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다시 언니의 심장을 부숴 버려서..'
슬프게 눈물짓는 아이의 주위를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서 흘러들어 온 반짝이는
보랏빛 구체가 빙그레 돌고 있었고 아이는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자, 이리와.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아이의 말에 마치 알아듣기라도 하듯이 구체를 원을 그리며 빙그르르 돌더니 서서히 유리의 가슴에 내려앉았다.
.....
...
어두운 공간에 빛이 새어 나오는 단단한 철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걸음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피를 토해 내어서 붉게 물들인 하얀 원피스를 입고 허리를 넘어서던 검은 긴 생머리는 엉망으로 잘려서 헝클어져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또 내 꿈속인가?"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의 위로 보랏빛 구체가 마치 장난을 치듯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고
작은 아이의 발걸음 소리가 문득 유리의 궛가에 들렸다.
그리고 드디어 단단하게 닫힌 철문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유리의 옷자락을 붙잡는 어린 아이가 있었다.
'잘 생각해 보고서 그 문을 여는 게 좋을 거야, 신유리.'
"......누구?"
고개를 돌리는 유리의 눈에 들어 온 건 다른 아닌 자그마한 아이였다.
소중하다는 듯이 분홍색 허름한 토끼인형을 안고서 까만 검은 단발머리에 단정한
어린이용 정장을 입은 아이는 웃으며 유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함부로 그 문을 열었다가는 다시는 귀문왕(鬼門王) '강은민'에게 돌아갈 수 없을 거야. 그래도 괜찮아?'
"...은민이에게 돌아갈 수 없다고?"
'그래, 이 문은 당신 '서란(徐爛)이 아닌 '신유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원래 기억이 잠들어 있는 곳이니까.'
아이 아니 유리의 말에 그녀는 그제야 자신을 돌아봤다.
그러자 어느새 검은 머리를 발목까지 길게 기르고 투명하리만큼 시린 하얀 피부에 은빛 천으로
곱게 짠 예복을 입은 자신이 바로 서란(徐爛)이 있었다.
.......
...나는 신유리이기 전에 서란(徐爛)이었지.
그런데.. 어째서 내가 이런 모습으로? 그리고 이 꼬마가 바로 나 신유리라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제야 돌아보는 그녀에 자신이 '신유리'라고 밝힌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말해왔다.
'선택해, 지금의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한가지뿐이야. 영원히 어린 시절의 과거를 묻어 두고 살 것인지.
아니면 사랑하는 귀문왕(鬼門王) 강은민을 잊고 기억을 되찾을 것인지 말이야.'
".....선택? 하지만.. 은민이를 잊어버리면 나는.."
이제서 은민이를 잊어 버리면.. 내게 이제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
하지만.. 그래도 왠지 지금 되돌아가면 평생을 후회하고 살 것 같아.
망설이며 걸음을 옮기지도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꼬마 유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택했어?'
"........."
'문을 열 거야? 평생 잊고 살아도 후회할지 모르는 진짜 신유리의 과거를?'
"그래, 강은민을 잊는다고 해도 내 과거 역시 중요해. 나는 이제 신유리가 아닌 서란(徐爛) 이니까."
'그래, 그렇다면 절대로 후회지 마. 넌 서란(徐爛)이기 이전에 현재의 삶에서는 신유리야.'
그녀가 아니 유리가 문을 열기로 선택하자, '삐걱' 소리를 내면서 철문이 열리고 환한 빛이 새어 나오는
그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아이는 빙그레 웃으며 모습이 속삭이듯 말했다.
'신유리.. 너는 나와 같이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군아.
사랑하는 내 딸아.. 그래, 기억이 돌아와 그 녀석을 만나도 잊지 말렴.
나와 네 아버지는 서로 사랑한 것도 너를 낳은 것도 후회하지 않았다는 걸.
단지 너를 이렇게 혼자 버려두고 먼저 가서 미안하군아. 널 사랑해주지 못해서..'
'스르륵'
문 안의 밝은 빛 속의 터널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유리는 마지막 아이와도 같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다.
......
...
.....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길거리에 다정하게 걷는 부녀와도 같이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 보이는 어느 오누이가 있었다.
남자는 이제 겨우 20대 초반의 까만 머리를 단정하게 넘기고 정장을 입은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서 신기하다는 듯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쳐다보는 아이는 이제 겨우 열살 남짓
되었을 것 같은 여자아이로 곱게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땋아서 내리고 흰 리본이 묶여 있는 머리핀을 하고 있었다.
한참 남자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걸어가던 아이가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
"오라버니! 유현 오라버니!"
아이의 부름에 그제야 멍하니 걷기만 하던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아.."
"우리 지금 어디에 가는 거에요? 네?"
"........"
"어디에 가던지 나.. 오랜만에 오라버니랑 이렇게밖에 나와서 좋아요."
싱긋 웃으며 말하는 아이의 모습에 유현은 피식 웃으며 서서히 잡고 있던 손을 놓아 버리고서
그녀의 앞에 서서히 무릎을 끊어 눈을 마주치며 말해왔다.
"유리야.."
"네?"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가서 아버지 드릴 전과 좀 사 올 테니까."
"네, 빨리 갔다 오셔야 해요."
손을 놓아 버리는 그에 무언가 조금 불안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유리였지만, 그저 오빠를 향해서 웃어 보이고 있었다.
그런 동생의 미소에도 유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뒤돌아서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자신을 부르는 어린 동생의 목소리로 온기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유현 오라버니, 빨리 갔다 오셔야 해요.
저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게요."
...
.....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지. 그 사람과 나의 인연은..
그 후에 단 한 번도 날 찾으려도 하지 않았겠지.
아니, 일부러 집에서 멀리 나와서 나를 버린 사람이 날 찾을 리 없지.
오히려 찾았다면 죽이려고 날 찾았을지도 모르지.
키킥.. 아무리 피가 반밖에 썩이지 않은 남매라고 해도 당신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남일 뿐이야.
그렇지? 유현 오라버니?
......
.............
"으아악!!"
비명이 울려 퍼지는 어두운 방에는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에 앉아 있는 남자는 어딘가 넋이 나가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왜? 내 꿈에.. 그 아이가 나타나는 거지? 어째서.. 하.."
한숨과도 같은 헛웃음을 뺏어 내면서 그는 문득 침대 옆 탁상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는 몇 가지 사진이 놓여 있었다.
치우고 싶어도 아주 조금 마음속에 남아 있는 양심이라는 가책 때문에 없앨 수 없는 그 사진들.
한 사진은 그와 너무 닮은 나이 든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와 유리처럼 새까맣게 기른 검은 머리를 틀어 올려서
그가 선물했던 싸구려 나비 비녀로 고정하고 창백하리만큼 새하얀 얼굴로 남자를 향해 행복한 듯 웃어 보이는
투박한 흰 원피스에 배가 불러 있는 여자가 찍힌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또 다른 사진에는 아직 젊었을 때의 그와 아주 어려보이는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분홍색 토끼 인형을 안고서 웃고 있었다.
"..그래, 내가 선물해 준 인형을 안고서 좋아했었지.
내가 자기를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는 손을 뻗어서 액자를 들어 보였다.
아무것도 모른 체 해맑게 그렇게 자신을 오빠라 부르며 따르던 아이의 얼굴이 가득 담겨 있는 그 사진을..
하지만, 아주 조금 남아 있는 양심으로 그는 동생을 찾아 용서를 빌 용기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 네가 내 꿈에 나타난다는 건..
네 어미가 널 찾아 달라는 거겠지? 그 노망 난 영감이 아직도 유리 너를 찾고 있으니 말이야. 키킥.
이미 어딘가에서 죽어 있을지도 모르는 너를 말이야."
제발.. 돌아 오지말아라. 여기는 그때도 말했지만..
네가 있을 곳을 아니야. 유리야. 넌 처음부터 잘못 태어났던 거야.
내 아버지라는 그 사람과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여자 초린 아니 유련 사이에서 태어난 '신유리'
너는 내 동생이 아니야. 우리 신(神)가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 일 뿐이지.
눈물과도 같은 절망이 썩인 웃음을 흘리며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움직일 수는 없었다.
마치 이곳에 그녀가 나타난 듯 환각이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새로운 가족과 함께 아버지의 고국인 한국으로 떠나던 그날처럼 마치 흰 나비가 날아가는
듯한 수가 놓여 있는 아름다운 검은 비단의 차파오에 죽은 자와도 같은 새하얗다 못해서 창백한 얼굴의 그녀가..
'ㅇ....ㅇ..유...유현..'
".....또 뭘 원하는 거야!? 나한테!!"
'..유..유현.. 돌려줘.. 돌려줘.. 제..제발.. 내.. 아기..를... 돌... 돌려줘....'
그녀의 슬픈 중얼거림에 그의 유리와도 같은 새까만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고 그럴수록 그녀의
입가에는 슬며시 미소가 생겨나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에 죽어 버린 그녀가 아닌 것 같이..
'..왜...왜? 버린 거야? 내.. 아기를.. 피가 반밖에 섞이지 않았지만.. 내 아기는 ..너의 동생이였어..'
".....웃...웃기는 소리 하지 마! 집안에서 인정하지도 않은 그런 사생아 따위 내 동생이 아니야!
이 신(神)가의 당주는 나야! 그 영감이가 아니고 나라고! 유련!"
'...버렸어.. 네가 내 아기를! 나와 그의 사랑으로 태어난 그 아이를!'
비명과 같은 그녀의 울음소리에 유현은 드디어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잊고 싶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서 말이다. 그건 바로..
"너 유련이 아니지?"
'..그...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유련이야! 네 친구이자 새어머니였던 유련이라고!'
환각 속 그녀의 말에 유현은 우습다는 듯이 피식 웃어 보이며 천천히 자신이 유련이라고 주장하는 여자에게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말했다.
"웃기지 마. 그녀는 나를 유현이라고 부르지 않았어. 항상 현(晛)이라고 불렀지."
그래, 그녀는 나를 현이라고 불렀지. 마치 내게서 나의 아버지를 찾듯이 말이야.
그래서 당신이 미웠어. 죽을 만큼.. 그 아이도..
내가 아닌 내 아버지를 사랑해서 낳은 당신이 딸이자 누이동생이었던 그 아이가 죽을 만큼 싫었어.
당신을 사랑했던 만큼 말이야.
"그녀는 나를 유현이라고 부르지 않았어. 아버지와 같은 이름인 현(晛)자로만 나를 부르는 것을 좋아했지.
내 아버지를 그녀는 사랑했으니 말이야."
'...아..아니야.. 내가 바로 '양유련'이야!
네가 사랑하고 결국에는 너희 아버지 때문에 죽은 그녀란 말이야!'
그녀의 절규 섞인 웃음에도 그는 피식 웃어 보이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고 지금도 잊지 못하는
그녀는 이런 여자가 아니었다. 항상 몸이 약하고 창백한 얼굴에 귀신을 보는 이라 하여 모두가 멀리해도
항상 밝게 웃으며 살아가려는 이였다. 그래서 그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랑한다.
이미 자신만의 가정이 있지만 말이다.
그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모습을 한 환각에 소리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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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소설
퓨 전
귀문(鬼門)고등학교 4부(부제: 원령화) 62화
하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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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2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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