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리》라는 작품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고길동 씨다. 자기 자식 둘도 있는 판에 인간도 아닌 초록색 괴물(?)에다, 타조에, 외계인을 자처하는 녀석, 거기에 팔자에도 없는 조카까지 떠안은 인물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말썽만 부리는 이 녀석들을 쫓아내고 싶어 안달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다 거둬 먹여 살리는 이 시대 만년 과장의 표상. 재미있는 점은, 어렸을 적 작품을 봤던 이들이 어른이 되어 다시 이 작품을 보고 난 후에는 하나같이 길동이 아저씨를 욕했던 자기 과거를 ‘참회’하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말썽쟁이들을 거두는 길동이 아저씨는 대인이며, 돌아가셔서 화장을 하면 사리가 쏟아질 것, 새침부끄(평소엔 싫은 듯 트집 잡고 화내지만 사실은 애정을 품고 있음을 일컫는 일본어 조어 ‘츤데레’의 우리말 대체어) 하다”며 칭송하기도 한다.
길동이 아저씨가 이 불청객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모습, 한 상에서 함께 밥을 먹거나 ‘차려 오라’ 시키는 모습, 말 안 듣는 아이들에게 속을 끓이면서도 가끔은 능청맞게 곯려주며 버릇을 잡는 모습들은 단순히 집주인이나 어른이라는 위치만으로 해석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둘리》가 등장했던 1980년대 초중반은 2009년 현재와는 정 반대로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캠페인이 한창 벌어지던 때다. 즉 핵가족 시대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던 시기였다. 그런데 길동이 아저씨네는 항상 아이와 조카와 악동들에 늘 북적이고 있다. 또한 길동이 아저씨도 갈수록 불청객들을 쫓아내기보다는 같이 놀거나 심부름을 시키는 등 어떻게 봐도 ‘아저씨’가 아니라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둘리 일당들에게 길동이 아저씨는 단순히 《톰과 제리》의 톰 역할이 아니라 대가족 시대의 아버지로서 이들을 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구도가 《둘리》에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화 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던 《일곱 개의 숟가락》도 한 가족의 왁자지껄하면서도 조금은 슬픈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핵가족 시대에 막 접어들던 그 시점에, 가족 그것도 크지 않은 집구석에 적지 않은 인원이 왁자지껄하게 모여 사는 서민 가족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김수정의 만화. 김수정에게 가족이란 건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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