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망도 없었다. 하지만 다시 시작해보고자 하는 희망도 없었다. 36년생 엄앵란은 그렇듯 초연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슬펐다.

어느날 신성일은 감옥을 방문한 엄앵란에게 눈물을 흘리며 담벼락에게 꺾은 장미 한 송이를 전했다. 엄앵란은 외친다. '난 이 장미 한 송이로 일생을 갈 거야'라고.

신성일의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 수록된 글이다. 장미 한 송이에 인생을 바친 여자 엄앵란. 하지만 그렇듯 숭고하고 아름다운 로맨티시즘이라기엔 그녀의 인생은 너무나 가혹하고 서글펐다. 고추보다 맵다는 시어머니의 시집살이. 그와중에 아이를 유산하게 될까 두려워 일부러 숨어서 먹고 또 먹어 살을 찌울 수밖에 없었다는 엄앵란의 신혼생활은 그렇듯 서글프고 가혹했다.

강신성일은 한때 한국의 제임스 딘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사는 60년대의 은막의 스타였고 수많은 여성과의 추문과 스캔들에 휘말리던 그를 차지한 엄앵란은 그 나름의 뿌듯함도 있었겠으나 달콤한 신혼생활은 커녕 이윽고 이어진 남편의 폭력과 멸시 그리고 방관은 이제 겨우 20대 초반인 어린 그녀를 나날이 피폐하게 만들었다.

남편에게 너무나 많이 맞아 하얀 드레스가 피로 물들 정도였다-고 엄앵란의 저서에는 그렇게 쓰여있었다. 바람 뿐만이 아닌 아내를 향한 폭력도 서슴지 않았던 최악의 남편 신성일. 그나마 늙은 호랑이가 되면 뒷방 늙은이가 되어 기죽어 살까. 그때가 되면 나도 큰소리 치고 살 수 있을까. 엄앵란의 바람은 헛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신성일은 나이 70이라는 반백을 넘긴 나이에 기어이 과거의 여인의 비키니를 꺼내놓으며 내 일생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동시에 욕보였다.


아내는 지금도 모르고 있다. 내 일생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이라고.
엄앵란 몰래 바람도 피웠으며 그사이에 유산한 아이도 있었다. 평생을 기억할 것이라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70먹은 엄앵란은 바보에 모질이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신성일은 껄껄대고 웃으며 큰소리를 친다. "나같이 사지육신 멀쩡하고 잘생겼는데 애인이 없다는게 정상인가. 그동안 찍은 영화가 수백편이다. 그만큼의 애인이 없다는게 모질이지.
지금도 애인 있다. 난 늘 애인이 있었다."

최근 엄앵란은 한 티비 프로에 나와 그녀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대중들 앞에서 공개했다. 신성일에 대해서는 거의 입을 열지 않고 함구했으나 주변인들에 의해 밝혀진 엄앵란의 삶은 사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여자 마초를 지원하며 제2의 여자 마초가 되기를 수많은 독신 여성들에게 가르치던 엄앵란의 꼬장꼬장한 잣대도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인생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내버려 두어야 하고 사랑은 짙으면 짙을수록 외로워지기 마련이라 적당히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녀는 결코 신성일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를 자책하는 투였다. 언니에게 배우고 싶지 않은 것이 남편 길들이기의 실패 혹은 포기라는 여동생에게 장난으로 화난 것처럼 자리를 피해보아도 그녀는 결국 신성일을 향해 신성일은 만인의 연인이며 길들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의 삶을 합리화시켰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그녀는 과연 행복해보였을까.

"예전에는 돈 많이 벌게해달라는 기도를 했지만 요즘에는 '나도 모르게 잠들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한다"

아무렇지 않게 죽음의 소원을 비는 어머니의 모습에 딸마저도 깜짝 놀라며 항상 밝고 명랑한 어머니였다고 그녀의 바람을 어색해했다. 결국 엄앵란은 지쳐버렸던 것이다. 이제 그만쯤 하겠지.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참고 또 참으며.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내 사는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고 고개 젓고 싶어 아침프로에 나와 어린 여성들을 향해 남편 보필하고 여자들은 기 죽어 사는 것이 최고라고 나처럼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가르치려 들었던 엄앵란은 그 삶을 여자들에게 가르치면서도 본인은 죽음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까지 몰락시킬 수 있을까. 차라리 엄앵란이 죽고 싶다고 울부짖었다면, 신성일을 향해 침이라도 뱉았다면 그리 놀랍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예 초연해버릴정도로 자신의 삶을 합리화시키는 엄앵란이, 나의 아내라는 직책을 떠나서라도 사람대사람으로서도 불쌍하고 측은하고 미안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첫댓글 "예전에는 돈 많이 벌게해달라는 기도를 했지만 요즘에는
'나도 모르게 잠들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한다"
현대인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누구나 위 와 같은 문장을
생각하게 되네요..
뜻이 있는 말 이지만 현대사회의 현 모습이 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