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6대 경선역사(1-6)1 신민당 후보지명 전당대회편
(다음은 95년 경기도지사경선 편입니다.)
대선을 맞이하여 후보자경선이 최대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후보자의 경선승복과 불복에 대한 편견과 왜곡이 도를 넘고 있다. 정치권은 이를 악용하여 정치적 선전도구로 이용하고 있어 경선과정과 승복. 불복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과거 경선을 조명해 보므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올바른 경선문화를 정착시키고 한국정치의 새로운 경선모델을 구해보고자 한다. 지난날의 경선의 주요관점은 불리한 후보가 경선에서 승리한 경우와 여론조사에서 우위에서고도 패한 경우 등 경선승복. 불복이 대선에 미친 결과를 살펴보므로 올바른 경선문화를 정착시켜 왜곡된 정치적 선전을 막고 국민들의 잘못된 선택을 바르게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1. 70년 신민당후보지명 전당대회
출마후보자 김영삼(민주당구파) 김대중(민주당신파) 이철승(민주당구파)
당시 민주당구파는 당권파로 유진산이 당수였다. 비 당권신파는 정일형씨 등이었다.
총 투표자 885명 1차 투표 김영삼421표 김대중382표 과반수미달
2차 결선투표로 김대중후보 당선 김영삼승복 (458:410)
김영삼씨는 1970년대 들어'40대 기수론'을 주창하고 김대중·이철승이 이에 동조하여 제7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이 이루어졌다. 1970년 9월 29일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임시전당대회에서 유진산 총재의 지원을 받은 김영삼후보가 1차 투표에서 참석대의원 885표 중 421표를 얻어 382표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39표 차로 앞섰으나 과반수에 미달되어 2차 투표를 실시한 결과 오히려 1차 투표보다 적은 410표를 얻어 458표를 얻은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당시경선은 대의원수가 1000명 미만이라 1차 투표결과를 2차 투표에서 뒤집는 것이나. 2차 투표에서 1차 투표보다 적게 나오는 결과는 아주 드문 일로서(정당사상 유래가 없다)정보당국의 경선개입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기도하다. 당시 모든 언론이 김영삼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으며 1차 투표에서 김영삼은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지만.(현행 여,야 제도라면 승자는 김영삼이었다.)선진민주적인 제도이며 헌법정신에 맞춘 결선투표가 실시되어 이철승계의 지지를 얻은 김대중후보가 역전승을 거둔 것이다.
이러한 경선결과는 당시 단독후보로 경선 없이 추대된 박정희정권이 선거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하여 호남출신인 김대중후보를 지지하게 정보당국이 만든 공작이라는 것이 당시 언론 등 공통된 인식이다
당시 김영삼의 경선승복은 박정권의 의도대로 된 것인 반면 김대중에게는 반가운 결과이거나 당선에 유리한 것도 아니었으며 당시나 지금까지도 높이 평가하지 않고 있다. 그러한 경선결과는 대선의 실패로 끝났다. 정권의 의도 되로 된 실패한 경선승복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김영삼의 경선승복은 영호남의 지역감정의 최초의 동기를 부여한 독재정권에 말려든 것은 물론 3선 개헌에서 유신정권으로 들어간 우리정치사에 가장 불행한 선거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김영삼은 언론의 보도나 객관적으로 앞선 후보로서 정보당국의 공작으로 결과가 바뀐 사건으로 경선불복의 충분한 명분이 있었다. 만약 경선에 불복하여 출마했다면 정권교체의 가능성도 높이고 지역감정이라는 씨앗을 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영삼의 경선승복은 지금에 와서 미화 할 일이 아니라 그 경선승복이 가져온 우리정치사에 불행한 결과를 남긴 역사적사건으로 되새겨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경선은 소수의(885명)대의원이 투표권을 행사하고 계보. 계파보스들의 영향력과 국회의원 지구당위원장들의 입김에 의하여 선임된 대의원들은 당시 서슬 퍼런 정보당국의 공작에 상당부분 노출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야당은 정권의 공작정치에 시달려야 했고 후일에 김대중씨가 정권에 핍박을 받은 이후에는 호남지역 대의원들에 대한 공작은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
그이유로 야당은 각 지역에서 대의원을 선정할 때 호남출신들이 많이 선정되었고 그들은 어떠한 공작에도 흔들림 없이 야당과 김대중씨를 지지하였다. 이런 결과가 야당이 호남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당이 주도하면서 당의 모든 결정권은 광주를 기반으로 하는 호남에서 결정되면 전국적인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과거 독재시대에 관행이 낳은 잔재로서 시급해 해결해야 하는 과제임에도 이러한 모순에 대한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정치세력들이 이용하기 위하여 상호묵인 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민주진영의 한축을 이루던 김영삼씨가 주도하던 세력이 이탈함으로 온 분열이기도 하다. 정치권은 이 문제를 대승적 차원에서 해결하여야 한다.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 특정지역 특정출신들이 좌지우지하거나 계속 집권하는 것은 평등 원칙에도 어긋남으로 시정할 수 있는 대책이 나와야 된다. 그러므로 이제는 과거 지역감정차원이 아닌 평등. 균등 차원에서도 영호남 이외에 지역에서 대통령이 선출되어야 한다고 공개 주창하고 그렇게 되어지도록 하는 것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신민당후보 지명대회는 민주적기반이 약한 경선에서 공작정치가 난무하고 경선승복이 대선의 실패로 이어지는 결과와 정권에 의하여 의도된 첫 지역대결로서 지역감정의 단초를 제공한 실패한 경선승복이었다. 이러한 경선결과를 충분한 검증결과도 거치지 않고 즉 대선에 실패한 선거임은 망각한 체 정치적도구로 이용하여 극찬하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결과 밖에 가져올 수 없다.
다음은 95년 경기도지사 경선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