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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성산성에서 만난 井자 문양
작가 최인호가 井자 문양을 처음 만난 것은 92년 봄 한양대 박물관에서다. 백제와 관련한 자료를 찾으러 갔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7.5㎝ 크기의 고구려 토기 밑바닥에 새겨진 문양을 발견한다. 당시 한양대 발굴 팀은 경기도청과 용역계약으로 186년부터 ‘이성산성’에 대한 발굴을 시작 했었다. 이성산성은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따르면 “이성산은 서부면 춘궁리, 초일리, 광암리에 있으며 삼면에 석괴가 남아 있다. 이 산은 예성산이라고도 불리는데 둘레는 약 8백칸이고 높이는 약 2칸이며 산 정상부에서 토기편과 기와가 발굴되고 있다.”고 보고된 바 있다.
많은 유물들이 쏟아진다는 정황을 파악한 당국은 발굴 작업 십여 년 전부터 입산금지 구역을 정한 후 발굴을 개시하였던 것이다. 역사 앞에 큰 그물을 던진 것이다. 결과는 어찌되었을까. 당시는 대단한 기회이고 희망이었을 것인데 시간이 지나며 어느 새 과거가 되었으며 또 그 결과가 도출되었을 것이다. 영조 때 제작된 해동지도에는 이성산을 二星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星은 문자 그대로 ‘별’을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이성산은 별과 관계되어 있는 산이다. 반짝이는 두 별은 누구를 상징하는 걸까.
그런데 발굴지 중에서도 유독 9角의 특이한 형태를 가진 건물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초석이 발견된 주변에서 기이한 모습들의 토기와 소뿔 모습의 파수(把手)가 나왔다. 그뿐 아니라 구각 건물지 부근에는 4개의 알 수없는 돌무더기가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져 있었다. 알다시피 구각이라하면 쪼개지는 한 각이 40도 인지라 대칭성을 유지하며 짓는 다는 게 용이하지 않았을 것인데 굳이 이를 택한 것은 음양의 논리에서 양기로서는 최상의 수이기 때문 하늘에 가까이 다가가리라 믿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당시 발굴을 주도하였던 K교수가 한 말이다.“산성 안에는 여러 개의 건물자리가 있었고 그 건물이 무너진 폐허의 주춧돌 틈새에서 여러 마리의 말 조각품이 발견되었다. 토마도 있었고 철마도 있었다. 제일 크고 잘 생긴 것이 사람 주먹만 하였고 작은 것들은 엄지 손가락만한 것들이었다. 어느 것이나 미적 감각은 느낄 수없는 소박한 것들이었다. 가까스로 말의 시늉만 해놓은 유치한 것들이었지만 그중 토마 한 마리는 안장, 고삐, 등을 갖춘 전투용 말이었다는 게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이상하게시리 이 말들은 모두 목이 잘리거나 다리가 잘린 채 묻혀 있었다. 이미 만들어진 순간부터 무참하게 절단이 난 상태에서 땅 속에 묻힌 것이다. ”
왜 말들을 만들어 묻었으며 왜 말들을 두 동강이로 참마하여 죽여서 묻은 것일까. 이 역사의 수수께끼는 또 무엇을 예시하고 있는 것일까. 작가는 소설에서 ‘백마의 맹’이란 역사적 사실을 떠올린다. 백마의 맹이란 한나라의 고조 유방과 항우가 오강(烏江)에서 건곤일척의 대전을 벌이는데 마침내 항우가 조강에서 목을 쳐서 자결해 버리고 유방이 천하를 평정했을 때 유방은 공신들의 논공행상을 봉하면서 백마를 죽여 그 피를 나눠 마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때 사용된 말은 항우가 타고 다니던 애마 추로서 백마의 목을 참마하여 그 피를 입가에 발라 삽혈을 하고 그 피를 나눠 마심으로써 서로 영원히 배반치 않도록 맹세하였는데 이로부터 이를 ‘백마의 맹’이라 불렀다.
이때 유방은 ‘백마의 맹’과 더불어 철판에 글자를 써서 맹문(盟文)을 새기고 그 위에 금을 칠한 철권(鐵券)을 함께 지어 이를 땅속에 파묻고 종묘에 보관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를 ‘철권의 서(書)’ 라고 불렀으며 백마의 맹과 철권의 서를 합쳐서 중요한 서맹(誓盟)의 표시로 삼았다. 항우가 죽은 것은 기원전 202년, 작가는 ‘백마의 맹’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중요한 맹약의 한 방법으로 전승되어 내려왔을 것이라고 했다. 삼국사기에도 ‘백마의 맹’에 관한 중요한 기사가 나온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멸망한 그해 8월 ,신라의 문무대왕은 당나라 칙사 유인원과 백제의 마지막 태자였던 부여 융과 더불어 오늘의 공주 연미산인 취리산에서 화친을 서맹하는 의식을 거행한다.
이때 세 사람은 백마를 잡아 목을 베어 희생시킨 후 그 피를 하늘의 신과 땅의 신에게 제사하고 다시 천곡(川谷)의 신에게 제사한 후 그 피를 입에 발라 삽혈을 하고 함께 백마의 피를 나눠 마신 후 맹문을 지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맹문은 백제가 말을 안 들어 한시도 편한 적이 없었기에 노하여 정벌을 하여 이제 편하게 되었다는 식의 글귀로 삼국사기는 이 맹문을 유인궤가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삽혈이 끝난 후 생폐(牲幣)를 제단 북쪽에 묻고 그 맹문의 글월은 종묘에 보관하였다고 전하는데 여기서 생폐(牲幣)는 희생과 폐백의 두가지 낱말을 합친 단어로 풀어 말하면 희생제물을 말한다.
작가는 생폐로 봐야한다고 심증을 굳힌다. 철제 말이 발굴될 때 쌓였던 돌무더기는 단순한 신앙부적이 아니라 희생제물을 파묻기 위한 돌이고 특이한 9각지 형상을 갖는 건물은 제단임에 틀림이 없다 싶은 것이다. 작가의 상상은 계속된다. 이성산성은 사람들이 말하는 한성 백제 시대의 왕궁이 있는 궁터가 아니라 희생제물인 생폐를 파묻을 수 있는 제단이 있는 곳, 신묘(神廟)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사유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백제의 시조 온조는 비류와 함께 주몽의 두 아들이다. 비류는 장자로 맏아들이었고 온조는 둘째아들인 차자였는데 어느 날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인 유리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어머니인 소서노를 모시고 열 명의 제자와 함께 남행하여 아리수(오늘날에 한강, 백제인들은 욱리하(郁里河)라 부르던 곳) 근처에 백제라는 나라를 건국한다.
이때의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백성들이 모두 즐겨 찾았으므로 후에 국호를 백제라 고쳤다. 그 世系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로써 성씨를 삼았다.」그리고 나서 온조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아버지인 주몽, 즉 동명왕의 사당을 세우는 일이었다. 이때의 기록도 「삼국사기」에 쓰여 있다. 「원년(元年) 5월에 동명왕묘를 세웠다.」백제도 고구려처럼 줄곧 동명왕을 자신들의 건국시조로 모시고 배알하였다는 기록이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자주 등장한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삼국의 제사를 기록한 잡지(雜志)에서고구려의 제례를 「고구려는 항상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동맹(東盟)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여기서 ‘동맹’은 양서(梁書)의고구려전에서 ‘동명’ 으로 되어 있으니 건국 시종인 동명을 기리는 동명제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백제 또한 마찬가지일 것으로 추론이 가능하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고구려에는 신묘(神廟)가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이라 하여 나무를 새겨 부인의 상을 만들었고 또 하나는 고등신이라 하여 이를 시조로 하고 부려신의 아들이라 한다. 모두 사당을 설치하고 사람을 보내어 지키게 하니 부여신은 하백녀(河伯女)이며 고등신은 주몽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고구려에서는 죽은 후에 하늘로 승천하였다는 주몽을 누리신(昇天神)으로 받들어 신묘로 섬겼으며 주몽 어머니인 하백녀도 나무로 새겨 부인의 상을 받들어 부여신이라고 섬겼음을 보여주는데 백제에서도 기록에 「온조 17년 4월. 사당을 세우고 국모로 제사 지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이성산성은 한성 백제의 옛 왕궁이 있었던 궁터가 아니라 바로 동명왕과 그의 어머니인 국모 부여신을 모시는 신묘가 맞을 것이다. 두 성인이 있음을 상징하는 이성산(二星山)은 온조와 비류를 암시하는 산이 아니라 작가는 동명과 그의 어머니인 하백녀를 의미하는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작가는 지금까지의 상상을 모두 조합해본다. 틀림없이 천 여 년 전 이성산성에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두 나라가 백마의 목을 베어 그 피로써 삽혈을 하고 맹세의 표시로 그 피를 나누어 마시는 ‘백마의 맹’이라는 제식을 거행하였을 것이다. 두 나라는 그 의식 뿐 아니라 ‘철권의 서’로써 서로가 서로를 배반치 않을 것을 맹세하는 맹문을 지은 다음 그 철권위에 금을 입혀 이를 따로 보관하였을 것이다. 작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코 바라 본 상자가 있었다. 토기는 10센티 정도의 높이를 가진 평범하기 짝이 없는 토기였다. 뿐만 아니라 토기는 절반 정도가 깨어져 있어 한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역사적 가치가 없는 토기였다.
자배기그릇, 운두가 높지 아니하고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 둥글 넙적한 토기. 그런데 평범한 이 토기를 따로 보관하고 있다니. 작가는 의아했다. 그런데 보고서에는 「…기형은 고구려의 성격을 많이 띠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바닥에는 음각선으로 표시된 井형태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라고 적혀 있었다.아마도 문양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싶어 따로 보관한 것이다 싶은데 순간 작가는 번뜩이는 영감을 느꼈다. 일부러 멋을 부리거나 토기를 아름답게 꾸미기위해서 그린 무늬가 아니라 마치 우연인 것처럼 음각선으로 새긴 부호. 작가는 장난처럼 낙서처럼 써내려간 문양이 마음에 걸렸다.
천오백변이 지난 오늘에는 의미를 알 수없는 이상한 부호일지는 모르지만 천오백년 전 동명성왕과 하백의 신묘가 있었던 이성산에 살고 있던 백제와 고구려인들에게 있어서 이 문양은 가장 흔하고 의미 있는 부호였을 것이다. 작가의 의문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신성한 성산 제단 밑에서 발견된 토기에 새겨진 부호가 예사롭지 않다 여겼다. 그의 세심한 통찰력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학자도 아닌 그의 뇌리 속에 번뜩이는 감성 넘치는 예지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천생이 작가다싶다. 작은 실마리를 기화로 시작된 그런 그의 행적은 문양의 상징성을 쫓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며 더불어 광대한 영역을 넘나든다. 나 역시도 그를 쫓다 보니 천지분간 못하고 역사적인 연고에 좌충우돌 그 자체다.
그가 연관 지은 이성산성만 해도 그렇다. 1995년 그가 일갈한대로 한성 백제의 옛 왕궁이 있었던 궁터가 아니라 바로 동명왕과 그의 어머니인 국모 부여신을 모시는 신묘가 맞는 것인지 2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선 어찌 파악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지금 쯤 이성산성은 땅을 파헤친 결과 무슨 소득을 얻었는지 머릿속이 뒤숭숭해진다. 거기에 백제 7백년 중 5백년을 넘게 살았던 한성 백제 왕궁 터는 어디쯤에 머무는지 이 또한 아니 알아볼 수는 없다. 5백년이라면 말이 그렇지 대단한 시간의 역사이다. 그런 터전을 소홀히하고 여직 파악조차 못한다면 역사학자들은 그 동안 무엇을 한 것이냐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과연 그럴까 싶었던 산성에서 출토한 부러진 말들에 대해 ‘백마의 맹’ 이라 추론하여 시작한 그의 희생제물론 상상은 과연 또 적절한 것일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무래도 가고 싶은 땅 요동에 이르기는 갈 길이 멀지 싶다.
(중원 목장의 대혈투 1)
나는 고구려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광활한 영토에 무용총이다. 무영총이야말로 고구려인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싶다. 놀라 달아나는 호랑이와 사슴, 말을 질주하며 정면을 향해 혹은 몸을 돌려 활시위를 당기려는 기마 인물의자세는 굵기에 변화를 준 물결무늬꼴 띠를 겹쳐 표현한 산줄기에 의해 속도감과 긴장감을 더 느끼게 한다. 고봉준령을 넘어 사냥을 하는 기상의 기마족이 바로 고구려인이다. 그 진취성을 발휘하여 중원의 패자를 넘보지 않았을까. 마상에서 활 시위를 당긴다는 것, 그것도 능수능란하게 평상시 늘 그렇게 한다는 식으로 몸까지 돌려 활시위를 당긴다는 데서야 누군들 섬칫하지 않을까. 그 당시 저 멀리 로마군단이 있었지만 적을 공격할 때는 말을 세우고 정지 자세에서 시위를 당겼지 동적인 자세는 아니었다. 그 시대 어느 영화를 봐도 로마군에게서 그런 기막힌 포즈는 없다.
그런 포즈는 지금도 몽고인들이 하고 사는 그대로 태어나 3살부터 말을 다뤄야만 가능한 기술이다. 한무제가 장건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멀리 그리고 빨리 달리는 말을 왜 구하여 오라고 하였을까. 엄청난 수의 군사력으로도 어쩔 수없이 흉노에게 조공을 받쳐야만 했던 뼈 아픈 과거를 어떠하든 벗어나고 싶어서 였을 것이다. 북방민족의 무예, 날샌돌이들을 한족은 겁냈으며 고구려는 기마족으로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그들을 위협하며 야금야금 중원 목장을 삼켜 나갔을 것이다. 로마군이 지금의 독일 변방을 넘어 정복을 할 때 당시의 힘 좋다는 게르만 족이 어쩌지 못한 것은 바로 기마군단 때문이다. 라인강에 어제 나타난 군단이 그 다음 날은 다른 지역에 나타나는 신출귀몰한 기동력을 어쩌지는 못했던 것이다. 알다시피 징기스칸이 큰 일을 도모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말과 조직 때문이다.
물론 고구려는 처음부터 강성하지는 못했다. 한사군이 설치 될 당시, 규합한 군졸이 얼마나 과연 얼마나 되었겠는가. 고조선이 망하고 예맥족은 많이 흩어져 있었을 것이다. 씨족을 중시하던 시대, 북부여에서 나온 추모왕 세력이 흩어진 그들을 재규합하기 시작하던 때가 바로 그 무렵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맨 처음 동예와 옥저를 영토화 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함경도와 원산 부근인 땅을 영토화한 것이다. 육류만 섭취하던 고구려인에게 정어리와 고등어가 풍부했던 동해의 수산물은 절대 필수 공급원이었을 것이다. 훗날 담덕 광개토대왕이 기마뿐 아니라 수군에도 능했다는 것이 바로 동예와 옥저 출신의 규합으로 터득하게 된 기술력은 또 아닐까 싶기도 하다. 훗날 수나라나 당나라는 늘 수전에서 맥을 못췄다. 아무튼 기마족 고구려는 초창기는 수에서 열세이니 치고 빠지는 기동성을 늘 이용했을 것이다.
그런 고구려는 건국이래 한 군현과 자주 접촉했다. 고구려와의 옛 현도군 고구려현의 자리는 고구려 건국이 선언된 졸본(현재의 요녕성 환인)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더욱이 2대왕 유리왕 즉위 후에는 나라의 중심을 옛 고구려현의 자리인 국내(현재의 길림성 집안)로 옮겼다. 초창기는 북으로는 부여가 서쪽과 남쪽에는 한군현이 있어 세력을 뻗어나가기가 어려 웠다. 하지만 고구려는 세력을 확대하고자 애썼다. 서쪽에는 천산산맥의 아래까지 쭉 뻗은 요동의 넓은벌이 남쪽으로는 대동강과 한강 유역 좌우로 펼쳐진 비옥한 평야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곳들은 고구려보다 앞선 문명이 이미 꽃을 피우고 있었다. 기록으로는 고구려가 한나라가 직접 부딪쳤다는기록은 없다. 사기를 쓴 사마천도 한사군 설치만 언급했을 뿐 별 기록이 없다. 이를 두고 유명무실한 한사군이었다고 말들을 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한나라와 직접 충돌한 때는 왕망의 신나라 (서기 8~25) 때다. 고구려 유리명왕 31년 신나라 왕망이 고구려 군대를 징발하여 흉노를 징벌하려 한 것이 계기가 된다. 고구려가 반발 안 했을리 없다. 한서 위현열전에는 "동쪽으로 고조선을 정벌하고 현도 , 낙랑을 일으킴으로써 흉노의 왼팔을 끊었다."는 구절이 있다. 이는 고조선과 흉노의 강한 연대성 내지는 친연성을 말한다. 그러니 고조선 계승 의식을 갖은 고구려가 흉노 편을 들지 신나라 편을 들을까.이때 한판이 붙은 거다. 이때부터 왕망이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비하를 하는데 이는 한차레 격전을 벌이면서 크게 손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유리명왕조는 이때부터 고구려 한의 변방을 침입하는 것이 더욱 심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유리왕 때 현도군에 속했던 고구려현을 차지했다고 전해진다.
왕망의 신나라가 곧 멸망하고 서기 25년 후한이 들어서는 데 그때부터 후한과의 대립은 격화일로로 치닫는다. 고조선의 옛고토를 되찾은 고구려를 후한이 반격하는 그런 양상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고구려 제 3대 대무신왕 11년 (서기28) 한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위나암성을 포위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 대무신왕의 맏아들 모본왕(재위 48~53)2년(49)의 삼국사기 기사는 매우 놀라운 기록이 적혀있다.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워을 습격했는데 요동태수 채융이 은혜와 신의로 대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그러니까 고구려 공격을 받자 얼른요동태수가 은혜와 신의로 화친하자 했다는 말 아닌가. 외교문서에 은혜라 하면 뜻을 헤아릴 만 하다. 기마족의 특수 병법 , 치고 빠지는 기습공격이 아마 유효했을 터다. 그런데 공격한 지역이 어딘 줄 아는가.
중국사회과학원에서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에 따르면 북평은 현재 북경 서남쪽 하북성 만성현 부근을 말한다. 어양은 북경시 밀운현부근으로 북경 동부지역이고 상곡은 지금의 하북성 회래현으로 북경의 북쪽인데 중국의 북방전진 기지였던 요충지다. 그리고 태원은 지금의 산서성 성서 태원시로 북중국의 중심지이자 훗날 당태종의 발원지다. 당시 후한의 수도는 낙양인데 태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러니까 후한 수도 가까이 까지 습격을 감행했다는 말이 된다. 아마 한족들의 등골이 오싹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사실이 맞는지는 믿기지 않다 할 수 있으므로 중국 측 사료에도 이 구절이 나와야 한다. 식민사관에 사로잡힌 구 시대 역사학자들이 소위 말하는 중극측에도 나와야 실증으로 인정하는 학계의 풍토가 있기 때문에서도 그렇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에는" 광무제 25년 춘정월 요동 변방의 맥인이 북평, 어양, 상곡,태원을 침략했는데 요동태수 제융이 불러 항복시켰다."는 구절이 있다. 알다시피 맥인은 고구려를 말한다.그렇다면 명백한 사실이다. 이때의 공격으로 고구려는 막대한 영토도 차지했다. 삼국사기 태조대왕(재위 53~146)3년 봄 2월조는 '요서에 성을 열 개 쌓아 한나라 군사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고 기록했다. 요하 서쪽 요서에 10성을 쌓았다는 것은 모본왕 때 요서 지역까지 차지 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늘 승리를 했던 것만은 아니다. 공격을 했다는 내용이 더 많지만 태조대왕 59년(서기 111)조에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방물을 바치고 현도군에 소속되기를 요구했다."라는 기록도 있다. 치고 받은 열띤 공방전 속에 후한서 안제본기 원초 5년(서기118년)" 여름 6월 고구려가 예맥과 함께 현도를 공격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후한서는 현도에 대해 "군명인데 요동에 잇다." 라는 주석을 달았다.
잇단 공격을 받은 후한은 반격전에 나섰다. 동북방 총동원령이 내려진 것이다. 삼국사기 태조대왕 69년조는 이때의 전투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 한나라의 유주지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해 예맥을 쳐서 우두머리를 죽이고 병마와제물을 모두 빼앗아 갔다. 그러자 태조대왕은 아우 수성에게 군사 2천명을 거느리고 풍환,요광등을 역습하게 했다. 수성이 사신을 보내 거짓 항복하니 풍환등이 이것을 믿었다. 수성은 험한 곳에 의지하여 많은 적군을 막으면서 몰래 군사 3천명을 보내 현도 요동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였다." 여기서 태조대왕은 멈춘 것이 아니다. 후한서는 같은 해 여름 4월" 예맥이 다시 선비와 함께 요동을 공격하니 요동태수 채풍이 추격하다가 전사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 태조대왕 94년 (146년)조는 " 가을 8월에 왕은 장수를 보내 한나라 요동 서안평현을 쳐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 잡았다.'고 전한다. 서안평의 위치는 고구려 서쪽 강역을 비정할 때 중요한 지역이다. 삼국사기 미천왕 12년(313년)조는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차지했다."고 또 전하고 있다.태조대왕이 공격한지 150년 후 미천왕이 또 공격한 지역이다. 서안평은 어디일까. 한서 지리지8은 서안평에 대해 왕망은 북안평이라고 했으며 위씨 춘추는 서안평현 북쪽에는 소수가 있다고 했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는 '구려는 일명 맥이다. 따로 별종이 있는데 소수에 의지하여 살기 때문에 소수맥이라고 부른다."고 기록하였듯이 소수는 고구려의 초기 강역을 비정할 때 주요한 지역이다. 그로 서안평 위치 비정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수는 어디고 수소 남쪽에 위치한 서안평은 어디일까.소수가 압록강? 나는 이 역사적인 명백한 사실에 덧붙여 한사군 설치 지역과 연관지어 또 머리가 아프다. 짚는 곳이 학자들간 천양지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곳을 더듬어 살펴는 봐야 할 것 같다. 가자 서안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