도로 인하여 때로는 손해 보는 듯 하였지만 그러나 결과를 보면 아브라함은 롯으로 인하여 손해 본 것이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가지신 계획과 축복들이 조카 롯으로 인하여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동일한 예를 멜기세덱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과 싸워 승리하고 돌아올 때 그를 영접하고 축복해 주었다. 이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그에게 전리품들 가운데 자신이 얻은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만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시기하여 그를 해하고자 했다면 그 자신이 넘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요나단에게서도 그리고 바나바에게서도 동일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요나단은 자신에게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부르심을 인정하고 그를 지켜 주었고, 바나바는 당시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바울의 부르심을 인정하고 그를 인디옥교회의 교사로 추천하였고, 후에 바울의 영향력이 자신보다 커졌을 때에도 변함없이 그의 부르심을 인정하고 그와 함께 했다. 이로 인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바나바는 바울을 있게 한 자로 인정 받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시기와 질투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가?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교훈들을 살필 때 얻을 수 있는 대답들 가운데 하나는 나의 성공과 실패는 이웃의 성공과 실패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즉 이웃이 성공한다고 하여 내가 실패하는 것이 아니고 이웃이 실패한다고 하여 내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이웃의 성공과 실패에 대하여 시기하거나 우월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이웃이 어떠함과 무관하게 스스로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우는 일에 힘쓸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나의 성공과 실패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기와 질투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길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 때 함께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 때 우리에게 이웃은 시기나 질투의 대상이 아니고 섬겨야 할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나의 섬김으로 인하여 이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 때 이웃뿐만 아니라 나도 복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바나바의 섬김이 없었다면 바울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우리는 복음에 대하여 무지한 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웃은 결코 싸움의 대상이 아니고 섬김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특별히 이웃의 형통함에 대한 시기로 인한 싸움은 믿음의 사람들이 결코 해서는 안될 싸움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싸움을 한다면 우리도 에브라임처럼 넘어질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주신 말씀에 따라 우리의 이웃들이 부르심에 따라 살 수 있도록 섬김의 삶을 살게 해 주시고, 또한 그들이 부르심에 따라 삶으로 형통하게 되었을 때 그들과 함께 기뻐하게 해 주옵소서. 어떤 경우도 이웃의 성공에 대하여 시기하지 않게 해 주옵소서. 아멘!
쉽볼렛 십볼렛
삿 12장 1~ 7절 / 류영모목사
I. 질투.교만
유대인의 민담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절친했던 두 친구가 서로 마주 보고 똑같이 보석가게를 냈습니다. 어느덧 두 친구는 서로의 시기심 때문에 철천지 원수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내가 그대들에게 큰 복을 주기를 원한다. 누구든지 먼저 큰 소원을 말하라. 그 소원이 무엇이든지 응답될 것이다. 단, 한 사람이 소원을 말하면 상대 친구는 그 두 배를 받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은 상대가 먼저 소원을 말해 주기를 기다리며 눈치를 하기도 하고, 먼저 말하라 서로 다그치다가 멱살을 잡고 싸움까지 합니다. 드디어 한 친구가 “좋다. 내가 먼저 말을 하마. 천사님 내 한쪽 눈을 멀게 해 주십시오.”
어떻게 되었겠어요?
질투는 너를 아프게 하고 결국 나를 파괴하게 만듭니다. 질투는 내가 가진 장점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질투하는 그 대상에게 모든 에너지를 빼앗깁니다. 질투는 미움과 증오의 강물에 나를 빠뜨립니다. 그 미움의 강물에 나의 모든 행복을 흘려보냅니다.
독일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육상을 하던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청년이 되어 한 친구는 세계 육상 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따고 다른 친구는 메달권에도 들지를 못했습니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 온 친구는 언론의 온갖 관심과 주목을 받고 시민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고향 마을엔 이 친구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온 국민이 기뻐 좋아하는데 함께 운동을 해 온 친구는 시기심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깊은 밤 마을에 세워진 동상을 무너뜨리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 땅을 파는데 그만 동상이 무너져 친구는 그 동상에 깔려 죽었습니다.
내 마음에서 시기와 질투가 불타오를 때 그것을 억제하고 다스리는 능력을 잃어버리면 그 질투의 불길에 내가 불타고 맙니다. 백설공주 얘기도 시기심을 이기지 못해 몰락해 가는 계모 이야기 아닙니까? 성경에 사울 왕도 다윗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이기지 못해 몰락합니다. 사무엘 상 18:10에 보면 질투의 악신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겐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각자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면 모두가 행복합니다. 질투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비교하게 만듭니다. 비교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은 우리를 모두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축복하십시요. 칭찬하십시요. 하나님은 질투하는 자를 버리시고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늘 시기, 질투를 감추지 못하고 드러냈던 교만한 지파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나옵니다. 요셉에게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수한이 얼마 남지 못함을 알고 두 아들을 데리고 병문안을 갔다가 두 아들로 하여금 할아버지의 축복을 받게 합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오른손 밑에는 장자 므낫세를 밀어넣고 아버지의 왼손 밑에는 둘째놈 에브라임을 앉혔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 야곱이 두 손을 X형으로 어긋맞게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그러지 마세요. 얘가 장남이예요”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야곱이 “아들아, 나도 안다. 므낫세도 자기 복을 받겠지만 둘째가 장자의 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는 축복을 합니다.
막강한 입애굽의 영웅 요셉 가문의 장자의 복을 에브라임이 받습니다. 이때부터 에브라임은 자신들은 최고의 지파라는 자부심 긍지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가나안 입성의 영웅 여호수아도 자신들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들 보다 잘난 꼴은 못봐 주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들이 주관하고 자기들의 허락 하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긍지나 자존감의 차원을 뛰어 넘어 대단히 교만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성당 마리아상 앞에 매일 새벽 정성스런 기도를 드리고 하루를 시작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절대로 거르는 법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참으로 신실한 성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인즉 조각가가 바로 그 여인을 모델로 마리아 상을 조각해 거기 세워둔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바로 자기 자신을 숭배했던 거지요.
이것을 두고 심리학에서는 자기 숭배 - ego worship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존감이나 긍지가 아니라 질병수준입니다. 모든 죄의 근원이 교만이라고 합니다. 교만한 사람도 교만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질투와 교만 이것이 가져온 사사시대의 아픔을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II. 시비
지금까지 한 사사의 이야기는 전쟁과 그 승리에 관한 이야기가 마쳐지면 한 시대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입다의 이야기는 상당히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경우 전쟁이야기가 얼마나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반면 입다가 암몬을 무찌른 얘기는 이렇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암몬을 입다의 손에 넘겨 주시매 암몬이 성을 넘겨주고 항복했다” 끝! 11:32, 33절 단 두 절을 기록하고 끝냅니다.
그 대신 전쟁 이후의 두 이야기 - 딸에게 행한 서원 사건, 에브라임과의 내전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동족 에브라임 지파와의 싸움이야기는 이 싸움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이 싸움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신이 나서 기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사사기 기자는 에브라임과의 내전을 신나는 싸움을 전하듯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까요? 이 사건을 통하여 하고 싶은 메시지가 많다는 겁니다. 사사시대가 어떻게 무너져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사건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우상과의 싸움, 영적인 싸움은 포기하고 이방 적과의 싸움을 강 건너 불 보듯 구경하고 집안 싸움은 신이 나서 하고 있었다고 보고하는 겁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오늘 너의 모습이 아니냐 이거지요.
교만한 에브라임 지파가 사사에게 시비를 걸고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사사기 8장에서 기드온이 미디안 연합군 12만을 항아리와 횃불 그리고 나팔과 함성으로 무찌른 후에 에브라임은 기드온과 므낫세 지파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때 기드온 자신의 자존심을 죽이고 에브라임의 자존심을 세워주었습니다. 당신들의 끝물 포도가 우리의 맏물 포도보다 나은데 뭘 그러십니까? 정작 적장의 목을 가져온 것은 당신들 아닙니까? 겨우 달래주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입다는 에브라임과의 논쟁에서 먼저 시비곡절을 가려냅니다. 그리고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습니다. 결국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에브라임 지파는 입다의 기를 꺾기 위해 입다 목전에 대대적인 군사를 집결시킵니다. 그리고 전쟁의 명분을 쌓습니다. “너는 왜 암몬을 치러 갈 때에 우리를 불러 함께 하지 않았느냐?” 우리에게 무슨 유감이 있는 것 아니냐. 왜 우리를 소외시키느냐 이겁니다.
그리고 위협합니다. 입다! 너와 네 집을 불사르고 길르앗 땅을 우리가 다스려야겠다고 말합니다. 에브라임은 다른 지파가 주도권을 잡고 다른 지파에서 사사가 나와 영웅이 되는 꼴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입다의 응답이 2절 3절입니다.
입다는 기드온처럼 좋은 말로 그들을 달래지 않습니다. 이건 적반하장이라는 거지요. 내가 암몬과의 싸움이 위급하여 도와 달라. 함께 싸우자고 할 때는 구경만 한 놈들이 무슨 귀신 씬나락 까먹는 소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이거지요. 우리가 암몬과 싸운 것이 동리아이들 패쌈 한 줄 아느냐?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싸웠다! 아마 울먹이며 울분을 토했을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에브라임 지파가 입다의 불난집에 부채질을 한 격이라고 합니다.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이 말 속엔 목숨을 번제로 드리겠다는 서원으로 외동딸을 바쳐야 했던 단장의 고통,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과 울분이 담긴 소리였습니다.
입다와 길르앗이 암몬과 목숨건 싸움을 할 때는 웅크리고 구경만 하고 있다가 뒤늦게 나타나 불평하고 비난하고 이제 와서 헤게보니를 자신들이 차지하겠다고 덤비는 에브라임의 태도는 언제 어디서든지 볼 수 있는 태도입니다.
교회에서도 교회가 주어진 과제를 이루기 위해 시간 바쳐 돈 바쳐 온몸을 던져 일을 해 냅니다. 일을 하다보면 실수도 있고 좀 소외되는 사람도 있지요. 그때사 고개를 내밀고 이것은 좋은데 이것은 잘못되었다는 등, 자신은 소외되었다는 등... 전과를 가로채려는 현대판 에브라임들이 있습니다.
불난집에 부채질을 하던 에브라임이 이제는 기름통을 들이붓는 말을 4절에서 합니다.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에서 죄짓고 버림받아 도망간 사람들이었다는 상처를 건드리는 말을 했습니다. 입다는 버림받고 도망가 살던 쓰라린 상처를 기억하며 “한판 붙어 보자” 내전을 결단합니다. 상처는 소금을 뿌려서도 안되지만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참 잔인한 말이 남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입니다.
III. 쉽볼렛;십볼렛
에브라임의 교만과 입다의 상처가 충돌합니다. 에브라임의 질투와 입다의 위기감이 부딪힙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동족상잔 내전으로 이어집니다. 길르앗은 므낫세, 갓, 르우벤 지파가 살던 땅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두 아들 지파인데 기드온 때 1번, 지금 입다 때 1번 이어 두 번씩이나 형제 지파가 부딪히지요.
이때 입다는 고민을 합니다. 이 에브라임 사람들을 형제로 생각하고 길르앗 땅에서 쫓아내는 것으로 끝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원수로 생각하고 끝까지 따라가 진멸해야 하는 건지? 전쟁은 입다의 일방적인 승리였습니다. 입다는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에브라임은 원칙적으로 형제이다. 그러나 요단강을 건너온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경계를 넘어온 자들이니 그리고 형제를 지배하겠다고 과욕을 부린 자들이니 원수다. 그래서 경계를 넘어온 에브라임 군대를 진멸하기로 합니다. 입다는 요단 나루터를 장악하고 숨어서 도망가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이잡듯 하나씩 잡아죽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암몬과 싸울 때는 생긴 것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복장도 다르니 아군과 적군을 쉽게 구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 사람들은 생긴 것도 꼭 같고 언어도 꼭 같습니다. 복장만 조금 위장하면 요단강을 오고가는 다른 지파 백성들과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때 참모 병사 중 한 사람이 기가 막힌 구분법을 찾아냅니다. 같은 민족이지만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가까운 이방인들과 섞여 살고 동족끼리 교류가 부족하다 보니 사투리가 생긴 것입니다.
전 대통령 가운데 김대중 대통령은 호남 방언이 워낙 강해 누가 들어도 호남 출신임을 알 수 있지요. “국민 여러분, 행동하는 양심, 이건 나으 인생철학입니다. 이번에 확실하게 거시기 해 버립시다.”
또 김영삼 대통령은 영남 방언이 워낙 강해 누가 보아도 영남 출신임을 알 수 있지요. “국민 여러분, 나의 목표는 배나와 개혁 그리고 갱제를 확실히 살리는 것입니다.”
경북의 어떤 지방 사람들은 쌀, 싸움 - 이런 경음이 잘 안됩니다. 만약 에브라임 사람들이 이런 경음이 안되면 “쌀” 해봐. “싸움” 해봐. 그들은 “살” “사움” 그럽니다. 그러면 죽여버리는 겁니다.
일제치하 1923년 9월 1일 일본서 간토(관동) 대지진이 있었습니다. 국가적인 대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군은 조선인의 폭동이 일어났다고 선전하고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조선인이 잡히면 바로 살해했습니다. 이때 조선인을 어떻게 구별했는고 하니 한국 사람은 “어두유성음”이라 하여 첫발음에 콧소리가 나는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발음시켜보고 이 발음이 안되는 사람은 모조리 죽이는데 7000여명이 이때 잡혀서 죽었습니다. (dokata → Nogada / 가기구끼고 → 가기구끼고)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쉬(sh)” 발음이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침 요단강 나루터에서 작은 시냇물이란 말 “쉬보볼렛”을 에브라임 사람들은 “시브볼렛”이라고 발음하는 것을 이용해 에브라임 사람을 골라내 죽였습니다.
“쉽볼렛” 해 보라! 에브라임 사람은 멋 모르고 “십볼렛” 이라고 합니다. 이놈을 죽여라! 그래서 잡혀 죽은 에브라임 사람이 자그만치 4만 2천명이었습니다. 얼마전 기드온이 미디안 연합군과 싸우기 위해 각 지파를 통해 모집한 군인이 3만 2천이었으니 과히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감이 잡히실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야! 입다 잘 싸운다. 멋지다”라고 감상하시면 안됩니다. 본문에 생략된 말이 있습니다. 괄호 열고 (놀고 있네!) 괄호 닫고! 이 싸움은 입다가 에브라임을 무찌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신 사건입니다. 이 싸움 과정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한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가슴을 치며 보고 계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읽을 때는 하나님의 가슴앓이를 가지고 가슴을 치며 읽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12지파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 한가족 한배를 탄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 위기에 부딪히면 함께 가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멋진 승리를 이룬 지파가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지파의 약점을 감싸 주어야 할 부분이지 그것이 다른 지파를 구분하고 죽이는데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누구의 약점도 악한 목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서로의 다른점은 축복받아야 할 부분이지 비난받아야 할 부분이 아닙니다.
얼마전 (2007년) 영국 현대 미술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테이트 모던 미술관 바닥에 번개가 지나간 모양의 거대한 금이 갔습니다. 무려 167cm 1층 바닥 전체를 거의 갈라놓았습니다. 2000년도 2000억원이 넘는 돈을 들여 옛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탈바꿈해 놓은 미술관이 부실공사란 말인가? 지진이라도 일어났나? 자세히 살펴보면 누군가 섬세하고 정교하게 바닥에 흠집을 내고 틈새로 철제 그물망을 박아 놓았음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설치 미술가요 조각가인 콜롬비아 출신 도리스 살세도의 의도된 작품인 게지요. 1년 이상 공을 들여 만들었고 설치하는 데만 5주가 걸린 이 작품의 이름이 바로 “쉽볼렛(shibboleth)”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서로의 차이점을 가지고 상대를 죽였던 사건을 작품화 한 것이지요. 서로 다른점을 가지고 하나님이 만든 이 아름다운 세계를 깨뜨리는 인간!
최 선진 문명사회를 산다고 하면서도 아직 피부색깔, 인종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세계를 고발하는 작품입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서로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수와 진보가 공존하는 것은 이 사회가 균형을 잡아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쉽볼렛” 서로를 죽이려고 극한 대답을 합니다. 지역간의 차이는 서로 존중되어야지 서로 원수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사회의 이런 모습을 보며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놀고 있네” “그 싸움은 곧 나의 심판이야” 상대의 약점을 감싸주기 보다는 그것을 꼬집어 죽이는 인간의 비열함을 고발합니다.
IV. 요단강 건너갈 때
오늘 본문 마지막 7절입니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지 6년 만에 죽어 길르앗 성읍에 장사됩니다. 통치 기간이 6년밖에 되지 않은 것을 보면 요절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사사들에게 따라붙던 말씀 - 사사가 있는 동안 나라가 평온하였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입다 시대엔 고통의 기간이 18년이었는데 사사가 섬긴 기간은 6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고난의 기간보다 통치기간이 짧게 섬긴 사사로 기록됩니다. 지금까지 옷니엘, 드보라, 기드온은 40년을 섬겼고 에훗은 80년을 섬겼는데 입다는 한 자리수 6년을 섬기고 죽어갔습니다.
입다가 에브라임 사람들을 요단강 나루터에서 심판했듯이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 앞 요단강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에브라임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 주변 모든 사람들이 요단강을 건너기전 발음을 잘 해야 살 수 있었습니다. 쉽볼렛. 같은 발음 같지만 십볼렛하면 죽습니다.
우리가 요단강에 설 때 입술의 고백, 발음을 잘해야 합니다. 신앙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너는 예수를 믿느냐? 예. 예수를 나의 그리스도요 주님으로 믿습니다.
네게 하나님은 누구냐? 그분은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평생 나를 인도하셨고 나를 지키신 나의 왕이십니다.
그대는 성령을 믿느냐? 예. 언제나 나와 그분은 동행하셨습니다. 일마다 때마다 임재하셨습니다. 그분은 나의 보혜사이십니다.
너는 누구냐? 하나님의 아들 류영모입니다.
요단강 잘 건너야 합니다. 쉽볼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