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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14강
주요 용어 해설
리덜보스 책에도 자주 등장하며 일반 신약서적에도 자주 등장하는 용어들을 먼저 간단히 정리하여 해설한다. 이 용어들을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 일단 임시방편으로 급히 만들었다.
바울서신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종말론이란 말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이 말은 한두 번 연구해도 잘 파악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더욱이 종말론은 바울뿐만 아니라, 신약, 더 나아가서 구약을 포함한 성경 전체의 큰 주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종말론과 함께 하나님 나라, 이미와 아직, 서술형과 명령형이라는 말도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그뿐 아니라 구원에 관련된 거의 모든 말(믿음, 중생, 칭의, 성화)에도 종말론이라는 개념이 침투되어 있다. 에온(시대)과 묵시라는 말도 종말과 관련해서 사용된다.
또한 신약성경에서 중요한 배경을 이루는 유대교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이곳에서는 주로 종말론과 유대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종말론
종말론이란 세상의 마지막 때에 관한 가르침이다. 세상의 마지막 때에는 악인의 심판이 있고 의인이 구원을 받으며 만물이 회복된다.
하나님께서는 극도로 아름답고 선한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시어 그에게 낙원을 지어주시고 세상의 관리자로 두셨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타락하게 되어 선한 세상이 크게 훼손되었다. 이에 따라 선한 인간이 사탄과 죄의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타락 즉시 다음과 같은 약속을 주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원(元) 복음이라고 하는 이 약속 말씀이 실현되는 과정이 인간 역사이며, 성경은 하나님께서 어떤 과정을 통해 이러한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가시는지를 기술하는 책이다. 이 여자의 후손, 사탄의 원수, 메시아가 오셔서 심판과 구원을 통해 만물을 회복하신다. 세상 역사는 이렇게 시작과 종말이 있다. 구약에서는 특히 이사야서와 에스겔서에서 메시아에 대해, 그리고 그분이 오셔서 회복하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이 세상의 종말에 오실 메시아께서 수립하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되는 것이 당연했고, 특히 바빌론 포로 이후부터 이 기대가 커지기 시작했으며, 예수님이 오실 즈음에는 이 기대가 팽배해 있었다.
그런데 메시아(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귀에는 매우 특이한 종말론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가르치셨으나, 유대인이 기대하는 종말은 오지 않았다. 자기들을 지배하는 로마군인은 여전히 건재하고, 이스라엘은 압제에 시달리고 대중은 생활고에 허덕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말이 와서 종말이 실현되기 시작했다. 메시아께서 만물을, 특히 죄인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하나님께서 죄인을 단지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기신다. 옛것이 도래하고 새것이 도래하여 죄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과 화평 관계에 들어가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극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나에 대한 지배권도 사탄의 손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로 넘어갔으며, 심지어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하나님 안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구약의 종말에 대한 예언과 약속은 성취되었다.
그런데 이것만이 실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원한 안식 속에서 살지 못하고, 썩어짐에 종노릇하고, 고난당하고 죄의 유혹을 받고 고통 속에서 산다. 이러한 독특한 종말론적 현상을 “이미와 아직”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종말이 왔다는 것을 사도 중에 바울만 가르친 것이 아니다. 베드로도 그렇게 가르쳤다. 행 2:17 이하에서 베드로는 방언 현상을 그렇게 해석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종말이 온 말세에 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말세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야 완결된다. 종말론과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용어, 개념들을 살펴본다:
이미와 아직
이 용어는 본서에게 종말론과 관련하여 자주 등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써 세상의 종말은 이미 시작했다. 그러나 최종적인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 비로소 종말 상태는 완결된다. 이 기간과 상태의 특성을 잠정적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사단과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는 잠정적이다. 잠정적이라는 말은 불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승리가 분명히 이루어졌지만, 그 승리의 완전한 효과는 아직 완전히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성령께서 인간에게 내주하신다. 하나님이 인간 안에 계신다는 것은 이미 천국, 하나님 나라가 온 것이다. 그분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이미 놀라운 하나님의 다스림을 매일 체험하고 있다. 내 가운데서 정욕이 쫓겨나가는 이적이 일어난다. 천국의 평안을 맛본다. 그러나 이것도 완전한 것이 아니라 잠정적이다. 왜냐하면 동시에 내 안에서 갖은 정욕이 역사하고, 내 안에서 무서운 싸움이 있고, 나는 때때로 이 투쟁에서 패배하여 신음하고 고통을 당하며 심지어 나의 구원을 의심하기도 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의 요소이다.
이에 대해서는 박문재 역„제74절 대망의 삶-가까움“(890쪽), „제78절 부활“(984쪽)에서 자세히 다룬다.
서술형과 명령형(Indikativ und Imperativ: 직설법과 명령법)
문장에서 서술형의 예를 들면 “나는 아침을 먹었다”이며, 명령형은 “아침을 먹어라”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의미이다. 전자는 아침을 먹은 행위가 완료된 상태이지만, 후자는 이제 실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에게 동시에 이 두 문장은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면 모순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특이하게도 이것이 같은 사람에게 동시에 적용된다. 가장 명료한 예를 든다면 갈 3:27과 롬 13:14이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사도 바울은 갈 3:27에서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하고 롬 13:14에서는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명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이며 또한 계속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하는 자이다. 이 현상을 앞에 나온 “이미와 아직”의 의미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수없이 많은데,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바울이 인디카티브를 통해 나타내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새 생명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바울은 신자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생명의 삶을 살라고 권면하는 근거로서 먼저 이 사실을 주지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새 삶, 윤리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우리가 이것을 영접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 그리스도와 같이 된 사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하고, 그리스도를 입고 그리스도 안에 사는 신자들이, 즉 새로운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지향하고 살아야 할 지침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옛 사람을 이미 벗었지만, 계속 벗으라고 할 수 있었다.
자세한 설명을 위해 리덜보스는 한 단원을 할애했다(„직설법과 명령법“, 박문재역 464쪽 이하)
묵시(默示: 아포칼립시스)
마지막 날(종말)에 실현될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을 선지자를 통해 명확하게 직설적으로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혹은 그림 언어로 계시하신다는 의미이다. 요한계시록이 묵시적으로 쓰였다. 즉,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해서 성경은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상징을 사용하여 알려준다. 물론 우리가 몇 가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사도 바울도 이에 대해 비밀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라”(고전 15:51).
리덜보스의 설명을 들어본다:
“그것은(신약 묵시록은) 교회에게 최종적인 위로이자 소망이며 승리의 확실성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신약의 미래 기대가 지닌 묵시적인 성격은 역사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역사는 묵시론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역사의 실제적인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묵시록과 묵시 본문들을 미래 사건에 대하여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알려줄 정보를 얻게 해 주는 수단으로 보는 모든 해석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966).
아이온(aion)
아이온은 여러 의미를 가졌지만, 본서에서는 유대교 묵시사상의 정의에 따라 옛 시대와 새 시대를 구분하는 시대 개념을 따른다. 옛 시대는 아담의 타락부터 메시아의 통치가 오기까지, 그리고 새 시대는 메시아가 통치하는 시대이다. 묵시사상에 따르면 새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고, 성경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는 메시아께서 오신 이후에 살므로 이미 온 하나님 나라, 새 시대에서 살고 있으며 이미 영생을 얻었다.
선포(Verkündigung)
바울의 가르침을 독일의 신학적인 용어로 선포라고 한다. 우리와 같은 보수측에서는 보통 가르침이라고 한다. 그들은 성경을 비판적 입장에서 연구하므로, 가르침이라는 말보다는 신학적으로 중립적인 선포라는 말을 선호한다. 필자는 대부분 선포라고 그대로 번역했지만, 때로는 가르침이라는 말을 선택했다.
파루시아(Parusia)
예수님의 재림. 원래는 옴, 도래라는 의미로서 높은 사람이나 왕이 오는 것에 사용한다. 혹은 신이 임재하는 것도 의미하고, 적그리스도가 출현할 때도, 성경에서는 주로 그리스도께서 영광으로 재림하신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에피파네이아
현현이라는 말로 번역하는데, 신이나 왕이 영광 중에 장엄하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파루시아와 같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파루시아는 오는 것에, 에피파네이아는 나타남에 강조점이 있다.
o 딤전 6: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o 딤후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실존(Existenz)
인간이 자기를 의식하고 결정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
리덜보스 책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이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의 부활 속에 참여하여 그분 안에서, 그분이 내 안에서 사는 새 생명의 삶을 사는 것과 동시에, 육신을 입은 자로서의 사는 자로서 갖은 유혹을 받으면서 고난 가운데 사는 삶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의 실존방식과 육체적 실존방식의 긴장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러한 큰 긴장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부활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긴장이 해소되므로 부활의 소망이 신앙생활에서 큰 역할을 차지한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한편으로는 죽음을 이기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 영광스러운 실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환란과 죽음에 종속되어 있는, 갖은 죄의 유혹에 던져진,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갈망하고 죄와 싸워 이겨야 하는 실존이다.
케리그마(κήρυγμα; Kerygma)
이것은 고전 15:14에 나오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케리그마)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선포라는 의미로서, 예수님에 관한 초대교회의 핵심적 선포(구전)이다. 성경비평학자들은 사도들이 모두 이 케리그마에 의거하여 전도, 설교했다고 한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구약의 선지자 예언에 따라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심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왔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이스라엘에서 가르치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 무덤에 묻혔으나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는 재림하실 것이다.
이것은 성경비평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므로 우리는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이들은 교회가 나중에 케리그마와 전승을 중심으로 자기들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만들어 복음서를 만들었다고 가르친다.
전승
신학서적에 전승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되는데, 원래 전승이라는 말은 성경비평가들에 의해 왜곡되어 시용되면서 성경비평학적 용어가 되었다. 이들은 마가(교회)전승, 요한(교회)전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이들 교회가 복음을 날조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리덜보스는 전승이라는 말을 사도들과 신실한 목격자의 전승에 국한했다. 그는 성경비평을 허용하지 않는다. 즉, 이것은 사도들이 전한 것으로서 케리그마와 함께 무오한 것이며 이것이 성경이 되었다.
삶의 자리(Sitz im Leben)
양식이 생겨난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양식사학파들이 만들어낸 성경비평적인 용어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폭 넓게 사용한다. 보통 어떤 용어나 사상이 만들어진 배경의 의미로 사용된다.
가짜 서신 문제[1]
성경비평에서는 신약에 나오는 10개의 사도들의 서신을 가짜서신(Pseudepigraphie)이라고 한다. 어감이 좋지 않으므로 일반적으로는 후기서신이라고 한다.
소위 가짜서신을 다음과 같다:
6개의 바울서신: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후서, 목회서신(디모데 전후서, 디도서).
4개의 다른 서신: 야고보서, 베드로 전후서, 유다서.
에타 린네만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진짜로 여겨지는 것과 가짜로 여겨지는 것은 총체적으로 면밀하게 비교하며 연구한 것은 아직 없다. 그 대신 언어적, 문학적, 역사적, 신학적인 논거들만 사용했다. 그런데 그것들은 아무것도 증명을 할 수 없다. 그것들을 면밀하게 조사하면 근거가 박약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2]” 또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스유도(Pseudo)라는 그리스어는 속임, 거짓, 가짜라는 의미다. 이 말은 분명히 좋지 않은 행위를 나타낸다. 이 말에는 잘못 알았다던가 실수를 했다는 의미가 없이 고의로 속인다는 의미가 있다. 가짜서신의 저자는 그가 잘 알려진 권위자의 이름을 이용하여 상대방이 자신의 생각을 수용하도록 독자를 속이는 것이다. 이것은 범죄이다!”
리덜보스는 후기서신설을 비판하고 13개를 모두 바울의 친서로 본다. 그럼에도 그는 후기서신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이미 학문 용어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 유대교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무엇을 믿고 살았는가? 이들은 여호와 신앙을 견지하고자 대단히 애쓴 사람이었지만, 대체로 구약을 올바로 믿는 사람으로 볼 수 없고 유대교라는 독특한 종교적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정황이 요 1: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말씀의 배경을 이룬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잘 연구하면, 유대교와 구약신앙 사이의 괴리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유대교 전통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대교를 잘 모르면, 예수님과 당시 유대인들 사이의 대화뿐만 아니라,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 가르침에 그렇게 반응했는지도 잘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이들이 바울이 개척한 이방교회에까지 침투하여 교회를 율법화시켜 결국은 교회를 타락하게 하거나 격렬하게 바울의 전도를 방해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바로 이들이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으며 초대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한다면 유대교가 없었다면 기독교도 시작될 수도 없었다. 예수님은 바로 이들에게 전도하시어 제자와 사도로 만드셨다. 사도 바울도 새로운 도시에서 개척할 때는 늘 유대인의 회당에 먼저 갔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교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우리가 왜 유대교가 말씀을 벗어난 타락한 종교가 되었는지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면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리고 여호와를 향한 열심이 그렇게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도 경각심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유대인을 미워해서도 안 되며, 이들은 지나치게 존경해서도 안 되며, 아직도 이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다만 이들의 상태를 알고 그것을 인정해 주고, 기회가 있다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런데 유대교는 매우 복잡하고 그 역사도 복잡하므로 별도로 연구해야 한다. 이곳에서는 바울신학의 범위 안에서 매우 간단히 설명한다.
유대교는 페르시아 시대 이후로 서서히 형성된 유대인의 다양한 형태의 종교이다. 예수님 시대에만 해도 에센파, 사두개파, 바리새파, 젤롯 당원이라는 여러 형태의 유대교가 성경에 등장한다. 에센파는 명시적으로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서로 매우 다른 신앙형태를 가지고 경합하고 있었으므로 유대교가 어떻다고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다행히도 바리새파가 유대교를 주도하게 되어 오늘날 유대교라고 하면, 이들을 생각하면 된다. 바리새파가 여러 분파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구약성경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들이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가장 핍박하기도 했지만, 복음을 믿게 된 바리새인들도 상당히 많다.
I. 예루살렘 멸망으로부터 느헤미아의 성벽 건축까지
BC 597: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해이다. 왕과 고위관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이스라엘은 속국이 되었다. 그때부터 1948년 독립을 선언할 때까지 2500년 이상 속국으로, 혹은 나라 없이 살아야 했다(마카비 왕조 때에 80년간 독립을 누리기도 했다). 이들은 외국에 살므로 성전을 방문할 수 없어서 회당을 세워,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회당은 유대인 삶의 중심지가 되었다.
BC 586(7):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고 쓸만한 사람들은 끌려갔다. 이것을 귀양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시드기아 왕이 어리석게도 이집트의 사주를 받아 바벨론에 조공을 바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하루 전에 성전을 버리셨다(겔 9장-11장). 그때의 슬픔이 예레미아 애가에 기록되어 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1:1). 이들은 강제 노동(부역)을 하기도 했지만 노예로 끌려간 것은 아니었다. 이들 중에 성공한 사람들도 있었다(모르드게). 그러므로 귀환 허가를 받았음에도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이들은 커다란 디아스포로 공통체를 구성했다.
BC 539: 고레스 칙령. 이 해에 고레스가 바빌론을 정복하고 유대인에게 성전 재건을 허락하고 유대인을 돌려보내면서 건축자제를 제공함. 이로써 약 50년 간의 유배 생활(포로기)을 끝났으며 포로 이후의 시대가 시작한다. 이들이 독립된 것은 아니었다.
고레스는 식민지를 안정시키고자 각국의 신을 인정하여 토속종교 신앙 회복시켜 주었다. 각국의 법과 관행도 존중했으므로 모세오경을 이스라엘 법으로 허락했다(느헤미아서 8:1 이하를 읽어보아도 쉽게 이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유대인은 모세 오경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제사를 지낼 수 있었으며, 국법도 오경에 따라 집행되었다: 에스라 7:25-26. 이 일은 에스라와 느헤미아의 지도 아래서 일어난 일인데, 이것은 왕의 명령과도 일치한다)
BC 515. 스룹바벨의 영도 아래 성전 재건 완성. 중단되었다가 다리우스 치하에서 24년 만에 완성.
BC 486-465.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왕 통치. 그의 통치 3년 차에 에스더 이야기 시작. 페르시아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이야기.
BC 458: 에스라 귀환
BC 445-433: 느헤미아가 총독으로 파견된 기간. 이때 성벽을 보수한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 BC 559-530
캄비세스: BC 530-525
다리우스: BC 525-486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BC 486-465.
아르타크세르크세스(아닥사스다): BC 465-425
마지막 선지서인 말라기 기록 연대는 BC 480-450 사이(게르하르트 마이어), 혹은 BC 460(James Adamson[3])이다. 학개와 스가랴는 말라기보다 조금 앞선다. 에스더서도 말라기서보다 조금 앞서는데, 그곳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어떠한 이유로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하지 않은(혹은 못한)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삶이 나타나 있다.
위에서 중요한 연대는 예루살렘 멸망인 BC 586, 성전재건 BC 515, 성벽 증축 BC 433이다. 이 세 가지 연대는 잘 알아두어야 한다. 선지서 기록연대에 관해서는 학자에 따라 약간 편차가 있지만, 이 연대는 거의 확실하다.
아닥사스다(Artaxerxes)왕이 에스라와 느헤미아의 귀환을 허락함.
“아닥사스다는 그리스와 이집트의 점증하는 위협으로부터 제국의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예후드(유다)를 강한 우방국으로 간주하고 지원했다[4]”. 페르시아 “제국의 서부 국경이 이집트와 그리스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그 지점에 유다가 있었다. 이것은 모두 “페르시아 자신의 이득을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5]. 그러나 유대인 입장에서 본다면, 이를 통해 에스라가 율법을 정리하고 느헤미아는 성벽을 공고히 함으로써 유대인을 외적과 이방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이다.
에스라와 느헤미아의 개혁
에스라서와 느헤미아서는 우리가 유대인이 어떤 상태에서 유대인 역사의 암흑기로 진입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잘 연구해야 한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의 중간기가 시작한다. 그때부터 세례 요한이 등장할 때까지 450년 이상을 이스라엘은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나 가르침 없이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에스라와 느헤미아, 즉 매우 뛰어난 서기관과 정치 지도자를 통해 유대인의 영적 삶의 기초를 다지게 하셨다. 이 기간은 스룹바벨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유대인이 성전 건축을 시작하여 느헤미아에 의해 외벽이 완성되기까지 근 100년간의 고난의 시기였다. 이때 에스라와 느헤미아는 모세오경을 이스라엘의 국법으로 하여 백성을 가르치고, 백성은 크게 회개하여 율법을 지킬 것을 다짐했다. 느헤미아는 여호와 신앙을 순수하게 견지하고자 자기 백성을 다른 민족, 종교와 확연하게 경계선을 그었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은 다시는 흩어지지 않고 메시아께서 오실 때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이 두 사람의 개혁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기 위해 몇 구절만 예로 든다.
1) 에스라의 회개 기도와 개혁(스 9장-10장)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에스라가 이렇게 큰 충격을 받은 이유는,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혼인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 앗수루, 바벨론 제국을 통해 이스라엘을 무섭게 심판하셨는데, 이것을 몸소 겪었음에도 이러한 일은 했다는 것은 율법사인 에스라에게는 몸서리치게 하는 일이었다. 이것 때문에 또다시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의 행동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저녁이 되어 두려움에 찬 에스라의 회개 기도가 따르는데, 이 긴 기도는(9:5-10:1) 눈물이 없이는 읽을 수 없다.
결국 그는 결단하여 온 회중을 모아놓고 이방 아내를 돌려보내기를 요구한다: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10:10-11).
회중은 에스라의 회개 기도와 금식 기도를 통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에 동의한다:
10:12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10: 19 „그들이 다 손을 잡아 맹세하여 그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하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드렸으며“
에스라서는 이들이 통혼한 자들의 명단을 조사하여 열거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가족 간의 유대인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다!
2) 매우 감동적인 부흥과 언약갱신 대집회(느 8-10장)
에스라가 계속 백성들 앞에서 율법책을 낭독하면서 해석도 해주자, 백성들은 이를 기뻐하고 회개한다. 정상적인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모두 율법을 즐겨 듣고 회개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한다. 이들은 죄를 자복하고, 또한 너무나 기뻐서 울기도 했다. 이들은 여호와께 맹세하고 인봉하기까지 했다: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느니라”(느 9:38 이하).
3) 느헤미아의 개혁(느 13장)
모세의 책을 읽다가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을 보고, 이들을 전부 쫓아냈다.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어 예배를 섬길 수 있도록 하고, 이방인 장사군이 안식일에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성문을 막고, 또한 유대인과 결혼한 이방 여자들을 쫓아냈다. 이것은 너무 냉혹하게 들리지만,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 전체가 우상숭배로 떨어지는 위험에 처하므로 매우 중요한 처사이다.
이스라엘은 그 이후로 심지어 오늘날까지 다시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 두 믿음의 사람이 두 가지 든든한 벽을 세웠기 때문일 것이다. D. Green에 따르면 에스라와 느헤미아서가 두 개의 벽을 건축하는 책이라고 하는데, “느헤미아의 벽”은 하나님의 백성과 그의 적들, 부정한 이방인을 물리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이고, “에스라의 벽”은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 사이의 영적인 경계가 되는 하나님의 법이다[6]. 에스라-느헤미아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거룩한 도시에 살고 있는 거룩한 백성을 만나게 된다[7]. 이와 함께 정경의 범위 안에서 이스라엘 역사 기록은 끝난다. 이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등장하기 전까지 신구약 중간기로 접어든다. 이 시대의 특징은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다는 것이다.
개혁의 본질
에스라-느헤미아 개혁의 본질은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는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이유가 율법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개혁적 지도자들이 할 일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율법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이로써 이들은 그간 깨어지고 단절된 전통을 다시 세웠다. 유대 사회를 갱신했다. 외적으로 본다면 토라를 국법으로 삼게 한 것은 흥미롭게도 아닥사스다 왕의 명령이었다: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 하였더라”(스 7:25-26). 우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구속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개혁의 본질은 어느 시대이든지 “말씀으로 돌아가자!”이다. 한국교회가 살아남는 길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이 무시되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따른다. 교회 부흥이란 이러한 사람들이 다수로 등장하는 것을 말한다.
II. 신구약 중간기
에스라와 느혜미아라는 두 탁월한 인물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으나 다시 회개하여 회복된 이스라엘이, 메시아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 오신 그때까지 약 450년의 중간기에 수많은 사건을 겪어야만 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개념을 중심으로 이 시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예수님과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했던 그 시대의 유대인과 헬라인의 모습을 좀 더 잘 이해하려고 한다.
서기관의 등장
포로기 이전에도 물론 토라가 유대사회의 법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았으므로 선지자들의 질책을 받았다. 이들은 율법 외에서 선지자들의 가르침과 법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토라 외에도 역사서(여호수아부터 열왕기)와 선지서들도 서서히 정경으로 간주되고 있었으므로, 이것들을 연구해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해주는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었으므로 서기관들이 등장했다. 또한 사회가 좀 더 복잡해졌으므로 율법서를 새로운 상황에 적용해서 해석해야 하는 전문인이 필요하게 되었다. 서기관들은 성경뿐만 아니라 전통도 중시했다.
기원전 2세기 초에 나온 외경인 집회서(Ecclesiasticus) 38:25-39:15에서는 어떤 서기관이 이상적인 재판관인지를 묘사한다. 그곳에서 헬라문화를 비판한다.
디아스포라
고레스의 귀환 허락 시에 귀환하지 않고 정착하여 남아있던 유대인 외에도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애굽으로 간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렘 42:18-43:7). 이들은 나일강 상류 한 섬인 엘레판티네에 또 다른 성전을 지어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분노를 샀다(BC 410에 파괴됨). BC325년 경에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되자, 도시 인구의 30%가 유대인일 정도로 유대인이 많았다. 이것이 70인역 탄생의 배경이 된다. 유명한 헬라적 유대인 필로가 그곳에서 태어났다. 예수님 시절에는 로마제국 거의 모든 큰 도시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을 정도로 유대인이 광범위하게 퍼졌으므로, 사도 바울이 항상 이들을 전도했다. 유대인도 전도를 했으므로 이방인 중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프로젤릿)도 적지 않았고, 유대교를 받아들이지만 유대인이 되지 않은 “경건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물론 이와 반대로 헬라화된 유대인도 많았다.
알렉산더 대제와 헬레니즘
에스라-느헤미아 개혁이 그 이후 약 100년간 어떻게 이어졌는지 당시의 사료가 별로 없으므로 우리는 잘 모른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회복되고, 사회도 어느 정도 잘 유지되었을 것이다.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더에 의해 페르시아가 멸망하고, 그는 유럽 전역을 정복하면서 헬레니즘을 퍼트리다가 BC 323에 사망한 후에, 그를 잇는 왕들도 헬레니즘을 신봉했다. 이들이 제국 전체를 헬레니즘화 시키고자 했으므로 이것은 유대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헬레니즘이란 그리스 문화와 각지의 토착 문화(주로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된 문화를 말한다. 알렉산더는 식민지를 원활하게 통치하고자 의도적으로 헬레니즘을 전파했다.
헬라어가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다. 로마인이 세상의 지배권을 잡은 후에도 라틴어를 사용한 이들은 초등학교에서 이미 제국 공용어가 된 헬라어를 배웠다. 그러므로 식자들은 유창하게 헬라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사도행전 6장은 헬라파 유대인에 관한 보도이며, 이때 선출된 7집사들은 모두 그리스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제수님 제자들 중에서도 그리스 이름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
알렉산더 사후에 제국이 4등분 되면서 톨레미 왕조(BC 319-198)가 유대를 차지하여 지배하게 되었다. 이때 유대는 페르시아 제국 아래에서와 같이 비교적 안정을 누렸으며, 유대의 대제사장이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로 있었다. 유대지방 전체는 총독의 관할이었으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영토의 수장은 대제사장이었고 국법은 모세오경이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Seleucid)왕조가 톨레미 왕조를 몰아내고 유대를 통치하게 되고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를 다스리면서 사태는 급전한다. 그는 급진적으로 유대를 헬라화시켰다. 그때까지는 사독의 후손이 왕처럼 대제사장을 계속 계승했으나, 야손이라는 자가 안티오쿠스 4세에게 큰 뇌물을 주고 유대를 헬레니즘화시킨다는 약속을 하고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야손도 사독의 후손이었지만, 그때부터 대제사장직이 매관매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몇 년후에 메넬라우스(Menelaus)가 더 큰 뇌물을 주고 유대의 헬레니즘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는 약속을 받고 대제사장이 되었다. 그는 사독의 자손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이러한 관행이 계속되다가 마카비 혁명으로 이것이 중단되었으나,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BC 63)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이러한 악한 관행이 다시 지속되었다.
국제정세와 유대인의 반발과 맞물리면서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종교 박멸을 위한 극단적인 정책을 취했다. 그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강탈하고 율법서를 불사르고 저항자들을 학살했다. 안식일과 할례 금지시키고, 성전 안에 제우스의 제단을 세우고 돼지를 희생제물로 삼았다. 이것이 마카비 혁명의 원인이 된다. 하스몬가의 연로한 제사장 마타티아가 반기를 들고 그의 3 아들 중 유다 마카비가 후계자가 되어 본격적인 투쟁에 들어간다. 마카비는 결국 셀레우코스 왕족을 몰아내고 독립국가가 되고 성전을 정결하게 한다(BC 164). 이것을 기념하는 날이 하누카(수전절: 요 10:22)이다. 이들은 나중에 독립적 왕국으로 인정을 받아 약 80년을 유지하지만, 다시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로마의 속국이 된다.
안티오쿠스 4세 때에 하시딤(경건한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엄격한 율법주의적 생활을 추구하는 유대인이다. 이들이 바리새인과 에세네파의 전신이다.
사두개파
사두개파는 대제사장들, 상위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부유한 귀족들의 당파였다. 이들은 구약 전체가 아니라 단지 토라(모세오경)만 받아들인다. 이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는데, 이는 토라에서 부활을 명시적으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모세오경 외에서 나오는 율법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율법에 매우 열심인 바리새파와 적대 관계에 있었다. 이들은 평민들과는 거의 접촉이 없었고 부자들에게만 지지를 받았다. 성전운영에만 관심이 있었으므로 70년 성전이 파괴되자 이들도 사라졌다.
바리새파
바리새파도 사두개파와 함께 마카비 시기(안티오쿠스 4세 시대)에 나온 종파로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시딤 운동에 가담한 자들이다. 하시딤은 마카비를 도와서 안티오쿠스 군대에 대항했으나, 안식일을 지키고자 싸우지 않아 많은 하시딤이 죽었다. 안티오쿠스 군대의 만행과 이에 대한 항쟁은 마카비서에 잘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마카비전서(1. Macc.)는 읽는 것이 좋다. 좋은 역사책이다. 이후에 이들은 생각을 바꾸었고 안식일에도 싸웠다. 이처럼 바리새인도 하시딤에서 나왔으므로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종파 중에서 그나마 이들이 성경 가르침에 가장 가까웠다. 이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고 메시아 대망 신앙도 가졌다.
그런데 바리새파도 힐렐파와 샴마이 파가 나뉘어져 있었다. 랍비 힐렐은 율법 해석에 비교적 관대했고, 샴마이는 엄격했다. 바울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은 힐렐의 제자였다. 그러나 힐렐 파는 소수였고 샴마이 파가 다수였는데, 이들은 이방인과 일절 접촉하지 않았고, 로마 정부에 대항하고자 폭력적인 젤롯들과 연합하기도 했다.
예수님께 호의적이고 나중에 믿음에 들어온 바리새인들은 추측건대 대체로 힐렐파였을 것이다. 70년 성전파괴 이후에는 다행히도 힐렐파가 주도하여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을 대표하게 되었다.
그외 열혈당원, 에세네파, 헤롯당원 등이 있는데, 이것은 각자 알아보기 바란다.
70인역(LXX)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시간이 가면서 히브리어를 잊어버렸다. 기원전 2세기에 이집트 왕 톨레미 2세의 명으로 히브리어 구약을 당시 공용어인 헬라어로 번역하는 일이 있었다. 70(72)인의 학자들이 번역했으므로 70인역(Septuaginta)라고 하는데, 이것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표준성경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을 인용할 때 거의 70인 역을 사용했다. 이것은 독자들이 이방인 이었고, 본인이 70역을 잘 알고 이것을 성경으로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70인역을 무시할 수 없다. 이를 통해 성경이 당시 이방인에게도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도 적지 않게 생겨났다.
중간기 문헌들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없었던 이 중간기에 성경 대신 수많은 문헌들이 나왔다. 그런데 랍비 문헌은 중간기를 넘어서 6세기에 집대성되었다. 그 문헌 종류는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
1) 외경(기원전 200-기원전 50)
2) 위경(기원전 200-기원후 100)
3) 쿰란문헌(기원전 1세기)
4) 랍비문헌(기원후 1세기에 시작하여 6세기까지 진행 됨)
5) 필로(기원전 20-기원후 45)
6) 요세푸스(기원후 37-100)
외경(Apokryphen)
이들은 공동번역 성경에 실려 있으며, 가톨릭에서는 정경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유대인 정경에는 외경이 없다. 이들 13개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에스라1서, 마카비1-3서, 토비트, 유디트, 므낫세의 기도, 다니엘서 부록, 에스더 부록, 바룩서, 예레미아의 편지, 집회서(예수 벤 시락의 지혜서; Ecclesiasticus: 교회의 책), 솔로몬의 지혜서.
솔로몬의 지혜서(BC 50년) 외에는 전부 BC 2세기 작품이다. 이들은 당시 사회, 정치, 문화, 종교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준다. 역사적 자료로서 신뢰할만하지만, 이것은 모두 유대인의 관점에서 쓰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역사서, 지혜문학이 지배적이며, 바룩서만 묵시문학에 속한다.
위경(Pseudepigraphen)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희년서, 이사야의 승천기, 솔로몬의 시편, 에녹1서(이디오피아어), 시빌의 신탁, 모세 승천기, 에스라4서 바룩의 묵시서, 12족장의 언약, 아담과 하와의 책, 마카비4서.
솔로몬의 시편(시문학) 외에 11개가 모두 묵시문학이다. 묵시문학은 주로 메시아께서 곧 오셔서 이방인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는 내용이다. 묵시문학은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유대인의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려준다.
쿰란문헌
쿰란동굴에서 발견된 문헌은 상당히 많다. 성경본문으로는 이사야서와 시편 두루마리가 있고, 성경 주석도 있다. 외경과 위경, 쿰란종파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문헌들과 모음집도 있다.
랍비문헌
랍비들의 가르침은 예수님 당시에는 구전으로 내려오면서 계속 증가되었다. 이것이 기원후 200년부터 500년 사이에 문서화되면서 집대성되었다. 이것을 문헌명으로 크게 분류하면, 미드라쉬, 팔레스틴 탈무드, 바빌론 탈무드와 보완 문서인 토셉타(=보완)와 함께 4 가지가 있다. 이곳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미드라쉬와 바빌론 탈무드인데, 미드라쉬는 율법의 주석으로서 이것은 랍비들이 토라(모세오경)를 주석(해석)한 할라카와 토라 외의 성경을 해석한 학가다로 나뉘어져 있다: 미드라쉬=할라카+학가다.
특히 할라카와 미쉬나의 내용이 예수님과의 토론, 논쟁에서 자주 배경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막 7:6-8에서 바리새 서기관들을 비판하면서 말씀하신 “사람의 계명”, 혹은 “사람의 전통”은 이러한 구전 율법집을 의미한다. 이것이 나중에 미쉬나가 되었고, 그 후에 탈무드로 편입되었다.
바빌론 탈무드에는 미쉬나와 게마라가 있는데, 미쉬나는 율법에 대한 해석과 토론을 수집한 것이다. 미쉬나는 크게 6개 부분으로 나뉜다:
1. 씨앗: 경작과 관련된 규례
2. 명절: 안식일과 성일에 관한 규례
3. 여인: 결혼, 이혼 등 가정 법률
4. 손해: 피해보상법
5. 성물: 성전의식법
6. 정결: 정결의식법
그외 중요한 인물 두 명을 알아야 하는데, 필로는 헬라화된 유대인 학자이며, 요세푸스는 군인이자 역사가로서 중요한 저작들을 남겼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의 언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아람어를 사용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언어도 아람어였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같은 셈족의 언어였다. 신약에서 “히브리 방언”이라고 할 경우 이것은 아람어를 말한다(요 19:20; 행 21:40). “심지어 주후 1세기에는 잘 검증된 히브리어 성경의 아람어 번역의 탈굼을 출판해야 했다[8]”. 그러나 회당 예배는 히브리어로 이루어졌다. 계속 엘버트 벨의 책을 인용한다(66): “주민 30,000명의 이 도시(세포리스)는 (아고라=시장, 목욕탕, 김나지움 극장 등) 헬라의 도시가 갖추고 있는 모든 요소를 다 보유하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한 시간 가량만 남쪽으로 걸어 내려가면 나사렛이 있다. 1983년에 시작된 발굴로 인해 헬라의 영향은 이전에 학자들이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을 정도로 갈릴리에 퍼져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갈릴리 사람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헬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헬라어를 하실 수 있었음이 틀림없다. 심문 시에 예수님과 빌라도는 통역 없이 그리스어로 대화하셨을 것이다.
참조: 신약의 외경과 위경
구약에만 외경과 위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도 수십 개의 외경과 위경이 있다(약 75개). 1945년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도마복음이 신약의 위경이다. 베드로복음, 빌립복음, 맛디아복음 등 20개의 복음서와 바나바행전, 바울행전, 요한행전, 안드레행전 등과 같은 24개의 행전이 있고 8개의 묵시서가 있다. 도마복음을 비롯한 영지주의 복음서만 해도 12개가 되는데, 이것은 2세기 이후 작품들이다. 성경비평학에서는 이러한 문헌도 성경과 거의 대등한 것으로 간주하므로, 오늘날 신학계가 매우 혼란스럽다. 신학에 거의 아는 것도 없는 도올 김용옥이 루돌프 불트만을 배워 도마복음이 성경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며 수없이 많은 강연을 하고 다니는 작태를 벌이고 다닌다.
[1] „성경비평은 과학인가 조작인가?“ 70. 에타 린네만, 부흥과개혁사. 송다니엘. 이곳에서 린네만은 성경비평이 조작의 결과임을 입증했다.
[2] 71쪽.
[3] “The New Bible Commentary Revised”.
[4]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이안 프로만 외. clc. 김구원. 609.
[5] 610.
[6] 615.
[7] 616.
[8] “신약 시대의 사회와 문화” 61. 엘버트 벨/ 오광만. 생명의 말씀사
*강의자 : 송다니엘 교수
*본 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14강은 2024년 8월 25일(주일)과 9월 1일(주일)에 실시된 부천개혁교회의 사경회와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집중강의를 겸하여 강의된 내용에 수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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