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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농주의 (重農主義 physiocracy) 18세기 후반 프랑스 고전경제학자 F. 케네·V.R. 미라보·F.P.M. 리비에트·G.F. 트론·D. 네무르 등에 의해 펼쳐진 경제이론과 경제정책. 중농주의라는 말은 자연의 통치에 어원을 두고 있다. 중농주의자는 상공업에 편중하고 농업을 돌보지 않았던 프랑스의 중상주의에 반대하고 자연법철학관을 바탕으로 개인적 자유를 존중하며 농업의 생산적 성격을 강조했다.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2개의 다른 질서를 바탕으로 살고 있는데 이는 신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정한 영구불변의 자연적 질서와 국가의 형성에 따라 만들어진 인위적 질서이다. 자연적 질서를 규제하는 법칙은 자연법이며 인위적 질서를 유지하는 법칙은 인정법이다. 인간은 자연법 테두리 안에서 자유를 찾아야 하며 만약 인정법이 이 자유를 구속한다면 그것은 해로운 법률이다. 중상주의가 주장하는 상공업 편중주의와 보호간섭주의는 인정법을 중요시하여 산업발전을 막는 해로운 정책이므로 중농주의자는 이를 반대하여 산업을 간섭하기보다는 그 활동을 자유롭게 방임함으로써 국가 경제력이 증진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되는 대로 맡겨라, 가는 대로 두어라>라는 자유방임주의 움직임은 봉건제도의 속박을 타파하려는 자본가 계급의 요구와 합쳐져 그 뒤로 오랜 세월 세계의 자본주의 지도이념이 되었다. 중농주의자들은 프랑스경제의 피폐한 원인을 탐구하여 농업의 중요성과 그 구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래서 케네는 프랑스 사회를 1개의 인체에 비유, 《경제표》라는 1장의 해부도 안에 농촌과 도시를 잇는 상품과 화폐 순환까지의 자본에 대한 재생산과정을 그려냈다. 그 중에서 케네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만이 그 생산에 투자한 비용을 초월하는 잉여생산물 즉 순생산물을 만들어내므로 생산계급이 되고, 도시의 상공업자들은 단지 원료를 가공한다든가 상품을 교환하는 데 그치며 어떤 잉여생산물도 만들어내지 못하므로 비생산계급이라고 평했다. 케네의 이론적 영향을 받은 A.R.J. 튀르고는 루이 16세 치하에서 재무장관이 되어 봉건적인 직업조합을 폐지하고 곡물거래를 자유화하여 농민에게 부과했던 부역을 면제하는 동시에 토지단세론(土地單稅論)이라는 지극히 급진적인 재정정책을 내세웠다. 즉 그 때 부르봉왕조의 재정적 파탄을 구제하기 위해 프랑스 농경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귀족과 성직자, 지주계급의 수입에만 조세를 부과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산계급인 농민이 생산한 순농산물을 전부 지대(地代)로 챙기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상공업자는 비생산계급이며 이윤을 만들어내지 못하므로 조세는 면세되어야 한다는 방책이었다. 튀르고의 토지단세 주장은 농민이나 상공업자들로부터는 환영을 받았으나 귀족·성직자·지주 등을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의 반감을 사 재무장관직을 면직당하게 되어 이 정책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 농업만이 생산적이며 공업·상업이 비생산적이라는 중농주의자들의 주장은 그들이 지니고 있던 가치론의 결함에서 나온 것으로 그 이론은 A. 스미스가 집대성한 영국 고전학파의 비판을 받아 극복되었다. 그러나 중농주의자가 그때까지 영국이나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던 중상주의의 잘못을 비판하여 시정한 공적은 크다. 중상주의 (重商主義 mercanti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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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업을 중시하고 국가의 보호 아래 국산품의 수출을 장려하여 국부(國富)의 증대를 꾀하려는 주의. 16세기 말부터 18세기에 걸쳐서 유럽 여러 나라에 널리 퍼졌던 경제사상이다. 자본주의 생산은 15세기 말에 진행된 신대륙의 발견과 동인도항로의 개척에 의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지리상의 발견에 따라 세계시장은 급속하게 확대되었고, 이와 함께 신시장의 생산물과 자원·식민지 획득을 둘러싸고 에스파냐·네덜란드·영국·프랑스 등의 국가간에 격심한 상업전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16세기 중반 무렵 볼리비아와 멕시코에서 금광과 은광이 발견되어 이것이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유럽의 금·은 보유량은 비약적으로 증대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아래 중상주의라는 경제사상이 싹트게 되었는데, 즉 16세기 초기 중상주의 또는 중금주의가 생기고 17세기에 후기의 발전된 중상주의체계가 출현하였다. 그러나 중상주의라는 말은 이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사용되지는 않았으며, 중상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이던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나 영국의 고전학파인 A. 스미스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중상주의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한 나라의 부 가운데 금·은화폐를 가장 귀중한 영구불멸의 재산으로 여기고 경제정책의 중점을 이 재산의 증대에 두고 있다. 둘째, 화폐를 중시하여 이윤을 획득하는 것과 화폐를 증가시키는 것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화폐는 상품을 값싸게 매입하여 비싸게 판매하는 매매의 차액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이윤의 증식이라는 점에서 보면 농업이나 공업보다도 상업 쪽이 우위에 선다고 여기게 된다. 셋째, 상업은 이윤획득의 수단이 되지만 국내의 상업은 한 국가의 부를 증가시키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면 판매자의 이익은 곧 구입자의 손실이므로 여기에서는 적극적인 이윤이 발생하지 않고 더구나 유럽에서는 금·은의 국내산출량이 소량이고, 그 대부분을 신대륙으로부터 입수하기 때문이다. 넷째, 한 국가의 금·은을 적극적으로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상품의 수입액보다 수출액을 많게 하는 외국무역의 차액을 유지해서 그 차액만큼 금·은을 자국 내로 유입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중상주의자들은 금·은의 증가정책을 연구하였다. 더욱이 초기 중금주의자들은 화폐를 자본축적의 수단으로 보고 국내로 유입된 화폐는 절대로 국외로 유출시키지 않는 방침을 취하였다. 이들의 주장에 입각하여 유럽국가들은 엄중한 금·은의 수출금지정책을 채택하고, 법률을 위반하여 금·은을 국외로 반출하는 자는 엄하게 처벌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책이 도리어 외국무역의 발전을 가로막고 금·은의 획득에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후기의 진보된 중상주의자들은 화폐를 자본축적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이를 조정함으로써 이윤을 획득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인식하였다. 이들은 초기 중상주의자와 같이 외국으로부터 상품을 수입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금·은을 반출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고, 수입한 상품보다도 많은 수량의 상품을 수출함으로써 금·은의 유입을 도모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래서 중상주의의 학설이 화폐차액론에서 무역차액론으로 발전한 것이다. 중상주의는 자본 특히 상업자본의 유통으로 나타났는데 이 주의의 주창자 대부분은 상인계급에서 나왔다. J. 보댕·T. 먼·A. 세라·A. 몽크레티엥 등이 대표적인 중상주의자들이다. 영국의 동인도회사 중역이었던 먼은 영국의 외국무역 발전을 위해 일생을 바쳤으며 저서 《외국무역에 의한 영국의 재보(財寶)》를 남겼다. 1664년에 출판된 이 책은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상업국의 경제정책에 기본이 되었다. 중상주의의 무역정책은 외국상품의 수입금지, 고율의 수입관세정책 그리고 이것과 병행해서 수출장려금제도, 수출품공업의 보호·신장정책 및 모험심이 있는 상인이나 국책회사의 활동을 장려하는 정책에 그 중요성을 두었다. 1600년에 창설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중상주의 정책의 전형으로서 국제무대에서 활약하였다. 같은 종류의 회사가 네덜란드·프랑스·덴마크·스웨덴·프로이센 등의 여러 나라에서 설립되어, 이들 사이에 상업상의 경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 때 재무장관인 J.B. 콜베르가 극단적인 중상주의정책을 강행하였기 때문에 이를 콜베르티슴이라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국가가 중상주의정책을 취하면 다른 국가도 역시 이 정책에 대항하여 상호간에 관세장벽을 설치하고 수입을 억제하여 외국무역을 저해하게 되므로 중상주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중상주의 극복을 위해 중농주의와 고전학파의 자유무역정책이 제창되었다. |
Ⅱ 절대주의 시대
1. 절대 왕정과 중상주의 (1) 절대주의와 왕권 신수설 ① 절대주의의 성립 배경 : 16세기 후반∼18세기에 걸쳐 봉건 제도가 붕괴되고 나타난 강 력한 왕권 중심의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 ② 왕권 신수설 : 왕권은 신이 부여한 신성한 것이므로 국민은 이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사상 ③ 절대주의의 특징 ㉠ 관료 :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신을 대신하여 행정 업무를 담당할 관료 임명 ㉡ 상비군 : 강력한 왕권을 위하여 언제나 동원할 수 있는 군대 ㉢ 상공 시민층과 제휴 : 관료와 상비군 유지를 위한 비용 마련을 위해, 상공 시민층을 보 호해 주고 그들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 (2) 중상주의 정책과 식민지 쟁탈 ① 중상주의 ㉠ 뜻 : 절대주의 시대에 국가가 경제 활동을 지원하면서 엄격히 통제한 경제 정책 ㉡ 내용 : 부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국내 산업을 육성하여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 제함 ② 식민지 쟁탈 ㉠ 원인 : 상품 시장과 값싼 원료의 공급지 확보를 위해 ㉡ 결과 :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을 위해 각국은 저마다 국력 신장에 노력→왕조 전쟁과 식민지 전쟁 계속
2. 각국의 절대 왕정 (1) 펠레페 2세와 무적 함대 ① 에스파냐의 절대주의 : 유럽 최초의 절대주의 확립 ㉠ 배경 :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금과 은 ㉡ 전성기 : 펠레페 2세때, 무적 함대를 만들어 세계의 해상권 장악 ② 에스파냐의 쇠퇴 ㉠ 국내 산업 기반 미약 : 식민지 약탈에만 의존 ㉡ 강압적인 카톨릭 종교 정책 : 네덜란드의 독립←영국의 지원 ㉢ 무적함대의 패배 : 영국을 응징하고자 무적함대 파견→영국에 패배→에스파냐 절대 주의 쇠퇴 (2) 짐은 국가와 결혼하였다 ① 영국의 절대주의 : 헨리 8세때 종교 개혁을 단행하면서 절대주의의 기틀 마련→엘리자 베스 1세때 전성기 ② 엘리자베스 1세 : "짐은 국가와 결혼하였다."라고 말할 정도로 헌신 ㉠ 영국 국교회 확립 ㉡ 무적함대 격파 : 해상권 장악 ㉢ 대외 발전 : 북아메리카에 식민지 개척, 동인도 회사 설립→인도 진출의 발판 마련 ㉣ 중상주의 정책 추진 : 국내에서 모직물 공업 육성, 해외 무역 장려 (3) 짐은 곧 국가다 ① 프랑스의 절대주의 : 자신을 태양에 비유한 루이 14세때 크게 번성 ② 루이 14세 : 절대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 "짐은 곧 국가다."라는 유명한 말 남김. 왕권 신수설을 철저히 믿음 ㉠ 중상주의 추진 : 콜베르와 같은 유능한 재상 등용하여 중상주의 추진 ㉡ 강한 군대 양성 : 강한 군대를 양성하여 유럽 최강으로 만듦 ㉢ 궁정 문화 발달 : 파리 근교에 베르사유 궁정 건축→화려한 궁정 문화 ③ 프랑스 절대주의의 쇠퇴 ㉠ 잦은 전쟁 : 말년에 루이 14세는 국가 위신을 높이기 위해 잦은 전쟁→국력 소모 ㉡ 신교도 박해 :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던 낭트 칙령 폐지→많은 위그노 해외 로 망명→프랑스 산업 타격 (4) 군주는 국가 제일의 심부름꾼이다 ① 독일의 분열 : 중세 이래 300여개의 영방 국가로 분열 ② 오스트리아 : 오스트리아 국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함→세력이 강할 때는 유럽 전 역 호령하였으나, 대체로 오스트리아 주변 지역에 한정 ③ 프로이센 ㉠ 17세기 지금의 베를린 지방에서 새로 일어나 유럽의 강대국으로 발전 ㉡ 프리드리히 대왕 :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대왕 때 크게 발전 - 영토 확장 : 오스트리아와 두차례 싸워 모두 승리→슐레지엔 지방 차지 - 계몽 군주 : 계몽 사상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를 '국가 제일의 심부름꾼'이라 자처→제 도 정비, 산업 장려→전제 정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함 (5) 러시아의 팽창 정책 ① 러시아의 절대주의 : 15세기 말 몽고족의 지배에서 벗어남→17세기 말 표트르 대제 때 절대주의 확립 ② 표트르 대제 ㉠ 국내 정치 : 귀족과 교회 세력 누르고 왕권 강화→서유럽 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여 러 시아의 근대화에 힘씀 ㉡ 대외 발전 : 북방 전쟁에서 스웨덴에 승리→발트 해 진출 가능, 시베리아를 경영하여 중국의 청나라와 국경 접함 ③ 영토 확장 : 18세기 후반 흑해 연안 진출, 오스트리아·프로이센과 손잡고 세 차례에 걸 쳐 폴란드 분할 점령
3. 17, 18세기의 유럽 문화 (1) 근대 과학과 철학의 발전 ① 과학 혁명 : 17세기에 일어난 자연 과학의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 ㉠ 근대 과학의 확립 : 르네상스 시대에 싹트기 시작하여 17세기에 확립 ㉡ 뉴턴 : 영국인으로 만유 인력의 법칙 발견→우주의 모든 운동을 수학 공식으로 설명 ② 18세기 과학의 발달 : 천문학 이외의 다른 과학 분야 크게 발달 ㉠ 화학 : 영국의 보일, 프랑스의 라부아지에 ㉡ 식물학 : 스웨덴의 린네→식물 분류학의 토대 마련 ㉢ 의학 : 영국의 제너가 종두법 발견→예방 의학의 선구자 ③ 근대 철학의 발달 ㉠ 베이컨 : 경험주의 철학 주장→모든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나옴,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 는 귀납법 강조 ㉡ 데카르트 : 합리주의 철학 주장→경험보다 타고난 이성 중시 ㉢ 칸트 : 경험주의 철학과 합리주의 철학 종합→순수 이성 비판 ㉣ 로크 : 생명, 자유, 재산권을 인간의 자연권이라고 주장 (2) 이성과 진보를 강조한 계몽 사상 ① 계몽 사상 : 근대 과학의 발달과 합리주의 철학, 로크의 정치 사상의 영향 →18세기 프 랑스를 중심으로 발달 ㉠ 내용 : 이성에 의한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믿었으며, 미신과 무지를 배격하고 불합리 한 제도와 전통을 신랄히 비판 ㉡ 영향 : 계몽 군주, 미국 혁명, 프랑스 혁명에도 영향을 줌 ㉢ 대표적 사상가 - 몽테스키외 : 삼권 분립 주장 - 루소 : 국민 주권설, 자유와 평등 주장 ② 자유 방임주의 ㉠ 배경 : 18세기 중상주의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면서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강 조하는 자유 방임주의 주장 ㉡ 애덤 스미스 : "국부론"→근대 고전 경제학 수립 (3) 바로크 양식과 고전 문학 ① 예술의 발달 ㉠ 바로크 양식(17세기) : 화려하고 웅장→절대 왕정의 권위를 높이려는 시대 분위기→ 베르사유 궁전 ㉡ 로코코 양식(18세기) : 섬세하고 우아함 ㉢ 음악 : 바흐, 헨델(바로크 음악), 모차르트, 베토벤(고전 음악) ② 고전 문학 ㉠ 영국 :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 독일 : 괴테의 '파우스트'
재화와 용역의 생산·소비·분배 등의 과정을 통하여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체계적 사고.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생산·분배·소비·폐기하는 행위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이 행위는 오늘날 여러 가지 사회관계를 동반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여러 경제사상에 근거하여 전개되고 있다. 고대·중세·근세의 경제사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가족·민족·국가가 인간의 의식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여 왔느냐 하는 역사이다. 그러나 그 경제사상은 윤리적·철학적 형태로 표현되는 일이많았고, 사상으로서 독립된 형태를 취하는 일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경제사상이 정치사상·사회사상·교육사상의 토대로서 하나의 형태를 가지고 등장한 것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형성 이후였다. 현대 경제사상은 이제까지 경제사상을 재생하는 동시에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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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주의·중농주의 경제사상 중상주의(重商主義)와 중농주의(重農主義)는 유럽이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하는 시기에 나타난 경제사상이다. 먼저 16세기경에 중상주의가 영국을 비롯하여 프랑스·독일 등 유럽 여러 나라에 나타나고, 중농주의는 18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하였다. 중상주의의 경제사상을 전형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J.B. 콜베르였다. 그는 <국가의 위대성과 힘의 차이는 단지 국내에 은(銀)이 풍부하게 있느냐 없느냐에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중상주의는 당시 절대주의국가의 국왕이 귀금속·화폐·부의 획득을 둘러싸고 자국의 경제발전을 찾았던 경제사상이었다. 국왕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국내의 산업을 육성하는 동시에 수입을 제한하고 수출을 장려함으로써 무역상의 차액을 확대하였다. 이 무역차액으로 국왕은 금·은을 획득해서 왕실재정을 공고히 하고, 상업자본가나 산업자본가는 자기의 입장을 굳건히 하였다. 이러한 경제사상에 대항하여 중농주의자들이 등장하였다. 중농주의의 주창자 F. 케네는 역사적인 명저 《경제표(1758)》에서, 자립한 생산자로서 농민의 위치를 정하고 농업을 합리적으로 경영하는 것이 프랑스 경제번영에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상공업의 보호가 철폐되어야 하며, 모든 경제의 영위는 개개인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행해져야만 한다는 자유방임의 경제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중농주의 경제사상은 프랑스 이외의 국가에서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상주의의 본질은 절대주의국가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부와 재화의 축적에 있었으나, 동시에 신흥자본가계급을 대두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 신흥자본가계급은 드디어 새로운 정치체제를 찾아서 정치적 투쟁을 벌이게 되고 시민혁명·산업혁명을 거쳐 자본주의 국가체제의 수립에 성공하게 된다.
자유주의·보호주의 경제사상 자본주의 경제사상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으나,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나타난 큰 흐름으로는 자유주의와 보호주의의 경제사상을 들 수 있다. 자유주의 경제사상은 개인의 이익추구는 공공이익과 일치한다는 사상이다. 이 점은 중상주의 경제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개인과 사회 사이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지만 결국은 조화가 가능한 것이므로, 개인의 판단과 자유에 맡기면 정부의 통제나 간섭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A. 스미스는 명저 《국부론(國富論, 1776)》에서 이기심이야말로 경제를 움직이는 유일한 유혹의 손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으로 어느 사이엔가 사회의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국부를 늘리며, 공공복지와 국가의 번영을 가져온다고 자유주의 경제사상을 설명하였다. 스미스는 자유경쟁, 곧 자유방임의 경제사상이야말로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던 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경제와 정치를 완전히 분리하여 자유방임만을 역설한 것은 아니며, 개발산업자본가의 이익이 공공의 복지와 일치하는 선에서 자유방임을 주장하고, 또 자유경쟁도 정의의 한계를 넘지 않도록 개인은 도덕심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자유주의의 경제사상은 18세기 영국에서 등장한 산업자본계급의 경제사상으로서 정착하였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발달이 늦어진 독일에서는 자유주의 경제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상황으로 인해 국가가 개인의 경제활동에 대해서 보호통제를 가해야만 한다는 보호주의 경제사상이 일어났다. F. 리스트는 《경제학의 국민적 체계(1841)》에서 스미스를 비판하고 선진국에서는 자유주의원리가 채택되어도 후진국은 보호주의원리를 채택해야 한다는 보호무역주의적 경제정책을 주장하였다. 스미스의 자유주의와 리스트의 보호주의 경제사상은 당시의 선진국 영국과 후진국 독일의 경제발전의 차이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 영국의 계몽주의와 독일의 역사주의의 차이로 나타났다. 영국 계몽사상은 사회와 국가보다도 개인의 권리를 중시한 데 대하여, 독일 역사주의는 개인의 권리보다 국가를 중시하고 전통을 존중하였던 것이다.
사회주의 경제사상은 자본주의의 성숙기에 태어났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한편에서는 부(富)의 축적으로, 다른 편에서는 빈곤의 축적으로 나타났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달하는 데 따라서 각국 생산력은 빠른 속도로 신장하고 사회의 부흥을 증대시켰으나, 분배관계가 제대로 되지 않아 빈부의 계급대립은 뚜렷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18세기 말부터 19세기의 산업혁명기에 프랑스의 C.H. 생시몽, F.M.C. 푸리에, 영국의 R. 오언 등은 자본주의사회의 왜곡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방법으로서 공동사회의 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실현을 위한 주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자본주의사회를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이 대립하는 사회로는 파악하지 않았다. 따라서 주체로서의 노동자계급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의 사상은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불린다. 그 뒤 영국·독일·프랑스에서는 자본주의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빈부의 계급대립을 개량적(改良的)으로 해소시키려는 사회개량주의의 경제사상이 탄생되었다. 한편 K.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생산의 사회성과 소유의 사적 성격에서 찾고, 사회주의 운동법칙을 해명하였다. 이것이 《자본론(資本論)》이다. 그는 빈부의 대립 원인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자체에 있는 것이므로 이 관계를 철폐하지 않으면 진실된 해결은 있을 수 없다고 하여 노동자계급을 주체로 하는 사회주의국가의 실현을 지향하였다. 이 경제사상을 과학적 사회주의라고도 한다. 제국주의 경제사상 1870년에서 90년경까지의 유럽은 단속적(斷續的)인 대불황에 직면하였다. 이 불황 극복 정책으로서 영국·독일·프랑스의 각 자본주의국가는 각기 대응의 차이는 있었지만 자유경쟁을 부정하는 독점조직(카르텔·트러스트·콘체른)을 용인하고 무역정책에서도 자유무역보다는 보호무역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우선 <세계의 공장>이며 <세계의 은행>이라고 했던 영국는 제국주의적 경제정책으로 식민지획득과 재분할을 전개하였다.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은 아시아·아프리카 등의 식민지를 영국본국의 원료기지로서, 또 자본수출시장으로 정착시켰다. 이러한 영국의 움직임에 대해서 독일의 O. 비스마르크는 대외적으로는 영국에 대항하기 위하여 보호관세정책을 채택하는 동시에, 국내적으로는 각종 사회보험법을 입법화하고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자 진압법(鎭壓法)을 제정해서 <엿과 채찍>의 정책을 병행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영국·독일과는 달리, 거대은행자본을 중심으로 대외차관(對外借款)에 의한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고리대적(高利貸的) 제국주의의 경제정책을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제국주의의 경제사상이 혹독한 비판을 받기에 이르러 영국의 경제학자인 J.A. 홉슨은 《제국주의론(1902)》에서 영국의 남아프리카 침략을 비판하고, 제국주의의 경제적 기생자(寄生者)는 금융업자·대투자가·고급군인·고급관리라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그는 제국주의의 원인을 국내 소득분배의 불평등으로 인한 과잉자본에서 찾고 이것을 정책적으로 개량하면 제국주의의 침략성(侵略性)을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독일의 경제학자 R. 힐퍼딩은 《금융자본론(1910)》에서, 은행자본에 의한 산업자본의 지배관계를 금융자본이라고 하고 이 금융자본의 분석을 통해서 독일 제국주의 비판을 이론적으로 전개하여, 독점자본주의시대의 지배자본인 금융자본의 축적과 제국주의 경제사상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혁명지도자 N. 레닌은 《제국주의론(1917)》에서 제국주의의 5가지 특징으로 ① 자본주의의 발전결과 생산과 자본의 집적(集積)·집중(集中)이 일어나 독점체를 유도한 것 ②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이 결합해서 금융자본이 되고, 전 산업에 대한 금융과두제(金融寡頭制)를 가져온 것 ③ 자본수출이 큰 의미를 가진 것 ④ 국제독점체의 성립에 따라 세계의 분할이 완료되어 있는 것 ⑤ 자본주의 강국에 의해 영토분할이 완료되어 있는 것 등을 지적하고, 이런 것들이 재분할을 위한 전쟁을 반드시 유발시킨다고 주장하였다. 1914년의 제 1 차세계대전은 바로 이와 같은 제국주의 모순의 폭발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전 말기인 17년에는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이 승리하였다. 제 1 차세계대전 후 세계경제는 다시 과거의 자유주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29년 미국 월가(街)의 패닉(panic;공황)이 단서가 된 세계공황(世界恐慌)은 그 환상에 종지부를 찍었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선진자본주의국가보다도 후진자본주의국가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개인주의와 세계주의를 배척하고, 국가·국민·민족의 입장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의 사상인 파시즘이 등장했다. 이 파시즘의 경제사상은 독일을 위시하여 이탈리아·일본 등에 나타나면서 그 후 제 2 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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