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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 입산, 엘론, 압돈
삿 12:8-15
8 그 뒤를 이어 베들레헴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9 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칠 년이라
10 입산이 죽으매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더라
11 그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
12 스불론 사람 엘론이 죽으매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더라
13 그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14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
15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죽으매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더라
삿 12:8-15 / [사사 입산 . 엘론 . 압돈] 입다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사사로 활동한 사람은 베들레헴 출신 입산이었다. 9) 그는 딸 30명과 아들 30명을 두었다. 딸들은 모두 다른 씨족 사람들에게 시집 보내고 또 며느리들도 모두 다른 씨족 사람들 가운데서 맞이하였다. 입산은 7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일하다가 10) 세상을 떠 베들레헴에 묻혔다. 11) 입산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사사로 활동한 사람은 스불론 지파 사람 엘론이었다. 그는 10년 동안 사사로 활동하다가 12) 세상을 떠 스불론 지역에 있는 아얄론에 묻혔다. 13) 엘론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사사로 활동한 사람은 비라돈 출신 힐렐의 아들 압돈이었다. 14) 그는 아들 40명과 손자 30명을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나귀를 타고 다녔다. 압돈은 8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활동하다가 15) 죽어 아말렉 산악지대에 있는 에브라임 땅에 있는 비라돈에 묻혔다.
입다가 죽은 뒤, 베들레헴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됩니다. 그는 자기의 자녀들을 이방인과 결혼시켰습니다. 그 뒤 사사가 된 스불론 사람 엘론은 별 특징 없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그 후에는 부유했던 압돈이 사사가 됩니다.
풍요로운 사사 입산(8-10) 본 단락은 입산을 열두 지파 중의 하나가 아닌, 단지 베들레헴 사람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입다 이후에 등장하는 입산과 이어 등장한 소사사들의 가문이나 배경에 특별한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실 베들레헴은 유다의 베들레헴(삿 17:7, 9; 룻 1:2; 삼상 17:12)이나 베들레헴 에브라다(미 5:2)로 구분되어 표기되었던 것으로 볼 때, 본 단락의 베들레헴은 아마도 스불론 지파에 있던 같은 이름의 소도시로 보입니다(수 19:15). 입산이 사사로 있으며 했던 일 중에 성경에 기록된 것은 많은 여인으로부터 자식 60명을 낳아 타국으로 시집보내고 또한 타국의 여인을 며느리로 맞이한 것뿐이었습니다. 아마도 자식들의 혼인으로 타국과 정치적 동맹을 맺은 듯합니다. 여기에는 입산의 정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요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같은 길을 걷는 두 사사들(11-15) 엘론과 압돈에게서도 뚜렷한 신앙적 행적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은 평화의 기간을 영적 충전과 성숙의 기회로 삼지 못하고 오직 세상과 친밀해지고 세상에 빠져 사는 일로 시간을 허비해 버린 것입니다. 엘론의 생애는 짧은 두 절로 축약되어 있지만 실상 그는 10년의 기간 동안 사사로 지냈습니다. 압돈은 그보다 짧은 기간을 다스렸지만, 하나님이 그를 더 비중 있게 대하시는 것을 볼 때 성도의 삶은 양보다 질로 평가받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압돈에게는 아들 사십과 손자 삼십이 있었으며 그들이 모두 어린 나귀를 탈 만큼 그가 부유했다는 사실만을 알려줍니다. 영적 권위보다는 물질적인 풍요와 세속적인 가치를 드러내는 소사사들의 모습 속에서 영적으로 어두워 가는 이스라엘의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도 육적인 그리스도인을 넘어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고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적용: 세속적인 풍요가 생의 중요한 목적이 되어 버린 이 시대에, 당신은 하나님과 삶 앞에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인 당신 삶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인정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칭찬입니까?
저 혼자 있을 때 마음속에 있는 저와 겉에 있는 제가 사랑을 나눕니다. 둘이 있는 한, 공동체가 있는 한, 하나님과 피조물이 있는 한,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이 있는 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매어주고 우리 모두를 매어주십니다. 뭐로 매어주냐 하면 사랑으로 매여주십니다. 사랑으로 삽시다. 사랑으로 살아야 진실로 안식하는 날 행복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 설 교 >
여러 사사들
삿 12장 8~15절 / 채규현목사
우리가 사사기를 읽을 때 대충 보면 비슷한 이야기가 계속 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은혜 또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가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하나님의 뜻과 또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시는 면들이 나오는데,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살았던 세 명의 사사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입산, 엘론과 압돈이라는 사사기 있었는데, 몇 년씩 사사를 지내고 아이를 낳고 죽었더라…, 계속해서 그런 싸이클이 됩니다. 바로 이 대목을 통해서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좀 더 많은 내용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고 간단하게 나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역시 인간은 어차피 왔다가 가고, 왔다가 가고…, 잠시잠깐 반짝이는 반딧불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 사사를 세우시고, 또 세우시고, 그 다음을 예비하시는 분은 역시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천지만물을 주관하고 계시고, 거기에 인간은 오히려 조연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이러한 모든 삶의 구조 속에서 하나님이 주인 되심, 하나님이 왕 되심, 하나님이 진정한 우리의 인도자 되심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 내용들에 대해서 여기서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입산과 압돈에 대해서 자식 이야기가 나옵니다. 입산은 자녀가 전부 몇 명입니까? 아들 30, 딸 30입니다. 전부 60명이고, 압돈은 자녀가 몇 명입니까? 아들만 40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손주도 손자만 30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훨씬 그보다 숫자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좀 더 넓은 문맥 속에서 보면 참 아이러니컬한 면이 있어요. 바로 그 앞 이야기에 입다가 나옵니다. 입다에게 있어 가장 큰 슬픔이 무엇입니까? 딸을 잃어버렸는데, 그게 외동딸이에요. 어떻게 하나님은 딸이 하나밖에 없는 그 집안의 딸은 죽는 것을 허락하시고 자식이 60명, 70명 이렇게 있는 집안에는 그런 일이 없을까,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 “하나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묻지 않겠어요? 더군다나 입다가 그 딸 하나를 어차피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 앞에 또 하나의 사사가 나옵니다. 10장 앞에 보면 야엘이라는 사사가 나오는데, 그 야엘이라는 사사도 자녀가 30명이예요. 앞 뒤로 수많은 사사들은 전부 수십 명씩 자녀를 두었는데 입다에게는 오직 외동딸 하나 있었는데, 그 외동딸을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어떤 마음이 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겠죠?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어떤 집은 자식이 일곱이 있는데 하나 더 생겼어요. 어느 집은 그렇게 자녀를 갖기를 원하는데 자녀가 없는 집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러실까요? 하나님께 그런 질문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느 집은 아들이 꼭 있어야 하는데 딸, 딸, 딸…, 낳는 집도 있어요. 반대로 요즘은 딸이 없는 집은 참 불쌍한 집이 되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거기서 유학생들이 결혼하고 출산하게 되면 98% 장모님이 산바라지 하러 오십니다. 시어머니가 오신 적이 없어요. 물론 수고하고 힘도 들지만 딸이 없는 집은 미국 올 일도 없더라구요. 요즘에 점점 더 딸이 좋다고 느낍니다. 자라면서 엄마하고 친구도 되어주고, 또 아빠의 마음을 녹여주는 것은 무뚝뚝한 아들들이 아닙니다. 애교스런 딸들입니다. 그렇게 딸이 좋은데, 어느 집은 그렇게 딸을 원해도 아들, 아들, 아들…, 낳는 집이 있어요. 그럴 때 과연 하나님이 왜 그러실까, 공평하신 하나님이신데 누구에게는 딸만 주고 누구에게는 아들만 주고, 좀 섞어서 주시면 좋겠는데…, 또 필요한 집에는 안 주시고, 필요 없다는 집은 더 주시고…, 왜 그러실까? 이게 자식 문제뿐만 아니고 우리 인생길의 여러 가지 문제도 그러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당시 베들레헴에서 어린 아이들이 수없이 많이 죽었습니다. 헤롯왕이 죽였죠? 도대체 그 아이들은 왜 죽었을까요?
낳자마자 얼마 되지도 않아서요. 그 아이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길래….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악하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 죽는 날까지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주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는데 어느 날 일찍 하나님께서 데려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러실까요? 또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왕이 야고보를 죽입니다. 그런데 그 야고보를 죽이는 것을 백성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니까 그 일을 계속하려고 베드로를 잡아 또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그를 풀어줍니다. 성경의 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야고보는 죽게 내버려 두시고 베드로는 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왜 그러실까요? 여러분은 그 답을 아십니까? 저도 답은 모릅니다. 그런 비근한 예가 있는 것뿐만 아니고, 우리 인생길의 가는 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 한번 질문해 보십시오. “하나님,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거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질문할 때 하나님께서 대답하실 의무도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니까요. 유명한 부흥사로 D. L. 무디(Dwight Lyman Moody)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누구보다도 정말 열정적인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증거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그가 기도하는 것을 엿본 사람이 있었어요. 그리고 놀랬습니다. 어떻게 기도했냐하면, 무디가 교회에서 혼자 앉아서 큰 소리를 내며 기도합니다. 반복해서 딱 두 문장으로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계시고, 이 작은 나는 이 낮은 이 땅에 있고,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계시고, 이 작은 나는 이 낮은 이 땅에 있고….” 이것만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연약하고 피조물이고 어찌할 수 없는 이 땅에 사는 나와의 그 극명한 차이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은 거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인생길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비록 우리가 인생길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불공평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라면 반드시 이 일은 이루어주셔야 하고, 하나님이라면 반드시 이 일은 막아주셔야 되는데 그러한 일들이 다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언뜻 본 영화중에 “브루스 올마이티(Bruce Almighty)” 라는 영화가 있어요. 이 영화는 미국의 버팔로라는, 나이아가로 폭포 바로 옆에 있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그 스토리가 참 재미있었어요. 그 버팔로라는 도시에 브루스라는 한량이 살았습니다. 능력도 없고, 삶에 의욕도 없고, 계획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 자기 애인 그레이스라는 여인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좀 잘 해보려고 하는데, 그레이스가 보기에 이 브루스라는 남자는 도대체 소망이 없는 남자에요. 그런 남자한테 잘못 시집가면 일생 고생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는 좋아하지만 함께 하지 못하는 그 뭔가가 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어찌하다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셨어요. 버팔로 시에 일정한 구역을 정해주고 “이 안에서는 네가 하나님 노릇을 해 봐라.” 그래서 그가 브루스 올마이티(Bruce Almighty)-전능자 브루스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모든 능력이 있으니까 신기해서 막 써보는 거예요. 그런데 꼭 유리겔라 같은 그런 것만 써보는 겁니다. 수프를 홍해 바다처럼 반으로 갈라보기도 하고 온갖 기괴, 미묘한 일들을 하면서 기분 좋아해요. 그런데 그가 하나님 일을 하는데 한 가지 해야 할 일은 그 구역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는 일이예요. 그래서 아직 응답이 안 된 기도 제목들을 보니까 수백만 가지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파일박스에 넣어보려 하니까 온 방안에 기도 파일박스가 꽉 차서 우직일 수 없게 되고, 포스트잇에 붙여보려 했더니 방안에 포스트잇이 가득 붙여지고 자기 몸에까지 다 붙어버리는 거예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다가 컴퓨터 파일로 만들어놓고 하루 종일 기도응답을 했어요. 그리고 얼마 남았나 봤더니 더 많이 늘어났어요. 그래서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할 수없이 모든 기도에 몽땅 “Yes” 했어요. 기도가 다 응답됐는데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면, 미국의 유명한 복권에 바로 그 지역 사람만 수천 명이 1등이 된 거예요. 온 사람들이 파티를 하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한 가지 못하는 게 있어요. 하나님이 제한을 두었는데, 자기 마음대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어요. 사람의 마음은 자유의지에요. 하나님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듯이 똑같이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의 오직 유일한 목적은 자기 애인인 그레이스를 차지하고 함께 사는 것인데, 이게 잘 안 되는 겁니다. 아무리 별짓을 다해도 잘 안돼요. 오히려 문제만 많이 일으킵니다. 하루는 복권에 당첨됐다고 축제했는데 그 다음날 발표된 것이 1등 당첨자가 너무 많아서 1인당 2만원도 안 되는 17불씩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졸지에 온 도시에 폭동이 일어나버렸어요. 온 도시가 다 뒤죽박죽이 되고 기도를 다 들어주니까 온갖 이상한 일들이 막 벌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다시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나는 오직 그레이스와 같이 사는 게 소원인데 아무것도 안 됩니다. 하나님, 이거 다시 가져가십시오.” 하고 기도하는데 갑자기 큰 트럭이 덮쳐서 죽습니다. 그리고는 천국에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하나님이 묻습니다.
“그래, 네가 하나님 노릇 해보니까 어때?” “아이고, 나는 할 게 아닙니다.” 그러자 거기서 하나님이 하는 말이, 사람들은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자기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엉뚱한 것만 구하고 산다는 겁니다. 그리고 “너는 원하는 게 뭐냐?” 브루스에게 질문하자, 그가 갑자기 거룩한 몸짓을 하더니 “온 세계가 평화롭게 되기를 원하고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하는 겁니다. “야, 그것은 미스월드나 미스유니버스가 하는 이야기고, 네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봐라.” 그러자 브루스가 잠깐 생각하더니, 자기는 지금 죽은 상태이니까 “내가 제일 원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그레이스가 정말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고 이야기해요. 거기서 하나님이 “그래? 그 기도는 내가 들어주지.” 하고 가슴을 팡 칩니다. 그래서 깜짝 깜짝 놀랬는데 알고 보니까 죽은 자기를 소생수술 하느라 가슴을 팡팡 친 겁니다. 그리고 깨어났어요. 그런데 부르스가 병원에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애인이었던 그레이스가 찾아와서, 다시 그 사랑을 회복한다는 내용이에요. 그러면서 그 때 그 브루스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하는 말은 “네가 정말 기적을 일으키길 원하느냐? 진정한 기적은 접시에 있는 수프를 반으로 가르는 게 아니라 네가 낮아지고 섬기면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또 원래 이 사람이 방송국에서 아주 낮은 자리에 있던 방송국 직원이었습니다. 자기가 전능자로서 막 일을 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을 다 제치고 자기가 앵커가 됐어요. 그런데 그것을 다 느끼고 나서는 가서 원래 앵커 자리에 올라야 할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 자리를 돌려주고, 자기는 원래 있던 자기 자리에 가서 헌혈 운동을 재미있게 하면서 그 속에서 나름대로의 기적을 만들어 갑니다. 거기서 또 하나 주는 메시지는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게 뭐냐는 겁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리고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보일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 브루스라는 사람이 고백하는 것이 “앞으로 나는 내 앞일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대로 작은 기적 하나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매일 매일을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하나님이 참된 안식과 행복을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영화지만 저는 그 대목 대목이 참 성경적이라고 느꼈어요.
여러분,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처럼 능력 있기를 원합니까? 내가 말하는 대로 전부 다 되기를 원합니까? 제가 전에 한번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다 응답되면 여러분은 정말 불행해진다고요. 만약에 어떤 부부가 부부싸움을 했는데 둘 다 믿는 사람이어서 화가 나니까 하나님께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저 사람 다리가 똑 부러지게 해 주세요.” 그래서 금방 앉은뱅이가 됐어요. 심지어는 만약에 “저 웬수,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죽었어요. 그 다음에는 어떡할 거예요? 우리 마음속에서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지도 못해요. 하나님이 기도 다 안 들어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나중에 후회할 우리의 욕망, 후회할 우리의 욕정, 후회할 우리의 바램…, 하나님은 안 들으신다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축복이에요. 거기 있는 말대로 정말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가장 원해야 할 것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구합니다. 그것을 인정합시다. 전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흉-좋은 일과 슬픈 일을 번갈아 주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내일 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내일 일을 알려고 좇아다니지 마십시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그게 다른 말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그 전능자 하나님께, 비록 내 인생길에서 수없이 많은 이해 못할 일들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증명이 되었습니다. 어디에서 증명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증명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그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증하셨습니다. 그것을 확인했으면 자질구레한 인생길에서 우리가 이해 못하는 것은 그냥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이렇게 살아갈 때에 진정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도하심이 여러분과 함께 할 줄을 믿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이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사들이 역시 인간으로서 연약하고 죄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모든 인간은 연약하고 죄가 많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연약하고 죄가 많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은, 저를 포함해서 누구든지 연약하고 죄가 많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 하나님은 리더도 세우시고 그렇게 하시지만, 연약하고 죄인인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여기에서도 바로 그런 면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사실 사사기 전체에 나오는 사사들, 다 연약한 면모가 있어요. 그런데 특별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앞의 사사들보다 뒤의 사사들이 더 연약한 면을 봅니다. 여기 나오는 세 사사들이 이 세상에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몇 년 동안 사사를 지냈더라 하는 이야기만 나오지, 그들이 사사로 지내면서 어떠한 일을 했다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모르지만 어쩌면 그들이 사사로 살아가는 그 기간 동안에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세상의 것으로 누리고, 즐기고, 권세를 휘두르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식 수만 봐도 이렇게 많은 수가 있으려면 부자가 아니면 안 되거든요. 아내를 많이 거느려야 합니다. 분명히 이 사람들은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위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지막은 “죽었더라.” 그 길로 갑니다. 인간으로서의 사사, 인간으로서의 지도자는 연약합니다. 우선 완전하지 못하니까 여러 가지 결점도 있을 수 있고, 좀 만족할만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오래가지 못해요. 결국은 죽습니다. 결국은 늙어지고요. 역시 인간 사사들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일이 뭡니까? 자식의 경우를 잘 보십시오. 그들이 한 일이란, 자식을 낳는데 수십 명씩 자식을 낳은 일만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 자식도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큰 자랑거리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자식이 많은 것은 그 집안의 복이었어요. 옛날부터 세계 어디를 가나 풍요의 신이 있다고 그랬죠? 그런데 그 풍요의 신에 대해서 바라는 것이 꼭 내 곡식이 많아지고 내가 키우는 소나 양이나 다른 육축들이 새끼를 많이 낳고, 그런 것만 풍요가 아니에요. 많은 자식을 갖기 위해서 풍요의 신 앞에서 간구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이 사람들은 자식이 수십 명 되니까 축복 중의 축복 아닙니까?
자식이 많아야 부자가 됩니다. 자식이 많아야 세력도 얻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그렇게 했으니까요. 얼마나 그들에게는 자랑거리였겠어요? 그런데 그 자랑거리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거리였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왕들에게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자식들이 몇 명이에요? 60명입니다. 분명히 이 60명이 한 어머니에게서 낳은 자식들은 아닐 것입니다. 수십 명의 여자를 두어서 낳았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눈에 띄게 금지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사들이 수없이 많은 자식들을 두었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식 많은 게 뭐가 죄인가요?” 그게 죄가 아닙니다. 아내를 여럿 두는 것도 죄일뿐더러-가정생활에 문제가 생기니까요. 그 다음에 이 당시 통치자들이 아내를 여럿 두는 것은 대부분 외국과의 정략결혼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아니하고 다른 외부의 세력을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라는 말입니다. 여기 입산을 보십시오. 아들 30명을 위해 며느리들을 전부 타국에서 데려왔습니다. 또 딸들을 전부 타국으로 시집보냈습니다. 이게 전부 정략결혼이에요. 하나님을 믿지 않음이 바로 이들의 결혼을 통해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가장 세상에서 자랑거리인 이 긍지가 오히려 그들에게는 올무가 되고 그들에게는 자기 잘못과 허물과 죄를 나타내는 것밖에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것으로 자랑스러워합니다. 내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내가 여러 가지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이 있는 것을 가지고 자랑스러워하고, 내가 아름다운 몸매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내가 수없이 많은 일들을 해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을 또한 자랑스러워하고, 무언가 그것에 대해서 긍지를 가지는데, 두렵건대 여러분이 자랑스러워하는 그 많은 것들이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여러분의 교만과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남과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죄 짓는 것에 도구가 되고 그 죄 짓는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것을 가지고 자랑스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가지고 자랑스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그 소유를 가지고 여러분이 자랑스러워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서 넘어지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오히려 자식 많음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고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당시 살아가면서 그토록 바란 것은 무엇이었겠어요? 그들에게 유일한 바램은 자기들에게 정말 좋은 리더, 좋은 사사가 있어서 평안하게 사는 겁니다. 지금도 각 나라에서 바라는 것은 좋은 대통령 뽑혀서 좋은 정치하고, 또 우리 시 같으면 좋은 시장님, 구청장님 많이 세워져서 우리가 평안하게 복된 삶 사는 것이 또한 우리의 바램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게 더 강했어요. 왜냐하면 거의 모든 권력이 그쪽에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그들의 사사가 어떻습니까? 그들 사사가 연약해요. 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그 만큼 못하는 거예요. 전부 다 인간 사사들은 부족하고 죄가 많은 면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그럴 때 그들의 마음에 뭐가 있겠어요? 간절히 “하나님, 좀 더 나은 사사를 주십시오. 하나님, 좀 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그러한 지도자를 주십시오.” 이러한 갈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갈망이 결국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마음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참되고 완전하고 진정한 사사가 되십니다.
가장 온전하신 왕이 되십니다. 그는 기묘자시요, 그는 평강의 왕이시요,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진정한 구원자이십니다. 모든 사사들은 죄를 지었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모든 사사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인간 사사들, 인간의 왕들은 다 죽어서 연약함을 드러냈지만, 예수님은 죽었으나 다시 부활하셔서 영원히 아버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 하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을 고대하고 바라는 그 갈망이 이 작은 구절에서도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누구도 믿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위임권세는 다 인정하고 그들을 따르고 순종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믿는 것은 여러분 가정의 가장도 아니요, 구역장이나 교구장이나 목사도 아니요, 이 나라의 대통령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오직 그 하나님 앞에 안식주심을 감사하고 오직 그 하나님 안에서만 살기를 다시 한번 다짐할 수 있는 주님의 참된 백성, 가장 복된 백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명을 잃으면...
사사기 12:8~15 / 고신일 감독
<목회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날을 구별하시고 예배를 명하신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눈과 귀와 마음 문을 열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보고 듣고 느끼게 하셔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복을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임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남은 날들도 평안케 하여 주옵소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기둥교회 모든 성도들의 가정과 일터에 … 모든 삶의 현장과 상황에 … 때마다 일마다 …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우리와 함께 예배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객지에, 외국에, 군대에, 병상에 있는 성도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인터넷과 휴대전화로 예배에 동참하는 성도들도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어디서 살든지 감사와 찬양, 기쁨이 넘치게 삶을, 일을, 몸을 붙들어 주옵소서. 부족한 종이 말씀을 전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말씀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치료와 회복의 역사를 믿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평안하십니까? ‘덥다 덥다’하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여름은 당연히 더운 계절입니다.
옆의 분에게 “여름이라 덥습니다”라고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더운 여름에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가 어디 일 것 같습니까?
한 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 162개국 중 ‘아이슬란드’가 가장 평화로운 나라에 선정되었습니다.
아이슬란드는 유럽 서북부, 노르웨이 서쪽에 있고 … 면적은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인구는 30만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입니다.
조사의 기준은 여러 가지입니다. 국내 및 국제분쟁, 사회 안전, 치안, 군비확장, 폭력범죄의 정도, 전쟁 사상자, 잠재적인 테러 공격 위험 … 등 23개 지표에 대해 1~5점을 매겨 산출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몇 위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나라는 47위입니다. 북한은 152위, 최하위는 아프가니스탄이었습니다. <2013.6.11. 연합뉴스 기사, 참조>
그래도 우리는 1위는 아니지만 47위에 해당하는 평화로운 나라에 살고 있으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잘 살고 남북이 통일이 되면 1위가 될 것입니다. 아이슬란드가 가장 평화로운 나라라고 해도 우리가 나중에 가게 될 하늘나라보다 평화롭지는 못할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 있지만 하늘나라의 평화를 누리는 방법은 ‘주 예수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살든지 주 예수와 동행하면 세상이 줄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을 누리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평안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공의 조건
나폴레옹 힐(Napoleon Hill, 1883~1907)은 인간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한 학자입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성공을 조사해 ‘성공의 법칙(The law of success, 1928)’이라는 책을 발표했습니다. 그 책에 따르면 전 세계 위대한 지도자들과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답니다.
성공한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자기가 꼭 이루기 원하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목표를 이루기 위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목표 사이에 끼어들어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점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목표가 있습니까? 그 목표가 있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십니까? 그리고 목표를 이루어 가는데 방해가 되는 습관, 친구, 주변의 조건들을 과감히 떼어내십니까? 내가 어떤 일을 이루어야 하는데 친구들이 문제라고 생각된다면 과감히 친구들을 멀리하느냐 말입니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목표에 대한 열정이 있고, 걸림돌로 방해가 되는 것들을 배제할 수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목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 14)
바울은 예수님께 붙들린 삶을 살길 원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는 일평생 복음 전도라는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구약 성경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들에게도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진 이유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의 침입과 지배를 받아 고통 중에 있을 때 이스라엘을 구원해 해내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평안이 없던 이스라엘에 … 평안을 주는 것이 사사들의 임무였습니다.
때문에 여러 사사들에 관한 사사기의 기록은 대개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 그 땅이 … 평온하였더라”(삿 3:30, 5:31, 8:28) 기드온과 그 이전의 사사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그 땅이 … 평온하였더라”는 평가가 내려집니다. 그렇듯 … 사사로 지냈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이 평온하도록 만드는 것 … 그것이 사사들에게 부여된 사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땅이 … 평온하였더라”는 표현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다가 그 악의 댓가로 고통을 받고 고통이 너무 심해지면 회개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또 새지도자를 세우셔서 그 땅을 평안케 하셨습니다.
곧 다시 평안을 찾던 이스라엘에 언젠가부터 평온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세 명의 사사가 등장합니다. 「입산」과 「엘론」「압돈」이 그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애를 기록한 말씀에는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기록도 없고,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는 기록도 없습니다. 대신에 지금까지의 다른 사사들과는 다른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본문 12장 9절을 보면 입산에게는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명이 있었는데 자녀들이 모두 이방 민족과 혼인했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7장 3절과 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방 민족과의 혼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신 7:3-4)
그럼에도 입산은 그 자녀들을 모두 이방 민족과 혼인시켰습니다. 입산이 이와 같이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자녀들의 결혼을 통해 이웃 민족과 정략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였습니다. 분쟁이 가능한 이웃 민족과 사돈이 되면 싸울 일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의 이웃민족과 정략결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엘론에 대해서는 그가 십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아얄론에 장사되었다는 기록만 남아있습니다. 압돈 역시 자녀들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 사십 명 … 손자 삼십 명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 나귀를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자녀가 많았다는 것은 아내가 한 사람이 아닌 … 여럿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아내가 여럿 있었다면 그만큼 많은 재산이 있었을 것입니다.
압돈의 자녀들이 나귀를 타고 다녔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풍족한 생활을 누렸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사사들은 하나님께서 주실 평안을 찾고자 일했던 사사들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평안을 누리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 『사사기 룻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 2009), p. 322. 참조>
사명을 위해 사는 사람 세상에는 욕심을 위해 사는 사람과 사명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사명(使命)은 ‘맡겨진 임무’, ‘사신이나 사절이 받은 명령’을 말합니다.
욕심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신의 야망을 먼저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명을 위해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욕심을 위해 사십니까? 아니면 사명을 이루기 위해 사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의 목적을 물어보면 부자 되는 것, 성공하는 것,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 그래서 이름을 남기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목적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 / 무엇을 위한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 자신을 위해 부자가 되려하고
- 자신을 위해 성공하려고 하고
- 자신을 위해 명예를 얻으려한다면
그 사람은 욕심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부자가 되려 하고 -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성공하려 하며, - 모든 목적의 끝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사명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사명을 이루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하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사명이 있다면 … 세상의 욕심을 함께 끌어안고 살 수 없습니다. 욕심을 끌어안고는 사명을 이루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다하더라도 사명의 목표를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세 사람은 ‘사사’로 세우심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의 평안’이라는 사명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명을 이루지 못한 것이 실패 중에 가장 큰 실패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온전한 ‘평안’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7절에 “…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엡 2:17)했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약속의 백성이 아닙니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2:12)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엡2:13) 하늘백성이 되었고 영원히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치루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늘의 시민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엡2:19)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사명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되었으니 예수 믿는 우리도 예수님께서 명하신 사명을 성취해 가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활하신 후에 “…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 28:19~20)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또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세상에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합니다. -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명을 완수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배를 드리고 난 후 누구를 만나실 것입니까? 어디를 가십니까? 누구를 만나든지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으로 만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그리스도인임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사명을 받은 사람은 힘이 들던지, 어렵든지 손해가 나는 것 같아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명을 성취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는 큰 빌딩이나 공공기관, 거리에 사람의 이름을 붙입니다. 뉴욕에 있는 공항은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 이름을 따서 JFK 공항이고, LA 공항은 ‘톰 브래들리(Tom Bradley)’공항입니다. 미국 워싱턴 DC에는 유명 인사의 이름을 딴 정부 건물들이 많습니다. 그 중 유일하게 현직 공무원의 이름으로 헌정된 건물이 있습니다. ‘존 키니(John Keaney)’라는 사람의 이름을 딴 ‘존 키니 빌딩’입니다. 올해 90세인 존 키니는 연방정부 사상 최고령 검사입니다. 그가 법무부에 있는 동안 대통령 12명과 법무장관 27명이 바뀌었습니다. 대형 로펌에 소속되어 변호사로 일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키니의 연봉은 1/100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연방정부 검사로만 남아있었습니다.
언젠가 키니 검사는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좋은 자리를 다 포기하고 이 자리에 50년이 넘도록 계십니까?” 존 키니는 대답했습니다. “법무부 검사의 위대한 점은 옳은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이 일을 할 것입니다.” 존 키니는 더 많은 연봉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더 큰 명예와 현실적인 편리를 물리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옳은 일을 한다’는 사명에 충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에게 가장 즐거운 일은 부유해지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아닙니다. 사명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를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2~13절에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 했습니다.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우리들도 바울 같은 고백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만 관심을 두고 산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 어떻게 생각하느냐 / 어떻게 말하느냐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주일이 되어 교회 가는 여러분을 보고 ‘참 미쳤다. 이 더운데 교회에 가냐’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신경 쓰이고, 교회에 가는 것을 주저하십니까?
다음 주에 아프리카 모잠비크에 <신징기르 기둥교회> 봉헌식을 위해 가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재미있고, 좋은 곳이 참 많습니다. 이 더운 여름에 놀러 갈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저는 아프리카에 갑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든지 다른 사람이 왜 거기에 가느냐고 해도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에 갔다 올 것만 생각하면 아득하지만 아이들에게 나눠 줄 목걸이 볼펜을 준비했습니다. 그 아이들이 끈 달린 볼펜을 목에 매주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재미로 하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생각하는지, 말하는지 신경쓰는 것 자체가 사명이 없는 것입니다. 사명을 완성하고 있느냐의 여부에만 집중을 하면 됩니다. 여러분 모두 사명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도전과 변화를 위한 사명
미국의 생명교회(Life Church) 담임자이자이며, 미국 최초로 multi-site church를 시작한 크레이그 그로쉘(Craig Groeschel) 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인생의 목표를 찾기 위해 두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 첫째 질문은, <무엇이 정말 나를 화나게 만드는가> 입니다.
운전할 때 끼어드는 사람을 보거나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을 보고 화를 내는 것과 같은 개인적인 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정의감과 도덕심에 불을 지르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닌 돈에만 눈이 먼 장사꾼들을 보고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소중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외식과 위선을 보고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실함의 가치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 절대적인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워서 화가 나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들을 돕는 것이 여러분의 비전이고, 사명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전에 제가 아프리카 우간다의 솔티라는 마을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가서 본 아이들은 먹지 못해 배만 동그랗게 불룩 솟아있고 팔과 다리는 앙상하게 말라 있고 도랑에 엎드려 물을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의 사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습니까?’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살리고 싶다는 마음에 돌아와서 시작한 일이 ‘생명살리기 운동’입니다. 여러분이 한 달에 3만원씩 후원하고 있는 그 일이 한 아이를 살리는 일입니다. 그런 답답함과 안타까움과 분노가 느껴진다면 그것이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화가 나며 안타까움을 느끼십니까? 무엇을 보고 거룩한 분노가 느껴지십니까?
‣ 둘째 질문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좋은 곳을 여행할 때 개인적으로 느끼는 만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관계나 활동에서 진정한 의미와 성취감을 느끼느냐는 물음입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느낄 때가 언제이십니까? 남을 돕는 일이 즐거우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섬김의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크레이그 그로쉘, <카존>, 두란노, pp.52-54. 참조>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겠다는 마음에 복음을 전하고, 변화되는 사람들을 보며 기쁨을 느낀다면 여러분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명인 것입니다. 무엇에 화가 나고 안타까우십니까? 무엇에 기쁨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십니까? 어떤 때는 내 마음에 답답하고 분노가 느껴진 그것이 사업의 아이템이 되기도 하고 성공의 비결이 되기도 합니다.
1951년 미국 멤피스에 살던 케몬스 윌슨은 가족들을 이끌고 워싱턴에 휴가를 갔습니다. 그러나 워싱턴의 형편없는 숙박시설 때문에 그의 휴가는 즐겁지 않았습니다. 요금도 비쌌고, 더군다나 불친절하고 지저분하기까지 했습니다. 호텔에 식당도 없어서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숙소에 멀리까지 가야만 했습니다.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억지로 참으며 여행을 마쳤습니다. 그 후 윌슨은 미국 전역에 좋은 숙박시설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것을 사업 아이템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누구나 안심하고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호텔 400개를 짓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부푼 가슴을 안고 그는 그 계획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첫 번째 호텔의 문을 열었을 때 그는 ‘홀리데이 인(Holyday Inn)’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그가 처음 생각한 400개의 호텔은 말도 안되는 것 같았지만 1964년에 500개, 1968년에는 1,000개, 1972년부터는 전 세계에 3일에 하나씩 새로운 호텔이 들어섰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할 때 답답하십니까? 안타깝고 분노가 생깁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할 때 기쁨이 있습니까? 무엇을 생각할 때 가슴이 설레고 뛰십니까?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분노와 행복으로 가슴 뛰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골1:16)
그러므로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목표와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이 무엇인지 분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니, 이 주간에 여러분이 해야 하는 일들은 무엇을 위한 일입니까? 좀 더 부지런하게 열심히 뛰어서 물질과 유익을 얻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몇몇 사사들처럼 단지 식구들 배부르게 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적입니까?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세 명의 사사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 그리스도의 예수의 이름과 사랑을 전하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사명을 잃으면 입산, 엘론, 압돈 같은 존재감 없는 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 6개월을 살았습니다. 여러분의 반년의 삶이 어떠셨습니까? 힘드셨습니까? 어려웠습니까?
그래도, 그럼에도 … 여기까지 오늘까지 살아온 것,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주일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그리고 기둥교회 창립42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맥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3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 반년을 / 봄을 감사하는 때입니다. 여러분을 지난 반년을 원망과 탄식으로 묻어버리시렵니까? 아니면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고 감사하시렵니까? 그리고 감사함으로 남은 6개월을 다시 시작하시렵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어떤 것을 품고 계십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담긴 진실함과 감사,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가슴 뜀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남은 6개월을 더 크게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지난 6개월을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보세요. 그리고 남은 6개월을 정말 가슴뜀으로 살겠다는 결단을 하면 하나님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여러분과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 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임에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오게 하셨으니 남은 날들의 삶이 더 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는 삶이 되기 위하여 가슴 뛰는 목표를 가지고 살게 하시고 그 목표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 살게 하실 뿐 아니라 목표를 이루는 일에 방해가 되는 어떤 것도 제거하는 용단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작은 사사들-입산, 엘론, 압돈
삿 12:8-15
본문은 작은 사사 세 사람의 짧은 통치 경력을 더듬어 봅니다. 그 이름은 입산과 엘론과 압돈입니다. 입산은 7년간, 엘론은 10년, 압돈은 8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잠 28:2에 “ 나라는 죄가 있다면 주관자가 많아진다 ” 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선한 사람들이 채 일을 해내기도 전에 물러나게 됩니다.
1. 베들레헴 사람 입산 사사(8-10절) 입산은 입다 뒤의 사사입니다. 베들레헴 사람으로 아들 30명, 딸 30명을 둔 큰 가족의 씨족의 장이였습니다. 유대 전설에는 입산은 바로 룻의 남편 인 보아스였다고 합니다. 입산이라는 이름은 성경 본문에 나타난 바가 없습니다. 그와 연결되어 있는 베들레헴은 갈델산 근처 므길도 북쪽으로 스불론에 있는 같은 이름의 성읍입니다. 입산이 대가족장이라는 말은 그가 부자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례적인 본문, 공직이외 아무런 역사적 자료가 없습니다. 그는 60명의 자녀를 다 혼례할만한 재력이 있는 자로 베들레헴을 번성 시켰으며 그는 장수하였고 그의 영향력으로 베들레헴 성읍은 하늘의 별과 같은 영적인 씨앗을 배출하기로 되어 있는 곳으로, 베들레헴을 하나님의 도성으로 가꾼 것입니다. 그는 아들 30명의 혼례를 위해 딸 30명을 타국으로 시집을 보내고, 또한 그 교환으로 타국에서 아들을 위해 여자30명을 데려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해주어야 할 일 세 가지가 있습니다다. (1) 아들로 하여금 율법을 읽을 수 있도록 글을 가르쳐 주었고, (2) 아들에게 일거리를 마련해 주어야 하고, (3) 아내를 구해 주어야 합니다. 입산의 가족과 그의 바로 윗 사사인 입다 가족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 가 있습니까 입산은 60명의 자식을 모두 결혼시켰으나, 입다는 단 하나의 무남독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딸을 결혼도 시키지 못하다가 아버지 입다 의 경솔한 서원으로 독녀 딸을 죽여 번제로 드렸던 것 아닙니까 입산은 번영된 그의 가족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돌렸던 것입니다. 입산은 죽어서 베들레헴에 장사했습니다.
2. 스불론의 사람 엘론 사사(11-12절) 스불론 족장으로 작은 사사 중 하나로 입산 사사의 후계자입니다. 엘론 이라는 말은 ‘ 데레빈 나무 ’ 라는 뜻입니다. 10년간 이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성경에 엘론은 1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는 기록외는 역사 자료가 없습니다. 엘론 사사가 통치시작하면서 그 때부터 블레셋 사람들의 40년간의 속박이 이미 시작되었고 그 때 즈음에 삼손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엘론은 이스라엘 북쪽에서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가끔 국경을 넘겨다 보며 침입할 기회를 노렸을 것입니다.
3. 비라돈 사람, 압돈 사사(13-15절) 비라돈 세겜 서쪽 10km지점에 있으며 오늘에는 ‘ 페라하타 ’ 라고 부리는 지점입니다. 압돈이라는 뜻은 ‘ 하인 ’ 이라는 뜻입니다. 에브라임 씨족장으로 삼손의 바로 선우인 사사로서 작은 사사로서는 마지막 사사입니다. 압돈의 자녀의 수와 나귀의 수는 그의 부의 정도를 말합니다. 압돈은 그 이름이 성경 다른 곳에도 나타납니다(대상 8:23). 그는 대상 27:14에 의하면 에브라임에 있었던 비라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의 가족의 크기와 아들과 손자들이 재산의 척도가 됩니다. 압돈으로 인해서 여호수아 시대 이래로 별 주목을 끌지 못하던 에브라임 사람들이 명성을 다시 얻기 시작했습니다. 아비멜렉으로 인해서 세겜 사람들에게 에브라임 지파에 상당한 수치가 되었습니다. 압돈은 많은 후손들로도 유명 했습니다. 그는 아들 40명, 손자 30명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들이 다 성장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관직에서 일하는 자로서, 혹은 뛰여난 인물로서 인정을 받아 모두 어린 나귀 70마리를 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압돈 시대부터 블래셋 군사가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기에 평화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압돈은 국가 안보보다는 자신의 영달과 자기 이름이 후대에 길이 남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여, 전례대로 사사들 기념비를 세워 자기의 치세 업적만은 남기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초라하여 아무것도 기념비에 쓸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세속적인 영광을 높이 평가하려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자만은 헛된 것 이었습니다 다. 그들의 명예는 먼지처럼 사라지고 그들은 모두 평범하게 죽었습니다. 세 사사는 이름만의 사사였고, 초라한 발자취만 남겼을 뿐이였습니다.
죄의 반복은 하나님의 축복을 약화시킵니다
삿 12:8-15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중북부 지역에서 활약한 9, 10, 11번째 사사 곧 ‘입산’과 ‘엘론’과 ‘압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 세 명의 사사는 그 행적에 대한 세세한 설명 없어 이름, 출신, 자손의 수, 매장지, 통치기간만 간략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사기에는 이들 외에도 이처럼 행적에 대한 세세한 설명 없이 간략한 이력만 나오는 사사가 ‘삼갈’, ‘돌라’, ‘야일’이 더 있는데 이들 여섯 명의 사사를 편의상 ‘소 사사’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이 이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소 사사’들의 업적이 ‘대 사사’들에 비해 보잘 것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다만 그 행적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느냐의 여부에 따른 구분일 뿐입니다.
1. 먼저, 세 명의 사사들은 25년 간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다스리던 25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평화가 계속되었습니다.
9절에 입산이 모두 60명의 자녀를 두고 다 결혼을 시켰습니다.
이것은 그때가 평화기였음을 시사해 줍니다.
또, 13절에 압돈의 70명의 아들과 손자들이 다 나귀를 탔다고 말씀합니다.
이 또한 그때가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기였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러나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그러한 평화기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타락으로 치닫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입산과 압돈이 각각 60명과 40명의 자녀를 둔 사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손이 많은 것은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많은 자녀를 두었다는 것은 많은 아내를 두었음을 뜻합니다.
입산과 압돈은 ‘일부일처’를 정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많은 처첩을 두는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평화기에 영적으로 나태해져 하나님의 명령에 소홀한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사사들이 이렇게 타락하였다는 것은 일반 백성들의 타락의 정도를 능히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들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모든 경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평화기를 선용하지 못하고 도리어 타락의 길로 달려갔습니다(13:1).
그리고 이러한 기록들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평화의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롭고 풍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그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풍요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성경속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영적, 도덕적으로 극심한 타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타락의 상태가 계속된다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환난과 시련보다는 평화를 바랍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평화는 타락을 부르기 쉽고 타락에 빠지게 되면 그 후에는 엄청난 고통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 역사가 증명해 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파수꾼인 우리는 이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러한 타락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영적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이 세대가 더 이상 타락의 길을 걷지 않도록 부지런히 복음을 외치는 선지자적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 이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이어지는 10절에 “입산이 죽으매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죽으매... 장사되었더라’ 라는 표현은 모든 사사들에게 사용하고 있는 공통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기드온 이전과 이후의 사사들에에 대한 기록 중에서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기드온 이전의 사사들의 죽음을 기록할 때에는 ‘그 땅이 ~동안 평온했다’는 표현과 함께 그들의 죽음을 기록한 반면, 기드온 이후의 사사들인 돌라, 야일, 입다, 엘론, 압돈, 삼손 등에 대해서는 단순히 그들의 죽음과 장사에 대한 사실만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 이전과 이후에 이스라엘 땅에 주어진 평화의 의미가 조금 달라졌음을 암시합니다.
그렇다고 기드온 이후 시대가 전혀 평화롭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기드온 이후 사사들이 통치할 때에도 이스라엘은 분명 평화를 누렸습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드온 이전과 이후의 평화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드온 이전에는 이스라엘에 평안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었던 반면 기드온 이후의 평화 시기에는 그저 어느 정도의 안정만 있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깨닫습니다. ‘계속되는 죄의 반복은 하나님의 축복을 약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속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들이 현실의 삶에서 점점 사라져 버리게 되고 종국에는 이전에 누리던 평안도 기쁨도 물질적 축복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죄를 지을지라도 회개하면 범죄한 이스라엘이 계속되는 범죄 속에서도 회개할 때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용서받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크고 놀라운 축복들은 점점 더 감하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든 죄를 멀리하고 반복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나의 믿음은 처음의 순수한 믿음을 그대로 잘 유지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변한 부분이 있다면 회개하고 돌이키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평온의 시간들을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기회로 삼지 않고 육체의 기회로 삼게 되면 어떠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옵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수를 교훈삼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시간들을 잘 선용하되 이 축복들이 커져 갈 수 있도록 선지자적인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사명에 더욱 힘쓰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