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골 때려, 라는 말에 끌렸다
극장에서 다큐멘터리를 개봉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스포츠다큐멘터리는 더욱 드물다. 그런데 임유철 감독은 그걸 밀어붙였다. 월드컵 때면 온 나라가 붉은 물결을 이뤄도 K리그에는 냉담한 현실. K리그 중에서도 돈없고 백없어서 늘 선수를 뺏기고 연습구장을 찾기 위해 전국을 전전해야 하는 시민구단 인천유나이티드팀을 주인공으로 장편다큐멘터리를 만들더니 결국은 개봉까지 했다. 그의 영화 <비상> 속 인천유나이티드의 장외룡 감독 이하 선수들 역시 무모하기로 치면 뒤지지 않는다. 지는 것을 밥먹듯이 하는 팀에 감독대행으로 부임한 장외룡 감독은 대뜸 플레이오프 진출을 목표랍시고 내놓고, 스타 플레이어 하나없는 팀의 선수들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전쟁처럼 그라운드에 서는 이들을 전쟁처럼 카메라에 담은 사연을 듣기 위해 임유철 감독을 만났다. 성균관대 재학 시절 영화동아리 영상촌 활동을 하면서 각종 시위대를 비디오카메라에 담을 당시만 해도 문화학교 서울 등의 시네마테크 활동가들을 향해 영화주의자라는 비판을 감추지 않았던 그는 이후 서울국제독립영화제를 기획했고, 방송사 프리랜서 PD로 숱한 방송다큐멘터리를 만들었으며, <오마이뉴스>와 <스크린> 등에서 영상·영화 관련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한 시간 반에 걸친 인터뷰 동안 재주가 많고 관심사가 많기에 수시로 직장과 직책을 바꿨던 그가 어디서도 자신의 뜻을 온전히 꺾은 적이 없었음을 알게 됐고, 그가 말이 많고, 웃음이 많고, 무엇보다도 정이 많은 사람임을 알게 됐다.
|
-축구, 그중에서도 K리그, 그중에서도 인천유나이티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 사연이 길 것 같다.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등원한 뒤 8개월간에 대한 것이 방송사에서 만든 마지막 다큐멘터리였다. IMF 이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무엇인가를 민노당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는데 결국 실패했다. 아마추어였던 초선의원들이 변질되는 모습도 지켜봤고, 완성 역시 MBC 사장의 압력으로 원하는 대로 하지 못했다. 결국 그만두고 튜브픽쳐스에 영상제작실장으로 취직했는데 소문난 축구광 튜브픽쳐스 황우현 대표가 축구감독 이장수에 대한 <충칭의 별>이라는 극영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흔히 영화의 메이킹은 촬영현장을 위주로 스케치하는 것과 달리, 사전단계부터 꼼꼼히 기록하고, 영상취재 자체가 다시 시나리오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이장수 감독과 그가 이끄는 FC서울에 대한 일종의 다큐멘터리를 찍게 된 거다. 근데 이장수 감독님이 당시 FC서울을 맡고 굉장히 힘들어할 때였고, 그런 와중에 옆에 카메라까지 찍고 있는 게 너무 죄송해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FC서울을 통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프로페셔널리즘이었는데 내가 생각하는 주제와도 맞지 않았다. 개인작업 차원에서 K리그를 찍겠다는 생각에 스포츠 신문 기자 친구들한테 조언을 구했더니 다들 “인천유나이티드 찍어, 거기 골때려”라는 거다. (웃음)
-제목은 어떻게 정했나.
=원래는 <파란>이었는데, ‘ㅍ’가 들어가면 영화가 망한다더라. 대표적인 예가 <파이널 환타지>. (웃음) 제목을 <비상>으로 바꾸고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관련 기사가 정말 많았다. ‘조류독감 비상’… 온 나라가 비상이더라. (웃음)
-화면을 보면 구단과 선수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FC서울을 찍을 땐 작전회의나 로커룸 촬영은 물론 불가였고, 선수들을 공식적으로 소개받은 적도 없었다. 근데 장외룡 감독님은 2005년 초에 찾아가서 “솔직히 축구 하나도 모른다. 근데 꼭 찍고 싶다”며 협조를 구했더니 너무 쉽게 OK를 하는 거다. 한번도 로커룸에 카메라를 들인 적이 없는데 허락하겠다고, 와서 성실하게 기록하라고. 그러고는 나를 선수들에게 인사시키면서 “당신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이다. 이 사람이 당신들을 오랫동안 기록할 거니까 협조해라”라는 당부까지.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한 건 후기리그부터다. 영화가 1, 2부로 나뉘는데 전기리그까지 다룬 1부는 취재한 것도 별로 없어서 방송자료도 많이 썼다.
-인천유나이티드가 2005년에 뜬 셈인데,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었다는 얘긴가.
=전기리그에서 파란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예상은 했지만 그렇게 바로 급부상할 줄은 몰랐다. 2년 정도 각오하고 시작했는데 그렇게 되니까, 이 영화는 무조건 극장에서 개봉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더라.
-관객 중에는 K리그 구단이 몇개인지, 인천유나이티드가 어떤 구단인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심지어 챔피언 결정전 방식을 모르면 클라이맥스에서 영화의 전개까지 헷갈릴 수 있다.
=원래는 그런 설명을 자막으로 해주려고 했는데, 배급을 맡은 이모션픽처스의 임재철 대표는 너무 방송다큐 같다면서 빼라고 하셨다. 시키니까 빼긴 했는데(웃음) 나만 해도 선수들 이름을 익히는 데 6개월이 걸렸고, 스타도 아닌 그들을 일반 관객이 어찌 기억하겠나.
-그처럼 축구며 K리그에 대해서 모르는 이들을 배려하기 위한 해결책은 어떤 것이었나.
=축구에 대한 전문적인 부분이 아니라 선수들 개인에 집중했다. 그들의 가족, 힘들어하는 이유, 죽어라 뛰는 이유, 아픔을 치유하는 방법 등을 보여주고 싶었다. 축구시합 장면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런가. 하지만 영화 속 축구장면이 하도 흥미진진해서 좀더 보고 싶던데.
=이상하다. 모니터할 땐 아무도 그런 얘기를 안 했다. (웃음) 사운드가 들어가면서 느낌이 달라졌을 거다, 아마. <공동경비구역 JSA> 메이킹 다큐를 만들 때 블루캡 김석원 대표가 많이 도와주셨는데, 그러면서 사운드에 대해서 배우고 생각하게 됐다. 5.1채널 사운드의 다큐멘터리는 거의 새로운 개념의 다큐였다. 그간 방송다큐멘터리 역사는 기술의 진보가 새로운 다큐를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스튜디오 밖으로 나올 수 있는 ENG카메라 덕분에 <인간시대> 같은 방송이 나왔고, 6mm카메라 때문에 <인간극장>이 가능해진 거니까. 사운드를 제대로 관리하면 또 다른 다큐가 나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
=그때그때 다르긴 했지만 축구경기 장면을 찍을 땐 동시녹음 장비를 경기장 4곳에 설치하고, 감독님이나 관계자들에게는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채웠다. 팀닥터에게 마이크를 채워서 경기장 안에서 선수와 코칭스탭의 긴박한 대화까지 잡아낼 수 있었다. 후반작업 때 폴리작업으로 공 소리, 옷깃 스치는 소리 등은 새로 만들었다.
-축구 중계나 극영화에서는 보지 못한 앵글의 화면이 인상적이다.
=경기장면을 찍을 땐 최대 8대까지 카메라를 동원했는데, 카메라맨들에게 동물다큐 같은 느낌을 주문했다. 중계 사이즈보다 타이트한 화면이어야 하고 중계 카메라 위치에서는 찍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처음엔 FC서울 박주영 선수의 페이크에 모두 속아서 골 넣을 때 쫓아간 카메라가 한대도 없을 정도였다. (웃음) 워낙 클로즈업 위주이니 한번 놓치면 끝장이고. 밤새 회의하고, 난리가 났었다. 나중에는 경기 전 장외룡 감독의 전략을 받아적어서 카메라맨들에게 브리핑을 했다. 축구경기가 연극판처럼 계획한 대로 움직인다는 걸 그때 알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아니까 그때부터 카메라가 쫓아갈 수 있게 되더라.
-경기장 밖에서 선수들과 관계가 굉장히 친밀해 보인다.
=선수들은 늘 경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 다큐멘터리는 안중에도 없다. 그러니 카메라가 그들에게 왜 필요한지를 설득해야 했다. 1년 정도 찍다보니 나중에는 경기만 봐도, 어떤 선수는 후보로 내려가겠구나, 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럴 때 찍은 테이프를 건네주면서 “니 모습을 한번 봐라”라고 말하면 굉장히 좋아한다. 자기의 문제를 알게 되니까. 우리가 선수들한테 해줄 수 있는 건 그런 것밖에 없다. 밥을 사줄 수도 없고. 다들 진짜 잘 먹고, 입도 고급이라서 한번 사주면 몇 십만원이 깨지니까. (웃음)
-심지어 주장인 임중용 선수와 괴짜 용병 라돈 치치가 싸우는 장면에서는, 애초에 카메라를 든 감독이 싸움의 발단을 만든 셈이다. 그렇게 하면 싸움이 날 거라는 걸 예상한 사람 같다.
=임중용은 그날 벼르고 있다가 본보기로 라돈을 혼낸 건데 그런 날은 분위기가 다르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불쌍한 라돈이 괜히 혼난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했다. (웃음) 영화 속에서는 계속 괴짜 용병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라돈은 되게 똑똑하다. 팀의 윤활유가 된다는 걸 알아서 귀여운 밉상 짓을 하는 거다.
-숙소에서 선수들이 말다툼하는 장면은 어땠나. 그날도 싸울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나.
=선수들에게 “너네는 경기 뛰고 난 뒤 서로 얘기 안 하냐, 얘기 좀 해봐라”라는 말을 하기는 했는데 그렇게 싸울 줄은 몰랐다. (웃음) 카메라가 있는지도 모르고 이야기를 하더라. 사실 우리는 그저 식구여서 카메라가 들어가도 반응을 안 하는 수준이었다. 선수들과 친해지고 난 뒤 그런 얘기를 했다. “이 다큐가 개봉하면 너희는 많은 팬을 얻을 거고, 프로선수에게 팬에 대한 서비스는 기본이다. 박주영이 슬럼프에 빠진다고 베스트11에서 빠질 것 같냐. 팬이 있는 스타니까 그럴 수 없다는 걸 너희도 알지 않냐. 그러니 너희에게 팬이 생기면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러려면 우리 카메라에 협조해라.”
-거의 협박 수준인데. (웃음)
=임재철 대표와 그렇게 싸우고 결국 모든 자막을 다 빼면서도 처음에 모든 선수들을 소개하고 이름자막을 넣은 게 그 때문이다. 선수들 이름자막은 무조건 한번 이상 들어가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는데 두번 이상 못 쓰게 하기에 결국 한번 넣었다. (웃음)
-김학철 선수의 딸이 아빠 이메일을 보면서 펑펑 우는 장면은 그 엄마가 찍은 것 같더라.
=애가 아빠 보고 싶어서 우는 장면을 찍어놓은 게 있다기에 별 기대없이 보여달라고 했는데, 대박이더라. (웃음) 처음엔 애가 그렇게 우는 게 그저 귀여웠는데 나중에는 엄마라는 사람이 그걸 찍고 있었다는 게 웃기더라. (웃음) 형수님께 그랬다. 다큐멘터리스트로서 자질이 보인다고.
-열혈 서포터 서문여고 친구들의 인터뷰는 교실이 아니라 경기장에서 찍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서문여고 학생들만 경기장에 가면 인천유나이티드가 무조건 진다는 징크스가 있어서, 경기장에 잘 안 온다. (웃음) 그야말로 비운의 서포터.
-음악은 보는 이에게 감정을 강요한다는 느낌도 있었다.
=편집본 모니터링 결과가 늘 부정적이었다. 상업다큐로서 어떻게든 감정을 끌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음악을 많이, 심하게 쓰긴 했다. 인정한다. 음악감독이 아니라 나의 흠이다. 음악감독을 한 송준석은 사운드를 담당한 성지영과 함께 나와 평생 갈 친구들이다. 진짜 까탈스러운 감독 덕분에 2년 동안 고생도 많았다.
|
-내레이터로 오만석을 기용한 건 본인 생각이었나.
=TV다큐가 아닌 영화기 때문에 성우가 아니라 배우, 목소리 연기와 발음이 좋은, 마케팅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배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포도밭 그 사나이>를 보면서 믿음이 갔는데, 마침 오만석씨가 축구를 좋아해서 기분좋게 승락해줬다. 녹음할 때 사운드팀 전부가 박수를 칠 정도로 많은 제안을 했다. 라돈 치치 앞에 괴짜 용병이라는 수식어를 계속 붙인 것도, 마지막 내레이션을 힘을 빼고 간 것도 모두 그의 아이디어였다.
-선수들이 완성된 영화를 봤나.
=기자시사 때 온 몇 사람 빼고는 아직 못 봤다. 서기복, 골키퍼 김이섭, 두 선수한테 진짜 미안하다. 서기복 선수는 찍은 분량은 정말 많은데 모두 2006년에 찍은 거였고, 영화를 2005년만으로 가게 되면서 모두 빼야 했다. 김이섭 선수는 지난 1년간 인천의 골문을 잘 지킨 정말 성실하고 수줍음 많은 사람인데, 영화 속에서는 만날 싸우고 성질부리고 마지막에는 교체되는 모습만 보여줬으니. 선수들 개인에게는 이게 평생을 가는 건데 상처가 되는 건 아닐까 너무 미안하다.
-고대하던 개봉을 앞두고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내가 다큐를 배운 박진표 감독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시사회며 인터뷰할 때가 감독이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이라고. 근데 스탭들에게 돈도 못 주고 있는 상황이라서 즐길 수가 없다. 퍼스트 촬영감독인 이동원 촬영감독은 방송 카메라맨이라는 본업까지 제쳐두고 <비상>을 도와줬는데 얼마 전에는 딸이 아픈데 돈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돈을 구해줬더니 고맙다고 말하는데,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처지는 아니지 않나. 조연출을 했던 오지훈은 집안 사정은 좋지만 자기가 밥벌이해서 먹고살겠다면서 대학을 안 갔다. 고등학교 졸업하고부터 용돈을 안 받으면서 살았는데 <비상> 하면서 그 자존심을 꺾었다. 조금씩이라도 도와준 스탭들이 모두 40명 정도인데 이모션픽처스가 저작권을 가져가면서 일정 정도 주기로 한 돈이 있으니 그게 들어오면 모두에게 개런티를 지불하려고 한다. 이 영화를 극장까지 끌고 온 이유는 그거 하나였다. 다큐의 산업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스탭들한테 돈을 주고 싶었으니까.
-축구의 재미는 무엇인가.
=이 다큐를 찍기 전에는 축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고 그라운드에 가본 적도 없었다. 롯데 자이언트를 응원하는 야구팬이었다. 전세계에서 단일 종목으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 돈이 없어도 이길 수 있는 게 축구다. 야구는 절대 안 그렇다. 몸값 높은 선수 데리고 있는 팀이 왕이다. 그래서 삼성이 만날 1등을 한다. 야구는 개인과 개인이 싸우는 기록경기고, 축구는 집단과 집단의 원초적인 전쟁 같다. 그리고 축구는 경기장에서 승패와 상관없이 욕하고 소리지르고 뛰면서 볼 때가 가장 재밌다.
-앞으로 축구다큐를 더 찍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제 인천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는데, 영화에는 정작 그전까지만 다룬 셈이다. 재밌는 이야기가 많은데 다 못했으니, 꼭 하고 싶다. 국가대표에 대한 이야기를 찍고 싶기도 하다. 지금은 극영화를 먼저 준비 중이다. 실제 있었던 미술품 도둑 이야기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