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 일원에 조용하게 머물러 살던 나라로만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700년 백제의 역사는 대륙 경영의 역사였으며, 바다를 손안에 넣고 동아시아를 호령하며 위상을 드높이던 거대한 국가였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대륙과 백제의 관계를 백제건국 세력의 망명 경로에서 먼저 착안하여 ‘백제 대륙 경영설’이 백제의 역사를 복원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확신하며 그 가설을 통해 이 책을 구성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한․중․일 삼국의 사료를 통해 입체적이고 면밀하게 당시 각국의 세력과 이해관계를 파악하며 백제사의 여러 쟁점을 살피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백제와 고구려가 처음 군사적인 충돌을 일으킨 곳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이었고(근초고왕실록), 백제와 일본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종속의 관계가 아닌 대등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 일본과의 역사문제 중 가장 민감한 부분인 임나(任那)는 가야에 있는 자유무역 도시였다는 점 등을 면밀한 사료 고증과 당시 국제정세를 고려한 추론을 통해 접근하여 백제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대륙의 국가들과 어깨를 겨루고 고구려 못지않은 웅지와 기상으로 대륙을 지배하며 영원한 영광을 꿈꾸던 해양제국 백제. 이제 한반도사관에서 벗어나 진정한 동아시아의 영웅 대륙백제를 만나보자.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백제는 온조왕을 시조로 하여 B․C 18년 현재의 한강 북쪽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한 고대 삼국 중의 하나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한강 유역을 통합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실질적인 시조로 등장한 것은 제8대 고이왕(234∼286)이다. 고이왕은 16관등급, 6좌평의 관제를 정비하고 관복제정, 남당 설치, 낙랑군의 압력을 배제하면서 한강 유역을 통합하였으며 고대국가의 체제를 마련해 백제의 실질적 시조로 등장한다. 백제의 전성기인 제13대 근초고왕(346∼375)은 정복군주로서 대방군의 옛 땅을 확보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331∼371)을 살해하는 등 국위를 떨치며 마한을 완전히 통합하여 그 세력이 오늘날의 전라도 남해안까지 미치고, 중국 랴오시 지방까지 진출하는가 하면 중국의 남조인 동진과 통교하여 문화를 수입하고, 일본과도 접촉하여 한학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17대 아신왕 5년(396)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대에 패하여 한성을 침공당하고 한강까지 후퇴하여 임진강 유역을 잃는다.
제20대 비유왕(427∼455)때에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대비하여 신라 눌지왕과 나제동맹(433)을 체결하여 고구려에 대항했으나 제21대 개로왕(455∼475) 때에는 장수왕의 압력이 더욱 가중되었다. 결국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개로왕을 패사시키고 한강 유역이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그 때 제22대 문주왕(475∼477)은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였으나(475) 국세는 더욱 쇠약해졌다. 삼근왕에 이은 동성왕(479∼501)은 남제와 외교하고, 신라 소지왕과 결혼동맹(493)을 맺어 양국의 유대관계를 굳혔으나 임류각 같은 궁전을 짓고 방종과 사치에 젖어 끝내 반신인 좌평 백가에게 피살되었다.
제25대 무령왕(501∼523)이 즉위하면서 안으로는 전국에 22개의 담로(邑에 해당)를 설치하여 왕족을 파견, 지방 통치를 강화하고 밖으로는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다. 또한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중국의 양나라와 통교하면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여, 제26대 성왕(523∼554)이 부왕(父王)인 무열왕의 업적을 기반으로 하여 중흥의 군주로 활약하였다. 그는 수도를 사비(부여)로 천도하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는 한편, 중앙에 22부를 두고 지방을 5부, 5방 제도로 정비하여 국력의 쇄신에 진력하였다. 그는 중국 남조인 양나라와 통교하여 문물을 수입하는 한편,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썼다. 그리고 신라 진흥왕과 제휴하여 독산성(예산)에 침입해온 고구려군을 격퇴시키는 등 한강 유역을 확보하였으나, 신라 진흥왕의 배반으로 나 ·제동맹은 결렬되고(553) 관산성에서 싸우다가 전사(554)하여 한강 유역은 신라가 지배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백제의 국운은 날로 쇠약해지기만 하고 위덕왕, 혜왕,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 의자왕 때 지나친 토목공사와 신라의 침공으로 국력이 극도로 소모되고 민심이 이반함으로써 국정은 문란해져 패망했다(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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