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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를 찾아서 ① (法寶宗刹 慶南 陜川 伽倻山 海印寺)
-부도전(浮屠田) 및 비림(碑林)-
지난 1월 6일 가산지관(伽山智冠) 스님의 영결식과 다비식을 참관하고 나서 홍제암을 둘러 보고 다시 해인사로 향했습니다. 시간이 넉넉할 줄 알았는데 해도 많이 기울고 있었습니 다. 부도전의 고승 사리탑은 영결식 전 찾아 참배를 드리고 사진도 담았었습니다. 그러나 다 담지 못하고 빠진 것도 있었는데 재차 찾아 담았습니다. 부도전의 사리탑을 통해서 역 대 고승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수행하셨는지 저절로 가슴이 여며지고 고개가 숙여지며 합 장이 되었습니다.
자운대율사 사리탑비
해인사를 들어와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일주문 밖의 부도밭인데 이 부도밭 옆에는 웅장 한 근래의 고승의 사리탑이 여러 기가 있습니다. 자운대율사(慈雲大律師), 성철대종사(性 徹大宗師), 혜암대종사(慧菴大宗師), 일타대종사(一陀大宗師) 등의 사리탑이 조성되어 있 습니다. 이 중 성철대종사의 사리탑은 세간에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습니다. 제일 먼저 만나는 고승의 사리탑 및 비는 자운대율사입니다.
계단 석주에 한글로 자운대율사사리탑비(右), 불기2542년(1998) 3월 3일(左)이라 각자되어 있습니다.
자운대율사의 사리탑 및 행적비
스님은 1911년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 41번지에서 아버지 김자옥(金慈玉), 어머니 안동장씨(安東張氏) 사이의 팔남매 가운데 셋째 아들이자 다섯 번째 자식으로 태어났습니 다. 7세 때 서당에서 동몽선습을 비롯한 사서삼경 등의 유서를 공부하다가, 1926년 16세 의 나이에 출가의 뜻을 굳히고, 어머니를 따라 오대산 상원사에 갔다가 혜운 경윤(慧雲敬 允) 스님으로부터 순치황제 출가시를 듣고 출가발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후 부모의 반대 를 무릅쓰고 해인사로 달려가 팔만대장경 판전에서 일만배를 하고 1927년 혜윤스님을 은 사로 득도(得度)하였습니다.
출가이후 1933년까지 해인사 강원에서 사교과, 범어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공부하고, 범어 사ㆍ선암사ㆍ해인사ㆍ표훈사ㆍ불영사 등 선원에서 수행했으며, 1934년 24세 때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일봉 경념(一鳳敬念)율사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고 그의 계맥을 전승 하게 되었습니다. 비구계를 받은 이후 3년 동안 울진 불영사에서 장좌불와의 결사정진을 하였으며, 1938년 28세 때 도봉산 망월사에서 용성(龍城)대종사에게 법의 인가를 받았습 니다. 1940년 이후 10여 년간 제방선원에서 정진하였으니, 北으로는 금강산 마하연과 南으로는 학성선원ㆍ불영사ㆍ김용사ㆍ통도사ㆍ백양사 등 선원에서 정진하였습니다. 서울 대각사 에 주석하면서 당시 희귀한 율장을 구할 수 없어 2년여에 걸쳐 삼복 염천에도 두터운 장삼 을 입고 날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만속장경(卍續藏經)에 실려있는 오부율의(五部律藏) 과 그 주소(註疏)를 모두 필사(筆寫)하여 율장(律藏)을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사미율의(沙彌律儀) 5천부, 사미니율의(沙彌尼律儀) 5천부, 범망경(梵網經) 1만부 등 많은 율전(律典)을 출간 분포하였습니다.
이후 조계종 원로, 총무원장, 재단법인 대각회 이사장, 종단 단일계단전계화상, 동국역경 원장, 동국역경사업진흥회 이사장 등에 취임하여 종단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습니다. 風逍遙來 去隨明月自在去, 라는 임종게를 쓰신 다음 서쪽을 향하여 합장하고 단정히 앉아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명하면서 조용히 입적하시니 향기가 진동하고 묘음이 청아하였으며 염불소리와 함께 입으로부터 오색광명이 서쪽하늘을 가득 메웠다고 합니다. 세수 82세, 법랍66년이었습니다. 7일째인 2월 13일 해인사 연화대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장으로 거행하였는데. 다비 후 은행크기의 사리 19과와 녹두크기의 사리 5천여 수가 출현하였으 나 생전에 사리를 찾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큰 것만 수습하여 이를 해인사, 감로사, 경국 사에 나누어 봉안하였습니다.
자운대율사원명 사리탑(慈雲大律師圓明 舍利塔)
여기에 조그마한 안내비명을 옮겨 적어 봅니다
자운성우(慈雲盛祐) (1911~1992)
『빙설과 같이 계율을 지키시며 한국불교의 율풍을 진작시키신 중흥율조 자운대율사의 영롱한 사리를 여기 탑을 세워 봉안합니다. 불기 2542(1998)년 3월 3일』
자운대율사 행적비(慈雲大律師 行蹟碑)
자운성운(慈雲盛祐) (1911~1992)
『계율정신과 그 실천을 몸소 보임으로서 한국불교의 율풍을 진작시키신 중흥율조 자운 대율사의 행적을 여기에 길이 남깁니다. 불기2542(1998)년 3월 3일』
"율사께서는 숙세의 원력으로 이 땅에 태어나 동진출가하여 일찍이 경율론 삼장을 연찬하 던 중 율학에 더욱 전념하여 율장의 간행ㆍ유포ㆍ강설ㆍ수계의식정비, 수계산림 상설 등 율풍(律風)의 선양에 일생을 바쳤다. 이에 조선조 오백년과 일제강점기동안 훼손되었던 한국불교의 자주적 율풍이 진작되어 한국불교 교단을 정립하고 승가의 기강을 확립하여 이 나라 불교의 새로운 면모를 이룩하였다." -지관(智冠)스님이 쓴 비명 중에서-
혜암당 성관대종사 사리탑 및 행적비
자운대율사 윗쪽 좌편에 자리한 혜암대종사의 사리탑 및 행적비입니다.
혜암 성관(慧菴性觀) 스님은 1920년 3월 22일 전남 장성군 장성읍 덕진리 720번지에서 출 생하셨고, 속성은 김씨(金氏) 본관은 김해이며, 아명은 남영(南榮)이었습니다. 부친은 김 원태(金元泰)이며 모친은 금성 정씨(丁氏)입니다.
14세에 장성읍 성산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동리의 향숙(鄕塾)에서 사서삼경을 수학하고 제자백가를 열람하고 불서를 즐겨 읽었습니다. 17세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조사어록을 보 다가 출가를 결심하고 귀국하였습니다. 1946년 27세에 합천 해인사에 출가하여 인곡(麟 谷)스님을 은사로, 효봉(曉峰)스님을 계사로 수계득도하여 성관(性觀)이라는 법명을 받았 습니다. 가야총림선원에서 효봉스님을 모시고 일일일식(一日一食)과 장좌불와(長坐不臥) 를 하며 첫 안거를 하였고, 1947년 28세에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ㆍ우봉ㆍ자운ㆍ보문ㆍ도 오ㆍ법전ㆍ일도 스님등 20여 납자와 더불어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를 하였 습니다. 그 후 오대산 상원사 청량선원, 금정산 범어사선원 등에서 용맹정진하였습니다.
1951년 32세에 해인사 장경각에서 은사인 인곡스님과 문답하고 인가를 받았으며 혜암당 (慧菴堂)이란 법호를 받았습니다. 이후 통영 안정사 천제굴, 설악산 오세암, 오대산 서대, 태백산 동암 등지에서 용맹정진하였으며, 1957년 38세 때 오대산 영감사 토굴에서 용맹정 진하던 중 심안이 열리어, "미혹할 땐 나고 죽더니 깨달으니 청정법신이네. 미혹과 깨달 음 모두 쳐 부수니 해가 돋아 하늘과 땅이 밝도다(迷則生滅心 悟來眞如性 迷悟俱打了 日 出乾坤明)라는 오도송을 읊었습니다.
이로부터 오대산 오대, 동화사 금당선원, 통도사 극락암선원, 묘관음사선원, 천축사 무문 관 등 제방선원에 나아가 더욱 정진하였습니다.
스님은 이후 해인총림 유나(維那), 해인사주지, 부방장 등을 역임하면서 해인총림발전과 총림대중의 용맹정진 가풍진작을 위하여 진력하였습니다. 제방선원에서 당대의 선지식인 한암, 효봉, 동산, 경봉, 전강 선사를 모시고 45년동안 일일일식(一日一食)ㆍ오후불식(午後 不食), 장좌불와(長坐不臥)ㆍ용맹정진을 하여 위법망구(爲法忘軀)ㆍ두타고행(頭陀苦行)은 가히 본분납자의 귀감이되었고, 계율이 청정함은 인천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조계종원로위원, 원로회의의장에 추대되었고, 성철스님 원적후 해인총림방장에 추대되었 고, 1999년 제10대 조계종종정에 추대되어 종단의 안정과 화합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 다.
2001년 12월 31일에 해인사 원당암 미소굴에서 문도를 모아 놓고 "인과가 역연하니 참선 잘해라."는 당부를 한 후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마음도한 머물 바 없도다. 무쇠소 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我身本非有 心亦無所住 鐵牛含月 走 石獅大哮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니 세수 82세요 법랍 56년이었습니다.
혜암대종사 사리탑(慧菴大宗師 舍利塔)
혜암성관(慧菴性觀) (1920~2001)
『청정한 계행(戒行)과 철저한 두타고행(頭陀苦行)으로 평생을 용맹정진하시고 "공부하다 죽어라" 사자후 하시며 선풍을 진작시킨 혜암대종사의 오색 영롱한 사리를 이곳에 탑을 세워 봉안합니다.』
불기 2551(2007)년 음력 11월 17일 혜암대종사 문도회
혜암대종사 행적비 (慧菴大宗師 行蹟碑)
『출가이후 평생을 올곧게 수행정진하시고 해인총림 제6대 방장(方丈)과 대한불교조계종 제10대 종정(宗正)을 역임하시며 종풍(宗風)을 선양하시고 전법도생하신 혜암대종사의 행 적을 비석에 새겨 길이 남깁니다.』
불기 2551(2007)년 음력 11월 17일 혜암대종사 문도회
자운대율사 사리탑에서 바라본 일타스님 사리탑
동곡당 일타대종사 사리탑(東谷堂 日陀大宗師 舍利塔)
일타대종사의 사리탑및 행적비는 자운대율사 사리탑 윗쪽 우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즉 혜암대종사 사리탑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친인척 41명이 출가한 것으로 유명한 동곡일타(東谷日陀)스님은 1929년 충남 공주에서 연안 김씨 김봉수(金鳳秀)공을 아버지로, 광산 김씨 김상남(金上男)씨를 어머니로 하여 4남매 중 삼남(三男)으로 태어났습니다. 1942년, 14세에 양산 통도사로 출가하여 고경(古鏡)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셨고, 1946년, 송광사 삼일암의 수선안거(修禪安居)를 시작으로 참선정진하는 한편, 1949년 통도사 강원 의 대교과를 졸업하였고,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 지하였으며, 22세 때인 1950년부터 진양 응석사와 범어사, 성주사 선원 등에서 금오ㆍ동 산ㆍ성철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였습니다. 니다.
1954년 오대산 서대에서 생식과 장좌불와로 그해 하안거를 마친 스님은 하안거 해제 후 7 일 동안 매일 3천배 용맹정진을 하고는 "굳은 심지가 없이는 생사를 해결할 수 없다."고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할 것을 발원하며 오른쪽 네 손가락 열두 마디를 부처님 전에 촛불 로 태워 올리는 연비공양을 감행하였고, 홀로 태백산 도솔암으로 들어가 6년동안 동구불 출(洞口不出)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좌불와(長坐不臥) 등 용맹정진하였습니다
1962년부터는 조계종 종회의원ㆍ역경위원ㆍ교육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통합종단에 정법 의 기틀을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1971년부터 가야산 해인총림 선원장ㆍ율원장ㆍ율 주ㆍ금강계단 교수아사리가 되어 후학들을 양성하는 한편, 인도ㆍ태국ㆍ미국 등 세계 여 러 나라를 다니면서 한국불교를 전파하였습니다.
스님은 해인사 지족암에 주석하시면서 모든 이에게 해탈법문을 열어 청량을 안겨 주었으 며, 대한불교조계종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으로서 출가하는 모든 승려들에게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를 수계하는 중임을 맡으셨습니다.
그후 조계종원로회의 의원 은해사 조실등을 역임하시며 후학을 지도하셨습니다.
1996년(68세)부터 오른손에서 한 달에 한두 과 또는 세 과씩 나와 열반하시기 전까지 1백 여 과의 사리가 나왔으며 그 사리 중의 일부는 증장(增長)하거나 분신(分身)을 하여 여러 개로 나누어지기도 했다 합니다.
"다음 생에는 지구상의 최강국인 미국에서 태어나 거룩한 상호를 갖추고, 대도(大道)를 이루어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이 땅의 불교를 세계에 펼치리라." 하고 서원 했다고 합니다.
1999년 11월 22일 미국 하와이로 건너간 스님은 11월 29일 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一天白日露眞心 하늘의 밝은 해가 참 마음 드러내니 상좌들이 법구를 국내로 이운하여 은해사 앞뜰에서 영결식을 봉행하고 다비를 하니 영롱 한 사리 542과가 드러나 모든 분들이 환희심을 내었습니다.
저서로는 《범망경보살계》전5권,《시작하는 마음》《영원으로 향하는 마음》《기도》 《보살마음 중생마음》《집착을 버리면 행복이 보인다》등 많은 저서가 있습니다.
전지조인통달삼장(傳持祖印通達三藏) 일타대종사 행적비
동곡당 일타대종사 사리탑ㆍ비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룬 사리탑은 단순구조이면서 법고창신의 정신을 담고 있다. 사리탑은 석종형 양식에서 현대적인 사각형으로 양감있게 구성하고 네 군데 사자상은 사실적 조각을 억제한 형상으로 표현하였으며 비는 전통적인 용과 거북을 꽃구름과 연꽃잎으로 장식하여 현대적인 감각으로 표현하였다.
이 사리탑ㆍ비는 전통성을 담보하여 수작업으로 제작한 우리시대의 새로운 조형작품 이다.』 불기2552. 2008. 11. 19. 음10.12 해인사 지족암 동곡동문회
빗돌의 조각 모습
일타대종사의 사리탑을 예참하고 성철스님의 사리탑으로 향했습니다.
퇴옹당 성철대종사 사리탑 전경
나를 찾아가는 禪의 공간
『성철스님((1912~1993)은 해인총림의 방장과 대한불교조계종 6대ㆍ7대 종정을 역임하 며 올곧은 수행정진과 중생을 향한 자비의 실현, 서릿발같은 사자후로 근ㆍ현대 한국불교 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철스님의 사리를 모신 이 탑은 통도사 적멸보궁을 기본형으로 하여 우리나라 전통 부도 의 아름다움을 현대적 조형언어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가운데 구는 완전한 깨달음과 참된 진리를 상징하고, 등을 살짝 맞대고 있는 반구는 활짝 핀 연꽃을표현하며, 크기가 다른 정사각형의 3단 기단은 계ㆍ정ㆍ혜 삼학과 수행과정을 의미한다.
사리탑을 둘러싸고 있는 참배대는 앞쪽에서 뒤쪽으로 가면서 서서히 높아졌다가 낮아지는 데, 이것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시간의 무한성을 상징한다.
1998년 성철(性徹)스님의 열반 5주기에 회향하였으며, 여기는 성철스님께서 늘 말씀하신 "자기를 바로 보라"는 가르침이 살아있는 선(禪)의 공간이다.』
우선 성철대종사의 사리탑에 예를 올렸습니다.
퇴옹당 성철대종사 사리탑(退翁堂 性徹大宗師 舍利塔)
성철스님은 속명은 이영주(李英柱), 법명은 성철(性徹), 법호는 퇴옹(退翁)입니다. 성철스님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불교계는 물론 우리사회의 지도자이자 어른이었습니 다.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 제6대 종정에 취임하면서 내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 는 법어는 세간의 인구에 회자되어 화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특히 스님의 장좌불와(長坐不 臥)와 동구불출(洞口不出)은 유명하여 수행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 아래 봉암사 결사를 주도하며 수행가풍을 진작시켰으며 1967년 해인총림 해인사 방장으로 취임한 뒤 동안거 기간 동안 ‘백일법문(百日法門)’을 설 하여 불교전반에 흐르는 사상은 중도에 있음을 설하셨습니다. 정수님께서 백일법문 연재 중입니다. 이 백일법문을 읽으면 불교전반을 다 공부하게 됩니다. 관심을 기울여 주세요.
스님은 불전 3000배로 유명하여 3000배를 하지 않고는 친견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절 을 하면서 하심을 배우고 마음을 비우라는 의미였습니다.
철저한 수행과, 무소유의 절약정신, "자기를 바로보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스님은 우리시대의 부처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사리탑 조형의 의미
『가운데 구는 완전한 깨달음과 참된 진리를 상징하고, 등을 살짝 맞대고 있는 반구는 활짝 핀 연꽃을표현하며, 크기가 다른 정사각형의 3단 기단은 계ㆍ정ㆍ혜 삼학과 수행 과정을 의미한다.』
사리탑 참배대
사리탑은 모든 공간에서 참배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리탑을 둘러싸고 있는 참배대는 앞쪽에서 뒤쪽으로 가면서 서서히 높아졌다가 낮아지 는데, 이것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시간의 무한성을 상징한다.』
성철대종사 행장을 읽고 있는 모습입니다.
비림(碑林)
성철스님의 사리탑을 예참하고 되돌아 나와 일주문으로 향하면 바로 비림입니다. 비석이 수풀처럼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여기에는해인사 사적비와 20여 기의 공덕비 들이 있습니다. 비림 앞을 비석거리라 합니다.
가야산해인사 사적비(伽倻山海印寺 事蹟碑)
길상탑(吉祥塔) 보물 제1242호)
『해인사 절 입구의 일주문에서 남쪽으로 약 50m 지점에 서 있는 탑으로, 일반적인 절의 건물 배치와는 무관하게 길가에 세워져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구조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바닥돌 위에 아래층 기단을 받고, 윗면에 얇은 괴임을 새긴 후 위층 기단을 얹었다. 위층 기단은 하나의 돌로 짜여져 다른 탑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모습이다. 탑신은 1층의 몸돌이 2ㆍ3층의 몸돌보다 크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각 층 모두 5단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전체적으로 경쾌한 느낌을 준다. 꼭대기 의 머리장식은 네모난 받침돌만 남고 모두 없어진 상태이며, 받침돌 윗면에 철주를 꽂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탑에서 나온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 중 조그만 탑이 157개가 있 으나, 소탑은 원래 99개, 77개를 두는 것이 원칙이므로 19개는 없어진 듯 하다. 탑에 대한 기록인 탑지(塔誌)는 4장인데, 통일신라 후기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글에는 신라 진성여왕 8년(895) 통일신라 후기의 혼란 속에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 된 스님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탑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소탑 (小塔)으로, 탑지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전통사찰총서에서-
인곡대선사비(麟谷大禪師碑)
천진도인으로 유명한 인곡대선사(麟谷大禪師)는 법명은 창수(暢洙)이고 법호는 인곡(麟谷) 입니다. 1895년 2월 15일 전남 영광군 법성에서 태어나 14세에 고창 문수사에서 금성화 상을 은사로 득도했습니다. 1914년 백양사에서 금해율사를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습니 다.
1920년 백양사 만암스님 회상에서 대교과를 마치고 팔공산 동화사, 예산 보덕사에서 보월 선사 회상에서 정진하고 오대산 상원사에서 수월ㆍ혜월ㆍ한암선사 회상에서 정진하였습 니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돌탑처럼 움직이지 않고 정진한다고 하여 '돌탑수좌'로 불렸다 고 합니다.
1923년 도봉산 망월사에 용성스님을 찾아가 법거량하여 인가를 받고 인곡(麟谷)이란 법호 를 받았습니다. 그후 용성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고 소문이 나 많은 납자들이 몰려았 다고 합니다.
1926년 30세의 나이에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대우를 받으려 한다 거나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말수가 없는 스님은 늘 겸손하며 계율이 청 정했다고 합니다. 스님의 제자로 조계종 종정을 지낸 혜암스님은 스승의 영정을 벽에 걸어 두고 스승을 뛰어넘는 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1946년엔 해인사에 주석하였고, 1953년 통도사 조실을 지냈습니다.
1961년, 스님은 열반 12일전부터 단식한 후인 음력 7월14일에 "허깨비 꿈과 67년세월이 여, 내 이제 가노니 흐르는 물이 하늘에 뻗침이로다(夢幻空華六十七年 麟谷煙沒流水連 天)." 하고 게송을 읊은 후 머리를 삭발하고 목욕을 한 다음 "이제 속세를 떠나겠다" 하니 상좌 포공스님이 "내일은 선원 하안거가 해제하고 우란분절로 좋은 날이니 내일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니 "좋고 나쁜 일이 따로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포공스님은 "큰스님 경계는 그렇지만 미혹한 중생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간청하니 "그렇게 하지." 하고 대답했다 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인 15일 오전 8시 조용히 원적에 들었다고 합니다.
원경왕사비(元景王師碑) 보물 제128호
안내문을 옮겨 봅니다.
『고려시대의 고승 원경왕사(1045~1114)를 기리고자 인종 3년(1125)에 세운 비다. 가야면 야천리 반야사 터에 있던 것을 1961년 해인사 경내로 옮겨 왔다. 거북받침돌, 비몸, 지붕돌 등을 갖추었고, 각 부분이 얇은 것이 특징이다.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1년(1104)에 승통이 되었다. 예종 때 왕사가 된 후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였다.』
왕사의 속성은 신씨(申氏)이고 이름은 낙진(落眞)으로 세납 70세 법납 62세로 입적하자 예 종은 '원경(元景)'이란 시호를 내렸습니다.
원경왕사비 편액. 지관스님 글씨
비몸(碑身)
원경왕사비 모습
비문은 김부일(金富佾)이 짓고 글씨는 이원부(李元符)가 썼다고 합니다.
원경왕사비 비각 모습
이제 발걸음을 해인사 일주문으로 옮깁니다. 인적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직후라 언제 사람 들이 운집했나 싶게 한산합니다. 다음은 일주문에서 보경당, 구광루까지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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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세한 설명에 감사합니다. _()_
꼼꼼히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사리탑이 저렇게 장엄된 연유는 계행히 청정하고 수행이 남다르고 상구보리 하화중생의이 되었기 때문일 터 입니다.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
글을 올리려면 쓰고 다듬고 자료수집하는 시간이 만만찮은데 다만 읽기만 하기도 시간이 모자라네요
정성으로 쓴글 그저 못읽고 가면 죄송할 따름입니다. _()_
조금씩 천천히 보세요. 사진은 그대로 있으니... 시간이 나실 때마다 조금씩 살펴보세요. 감사합니다. _()_
꼼꼼하고 디테일한 설명~~짱입니다.
그리고 위 사진 속의 여인이 백우님?
감사합니다. 제 사진은 여기에 없습니다. ^^ 사찰순례기가 많으니 보시면 백우사진도 많습니다. 그 여인은 비니초님입니다. _()_
첨~ 까페 와서 둘러보다가 윗글 읽고 사진 속 여인이 백우님인줄 알았어요.
사찰 순례기 가서 백우님 사진 봤어요. "미남이시네요"라고 해야지요~ㅋㅋ
이 번 삼사순례는 참석 못 할 거같습니다~^^
큰스님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인 듯합니다. 백일법문을 올려야 하는데 요즘 게으름을 피우다보니 잘 보고 갑니다.
해인사는 법보사찰이요 총림이다 보니 큰 스님들이 안 거쳐 가신 분이 없을 것입니다. 과거 경허스님, 용성스님을 비롯 기라성 같은 고승들의 발걸음이 머물지 않은 분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성철스님은 해인사의 상징이 되셨습니다. 백일법문은 천천히 올리세요. 많은 분들이겨 보았으면 합니다. _()_
저 위에 있는 여자 옷 넘 많이 입어 굴러 갈 것 같아요. ㅎㅎㅎ
그날 날씨가 쌀쌀하여 모두 그러했습니다. _()_
눈과 마음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것을 보고 느끼며 머리 숙이고 갑니다. 백우님 수고에 편히기는 이자리가
정말로 감사 합니다. 명찰중의 명찰 같 습니다. -()()()_ 해인사 -()()()_
감사합니다. 고승의 행장을 살피는 기회가 되어 저도 좋았습니다. _()_
아, 이제부터 해인사를 찾아 보려 합니다. 해인사의 고승 부도군요. 존경하옵니다. _()_
감사합니다. 천천히 잘 보셨습니까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