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사회의 이율배반(Antinomy) - 이환식(파리 8대학 한국연구원장)
1. 서론
역사는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를 ‘지식사회(Société de la connaissance)’로 기억할 것인가? 명쾌하고 합리적인 답변을 기대하면서 제기한 질문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유토피아의 전도사들이 변화를 화두로 날마다 쏟아내는 신조어의 홍수속에서 지식사회는 더 이상 낯선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고도의 논리적 추론과정이 요구되는 지적담론까지 ‘안방 스펙타클’로 전환하여 지배질서의 사회문화적 조건을 재생산하는 미디어의 역동성*주)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지식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인간해방의 본질적 의미가 어떠하든 자본권력에 충실한 미디어가 일방적으로 되풀이하는 지식사회의 형상은 경제적 신자유주의, 정치적 냉소주의, 사회-문화적 보수주의로 요약되는 야만이 지배하는 시장사회이다. 지식사회의 이러한 소모적 운명은 70년 대 후반 복지국가 모델의 위기와 더불어 시작된 신자유주의 보수혁명의 대장정과 분리하여 설명될 수 없다. 특히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가 몰고 온 반자본주의 운동의 회의적 전망은 자본에게 포스트-포드주의적 착취 수단과 전략을 거리낌없이 추진하는 결정적 동력이 되었다. 오늘날 자본이 세계적 규모로 견고하게 재구축한 전근대적 지배질서는 이렇듯 반자본주의 비판이 면제된 자본운동의 산물인 것이다. 하지만 상품가치가 지식사회의 지평를 지배한다는 사실이 주류담론과 다른 관점에서 지식사회를 규정하는 노력마저 질식시키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가 견고할수록 지배적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을 통해 지식사회의 본질에 접근하는 시도는 오히려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다. 미디어적 접근에 방치된 지식사회에 대한 분석적 비판적 접근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주) {{지식의 미디어화 경향은 사회적 이슈를 저널리즘 수준에서 여과하는 인터뷰나 텔레비전 토론에 잘 나타난다. 하지만 다양한 관점을 필요에 따라 조합하는 미디어 지식은 객관적 진실에 접근하는 연속과정으로서의 과학적 지식과는 거리가 있다. 인터뷰의 경우 미디어의 관점으로 취사선택하는 단절적 편집과정은 지식의 논리적 추론과정을 삭제함으로써 인터뷰 주체의 의도와 논리를 왜곡하는 경향이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미디어의 함정을 아는 지식인들은 논리적 추론을 단문으로 압축하는 숙련성(?)을 보이기도 한다. 미디어 지식의 가장 일반적 형태로서 흔히 저널리스트에 의해 진행되는 TV토론은 토론자에게 제한된 짧은 시간만을 할애하여 논증절차를 파편화함으로써 시청자는 문제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아무런 실질적 지식도 얻지 못한다. 토론에 임하는 대부분의 지식인들 역시 사회에 전달되어야 하는 지식보다는 그저 말하고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이다. 이러한 미디어의 지배경향이 일반화되면서 과학적 지식과 정보의 혼동도 일상화되고 있다.}}
프로그램화된 지식사회에 대한 비판은 시장의 물신에 종속된 지식생산으로 인하여 과학, 기술 및 일반적 지식의 발전이 사회활동 노동 레저 등 인간활동에 제공할 수 있는 진정한 잇점들이 왜곡, 상실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류의 문제해결 수단이 증대된 반면 사회는 점점 더 어둡고 불확실한 미래로 질주하고 있는 역설적 현실보다 광고적 담론으로 포장된 지식사회의 실체를 더 잘 묘사할 수 있는가? 시장의 물신에 무조건적 적응을 강요당하면서 항상적 ‘산업예비군’으로 전락된 노동현실보다 ‘생산적 복지’에 기반한 지식사회의 파괴적 특징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가? ‘대중대학’으로서 대학은 교육기능을 상실하고 단순히 지적노동력을 준비하는 집단으로 전락되고 ‘지식 생산처’로서 대학은 자본축적에 유용한 상품지식 생산에만 몰두함으로써 총체적으로 와해되고 있는 대학현실보다 ‘신지식인’이 구현하는 지식사회의 암울한 미래를 더 잘 적시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이 소위 무한축적논리의 포로가 된 자본이 생산의 합리화 과정을 통해 왜곡시킨 지식사회의 현실이다. 주지하는 바처럼 자본주의 생산은 사회적 필요와 무관한 잉여가치 창출이라는 특수한 논리에 지배된다. 이러한 목적은 구체적 수단을 왜곡한다. 즉 자본주의 생산은 사회의 생존조건보다 축적조건의 재생산을 우선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자본의 요구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회 구성원은 사회생산에서 철저하게 배제된다. 이윤논리에 지배되는 지식생산도 예외일 수는 없다. 지식생산의 특성에 비추어 인적자본은 절대적이지만 자본의 관점에서 본다면 단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면 의미가 있는 가변자본일 뿐이다. 따라서 자본은 잉여가치 생산의 필요를 넘어서는 노동의 자율성과 지적 교환활동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지식생산과정을 조직하고 관리하게 된다. 요컨대 인간을 자본의 필요에 따라 언제라도 대체할 수 있는 일회용 소모품으로 전락시켜 조율된 활동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푸코(M. Foucault)가 말하는 ‘예속지식(savoirs assujettis)’에 의존하는 이러한 축적운동은 자본을 필연적으로 모순에 빠지게 한다. 즉 자본은 점점 더 다양한 범주의 지식을 소비하면서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반면 자본운동은 지식생산의 사회적 기반을 파괴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모순이 즉각적인 자본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속지식에 기반한 지식생산은 오늘날 자본축적운동을 지탱하는 견고한 양식이 되었다.
이 글은 반 자본주의 운동이 현저하게 위축된 오늘의 현실에서 인간활동이 자본의 무한한 낭비적 필요를 충족하는 강제노동의 족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이론적 측면에서 모색하는 추상적인 글이다. ‘추상적’이란 의미가 이 글이 실천적 전망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조건없는 사회 급여’ 보장을 위한 사회동원에 대한 필자의 강조는 실효성이 의심스런 노동시간단축 투쟁에 비해 훨씬 급진적 요구를 담고 있다. 포스트 포드주의적 착취전략으로 유발된 노동사회의 위기를 노동시간을 몇 시간 단축하는 ‘기술적’ 처방만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제기가 노동시간 단축 투쟁을 평가절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다만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과 자본의 대립지평을 지배함으로써 의도와 무관하게 ‘본질적 의미’를 상실한 시간경제에 의존한 자본의 지배전략에 장단 맞춰 오히려 자본권력의 강화에 기여하는 측면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명백함은 빈번히 인식론적 추론작업의 제약요인으로 기능한다. 실업을 일자리 부족현상으로 인식하면서 노동시간 단축으로 간단하게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 발상인가! 그리고 기계적 산술계산의 결과를 논리적 근거로 제시하면 그만 아닌가! 지식생산과 노동시간의 관련성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노동시간 단축이 어떠한 의미에서 허구적 표적인가를 분명하게 드러나게 할 것이다. 또한 즉각적인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할지라도 ‘조건없는 사회급여’를 위한 사회적 동원이 ‘개성의 자유 발전’을 가능케하는 지식사회 실현을 위해 이 시점에서 얼마나 시급한 과제인가를 납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지식생산과 자본의 역동성
지식사회는 인간활동에서 지식소비가 급증함에 따라 변화되는 ‘삶’과 ‘지식’의 새로운 관계를 반영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특히 생산영역의 변화 즉, 지식생산에 기반한 포스트 포드주의적 자본축적의 지배적 경향은 지식사회 개념을 뒷바침하는 구체적 현실로 제시된다. 물론 테크놀로지나 일반 지식이 자본주의 생산과 결합된 것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생산과정에서 이들의 역할이나 변화의 속도는 산업생산과 비교되지 않는다. 자본축적과정에서 지식의 절대적 역할은 생산요소의 탈물질화와 마찬가지로 제품의 탈물질화 경향에서 잘 나타난다. 과거 그 특성에 비추어 이윤으로 쉽사리 전환되지 않았던 과학기술, 정보, 커뮤니케이션, 지식은 오늘날 생산과 부를 견인하는 중심 축이다. 요컨대 생산이 점점 비물질 중심으로 전환됨에 따라 생산 자체가 지식생산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산의 탈물질화가 물질생산의 전면적 퇴조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용규모나 자본축적영역에서 물질생산의 비중이 점차 보조적 역할로 밀려나는 경향을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성이 어떠하든 이러한 생산과정의 물질적 변화가 지식사회의 지평을 설명하는 전부는 아니다. 지식생산에 내재된 노동과 자본의 역관계, 나아가 노동력 본질의 변화라는 측면이 초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는 산업사회에서 ‘산 노동’을 대체하던 단순한 산업기계가 아니다. 임노동자의 지식과 이니셔티브가 결합된 산 노동이 투입되지 않는 한 한낱 무용지물에 불과한 ‘빈 상자’일 뿐이다. 이러한 유형의 비물질 노동은 노동시간과 자유시간을 구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과거와 달리 존재를 위해 자본이나 자본의 사회질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자본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중시되는 이러한 지식생산체제는 가능하다면 자본이 기피하고 싶은 생산양식일 것이다. 결국 지식사회는 자본주의가 비물질생산과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증대에 적합한 새로운 조절양식의 요구에 직면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지식생산의 새로운 조건들이 산업사회로부터 상속된 사회관계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지식생산은 노동해방의 실현을 기대할만한 반 자본적 특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식생산에 요구되는 노동의 자율성과 이니셔티브, 창의성을 탈 자본지배, 나아가 노동사회의 지양이라는 노동의 궁극적 목적을 실현하는 충분조건으로 속단해서는 안된다. 20세기 역사가 증명하는 바처럼 격렬한 반자본 공세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이미지를 쇄신하면서 축적운동을 지속해 온 자본의 역동성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이 강제하는 범주를 벗어나 자유롭게 존재하는 지식 또는 지식생산이 자동적으로 실현될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실제 자본은 70년대 포드주의 위기 이후 자본의 단절논리*주1)를 토대로 변화된 생산환경에 대응하면서 자본지배를 전근대적 수준으로 회귀시켰다. 좌파 이데올로기가 지배해 온 사회-문화적 지평을 넘어 세계적 자본지배체제를 구축함에 있어 ‘중립적’ 개념으로 포장된 지식정보 또는 커뮤니케이션 사회론의 공헌은 절대적이었다. 인류역사에 지배적 테크놀로지의 명칭이 사회명칭을 대신한 경우가 있는가? 어떻게 기술혁명이 사회혁명을 견인한다는 빈약한 논리체계에 기반한 기술결정론*주2)이 별다른 저항없이 사회에 수용될 수 있는가? 다수의 진보적 이론가들까지 함정에 빠뜨린 지식정보 사회론의 본질은 자본지배조건의 사회문화적 재생산이라는 자본의 새로운 지배전략이었다. 즉 ‘왜곡, 정당화, 동화’*주3)의 삼중주에 기반한 이데올로기 은폐과정를 통해 커뮤니케이션 영역을 새로운 자본축적 영역으로 확대하는 수단인 것이다. ‘정보혁명’을 내세우는 정보-커뮤니케이션 이데올로기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동일한 명제, ‘제약없는 교환’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자본은 정보-커뮤니케이션 가치를 내세워 이데올로기의 쇠퇴라는 20세기 후반의 일반적 경향으로부터 신자유주의를 분리함으로써 반 자본주의 운동의 사회-문화적 장벽을 우회한 것이다. 항상 새로운 이윤의 광맥을 찾는 자본운동이 노동 및 사생활 영역을 거쳐 교육, 문화, 지식생산 영역을 상품공간으로 확대함에 따라 자본과 노동 사이의 갈등지형도 변화되었다. 과거 첨예하게 대립해 온 공장을 넘어 전선이 사회영역 전체로 전면화된 것이다.
*주1) {{쉴러는 2차대전 이후 자본은 3가지 유형의 단절논리를 통해 자본주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강화했다고 설명한다. 첫째는 소위 다니엘 벨의 ‘후기 산업사회’(D. Bell, Vers la société post-industrielle, Laffont, 1976)이다. 후기산업사회론은 완전한 역사적 단절을 위한 전제로서 정보 및 정보생산의 단순성을 활용한다. 두 번째는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F. Fukuyama, La fin de l'histoire et le dernier homme, Flammarion, Paris, 1992)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자본주의 경제의 승리로 해석하는 후쿠야마는 사회갈등을 과거의 유물로 치부한다. 시장경제와 더불어 다양한 사회세력들은 자유경쟁을 통해 개인의 조건을 향상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종말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규제없는 자본주의는 불평등 심화의 강력한 동력임을 확인시켰을 뿐이다. 자본의 단절논리의 또 다른 버전은 ‘제3의 물결’(A. Toffler, La Troisième Vague, Denoel, Paris, 1982)로 대표되는 토플러나 드러커, 헌팅턴 같은 소위 ‘미래학자’들이 전파해 온 산업사회를 대체한 ‘정보-커뮤니케이션 사회’이다. Herbert I. Schiller, “La communication, une affaire d'Etat pour Washinton,” Manière de voir, n°. 46, Juillet-aout 1999.}}
*주2) {{정보화 담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회적 영향에 걸맞지 않은 빈곤한 논리체계이다. 기술결정론에 기반한 커뮤니케이션 사회론은 기술논리와 사회논리의 불연속성을 외면하고 있다. 사회모델을 결정하는 것은 기술 인프라가 아니다. 사회는 기술 인프라보다 이데올로기와 가치체계에 기반하여 존재한다. 동일한 네트워크, 동일한 단말기, 동일한 서비스 등 정보-커뮤네이션 인프라의 존재가 동질사회, 나아가 평등사회의 동의어일 수 없는 것이다. 설령 커뮤니케이션 담론대로 이러한 정보-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불평등의 심화를 억제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거의 동일한 기술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의 대립이 지배한 20세기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경제가 필요로하는 정보 및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민주주의와 평등사회의 가치로서의 정보-커뮤니케이션은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 사회의 개념은 동일한 용어를 이용하여 이러한 차이를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 이데올로기에 관하여 다음 문헌을 참조하기 바람. Bill Gates, La route du futur, Laffont, Paris, 1997 ; Manuel Castells, La société en réseaux, Fayard, Paris, 1998 ; Jean-Claude Guédon, La planète cyberinternet et cyber-espace, Gallimard, Paris, 1996.}}
*주3) {{Paul Ricoeur, Idéologie et utopie, Le Seuil, Paris, 1997.}}
이러한 지식정보화 담론의 전위대는 라모네(I. Ramonet)가 ‘설득산업 공장’*주1)이라고 부르는 학자, 전문가, 평론가 등 지식인 집단과 미디어였다. 이들은 자본권력이 제공하는 풍족한 인적 물질적 지원을 바탕으로 저작활동이나 강연, 세미나를 통해 평등사회를 구현하는 정보-커뮤니케이션 유토피아*주2)를 끈질기게 설파했다. 사회과학의 건조함을 털어낸 이들의 광고적 담론은 미디어의 총아로 부각되어 지구적 규모로 지적 사회적 영향력을 급속히 확산했다. 가시적이고 명백한 현실변화를 반영하는 듯한 지식정보 사회 담론이 인식의 지평을 지배함에 따라 사회과학적 비판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정보-커뮤니케이션 가치와 ‘근대성(modernité)’의 일체화 논리의 신속한 사회적 정당성 확보가 커뮤니케이션 담론에 대한 문제제기를 침묵시키는 수단으로 기능한 것이다. 비판은 곧 진보와 근대성에 대한 거부, 다시 말하면 변화의 거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산의 본질적 변화나 가치에 대한 문제제기의 겨를도 없이 사회는 무조건 지식정보사회의 새로운 조건에 적응하도록 단죄된 것이다.*주3) 정보화 담론의 지배는 사회-문화적 지배개념의 전환을 동반했다. 산업사회의 지배개념이었던 계급, 착취 개념의 자리를 세계화, 유연화, 시장, 경쟁 등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이 장악한 것이다.
*주1) {{I. Ramonet, ‘L'Amérique dans les tetes’, Le monde diplomatique, mai 2000. 라모네는 맨하탄 연구소, 헤리티지 재단, 부르킹스 연구소, 미국기업 연구소 등을 이러한 설득산업의 대표적 기관으로 꼽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르디외는 지적 정치적 영역에서 영국의 역할을 강조한다. 즉 영국이 지닌 미국과 유럽의 매개적 혹은 중립적 입지조건과 역사적 문화적 언어적 환경을 이유로 자본주의 설득산업의 ‘트로이 목마’로서 기능했다고 설명한다. P. Bourdieu, ‘La nouvelle vulgate planétaire’, Le monde diplomatique, mai 2000.}}
*주2) {{앨 고어 미국 부통령은 정보-커뮤니케이션 혁명이 구현하는 정보사회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훨씬 정의롭고 평등한 ‘새로운 아테네 민주주의 사회’라고 주장한다. 개인은 지구적 규모로 구축된 정보-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를 수단으로 쉽게 필요한 정보를 얻고 사회적 결정에 ‘직접’ 참여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패권시기는 20세기가 아니라 21세기’라는 오웬(William A. Owens) 전 미국 합참 부의장의 설명은 앨 고어의 환상적인 평등사회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정보혁명을 가장 잘 운용할 수 있는 국가가 최강자가 될 것이다. 그것은 정교한 비교우위를 가진 미국일 것이다. 장차 미국의 정보의 수집, 처리, 관리 및 보급능력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클링턴 대통령 역시 이러한 관점을 확인한다. “나의 의무는 미국이 지도적 위상을 유지하고 21세기에 승자가 되는 방식으로 미국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Herbert I. Schiller, op.cit., 에서 재인용.}}
*주3) {{자본은 정보화 담론을 확산하는 수단으로 계량화가 가능한 인터넷 인구와 접속 건수를 신 기술 적응도와 근대성을 측정하는 지식 정보화 지수로 활용하였다. 논리적 근거조차 없는 ‘정보화 지수’가 미디어, 정치인, 지식인을 앞다투어 ‘근대성’의 전위대로 변신시켰음은 물론이다. 미디어들은 연일 사회의 후진성을 ‘질타’하면서 정보사회의 광고적 담론을 되풀이했다. 정치인들은 국가의 미래가 정보혁명을 통한 가치창출 능력에 달렸다며 시장독재를 미화하고 정당화했다. 교육자들은 어제의 기술을 익히기도 전에 신기술이 등장하는 기술변화의 속도에 질식되면서도 정보화 교육이 미래교육이라는 ‘허세’를 포기하지 않는다. 개인은 가정 학교 사무실 공장 공공서비스 및 레저 시설 등 사회공간에서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부터 ‘근대성’과의 거리감을 확인하면서 불안에 빠져든다. 자본은 기술의 변화속도와 사회의 적응속도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괴리를 ‘근대성’의 괴리로 교묘하게 전환하여 사회 문화적 지배조건을 확고하게 구축한 것이다.}}
지식생산의 결정적 요소로 대두된 지적노동의 자율성을 자본의지에 충실하도록 길들이기 위한 자본의 지배전략은 단지 이러한 심리적 윤리적 무력화에 한정되지 않는다. ‘시장’이 지식생산의 자본주의적 합리성, 즉 상품적 효율성을 가늠하는 척도로 대두된 것이다. 시장에 의한 조절은 노동의 효율성에 대한 산업사회적 개념을 사라지게 했다. 노동 생산성과 금융 수익성이 분리된 것이다. 즉 생산적 효율성이 반드시 투기적 금융 수익성과 일치되지 않는다. 기업의 수익성을 생산성이 아닌 고용인원수에 기반하여 계산하는 것이다. 그 결과 적자기업은 물론 막대한 이윤을 낸 기업조차 경쟁적으로 경제적 해고를 통해 금융 수익성의 극대화에 혈안되었다. 실물경제와 분리된 금융논리의 발전으로 노동의 지위가 극도로 불안정해진 것이다. 노동자의 저항은 절대권력을 장악한 금융자본과 그 하수인인 IMF,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의 무자비한 심판에 의해 즉각 응징으로 대응했다. 한 국가나 대륙의 경제를 일순간에 황폐화시키는 금융자본의 가공할 파괴력은 이미 97년 아시아 경제위기를 통해 충분히 입증된 바 있다. 시장의 물신에 적응하는 유연노동만이 유일한 생존조건이 된 것이다. 노동과의 직접 대립을 우회하는 이러한 시장에 의한 자본의 간접지배 전략으로 인하여 지식사회의 지배관계는 한층 복합적 특징을 보여준다. 소비영역까지 자본지배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사회생산의 흐름을 조절하는 시장을 구조화하는 권력관계를 인지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주)
*주) {{노동시간 단축이 국가와 노동의 갈등으로 나타나고 노동유연화를 임노동의 시장적응이라는 사회적 위계질서에서 근거를 찾는 것은 이처럼 시장을 구조화하는 지배관계를 단순히 목적과 수단의 조정 또는 합리적 계산 결과와 혼동하기 때문이다.}}
노동의 표적상실과 실업율 증가는 자본에게 포스트 포드주의적 노동착취의 더 없는 기회가 되었다. 노동과 생존이 연계된 산업사회에서 노동은 노동자의 ‘개인적 사회적 정체성을 담보하는 길’일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의 여정에 ‘의미를 만들고 규정하는 유일한 기회’*주1)로 인식되어 왔다. ‘일자리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란 사회담론은 노동에 부여하는 인간활동의 중추적 기능을 잘 요약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실업은 노동자에게 의미없는 강제노동으로부터 해방이 아니다. 실업이 개인적 무능과 등식화된 사회에서 실업은 곧 사회와의 단절이자 상실과 굴욕의 시간인 것이다. 따라서 보조금에 의존하여 비참하게 살아가는 ‘개인적 사회적 재앙’을 모면하기 위해 안정된 일자리는 노동자 모두가 원하는 ‘재화’가 아닐 수 없다. 반면 노동량의 급속한 감소는 일자리를 자본에게 ‘낙점’된 한정된 ‘엘리트’ 노동자에게 분배되는 특권적 재화로 만들었다. 이러한 노동시간 감소 경향에 관하여 자본은 이미 명확한 해법이 있었다. 자본주의 생산 자체를 위협하지 않는 수준으로 실업을 유지함으로서 노동자의 반 자본운동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실업을 지렛대로 노동유연화 임금삭감을 강요하는 자본의 위협앞에서 노동자의 실업공포는 노동사회의 왜곡으로 나타났다. 즉 노동자는 노동의 재분배, 더 나아가 노동사회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통한 현실변화를 모색하기보다는 굴욕과 양보, 경쟁과 배신을 거듭하며 유례없는 자본권력의 전횡을 지켜보는 처지로 전락했다. 한 세기에 걸친 노동자들의 간단없는 투쟁으로 쟁취한 고용안정과 미래의 안전장치가 일순간에 붕괴된 것이다. 앙드레 고르즈(A. Gorz)가 개탄하는 것처럼 “자본과 노동간의 대립이 대부분 소멸되고 정규 노동자와 비정규 노동자 또는 실업자 사이의 대립으로 전이”*주2)되어 노동시장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전면화된 현실은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지식생산이 요구하는 노동량의 감소와 예속지식을 교묘하게 결합한 자본의 지배전략으로 노동은 최악의 상황에서 포드주의와 단절하고 있는 것이다.
*주1) {{R. Sainsaulieu, “Quel avenir pour le travail?” Esprit, decembre, 1995.}}
*주2) {{A. Gorz, Misères du présent, Richess du possible, Galilée, 1997, p. 79.}}
3. 노동사회의 지양은 ‘이론주의적 망상’인가?
그러면 자본이 새롭게 구축한 이러한 견고한 지배체제 위에서 노동사회의 지양이라는 역설적 변화는 가능한 것인가? 가능성을 넘어 노동사회 지양을 확신하는 이론가들은 유럽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맑시스트 이론운동 영역에 적지않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학자들로서 일반적으로 ‘대중지력(知力) 학파’*주1)로 불리는 그룹이다. 이들은 노동이 비물질 노동으로, 노동력은 대중지력으로 전환됨에 따라 노동은 ‘착취의 형식이 아닌 주체성(subjectivité)의 재생산 형식으로 재생산’되며 따라서 ‘즉각적으로 자유롭고 건설적인 지위를 확보’*주2)한다고 분석한다. 요컨대 ‘일반적 지력’(general intellect)*주3)이 노동자의 연대 및 지적 교환활동을 활성화함으로써 스스로의 사회관계를 재규정하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노동력의 맑스적 개념이 이들에 의해 ‘주체성의 자율적 생산과정’으로 발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중지력 이론가들의 자율적 주체성 생산론은 전제적 자본지배라는 구체적 현실을 근거로 내세워 논리적 오류로 비판하는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지난 97년 고르즈(A. Gorz)와 네그리(A. Negri) 사이에 격렬하게 교환된 지식생산과정의 노동의 자율성 논쟁이 그것이다. 쟁점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는 이 논쟁은 포스트 포드주의적 자본지배의 성격 규정이라는 본질적 문제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주1) {{대중지력 학파는 90년 창간된 프랑스 학술지 Futur antérieur(전미래)를 중심으로 활동한 프랑스 파리 8대학과 이탈리아의 학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J-M Vincent, A. Negri, P. Zariffian, P. Virno, M. Lazzarato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Futur antérieur(2000년 발전적으로 해체되었으며 필자를 포함, 새로운 편집진을 구성하여 학술지 명칭을 Variations으로 확정하고 9월 창간호 발간을 시작으로 년 3회 발간하게 됨)를 이끌었던 Vincent과 Negri가 철학적으로 항상 관점을 공유한 것은 아니다. 이들의 관계는 오히려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네그리가 이탈리아에서 1979년 테러혐의로 20여년의 실형을 언도받은 뒤 지지자들과 함께 프랑스로 왔을 때 (공식적으로는 망명이 아님)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는 장-마리 벵상 이외에도 가타리(Guattari), 들뢰즈(Deleuze), 물리에르 부탕(Moulier-Boutang) 등 네그리를 옹호하는 지식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네그리가 지적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파리 제 8대학에 교수 자리를 마련해주고 Futur antérieur에 참여시킨 것은 뱅상이었다.}}
*주2) {{A. Negri, M. Lazzarato, “Travail immatériel et subjectivité,” Futur Antérieur, n°. 6, 1991, 여름 ; M. Lazzarato, “Le concept de travail immatériel : la grande entreprise,” Futur Antérieur, n°. 10, 1992/2. 반면 대중지력 학파의 또 다른 핵심인물인 장-마리 벵상의 관점은 이러한 네그리의 분석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벵상은 자본이 지식생산과정을 장악하고 지식이 ‘사회성의 동력’이나 ‘집단지능’이 되는 것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지식을 파편화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다시 말하면 파편화되고 세분화된 지식은 자본의 가치증식에 봉사하는 과학기술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J.-M. Vincent, “Sortir du travail,” Futur antérieur, 43, 1997-1998/3, Syllepse.}}
*주3) {{맑스가 자본주의 생산의 ‘자동화’, 즉 생산의 과학화에 의한 축적모순을 설명하는 개념으로서 지식생산과정의 핵심인 객체화된 지식, 언어, 상상력 등 사회적 지식을 총칭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Manuscrits des 1957-1958 (Grundrisse불어판), t. II, Editions sociales, 1980, 참조.}}
고르즈는 지식생산에 강제노동 종식의 의미를 부여한 대중지력 이론가들의 주체성 생산론을 논리적 오류에서 비롯된 “이론주의적 망상”(délire théoriciste)*주1)이라고 몰아 세우며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고르즈의 비판에 따르면, 주체성 자율 생산론은 암묵적으로 노동 ‘속에서’ 자율성이 그 자율성에 의해 ‘노동자의 자율성 행사를 가로막는 모든 제약과 한계를 제거하는 노동자의 능력이나 요구가 생성’된다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 속의 자율성을 의미있게 하는 것은 ‘정치적 도덕적 문화적 자율성’이며 이러한 자율성은 ‘생산적 협력관계’가 아니라 ‘불복종, 저항, 형제애, 자유토론 및 급진적 문제제기 문화와 현장활동’으로부터 생성된다고 주장한다.*주2) 더구나 세계화와 무한경쟁 논리에 압도된 노동영역 안팎 그 어디에도 노동자에게 최대한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생산 시스템이 구상되고 관리되고 조직’되고 있다는 징후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지식생산 시스템은 생산성에 필요한 노동의 자율성을 드러나지 않게 통제, 관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고르즈는 지식생산의 노동 자율성을 자본이 강제하는 한계를 넘을 수 없는 ‘타율성 속의 자율성’일 뿐이라고 단정짓는다. 지식생산 자체가 노동의 자율성에 대한 자본의 지배를 가능케 하는 ‘사회 문화적 조건’ - 정글법칙 - 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주1) {{A. Gorz, op.cit., p. 72.}}
*주2) {{A. Gorz, ibid., pp. 71-75}}
이러한 비판에 대해 네그리*주)는 구조적으로 변화된 토대 위에서 구축된 자본지배의 역동성을 단순한 임노동 사회의 악화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반박한다. 맑스가 이미 ‘그룬드리세(Grundrisse)’에서 부분적으로 예견한 것처럼 일반적 지력이 생산하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주체성’이라는 의미이다. 고르즈가 주체성을 단순히 노동의 ‘자율성(autonomie)’에 한정하면서 착취의 사회적 조건이 봉건적 수준으로 악화된 것을 자본에 의한 생산사회의 포섭으로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생산과정의 ‘내용’이 ‘비물질 노동의 사회적 협력’에 속하는 까닭에 견고해 보이는 자본의 사회적 지배는 사실상 ‘생산과정 밖에서 감시하고 통제’하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즉 네그리는 고르즈가 지식생산을 ‘생물정치적 장치’가 아니라 단순한 ‘테크놀로지 현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 결과 자본이 구축하고 있는 지배질서에 내포된 ‘노동의 거대한 새로운 힘의 인식’이라는 측면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 {{A. Negri, “Recension,” Futur antérieur, 43, 1997-1998/3, Syllepse. pp. 115-124.}}
비록 자율성을 ‘절대적’ 자율성으로 이해하는 듯한 고르즈의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자본지배 질서가 정교하게 재구성된 현실에 비추어 노동해방을 ‘이론주의’로 치부하는 고르즈의 비난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란 쉽지 않다. 이론적 확신과 명백한 현실 사이의 괴리가 클수록 ‘자유의 왕국’ 실현을 강조하는 추론의 신뢰성에 대한 의구심이 강하게 제기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중지력 학파의 노동사회 지양 논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담론이 근거하고 있는 맑스의 일반적 지력 테제를 재음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시도가 데리다(J. Derrida)의 표현처럼 그저 ‘맑스를 읽고 또 읽고 토론’*주)하는 교조적 접근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 지력 테제는 맑스의 지식생산에 대한 추론의 현재성에도 불구하고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여파에 휩쓸려 지금껏 실질적 논의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10년 전 거대담론의 소멸을 몰고온 ‘역사의 종말’ 이후 맑스의 이름을 되뇌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용기를 필요로 했는지를 상상해보라! 아이러니하게도 맑스는 그가 예견한 지식생산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순간 인식의 지평에서 멀어진 것이다.
*주) {{J. Derrida, Spectres de Marx, éd. Galilée, 1993.}}
물론 그동안 일반적 지력 테제에 관련된 이론적 논쟁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진행된 두 차례의 해석전쟁*주1)은 당시 좌파의 주류담론을 보강하는 전술적 특성이 가세되어 본질적 의미에 이르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 주었다. 80년대를 거치면서 자본의 발전은 맑스가 ‘그룬드리세’에서 예견한 사회를 현실로 구현하는 단계에 도달한다. 즉 “생산과정이 노동자의 즉자적 숙련성이 아닌 과학의 기술적 응용으로서 규정”*주2)되는 단계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본주의 발전은 노동해방의 전망을 동반하지 않았다. 오히려 맑스가 자본주의 생산의 위기의 근원으로 적시한 ‘노동시간과 생산된 부 사이의 불균형’은 비르노(P. Virno)의 표현을 빌자면 ‘견고하고 새로운 지배형식’의 토대가 되었다. 일반적 지력에 관한 재독서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된 것이다. 90년대 초 맑시즘에 대한 극심한 ‘지적 냉대’ 속에서 맑스의 ‘복권’을 확신하며 재개된 이론운동은 지식생산에 기반한 자본주의 생산이 인간활동의 자유를 진척하는 진보적 요인을 주목했다. 70년대의 담론이었던 ‘갈등적’ 주체성(subjectivité) 생산론을 넘어서서 ‘대안적’ 또는 ‘자율적’ 주체성 생산론이 새로운 화두로 던져진 것이다
*주1) {{60년대에 일반적 지력 테제는 소위 과학과 지식의 중립성 논리의 허구를 밝히는데 활용되었다. 기계나 과학기술이 자본지배와 분리될 수 없음을 입증하는 논리적 토대였다. 70년대에는 공산주의의 실현의 실마리를 찾는 근거가 되었다. 즉 사회적 부의 생산에서 임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의 급속한 감소하는 경향을 노동력이 상품적 족쇄를 벗어나는 징후로 해석했다.}}
*주2) {{K. Marx, Manuscrits de 1957-1958 (Grundrisse), t. II, Editions sociales, 1980. p. 187.}}
4. 노동시간과 자유시간의 역학
문제의 일반적 지력 테제는 가장 비 맑스적 추론일 뿐 아니라 ꡔ그룬드리세ꡕ 이외의 맑스의 저작 어디에도 동일한 논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 세기 반에 걸친 자본주의 발전을 ‘부처 손바닥 안의 손오공’으로 만들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일반적 지력 테제에 드러난 맑스의 추론능력이다.
(생산이 과학화됨에 따라) 부의 생산이 의존하는 가장 근본적 축은 인간에 의해 행해지는 즉자적 노동이나 노동시간이 아니라(...)사회적 개인의 발전이다(...)현재의 부가 기반하고 있는 노동시간의 착취는 대 공업에 의해 발전되고 창출된 새로운 토대에 비해 아주 미미한 토대로 나타나게 된다 (...)자본은 한편으로 부의 생산을 생산에 이용되는 노동시간으로부터 독립적이 되도록 사회적 교류와 협력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과학의 모든 힘에 의존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산된 엄청난 사회적 힘(부)을 노동시간의 척도로 측정하려 한다(...)(부의 생산이 보편적 사회 생산력에 의존함에 따라) 고정자본의 발전은 보편 사회지식(Knowledge)이 어떠한 단계까지 즉자적 생산력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사회의 필요불가결한 과정의 조건들이 어떠한 수준까지 일반적 지력의 통제에 놓여 있는가를 보여준다.*주)
*주) {{K. Marx, ibid., pp. 193-194.}}
다소 길게 인용한 이 텍스트가 보여주는 것처럼 자본주의 발전 경향에 대한 맑스의 진단은 생산과 과학의 결합이 유발하는 생산영역의 급진적 변화에서 출발한다. 즉 지식, 언어, 정보 등 일반적 지력이 생산력의 중심이 되면서 인간의 즉자적 노동은 생산의 ‘결정적 지위’를 상실하고 아주 ‘미미한 토대’로 전락한다. 이러한 변화로부터 맑스는 다른 저작을 통해 잘 알려진 ‘이윤율 경향적 감소의 법칙’과 다른 유형의 자본축적 모순, 즉 ‘생산된 부와 투입된 노동시간 사이의 불균형’에 따른 모순을 인식하게 된다. 자본의 사회적 관계의 중추를 구성하는 소위 ‘가치법칙’이 자본주의 발전 그 자체에 의해 붕괴에 이르는 모순이다. “즉자적 형식으로서 노동이 부의 핵심적 원천이 아님에 따라 노동시간도 당연히 이러한 부의 척도가 아니며 결국 교환가치도 사용가치의 척도가 되지 않는다.”*주) 따라서 자본운동의 근간인 타인의 노동시간 ‘탈취’는 더 이상 총체적 부의 발전 조건이 아니다. 하지만 자본은 노동시간을 계속하여 생산된 부의 가치척도로 간주한다. 의미없는 노동시간에 근거한 가치법칙에 집착하는 것이다. 노동해방에 대한 맑스의 가설을 뒷바침하는 논리적 근거이다. 즉 지식생산과정과 생산에 투입된 노동량에 일치하는 부의 측정단위 사이에 커다란 괴리가 발생한다. 이러한 괴리가 점점 커지면서 ‘교환가치에 기반한 생산’은 필연적으로 붕괴된다는 것이다.
*주) {{K. Marx, ibid., p. 193.}}
이러한 맑스의 치밀한 논리전개와 결론을 이론적으로 별다른 어려움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평균적’ 인지능력 발전에 ‘기여’한 것은 아마도 맑스의 ‘19세기 공상과학’을 현실화한 자본의 역동성임이 분명하다. 지식생산의 지배적 생산력인 일반적 지력을 단순히 ‘고정자본’의 발전으로 해석하는 맑스의 오류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과학이 ‘산 노동’을 대체하는 기계에 용해된 ‘객체화된 지식’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었던 맑스의 시대를 고려할 때 일반적 지력을 고정자본의 발전으로 이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일반적 지력은 “고정자본으로 구현된 지식을 넘어 가공언어, 정보이론,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국지적 지식 등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구조화하고 대중의 지적노동 활동을 조직하는 지식을 포함”*주)한다. 요컨대 개인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지식의 보유체로서 일반적 지력은 기계에 결코 용해될 수 없는 지식을 내포한 ‘산’ 노동인 것이다.
*주) {{P. Virno, “Quelques notes a propos du general intellect,” Futur anterieur, 10, 1992, p. 48.}}
물론 맑스는 노동사회의 지양이 직선운동으로 진행된다는 환상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즉자적 인간노동을 ‘필수적이지만 보조역할’로 전락시킨 지식생산체제에도 불구하고 노동시간은 여전히 부의 측정단위로서 기능하는 현실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다. ‘생산된 부와 투입된 노동시간 사이의 불균형’에 따른 모순이 자본주의 생산의 붕괴로 이르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경과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주1) 반면 자본주의 생산의 붕괴에 이르는 ‘모순 표출기간’에 대한 인식은 유토피아적 접근이 강하게 나타난다. 대폭적인 노동시간 단축으로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이 가능하다고 낙관하고 있다. 즉 초과노동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필요노동시간을 단축했던 과거와 달리 사회의 필요노동시간이 ‘최소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시간 단축으로 ‘개개인들이 모두를 위해 창출된 물질적 부와 자유시간을 이용하여 과학적 예술적 지식습득”*주2)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은 생산영역에서 최소의 에너지만으로 무한한 부를 생산하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사회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점점 더 단축된다. 핵심 생산력으로서 필요를 위해 사용가치를 생산하고 상호협력과 교환을 자가조직할 수 있는 ‘사회적 개인’의 능력이 생산성의 저주스런 족쇄에 옭죄었던 즉자적 노동을 대체하는 것이다. 필요노동시간 단축으로 가능해진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의 ‘결과’이다.
*주1) {{“우리는 부르좌 경제체제가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부르좌 경제체제의 최종결과인 경제체제의 부정 역시 서서히 진전될 것이다” K. Marx, ibid., p. 200.}}
*주2) {{K. Marx, ibid., p. 193.}}
이러한 맑스의 추론이 지닌 커다란 장점은 자본이 어떻게 자기붕괴과정을 가속화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이 점은 오히려 자본의 반동을 충분하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논란의 여지를 제공한다. 진정한 강점은 일반적 지력이 주도하는 “인식자본주의”*주1)의 파행, 즉 오늘날 자본이 자행하는 광란의 ‘이유’를 알기쉽게 요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자본은 노동시간 단축에 격렬하게 반대하는가? 왜 맹아적 수준의 사회보장제마저 ‘생산적 복지’를 앞세워 해체하려 시도하는가? 왜 관료주의의 폐해를 집중 부각하면서 더욱 보강되어야 할 공공서비스를 공격하는가? 끝없이 이어질 수 있는 이러한 의문들은 필요노동시간 단축과 자본붕괴 사이에 얽힌 비밀이 드러나면서 순식간에 해소된다. 일반적 지력 체제에서 이윤의 크기가 타인의 노동시간 착취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자본의 노동시간에 대한 집착이 반드시 경제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노동은 생산수단이 결여된 노동자의 생존을 담보하고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하는 사회관계의 토대였다. 이러한 조건은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이 노동자의 ‘육체’는 물론이거니와 ‘영혼’까지 완전한 지배를 가능하게 했다. 다시 말해 노동사회에서는 노동시간 이외의 ‘비 노동시간’조차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의 발전을 위한 자유시간이 아닌 것이다. 자본의 의지를 빈틈없이 따르기 위해 소모된 노동력을 ‘재충전’하는 또 다른 형식의 예속시간에 불과하다. 반면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으로 자본의 강제에서 해방된 시간의 증가하면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된다. 노동이 사회관계의 중심적 역할을 상실하고 여타 사회활동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순간의 일부가 된 것이다.*주2) 최소의 사회적 필요노동 이외의 자유시간 역시 ‘비 노동권’으로서 상실의 시간이 아닌 ‘잠재적 부’를 의미한다. 개개인이 정치, 문화, 예술, 여가 활동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자신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활용하는 비노동시간은 지적 교환활동이나 사회적 연대활동을 촉진시켜 사회관계의 지형을 재정립토록 함으로써 새로운 여망을 나타나게 한다.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과정 사회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는 것이다. 결국 노동시간의 단축은 자본을 위한 보충시간이 자본에 대한 ‘저항의 시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주1) {{지난 99년 10월 파리 1대학 마티스 이시스(Matisse-Isys) 연구소가 주관한 ‘경제사 심포지움’은 산업자본주의를 잇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조절양식을 ‘인식자본주의(capitalisme cognitif)’로 정의했다. 산업자본주의와 달리 인식자본주의 단계에서는 분야와 형식을 망라한 모든 지식이 향후 경제기능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다. 필자는 93년 파리 제 8대학에 제출한 학위논문 ꡔ인식자본 축적의 본질로 본 맑스의 자본주의 붕괴 테제 비판ꡕ (Forces et faiblesses de la thèse de Marx : la fin du Capital par manque de la plus-value, vue de la nature de l'accumulation du capital cognitif - 에서 ‘인식자본(capital cognitif)’ 또는 ‘가상자본(capital fictif)’의 개념을 통해 지식생산에 기반한 새로운 자본축적양식을 분석한 바 있다. 임노동의 자율성이 중시되는 지식생산의 특징을 고려하여 필자가 ‘인식자본에 의한 생산자본의 식민화’라고 정의한 간접지배에 의존한 축적운동이다. 즉 컨셉영역과 생산영역의 위계화를 통해 지식생산을 파편화하고 주기적 개인능력 평가(연봉제)로 임노동을 개인화하는 방식으로 지적노동의 자율성을 통제하는 것이다.}}
*주2) {{로제 쉬는 노동시간이 활동시간의 14 %, 하루 2시간 30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R. Sue, Temps et ordre social, PUF, 1994, p. 176.}}
자유시간에 내재된 이러한 반자본 지향성은 자본이 노동시간 단축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본질적인 이유를 잘 설명한다. 자본의 지배를 벗어나 존재하는 비 노동시간의 증가는 자본에게 중대한 위협이다. 따라서 맑스의 생각과 달리 일반적 지력 체제하에서 사회에 필요한 노동량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생산영역에서 실질적인 노동시간 단축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자본은 노동자가 생산관계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을 회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결국 ‘내용적’으로 경제적 의미를 상실한 노동시간은 개인적 정체성과 집단적 가치의 원천으로서 계속 존재한다. 네그리가 자본에게 생산과정은 그 특성이 점점 ‘형식적’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한 이유이다.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면서 점차 정상적인 일자리는 희귀해지고 노동력은 상대적으로 ‘과잉’이 된다. 자본에게 이러한 노동력 과잉 현상은 지식생산에 고유한 임노동의 자율의지를 통제하는 구체적 수단이다. 즉 노동시간 단축보다는 노동력 일부를 시장 부적격자로 분류하여 생산영역에서 완전히 배제시킴으로써 대량실업을 만성화하는 것이다.
노동이 여전히 인간활동의 중심이 되는 보편적 현실에서 노동시간 단축으로 얻어지는 비 노동시간과 달리 실업과 파트타임으로 남아도는 시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자율시간이 아니다. ‘정상적 노동권’을 갖지 못한 상실의 시간이자 사회적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굴욕의 시간인 것이다. 따라서 실업자가 겪는 사회적 차별과 비참한 생존조건은 노동을 자본이 강제하는 지배된 시간에 ‘기꺼이’ 예속되게 한다.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가 ‘단순한 경기정책’이 아니라 ‘탈사회화된 개인화의 효과를 얻으려는 자본의 상설적인 반 노동전쟁’이라는 벵상(J.-M. Vincent)의 정의*주)는 실업을 지렛대로 생산과정 속에서 노동의 자율성을 억제하는 자본의 지배전략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즉 자본은 노동유연화, 개인화를 통해 ‘보편적 지능 속에서 반 지능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러한 임노동의 유연화는 생산에 이용되는 지식의 통제 및 규격화 정책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지식생산이 자본운동의 역동성에 점점 더 예속되는 것이다. 결국 필요노동시간 단축은 노동해방을 약속하는 요인인 동시에 이러한 약속을 부정하는 요인이다.
*주) {{J.-M. Vincent, op.cit., p. 90. 벵상은 노동의 유연화가 단지 경제적 해고나 고용의 불안정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관계의 불안정을 관리하고 대다수의 무력감과 공포를 활용하는 모든 장치를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 오늘의 현실과 맑스의 추론 사이의 괴리는 어디서 유래된 것인가? 맑스가 필요노동시간의 감소를 노동시간 단축의 구체적 현실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충분하다. 노동시간이 생산의 결정적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노동시간 단축은 당연한 현상이 아닌가? 또한 실업자의 생존을 최저 생계비 수준에서나마 보장하는 ‘사회보장’ 개념이 없는 단계에서 자본운동의 위협과 다름없는 소위 20(실업)-80(정규직) 또는 10(실업)-40(비 정규직)-50(정규직) 사회를 상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정규직과 비 정규직 또는 실업자를 분할지배하는 자본전략으로 노동자 사이의 경쟁과 갈등이라는 아이러니를 추호도 감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맑스가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었던 자유시간 증가는 시장사회의 맥락에서 여가나 문화활동의 상품화로 접근자체가 어려워짐에 따라 또 다른 불평등을 강화하는 요인*주)이 되리란 것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 {{F. Gollain, Une critique du travail entre écologie et socialisme, La Découverte, 2000, p. 182.}}
맑스의 ‘정당한’ 유토피아와 자본 역동성의 비교는 적어도 두 가지 명백한 사실에 이르게 한다. 하나는 사회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감소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사회의 악화가 신자유주의자들의 기만적 주장과 달리 노동시장의 경직성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주)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은 현 단계에서 더 이상 급진적 과제도 아니며 노동사회에 던져진 시급한 문제들 - 실업, 비정규 노동, 사회적 소외, 미래의 불확실성 등 - 에 대한 근본적 처방이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노동권을 겨냥한 ‘기술적’ 접근은 노동자들이 자본이 ‘분배’하는 점점 줄어드는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동시장에서 각축하는 ‘스펙타클’ 종식에 걸맞지 않는 수단인 것이다. 상대적 안정을 구가해왔던 노동지평을 황폐화시킨 신자유주의 바이러스에 대한 해독제는 과거처럼 ‘먹고 자고 일하는 것’이 삶의 전부인 노동사회의 복원이어서는 안된다. 네그리가 말하는 ‘자유롭고 건설적 위상을 확보’한 노동이라야 한다. 다시 말하면 노동을 자본의 수익성 논리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게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임노동 중심주의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는 노동운동의 고답적 인식은 ‘미련없이’ 버려야 한다. 노동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시간으로부터의 해방 (노동시간 단축)은 물론 필요로부터 해방 (조건없는 사회급여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 {{프랑스 경제분석 위원회의 최근 보고서는 영국 네델란드 포르투칼 덴마크, 일본, 노르웨이 및 스위스 사례를 들어 시장구조와 같은 ‘제도적 변수’가 실업의 변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사회경제 연구소(IRES)의 프레시네(J. Freyssinet) 소장 역시 1990년에서 1998년 사이에 현저하게 실업율이 감소된 덴마크 아일랜드 네델란드 노르웨이 영국 등 유럽 5개국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즉 90년대의 지배적 담론과 반대로 “서유럽에서 높은 수준의 노동시장 유연화와 고용창출 또는 실업율 감소 사이에 어떠한 관련성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00년 6월 1일. 참조.}}
5. 조건없는 사회급여 보장을 위한 대장정
‘개인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기본적 경비에 상당하는 금액을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조건없이 매달 지급하라!’ 1987년 발표된 벨기에 ‘샤를 푸리에르 서클(Cercle Charles Fourier)’ 선언의 한 구절이다. ‘조건없는 사회급여’ 또는 ‘시민급여’에 대한 본격적인 이론논쟁*주1)을 촉발시킨 이 선언은 당시 사회에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노동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기본 생계비를 지원함으로써 생존과 노동의 연계고리를 단절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13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주장은 누구에게도 더 이상 충격적 제안은 아니다. 나아가 비록 정치적 제스처일지라도 프랑스의 경우 정부의 정책대안으로 고려되기도 했다. 실업이 증가하고 노동 유연화가 가속화되면서 반자본주의적 기류가 강하게 형성된 결과이다. 반면 이러한 기류에도 불구하고 조건없는 사회급여를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유토피아적 발상’으로 인식하는 편견의 장벽은 별다른 붕괴의 조짐이 감지되지 않는다. 조건없는 사회급여를 현재의 경제적 맥락에서 적용될 수 없는 ‘아주 먼’ 미래사회의 설계도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다. 요컨대 조건없는 사회급여를 원론적 측면에서 ‘호의적’으로 수용하면서도 현실적 목표로서 고려하지 않는 이중성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진보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운동 조직이나 정치조직에서조차 이러한 경향이 예외는 아닌 듯하다. 현실성없는 이상주의자로 낙인찍히는 ‘왕따’의 위험을 경계하는 것이다. 조건없는 사회급여의 보장이 노동권 확보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지적장벽’의 산물이다.*주2) 따라서 조건없는 사회급여의 실현 방법을 추구하기에 앞서 이러한 이중성의 제거가 시급한 과제이다. 이에 대한 가장 효율적 전략은 유토피아로 몰아가는 논리의 허구성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주1) {{프랑스의 ‘사회과학 반 공리주의 운동(M.A.U.S.S.)’은 이 주제에 관한 다양한 관점을 소개한 바 있다. Vers un revenue minimum inconditionnel? La revue du MAUSS, n°. 7, 1er semestre 1996, La Découverte / MAUSS.}}
*주2) {{Ph. Van Parijs, ‘De la trappe au socle, l`allocation universelle contre le chomage’, La revue du MAUSS, op.cit., p. 95}}
필자의 경험에 비춰볼 때 ‘조건없는 사회급여’를 실현 가능성없는 유토피아로 인식하는 토대로서 대략 다음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급여노동없이도 생존이 가능해진다면 노동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관점이다. 즉 노동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기본 생존비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원칙론적 반대’이다. ‘백수’의 부양을 위해 자신이 희생해야 하는 ‘사회적 짐’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론은 ‘노동에 의한 구원 추구와 모든 형식의 ‘백수’에 대한 비난과 근절에 기반한 근대사회*주1)’의 문화 이데올로기에 근거한다. 맑스의 설명처럼 지식사회에서 생산되는 부의 크기는 투입된 노동량과 비례하지 않는다. 따라서 ‘미미한’ 노동력을 제외한 지식생산의 거대한 생산성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혜택을 누려야 하는, 브레송(Y. Bresson)*주2)의 표현을 빌자면 ‘집단적 유산의 열매’라 할 수 있다. 반면 노동사회의 원리는 이러한 열매를 자본의 ‘후견’을 통해 분배함으로써 자본에게 ‘선택’되지 못하여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은 분배받을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들 몫이 정규 노동자에게 이전되는, 다시 말해 실업자가 오히려 정규 노동자를 돕는 기형적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조건없는 사회급여는 자신의 정당한 몫을 얻기위해 개인을 부당한 자본권력에 굴복하도록 강제한 왜곡된 분배구조를 바로잡는 것이다. ‘백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더 많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백수’들에게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돌려주는 것이다.
*주1) {{A. Caillé, ‘Vers de nouveaux fondements symboliques’, Garantir le revenue, une des solutions à l'exclusion, n°. 3, Transversales, mai 1992, p. 27 }}
*주2) {{Y. Bresson, “Le revenue d'existence : réponse aux objections,” Revue du MAUSS, op.cit., p. 109 }}
한편 조건없는 사회급여로 개인의 노동의지가 약화됨에 따라 초래될 수 있는 노동력 결핍에 대한 우려는 빈번히 사회급여의 ‘무조건성’을 비판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소위 ‘현대판 노예제’라 할 수 있는 생산적 복지(workfare)는 바로 ‘백수’에 대한 사회의 ‘도덕적 장벽’에 의존하여 불충분한 기존의 사회보장 성과물마저 부정하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 투쟁이다. 하지만 ‘백수’에 대한 우려는 사회급여를 임노동사회의 틀에 고정시켜 본질을 오도하는 노동사회 이데올로기의 잔재에 불과하다. 사회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최소로 단축된 지식사회에서 노동은 더 이상 생산의 결정적 요소도 인간활동의 중심도 아니다. 더구나 사회급여의 보장으로 자본운동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난 노동은 더 이상 ‘강제’노동이 아니다. 정치, 문화-예술, 봉사, 창작활동 등 자신의 발전을 위해 개개인이 창의력과 상상력에 기반한 여타의 사회생산 활동과 다름없는 ‘향유(jouissance)하는 활동’이다. 노동사회에서 개인의 사회생산 참여가 획일적으로 급여노동에 한정되었다면 지식사회는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이 가능한 ‘자가활동’을 무한하게 확대하는 사회인 것이다. 따라서 노동이 생존을 담보하는 노동사회의 개념인 실업은 조건없는 사회급여의 보장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소멸된다. 자의이건 타의이건 노동영역에 흡수되지 못한 ‘실업자’ - 굳이 노동사회의 개념으로 호칭하자면 - 가 원하는 무수한 자가활동이 지식사회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다소 추상적인 첫 번째 문제에 비해 훨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비용에 관련된 문제제기이다. 조건없는 사회급여에 소요되는 비용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가능성이 있는가를 의심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단지 유토피아론의 불식이라는 전략적 측면만을 고려한 중요성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회급여의 구체적 수준과 범주, 즉 금액, 전부와 일부, 조건과 무조건 등을 결정하는 변수가 이러한 재정확보 능력이기 때문이다. 반면 이러한 문제에 관련된 경험적 연구는 그다지 흔치 않다. 프랑스의 RMI(최소적응급여)는 비록 제한적이나마 조건없는 사회급여의 비용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구체적 근거가 될 수 있다. RMI(Revenue minimum d`insertion) 제도는 그 성격에 있어 조건없는 사회급여의 정신에 가장 근접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1988년 RMI 제도의 도입은 기존 복지국가 시스템이 모든 사회구성원을 빈곤으로 보호*주1)하지 못한다는 현실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RMI는 기존의 사회보장 장치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취업이 가능한 25세 이상의 실업자들에게 매월 최저생계비를 지급하는 것이다. RMI의 수준을 보면 개인 2138 프랑 (한화 35만원 상당), 부부 3061 프랑 (50만원)이며 자녀가 있을 경우 한명 3651 프랑 (60만원), 두명 4380 프랑(75만원)이 지급된다. 여기에 RMI 대상자가 면제받는 의료보험료와 주거세와 같은 세금 또한 최대비율의 주택보조비를 가산하면 개인은 3723 프랑 (61만원), 부부는 4925 (80만원)에 상당하며 두 자녀가 있을 경우 6555 프랑 (105만원)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수준의 RMI 제도는 기대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97년 말부터 98년 초까지 RMI를 포함한 최저생계비 1500 프랑 인상을 위해 결렬하게 투쟁했던 ‘실업자 운동’*주2)이 잘 반증한다. 프랑스 정부는 실업자 운동의 요구에 맞서 물가상승 비율을 반영하는 것으로 인상폭을 최소화했다. 프랑스 정부의 인상거부 이유가 비용부담이라는 재정적 이유가 아닌 것은 물론이다. 실제 이유는 1500 프랑을 인상할 경우 RMI가 임노동의 법정 최저급여인 5280 프랑(85만원)와 같은 수준이 됨으로써 초래될 수 있는 윤리적 혼란에 대한 우려이다. 즉 최저급여 수준의 RMI는 대상자들의 ‘취업의지’를 소멸시켜 ‘백수’가 급격하게 증가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예컨대 ‘충분한’ 최저생계비 지급을 금지하는 이유가 ‘재정적 능력’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고려’에서 비롯되었음을 프랑스의 실업자 운동은 명확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주1) {{개인을 빈곤으로 보호하기 위해 현재 프랑스에서 시행되고 있는 지원제도(Minima sociaux)에는 실업 및 의료 보험제도 외에도 노약자 수당, 장애자 수당, 가족수당, 과부수당, 적응수당, 특별연대 수당, 최소적응급여 등이 있다.}}
*주2) {{이에 관해서는 이환식, 「프랑스 실업자 운동」,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1998년 3월호, 참조.}}
물론 프랑스와 우리나라, 더 나아가 저개발 국가의 경제현실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즉각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국가별 경제규모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은 초점을 벗어난 것이다. 조건없는 사회급여의 수준이 모든 나라가 동일한 것은 아니며 동일할 수도 없다. 나라마다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반면 이러한 차이는 사회급여의 수준과 범주에 관련되는 것으로 조건없는 사회급여 제도 시행의 가능 또는 불가능을 결정하는 요인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가계 평균소득을 토대로 적절한 비율로 사회급여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예를 다시 본다면 RMI의 경우 프랑스 평균 가계소득의 20 - 30 % 수준이며 노약자 수당은 이보다 약간 높은 30 - 40 % 수준이다.*주1) 물론 사회 구성원 일부에 해당하는 이들의 경우를 일반화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논란의 여지를 남기게 된다. 이러한 의구심을 불식하기 위해 사회보장에 소요되는 총비용이 국내총생산(GDP)에 차지하는 비율로 접근하는 것이 훨씬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 현재 프랑스가 기존 복지국가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 지출하는 총 비용은 대략 국내 총생산의 14 %를 점한다. 이 비용을 국민 모두에게 조건없이 지급할 경우 개개인은 매월 1500 프랑 (25만원 상당)의 사회급여를 보장받게 된다. 반면 경제규모가 허락하는 최대의 비율, 예를 들어 20 %로 확대하고 지급대상을 기술적으로 조정*주2)한다면 현재의 RMI 수준보다 높은 수준의 조건없는 사회급여 보장이 가능하다. 이러한 현실은 조건없는 사회급여를 경제적 이유로 ‘유토피아’로 간주하는 사회적 인식이 얼마나 근거없는 편견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주1) {{M.-Th. Join-Lambert, Chomage : mesures d'urgence et minima sociaux. La documentation francaise, 1998. p. 34}}
*주2) {{예를 들어 일자리나 사회급여와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는 부유한 사회계층에게 사회급여를 지급하는 것은 조건없는 사회급여에 담긴 본질적 의미에 벗어난다. 따라서 이들 계층을 사회급여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또한 18세 미만의 미성년에게는 사회급여 수준을 성년과 차등 지급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이처럼 대상자나 금액의 조정을 통해 실질 수혜자는 보다 ‘충분한’ 사회급여를 보장받을 수 있다.}}
6. 결론
우리는 흔히 가장 빈곤한 계층이 가장 많은 지원혜택을 누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계층이 가장 많은 지원혜택을 받는다. 우리사회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굳이 재벌그룹에 지원되는 천문학적 규모의 다양한 지원금을 들먹일 필요조차 없다. 1997년 경제위기로 발생된 실업자 구제에 소요된 전체 비용과 단지 제일은행을 정상화하기 위해 투입된 공적자금을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결국 조건없는 사회급여의 실현을 가로막는 장벽은 일반적 인식과 달리 사회적 비용이 아니라 정치의지의 결핍인 것이다. 물론 필자가 조건없는 사회급여가 하루 이틀 사이에 갑자기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노동시간이 단번에 주당 15시간으로 단축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대폭적인 노동시간 단축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처럼 조건없는 사회급여도 그리 멀지않은 장래에 실현될 수 있는 제도이다. 다만 이러한 방향으로 맹아적 수준의 사회보장제를 더욱 개선하고 범위를 확대해 나갈 때 가능한 일이다. 개인이 교육비와 의료비 부담에서 벗어난다면 현재의 급여로 삶의 질을 훨씬 높일 수 있지 않겠는가! 실업자는 물론 한달 소득이 최저 생계비에 미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우선적으로 사회급여가 지급된다면 일을 찾아 헤매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낙원의 문 앞에서 굶어 죽는 비극적 현실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이 가능한 지식사회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회동원으로 쟁취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