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4주일(다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제1독서 : 미카 5,1-4ㄱ<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제2독서 : 히브 10.5-10<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복 음 : 루카 1,39-45<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고수끼리의 만남
홍승완 님이 말하는 <고수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순간의 마주침에서 고수(高手)는 고수를 알아본다. 하지만 하수는 고수를 몰라본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기에 서로 통한다. 하수끼리는 오로지 이기기 위해 서로 싸우고, 이기면 거들먹거리지만, 고수는 서로 실력을 인정하면서 배우기 위해서 경쟁한다.
고수는 요란하지가 않다. 말을 함에 중언부언 하지 않는다.
내면의 삼엄함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치열하지만 고요하다. 자연스럽다.
상대와 상황을 탓하지 않는다. 때로는 그것에 맞추고 때로는 그것을 고친다.
끼리끼리 논다. 고수는 고수끼리…
고수는 핵심에 다가 갈 수 있다. 따라서 명쾌하게 표현할 수가 있다.
핵심을 찌르니 복잡할 것이 없고, 복잡한 것이 없으니 어렵게 말하지 않는다.”
☞ 신앙의 동반자끼리의 만남은 상승작용하는 고수끼리의 만남이어야 합니다.
◤ 기적의 잉태를 체험한 어머니들의 상봉
기적의 잉태를 체험한 어머니 두 분의 상봉은 극적이며, 품격을 느낍니다.
믿음의 만남이며, 축복의 만남입니다.
기적의 잉태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받아들인 어머니들이며,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두 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여인답게 만나자마자 바로 명쾌하고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마리아가 인사말을 하자,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먼저 성모님과 주님 현존을 축복합니다.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1,42)
그러면서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하고 주님의 어머니가 자기를 찾아주신데 대한 놀라움과 고마움을 표시합니다. 이때 요한은 주님 도착을 알고, 어머니의 배를 차며 기뻐합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만남이 있음을 봅니다.
거룩한 두 여인들의 만남을 통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영적 만남.
목소리 듣고 본 것은 엘리사벳이지만, 은총 체험은 요한이 하게 됩니다.
엘리사벳 역시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던 여인이며, 주님의 축복을 받은 몸이지만. 성 마리아를 한 번 더 축복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그러자 성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로 시작되는 마니피캇(Magnificat)으로 응답합니다.(루카 1,46-55)
성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기적을 체험한 두 어머니의 기가 상통하여 함께 느끼고, 함께 반응(相感相應) 합니다. 기질이 서로 달라 서로를 죽이는 이기상쇄(異氣相殺)의 만남이 아니라, 같은 기가 조화를 이루어 화생(和生)하는 만남, 동기상생(同氣相生)의 만남이며, 동음상응(同音相應)의 관계입니다. 烏鵲은 천하가 同音同律이고, 같은 풀과 같은 나무는 같은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같은 소리를 내도록 되어 있는가! 봅니다.
두분 만남은 주님이 주선하신 만남(Divine encounter)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태중의 세례자 요한 같이 발로 차며 주님 오심을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 두 여인의 만남은 소공동체 모임의 원형
정월기신부(서울대교구)는 두여인의 만남을 소공동체의 원형이라고 지적합니다.
신앙의 동반자간의 격려와 축복의 복음적 만남, 아름다운 동행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는 성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듯 이웃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지방 한 고을로 갔다.”(루카1,39)
당시 성 마리아는 임신한 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걸어서 나흘이나 걸리는 먼 길을 ‘서둘러’찾아갑니다.
쯔가리아의 집은 아인 카림에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나자렛에서 예루살렘까지 약129㎞, 예루살렘에서 아인 카림까지 약8㎞거리 총139㎞이며, 대전~대구까지의 거리입니다.
밤에는 어디서 주무셨을까? 모래바람속 땀 흘리면서 걸어가시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다음으로 이웃을 만나면 기쁨과 슬픔을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성 마리아와 엘리사벳을 찾아간 것은 ‘당신의 뜻을 이루러 오시는(히브10,7.9) 그리스도를 잉태한 기쁨을 알리고, 서로 도구로 사용되어 인류에게 구원을 베푸셨음을 함께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에 가득 차 성 마리아에게 여인 중에 복되다며‘현재를 축복’하고, 이어서 장차 태어날 아기 또한 복되다고 ‘미래도 축복’합니다. 그러면서 성 마리아가 돌아가기까지 석 달 동안 두 여인은 함께 하면서 황당한(?) 일을 당한 동병상련의 많은 교감, 격려, 축복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우리 소공동체와 교회의 모임도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소공동체와 교회는 진정한 만남, 참된 사귐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감격, 축복이 있고, 위로와 용서가 있는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수많은 프로그램과 교육이 실시되고, 다양한 단체와 만남이 이루어져도 어딘가 허전하고, 외롭고, 무력하다면 그 원인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 참다운 만남은 기쁨의 원천이고 사랑의 매개체입니다. 믿음으로 만난 것이 바른 만남이며, 참다운 만남은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 참다운 만남을 위해
우리들의 삶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인생은 만남에 의한 관계의 예술입니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는 부모와의 만남에서부터 스승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배우자와의 만남, 절대자와의 만남 등 만남의 연속에서 그들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가가 중요합니다. 만남을 통해 좋은 인연과 아름다운 삶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잘못되어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맑고 순수한 영혼을 만나면 전염되어 나도 덩달아 맑게 정갈하게 되고 기쁨을 느낍니다. 그들은 삼복더위의 그늘 같이 서늘함을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행운이고 드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따뜻함이 느껴지는 만남,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는 만남, 입에서 찬양이 흘러나오는 만남, 기다려지는 만남이 있는가 하면, 피하고 싶은 만남, 기계적인 만남, 의무감에서 만나는 모임도 있습니다.
참다운 교회의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기쁨이 있어야 하고, 지혜를 얻어야 하며, 서로 일치가 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만남이어야 할 것입니다. 순수한 영혼과 영혼간의 만남, 실존적 교제(Existential Communion-Koinonia)는 진실한 만남이기에 서로의 영혼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참된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영혼의 울림이 필요합니다. 조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헤어질 때 기쁘지 않는 모임, 말씀이 없는 모임, 일치되지 않는 모임, 만나도 영양가 없는 일과 사업(?)만 하는 모임, 거래적 만남은 영혼의 울림이 없으며, 진정한 만남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만남, 내가 속한 모임이 어떠한 만남, 모임인지 냉정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만남과 교회적 모임이 중요한 것은 좋고, 나쁜 행동과 정서는 사회적 전염(Social Contagion)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되기에 행복하고 싶으면 행복한 사람을 곁에 두라는 연구보고(캘리포니아대학 제임스 파울러교수)도 있습니다. 행복은 감기처럼 정서적 파장(Emotional Ripple)을 통해 전염됩니다. 능력이 있다면 하나의 불씨가 되어 조직과 만남을 변화시키는 것도 좋지만, 마음에 안 맞는 사람 만나서 상처받고, 미워하고, 죄짓고 하기보다는 그러한 만남, 모임은 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때의 마주침이다.-법정,《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에서-
◤ 가장 아름다운 만남(정채봉)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와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 아름다운 만남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 쪽에서 손수건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적 만남을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