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준 사진전 _ 네팔 대지진 1주기 후원전
신들의 정원, 사람의 마을
3.1 ~ 3.13

신들의 정원에서 만난 ‘사람’들을 위한 기도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 산맥 남쪽에 위치한 작은 나라 ‘네팔’. 이 네팔을 떠올리면 만년설이 덥힌 장엄한 설산과 끝없이 굽이굽이 이어진 산맥, 눈부신 계곡이 그려진다. ‘신들의 정원’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 경관은, 그 곳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에게조차 선명하게 각인되어있다. 네팔의 이런 인상은 아마 수많은 사진들에서 연유되었을 것이다.
시인이자 사진가인 조병준이 20대 청년 시절에 카메라를 메고 네팔에 처음 간 것도, 바로 이 히말라야의 땅 즉 ‘신들의 정원’을 보기 위해서였다. 한번 본 그 땅은 그의 발길을 자꾸만 다시 이끌었고, 1990년부터 거의 5년 주기로 인간세상의 삶이 지치고 힘겨울 때마다 ‘신들의 정원’으로 찾아들었다. 집에 돌아와 보면 필름 속에 히말라야가 가득했지만, 직접 바라볼 때 느꼈던 장엄함을 담아올 수는 없었다. 그것이 늘 다시 그를 히말라야로 향하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때로 괜찮은 선물이다. 체력이 달리니 죽어라 걸음을 재촉할 수 없게 된다. 속도가 줄면서 사람들이 눈에, 그리고 뷰파인더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함께 산길을 걷는 트레커들이, 무거운 짐을 등에 싣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포터들이, 마을과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이. 산 속의 마을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랬다. 네팔의 장엄한 자연 속에는 ‘사람의 마을’이 있다. 아직도 손으로 농사를 짓고, 난방도 되지 않는 허술한 흙집 방 한 칸에서 온 식구가 함께 사는, 식구들의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그는 이 사람들을 사진의 중심에 놓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산을 오르는 발걸음이 더 느리고 무거워졌고, 그 걸음만큼 네팔을 바라보는 앵글도 더 깊고 넓어진 것이다. 여전히 웅장한 산과 계곡에 압도되어 셔터를 누르면서도, 그 안에 사람들을 담을 때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그다.
네팔 대지진 참사가 일어난 지 1년, 조병준은 사진을 통해 네팔의 사람들을 기억한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바나나와 오렌지, 차를 끝없이 건넸던 순박한 사람들과 그들의 마을을 떠올린다. 그리고 여전히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시인 사진가 조병준의 세 번째 개인전 <신들의 정원, 사람의 마을>은 네팔 사람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인 셈이다.
“사진처럼 강력하게 기억을 환기하는 매체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언제나 그러했듯이 우리의 힘이다. 불행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무기다.”
네팔 대지진 참사 1주기 후원전인 이번 전시는 3월 1일부터 13일까지 류가헌에서 열린다.




■ 작가 소개
조병준 曺秉俊, Jo Byoungjoon
1960년에 태어났고,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평화의 잠> 외 3편의 시로 등단했다. 방송개발원 연구원, 광고 프로덕션 조감독, 자유기고가, 극단 기획자, 방송 구성작가, 대학 강사, 번역가 등 여러 직업을 거쳐, 지금은 글 쓰고 길 떠나고 사람 만나는 삶에 전념하고 있다. 삼십대 시절 10년 동안 여러 차례 인도와 유럽 등지를 여행했고, 그 사이 다섯 번에 걸쳐 약 2년간 인도 캘커타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 자원 봉사자 생활을 했다. 쓴 책으로 <나눔 나눔 나눔>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나를 미치게 하는 바다> <정당한 분노>가 있고, 시집으로 <나는 세상을 떠도는 집>, 사진시집 <따뜻한 슬픔>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유나바머> <영화, 그 비밀의 언어> <나의 피는 나의 꿈속을 가로지르는 강물과 같다> 등이 있다. 2007년 여정 속에 만난 사람과 풍경을 주제로 첫 번째 사진전 <따뜻한 슬픔>을 전시한 바 있다.
사진전
2011 <길 위의 시(詩)> 류가헌
2007 <따뜻한 슬픔> 트뤼포갤러리/카페 에쯔
시집/ 에세이
<나눔 나눔 나눔>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사랑을 만나러 길을 나서다>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나를 미치게 하는 바다>
<나는 세상을 떠도는 집>
<따뜻한 슬픔>
<정당한 분노>
옮긴 책
<유나바머>
<영화, 그 비밀의 언어>
<나의 피는 나의 꿈속을 가로지르는 강물과 같다>
■ 작업 노트
당신이 네팔에 간 까닭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히말라야가 거기 있기에. 나 또한 그 대부분의 사람들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1990, 1995, 2010, 그리고 2014년. 서른을 목전에 두었던 그 첫 네팔 행으로부터 헤아리면 24년의 세월이 흘렀다. 파랗던 청년이 ‘늙다리 아저씨’가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 그 시간 사이에 카메라도 몇 번 바뀌었다.
나도 남들처럼 죽어라고 산을 찍었다. 그리고 남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확인할 때면 절망했다. 내 눈으로 목격했던 그 장엄한 히말라야는 내 사진에 들어 있지 않았다. 나는 다음 번 롯지를 향해, 마지막 베이스캠프와 고갯마루를 향해 허덕허덕 걷기 바빴던 트레커였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때로 괜찮은 선물이다. 체력이 달리니 죽어라 걸음을 재촉할 수 없게 된다. 속도가 줄면서 사람들이 눈에, 그리고 뷰파인더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함께 산길을 걷는 트레커들이, 무거운 짐을 등에 싣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포터들이, 마을과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이. 산 속의 마을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히말라야가 너무 장엄한 탓에, 그 안에 들어서면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탓에, 나는 다른 사람들도 역시 나처럼 하찮은 존재라고 퉁쳐 버렸던 것이다. 오해는 마시라. 히말라야는 여전히 장엄했고, 나는 여전히 하찮았다. 다만 이전에는 그리도 작게만 보였던 사람들이 마치 돋보기 안경을 통해 보는 것처럼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평범한 트레커들이 오를 수 있는 베이스캠프와 고개들은 어디나 결국은 사람들과 사람의 흔적들로 채워져 있었다. 여전히 산과 계곡을 향해 셔터를 눌러대기도 했지만, 그 안에 사람이 담겨 있을 때 셔터를 누르는 내 손가락은 경쾌해졌다.
우연한 초대를 받아 마을에 찾아온 첫 외국인이라는 영예를 누리며 어느 작은 산골 마을에서 보낸 시간은 그런 과정의 클라이맥스였다. 말이 거의 통하지 않았음에도 마을 사람들은 내게 바나나와 오렌지와 차를 끝없이 건넸다. 추수하던 농부들은 내게 그들의 새참을 권하기도 했다. 모든 여행자들이 꿈꾸는 행운! ‘관광’에 오염되지 않은 웃음을 그이들은 내게 선물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의 사진을 인화해 보내준 것이 내가 할 수 있었던 답례의 전부였다.
그리고 몇 달 후, 참혹한 대지진이 네팔을 덮쳤다는 소식이 들렸다. 네팔에서 찍어온 사진들을 보며, 그 착하디착한 사람들을 기억하며 나는 신들을 원망했다. ‘그 많던 신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라고 하던 어느 신문의 한탄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급한 대로 친구들과 인터넷 이웃들의 마음을 모아 현지에서 구호활동에 뛰어든 일본인 친구에게 전달하기도 했지만, 마음의 빚, 또는 무력감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5년 만에 세 번째 사진전을 열게 되었다. 네팔을 주제로 정하면서 자연스럽게 ‘신들의 정원, 사람의 마을’이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네팔에는 히말라야가 있고, 히말라야 기슭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그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다시 하고 싶었다.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 고달프고 힘겹긴 해도 그래도 환히 웃던 사람들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 적어도 그이들을 기억해 달라고, 참사 후 1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이들을 위해 기도 한 줌이라도 보태 달라고.
사진처럼 강력하게 기억을 환기하는 매체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기억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우리의 힘이다. 불행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무기다. 이 전시는 네팔의 사람들에게 바치는 기도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기도에 동참해 주실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