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창 촬영할 때는 피곤하니까 초콜릿·사탕을 많이 먹었어요.
- 40대 중반쯤 되니 당뇨가 왔어요.
- 그래서 단 음식은 주의하고 하루 5000보 이상 걸으려고
- 노력합니다.
- 매일 오후 헬스장에 가서 한 시간 이상 가벼운 근육운동과
- 러닝머신을 해요.”
- 배우 시절 너무 소리를 질러서인지 기관지가 좀 안 좋은 것
- 빼고는 다 괜찮아요.
- 나이 먹으니 체중이 자꾸 줄어서 68~70㎏ 왔다 갔다 하는데
- 한창 시절엔 85㎏까지 나갔어요.”
기독교 신자인 그는 ’나중에 내 관 속에 성경책
하나만 함께 묻어달라“고 말했다.
기증 재산을 토대로 2011년 신영균영화예술재단이
출범했다.
영화인 자녀 장학금 지급, 단편영화 제작 지원 등을
하고 있다.
연극·영화계 공로나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한 상인데,
상금( 1억원)으로는 최고 액수다.
- 이제 욕심이 없어요. 마지막으로 내가 가지고 갈 거는
- 40~50년 손때 묻은 이 성경책 하나예요.
- 딸을 보며, 이걸 나랑 같이 묻어 다오.”
딸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소리 내 읽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를 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60년 ‘과부’로 데뷔하면서 그간 연극으로 다져온 연기 실력을
단박에 인정받았다.
이후 ‘상록수’ ‘연산군’ ‘빨간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 19년
동안 300여 편에 출연했다.
- 머슴, 왕, 군인, 사장 뭐 안 해본 캐릭터가 거의 없어요.
- 상남자 스타일. 심지어 예수, 석가모니도 했다니까요.”
- “윤정희와 마지막 영화 … 알츠하이머 안타까워”
사진은 ‘연산군’. 19년간 300여 편에 출연.
78년 ‘화조’를 끝으로 은퇴. 40여 편에서 그와 호흡을 맞춘
윤정희(75)씨 얘기가 나오자
“참 아까운 사람이에요”. 10년째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안타까움을 사고 있지만 신씨는 이미 윤씨의 투병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난해까지도 백건우 피아니스트 공연이 있으면 우리 부부를
초청. 식사도 함께 했는데 치매라니 정말 안타깝게 됐어요.”
‘빨간마후라’ 촬영하며 생사 오가
‘빨간마후라’. 19년간 300여 편에 출연했다.
서울대 출신 치과의사에서 배우로 인생 항로를 바꿨다.
연기에 대한 갈망이 컸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 대학 진학도 포기 연극 무대에 뛰어들었다.
어머니가 신발을 던져가며 만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연극만으로는 생활이 안 될 거라고 보고 공부를 시작했다.
치과대학을 졸업‘동남치과’를 열었어요.”
- 배우 김혜자씨 허장강·최무룡 등 연극하며 인연을 맺은
- 배우들도 자주 왔어요.”
- 치과의사를 하면서 극단에 입단해 활동하던 때였는데,
- 여인천하에서 조광조 역을 맡아 하는 걸 보고
- 영화 ‘과부’에서 머슴 성칠이 역을 시키면 딱 맞겠다
- 생각한 모양이에요.
- 머슴 역이다 보니 머리를 빡빡 깎으라고 하더라고요.
-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 영화에 출연 치과 일을 병행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 싶어 치과를 그만두게 된 거죠.”
- 아내는 ‘내가 치과 의사랑 결혼했지 딴따라랑 결혼한 거
- 아니지 않냐’면서 결사 반대를 했죠.
- 그 당시 배우들은 스캔들이 워낙 많다 보니 아내도 그걸
- 걱정한 모양이에요.
- 나는 ‘절대 그럴 일 없게 하겠다’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하겠다’고
- 설득해 허락을 받았고 그 약속을 지켰어요.
-
미워도 다시 한번’ 포스터. 19년간 300여 편에 출연했다.
60년대 영화배우들은 목숨을 걸고 일했다. 대역 배우도 없던 시절이
안전장비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5인의 해병’ ‘빨간마후라’ 촬영 때는 실탄이 날아들었고,
‘나그네’ 촬영 때는 물에 빠져 익사할 뻔했다.
연산군, ‘열녀문’으로 1, 2회 대종상 남우주연상, ‘상록수’,
‘빨간 마후라’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화려한 스크린과 함께하면서도 가장의 책임, 가정의 행복을
삶의 1순위에 올려놓았다.
사생활 관리 소홀로 재산·가족 등을 잃은 많은 스타 배우들과
차별화된 지점이다.
그는 영화를 늦게 시작했고, 이미 아내와 아이가 있었기 때문에
책임감이 더 컸던 것 같다” .
- “집 한 채 가격이 200만~300만원 하던 시절 편당 70만원
- 1년에 20~30편씩 출연 모아둔 돈이 사업 밑천이 됐죠.”
명보제과를 600만원에 인수. 뉴욕제·태극당·풍년제과 등과 함께
4대 제과점으로 인기를 끌며 25년간 성업했다.
- 노후를 생각 무리를 하지 않고 모험은 하지 않고 안전한 투자를
- 했어요. 빚을 안 지고 안정되게 살 수 있었네요.”
- 명보극장을 기부했을 때 정말 기뻤고, 가족들도 적극 지지해 줬어요.
- 충무로의 자취를 살릴 수 있었잖아요.”
68년부터 한국영화배우협회장·을 하며 권익 향상에도 앞장섰다.
15, 16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문화예술 진흥에 힘썼다.
- 90년 영화 같은 인생은 앞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만날 수 있다.
-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자신의 긴 여정을 압축했다.
중앙일보 500억 기부한 91세 배우
"내 관엔 성경책 하나만 넣어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