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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18 - 카이사르 그리스로 건너가서 폼페이우스군과 전쟁에서 승리하다!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한 카이사르는 로마 집정관을 원했으나 원로원이 거부하자 기원전 49년 1월 13군단을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남하해 리미니에서 33세 안토니우스에게 5개 대대로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아레초를 공격케하고 원로원의원 쿠리오에게 3개 대대를 주어 아드리아해를 따라 안코나를 공략시킵니다.
원로원 의원 다수와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동남부 브린디시에서 배를 타고 그리스로 떠나니 카이사르는
밀 생산지 사르데냐와 시칠리아로 군대를 보내 로마에 식량 공급선을 확보하고 로마 국고의
금괴와 은화를 차지한 후에는 마르세유와 스페인으로 원정해 폼페이우스 휘하 군단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쿠리오에게 준 4개 군단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쉽게 손에 넣었지만 북아프리카에서 속주 총독과
연합한 누미디아왕의 코끼리 부대 및 기병대에 궤멸당해 몰살당했으며 아드리아해
재해권 장악에도 실패한지라 폼페이우스군의 요충지인 디라키움 보급기지를 빼앗으려 한 것입니다.
카이사르는 패배는 잊어버리고 새로운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했으니 폼페이우스와 대결하기 위해
직접 아드리아해를 건너 그리스로 건너가 디라키움(알바니아) 에서 폼페이우스를
숫적 열세 상황에서 무리하게 포위를 하다가 맹렬한 반격을 받아 패배하니 디라키움 공방전 입니다.
디라키움 공방전은 기원전 48년 4월 에서 7월 까지 디라키움(알바니아 두러스) 에서 벌어진 전투로 보급기지에
폼페이우스 군대가 주둔했는데 폼페이우스군 공세에 허점을 찔린 카이사르는 포위를 풀고 퇴각했지만,
함정으로 의심한 폼페이우스가 추격하지 않은 탓에 보병 1천명, 기병 200명 정도 경미한 손실만 입고 퇴각합니다.
이후 폼페이우스는 급히 본군을 디라키움 기지에 집결시켰는데, 카이사르군이 포위한 가운데 압수스 강에서
폼페이우스는 강 북쪽에, 카이사르의 병력은 강 남쪽에 진을 치고 대치하였으니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질도 훨씬 떨어지고 사기와 충성도는 낮았지만 수적으로 월등했으니.... 카이사르는 병력 증원이 절실했습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병력이 카이사르 본대에 합류하기로 했지만, 내전 초기에 제해권 장악에 실패해 폼페이우스
의 해군 때문에 쉽게 움직이기가 힘든 상황이었는데, 안토니우스는 크나큰 도박을 감행하니 남풍 때문에
예상보다 북쪽에 상륙하면 강 북쪽에 진을 친 폼페이우스 군대와 폼페이우스 해군력에 포위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3월 26일 제2진 보병 1만과 기병 800기가 브린디시항에서 출항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폼페이우스 해군
에 발각되어 추격을 받았지만.... 당시 로마의 돛은 원시적이어서 바람의 방향에 따라 흘러갔기 때문에 손
놓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고 이제 상륙하려면 남서풍이 필요했지만 야속하게도 바람은 계속 남풍이었습니다.
사령관 안토니우스는 절박한지라 피해를 감소하고 상륙을 강행하는데, 이때 기적이 일어났으니 갑자기 바람이
남서풍으로 바뀌었던 것이라..... 안토니우스 함대는 피해가 전무한채 상륙한데 반하여, 안토니우스를
추격하던 폼페이우스 함선들 대다수가 바람을 거스르지 못하고 밀려가 근처 해안 절벽에 부딪쳐 침몰합니다.
너무나도 운좋게 안토니우스 휘하 2진 병력은 3월 27일에 무사히 상륙했고, 상륙 소식을 전해
들은 카이사르는 급히 진영지를 걷고 안토니우스와 합류하기 위해 북진했으며....
이러한 낌새를 눈치 챈 폼페이우스도 2진의 합류를 저지해 궤멸시키기 위해 급히 진군합니다.
카이사르는 병력 증원 없이는 전쟁이 극히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필사적으로 북진했고,
성공적으로 2진 병력과 합류했으며.... 소식을 전해들은 폼페이우스는 역공을 방지하기
위해 재빨리 보급기지로 귀환해 방어진을 펼치니 본격적인 포위 공방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포위를 당했다고는 하나 디라키움은 해안가에 인접한데다가 폼페이우스가 제해권을 틀어쥔 상황이라,
카이사르군과 달리 꾸준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으며 또한 정면을 따라 언덕 두 곳이 나란히 있었기
때문에 방어 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이었으니 전면전을 벌여 조기에 담판을 내기
보다 교착된 전선에서 장기간 소모전을 하여 카이사르의 병력을 약화시키고 힘을 빼는데 집중합니다.
그러나 소모전중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같은 고관, 백부장을 상당히 잃었으며, 카이사르 역시 소모전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했으니.... 갈리아 정벌중 기술한 병법을 도입해 폼페이우스의 방어진
코앞에 포위진지를 구축함으로써 폼페이우스를 육지에서 완전히 고립시키고 바닷가로 밀어 부칩니다.
더군다나 석달간 전선이 교착되어 보급품이 고갈되긴 했지만 머지않아 수확철이었으니 폼페이우스는 디라키움
기지에 병력을 집결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청야전술 같은 것도 구사할 시간이 없어서 농작지 등도
남아있던 상황이라.... 수확철이 되면 오히려 카이사르군이 쉽게 주변에서 식량을 장만할수 있을 게 뻔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시간을 더 끌며 버텨봤자 해안요새의 이점을 살리기 어렵다고 판단해, 포위진의 약점을
탐색하고는 우세한 병력으로 포위진 남쪽에서 카이사르 제9군단을 쳐서 포위를 푸는데 성공합니다.
포위가 깨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 휘하 증원병력을 보내 구멍을 메우려 시도했으니
수적 열세로 밀리는 상황이었고, 병력을 차출해 증원을 보낸 사이 폼페이우스가 기존 돌파구의
우측에 새로운 돌파구를 형성해서 측면공격을 감행하자 카이사르의 군대는 우측 날개 지점부터 붕괴합니다.
자신의 병력이 혼란 속에서 무너지는걸 보고 카이사르는 전열을 정비시켜 다시 맞서려고 시도하지만
부질없는짓임을 깨닫고 병력을 통솔해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는데 집중했는데 이게 폼페이우스를
기지 밖으로 유인해내기 위해 퇴각하는 듯한 기만술로 보여서..... 적의 추격을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카이사르의 군대는 목표였던 디라키움 기지 점령에 실패했으니 이 과정에서 소모전으로 인한 손실
외에도 퇴각 과정에서 보병 1000명과 기병 200명 정도 손실을 입었으므로 폼페이우스의
입장에서 본다면 명백한 승리였지만, 만일 폼페이우스가 추격을 강행했다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혀 이후 파르살루스 전투 자체가 없었을 것이니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카이사르는 ‘내전기’ 에서... “폼페이우스는 (내가 에스파니아로 가서 전투를 한데 비해) 전투할 필요도 없고 적의
방해에 시달리지도 않은채 꼬박 1년을 전투 준비에 몰두할수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마르세유나 에스파냐를
지원하는데 소극적이었지만 그리스에서는 클리엔테스들을 대거 동원해 카이사르를 맞아 싸울 준비는 했습니다.
카이사르군은 육상 전력에서 폼페이우스의 30% 였고 상급 지휘관의 수자는 4분지 1이었으며
해상전력은 5분지 1이고 자금도 5분지 1이었지만 중하급 지휘관의 숫자는
오히려 5배 많았으며 병사들의 전투 숙련도 역시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에 비해 4배나 높았습니다.
폼페이우스는 군량 보급과 숫적 우위에 큰 해군을 보유했기 때문에 회전 보다는 지구전을 펼치는게 유리했으니,
폼페이우스는 시종일관 지키는 전법으로 나갔는데 원로원 의원들은 장기간의 군대 생활에 싫증을
느꼈고 폼페이우스에게 조속히 결판을 내달라고 압력을 가하자..... 결국 파르살루스에서 회전을 벌이기로 합니다.
파르살루스 전투에서는 폼페이우스는 너무 뻔한 전술을 썼는데, 즉 카이사르군과 자기 보병이 붙으면
기병으로 카이사르군의 우익을 공격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기병의 예상 이동로에 장창병을 포진시켜 기병을 격파하고 거꾸로 폼페이우스 보병의 좌익을 공격합니다.
라비에누스가 지휘하는 카이사르군 기병 1천기는 폼페이우스 기병 7천기를 보고는 겁에 질린 듯 옆으로
피하니 적 기병이 기세가 올라 돌진해오자 숨겨둔 별동대 2천명이 튀어나오고 옆으로 피했던
기병 1천기와 보병 400명이 적 기병 배후로 돌아갔으니... 인간 울타리 속에 적 기병을 몰아넣은 것입니다.
후방에서 지원을 맡은 궁병을 격퇴한후 카이사르군 고참병들은 장창을 들고 기병을 막아선후 앞뒤에서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오니 당황한 폼페이우스의 기병을 틈새로 달아나기 시작
하는데, 폼페이우스가 진영으로 돌아가버리자 저 3천 400명은 적진 좌익으로 이동해 공격을 시작합니다.
로마군이 장창을 썼다고 하니 이상한데.... 플루타르코스는 비교열전 카이사르전에서 원래 로마군이
돌격 직전에 날려댔던 필룸(단창) 을 이날 전투에서만큼은 날리지 말고 집어서 폼페이우스
기병대의 얼굴에 겨냥하도록 병사들에게 명령했다는데, 단창인지 장창인지 어쨌든 승리를 거둡니다.
폼페이우스군 기병대가 좁은 지역에 너무 많은 병력이 투입되면서 교통체증이 일어난 상황에서 카이사르의
창병들이 필룸(단창) 을 꼬나들고 기병 돌격을 저지하자 서로 엉켜있던 뒤쪽 기병들 사이에서
앞열이 패한 것인가 하는 공포가 발생했고..... 공포가 전 기병대로 전염되며 스스로 와해되었다고 추정됩니다.
또한 파르살루스 전투 이전 디라키움에서의 포위 상황에서 폼페이우스가 바다를 통해 식량은 공급
받아 군량은 충분했지만, 다만 말들이 먹을 건초를 보급받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말들이 잘 먹지 못해서 비실비실 했던 것이 기병대가 힘을 못쓰고 패퇴한 것으로도 봅니다.
폼페이우스는 패전 후에 이집트로 달아났지만.... 카이사르에게 붙기로 결심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에 살해당했고 이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이집트에 들어 갔는데, 폼페이우스의 목을 건네받은 카이사르는 눈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2천년 뒤 영국의 한 연구자는.... “ 다라키움에서 패배한 카이사르는 맨 나중에 전장터를 떠난 전사였던데
비해 폼페이우스는 파르살로스에서 패한후 가장 먼저 전장터를 떠난 전사였다” 고 적으면서
재눙있는 사람과 천재를 구별해주는건 지성과 정열의 합일인데 폼페이우스는 그게 모자랐다고 평했습니다.
카이사르 저서 내전기에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았다' 라고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으니
이때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 인지, 아니면 한때 자신의 동료였던 자의 죽음을 보고 슬퍼한 눈물인지는
해석이 분분한데,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로마의 영웅' 으로 추대하고 기념하는 조각들을 만들어 세웁니다.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권력 싸움에 개입해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니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의 반감을 사게돼 결국 이들은 카이사르
군대를 공격하게 되었으니 알렉산드리아 전쟁으로..... 이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소실되었는데, 이후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의 도움으로 페르가몬에서 책을 가져와 채웠다고 합니다.
서양 도서관이라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최고의 장서를 자랑했는데....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왕국이 로마의
편에 서서 세력을 넗히면서 국력이 강해지자 도서관을 세워 장서를 수집하니 위기를 느낀 이집트는
책을 만드는 파피루스 수출음 금지하자... 페르가몬이 고육지책 끝에 만들어낸 종이가 “양피지” 라고 합니다?
적지에서 소수의 병력 밖에 없었던 카이사르는 죽을 고비도 넘기는등 고생을 하지만 결국 원군이
도착하면서 승리하고는 그뒤 소아시아의 젤라 전투에서 유명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라는 말을 남긴 승리를 거두어 이 지역을 평정한뒤.... 로마로 귀국하여 다시 집정관에 선출됩니다.
그러고는 숨돌릴 틈도 없이 카이사르는 북아프리카에 남아 있던 원로원파 잔당을 소탕하러 가서
기원전 46년 탑수스 전투에서 이들을 깨끗이 정리하고 돌아와 유일한 최고 권력자로
등극하게 되는데..... 이때 갈리아와 이집트 사건을 묶어 처음이자 마지막 대 개선식을 치렀습니다.
카이사르는 구 로마력의 오차를 간파해 1년을 365일로 하고 4년에 한 번씩 윤년을 두어 실질적으로 1년을 365.25
일로 정한 율리우스력을 만들었으니 오차는 1년에 11분 14초였으며, 16세기에 그레고리력이 만들어질때
까지 1500년 넘게 사용되었는데.... 기존 달력의 오차를 수정하느라 기원전 46년은 445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포룸을 건설하였으며, 로마 최초의 국립도서관과 쿠리아 율리아를 세웠고 또 바실리카 율리아
와 마르켈루스 극장을 건설하고, 세르비우스 성벽을 파괴하고 새 성벽을 쌓아 도시 로마를 크게 확장합니다.
원로원의 중심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술라 시대에 600명으로 증원되었던 정원 수를 900명으로 늘렸는데,
기사계급에게 의석을 주어 원로원 강화를 꾀한 술라와는 다르게 카이사르는 의석을 대부분 자신의
지지자로 채웠고 갈리아의 유력자들에게도 제공했으며 원로원의 계엄령인 원로원 최종 권고를 폐지합니다.
원로원의 기득권 세력은 이 비상계엄을 통해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재판 없이 처분할수 있었는
데....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한 역사를 가진 이 비상결의는 그
대상이었던 카이사르에게 폐지되었으며, 술라가 배심원단을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한 것도 폐지합니다.
원로원 귀족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 편향된 판결을 내기 쉬워서 공정한 판결이 힘들고
또 기존 배심원단이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쪽은 거의 유력자들이었기 때문에 뇌물을 받기 쉬웠으니,
카이사르는 배심원단을 로마시민 중에 일정한 재산을 지닌 모든 사람들로 구성하여 사법 개혁을 실시합니다.
늘어난 로마 영토에 따라 속주를 재편성했는데 카이사르가 직접 정벌한 갈리아와 누미디아, 폼페이우스
가 정복한 비티니아, 시리아에 예루살렘을 추가하여 18개의 속주가 편성되었는데,
속주가 늘어나면 군사지휘권이 부여된 총독이 임명되어야 하는데 카이사르는 행정개혁으로 해결합니다.
공화정 시절 집정관 다음 가는 법무관을 8명에서 16명으로 늘리고 재무관을 20명에서 40명으로 2배 늘렸으며
갈리아 키살피나의 속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고, 프로빈키아와 트리나크리아(시칠리아)
속주민에게 라틴 시민권을 부여했으니 이런 속주민 융화정책을 통해 카이사르는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카이사르는 이전에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점령해 독재를 휘둘렀던 마리우스나 술라 와는 달리 반대파을
죽여 씨를 말리거나 또 재산을 몰수하거나 이혼을 강요하는 짓을 안하고 관용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는데 카토를 비롯한 보수파들은 카이사르가 같은 로마 시민을 용서할 자격이 없다며 반발합니다.
하지만 카토의 논리가 공화국 이념적으론 맞는 말이라 쳐도, 마리우스와 술라가 벌인 피바다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대다수 로마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관대한 처사를 환영하고
지지했으며 당장 키케로 부터도 카이사르의 관용에는 편지까지 보내며 동의와 지지를 표했습니다.
의료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고 의료와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의사와 교사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제공했는데, 군대에서 12년 가까이 보낸 카이사르는
군인에 대한 대우 역시 개선하기 위해 70데나리우스 봉급을 140데나리우스로 2배 늘렸습니다.
당시 세게적인 대도시였던 로마는 많은 인구로 인해 교통이 매우 혼잡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짐마차의 주간통행을 금지했는데, 다만 로마 시민들은 밤에 소음으로 잠을 자지못하는
부작용이 있었으니 카이사르는 새로운 시스템들을 구축하면서 로마의 문제를 해결해 나갑니다.
카이사르가 임명한 총독을 현지 주민들이 쫓아내 권력 공백상태가 된 히스파니아에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 그나이우스와 섹스투스, 티투스 라비에누스 등 보수파의 최후 잔당
들이 들어가 히스파니아를 장악하니 카이사르는 마지막 원정인 제2차 히스파니아 원정을 떠납니다.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보수파 잔당의 저항이 거센지라 고전했으나 기원전 45년 문다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대승하면서 보수파 잔당들은 도주에 성공한 폼페이우스의 차남 섹스투스를 제외 하고는 전부 제거됩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개혁을 마친뒤에, 종신독재관에 취임하여 자신을
임페라토르 (imperator, 최고사령관) 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권세와 절대 권력을 누리게 되니.... 사실상 로마의 제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으로서 활동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로마 역사에도 이미 여러번
있었으며..... 게다가 카이사르는 원로원 체제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었고 스스로 황제가 되는 왕관을 거부하는 정치적인 제스처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로마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꿔놓은 과정은 아우구스투스의 집권기 부터 시작되었다고 평가하지만,
제정을 성립시키게 된 원인이 카이사르에게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으며.... 결국
카이사르의 제정으로 가는 듯한 행보 때문에 독재적 야망을 품은자 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자신을 스스로 황제라고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물론, 정치적인 위치는
사실상 절대권력을 지닌 황제나 다름없었으며 임페라토르 칭호를 받으면서 황제의 개념을
만들어가고 있을뿐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을 거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전제정의 제도화 됩니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추진했는데, 불과 사흘전에 원로원에서 암살당했으니, 암살자들은
주모자인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포함한 카이사르의 반대파가 주류였지만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비롯한 카이사르 휘하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젊은 장교들도 가담했습니다.
암살의 주된 동기는 카이사르가 보인 제정으로 가는 행보에 대한 반발과 카이사르에게
집중되는 명예에 대한 불만이었으니, 로마가 공화정인 이유는
왕이 없는 가운데 유력가문 몇몇이 중요한 관직을 공평하게 나눠먹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명예로운 관직들을 혼자서 독점하고, 말년에 가서는 술라가 했던 것 처럼 원로원을 본인이
임명하든지 자신이 마음에 안드는 사람은 선출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편법의 횡포가 심했기 때문입니다.
내전이 종료되고 전후처리가 끝난 이후 부터 카이사르는 대놓고 황제처럼 행동했으니 종신
독재관에 임명된 것도 그렇지만 자신의 조각상을 로마 왕들의 조각상
옆에 만들어 놓고 자기 얼굴을 새긴 주화를 발행한 것은 로마인들에게는 문화 충격이었습니다.
그 외 루페르칼리아 축제가 열리던때 대중 앞에서 집정관 안토니우스가 왕관을 바쳤는데 카이사르가
조용히 거부했으니, 그가 야심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여론을 살피려 했다는 견해와
왕관을 거부하는 정치적 제스처를 보여주면서 대중의 의혹을 불식시키려 했다는 견해가 엇갈립니다.
카이사르가 왕정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경계하던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불안감에 기름을 붓는
듯한 효과를 가져왔으니, 왕 행세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반면에 실익은
전혀 없는 기분 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카이사르는 자기 절제가 철저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오래 지내면서 기생충에 감염돼 뇌에 손상을 입었을 거라는 말도 있고,
스페인에서 폼페이우스의 아들들과 싸운 문다 전투에서 지지부진하며 고전한 모습을 보인 것도 뇌기능
손상설을 뒷받침하며 뇌졸중 신체질환과 원로원의 견제로 우울증이 도져 신중함을 잃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음모자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카이사르가 애인의 자식이라 아낀 것은 맞지만 브루투스는 외삼촌이자 카이사르의
숙적인 카토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는데,
폼페이우스가 아버지를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간 것에서 얼마나 카이사르를 반대했는지 알수 있습니다.
다른 주모자인 카시우스는 브루투스의 처남이고 독재에 대한 반감이 심한 사람이었으니 그 역시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카이사르와 맞서 싸우다가 항복했으며, 암살자 중 카이사르의 부하는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트레보니우스,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바실루스와 술피키우스 갈바가 있습니다.
데키무스는 카이사르 휘하에서 해군을 지휘하던 장교로 카이사르가 유언장에 제2상속자로 정했을 정도로
아낀 인물이니..... 카이사르는 데키무스를 기원전 42년에 집정관 선거에 출마시키려 했고
트레보니우스도 기원전 45년 보궐 집정관이었으며 갈리아 전쟁과 내전 당시 적지 않은 활약을 했습니다.
암살이 결행된 날짜인 3월 15일은 그가 파르티아 정복을 원로원에 공표하려고 했던 날이기도 했지만,
훗날의 암살된 당일 아내가 예지몽을 꾸고 극구 말렸는데 갔다든지. 또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나왔고 숙적인 폼페이우스 동상 앞에서 죽었으니..... 서양에서는 3월 15일은 불길한 날로 여겨집니다.
카이사르 한명이 없어진다고 수백년 전의 공화정으로 돌아갈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왕정과 공화정 사이에
균형을 잡으면서 구속구 역할을 하던 카이사르가 사라지자 공화정의 몰락이 가속화됐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카이사르 암살은 그의 후계자들에게는 좋은 명분이 되었고 원로원에 돌아온 것은 마리우스 이후의 대숙청
이었는 데... 복고주의 세력(공화파) 은 이런 현실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낙관적으로 행동하다가
자멸했으니 훗날 카이사르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세우면서 그들의 암살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날짜를 매달 초하루(Kalendae) 와 이두스(Idus) 를 기준으로, "무슨 달 초하루 며칠 뒤",
"무슨 달 이두스 며칠 전" 하는 식으로 표시했는데, 이 중에 이두스(Idus) 는 3, 5, 7, 10월
에는 15일, 그외 달에는 13일을 말하며 카이사르 암살로 유명한 3월 15일은
라틴어로 Idus Martii (3월의 이두스) 이니 영어로 Ides of March(3월의 이데스) 라는 표현이 존재합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파르티아 정복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원로원에 갈 준비를 했는데
카이사르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아내도 원로원에 가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기어이 원로원으로 향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들어가자 의원들은 모두 존경의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사람들이
그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은 슬쩍 그의 뒤로 갔으며
일당 중 한 명인 킴베르가 카이사르의 옷을 양손으로 잡아당겼는데, 이것이 공격의 신호였습니다.
카스카가 맨 먼저 목을 찔렀으나 상처가 깊지 않았으므로 카이사르는 칼을 빼들어 저항할수 있었는데,
호위 병력은 며칠전 해산시켰기 때문에 혼자였고, 주변 사람들은 하도 놀란 나머지 카이사르
를 돕지도 못했으며 암살자들은 그에게서 칼을 빼앗은 후 카이사르를 빙 둘러싸고 마구 찔러댔습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재각색한 카이사르 암살 직후의 이야기가 유명하니.... 그의 작품 “Tragedy of Julius
Caesar”에서는 암살파의 대표인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의 당위성과 지지를
얻기위해 시민들 앞에 나서서 긴 연설을 했지만 카이사르에 익숙해진 시민들을 이해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브루투스가 떠나자 안토니우스가 나섰으니 브루투스의 연설에 동감을 표하는 듯하다가 결국 카이사르를
찬양하는 충격적인 반전을 구사하며 시민들의 암살자들에 대한 분노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합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사람들의 추억과 감성을 자극하는 연설을 해서 마침내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이름을
외치며 울부짖기에 이르자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 일당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성을 잃은 시민들은
'브루투스와 일당을 끌어내 죽여라!' 라 외치니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은 잠적하고 안토니우스는 권력을 잡습니다.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아내 칼푸르니아를 설득하여 독재관의 모든 서류와 유언장을 확보하고 7억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하는 국고를 확보해 카이사르를 따랐던 병사들과 지지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발판
을 마련했지만, 전투 준비가 된 부대는 기병장관(부독재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군대 뿐이었습니다.
3월 19일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낭독되었고 주요 상속인은 카이사르의양자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였으며..... 평민 한 사람당 300 세스테르티우스를 기부한다는 내용이었으며 장례식에서
군중은 카이사르의 유해를 보고 분노해 폭동을 일으켰고, 암살자들은 로마를 탈출해야 했습니다.
카이사르는 포로 로마노에서 장례를 치르고 화장되었으며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낭독했는데
카이사르 소유 재산의 4분의 3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와 아티아의 아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에게 남긴다. 나머지 4분의 1은 루키우스 피나리우스와 퀸투스 페디우스에게 절반씩 나누어준다.
제1상속인인 옥타비아누스가 상속을 사양할 경우, 상속권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암살자?) 에게 돌아가는데,
옥타비아누스가 상속할 경우 유언 집행 책임자로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명한다.
제1상속인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는 상속과 동시에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고, 아들이 된뒤 카이사르라는 성을
이어받았으며 수도에 사는 로마 시민에게는 1인당 300 세스테르티우스씩을 주고, 테베레강
서안에 있는 카이사르 소유 정원도 시민들에게 기증한다. 이 일을 실행할 책임자는 제1상속인으로 한다.
이로써 훗날 로마 제국의 초대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되는 18살의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는 양자 입적후
유언장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로 정식 개명후 로마 정계에 등장하는데, . 처음에는 그
누구도 옥타비아누스를 알지 못했으나 이 젊은 청년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됩니다.
카이사르는 외동딸 율리아가 폼페이우스의 아이를 출산하다가 죽은 것 말고는 자식이 없었으니 이집트 파라오
클레오파트라와 사이에 태어난 아들 카이사리온은 로마법에서 볼 때는 정식 혼인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닌데다가 영화에서 와는 달리 카이사르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아들임을 인정한 적도 없었기에 법적인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으니 유언장 내용에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안토니우스가 이러한 유언장을 발표를 하고나서, 대중 사이에서 카이사르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으며 암살자들에 대한
분노도 커졌으니..... 군중들은 카이사르를 추모하는 의미로 장례용 장작 위에 놓인 카이사르의 유해에 직접
구해온 마른 나뭇가지들과 가구조각들과 옷가지들을 땔감으로 덮어 주었고, 여자들은 보석까지 불길에 넣어 줍니다.
즉, 독재자였음에도 민중의 지지를 받는 카이사르였기에 수많은 로마 시민들이 경의의 표현으로
시신 위에 자신들이 가진 물건들을 땔감으로 수북히 덮어 주었고, 그로 인해 화장을 위해
불을 당겼을 때 불길이 걷잡을수 없이 번져 포룸이 심각하게 피해를 입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불길이 꺼지고 나서 뼛가루(유해) 를 수습하려고 했을 때 비가 세차게 내려 뼛가루들이 전부 강으로
쓸려가는 바람에 유해를 수습하지 못해 묘소를 만들지 못했다고 하며 이때 혜성이 하늘을 지나
가서 사람들은 카이사르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었는데 이 혜성은 핼리 혜성으로 밝혀졌습니다.
로마 귀족들은 화장을 한후 뼛가루나 유골 조각들을 보관용 도자기(유골함) 또는 작은
석관에 담아 가족묘 건물에 봉안하는 식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비바람에
유해가 모두 소실된 카이사르는 뼈조각 하나도 추릴수 없었으니 카이사르의 묘소는 없습니다.
원로원파는 군대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으니 결국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카이사르 암살범들과 그와 관련된
이들(키케로 포함) 을 모조리 숙청하면서 로마의 정권은 카이사르의 후계자들이 장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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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간은 멈추지 않지만 마음은 잠시 머문다
지나간 날을 붙잡지 않아도 그 자취는 남는다
젊음은 사라져도 온기는 깊어진다
오늘의 나를 어제와 비교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살아 있는 시간이다
흐름 속에서도 나만의 박자를 지킨다
그렇게 하루를 통째로 사랑한다
드디어 카이사르의 시대가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