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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당(溪堂)에 흐르는 수은(睡隱)의 진면목(眞面目) 나를 깨우다.
안녕하세요. 날씨가 매우 추워지니 건강이 더욱 걱정되는 시절입니다.
오늘은 계당(溪堂)에 대해 알아보고 마지막 흔히 유언에 대해서도 잠깐 소개해볼까 합니다.
사실 매번 지나간 역사의 흔적을 올려보지만 관심이 있으신분도 없으신분도 있으리라 여겨봅니다.
당장 돈이 되는 물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답답할때나 어떻게 남은 삶을 마무리하여야할지 등 생각에 잠겨 있을때는 지나간 선조의 글이 가끔 도움이 될때도 있습니다.
아주 오랜 몇해전 사육신으로 잘알려진 한산인 백옥헌 이개는 사실 사육신사건으로 모두가 사망하였기에 몇대를 양자도 없이 몇백년을 이어오다 양자를 이었는데
아무도 그 연휴를 알려주지 않고 백옥헌 이개후손이니 가문의 자부심은 대단하였지만 평생 한구석에는 족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내가 혹시 노비나 중인 서자 즉 서얼이 아닌지 등 몹시 불안해한 것같은 기색도 있어보이는 것같은 글을 내 나름 추측해 한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하여 백옥헌 이개의 양자가 되었는지 고증자료를 통해 알려드리니 그 고마움을 잊지않으셨고 어쩌면 한평생 마지막 퍼즐을 알고 이후 그 임종의 순간은 편안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자뭇 이런 생각은 사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등 철학적 질문일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 한산이씨 소호문중 만큼 노비 서자 등을 차별없이 동등하게 대하고 하였기에 지금도 별칭 소호리이가는 양반이네 뼈대있는 가문이야
저쪽은 진짜 목은이색의 장남 문양공 후손중에서 제일류의 존숭받은 그런 문중으로 지낼 수 있는 이유아닌 이유중 하나일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안동입향조 수은 이홍조 할배도 서자 휘 효온이 있어지만 휘 효온의 손자가 없어 무후이다보니 그 대를 잇지 못하였습니다.
이제는 현실도 그리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아들딸 구별없는 세상이고 지금은 살아있을때는 딸가진 부모가 존경받는 시절이기에 더욱 그러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요즘은 딸들이 부모에게 아들보다 잘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 더욱 시대가 그렇게 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 오늘 계당(溪堂)을 알아보고자합니다.
한산이씨 소호문중의 계당이라고 하면 누군가는 알수 있지만 대부분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한테 그런 집이 있었어?
수은선생연보(睡隱先生) 휘 홍조의 초기 기록에는
神宗皇帝萬曆二十三年 宣祖大王二十八年 乙未 (신종황제만력이십삼년 선조대왕이십팔년 을미)
명나라 신종 만력 23년, 조선 선조 28년(1595년) 을미년.
十月十七日丙辰 戌時 先生生于全羅道咸悅郡 (시월십칠일병진 술시 선생생우전라도함열군)
10월 17일 병진일 술시에 선생께서 전라도 함열군에서 태어나셨다.
郡卽先生祖妣南宮氏之鄕 (군즉선생조비남궁씨지향)
함열군은 곧 선생의 할머니이신 남궁씨(南宮氏)의 고향이다.
壬辰倭冦 考承旨公避亂 轉徙寓于是郡 (임진왜구 고승지공피란 전사우우시군)
임진왜란 때 아버지 승지공(해산 이문영)께서 피란하여 이곳저곳 옮겨 다니다가 이 군에 머무셨기 때문이다.
先生本宅 在京城樂善坊 (선생본택 재경성낙선방)
선생의 본가는 서울 낙선방에 있었다.
선조 31년(1598년), 선생 4세.
十一月 承旨公卒 (십일월 승지공졸)
11월에 아버지 승지공께서 돌아가셨다.
承旨公以淸才雋望 年三十一而卒 (승지공이청재준망 년삼십일이졸)
승지공은 맑은 재주와 뛰어난 명망이 있었으나, 31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有遺詩若干首 藏于家 (유유시약간수 장우가)
남긴 시가 몇 수 있어 집에 보관되어 있다.
論者以爲有隴西遺響 (논자이위유농서유향)
평론가들은 그 시에 농서(이백의 고향, 즉 뛰어난 시풍)의 울림이 있다고 하였다.
二十七年己亥 先生五歲 (이십칠년기해 선생오세)
선조 32년(1599년), 선생 5세.
二十八年庚子 先生六歲 (이십팔년경자 선생육세)
선조 33년(1600년), 선생 6세.
春 送伯氏漣川公 就學于外祖文忠公西厓柳先生 (춘 송백씨연천공 취학우외조문충공서애유선생)
봄에 형님인 연천공(이창조)을 외할아버지 문충공 서애 류성룡 선생에게 보내 학문을 배우게 하셨다.
漣川公臨別 取芍藥花一枝 揷先生首 (연천공임별 취작약화일지 삽선생수)
연천공이 이별할 때 작약꽃 한 가지를 꺾어 선생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先生每抱花枝 悲思涕泣 花已枯而淚不乾 人皆異之 (선생매포화지 비사체읍 화이고이루불건 인개이지)
선생께서 매번 그 꽃가지를 껴안고 슬프게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니, 꽃은 이미 시들었어도 눈물은 마르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二十九년 辛丑 先生七歲 (이십구년신축 선생칠세)
선조 34년(1601년), 선생 7세.
三十年壬寅 先生八歲 (삼십년임인 선생팔세)
선조 35년(1602년), 선생 8세.
隨淑夫人 覲文忠公 (수숙부인 근문충공)
어머니 숙부인(풍산 류씨)을 따라 외할아버지 문충공(류성룡)을 뵈었다.
文忠公使之前讀書 音吐響亮 文義通曉 文忠公器愛之 (문충공사지전독서 음토향량 문의통효 문충공기애지)
문충공이 앞에서 글을 읽게 하니, 목소리가 낭랑하고 글의 뜻을 다 깨우치고 있어 문충공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고 아끼셨다.
三十一年癸卯 先生九歲 (삼십일년계묘 선생구세)
선조 36년(1603년), 선생 9세.
三十二年甲辰 先生十歲 (삼십이년갑진 선생십세)
선조 37년(1604년), 선생 10세.
挾冊尋師 不廢課業 (협책심사 불폐과업)
책을 끼고 스승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선조 40년(1607년), 선생 13세.
三月 隨淑夫人 奔文忠公喪 (삼월 수숙부인 분문충공상)
3월에 어머니 숙부인을 따라 외할아버지 문충공의 상사에 급히 가셨다.
留學于季舅修巖先生 (유학우계구수암선생)
막내 외삼촌인 수암(류진) 선생에게 머물며 배웠다.
自是 處心行己 俱有章程 (자시 처심행기 구유장정)
이때부터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행함에 모두 규범이 있게 되었다.
修巖先生期以遠大 (수암선생기이원대)
수암 선생께서 그를 크게 되리라 기대하셨다.
광해군 5년(1612년), 선생 18세.
聘淑人英陽南氏 副護軍煌之女 (빙숙인영양남씨 부호군황지녀)
숙인 영양 남씨를 아내로 맞이하셨으니, 부호군 남황(南煌)의 따님이다.
拜修巖先生于京城 時修巖被建在京 先生往候 (배수암선생우경성 시수암피건재경 선생왕후)
서울에서 수암 선생을 뵈었다. 당시 수암이 서울에 머물고 있어 선생께서 가서 문안하였다.
四十一年癸丑 先生十九歲 (사십일년계축 선생십구세)
광해군 8년(1615년), 선생 21세.
秋七月 丁淑夫人憂 (추칠월 정숙부인우)
가을 7월에 어머니 숙부인의 상을 당하셨다.
朝夕饋奠 除魚肉刲爓外 皆親自看撿 不委之婢僕手 (조석궤전 제어육규염외 개선자간검 불위지비복수)
아침저녁으로 제물을 올릴 때, 고기를 썰고 삶는 일 외에는 모두 직접 살피고 점검하며 종들의 손에 맡기지 않으셨다.
九月 歸葬南陽 反哭於樂善洞 (구월 귀장남양 반곡어낙선동)
9월에 남양으로 돌아가 장사 지내고 낙선동으로 돌아와 곡을 하셨다.
墓在大藏洞丑坐之原 與承旨公墓 同洞而異原 (묘재대장동축좌지원 여성지공묘 동동이이원)
묘소는 대장동 축좌(북북동 방향) 언덕에 있으니, 승지공(아버지)의 묘소와 같은 동네이나 언덕은 다르다.
柴毁幾不支 親舊憂之 請少節終不變 (시훼기부지 친구우지 청소절종불변)
슬픔으로 몸이 수척해져 거의 버티지 못할 정도라 친구들이 걱정하여 조금만 절제하기를 청했으나 끝내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四十四年丙辰 先生二十二歲 (사십사년병진 선생이십이세)
여기까지가 안동입향조 수은이홍조의 어린시절 행력입니다.
4세에 부친 승지공 해산공이문영이 임진왜란시 병이 생겨 졸하시고 6세에 작약꽃 한 가지를 꺾어 선생의 머리에 꽂아준 형제의 우애
8세때 서애류성룡 외조부와 공의 아들 수암류진 외삼촌에게 학업을 배우니 그 기대가 매우 강한 대목
18세에 결혼하여 숙인 영양 남씨를 아내로 맞이하고 21세 가을 7월에 어머니 숙부인의 상을 당해 효행이 얼마나 지극하였는지의 일은 수많은 형태로 전해져 모르는이가 없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면 계당(溪堂)은 무엇이지 궁금해 하시느분도 있을것 같습니다.
四十五년 丁巳 (사십오년 정사)
(광해군) 45년 정사년(1617년),
先生二十三歲 (선생이십삼세)
선생의 춘추 23세 때이다.
九月 服闋 (구월 복결)
9월에 복제(상복을 입는 기간)가 끝났다.
廢母議起 (폐모의기)
(인목대비를 폐위하자는) 폐모론이 일어나자,
先生卽束裝南下 (선생즉속장남하)
선생께서는 즉시 짐을 꾸려 남쪽으로 내려오셨다.
時李爾瞻專國 主論廢大妃 (시이이첨전국 주론폐대비)
당시 이이첨이 국정을 독단하며 대비(인목대비)를 폐위하자는 논의를 주도하고 있었다.
先生歎曰 三綱已絶 可以去矣 (선생탄왈 삼강이절 가이거의)
선생께서 탄식하며 말씀하시기를, "삼강(인륜의 도리)이 이미 끊어졌으니, 떠나는 것이 마땅하다" 하시고,
卽束裝南下 輟擧寓于一直縣院洞里 (즉속장남하 철거우우일직현원동리)
곧장 짐을 꾸려 남하하여 과거 공부를 중단하고 일직현 원동리에 머무셨다.
卽先生外舅南公所居 (즉선생외구남공소거)
이곳은 곧 선생의 장인(외구) 남공(南公)이 살던 곳이다.
先生不別營舍 日讀書以自娛 (선생불별영사 일독서이자오)
선생께서는 따로 집을 짓지 않으시고, 날마다 글을 읽는 것으로 스스로 즐거움을 삼으셨다.
築溪堂 就所居之旁 (축계당 취소거지방)
계당(溪堂)을 지으셨는데, 거처하는 집 곁에 자리를 잡아
臨溪結屋 爲讀書棲息之所 (임계결옥 위독서서식지소)
시냇가에 집을 지어 글을 읽고 휴식하는 처소로 삼으셨다.
요약하면
계당(溪堂)은 수은 선생께서 안동 일직에 자리를 잡으시며 지은 공부방입니다. 이는 이후 선생의 후손들이 안동에 정착하게 되는 안동 입향의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안동 일직의 시냇가에 세우신 계당(溪堂)이라는 명칭에는 어쩌면 단순한 건물의 이름을 넘어, 선생의 처지와 철학이 담긴 몇 가지 심오한 의미가 중첩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1. '계(溪)'에 담긴 은거(隱居)의 미학
'계(溪)'는 큰 강(江)이나 바다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산골짜기를 흐르는 작은 시내를 뜻합니다.
세상과의 단절: 광해군 시절, 삼강이 끊어졌다고 탄식하며 과거를 포기하고 내려오신 선생에게 시냇가는 **"세속의 복잡한 정치판에서 벗어난 청정구역"**을 의미합니다.
수은(睡隱)이라는 호와의 연결: '잠든 듯이 숨어 산다'는 호처럼, 깊은 골짜기 시냇가에 집을 지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내면의 수양에 전념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입니다.
2.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과 학문적 계승
유학자들에게 '계(溪)'는 주희(주자)가 무이산의 시냇가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학문을 닦았던 유례를 떠올리게 합니다.
도학(道學)의 전처: 외할아버지이신 서애 류성룡 선생의 학맥을 잇는 입장에서, 시냇가에 집을 짓는 행위는 성리학의 정통성을 따르고 산수(山水) 사이에서 진리를 찾겠다는 학문적 태도의 표명입니다.
3.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철학
계당은 말 그대로 **"시내를 임하고 있는 집"**입니다.
멈추지 않는 정진: 시냇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릅니다(逝者如斯夫, 서자여사부). 선생은 흐르는 물을 보며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닦고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습니다.
유연함과 겸손: 낮은 곳으로 흐르고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가는 물의 성질을 닮아, 난세(亂世)를 살아가는 선비의 유연한 처세와 겸손함을 배우고자 했던 뜻이 담겨 있습니다.
4. 장인(영양 남씨) 가문에 대한 예우와 정착의 상징
연보에 나오듯 계당은 장인인 남공(南公)의 거처 곁에 지어졌습니다.
안동 입향의 초석: 스스로 집을 따로 크게 짓지 않고 시냇가 곁에 작은 집을 얽어(結屋) 거처로 삼은 것은, 타향(안동)에 정착하는 선비의 검소함과 더불어 처가 어른들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계당(溪堂)은,
권력의 탐욕이 들끓던 한양을 뒤로하고 "맑은 물처럼 살며, 더럽혀지지 않은 도(道)를 지키겠다는 수은 선생의 청고(淸高)한 선비 정신이 응축된 장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극히 일부의 의미만을 나타낼 수도 있고 계당(溪堂)의 수없이 많은 의미를 알기에는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기에 아직도
우리는 그 정답을 모른다가 정답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소에 수은이홍조 안동입향조 할배의 말씀 중 가장 오래되고 귀중한 마지막 유언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은(睡隱) 이홍조 선생께서 66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시던 해의 긴박하고도 고결한 기록입니다.
顯宗大王元年 (현종대왕원년)
현종 대왕 1년(1660년).
先生六十六歲 (선생육십육세)
선생의 춘추 66세 때이다.
二月 移寓眞城方田村 (이월 이우진성방전촌)
2월에 진성(眞城)의 방전촌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蓋欲轉向日月山之計也 (개욕전향일월산지계야)
대개 일월산(日月山)으로 옮겨 가고자 계획하신 것이었다.
卜興臯 在眞城北山水淸奇 翠壁環繞 (복흥고 재진성북산수청기 취벽환요)
흥고(興臯)라는 곳에 터를 잡으셨는데, 진성 북쪽에 있어 산수가 맑고 기이하며 푸른 벽이 둘러싸고 있었다.
先生欲置溪亭 有詩曰 (선생욕치계정 유시왈)
선생께서 시냇가 정자(계정)를 세우고자 하시며 시를 지어 읊으셨다.
山色杯中落 (산색배중락)
산 빛은 술잔 속에 떨어지고
川聲席下鳴 (천성석하명)
시냇물 소리는 자리 아래에서 울리네
他年畫圖裏 (타년화도리)
훗날 그려낼 그림 속에서도
難寫故人情 (난사고인정)
옛사람의 정(이 그리운 마음)은 베끼기 어려우리
三月 感疾十三日 考終于寓所 (삼월 감질십삼일 고종우우소)
3월에 병환을 얻으시어, 13일에 머무시던 곳(우소)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遺令勿求輓 (유령물구만)
유언으로 만사(輓詞,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구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先生嘗語家人曰 (선생상어가인왈)
선생께서 일찍이 집안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今人爲輓 多虛辭溢語 (금인위만 다허사일어)
"요즘 사람들이 짓는 만사는 허황된 말과 넘치는 미사여구가 많다."
使死生異跡 甚無謂 我死勿爾 (사사생이적 심무위 아사물이)
"죽은 뒤와 살아생전의 행적이 다르게 (과장되게) 만드니 매우 의미 없는 짓이다. 내가 죽거든 그렇게 하지 마라." 하셨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수은(睡隱) 이홍조 선생께서 임종 직전에 남기신 **'유령물구만(遺令勿求輓)'**이라는 유훈과, 그 직전에 읊으신 흥고(興臯)의 시는 선생의 일생을 관통하는 **'정직(正直)'**과 **'은거(隱居)'**의 철학이 응축된 대목이다.
1. 유령물구만(遺令勿求輓): "거짓된 칭송으로 나를 가두지 마라"
이 대목은 수은 선생의 인간적 면모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선비 정신의 정수입니다.
배경 설명: 당시 조선의 사대부 사회에서 만사(輓詞, 죽음을 애도하는 시)는 고인의 생애를 찬양하는 관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허사(虛辭)와 일어(溢語)의 경계: 선생은 "허황된 말과 넘치는 미사여구"를 경계하셨습니다. 이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포장된 명성'보다, 스스로에게 떳떳한 '실질적 삶'을 중시했음을 의미합니다.
사생이적(死生異跡): "살아생전의 행적과 죽은 뒤의 기록이 달라지는 것"을 가장 큰 수치로 여기셨습니다. 이는 **언행일치(言行一致)**를 평생의 신념으로 삼았던 선생의 엄격한 자기 절제를 보여줍니다.
수은(睡隱)의 완성: '잠든 듯이 숨어 산다'는 호처럼, 죽음의 순간까지도 세상의 화려한 조명을 거부하고 고요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한 철저한 은일(隱逸) 정신의 마침표입니다.
2. 흥고(興臯)의 시 분석 및 해설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진성 북쪽의 흥고에 정자를 세우려 하며 읊으신 시는 선생의 도학적 경지를 보여준다.
山色杯中落 (산색배중락)
산 빛은 술잔 속에 떨어지고
川聲席下鳴 (천성석하명)
시냇물 소리는 자리 아래에서 울리네
해설:
물아일체(物我一體): 산의 빛깔이 술잔 속에 들어오고, 물소리가 내가 앉은 자리 밑에서 들린다는 것은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 경지입니다. 이는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상태를 시각과 청각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청렴과 안빈낙도: 화려한 연회장 대신 산수 사이에서 작은 잔을 기울이는 노학자의 평온함이 느껴집니다.
他年畫圖裏 (타년화도리)
훗날 그려낼 그림 속에서도
難寫故人情 (난사고인정)
옛사람의 정(이 그리운 마음)은 베끼기 어려우리
해설:
진정성(眞情)의 강조: 풍경은 그림으로 베껴낼 수 있지만, 그 풍경 속에서 느꼈던 **'인정(情)'**과 **'도(道)'**는 겉모습만으로는 전할 수 없다는 뜻이다.
불가설(不可說)의 경지: 이는 앞서 언급한 '만사(輓詞)'를 거부한 이유와 맞닿아 있습니다. 글이나 그림 같은 '형식'은 결국 마음의 본질을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깊은 성찰이다.
이를 요약해보면
수은 이홍조 선생의 마지막은 참됨(眞)으로 요약된다.
시를 통해서는 자연과의 순수한 합일을 노래하셨고,
유훈을 통해서는 세상의 가식적인 칭송을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완성하셨다.
이 기록은 이후 안동 한산 이씨 가문의 후손들에게
"이름을 얻으려 하기보다 실천에 힘쓰고, 겉치레보다는 내면의 충실함을 중시하라"는 강력한 가훈이다.
그래서 일까 ?
수은 선생께서는 마지막에 그토록 가고 싶어 하셨던 일월산(日月山)은 기운이 맑기로 유명한 산이다.
끝까지 도(道)의 근원을 향해 나아가려 했던 선생의 마지막 의지가 아닐까도 싶다.
그럼 유령물구만(遺令勿求輓)은 이 시대에 무엇을 남기고 있을까?
당시 조선 사대부 사회에서는 만사(輓詞)가 가졌던 수많은 폐단이 있었다.
수은 선생께서는 왜 그토록 단호하게 "내 죽음에 만사를 구하지 마라"고 하셨는지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만사는 오늘날의 추도사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복잡한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다.
1. 허사(虛辭)와 일어(溢語): "칭송이 도를 넘다"
선생께서 지적하신 '허사(거짓말)'와 '일어(넘치는 말)'는 당시 만사의 가장 큰 고질병이었다.
천편일률적인 찬사: 고인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느냐와 상관없이, "공자가 다시 살아온 듯하다", "하늘이 내린 현인이다"라는 식의 과장된 표현을 쓰는 것이 유행이다.
문학적 기교의 장: 슬픔을 표현하기보다는 누가 더 화려하고 어려운 한자를 써서 문장 실력을 뽐내느냐는 식의 '문학 경연'처럼 변질되어 있었다.
수은의 비판: 평생을 '잠든 듯 숨어 살며(睡隱)' 내면의 진실을 닦아온 선생에게, 이러한 번지르르한 빈말들은 오히려 자신의 삶을 모독하는 행위로 느껴졌을 것이다.
2. 사사생이적(死生異跡): "삶과 기록이 따로 논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살아생전의 행적(生)과 죽은 뒤의 기록(死)이 달라지는 것'에 대한 공포와 혐오이었다.
당쟁의 도구: 당시 만사는 누가 써주었느냐에 따라 그 집안의 정치적 위상이 결정되기도 했다. 유명한 대신이나 학자에게 만사를 받으려고 애쓰는 모습은 선생이 보기에 구걸과 다름없었다.
가문의 과시: 후손들이 문중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고인의 삶을 부풀려 기록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은 선생은 자신의 후손들이 그런 '기록의 조작'에 매달리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다.
3. 은일(隱逸)의 지조: "끝까지 숨어 있고 싶다"
선생의 호 '수은(睡隱)'에 담긴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조용한 퇴장: 선생은 폐모론에 항거하여 낙향했고, 병자호란의 치욕에 통곡하며 은거하셨다. 세상의 명예를 발등의 먼지처럼 여기셨던 분이기에, 죽어서 이름이 세상에 떠들썩하게 오르내리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진정한 애도: 진심 어린 눈물 한 방울이 화려한 만사 백 장보다 낫다고 보신 것이다.
이는 당시 사회상에 비춰본 결론으로
그 당시 만사는 '죽은 자를 위한 위로'**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한 장식'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수은 선생의 유언은 단순히 겸손함의 표현이 아니라, "나의 죽음을 이용해 가문을 과시하지 말고, 내가 평생 지켜온 정직과 은거의 도리를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달라"는 처절하고도 맑은 선비의 외침이었다.
이러한 선생의 뜻은 훗날 대산(이상정) 선생 등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져, 안동 한산 이씨 문중이 '겉치레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가풍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수은 선생의 이 유언 덕분인지 우리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선생의 삶이 얼마나 실질(實質)에 충실했는지를 더 깊이 신뢰하게 된다.
그 증거가 무엇인지 아직도 우리는 모르면 안된다.
수은(睡隱) 이홍조 선생께서는 타인을 위한 만사나 제문은 정성껏 지으셨으면서도, 본인의 만사만은 금지하신 점은 유학자로서의 '엄격한 자기 객관화'와 '이타적 예우'라는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는 선비가 가져야 할 세 가지 큰 도리가 담겨 있다.
1. 타인에 대한 예(禮)와 본인에 대한 의(義)의 차이
유교 사회에서 타인의 죽음에 만사나 제문을 짓는 것은 '산 자가 죽은 자에게 갖추는 마지막 예우'이다.
타인에게는 관대하게: 벗이나 스승, 친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삶을 기리고 슬픔을 표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였다. 선생이 타인을 위해 글을 쓴 것은 그 사람의 덕을 기려 유족을 위로하고, 그 선행이 잊히지 않게 하려는 '배려와 예우'였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칭송은 '자화자찬'이나 다름없다고 보셨다. 스스로를 '잠든 듯 숨어 사는 사람(睡隱)'이라 정의한 분이 죽어서 자신을 화려하게 수식하는 것은 평생 지켜온 '겸양의 도리(義)'에 어긋난다고 판단하신 것이다.
2. '거울'로서의 글쓰기
선생에게 글은 그 사람의 삶을 비추는 거울과 같았다.
타인의 만사: 타인의 삶을 기록할 때는 그가 남긴 좋은 발자취를 찾아내어 후세의 본보기로 삼는 '권선(勸善)'의 목적이 컸다.
자신의 만사: 하지만 자기 삶을 스스로 혹은 후손이 타인의 손을 빌려 꾸미는 것은 '거울을 왜곡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나는 내 삶을 내가 알기에 더 이상 꾸밀 것이 없다"는 당당함과 정직함이 "물구만(勿求輓)"이라는 짧은 문장에 담겨 있는 것이다.
3. 죽음을 대하는 군자의 담담함
선생은 죽음을 앞두고 "산색배중락(山色杯中落)"이라 읊으셨다.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여 돌아가는 마당에, 구차하게 인간의 문자로 자신의 생애를 평가받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다.
실천적 지성: 말(만사)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남긴 실천(행적)이라고 믿으셨다. 화려한 만사가 없어도 선생이 지킨 지조와 계당의 정신은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 시냇물처럼 흐를 것임을 아셨던 것이다.
이로 인해 나는 늘 수은이홍조 안동입향조 할배의 계당 - 계정 - 우소에서
"유령물구만(遺令勿求輓)" 유훈을 잊을 수가 없다.
다시말해 선생께서는 타인의 만사를 쓰신 것은 "당신은 참으로 훌륭한 삶을 사셨습니다"라는 따뜻한 작별 인사였고, 본인의 만사를 거부하신 것은 "나는 오직 하늘과 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그만이다"라는 서슬 퍼런 자기 고백이었다.
이는 곧 훗날 별칭이 소퇴계이신 대산(이상정) 선생 같은 퇴계학파를 다시 꽃피운 거유 대학자를 탄생시켰고 우리 한산이씨 소호문중 별칭이 소호리이가는 대단한 양반이야 학문이 시대 최고 등 세상사람들이 존숭하는 모든 단어의 수식어가 된 밑거름이 되었고 이는 겉치레를 버리고 '실질적인 공부(實學)'에 매진하게 한 정신적 뿌리가 되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아직도 불천위제사를 지내는 이유중 하나가 되어버린 기록이 아닐까?
이에 오늘을 사는 해은 이대원이 2026년 1월 12일 시간을 내어 글을 지어본다.
출처: 수은유고, 포탈 온라인정보, 인공지능 등을 참조하였습니다.
저작권을 지켜주세요. 이글은 해은 이대원이 노력하여 작성한 사실기록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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