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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 벽화로 배우는 부처님의 지혜 > 제11회 고승 이야기
* 본 회에서는 우리가 사찰벽화에서 자주 접하는 높은 학덕과 수행을 바탕으로 중생들의 제도하셨던 고승高僧들에 대한 이야기를 벽화를 통하여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Ⅷ. 고승 이야기
1. 원효대사가 마신 해골물
2. 소 등에 앉아 집필을 마친 원효대사
3. 천공을 받은 의상대사
4. 부설거사의 도력
5. 가르침을 얻고자 팔을 바친 혜가대사
6. 법통을 이은 혜능대사
7. 삼척동자도 다 아는 내용을 가르친 도림선사
8. 자장율사와 금 개구리
9. 되살아난 물고기, 원효와 혜공대사
10. 스승이 제자가 되다, 희운선사
11. 포대화상의 주머니
12. 국청사의 성인, 한산과 습득
인류의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지도 약 2,600여 년이 흘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불기佛紀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시작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것만으로도 매우 위대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불교가 보편적 진리인 종교로서 자리매김 해 온 것을 그 기원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법을 이은 제자들, 즉 뛰어난 고승들이 쉼 없이 출현했기에 지금의 불교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고승高僧이란, 높은 학덕과 수행을 바탕으로 중생을 제도하셨던 스님을 일컫습니다. 불법과 교학을 발전시켜 제자들에게 귀감이 되며 한 종파를 이끄시는 스승이었고, 백성들에게는 참된 수행의 실천으로 자비를 베풀어 정신적 귀의처가 되었습니다. 때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몸소 구국의 정신으로 수 많은 생명을 구제하시는 등 고승들은 모두가 부처님의 화신이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에게 참된 진리가 면면히 전해질 수 있는 것이 바로 부처님이래 각 종宗의 조사祖師께서 계셨고, 수 많은 고승들의 법력이 도도하게 펼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승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스님들의 면모를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가르침을 얻기 위해 필요한 노력과 바른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1. 원효대사가 마신 해골물
원효대사는 신라 말기의 고승입니다. 그는 많은 저술과 중생제도의 보살행으로 한국 불교사를 넘어 세계적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입니다. 스님이 34세 때 가장 친한 벗인 의상스님과 함께 불교의 참된 가르침을 얻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길을 떠난 지 얼마되지 않은 어느 날 저녁이었습니다.
넓은 들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억수 같은 소낙비가 내렸습니다.또한 해는 저물어 사방이 캄캄해 주위에는 비바람을 피할 만한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온몸이 비에 젖은 채 지쳐갈 무렵 간신히 비를 피할 만한 조그만 굴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두 스님은 굴에서 쉬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잠을 자던 원효스님은 심한 갈증에 눈을 떴습니다. 옆에 있는 의상스님은 여전히 깊은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이리 저리 물을 찾던 스님은 마침 낡은 바가지에 빗물이 한 가득 고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물을 마시니 목이 심하게 말랐던 탓인지 정말 꿀맛보다 달았습니다. 그렇게 갈증을 해결하고는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의상스님이 눈을 떠보니, 간밤에 두 스님이 동굴이라고 들어와 잠을 잔 곳이 사실은 묘지에 난 큰 구덩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스님들 곁에는 뼈 무더기와 해골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원효스님을 깨웠습니다. 원효스님은 그제야 간밤에 본인이 마신 물이 낡은 바가지가 아니라 해골에 고였던 빗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심한 구역질이 일어나며 뱃속의 모든 것을 다 토해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원효스님은 깨달았습니다.
'아, 마음이 일어나면 여러 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과 바가지가 둘이 아니구나.'
원효스님은 의상스님에게 말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 뿐이라 하였는데, 내 마음이야 당나라에 가나 고국으로 돌아가나 항상 그 마음이 그 마음인 것을!"
이 깨달음을 통해 원효스님은 당나라 유학을 그만두고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의상스님 혼자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2. 소 등에 앉아 집필을 마친 원효대사
소뿔에 경상을 묶고 경서를 집필하다 (단양 구인사) (좌) / 원효대사 (우) 그는 부인 요석공주(瑤石公主)사이에 설총을 낳았다
신라 시대에는 백고좌百高座라 하는 불교 행사가 있었습니다. 나라 임금이 스님들께서 앉아 법문하는 자리인 사자좌獅子座를 100개를 마련하고, 100명의 고승을 초빙하여 설법을 듣는 큰 법회였습니다.
한편 당시에는 불교 경전들과 가르침이 대부분 중국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원효스님과 의상스님도 그런 시대적 상황으로 당나라 유학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중국에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 처음으로 유입되었습니다. 처음이므로 아직 경전의 뜻을 바르게 해석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백고좌를 열어 원효대사에게 이 경전을 강설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원효스님은 소를 타고 백고좌가 열리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때 소의 두뿔에 책상 다리를 묶어놓고, 걸어가는 소 등위에서 강설하게 될 경전을 해석해 놓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집필했습니다.
불교에 대승과 소승이 있는데, 이 일로 원효스님의 사상은 '뿔 각'자를 써서 각승角僧이라고 불립니다. 달리는 차안에서 책 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좌우로 요동치는 소 등 위에서 단숨에 3권의 책을 써내려갔다는 것은 도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바르고 곧은 마음이 잘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2. 천공을 받은 의상대사
해골 무덤가에서 원효스님과 헤어진 의상스님은 계속해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의상스님은 중국에서 지엄智儼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십여 년간 화엄을 공부했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시 인근에 도선율사라는 덕 높은 분이 계셨는데 하루는 의상스님을 초청한 적이 있습니다. 도선율사는 수행력이 매우 뛰어나, 하늘에서도 큰 재가 있을 때마다 스님에게 천녀를 보내와 하늘음식으로 만든 천공天供을 바쳤다고 합니다.
그날도 신라에서 온 의상스님에게 대접하기 위해 천공을 기다리고 있는데, 때가 지나도록 음식이 오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참동안 천공이 오지를 않자 두 스님은 이런 저런 담소만 나누다 그냥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의상스님이 돌아간 후에야 천녀가 찾아 왔습니다. 도선율사가 오늘은 어째서 이렇게 늦엇는지를 물었습니다. 천녀가 말하기를 "산 입구에 골짜기 가득 신병神兵이 가로 막고 있어서,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에 도선율사는 의상에게 신의 호위가 있음을 알고, 그 도가 자기보다 높은 것에 탄복하며 그 공양을 잘 놔뒀다가 다음 날 지엄과 의상 두 스님을 청하여 공양 올렸다고 합니다.
그것은 의상스님께서 화엄을 공부하고 깨달음을 얻었기에 화엄성중華嚴聖衆 즉 여러 신장님들이 의상스님을 호위했던 것입니다. 그 후 하늘의 천공도 이제는 도가 높은 의상스님에게 올려지게 되었습니다.
의상스님은 지엄스님 문하에서 방대한 화엄경을 정리하고 그 핵심만을 요약한 「법성게法性偈」를 집필했습니다. 그리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의상스님이 귀국했다는 소식에 친한 도반을 맞이하려 원효스님이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의상스님에게 천공이 올 시간이 되었는데, 원효스님이 방문하자 하늘의 천사들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효스님이 떠나자 뒤늦게 천신들이 공양을 갖고 나타났습니다.
"왜 이렇게 늦었는가?"
"저희가 들어가려고 하는데, 번쩍이는 옷을 입은 신장들이 문 앞을 막고 서 있어서 도저히 들어갈 틈이 안보였습니다."
의상스님은 옛날 도선율사의 일이 떠올라 새삼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수행자로서 올바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친구였던 원효스님이 꾸짖은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후부터는 의상스님도 더 이상 천공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4. 부설거사의 도력
신라 선덕여왕 때 부설거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원래는 어려서 출가한 스님이었습니다. 부설거사에게는 출가시절에 영조, 영희라는 두 도반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리산, 천관산 등 여러 곳을 다니며 수행을 했었는데, 하루는 오대산으로 수행하러 갈 때였습니다.
가는 길에 날이 저물어 지금의 전북 김제에 있는 어느 집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는 묘화라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벙어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딸이 부설의 법문을 듣고 드디어 말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묘화라는 여인은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이제는 스님을 사모하고 있으니, 자기와 혼인하지 않으면 목숨을 끊겠다고 위협하는 것입니다. 부설은 자신이 승려임을 내세워 거절했으나, 그 부모도 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부설스님은 생명을 함부로 버릴 수 없는 보살의 자비심으로 그 여인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환속한 부설을 뒤로 하고 두 스님은 다시 수행을 떠났습니다. 세월이 흘러 두 스님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옛 도반과 헤어졌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두 스님은 이제 거사가 된 부설의 집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두 스님은 그동안 여기저기를 다니며 공부한 자랑을 하는지라, 부설거사는 물병을 꺼내 도력을 시험해 보자고 합니다.
병에는 물을 가득 담아 처마에 매달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병을 깨서 물이 흘러내리는지 아닌지로 서로의 도력을 겨뤄보기로 한 것입니다. 두 스님이 먼저 작대기로 병을 때리자 병이 깨지면서 물이 그대로 땅에 쏟아졌습니다. 이번엔 부설거사가 물병을 힘껏 내리치자 병은 깨졌지만 물은 허공에 그대로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비록 환속하였으나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탓에 도력이 두 스님을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설거사가 물병으로 시험하고자 한 것도, 병이 깨지는 것으로 공空의 이치를 알려준 것입니다. 병이 깨지면서 물이 땅에 쏟아졌으니, 아직 두 스님은 공을 이치로만 헤아릴 뿐 생사의 경계를 뛰어 넘지 못했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부설거사의 가르침에 두 스님은 매우 크게 느끼는 바가 있었습니다. 수행을 자랑하던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둘은 부설거사에게 지지 않을 각오로 더욱 열심히 정진하게 되었습니다.
5. 가르침을 얻고자 팔을 바친 혜가대사
혜가慧可스님은 중국 선종의 제2대조입니다. 중국 선종의 법맥은 달마대사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혜가스님은 달마대사가 있던 소림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달마대사는 스승이던 반야다라 존자가 입적하자, 인도에서의 인연은 제자들에게 맡기고 법을 전하러 중국으로 건너 왔습니다. 먼저 양梁나라의 왕이던 무제武帝를 만났으나, 그는 달마대사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대사는 그 길로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이란 긴 세월 동안 면벽面壁하며, 인연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 엄동설한이었습니다. 신광神光이라는 스님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달마대사는 면벽한 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무런 답을 듣지 못한 신광스님은 달마대사가 계신 굴 앞에서 꼼짝도 않고, 눈을 맞으며 추운 겨울밤을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밖을 내다보니 어제 찾아 온 스님이 눈 속에 그대로 서있는 것입니다. 대사는 크게 소리를 쳤습니다.
"하룻밤의 얄팍한 덕으로 큰 지혜를 얻고자 하느냐. 너의 믿음을 바쳐 보이거라."
이에 신광스님은 칼을 뽑아 왼팔을 잘랐습니다. 팔이 떨어지자 땅에서 파초 잎이 솟아오르며 팔을 받치는 것입니다. 이에 달마대사는 신광스님을 제자로 받아들이며 법명을 혜가慧可로 바꾸었습니다. 혜가스님은 스승에게 고통에 쌓인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달라고 법을 청했습니다.
"그럼 너의 그 마음을 가져와 보거라."
"스승님, 마음을 찾아도 괴로움을 떨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편안하게 했구나."
이윽고 혜가스님은 자신의 불안함과 괴로움을 떨쳐냈고, 스승의 지도아래 용맹 정진한 끝에 달마대사에 이어 중국 선종의 제2대 조사가 되었습니다. 가르침을 구하려는 혜가스님의 용기도 배울 점이 많지만, 달마와의 문답을 통해 우리는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마음은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실체가 없는 것이 마음이지만,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 마음이 팔을 잘라내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고통 속에 괴로워합니다. 마음을 찾을 수 없으니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고 말하신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6. 법통을 이는 혜능대사
달마, 혜가에 이어 어느덧 중국 선종은 5대 조사인 홍인弘忍대사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 태어나 나무를 팔며 홀어머니를 모시던 효심깊은 혜능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탁발 나온 스님의 독경소리에 느끼는 바가 있어 훗날 출가를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모를 잘 모신 뒤, 때가 되자 홍인대사를 찾아갔습니다.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구하려는가?"
"저는 영남 사람이온데, 오직 깨달음을 얻으러 왔습니다."
"영남 사람은 오랑캐인데,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은 남쪽 북쪽이 있지만, 불성이 어찌 남북이 있을 수 있습니까?"
홍인대사는 혜능이 비범한 줄 알았지만, 다른 스님들의 눈치를 염려하여, 큰 소리로 꾸짖듯이 방앗간에 가서 일이나 하라고 몰아냈습니다. 당시 중국은 중원을 중심으로 남쪽 해안가의 광동성 사람들을 변방의 오랑캐로 부르며 멸시하는 경향이 컸습니다.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홍인대사는 방앗간을 둘러보았습니다. 그곳에서 힘이 부족하여 큰 돌덩이를 등에 지고 열심히 방아를 찧는 혜능을 보게 되었습니다. 홍인대사는 혜능에게 다가가 지난 일을 물어보았습니다.
"혹 누군가 너를 해칠까 염려하여 더 말하지 않은 것인데, 네가 그 뜻을 알고 있었느냐?"
"예, 저도 스님의 뜻을 짐작하였습니다."
홍인대사는 다시 한 번 혜능의 그릇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중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도 이제 세상의 인연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 뒤를 이어 법을 전할 자를 정하겠다. 각자 본심의 지혜로운 마음을 게송으로 표현하여 가져오라. 만일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에게 초조初祖 달마대사 이래 전해오는 가사와 발우 전하여 6대 조사로 삼겠노라."
이미 홍인대사에게는 신수神秀라는 샛별과도 같은 제자가 있었습니다. 모두들 신수스님이 육조가 될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신수스님은 홍인대사의 이 말을 듣고 게송을 지어 여러 스님들이 다니는 복도 벽에다 붙여놓았습니다.
"육체는 지혜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 티끌 먼지 묻지 않게 하라."
홍인대사는 이 글을 보고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게송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럼에도 대중에게는 이 게송을 따라 수행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자 여러 스님들은 이 게송을 외우며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혜능스님은 여전히 방아만 찧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여러 스님들이 외우고 다니는 소리에 신수스님의 게송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게송의 내용을 들어보니, 아직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했음을 한 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밤, 다른 스님에게 부탁하여 자기가 말하는 게송을 신수스님의 게송 옆에 써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사실 배움이 부족한 혜능스님은 아직 글을 몰랐던 것입니다.
"지혜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대가 없노라.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어느 곳에 티끌이 일어나리."
혜능이 남긴 이 게송을 본 스님들은 놀라며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던 자신들을 뉘우쳤습니다.
홍인대사는 혜능이 남긴 게송을 보시고 이제 제자가 깨달음을 얻었음을 아시고, 다음 날 방앗간으로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쌀을 얼마나 찧었느냐?"
"쌀은 찧은 지 오래되었사오나, 키질로 아직 골라내지는 못했습니다."
* 키질 : 타작된 곡식의 낟알을 겨와 분리시키기 위해 까부는 행위. 타작 마당에서 타작 기계를 이용하여 떤 곡식을 키를 이용해 삽질하듯 바람에 날리면 알곡은 땅에 떨어지고 겨는 바람에 날려 분리된다
이에 홍인대사는 혜능대사에게 법을 물려주어, 출가한 지 8달 만에 초조 달마대사의 법통을 이어 육조 혜능대사가 되었습니다.
7. 삼척동자도 다 아는 내용을 가르친 도림선사
당대唐代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유명한 백낙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문장가이도 했지만 정치가로서 학식과 총명이 뛰어나 높은 벼술에 올랐던 인물입니다. 그가 항주고을의 태수로 부임했을 때입니다. 그때 항주에서 그리 멀지 않는 사찰에 도림선사라는 분이 계셨는데, 뛰어난 고승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항주에 부임한 백낙천은 직접 도림선사를 찾아가서 한 수 가르침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도림선사는 곧잘 경내의 큰 소나무 위에 올라가 좌선을 하곤 했는데. 그 날도 노송 위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백낙천의 눈에는 한 스님이 나무위에 앉아서 졸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스님, 나무 위는 위험합니다. 어서 내려 오세요."
"아래에 있는 자네가 더 위험하네."
"스님, 나는 이미 큰 벼슬에 올라 내 말이면 모두 벌벌 떱니다. 지금도 이렇게 안전한 땅을 밟고 있거늘 무엇이 위험하단 말입니까."
그의 자만심을 이미 꿰뚫어 본 도림선사가 타이르듯 말했습니다.
"티끌같은 세상의 지식만으로 교만심이 늘어 번뇌와 탐욕이 쉬지 않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단 말인가?"
결국 백낙천은 도림선사의 기개에 눌려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선사는 백낙천에게 게송으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衆善奉行,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받으러 행하라. 자정기의 시제불교自淨其意 是諸佛敎, 자기의 마음 맑게 하면 이것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백낙천은 크게 실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스님, 그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내용이 아닙니까?"
"그렇지, 하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지."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을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고 합니다. 평소의 마음이 수행과 다르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로 크게 깨달은 백낙천은 지행합일의 삶으로 훗날 더 큰 벼슬에 올랐으며, 덕치를 베풀어 사람들에게 큰 추앙을 받았습니다.
8. 자장율사와 금개구리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절이다.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하나로 꼽히는 통도사는 거찰답게 19개의 암자를 품고 있다. 그중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많은 곳은 자장암이다. 사시사철 암자 주위를 떠나지 않는 금개구리를 위해 자장율사가 절 뒤 암벽에 구멍을 뚫고 개구리를 넣어준 이후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절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다는 '금와보살' 설화로 유명하다. 1000년이상 세월이 흘렸는데도 아직도 금와보살이 상주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신라 때 자장율사라는 고승이 있었습니다. 그는 통도사 산내에 있는 자장암이라는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장율사는 공양미를 씻으려 암벽 아래 석간수가 흘러나오는 옹달샘으로 갔습니다. 바가지로 샘물을 뜨려다 물속에 있는 개구리를 보고는 손을 멈췄습니다.
"이 놈들 어디 놀 곳이 없어서 하필이면 부처님 계신 절집 샘물을 흐려놓는고?"
그러면서 자장율사는 샘에서 흙탕물을 일으키며 놀고 있는 개구리 한 쌍을 두 손으로 건져 근처 숲 속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또 다시 개구리 두 마리가 샘물에서 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참, 그 녀석들 말을 안 듣는구먼."
자장율사는 이 번에는 개구리들이 다시 오지 못하도록 아주 멀리 갖다 버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다음 날에도 개구리는 또 와서 샘물을 흐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이상하게 여긴 스님은 개구리를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보통의 개구리와는 달리 입과 눈가에는 금줄이 선명했고, 등에는 거북 모양의 무늬가 있는 것입니다. 필시 부처님과 깊은 인연이 있는 개구리라 생각하여 자장율사는 개구리를 그냥 샘에서 살도록 놔 두었습니다.
어느덧 겨울이 되었습니다. 겨울이면 개구리는 땅을 파고 들어가 겨울잠을 잡니다. 그런데 겨울잠을 자러 갈 것으로 생각했던 개구리는 눈 내리고, 얼음이 얼도록 그 샘물 속에서 놀고 있는 것입니다.
"안 되겠구나. 살 곳을 마련해 줄 터이니 얌전히 있거라."
스님은 절 뒤 깍을 듯 세워진 암벽을 손가락으로 푹 찔러 큰 구멍을 뚫고, 그 안에 개구리를 넣어 주었습니다.
"너희들은 영원히 죽지 말고 이 곳에 살면서 이 자장암을 지켜다오."
스님은 개구리에게 금와金蛙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신통력으로 죽지 않고 계속 바위 속에 살아가도록 했습니다. 지금도 통도사 자장암 뒤 금와석굴에는 금와보살이라 불리는 개구리 두 마리가 1,400년 동안 살고 있다고 합니다.
9. 되살아난 물고기, 원효와 혜공대사
원효와 혜공스님은 서로 아주 친한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만나면 언제나 서로 농담을 하면서 담소를 나누곤 했습니다. 두 분 모두 도통한 스님이셨습니다.
원효스님은 여러 경책을 집필하다가 의문점이 생기면 혜공스님이 계신 항사사라는 절을 찾아가 묻고 답하며 서로 토론으로 답을 찾았다고 전합니다. 그날도 원효스님과 혜공스님은 이런 저런 법담을 나누며 냇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마침 냇가에는 동네 사람들이 물고기를 많이 낚아, 거하게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두 스님을 발견하자 함께 먹을 것을 권했습니다. 딱 봐도 덕이 높아 보이는 스님들이라 고기나 생선을 안 먹겠거니 생각하고 일부러 골탕을 먹이려고 심술을 부린 것입니다.
"스님, 이 물고기 좀 잡수세요. 여기 이 새우도 참으로 맛나답니다."
그러자 두 스님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냥 음식을 받아 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동네 사람들은 아니 스님이 생선을 잘도 먹는다면서 인상을 찌푸리며 마음속으로 욕하거나 자기들만 들리는 작은 소리로 흉을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뒤 두 스님이 냇가에 변을 보았더니, 두 사람 몸에서 배출된 대변이 모두 물고기로 되살아나면서 개울로 헤엄쳐 가는 것이었습니다. 두 스님은 헤엄쳐 가는 물고기를 보면서 껄껄 웃으며 소리쳤습니다.
"저게 내 물고기다. 이게 내 고기구나. 허허허"
두 고승의 신통은 먹어버린 물고기마저 되살려 놓았습니다. 원래의 것을 있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는 것은 이미 도를 깨우쳤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고승의 신통을 본 마을 사람들은 스님들에게 큰 절을 하며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절의 이름이 '내 물고기'라는 뜻의 오어사吾魚寺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경북 포항시 오천읍 항사리 운제산에 있는 절. 신라 진평왕 때 창건하여 항사사라 하였고 그 이후로 오어사吾魚寺로 개칭되었다
10. 스승이 제자가 되다, 희운선사
희운선사는 중국 당나라 때 스님입니다. 그의 출가 스승은 고령이라는 스님이셨는데, 자신을 시봉하는 희운스님에게 때가 되면 마조선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조스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마조선사는 이미 3일전에 입적하셨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상심하다가, 마침 마조스님의 법통이 제자인 백장스님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희운스님은 백장스님에게 배우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3년을 백장스님을 시봉하며 열심히 수행을 했습니다.
3년의 공부 끝에 희운스님은 큰 깨달음을 얻고 원래 스승이던 고령스님에게 돌아왔습니다.
"마조의 법이 어떠하던가?"
"제자가 박복하여 이미 대사께서 열반에 들어 법을 듣지 못했습니다."
고령스님은 그렇게만 알고는 더 이상 뒷일을 묻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고령스님이 목욕을 하면서 등을 밀어 달라고 했습니다. 희운스님은 고령스님의 등을 밀다가 갑자기 등을 탁 치면서,
"법당은 좋으나 부처가 없습니다."
"내 비록 영험은 없으나, 참 나를 찾을 줄은 아네."
희운스님은 깨달음의 문답을 던졌으나, 스승은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하루는 고령스님이 선방에서 경전을 보는데 벌 한 마리가 날아 들어 왔다가 나가지 못하고 온 방안을 방황하는 것입니다. 희운스님이 또 선시를 읊었습니다.
강원도 원주 치악산 자락에 소재한 대한불교 천태종 성문사 星門寺
"창문을 날아든 벌 창틀은 더듬어도 종이를 분별하지 못하니 어느 때에 빠져 가리."
그러나 고령스님은 그 뜻을 알지 못하고, 벌이 나가지 못하는 줄로만 알고는 문창호에 구멍을 뚫어주었습니다. 벌은 그 틈새로 붕 ~ 하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천안통을 열고 보니 벌은 날아 요지로 간다. 가는 소리 불법을 말하고 밝은 달이 햇불을 비추더라."
그제야 고령스님은 알아차렸습니다.
"네가 법을 얻어 왔구나."
하고 일어나 희운스님에게 큰 절을 했고, 스승이 곧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습니다. 그 말은 배움에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속담에 '여든 노인도 세 살 아이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잘못입니다. 나를 헤치려는 원수에게도 배울 점이 있으면 배워야 합니다.
배움에 스승이 어디있고 제자라고 정해진 법이 어디에 있을까요. 인연 따라 가르침을 주는 모든 이들이 나에게 스승이 됩니다. 선재동자의 심정으로 모든 선지식을 찾아야 하는 것이 참된 수행자의 바른 공부 자세라 할 것입니다.
배움의 길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옛 고승의 전기만 보더라도 하루아침에 저절로 깨달음을 얻으신 분은 없습니다. 오랜 노력과 수행의 결과로 한 마음 바른 깨달음을 얻으신 것입니다. 차근차근 노력하는 것만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됩니다.
11. 포대화상의 주머니
포대화상布袋和尙은 원래 법명이 계차스님인데, 커다란 포대布袋자루를 짊어지고 다니며 복을 나눠주시기에 사람들은 스님을 포대布袋화상으로 불렀습니다.
불교의 수행가운데 자비심으로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수행을 보시행布施行이라 합니다. 그런데 보시라고 읽지만 한문을 보면 '베풀 포布'자를 씁니다. 따라서 스님에게는 보시를 하는 자루, 포대를 멘 포대스님이라는 별칭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화상和尙이라는 말은 덕이 높은 스승을 높여 부를때 쓰는 호칭입니다.
포대화상은 중국 당나라 때 스님으로, 뚱뚱한 몸집에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계십니다. 배는 풍선처럼 늘어져 괴상한 모습으로 지팡이 끝에다 커다란 자루를 둘러메고 다녔습니다. 그 자루 속에는 장난감, 과자, 엿 등을 가득히 넣고는 마을을 돌면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포대화상은 행동은 기인과 같았습니다. 무엇이든 주는 대로 받아먹고, 아무데서나 잠을 자면서 자연을 벗 삼아 살았고,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세속 사람들과 차별없이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으며, 짓궃은 아이들은 스님 위로 올라타기도 하고 큰 배를 만지거나 커다란 귀를 잡아 당기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스님은 항상 웃음으로 받아넘기고, 아이들과 장난치며 바보처럼 행동하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포대화상에게 물었습니다.
"스님! 스님께서는 매우 높은 깨달음을 얻은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스님의 장난스러운 행동을 저희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 귀중한 시간을 아이들과 놀고만 계십니까? 정말 스님께서 도를 통달하신 것이 맞습니까?"
그러자 포대화상은 커다란 포대를 땅바닥에다 쿵 소리가 들릴 정도로 집어 던져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스님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 얼굴만 쳐다 보았습니다.
"내가 짐을 내려놓았듯, 그대들도 자신의 짐을 벗도록 하라."
이 말은 사람들이 쉽게 불교수행의 이치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행동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사실 스님은 미륵불의 화신이었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격의 없이 대했던 모습은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 "나에게 한 포대가 있으니 허공에 걸림이 없어, 열어 펼치면 우주에 두루하고 호므리면 관자재로다.
천백 억의 몸으로 나투어도 미륵은 미륵일 뿐 언제나 세속 사람들에게 보여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네.">
* 관자재 觀自在 : 관자재란 자비(慈悲)의 화신(化身)으로 온갖 것을 자유 자재로 함을 말하는 것임
포대화상은 이 게송을 남기고 큰 바위에 앉은 채 그대로 입적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사찰에서나 포대화상을 모신 곳을 보면, 큰 바위 위에서 커다란 배를 내놓고 앉아 중생을 향해 큰 웃음 지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2. 국청사의 성인, 한산과 습득
천태산 국청사國淸寺는 수나라 때 천태 지의대사가 세운 사찰로 천태종의 본산입니다. 경내에는 천태대사와 더불어 고려 대각국사 의천조사 그리고 대한불교 천태종 중창조 상월원각대조사의 존상을 모신 「중한천태종조사기념당」이 건립되는 등 한국과 중국불교의 활발한 교류가 이뤄지는 곳입니다.
당나라 때입니다. 국청사에는 풍간선사와 한산 그리고 습득의 세 성인이 은거해 머물렀다하여 사람들은 국청삼은國淸三隱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모두 불보살의 화신이라고 합니다. 풍간은 아미타불, 한산은 문수보살,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이들의 기이한 행동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한산寒山은 국청사 뒤편의 한암이라는 토굴에 살면서 끼니때가 되면 국청사로 내려와 사람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얻어먹었다고 합니다. 옷은 다 떨어지고 커다란 나막신을 신고 다니면서 늘 기이한 행동이 많았는데, 한암에 산다고 해서 그를 한산이라고 불렀습니다.
한편 습득拾得이라는 분은 풍간스님이 길에서 주워 온 분이라고 습득이라는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그는 국청사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일을 맡았는데, 사람들이 먹다 남은 밥과 나물이 있으면 모다 두었다가 한산이 찾아오면 주곤 했습니다.
천태종 총본산 중국 천태산 국청사 / 국청사 경내에 모셔진 「중한천태종조사기념당中韓天台宗祖師記念堂」에 모셔진 천태 지의대사, 고려 대각국사 의천, 그리고 한국 천태종을 중창하신 상월원각대조사 존상
어느 날 국청사 스님들은 산 아래 목장에서 한산과 습득이 소떼와 놀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한산이 먼저 소떼를 향해 말했습니다.
"도반들아, 소 노릇하는 기분이 어떠한가, 시주 밥을 먹고 놀기만 하더니 기어코 이 모양이 되었구나. 오늘은 여러 도반들과 더불어 법문을 나눌까하여 왔으니, 호명하는 대로 이쪽으로 나오시게. 첫째, 동화사 경진 율사!"
한산이 이렇게 말하자 검은 소 한마리가 '음메 ~'하면서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다음은 천관사 현진법사!"
이번에는 누런 황소가 '음메 ~'하면서 앞으로 나와 절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른 번을 스님들의 이름을 호명하였고, 그때마다 어떤 소가 앞으로 나와 머리 숙여 절을 하더니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수 많은 소떼 가운데 이 서른 마리는 전생에 스님이었는데, 수행을 게을리 한 과보로 축생의 몸으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이를 본 스님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한산과 습득이 그저 미치광이인 줄만 알았더니, 성인의 화신임이 틀림없구나.'
대한불교 천태종 포항 황해사 일주문 낙성대법요식
얼마 뒤, 여구윤이라는 관리가 이 고을 원님인 자사刺史로 부임했습니다. 그에게는 평소 지병이 있었는데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이에 풍간스님이 자사를 찾아가 깨끗한 그릇에 물을 받아 자사에게 뿌리니 언제 아팠냐는 듯 말끔하게 병이 낫는 것입니다. 자사가 크게 공양을 올리며 설법해 주기를 청하자 풍간스님은 굳이 마다하면서 말하기를,
"나 보다는 문수, 보현께 물어 보시오."
"두 보살께서는 어디에 계신지요?"
"국청사에서 불을 때고, 그릇을 씻는 한산과 습득이 바로 그들입니다."
자사는 공양물을 준비해 국청사로 한산과 습득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한산과 습득은 개울가에서 개구리와 장난치며 놀고 있는 것입니다. 자사가 다가와 절을 올리자 그 둘은 무턱대고 자사를 꾸짖었습니다.
잠시 후 한산은 자사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해주었습니다.
"풍간께서 실없는 소릴 지껄였군. 자네는 풍간스님이 바로 아미타불인 줄도 모르고 우리를 찾아오면 뭘 어쩌겠나?"
그리고는 둘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구윤은 못내 아쉬워 한암굴로 급히 쫓아가 법을 청했습니다.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각자 노력하여 얻으라."
한산과 습득이 이 말만 남기고 굴속으로 들어가자 입구의 돌문이 저절로 닫혀버렸습니다. 결국 여구윤은 성인을 친견하고도 깊은 법문을 듣지 못한 것을 서운하게 여겨 풍간선사, 한산과 습득이 평소 동굴주변, 숲 속 마뭇잎이나 석벽, 혹은 국청사 구석구석에 써놓은 세 분의 시 약 350수를 모아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 책이 한산시집寒山詩集이라는 제목으로 전해지는데, 선화禪畵의 소재로도 자주 인용되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 "홀연한 마음으로 편히 앉아 쉬노라면 해 저무니 나무그림자 덩달아 낮아지네.
스스로의 마음자리 자세히 보노라면 진흙탕 가라앉고 연꽃 한 송이 피어나네."> ☞ 한산寒山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출처] < 사찰 벽화로 배우는 부처님의 지혜 > 제11회|작성자 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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